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잘해요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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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대로, 이 소설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속의 쌍둥이 캐릭터와, 카프카 소설에 나오는 암울한 의 이미지(혹은 푸코의 원형감옥)를 떠올린다. 폭력적인 시설은 벗어날 길 없고 실체를 알 길 없는 거대한 권력 세계인 시설’(이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군부 독재시절에 있었던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을 떠올린다)에 갇힌 시봉과 는 온종일 거듭되는 온갖 폭력과 정신을 마비시키는 약에 시달리며, 무감각과 무사유를 특징으로 하는 기계인간화라는 최후의 방어막으로 겨우 생존해나간다. 이런 시설에서 모든 주체성이 말살되고 철저하게 순응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진 시봉과 는 더 이상의 직접적인 폭력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시설밖 세상으로 나와서도 시설에서의 삶의 방식을 반복하는 좀비적인 삶을 산다. 과연 이들은 잠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좀비가 아닌 인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 소설의 표지 그림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시봉과 내가 어떤 자기 인식도 없이 동일한 행위를 반복하는 꼭두각시 인생에 전환을 맞게 되는 계기는 무엇일까?

 

이 소설에서 친구 살해를 통한 주체 회복을 보는 장정일(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에서)에 따르면, 구원은 진정한 자기만의 욕망을 인식하고 친구를 배반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의 살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은 시봉의 누이 시연을 살리고 싶다는 사랑의 욕망에서 싹튼 것이다. 진정한 자신의 욕망을 되찾은 는 친구의 죽음을 발판으로, 그 누이와 스스로를 죽음에서 구한다. 아직 온전한 기력을 되찾지 못한 시연을 업고 병원 밖으로 걸어 나가는 는 아무리 열심히 걷고 걸어도 시연과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병원의 파란 십자가 네온의 시야를 아직 벗어나지 못한 채 소설의 막은 내려지고 말지만, 계속해서 앞을 향해 걷는 것 이외에 이들에게 다른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어쨌건 는 이제 계속해서 앞을 걸어갈 힘을 얻었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닐까? 좀비처럼 빙글빙글 떠도는 게 아니라 길을 찾아 앞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힘 말이다.

 

소설의 또 다른 한 축은 죄와 벌에 대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온종일 구타를 당하며 시설에서 배운 건 자신이 육체적 징벌을 받는 이유, 즉 자신의 를 찾아내는 일이가 때문이다. ‘을 스스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일단 을 먼저 받고(구타를 당하고), 그 이유를 찾아내어(만들어내어) 고백하고 사과를 한 다음, 실재로 스스로 고백한 잘못을 저지르는, 우리의 상식과는 정반대로 전도된 행위가 반복적으로 행해진다. 나아가, 이들은 타인의 를 고백 받아 을 대신 받아주기도 한다. 얼핏 보기에, 이는 마치 편협한 고대 신앙이 성립하는 방식을 은유하는 것만 같다.

 

유아기의 신앙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하는 온갖 불행이 나의 에 대한 징벌임을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고 나서, 일단 전능하신 하나님께 죄인임을 고백한 다음,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찬찬히 헤아려 본다. 죄는 널려 있으므로 별로 고민할 것도 없다. 그런 다음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확신하기 위해, 즉 벌 받는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무의식의 발로로 죄를 짓는다. 그렇게 신앙은 완결된다.

 

그런데 바로 이런 기괴한 전도가 바로 예수가 율법을 폐지하러 왔다고 선포한 이유 아닌가? 율법이 죄를 유도하는 통로가 되고 있음이 무려 2천 년 전에 간파되었단 말이다. 예수는 십계명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금지 규칙을 나열한 율법’(금지와 처벌)이 바로 와 죽음을 가져온 원흉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하고, 그 자리에 사랑을 들여놓을 것을 역설한다. 살아있는 한 어떤 인간도 겪을 수밖에 없는 불행과 고통에 대해, 예수는 이를 율법을 어긴 의 표식으로 보지 않고 무한한 연민과 자비심으로 껴안으려 한다. 예수의 연민을 받아들이는 인간이라면, 그에게서는 를 지을 동기 자체가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논리로 말이다.

 

과연 모든 이들이 신의 사랑을 인지하고 받아들인다면 가 사라질 것인지, 이런 세상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에 관한 논의는 접어두고, 이 소설이 기독교의 원죄론을 비꼬기 위해 죄와 벌의 은유를 가져온 것이라면, 신학에 대한 저자의 이해가 너무 얄팍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는 말을 나는 하고 싶은 것이다.

 

종교에 대한 비꼬기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에 대한 성찰을 철학적이기보다는 사회 현상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가령 와 같은 방에 수감되어 있다가 자살한 이가 바로 의 아버지인지를 시설 원장에게 찾아가 묻자, 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원장의 입에서 나온 다음과 같은 말은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죄는 모른 척해야 잊혀지는 법이거든.” 아버지가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방식이 정말 자살밖에 없었을 지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우뚱해지지만, 아버지가 자신의 죄를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만큼은 원장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죄는 억지 자백의 강요를 통해 요술처럼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망각과 부인을 통해 마술처럼 사라지기도 하는 게 바로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사이좋던 정육점 주인과 과일가계 주인은 와 시봉의 집요한 사과 요청으로 인해 점점 죄의식에 시달려 불화를 겪는 반면, 시설 원장과 두 복지사는 자신의 죄를 끝내 부인함으로써 무죄 또는 가벼운 형량을 받게 되는 것처럼. 자신의 죄를 대면하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는 김밥집 주인 아들과 가족을 버리고 떠난 가장 사이의 화해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통해서 드러난다. 진정한 속죄는 스스로 그 죄의 결과와 정면으로 대면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이게 전부라면 사실 이건 너무 뻔한 이야기 아닌가? 시스템의 꼭두각시 인형처럼 살아가는 비주체적인 우리 인간의 모습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진정한 속죄의 어려움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소재나 인물만큼 신선하지 못한 이 주제 마저도 기대만큼 잘 직조되지 못한 듯한 느낌에 많이 아쉬웠던 게 사실이다. 만약, 이소설이 자기 자신에게 숨겨진 욕망을 깨닫고 자기 의지로 죄를 짓는 일이 바로 주체적 삶의 출발점이 된다는 생의 아이러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를 망각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며 죄의식을 평생의 동반자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게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가장 중요한 인간 윤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려는 의도로 쓰여진 소설이었다면, 작가는 좀 더 분투했어야 했다.

 

2013. 0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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