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스페인 내란 소식을 접한 오웰은 즉시 “보통사람의
존엄”을 위해 싸우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1936년 12월 23일
런던을 떠나 26일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신혼생활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의 일이었다. 스페인에서는 공산당이 지지하는
정부가 공포정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웰의 눈에 “바르셀로나의
거리와 사람들 사이에는 평등이 넘쳤다.” 그 광경은 싸워서 지켜낼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가 보이게 스페인 전쟁은 본질에서 계급전쟁이었다. 이기면 보통사람의
대의는 강화되고, 패한다면 지대수익자들이 환호하리라는 사실, 그
외에 나머지는 모두 거품이었다. 스페인에서 혁명전사가 된 오웰은 바르셀로나에서 일주일 머문 후에 POUM의 독립노동당 분대원으로 아라고 전선에 투입되었다.
(72-73)
귀국 즉시 스페인 반파시스트 진영의 내분, 정확히는
스탈린 공산주의 세력의 반혁명적 기회주의적 실상을 낱낱이 밝힌 <카탈로니아에 경의를>의 집필에 착수했다. 그런 작업은 좌파정치의 미래, 진정한 민주사회주의의 앞날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지만, 오웰이
아니면 다른 누구도 그 일을 대신할 수 없다는 점 또한 진실이었다. 스페인 상황을 선별적으로 보도하던
좌파미디어는 결과적으로 소련의 입장을 그대로 따른 셈이었다. 오웰은 런던의 지식들이 “결코 일어나본 적이 없는 사건들 위에 정서적 상부구조를 구축한다”고
탄식했다. 그가 POUM을 강하게 지지한 것도 부분적으로는
“자본주의 언론이 귀기울여주지 않고, 좌파언론은 오로지 중상만
해댔기 때문”이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오웰이 스페인에 오기 전부터 POUM을 “파시즘의 직접적 도구”로 간주한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패권 혹은 권력 장악이 최고의 선이 되면서, 사회주의라는 대의는
너무도 쉽게 소실되었다.
(109)
조지 오웰에게 세인트 시프리언스 예비학교와 버마는 그의 삶 전체, 즉 가난과 전쟁의 체험뿐 아니라 글쓰기에 이르기까지 깊고도 넓게 영향을 미쳤다. 이 점은 무엇보다 오웰의 삶과 작품들이 웅변으로 보여주지만, 여러
계기에 걸친 그의 직접진술과 말년에 이를수록 빈번해지는 회상과 환기, 주변인물과 전기작가들의 증언이
확인해준다. 오웰에게 학창시절과 버마 시절은 삶과 글쓰기의 원체험이었다.
(116)
무엇보다 부자애들은 결코 매질을 당하지 않았는데, 오웰의
기억에 따르면, 연소득 2천 파운드 이상의 부모를 둔 아이가
매 맞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가난한 집 학생은, 일류
사립고에 진학하여 학교의 명성을 높일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만 학비가 감면됐고 따라서 입학이 가능했다. 학교의
명성이 금전적 이익과 직결되던 산황에서 장학금은 학교(장)편에서는
장기투자였던 셈이다. 우웰이 그 경우에 속했다. 그런데 공짜
점심은 정말 없었다. 반액장학생이던 그가 치러야 했던 비용은 주로 정신적인 모욕과 상처였다.
(133-134)
오웰이 제국경찰을 그만두고 7년이 지난 1934년에 출간된 <버마 나날들>은 오웰이 동양에 대해 쓴 유일한 반제국주의 소설이다. 그가
죽을 때까지 붙들었던 <끽연실 이야기>는 버마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지만 미완성으로 남았기 때문에 그 의도와 내용은 추측하기 힘들다. <버마 나날들>은 영국제국주의의 실상에 관한 현장기록이면서 동시에 독자의 정치적 각성과 반성을 유인하기 위한 지식인 오웰의
‘행동’이었다. 버마
체험에 대한 오웰의 회상들이 대체로 그렇듯, 책의 행간 곳곳에는 도저한 석벽(石壁)과도 같은 인종적 편견에 대한 다양한 기억들이 스며 있다. 오웰은 거기에서 제국주의가 현지인들뿐 아니라 지배자들의 일상에도 깊숙이 침투해서 모두의 싦과 의식을 어떻게
파멸시키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166-167)
세계가 전체주의로 흐르리라는 오웰의 예감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수록 짙어졌다. 그는 조만간 모든 민족주의 운동은 초인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치고, 히틀러가
떠난 자리에 스탈린, 영미의 백만장자 그리고 드골 유의 온갖 ‘작은
독재자’들이 들어설 것으로 보았다. 세계적 흐름인 중앙집권적
체계는 경제적으로는 기능적일지 모르나 정치적으로는 비민주적 카스트 체제와 같이 가기 마련이다. 거의
신적인 카스트가 꼭대기에 있고 밑에는 적나라한 노예들이 있는 위계적 구조에서 유례없는 자유의 박멸이 진행될 것이다. 그때 언론의 자유는 첫 번째 치명적 죄악이며 후에는 “무의미한 추상”이 될 것이다. 그것은
<1984>에서 윈스턴 스미스가 오브라이언의 주장에 따라 4개 손가락을 5개로 보듯, 지도자의 뜻대로
2+2=5가 되는 세상이다. 그때 자율적 개인은 존재가 말살되고 작가는 창조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 오웰은 이런 유의 문명이, 나라들이 외부와는 완벽히
단절된 가운데 피차 끊임없는 유사전쟁을 벌이면서, 수천 년 동안 정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인류의 방향이었다.
(177)
특히 전쟁 발발 이전 즉 오웰이 아직 평화주의를 고수하던 때에, 자본주의하에서 민주주의란 파시즘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보통사람들의 존엄이 구현되는 사회였다. 그는 인간이 지닌 본질적이고 태생적인 위험이 형제애에
대한 신뢰 그리고 보통사람들의 전통이 회복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평화주의를 떠난 이후에도- 저버린 적이 없었다. 보통사람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경계하고
그것의 개선(예방)을 위해 노력하는 한 절망은 언어도단이었다.
(190)
오웰이 보기에 지식인은 권력을 지니거나 권력을 추구했으며, 늘
권력 주변에 서성댔다. 그가 지식인과 지배계급을 동일시했던 이유이다.
그는 지배층의 오만과 위선을 경멸하듯 지식층과 오만과 위선을 경멸했다. 그에게 지식인의
위선과 권력욕은 모두 가장 가동할 권력의 형식이면서 자본주의 외적 내적 발전형태인 제국주의와 전체주의를 떠받치는 중요한 기둥이었다. 따라서 오웰의 지식인 됨 혹은 지식인으로서의 삶은 그 자체가 가해자의 근원적 죄의식에 닿아 있었다. 그것은 그가 ‘떠남’과
‘내려감’ 그리고 엄혹한 글쓰기 과정을 모두 개인적 속죄의
근거로 삼는 한에서만 비로소 스스로에게 정당화될 수 있었다.
(254-255)
노동계급 가정이야말로 유대와 평등이라는 동일한 가치가 배양되는 통합공동체의 기초였다. <위건 피어로 가는 길>에서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노동계급 가정에서는 따뜻하고, 품위 있고, 깊은 인간적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다른 곳에서는 쉽지 않다. 육체노동자는 (…) ‘교육받은’ 사람보다 행복할 가능성이 더 많다. 그의 가정생활은 자연스럽게 더 정상적이고 보기에도 좋게 꾸려진다. 나는
종종 노동계급 가정의 실내가 독특하고도 손쉽게 완전성, 말하자면 완전한 대칭으로 꾸며져 있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299-300)
유럽대륙에 전운이 감돌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오웰의 성찰은 깊어졌고 과격해졌다. “우리는 영국이 민주국가라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인도통치에서 보듯이, 겉으로는 덜 자극적일지 모르나 독일 파시즘 못지않게 악하다. 자신의
조국에서부터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않고 어떻게 파시즘에 대항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오웰이
보기에 “파시즘이라는 경쟁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싸움에서 자본주의-제국주의 정부와 협력한다면 이는 파시즘을 뒷문으로 불러들이는 것과 같았다. 적어도
경제체제에 대한 한 영국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파시즘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때는 아직 전쟁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317)
오웰이 스스로 선택한 경험들은 시대상황에 대한 반응이라기보다는 상황을 적극적으로 만들어갔다는
점에서 보다 개인적이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일관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일관된 도덕적 힘이었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선택을 강요하지만, 도덕적 힘은 개인의 선택을
추동한다. 오웰은 버마 행,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생활, 영국 북부와 스페인으로의 여정, 그리고 인생 말년의 고독과 불편함을
스스로 선택했다.
(352)
오웰은 이처럼 노동운동의 속성과 현실적 한계에 누구보다도 민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농계급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끝까지 놓지 않았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희망은 오직 프롤레타리아에 있다는 것, 그것이 오웰의 단순하고 일관된 주장이었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오웰은 스페인에서 지식인에 대한 불신뿐 아니라
노동계급의 뼛속 깊이 자리 잡은 평등의 본능에 대한 깊은 신뢰를 경험했다. 스페인 내전 당시 영국의
지배계급은 기본적으로 친파시스트적이었고 스페인을 프랑코에게 넘기는 것이 계급 이해를 위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영국이
독일과 전쟁에 돌입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궁지에 몰렸기 때문이었다.
(359-360)
오웰은 도저한 사회주의자였지만, 보통사람에 의해
보통사람의 가치와 정서가 구현되는 정치에 희망을 걸었던 민주적 사회주의자였다. 그의 입장은 왕왕 인기가
없었고 종종 시대에 뒤처지기도 했지만, 그는 그것을 견지하고 추구하는 데 추호의 망설임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민주적 사회주의는 윤리와 함께 가는 것이었다. 오웰은
손수건 산업의 도덕성을 먼저 따진 후에야 코를 푸는 사람이었다.
(379)
오웰이 보기에 이 전쟁이 똑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는 점만큼 분명한 것은
없었다. 특히 노동계급에게 영국제국주의와 독일 나치즘 가운데 누가 승리하느냐는 중요한 차이를 만들 것이고,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이 영국의 전쟁노력을 지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물론
“전쟁에서 중립이란 없으며, 한쪽을 돕든가 다른 쪽을 도울
수밖에 없다.” 부자들이 희망하는 ‘타협된 평화’는 결국 영국을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만들 것이다. 설사 전쟁에
진다 하더라도 먼저 국내적 혁명을 일궈내면 완전한 패배로 볼 수 없거니와, 혁명을 추동했던 사상이 살아
있는 한 투쟁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싸우다 지는 것과 싸움 없이 항복하는 것의 차이는 그저 명예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웰은, 히틀러를 인용하여, 항복하는 것은 국가의 영혼을 파괴한다고 보았다. 타협도 정지도 없었다.
(431)
러시아 사회주의는 내적으로 전체주의화했고, 외적으로
제국주의화함으로써 사회주의의 본래 의미를 철저히 왜곡시켰다는 것이 오웰의 기본 시각이었다. “1930년
이래 나는 소련이 진정한 사회주의로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를 거의 보지 못했다. (…) 반대로 나는
그것의 지배자들이 여타 지배계급과 다름 없이 권력을 탈취하고 유지하려고 혈안이 된 위계적 사회로 전화되는 뚜렷한 증거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소련신화를 몰락시키는 일이야말로 사회주의 운동의 부활을 위해 핵심적 과제가 돼야 한다고 단언한다.
(461)
오웰은 제2차 세계대전을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는
전쟁으로 간주했다. 영국이 독일보다 도덕적으로 반드시 우월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영국제국주의는 나치즘보다 더 사악하다 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들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고 출판할 자유가 독일보다는 영국에 상대적으로 더 많다는 점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오웰이 보기에 영제국의 가장 어두운 부분인 인도에도, 전체주의 국가에서보다
훨씬 많은 표현의 자유가 존재했다. 그러나 “전체주의의 정신이
독일과 소련을 넘어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이런 절박한 인식이야말로 작가로서 오웰이 전체주의에 결연히
맞서야 했던 배경이었다.
(503)
오웰에게 문학과 정치적 가치는 상충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말년에 자신이 지난 10년 동안 늘 가장 원했던 것이 “정치적
글쓰기를 하나의 예술로 만드는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특히
스페인 전쟁 이후 자신의 모든 진지한 작품들이,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저항하고, 그가 이해하는 대로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해 써왔다고 말한다. “나는
어떤 동기가 가장 강력한지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어떤 동기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안다. 내 작업을 돌아볼 때, 내가 생기 없는 책을 쓰고, 미사여구, 의미 없는 문장, 화려한
수사, 곧 눈속임에 위해 있을 때는 예외 없이 정치적 목적을 결여했을 때였다는 것을 본다.
(519)
오웰에게 나쁜 작가는 무엇보다 무책임하고 부주의한 스타일리스트였다. 특히 그는 테크닉에 치중한 문학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혹독했다. 그에
따르면, 새로운 문학운동은 통상 선배들에 대한 학살을 시도함으로써 시작되는데, 종종 그때 일어난 문학 테크닉의 변화는 정치적 변화와 긴밀히 얽혀 있었다. 쓸모없는
작품을 양산하는 문예사조도 후대의 기억에 일정한 자국을 남기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과 1920년대의 천박한 상식에 대한 반발로
각각 태동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는, 그것들의 생산해낸 작품들은 “기교에
치우친 쓰레기”에 불과하지만, 아직 기억은 된다는 점이다.
(545)
오웰에게 희망은 (민주적) 사회주의에 있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일종의 도덕적 자유주의이기도
하다. 거기에서 국가는 경제적 삶에 대한 궁극적 책임을 떠안음으로써 국민을 빈곤 실헙 등의 공포에서
해방시키지만, 국민 개인의 지적 삶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그때
예술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대에서처럼, 혹은 그보다 더욱, 번성할
터인데, 예술가는 더 이상 경제적 압박하에서 작업하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