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지음, 박이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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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뒤늦게 박찬욱 감독의 <박쥐>를 보고 원작 소설 테레즈 라캥에 관심을 갖게 됐다. 영화가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읽다 보니 예전에 읽었던 소설인 것이다! 하긴, 약간의 기시감이 느껴지긴 했다.... 기억력 감퇴에 좋은 점이라면 이미 한 번 읽었던 책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일 거다. 치매에 가까운 기억력을 슬퍼하며 처음엔 설렁설렁 읽어 나갔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나는 책에 무섭게 빠져들었다. 이 책의 백미는 모든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벌어지는 심리적 갈등상태의 기술에 있다는 걸 이번엔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던 덕분이었을 것이다.


책 내용을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남편의 친구와 정분 난 여자가 애인을 충동질하여 남편을 죽이게 하고는 끝없는 죄의식에 시달리는 이야기다. 우리가 신문 사회면 기사에서 흔히 보아온 그 이야기 말이다. 물론 천여 페이지에 달하는 안나 까레리나가 불륜을 저지른 여자가 괴로움에 못 이겨 기차에 뛰어드는 이야기인 것처럼, 짧게 요약하자면 너무 흔하디흔하고 단순한 이야기여서 굳이 한 권의 책으로 그 내용을 확인하고픈 의욕이 안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난 이 책을 읽고 나서 더욱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소설이 왜 꼭 필요한 것인지를, 소설이 어떠한 철학적 논증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우리를 사유하게 만드는지를.

 

인간이 범죄를 저지르도록 만드는 심리와 범죄를 저지른 후 갖게 되는 어마어마한 심리적 변화 과정을 이처럼 섬세하고 무섭도록 사실적으로 묘사한 소설은 처음이었다.(뭐 혹시 소설을 그리 많이 읽은 건 아니지 않느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과연 자연주의 소설의 효시다웠다. 인간의 가장 강렬한 본성의 한 부분을 내장까지 속속들이 들여다 본 느낌이라 구역질이 날 정도였지만, 책을 읽는 내내 이토록 마음이 불편했던 까닭이 무엇인지 자문해 보았다. 아마도 이 소설 덕분에 죄의 일반적인 속성을 그야말로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된 탓이 아닌가 싶다.

 

살아가면서 우리 대부분은, 아니 어쩌면 모든 인간은 살인까지는 아니더라도 크고 작은 양심의 죄를 짓는다.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타인의 정신을 죽이는 상징적 살인 말이다. 모든 게 우리로 하여금 걸러지지 않은 본능에만 충실한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극도의 이기심 탓이지만 그 이기심을 자각하는 건 쉽지 않다. 매 순간 내 욕망으로 인한 행위가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섬세하게 따져보는 자기 훈련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윤리적 인간이란 타고나는 게 아니라 마치 조각 예술품처럼 섬세하게 공들여 만들어지고 다듬어지는 것이라는 걸 안타깝게도, 세월이 많이 흘러서야 깨닫게 되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살아오면서 도대체 나는 별다른 자각 없이 얼마나 많은 별 것 아닌죄를 저질렀던 것인지...., 생각, 또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별 일 아닌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박찬욱의 영화도 놀랄 만큼 훌륭했지만, 엄청난 죄를 짓고 난 인간의 변화무쌍한 심리적 흐름을 포착하여 독자를 충격과 사유의 바다로 밀어 넣는데 있어서는 도저히 소설을 따라갈 수가 없다. 적어도 이 작품이 있어서만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장면 장면이 오버랩 되어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이 보다 선명하게 그려지는 건 내겐 색다른 경험이었다. 영화를 먼저 보면 원작 소설을 읽는 맛이 확 떨어지게 될 것이므로 반드시 책을 먼저 읽어야 한다는 나의 고정관념이 일거에 무너져 버렸다. 소설의 탁월함과는 별도로, 적어도 내겐 이번만큼은 제대로 된 순서였다. 물론 이런 일이 흔한 경우가 아니란 건 알지만. 영화가 워낙 풍성해서 원작 소설을 읽는 감흥을 방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상상력에 기름을 부어주었기 때문이리라.


2013. 0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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