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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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상대를 찾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 없는 18세기 말, 19세기 초 중류계층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게 해주는 소설이다. 뭐 이 점에 있어서는 전근대와 탈근대가 공존하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도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고전 가운데 이만큼 추상적인 철학이나 당대의 정치와 경제에 대한 관심을 배제한 소설도 없을 것이다. 내게는 아직 문학의 역할에 대한 논쟁에 한 편을 들 정도의 내공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는 만큼 일단 이에 대한 판단은 접어두고라도,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토록 사적인 세계에만 배타적으로 천착하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현대의 칙릿소설이나 텔레비전 주말드라마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이 작품이 이들 현대 드라마의 원본(즉 오리지날)이라는 점일 것이다. 적어도 이 작품만큼은 원본과 복사본의 지위가 위계적일 수 없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주장에 굳이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원본의 화려한 향기가 살아있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비롯된 이른바 칙릿소설들의 교과서로 사용된 텍스트이니만큼 애초부터 뭔가 원조만이 가지고 있는 다채로움을 맛볼 수 있을 거란 기대 반, 시대적 한계와 진부함에 실망할 수도 있다는 각오 반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결론적으로 제인 오스틴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과연 제인 오스틴은 인간의 위선이나 어리석음에 대한 냉소적 풍자에 있어 지존이라고나 할까. 어떤 인물을 묘사하려 할 때 그녀에겐 긴말이 필요 없다. 핵심을 찌르는 날카로운 몇 문장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충분히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흔히 보아왔던 인물들을 겹쳐놓고 낄낄거리거나 때로는 자신의 폐부를 간파당한 것 같아 움찔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우리는 재미를 느낄 수밖에 없다. 뭐 우리에겐 은희경도 있지만 말이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흥미롭다. 그런데 다른 인물들에 비해 가장 나의 관심을 끈 인물들은 선하고 아름다운 제인도, 지혜롭고 똑똑한 편견장이 엘리자베스도 아니었다.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이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찬사를 늘어놓고 그의 비위를 맞추는 일을 자신의 모든 행동의 기준으로 삼으면서도,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이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경멸감을 표출하며, 극단적으로 형식적이기만 한 예의범절과 경제적 안위를 최상의 목표로 삼고 지나칠 정도로 성실하게 규격화된 삶을 살아가는, 단순하다 못해 우둔해서 코믹하기 짝이 없는 자폐적 모습을 보여주는 콜린스 씨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재미가 덜했을까? 그는 상류층 끄트머리에 위치하면서 자녀의 결혼을 통한 신분상승 욕구에 불타오르는 베넷 부인과 완벽한 짝을 이룬다

 

순간의 실수로, 오로지 사치와 허영에 들떠 살아가는 뇌가 없는 아내를 평생 감내하는 대신 독서와 산책으로 현실도피적인 삶을 살고 있는 베넷 씨에 대해서는 나는 진심으로 연민을 느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젊고 아름다운 데다 마음씨도 착해 보이는-젊고 아름다우면 마음씨도 착해 보이게 마련이니- 한 여인에게 반해 결혼하게 되었는데, 막상 결혼해 보니 머리도 나쁘고 마음도 꼭 막혀 있는지라 그녀에 대한 애정은 결혼 초기에 진작 끝나버렸다. 존경, 존중, 신뢰는 영원히 사라졌고, 가정의 행복에 대한 그의 생각들도 모두 깨져버렸다. 그러나 베넷 씨는 누구 탓도 아닌 자신의 경솔함으로 초래된 실망을 보상하기 위해서, 어리석거나 나쁜 짓을 한 결과 불행해진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해 찾는 도락 따위에 빠질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전원과 책을 사랑했다. 그리고 주로 이런 취미에서 즐거움을 얻었다. 자기 아내에게서 덕을 본 것이라고는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그의 즐거움에 기여했다는 것 외에는 없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남편이 아내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유의 행복은 아니지만, 달리 즐길만한 거리가 없는 처지라면 주어진 여건에서 얻을 것을 얻는 것이 진정한 현자일 것이다. (328-329)

 

이런 구절을 정말 스물한 살에(이 작품은 애초에 첫인상이라는 제목으로 완성되었으나 십오 년 후에나 지금처럼 제목이 바뀌어 출판되었다고 한다.) 썼을까? 아님 서른여섯쯤에 개작을 하면서 추가한 부분일까? 후자라면 수긍이 가고, 전자라면 작가가 정말 조숙한 천재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지금의 재벌쯤 되는 부를 상속받은 높은 신분의 상속인, 재벌 2이지만 자신과 장래의 며느리를 간섭할 부모는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고, 체격이 건장하고 남자답게 생겼으며 과묵하고 약자에 대한 동정심과 배려가 많은 반면 약간의 거만함만을 약점으로 가지고 있는 다아시 씨는 엘리자베스를 만나 거만함마저도 내려놓으면서 만인의 연인으로 등극했다. 온갖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에서, 특히 많은 소녀들이 즐겨 보는 하이틴 로맨스에서 앞을 다투어 여성들의 로망으로 설정될 이 이상적인 배우자감이 바로 여기서 탄생한 것이다. 제인 오스틴 자신의 욕망이 좀 지나치게 솔직하게 표현된 게 아닐까 싶어 잠시 민망한 미소를 짓게 된다.... 하지만, 오스틴 자신의 첫사랑이 상대 집안의 반대로 깨져버리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게 된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정도는 눈감아 주고 싶다. , 고전이라고 해서 모든 면에서 다 완벽한 건 아니라는 걸 늘 잊지 말자!

 

사랑하는 사람과 도망가는 무분별함을 거리낌 없이 실천하는 막내 리디아나, 불운하게 타고난 외모로 인해 현학적 지식에 집착하나 현실적인 지혜와는 거리가 먼 셋째 메리(세상에, 여성의 외모와 지성의 상관관계가 이 때부터...?!), 그리고 콜린스가 지루하고 매력 없는 사람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면서도 교육은 잘 받았지만 물려받은 재산이 없는 아가씨에게는 결혼만이 가장 확실하고 좋은 가난 예방책임을 알기에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으로 (어쩌면 비장한 마음으로) 콜린스를 선택한 샬럿에게도 작가가 좀 더 애정 어린 관심을 가져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당시에는 똑똑하지만 물려받을 재산이 없는 처녀가 샬럿과 같은 선택을 피하기 위해서는 제인 오스틴처럼 조카들을 돌보면서 형제에게 의지해서 살거나 남의 가정교사로 입주하여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니 말이다.) 물론 한 권의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동일한 비중을 부여하긴 힘들 것이다.


그런데 엘리자베스처럼 성격이 활달하고 매사에 자신감 넘치는 사교적인 인물이 내성적이고 낯을 가리고 과묵한 상대에 대해 오만하다든지 반대로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다는 식으로 오해하는 경우는 얼마나 흔한지! 자신의 판단력과 선함을 절대화하는 사람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그런 사람의 작지만 적극적으로 행해진 실수가 타인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불행을 야기할 수 있는지...! 이런 것을 잡아낼 줄 아는 제인 오스틴의 성격은 어떤 쪽에 가까웠을지 궁금해진다. 제인 오스틴에 관한 영화 <비커밍 제인>을 봐야겠다. 작가의 실재 모습과 얼마나 가깝게 그렸을지는 모르겠지만.  


책장을 덮으며, 이 천재적인 작가가 일찍 죽지만 않았더라면 얼마나 더 다채로운 인물상을 발굴해 냈을까 싶어 새삼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다섯 자매특히 리디아메리와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럿이 이후에 어떻게 살아갔을 지 궁금증을 풀어주었을 것도 같다. 인물 탐구에 있어 제인 오스틴의 작품은 그야말로 교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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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 영역의 확장
미셸 우엘벡 지음, 용경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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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자의 서론격. 자유지상주의에 내몰린 개인은 갈 곳을 몰라 비틀거린다.`투쟁 영역의 확장`이라는 현대사회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기를 포기한 개인은 결국 세계와 분리될 수밖에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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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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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란 모름지기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면서 재미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나게 그 이야기에 빠져있다가 마침내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뭔가 생각해 보게 되는 그런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다.' 작가 이기호가 이 단편집을 통해 하고싶은 말이 바로 이런 말이라면 그는 어느정도 성공한 거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계속해서 소설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뭇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유머와 익살을 빼면 이기호표 소설이 아니다. 오쿠다 히데오와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로망스가 특별한 인간이 성공하는 판타지 같은 이야기라면, 소설은 정의가 자기편이 아닌 사람, “꿈은 반드시 이루어 진다따위의 말이 해당되지 않을 실패자, 소외된 사람들, 인생에서 가진 패가 별로 없는 보통 인간들의 실패담이라고 한다. 그러니 성공하고 싶은 사람은 소설을 읽을 필요가 없다. 뭐 소설가로 성공하고 싶은 경우는 예외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소설은 진짜 가치 있는 삶이란 어떤 삶인지, 진짜 치명적인 실수란 어떤 건지를 볼 수 있는 혜안을 길러준다고 나는 믿는다. 나락으로 한없이 미끄러져 내리는 기분이 들 때 소설은 친구처럼 내 곁에 앉아서 가만히 용기를 북돋워준다. 내가 대체 어찌하면 좋은 건지, 다시 일어설 수는 있는 건지에 대해서도 슬며시 힌트를 주면서 말이다. 인간이 숭고해지는 순간에 대해, 고귀한 삶이란 게 어떤 건지에 대해 궁금하다면 오백 원도 필요 없다. 그냥 도서관에 가서 소설을 한 권 빌려보면 된다. 어릴적 동네친구가 그립거나 좀 웃고싶은 어느 날엔 이기호 소설을 집어들면 되고.

 

2013. 0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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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잘해요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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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대로, 이 소설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속의 쌍둥이 캐릭터와, 카프카 소설에 나오는 암울한 의 이미지(혹은 푸코의 원형감옥)를 떠올린다. 폭력적인 시설은 벗어날 길 없고 실체를 알 길 없는 거대한 권력 세계인 시설’(이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군부 독재시절에 있었던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을 떠올린다)에 갇힌 시봉과 는 온종일 거듭되는 온갖 폭력과 정신을 마비시키는 약에 시달리며, 무감각과 무사유를 특징으로 하는 기계인간화라는 최후의 방어막으로 겨우 생존해나간다. 이런 시설에서 모든 주체성이 말살되고 철저하게 순응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진 시봉과 는 더 이상의 직접적인 폭력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시설밖 세상으로 나와서도 시설에서의 삶의 방식을 반복하는 좀비적인 삶을 산다. 과연 이들은 잠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좀비가 아닌 인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 소설의 표지 그림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시봉과 내가 어떤 자기 인식도 없이 동일한 행위를 반복하는 꼭두각시 인생에 전환을 맞게 되는 계기는 무엇일까?

 

이 소설에서 친구 살해를 통한 주체 회복을 보는 장정일(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에서)에 따르면, 구원은 진정한 자기만의 욕망을 인식하고 친구를 배반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의 살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은 시봉의 누이 시연을 살리고 싶다는 사랑의 욕망에서 싹튼 것이다. 진정한 자신의 욕망을 되찾은 는 친구의 죽음을 발판으로, 그 누이와 스스로를 죽음에서 구한다. 아직 온전한 기력을 되찾지 못한 시연을 업고 병원 밖으로 걸어 나가는 는 아무리 열심히 걷고 걸어도 시연과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병원의 파란 십자가 네온의 시야를 아직 벗어나지 못한 채 소설의 막은 내려지고 말지만, 계속해서 앞을 향해 걷는 것 이외에 이들에게 다른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어쨌건 는 이제 계속해서 앞을 걸어갈 힘을 얻었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닐까? 좀비처럼 빙글빙글 떠도는 게 아니라 길을 찾아 앞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힘 말이다.

 

소설의 또 다른 한 축은 죄와 벌에 대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온종일 구타를 당하며 시설에서 배운 건 자신이 육체적 징벌을 받는 이유, 즉 자신의 를 찾아내는 일이가 때문이다. ‘을 스스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일단 을 먼저 받고(구타를 당하고), 그 이유를 찾아내어(만들어내어) 고백하고 사과를 한 다음, 실재로 스스로 고백한 잘못을 저지르는, 우리의 상식과는 정반대로 전도된 행위가 반복적으로 행해진다. 나아가, 이들은 타인의 를 고백 받아 을 대신 받아주기도 한다. 얼핏 보기에, 이는 마치 편협한 고대 신앙이 성립하는 방식을 은유하는 것만 같다.

 

유아기의 신앙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하는 온갖 불행이 나의 에 대한 징벌임을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고 나서, 일단 전능하신 하나님께 죄인임을 고백한 다음,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찬찬히 헤아려 본다. 죄는 널려 있으므로 별로 고민할 것도 없다. 그런 다음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확신하기 위해, 즉 벌 받는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무의식의 발로로 죄를 짓는다. 그렇게 신앙은 완결된다.

 

그런데 바로 이런 기괴한 전도가 바로 예수가 율법을 폐지하러 왔다고 선포한 이유 아닌가? 율법이 죄를 유도하는 통로가 되고 있음이 무려 2천 년 전에 간파되었단 말이다. 예수는 십계명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금지 규칙을 나열한 율법’(금지와 처벌)이 바로 와 죽음을 가져온 원흉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하고, 그 자리에 사랑을 들여놓을 것을 역설한다. 살아있는 한 어떤 인간도 겪을 수밖에 없는 불행과 고통에 대해, 예수는 이를 율법을 어긴 의 표식으로 보지 않고 무한한 연민과 자비심으로 껴안으려 한다. 예수의 연민을 받아들이는 인간이라면, 그에게서는 를 지을 동기 자체가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논리로 말이다.

 

과연 모든 이들이 신의 사랑을 인지하고 받아들인다면 가 사라질 것인지, 이런 세상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에 관한 논의는 접어두고, 이 소설이 기독교의 원죄론을 비꼬기 위해 죄와 벌의 은유를 가져온 것이라면, 신학에 대한 저자의 이해가 너무 얄팍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는 말을 나는 하고 싶은 것이다.

 

종교에 대한 비꼬기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에 대한 성찰을 철학적이기보다는 사회 현상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가령 와 같은 방에 수감되어 있다가 자살한 이가 바로 의 아버지인지를 시설 원장에게 찾아가 묻자, 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원장의 입에서 나온 다음과 같은 말은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죄는 모른 척해야 잊혀지는 법이거든.” 아버지가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방식이 정말 자살밖에 없었을 지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우뚱해지지만, 아버지가 자신의 죄를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만큼은 원장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죄는 억지 자백의 강요를 통해 요술처럼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망각과 부인을 통해 마술처럼 사라지기도 하는 게 바로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사이좋던 정육점 주인과 과일가계 주인은 와 시봉의 집요한 사과 요청으로 인해 점점 죄의식에 시달려 불화를 겪는 반면, 시설 원장과 두 복지사는 자신의 죄를 끝내 부인함으로써 무죄 또는 가벼운 형량을 받게 되는 것처럼. 자신의 죄를 대면하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는 김밥집 주인 아들과 가족을 버리고 떠난 가장 사이의 화해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통해서 드러난다. 진정한 속죄는 스스로 그 죄의 결과와 정면으로 대면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이게 전부라면 사실 이건 너무 뻔한 이야기 아닌가? 시스템의 꼭두각시 인형처럼 살아가는 비주체적인 우리 인간의 모습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진정한 속죄의 어려움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소재나 인물만큼 신선하지 못한 이 주제 마저도 기대만큼 잘 직조되지 못한 듯한 느낌에 많이 아쉬웠던 게 사실이다. 만약, 이소설이 자기 자신에게 숨겨진 욕망을 깨닫고 자기 의지로 죄를 짓는 일이 바로 주체적 삶의 출발점이 된다는 생의 아이러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를 망각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며 죄의식을 평생의 동반자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게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가장 중요한 인간 윤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려는 의도로 쓰여진 소설이었다면, 작가는 좀 더 분투했어야 했다.

 

2013. 0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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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지음, 박이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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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뒤늦게 박찬욱 감독의 <박쥐>를 보고 원작 소설 테레즈 라캥에 관심을 갖게 됐다. 영화가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읽다 보니 예전에 읽었던 소설인 것이다! 하긴, 약간의 기시감이 느껴지긴 했다.... 기억력 감퇴에 좋은 점이라면 이미 한 번 읽었던 책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일 거다. 치매에 가까운 기억력을 슬퍼하며 처음엔 설렁설렁 읽어 나갔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나는 책에 무섭게 빠져들었다. 이 책의 백미는 모든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벌어지는 심리적 갈등상태의 기술에 있다는 걸 이번엔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던 덕분이었을 것이다.


책 내용을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남편의 친구와 정분 난 여자가 애인을 충동질하여 남편을 죽이게 하고는 끝없는 죄의식에 시달리는 이야기다. 우리가 신문 사회면 기사에서 흔히 보아온 그 이야기 말이다. 물론 천여 페이지에 달하는 안나 까레리나가 불륜을 저지른 여자가 괴로움에 못 이겨 기차에 뛰어드는 이야기인 것처럼, 짧게 요약하자면 너무 흔하디흔하고 단순한 이야기여서 굳이 한 권의 책으로 그 내용을 확인하고픈 의욕이 안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난 이 책을 읽고 나서 더욱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소설이 왜 꼭 필요한 것인지를, 소설이 어떠한 철학적 논증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우리를 사유하게 만드는지를.

 

인간이 범죄를 저지르도록 만드는 심리와 범죄를 저지른 후 갖게 되는 어마어마한 심리적 변화 과정을 이처럼 섬세하고 무섭도록 사실적으로 묘사한 소설은 처음이었다.(뭐 혹시 소설을 그리 많이 읽은 건 아니지 않느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과연 자연주의 소설의 효시다웠다. 인간의 가장 강렬한 본성의 한 부분을 내장까지 속속들이 들여다 본 느낌이라 구역질이 날 정도였지만, 책을 읽는 내내 이토록 마음이 불편했던 까닭이 무엇인지 자문해 보았다. 아마도 이 소설 덕분에 죄의 일반적인 속성을 그야말로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된 탓이 아닌가 싶다.

 

살아가면서 우리 대부분은, 아니 어쩌면 모든 인간은 살인까지는 아니더라도 크고 작은 양심의 죄를 짓는다.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타인의 정신을 죽이는 상징적 살인 말이다. 모든 게 우리로 하여금 걸러지지 않은 본능에만 충실한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극도의 이기심 탓이지만 그 이기심을 자각하는 건 쉽지 않다. 매 순간 내 욕망으로 인한 행위가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섬세하게 따져보는 자기 훈련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윤리적 인간이란 타고나는 게 아니라 마치 조각 예술품처럼 섬세하게 공들여 만들어지고 다듬어지는 것이라는 걸 안타깝게도, 세월이 많이 흘러서야 깨닫게 되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살아오면서 도대체 나는 별다른 자각 없이 얼마나 많은 별 것 아닌죄를 저질렀던 것인지...., 생각, 또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별 일 아닌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박찬욱의 영화도 놀랄 만큼 훌륭했지만, 엄청난 죄를 짓고 난 인간의 변화무쌍한 심리적 흐름을 포착하여 독자를 충격과 사유의 바다로 밀어 넣는데 있어서는 도저히 소설을 따라갈 수가 없다. 적어도 이 작품이 있어서만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장면 장면이 오버랩 되어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이 보다 선명하게 그려지는 건 내겐 색다른 경험이었다. 영화를 먼저 보면 원작 소설을 읽는 맛이 확 떨어지게 될 것이므로 반드시 책을 먼저 읽어야 한다는 나의 고정관념이 일거에 무너져 버렸다. 소설의 탁월함과는 별도로, 적어도 내겐 이번만큼은 제대로 된 순서였다. 물론 이런 일이 흔한 경우가 아니란 건 알지만. 영화가 워낙 풍성해서 원작 소설을 읽는 감흥을 방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상상력에 기름을 부어주었기 때문이리라.


2013. 0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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