(18)

슈테판 성당은 살아 있는 화석이다. 중세 도시의 흔적을 온몸에 지니고 있다. 원재를 12세기에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이었는데 큰불이 나서 무너졌다. 그 자리에 14세기 초부터 2백여 년 걸려 새로 성당을 지었는데 종교 건축양식으로 바꾸었다. 부드러운 곡선을 강조하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흔적은 성당 전면에만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길이 107미터 너비 34미터, 축구장만 한 땅을 딛고 선 본당 건물에는 첨탑이 넷 있는데 남탑인 슈테플이 136미터로 단연 높다. 벽돌을 생선 뼈 모양으로 짜 맞춘(herring bone) 지붕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문장 쌍두(雙頭) 독수리가 새겨져 있었다. 내부시설은 권력자의 취향과 유행에 따라 여러 차례 달라졌지만 중앙설교대를 비롯한 중심 공간을 고급 대리석과 화려한 귀금속으로 꾸민 것만큼은 바뀌지 않았다.


(32)

온몸을 적셔 준 비엔나커피의 달콤함이 물 밑으로 가라앉는 듯한 우울함을 덜어주었다. ‘이성은 고상할지 몰라도 사람의 내면을 항구적으로 지배하지는 못해. 매 순간 더 강하게 인간을 끌어당기는 것은 감각인지도 몰라. 어때? 그런 것 같지 않아? ‘비엔나커피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잠깐, 오해를 피하려면 비엔나커피라고 따옴표를 한 이유를 말해야겠다. 빈에는 비엔나커피가 없었다. 딱 한군데, 부다페스트행 기차를 기다렸던 중앙역 로비의 비스트로에 비엔나커피라고 써 붙여 놓은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건 비엔나커피가 아니었다. 우리나라 길다방 커피에 생크림을 올린,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은 정체불명 음료였다.


(66-67)

사람들은 비운의 주인공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지만, 빈 사람들이 시씨를 사랑하는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운명에 의해 권력형 셀럽이 되었지만 시씨는 자기다운 삶을 추구했다. 그녀는 남편이 황제여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혼인했다. 황후의 권력과 화려한 궁정 생활에서 의미와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남편이 다른 여인을 사랑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빈을 떠나 여행자의 삶을 영위했다. 아름다운 몸과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고 처절한 노력을 쏟았고 신분의 차이를 넘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려 했다. 운명을 거부하거나 극복하지는 않았으나 운명에 갇히지도 않았다.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의미를 느끼는 인생을 살아나가려고 번민하고 도전했다. 그리고 그런 끝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비극적 죽음을 맞았다. 역사의 위인은 아니었으나 사랑할 만한 미덕을 지난 황후였음에는 분명하다. 그러니 시씨의 사진과 초상화를 마케팅 수단으로 쓰는 빈의 상인들을 욕하지 마시라. 그들은 시씨를 정말 사랑해서 그러는 것이다.


(73-74)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로지 타고난 성격과 재능 덕분에 유능한 군주가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남자 형제가 없었기에 어려서부터 군주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고 권력 행사와 관련한 직접 간접 경험을 쌓았다. 쇤브룬 궁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내게 말했다. “리더십을 형성하려면 지적,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키우는 데 필요한 학습과 경험을 해야 한다.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다. 그런 기회를 얻는다면 누구라도 탁월한 리더가 될 수 있다. 나를 보라.”


(101)

도나우강은 알프스 남쪽 경계를 타고 동쪽으로 흐르면서 빈을 지난 다음 부다페스트 근처에서 직각으로 몸을 틀어 남쪽으로 내려간다. 헝가리를 벗어날 때 다시 동으로 전향해 카르ㅏ티아산맥과 발칸 산맥 사이의 협곡을 따라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등 발칸반도 북부를 가로지른 후 루마니아 남부 평원과 우크라이나 저지대를 거쳐 흑해에 들어간다. 숱한 지류를 끌어안으며 알프스의 발원지에서 흑해까지 3천 킬로미터를 달리는 도나우의 품에서 빈,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등 크고 작은 도시들이 자라났다. 1990년대에 라인강과 연결하는 운하가 개통되어 이제 도나우 물길은 흑해에서 북해까지 통하게 되었다. 하류의 도나우는 잔물결이 흐르는 푸른 강이지만 빈과 부다페스트 구간의 도나우 상류는 그렇지 않다. 탁류가 빠르게 흐르는 위험한 강이다.


(114)

부다페스트의 화려함은 헝가리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던 열등감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역사의 상처를 감쪽같이 지워버린 빈과 달리 부다페스트는 그 모든 것을 내놓고 보여줌으로써 여행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증언하는 초대형 기억 공간을 조성한 베를린 말고는 부다페스트만큼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을 적극 홍보하는 도시를 찾아보기 어렵다. 부다페스트에서 반드시 그런 것을 챙겨야 하는 건 아니지만, 사연을 알면 부다페스트가 더 정겹게 안겨 오는 느낌이 들 것이다.


(135)

언드라시(Andrassy Gyula, 1823~1890)는 오늘날 슬로바키아공화국에 속하는 곳에서 태어났다.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백작의 아들이었던 그는 소년 시절부터 민족주의 정치 운동에 참여했고 세체니 이슈트반의 눈에 들어 스물세 살에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1848년 귀족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크로아티아 영토전쟁에 종군했으며 헝가리혁명 정부의 명에 따라 이스탄불로 파견되어 오스만제국 정부의 협력을 끌어내려고 했다. 혁명을 진압한 합스부르크제국은 그를 반역자의 두목으로 지목했다.


(181)

나는 얀 후스를 존경한다. 후스를 모른다고 해서 프라하 여행에 지장이 생기진 않지만 알면 프라하 공간과 체코 사람들의 정서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고등학생 시절 세계사 교과서에서 얀 후스(Jan Hus, 1372~1415)라는 종교개혁가의 이름을 처음 보았다. 그렇지만 후스가 그저 종교개혁가로서 프라하의 광장에 서 있는 건 아니다. 후스의 동상은 보헤미아 민족주의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담고 있다. 그는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았고 죽음 앞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럴 의도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삶과 죽음은 보헤미아와 유럽의 역사를 바꾸었다.


(188-189)

그래서 보헤미안이라는 말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보헤미아인에 해당하는 체코 말은 체키인데 뜻은 정반대에 가깝다. ‘체키는 슬로바키아인이나 모라비아인 같은 소수민족을 제외한 보헤미아의 체코인을 가리키는 체코 말이고, ‘보헤미안은 독일인과 집시를 비롯해 체코인이 아닌 보헤미아 사람을 지칭하는 외국어였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보헤미안의 뜻이 달라졌다. 유럽 사회의 주류로 지위를 굳힌 부르주아 계급의 틀에 박힌 도덕 규범이나 행동 양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선택한 가치관에 따라 자유분방하게 활동하는 지식인과 예술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주로 시인, 소설가, 화가, 음악인이었다.


(209)

체코 사람들은 성 바츨라프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시, 소설, 영화, 연극, 노래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가 죽은 지 1천 년이 된 1929 9 28일부터 체코슬로바티아공화국 정부가 개최한 축제를 보려고 75만 명의 시민들이 프라하에 몰려들었다. 지금도 해마다 그날에는 성당마다 대대적인 추모 미사를 연다. 카렐 4세가 실제적 국가 창설자라면 성 바츨라프는 정신적 국가 창설자였다. 생일이 확실치 않아서 사망한 날을 정신적인 국경일로 삼았다. 통치자로서 거론할 만한 업적도 없고 재위 기간도 짧았지만 도덕적 정치적 비난을 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게 중요하다. 게다가 보헤미아의 자존을 지키려고 외세에 대항하다가 사악한 동생의 손에 목숨을 빼앗겼다. 긴 세월 외세와 종교권력의 억압과 핍박을 받으며 자존과 독립을 갈구했던 보헤미아 민중이 역사에서 그를 불러냈다. 영운은 탄생하는 게 아니다. 민중이 찾아내고 만든다.


(248)

영국과 미국 공군은 1945 2 13일 밤부터 사흘 동안 네 차례 번갈아 드레스덴을 융단폭격했다. 그때마다 고열의 화염폭풍이 도심을 집어삼켰다. 군수품 공장과 기차역뿐 아니라 주택, 상점, 호텔, 술집, 교회, 성당, 병원, 오페라하우스, 영화관, 동물원, 학교, 엘베강의 선박까지 도심 반경 3킬로미터 안에 있던 모든 것이 터지고 녹고 부서지고 불탔다. 사망자만 20만 명이라며 연합국을 비난한 나치 정부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그 폭격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몇인지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전쟁이 끝나고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무너진 건물에서 시신이 나왔고 지하 방공호 한군데서 1천여 명의 시신을 찾은 일도 있었다. 체코 접경지 수데텐란트(보헤미아의 독일 국경 인접 지역)에서 쫓겨나 드레스덴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던 피난민들은 거주자 통계에 잡히지도 않았다. 당시 시신을 수습한 사망자만 35천 명이 넘었다. 독일이 엘베의 피렌체라고 자랑했던 드레스덴에는 공장 몇 개 말고는 전쟁과 관계있는 시설이 없었는데도 연합국 공군은 엄청난 양의 폭탄을 투하했다.


(258)

집은 건축주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다. 종교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건축양식은 건축기술의 발전, 활용할 수 있는 건축자재의 변화, 건축주가 동원할 수 있는 재정의 규모 등 여러 요소의 영향을 받는다. 건축주의 철학과 욕망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로마제국 시대에 지은 교회는 무섭지 않다. 아테네 도심 골목의 오래된 정교회들은 아담하고 소박하고 정겹다. 원래 성당이었던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웅장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중세 유럽의 대세였던 고딕 양식 성당들은 그렇지 않다. 높고 날카로운 첨탑과 장중한 스테인글라스로 경외심또는 공포감을 강요한다. 고딕 양식은 가톨릭교회가 세속권력과 결탁하거나 스스로 세속권력을 능가하는 권력이었던 시대의 지배적 건축양식이다. 그들이 그런 집을 지은 것은 민중이 그곳에서 두려움을 느끼며 복종하기를 원해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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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 장관인 병조판서 유전이 우연히 활터에서 이순신이 활 쏘는 모습을 보았다. 이순신의 활 실력을 구경하던 유전에게 이순신이 차고 있던 화살통이 눈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그 화살통 참 찾아 보이는구만. 나한테 선물로 줄 수 없겠는가?”

그러자 이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대감께 이깟 화살통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화살통 하나 때문에 대감이 부하의 화살통이나 바쳐서 출세하려는 인물로 오해를 받을까 두렵습니다.”

이 말을 들은 병조판서 유전은 아차 싶어 입을 다물고 말았다.


(37-38)

이순신은 항변했다.

병력이 부족하니 군사를 증원해 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으나 들어주지 않았음을 기억하오. 그 공문이 바로 나에게 있소이다. 조정에서 만일 이런 사실을 안다면 죄가 나에게 있다 하지 않을 것이오. 또 내가 힘껏 싸워서 녹둔도를 지켰고, 바로 추격하여 잡혀간 백성들을 여러 명 구출해 왔거늘, 이것을 패배로 치는 것이 옳단 말이오?”


(109-110)

전투 시 거북선의 실내는 아수라장이었을 것이다. 자욱한 먼지와 함께 어두웠을 것이고 바닷물은 계속해서 새어 들어왔을 것이다. 실내에서 쏘는 포의 소리와 진동은 갑판 위에서 함포를 쏘는 판옥선과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전투원들의 귀는 먹먹함을 넘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적선과 부딪히면서 생기는 진동으로 몸이 붕 뜨고 온몸을 여기저기 찍혀가며 피를 흘린 채 노를 젓고 포를 쏘았을 것이다. 공포감이 치열함으로 바뀌고 노를 젓는 틈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바다에 떠다니는 일본군들의 시체와 먹먹해진 귓속을 뚫고 들려오는 살려 달라는 일본군의 아우성에,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무적의 전사가 되었을 것이다.

거북선을 바라보며 외관의 멋스러움만 생각하지 말고 거북선에 탑승해서 전투를 치렀을 선조들의 처절함도 생각했으면 좋겠다.


(132)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원균의 수급 베는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하거니와 이순신은 적의 수급을 베는 것에 대해 이런 지시를 내렸다.

적의 수급을 베는 데 매진하지 마라. 너희들이 어떻게 싸웠는지는 내가 다 보고 있노라.”

너희들의 공을 내 직접 장계를 써서  낱낱이 밝힐 테니, 너희는 다만 전투에 이기는 데 집념하라.”


(152)

그러나 한산도의 패전으로 일본의 수륙병진작전은 좌절되고 말았다. 일본은 서해 바다로 10만 병력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올려 보내지 못했다. 증원병과 군량미, 무기 등 보급이 완벽하게 끊긴 고니시는 평양에 발이 묶이며 의주를 공격할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한산도대첩은 이순신이 조선의 임금 선조를 살려준 전투였고, 바다의 재해권을 완전히 조선이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된 전투였으며, 육지로 북상해 있던 일본군이 장기간 굶주리며 춥고 불안에 떠는 계기를 마련한 전투였다.


(181)

부산포해전에서 승리했던 날은 1592 9 1일이었다. 이를 양력으로 계산하면 10 5일이다. 그래서 오늘날 부산 시민의 날 10 5일이다. 이순신이 부산포를 공격해서 대승을 거둔 날이 바로 부산 시민의 날이 된 것이다.


(187)

이순신이 재해권을 장악하지 못했다면, 일본 수군은 서해 바다를 돌아서 한강을 타고 한양으로, 예성강을 타고 개성으로,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으로의 군대 충원과 보급이 가능했을 것이다. 일본군은 압록강을 타고 들어가 의주에 있는 선조가 명나라로 도망가는 길을 막았을 것이고 조선의 임금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해전에서 조선군의 승리가 일본 육군의 발을 묶었고 전쟁의 양상을 바꿔버린 것이었다.


(234-235)

장문포해전은 분명히 실패한 작전이었다. 총 지휘를 해야 할 도체찰사 윤두수는 장문포 근처 전장에 없었다. 장문포해전 당시 그는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순천에 있었고, 그 긴박한 전투 상황에 이순신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순천 부사 권준을 탐관오리라는 죄명을 씌워서 잡아들이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도원수 권율의 행동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권율 역시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구례에 주둔하고 있었다. 임금의 명으로 수륙양면작전을 시행한다면 육군이 먼저 나서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곽재우나 김덕령이 이끄는 의병들로 하여금 왜성을 공격하도록 하고 권율 자신의 육군 병력은 장문포 공격에 투입시키지 않았다.

다시 말해 사상 최초의 수륙합동작전에서 최고 지휘관인 윤두수와 권율은 전장 근처에 오지도 않았다. 이들은 이순신에게만 무리한 공격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 수군은 장문포해전에서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내지 않은 채 2척의 일본 함선을 격침시켰다.


(242)

임금이 이르기를

원균은 국사를 위하는 일에 매우 정성스럽고 또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원군은 전공이 있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이지 그러지 않다면 결단코 기용해서는 안 되는 인물입니다.”

김순명이 아뢰기를

충청도 인심이 대부분 불편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임금이 이르기를

원균은 마음이 순박하고 고집이 세기 때문이다.”

<선조실록 1596 10 21>


(256)

우의정 정탁은 엎드려 아룁니다.

이 모(이순신)은 몸소 큰 죄를 지어 죄명조차 무거우나 성상께서는 얼른 극형을 내리시지 않으시 두둔하여 문초하시다가 그 뒤에 엄격히 추궁하도록 허락하시니 (중략) 성상께서 인을 베푸시는 한 가닥 생각으로 혹시나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으시고자 바라심에서 하심이라 신은 이에 감격함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중략) 이 모는 참으로 장수의 재질이 있으며, 수륙전에도 못하는 일이 없으므로 이런 인물은 과연 쉽게 얻지 못할 뿐더러, 이는 변방 백성들의 촉망하는 바요, 왜적들이 무서워하고 있는데, 만일 죄명이 엄중하다는 이유로 조금도 용서해줄 수가 없다고 하고, 큰 벌을 내기기까지 한다면 공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 내키지 않을 것이요, 능력이 있는 자도 스스로 더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옵건대 은혜로운 하명으로 문초를 덜어주셔서 그로 하여금 공로를 세워 스스로 보람 있게 하시면 성상의 은혜를 천지 부모와 같이 받들어 목숨을 걸고 갚으려는 마음이 반드시 저 명실 장군만 못지않을 것입니다.


(285)

다른 지휘관들 역시 칠천량에서 머무르는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원균에게 면담을 청했으나 원균은 분노의 술만 들이킬 뿐 소통을 거부했다. 이 상황에 대해 원균에게 항명을 했던 이가 경상우수사 배설이었다. 배설은 칠천량에 진을 치는 상황이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한산도로의 회군을 주장했다. 그러나 통제사 원균이 자신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자 12척의 판옥선과 함께 칠천량의 조선권 진영을 이탈했다. 배설의 행동은 분명한 항명이었고, 칠천량에 남은 조선 수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323)

명량해전 이전에도 이순신은 조선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명량해전 승리 이후 이순신은 성웅이 되었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이 끝나고 이렇게 말했다.

명량해전 승리는 실로 천운이었다.”

칠천량의 대패를 보고받은 선조는 이렇게 말했었다.

이 패배는 하늘의 뜻이었다.”


(353)

전쟁을 끝내고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적을 막아서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진린도 잘 알고 있었다. 살아서 돌아가려는 자들의 발악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그러나 적이 돌아가도록 내버려두면 끝날 전쟁을 기어이 막아선다는 것은 군인으로서 너무 훌륭한 신념이었다. 나라와 강토를 짓밟은 외적이 살아서 돌아가는 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국가의 자존심을 건 큰 신념이었다.

전린 입장에서 이순신의 이러한 신념을 외면할 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번 전투에서 이순신이 단독으로 공을 세운다면, 진린 자신은 명나라 본국에 돌아가서도 입장이 난처해질 터였다. 울면서 겨자 먹듯, 진린의 명나라 수군은 이순인의 함대와 함께 참전을 결심하였다.


(368-369)

이순신 장군 묘소에 가본 적이 있는가?

갈 때마다 항상 혼자였다.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는 평일에도 사람이 북적거린다.

그러나 현충사는 한적함이 좋다.

그게 서글프다.


(388)

조선의 명나라 제독으로 참전하여 이순신과 깊은 전우애를 맺고 돌아간 진린의 자손들은 청나라 오랑캐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 하여 대거 조선으로 이주해 들어왔다. 그들이 이순신과 진린이 함께 있었던 고금도까지 왔고, 그 옆 해남에 터를 잡고 살아가니 이들이 광동 진씨이다. 지금도 해남에는 광동 진씨 집성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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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노신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 친구가 죽었어. 그처럼 규칙적인 사람도 해내는 걸 보면 죽는다는 건 아주 평범한 일임이 틀림없겠군. 하지만 분명히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겠지. 아마 삶에 애착이 있었으니까 자서전을 썼을 게야. 그렇게 평범해 보이던 사람도 어느 날엔가는 훌쩍 세상을 뜨게 된다는 걸 누가 알겠나.


(14)

나는 여러 번 이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제 마지막으로 뭔가 익숙한 것을 할 수 있다는 편안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더 이상의 두려움은 생기지 않았고, 죽음의 느낌이 야기하던 놀라움은 익숙함과 친근함에서 느껴지는 안도감으로 옮겨 갔다. 이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잠이나 휴식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대상으로 이름 붙이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이미 그 길을 지나간 친구들을 만나길 희망하면서 미지의 세계로 들어감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가 보다. 아마도 한 인간의 죽음이 중요한 경제적 사건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유언을 남기는 것일 게다. 그래,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일과 다를 바 없다. 나는 내 주변을 정리하려 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며, 또한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20)

하지만 인생이란 별난 모험이 아닌 일상적 법칙의 흐름이다. 삶에 나타나는 특이하고 비일상적인 것은 단지 삶의 바퀴가 덜컥거리는 소리일 뿐이다. 오히려 정상적이고 평범한 삶을 찬미해야 옳지 않을까? 덜컥거림이나 비통함이 없고 산산이 부서지지 않았다고 해서 부족한 삶일까? 그 대신 우리는 많은 일을 해냈고,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책임을 완수했다. 나의 삶은 전체적으로 보아 행복했고, 소심하지만 목가적인 삶에서 발견한 조그맣고 규칙적인 행복은 부끄러울 게 없다.


(48)

<얘야, 이 통장에는 일과 땀이 모여 있는 거란다. 돈을 낭비하는 건 완성된 일을 망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건 죄악이지>라고 하는 아버지에게 내가, <아버지, 그러면 그 돈은 어디에 쓰기 위한 거죠?>라고 묻는다면 아버지의 대답은 이럴 것이다. <노후를 위해서 그러는 건 아니다. 그건 그저 사람들이 해보는 소리지. 돈이란 근면과 절제를 미덕으로 하는 노동의 결과를 보기 위해 존재하는 거란다. 이 통장에는 삶의 내용이 들어 있고, 그건 평생의 결실이야. 여기에 내가 열심히, 그리고 검소하게 살았다는 기록이 들어 있는 것이지.> 아버지에게 노후의 시간이 다가왔다.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공동묘지의 대리석 비석 아래 잠들어 있었고 (비석을 만드는 데 정말 많은 돈이 들었다고 아버지는 경건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곤 했다), 나는 좋은 일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무겁고 부어오른 다를 이끌며 예전보다 일감이 줄어든 소목 공장 일에서 손을 떼지 않았고, 저축한 액수를 계산했으며, 일요일마다 집에서 홀로 통장을 꺼내어 자신의 정직한 삶의 합계를 들여다보았다.


(52)

지금도 아버지는 일을 하며 셈을 하고, 어머니는 걱정과 사랑의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으며, 나는 은밀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아이로 남아 있는 것이다.


(57-58)

<행복한 청춘 시절>이라는 말은 얼마나 단순한 표현인가! 그런 표현과 더불어 우리는 분명 그 당시 건강했던 치아와 위장을 생각을 따름이지 고통스러워하던 영혼은 간과해버린다. 우리에게 그때처럼 긴 인생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즉각 우리의 존재를 바꾸려 할 것이다. 나는 그때가 내게 가장 불행했던 시기였고, 동경과 고독의 시기였음을 안다. 하지만 내가 변화하고 그 우울했던 청춘을 두 손으로 다시 붙잡는다고 해도, 나의 영혼이 또다시 그처럼 한량없이 절망하고 괴로워한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97)

유희란 진지한 일이며, 규칙과 구속력이 있는 질서가 유지된다. 유희는 어떤 것에 대해, 오로지 어떤 것에 대해 깊이 몰두하거나, 감미롭게 또는 열정적으로 집중하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몰두하는 것을 그 밖의 다른 것으로부터 격리하고, 그 규칙에 따라 구분하고, 주변의 현실에서 떼어 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놀이는 축소된 규모가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리라. 어떤 것이 축소되면, 그것은 다른 현실로부터 분리되고 그 자체로 더욱 넓고 심오한 세계가 된다.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는 우리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다른 세계로부터 우리 자신을 떼어 내는데 성공하여 우리를 구분하는 마법의 원 한 가운데에 있다.


(103-104)

그러나 다른 면을 보자. 그것은 유희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혀 유희가 아니었다. 위대하고 힘든 것이 사랑이다. 또한 가장 행복한 사랑일지라도 도가 지나치면 끔찍하고 부담스러워진다. 고통 없는 사랑이란 없다. 사랑으로 죽을 수 있고, 고뇌를 통해 사랑의 원대함을 측정할 수 있다면! 기쁨은 무한할 수가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너무도 행복했고 처절할 정도로 서로의 손을 꼭 쥐었다. 그대, 나를 구원해 주오. 나의 사랑은 너무 지나치오. 아직 우리 머리 위에 별들이 있고, 사랑과 같이 커다란 것이 들어가기에 충분한 공간이 있어 다행이오. 우리는 침묵이 우리를 억누르지 못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잘 자요, 안녕. 영원을 시간의 조각으로 찢어 내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는 잠을 자지 않았고, 무거운 마음이 되어 사랑에 울며 목이 메었다. 빨리 날이 밝아 그녀의 창가에 인사할 수 있기만을 기다리는 시절이었다.


(154-155)

절약이란 수동적인 미덕이며, 안정된 생활에 대한 희구이자 닥쳐올 미래와 위기와 우연에 대한 두려움이다. 탐욕이란 잔인할 정도로 우울증과 유사하다. 아버지는 엄숙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자주 훈계를 했다. “공부만 해라, 얘야. 공무원이 되기만 하면 생활이 <안정>된단다. 그게 인생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란다. 확실한 기반과 안정과 자신감만 가지고 있으면 아무것도 걱정할 일이 없지.” 나무처럼 크고 강했던 아버지가 그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나약하고 응석받이인 아이가 어디에서 용기를 배웠겠는가? 내게는 어린 시절부터 그런 성향이 철저하게 준비되어 있었으며, 육체적인 충격이 나타나자 겁을 먹고 움츠러든 나는 삶에 대한 방어적 두려움을 느꼈고, 그 두려움을 삶의 질서로 삼았던 것이다.


(199-200)

삶이란 사건들이 아니고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이란 우리의 지속적인 작업이다. 그랬다. 나의 삶도 내가 깊이 몰두한 일종의 과제 같은 것이었다. 내게 소일거리가 없었다면 무척 곤혹스러웠을 게다. 은퇴하게 되었을 때 난 할 일을 가지기 위해 여기 이 집과 정원을 샀다. 씨를 뿌리고 벌초하고 물을 주는 일은 그 밖의 일이나 자기 자신까지 잊어버리게 될 정도로 몰두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곳은 정말 어릴 때 앉아 놀던 톱밥으로 덮인 작은 울타리 같기도 했다. 그곳에서 많은 기쁨을 느꼈고, 나를 한쪽 눈으로 바라보며 질문을 던지는 방울새도 만났다. <너는 대체 누구지?> 방울새야, 난 울타리 너머에 사는 다른 사람들처럼 아주 평범한 사람이란다. 지금 나는 정원사가 되었고, 이 일은 노신사가 가르쳐 주었단다. 거의 모든 일이 헛되이 일어나는 법은 없다. 모든 일에는 신기하고 지혜로운 질서가 있고, 곧고 필연적인 길이 있다. 어려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한 인간에 관한 연관성이 있는 이야기이다. 이 단순하고 질서 정연한 목가적인 삶이 말이다.


(201-202)

그건 우울증 환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는 어머니가 관련되어 있다. 어머니는 나를 응석받이로 만들었고, 나 자신 속에 있는 억척스러운 자아의 나약한 동생 같은 인물이 내게 형성된 것이다. 둘 다 분명 이기주의자들이었다. 그런데 억척이는 공격적이었고, 우울증 환자는 방어적이었다. 이 우울증 환자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소극적이었고, 오로지 안전한 생활만을 원했다. 그는 아무데에도 끼어들지 않으려 했고, 안전한 항구나 방풍막 같은 것만을 찾았다. 무엇보다 그 때문에 공무원이 되었고, 결혼을 했고, 자신의 주위에 울타리를 친 것이다. 우울증 환자는 첫 번째 자아인 평범하고 착한 인간과 지내기가 가장 편했다. 규칙적으로 일하는 생활은 그에게 안정감을 주었고, 은신처를 만들어 주었다. 억척이의 불만에 찬 명예욕은 때로 우울증 환자가 느긋하고 편안히 지내는 데 방해가 되기는 했지만, 생활이 더욱 윤택해지는 데에는 쓸모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세 개의 삶은 서로 동맹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었으나 조화를 이룬 셈이었다. 평범한 자아는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일을 했고, 억척스러운 자아는 그 일을 상품화하면서 한눈팔지 않고 이 일은 하고 저 일은 하지 말라는 지침을 정해 주었으며, 우울증 환자인 자아는 가장 괴로워하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우울증 환자인 자아는 가장 괴로워하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자신을 파멸시키지 않았고 모든 일을 적당히 처리했다. 그처럼 세 개의 상이한 본성이었지만 서로 불화하지는 않았다. 말없이 타협했고, 아마도 서로를 배려하기도 했을 것이다.


(212)

대체 얼마나 많은 경우의 인생이 있었던 건가. , 다섯, 여덟? 나의 인생을 구성하는 여덟 개의 삶이 있었다. 내게 시간이 조금 더 남아 있고, 조금 더 맑은 정신이 든다면 일련의 또 다른 삶들을 발견하게 되겠지. 아마도 전혀 연관성이 없고, 단지 일회적으로 일어났거나 한순간 동안만 지속되었던 그런 삶들이 나타나리라. 어쩌면 한 번도 나타나지 못했던 삶들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 나의 삶이 다르게 진행되었거나, 내가 다른 존재였거나, 다른 상황이 주어졌더라면 내게서는 전혀 다른 인물들이 등장해서 나와는 다른 삶을 영위했을 수도 있다. 만일 내가 다른 여자와 살았더라면 내게서는 호전적이고 흥분하기 쉬운 인간이 나타났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어떤 상황에서는 경솔한 인간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건 배제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떤 것도 배제하지 못한다.


(215)

사람은 사람들의 집합이라고 가정해 보자. 이 집합 속에 평범한 인간, 우울증 환자, 영웅, 억척이 같은 자들이 존재하고 있다. 사람은 그처럼 뒤섞인 무리로 이루어진 존재이지만, 이 무리는 같은 길을 가고 있다. 늘 그중 누군가가 앞장서서 한동안 길을 인도한다. 그가 지도자라는 걸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왕의 깃발을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그 깃발에는 <내가 자아>라고 쓰여 있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가 나의 자아이다. 이건 간지 단어에 불과하지만 강력하고 거창한 단어이다. 그가 자아인 동안 그는 집합의 지배자이다. 그 후 또다시 누군가 무리 중의 다른 인물이 앞으로 헤쳐 나오고, 이제는 그가 왕기(王旗)를 들고 인도하는 자아가 된다. 이 자아는 단순히 명분일 뿐이며, 그런 깃발이 그저 이 무리의 단일성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가정하자. 집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이 공통된 표지도 필요하지 않으리라. 단순하고 단지 유일한 가능성을 지닌 사람을 사는 동물에게는 자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가 복잡하면 할수록 우리는 이 자아를 우리의 내면에 각인시키고 최대한 부각시켜야 한다. <여길 보라,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237)

우리들 개개인은 우리를 이루며, 개개인은 무한대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집합인 것이다. 단지 자신을 보라. 네가 거의 인류 전체를 망라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건 끔찍한 일이다. 네가 죄를 지으면 그들 모두에게 벌을 내리고, 그 거대한 집합이 너의 모든 고통과 저속함을 감당한다. 너는 그 많은 사람들을 저속하고 헛된 길로 인도해선 안 된다. 너는 나이고, 네가 인도자이며, 그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 모든 인물들을 너는 어디론가 이끌고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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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얼마 후 재미 과학 기술자 협회 부회장인 강경식은 당시 한국 물리학회 간사장이던 조병하 교수를 통해 이휘소에 대한 정부 포상을 건의한다. 세계적인 학자였으므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명예의 흔적을 남겨 놓자는 취지였다. 어렵게 포상은 결정되었지만 정작 이휘소의 부인 심만청이 포상을 거절한다. 평소 남편 이휘소가 유신 체제에 반대해 왔는데, 그런 독재 정권으로부터 훈장을 받는다는 것은 남편의 철학에 어긋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이휘소의 어머니가 대신 받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18-19)

이휘소는 42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1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974년부터 전산화된 고에너지 물리학 데이터데이스에는 비록 60여 편밖에 수록되지 않았으나 전체 인용 횟수는 1만 회 이상에 이르고 있다. 논문의 인용 횟수는 해당 논문이 학계에 미친 여향을 가름하는 가장 기본적인 잣대로, 이론 분야에서 총 1만 회가 넘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논문들의 중요성은 충분히 입증된다.


(67-68)

요사이는 밤에 자기 전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습니다. 미국 남북 전쟁 당시의 사정이 어쩌면 그렇게 한국의 과거 수년과 똑같은지, 마치 저 자신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꿋꿋이 싸워 오신 그리고 아직도 싸우시는 어머님의 거룩한 모습은 저로서는 항상 자랑이요, 힘의 근원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알지 못하던, 그리고 알려고 해 본 일이 없던 사실 하나를 안 것 같습니다. 즉 여성의 힘, 심리 그리고 도덕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불안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부르는 흑인 영가 <켄터키 옛집>의 한 구절에서 이상한 마음의 동요를 느낍니다.

잘 쉬어라 쉬어, 울지 말고 쉬어,

어려운 시절이 닥쳐오리니,

잘 쉬어라 켄터키 옛집

그들이 이 구()와 자기네의 운명을 비교하고 몸부침치는 것- 어미니, 6.25 때 우리 광릉에서 지내며 똑 같은 경험을 한 것을 아직 기억하시죠?

아름답고 거룩한 어머님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재건이야말로, 전쟁 이상으로 쓰라린 시기이다라고 이 책에는 씌어 있습니다.


(102)

주로 양성자와 중성자들이 모여서 결합된 원자핵을 연구하는 학문이 핵물리학이다. 하지만 양성자, 중성자 이외에도 이만큼 무거운 중입자(重粒子)가 있고 중간 정도의 질량을 가진 중간자(中間子)가 있다. 또한 양성자와 중성자는 u, d의 두가지 맛깔의 쿼크로만 구성되나 다른 맛깔의 쿼크 결합체인 강입자들이 있다. 그러나 가장 무거운 맛깔인 t 쿼크를 포함하는 강입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명이 너무 짧아서 강입자가 만들어지기 전에 소멸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모두 대상으로 가장 바탕이 되는 기본입자를 연구하는 학문이 소립자 물리학 또는 간단히 입자 물리학이다.


(119)

이휘소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절망감을 느꼈다. 4.19를 통해 그나마 민주적인 정부가 세워지나 싶었는데 1년 만에 군인들에 의해 뒤집히고 말았던 것이다. 미국에 살면서 민주주의의 참된 가치를 절실하게 느껴온 이휘소는 해방된 지 15년이 되도록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 상황이 안타깝기만 했다. 더욱이 중남미의 어수선한 나라들에서나 벌어지는 군사 쿠데타가 한국에서도 일어났다는 사실에 그는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동료 교수들이 한국 상황을 화제에 올리면 이휘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52)

남이 아는 것은 나도 알아야 한다. 내가 모르는 것은 남도 몰라야 한다.’

이것은 이휘소가 물리학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기 시작하던 대학원 시절부터 남모르게 가슴에 지녀 온 좌우명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남에게 뒤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이 알아낸 것을 뒤쫓아가는 연구가 아니라 스스로 물리학의 새로운 화두를 제공하는 선두 연구자가 되고 싶다. 이것이 학자로서의 그의 욕망이고 꿈이었다. 그리고 이런 욕망은 아마도 정상급 학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욕망일 것이리라.


(206)

이휘소는 인류 문화의 거대한 흐름에서 물리학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인간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자연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오늘 알아낸 지식은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유산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명입니다. 누가 이러한 지식을 알게 되었는가는 결국 세인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한 시대, 한 국가가 이룩한 영감과 성취 결과는 영원히 기억에 남는 것입니다.”


(213)

토프트와 펠트만은 1999년 노벨상을 수상한다. 물론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는 이 두 사람의 업적이지만 토프트가 언급했듯이, 이휘소의 방법은 상호 보호적인 방법으로 그 업적을 충분히 인정받아야 한다. 만약 1999년에 이휘소가 생존했다면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었을까? 필자는 그렇다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에 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다. 업적은 인정되지만 상 받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노벨상을 둘러싼 논박은 항상 존재한다. 하긴 와인버그의 경입자 모형에 대하여도 시비를 걸 수 있다. 게이지 대칭은 이미 글래쇼가 발표했고, 자연 대칭 파괴는 힉스가 알아낸 것이므로 와인버그 논문에 새로운 것이 없다고 폄하하는 식이다. 실제로 워드는 이런 생각으로 와인버그와 똑 같은 결론에 이르렀으나, 논문으로 발표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전해진다. 물리학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이미 알려진 인간의 자연에 관한 지식에 학자 자신의 기여를 보태 학문이 발전하는 것이다. 자신의 기여는 과거의 관련이 있고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 기여로 물리학이 크게 도약하였다면 그 공적을 인정받아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 와인버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게이지 대칭과 자연 대칭을 결합하여 물리학의 도약을 이루었다. 이휘소는 토프트와 상호 보완적인 방법으로 자연 파괴하는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214-215)

노벨상은 학문적 성휘에 대한 최고의 인정이다. 그러나 노벨상이 학자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학문을 닦다 보면 큰 공헌을 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그 공이 인정되는 과정이 노벨상이다. 마치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을 추구하는 태도로 노벨상을 바라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흔히 업적도 중요하지만 행운도 따라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학문의 분야는 다양하고 심도가 깊은 것이다. 노벨상은 기초 연구 결과를 중시하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기초 과학 발전의 중요한 지표가 된다. 과학상 분야에서 노벨상을 배출한 나라는 30여 개국인데 한국은 포함되지 않는다. 여러 명을 배출한 나라들은 G7처럼 경제 선진국이거나 러시아, 중국, 스페인처럼 오랜 역사와 전통이 뚜렷한 나라들이다.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 강국이고 역사와 전통에서는 어느 나라 못지않은 자부심을 자랑하면서도 아직까지 한 명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도 배출하지 못한 것은 과학 교육과 기초 과학 연구에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시사한다.


(253)

1974년은 이휘소의 생애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삶의 해라 할 수 있다. 이미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나 참 입자의 탐색 논문과 발견으로 소립자 물리학자의 위상이 확고했다. 연구 활동이나 학계의 인지 면에서 그의 인생의 절정기에 있었다. 한편 한국에만 국한되는 이야기지만, 서울대 과학 교육 혁신을 위한 AID 평가 활동은 1980년애 이후의 한국 대학 교육 향상의 발판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 학자들이 고에너지 실험 물리학 분야에서 국제 공동 연구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293-294)

일반 독자들의 상당수는 진실과 상관없이 이휘소의 의문사를 믿고 싶은 마음도 있는 듯하다. 물론 순전히 정서적인 이유다. 그냥 세계적인 물리학자라는 것보다 일부러 수술을 해서 핵무기 설계도를 뼛속에 감추는 등 조국을 위해 비밀 사업을 추진하다 외국 정보 기관에 암살된다는 스토리는 얼마나 감동적이고 드라마 같은 대목인가..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드라마일 뿐이다. 소설로 읽고 소설적 감동을 얻는 건 독자에게 달렸지만 진실은 진실대로 분명히 알아야만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휘소는 사실 그대로 세계 정상급의 물리학자로 과학사에 큰 획을 그었고, 한국인의 우수성을 세계에 과시했으며 한국 물리학계의 발전과 도움을 준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었다.

이것이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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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그게 바로 내 위대한 발견의 씨앗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시간 속에서는 돌아다닐 수 없다는 선생의 말은 틀렸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건을 아주 생생하게 회상하고 있다면, 나는 그 사건이 일어난 순간으로 돌아가 있는 겁니다. 나는 방심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잠시 과거로 펄쩍 뛰어 돌아가는 것이죠. 물론 그 과거 속에 오랫동안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미개인이나 동물이 지면에서 2미터 높이에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이 점에서 문명인은 미개인보다 훨씬 낫습니다. 문명인은 기구를 타고 중력을 거슬러 하늘로 올라갈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결국에는 시간이라는 차원을 따라 이동하는 것을 멈추거나 이동 속도를 빨리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방향을 돌려 반대 방향인 과거로 돌아갈 수도 있으리라고 기대하면 왜 안 되죠?”

 

(65-66)

하지만 이렇게 생활 조건이 달라지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변화에 적응해야 합니다. 생물학이 오류투성이가 아니라면, 인간의 지성과 활력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고난과 자유, 활동적이고 강하고 명석한 사람은 살아남고 약한 사람은 밀려나는 생활 조건, 유능한 사람들의 충실한 협력과 자제와 인내와 결단력을 장려하는 생활 조건. 가족 제도와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들, 예를 들면 질투나 자식에 대한 애정, 부모의 헌신, 아이들이 절박한 위험에 빠졌을 때 정당화되고 장려되는 모든 감정들. 그런데 이제 그 절박한 위험은 어디 있습니까? 부부 사이의 질투, 격렬한 모성애, 온갖 종류의 열정에 대한 반감이 생겨나고 있고, 그 반감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겁니다. 그것은 이제 불필요한 것들이고, 세련되고 쾌적하게 살고 있는 우리를 불쾌하게 만드는 야만적인 유물이며 불협화음일 뿐입니다.

 

 

(83)

나는 처음에는 문명이 자동화된 결과 인간이 쇠퇴했다는 이론에 만족했지만, 그 만족감은 오래가지 않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론을 생각해 낼 수 없었습니다. 내 고충을 말씀드리죠. 내가 돌아본 궁전들은 단순한 거처와 넓은 식당과 침실이었을 뿐입니다. 거기서는 기계류나 어떤 장치도 찾을 수 없었어요. 하지만 미래인들은 아름다운 섬유로 지은 옷을 입고 있었고, 이런 옷은 이따금 다시 만들 필요가 있을 겁니다. 샌들은 아무 장식도 없었지만, 상당히 정교한 금속 세공품이었습니다. 그런 물건은 어쨌든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난쟁이들은 창조적 경향을 털끝만큼도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가게도 없고 작업장도 없고 외국에서 수입하는 흔적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온종일 평화롭게 놀고, 강에서 미역을 감고, 장난치듯 사랑을 나누고, 과일을 먹고, 잠을 자고, 그러면서 모든 시간을 보냈지요. 그런 생활이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96-97)

또한 부유한 사람들은 좋은 교육을 받아서 점점 세련되고 우아해지는 한편, 가난한 사람들의 상스럽고 난폭한 태도와 부자들의 간격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배타적 경향을 갖게 된 부자들은 이미 자신들을 위해 지표면의 상당 부분을 울타리로 싸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런던 일대에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의 절반 정도는 침입을 막기 위해 폐쇄되어 있습니다. 이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것은, 부자들의 경우 오랫동안 많은 비용을 들여 고등 교육을 받기 때문이고, 세련된 습관에 대한 유혹과 거기에 필요한 시설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계층 간 결혼이 사회 계층을 구분하는 경계를 따라 우리 인류가 쪼개지는 것을 저지하고 있지만, 빈부격차가 이렇게 벌어지면 계층 간 결혼이 촉진하는 계층 간 교류가 점점 뜸해질 겁니다. 그래서 결국 지상에는 쾌적함과 안락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가진 자>들이 살고, 지하에는 <못 가진 자>, 즉 자신들의 노동 조건에 끊임없이 적응하는 노동자들이 살게 될 겁니다.

 

(147)

인간의 지성에 대한 꿈이 얼마나 덧없었는가를 생각하자 슬펐습니다. 인간의 지성은 자살한 겁니다. 지성은 안전하고 영속적이고 균형 잡힌 사회를 모토로 삼고, 쾌적하고 안락한 생활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지요. 지성은 마침내 여기에 도달하여 희망을 이루었습니다. 한때는 목숨과 재산이 거의 절대적인 안전에 도달했던 게 분명합니다. 부자들은 재산과 안락을 보장받았고, 노동자들은 생존과 일자리를 보장받았지요. 그 완벽한 세계에서는 실업 문제도 없고,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사회 문제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엄청난 평온이 뒤이어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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