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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평점 :
결혼 상대를 찾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 없는 18세기 말, 19세기 초 중류계층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게 해주는 소설이다. 뭐 이 점에 있어서는 전근대와 탈근대가 공존하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도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고전 가운데 이만큼 추상적인 철학이나 당대의 정치와 경제에 대한 관심을 배제한 소설도 없을 것이다. 내게는 아직 문학의 역할에 대한 논쟁에 한 편을 들 정도의 내공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는 만큼 일단 이에 대한 판단은 접어두고라도,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토록 사적인 세계에만 배타적으로 천착하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현대의 칙릿소설이나 텔레비전 주말드라마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이 작품이 이들 현대 드라마의 원본(즉 오리지날)이라는 점일 것이다. 적어도 이 작품만큼은 원본과 복사본의 지위가 위계적일 수 없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주장에 굳이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원본의 화려한 향기가 살아있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비롯된 이른바 ‘칙릿소설’들의 교과서로 사용된 텍스트이니만큼 애초부터 뭔가 ‘원조’만이 가지고 있는 다채로움을 맛볼 수 있을 거란 기대 반, 시대적 한계와 진부함에 실망할 수도 있다는 각오 반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결론적으로 제인 오스틴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과연 제인 오스틴은 인간의 위선이나 어리석음에 대한 냉소적 풍자에 있어 지존이라고나 할까. 어떤 인물을 묘사하려 할 때 그녀에겐 긴말이 필요 없다. 핵심을 찌르는 날카로운 몇 문장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충분히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흔히 보아왔던 인물들을 겹쳐놓고 낄낄거리거나 때로는 자신의 폐부를 간파당한 것 같아 움찔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우리는 재미를 느낄 수밖에 없다. 뭐 우리에겐 은희경도 있지만 말이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흥미롭다. 그런데 다른 인물들에 비해 가장 나의 관심을 끈 인물들은 선하고 아름다운 제인도, 지혜롭고 똑똑한 편견장이 엘리자베스도 아니었다.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이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찬사를 늘어놓고 그의 비위를 맞추는 일을 자신의 모든 행동의 기준으로 삼으면서도,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이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경멸감을 표출하며, 극단적으로 형식적이기만 한 예의범절과 경제적 안위를 최상의 목표로 삼고 지나칠 정도로 성실하게 규격화된 삶을 살아가는, 단순하다 못해 우둔해서 코믹하기 짝이 없는 자폐적 모습을 보여주는 콜린스 씨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재미가 덜했을까? 그는 상류층 끄트머리에 위치하면서 자녀의 결혼을 통한 신분상승 욕구에 불타오르는 베넷 부인과 완벽한 짝을 이룬다.
순간의 실수로, 오로지 사치와 허영에 들떠 살아가는 뇌가 없는 아내를 평생 감내하는 대신 독서와 산책으로 현실도피적인 삶을 살고 있는 베넷 씨에 대해서는 나는 진심으로 연민을 느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젊고 아름다운 데다 마음씨도 착해 보이는-젊고 아름다우면 마음씨도 착해 보이게 마련이니- 한 여인에게 반해 결혼하게 되었는데, 막상 결혼해 보니 머리도 나쁘고 마음도 꼭 막혀 있는지라 그녀에 대한 애정은 결혼 초기에 진작 끝나버렸다. 존경, 존중, 신뢰는 영원히 사라졌고, 가정의 행복에 대한 그의 생각들도 모두 깨져버렸다. 그러나 베넷 씨는 누구 탓도 아닌 자신의 경솔함으로 초래된 실망을 보상하기 위해서, 어리석거나 나쁜 짓을 한 결과 불행해진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해 찾는 도락 따위에 빠질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전원과 책을 사랑했다. 그리고 주로 이런 취미에서 즐거움을 얻었다. 자기 아내에게서 덕을 본 것이라고는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그의 즐거움에 기여했다는 것 외에는 없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남편이 아내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유의 행복은 아니지만, 달리 즐길만한 거리가 없는 처지라면 주어진 여건에서 얻을 것을 얻는 것이 진정한 현자일 것이다. (328-329쪽)
이런 구절을 정말 스물한 살에(이 작품은 애초에 『첫인상』이라는 제목으로 완성되었으나 십오 년 후에나 지금처럼 제목이 바뀌어 출판되었다고 한다.) 썼을까? 아님 서른여섯쯤에 개작을 하면서 추가한 부분일까? 후자라면 수긍이 가고, 전자라면 작가가 정말 조숙한 천재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지금의 재벌쯤 되는 부를 상속받은 높은 신분의 상속인, 즉 ‘재벌 2세’이지만 자신과 장래의 며느리를 간섭할 부모는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고, 체격이 건장하고 남자답게 생겼으며 과묵하고 약자에 대한 동정심과 배려가 많은 반면 약간의 거만함만을 약점으로 가지고 있는 다아시 씨는 엘리자베스를 만나 거만함마저도 내려놓으면서 만인의 연인으로 등극했다. 온갖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에서, 특히 많은 소녀들이 즐겨 보는 하이틴 로맨스에서 앞을 다투어 여성들의 로망으로 설정될 이 이상적인 배우자감이 바로 여기서 탄생한 것이다. 제인 오스틴 자신의 욕망이 좀 지나치게 솔직하게 표현된 게 아닐까 싶어 잠시 민망한 미소를 짓게 된다.... 하지만, 오스틴 자신의 첫사랑이 상대 집안의 반대로 깨져버리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게 된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정도는 눈감아 주고 싶다. 뭐, 고전이라고 해서 모든 면에서 다 완벽한 건 아니라는 걸 늘 잊지 말자!
사랑하는 사람과 도망가는 ‘무분별함’을 거리낌 없이 실천하는 막내 리디아나, 불운하게 타고난 외모로 인해 현학적 지식에 집착하나 현실적인 지혜와는 거리가 먼 셋째 메리(세상에, 여성의 외모와 지성의 상관관계가 이 때부터...?!), 그리고 콜린스가 지루하고 매력 없는 사람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면서도 교육은 잘 받았지만 물려받은 재산이 없는 아가씨에게는 결혼만이 가장 확실하고 좋은 가난 예방책임을 알기에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으로 (어쩌면 비장한 마음으로) 콜린스를 선택한 샬럿에게도 작가가 좀 더 애정 어린 관심을 가져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당시에는 똑똑하지만 물려받을 재산이 없는 처녀가 샬럿과 같은 선택을 피하기 위해서는 제인 오스틴처럼 조카들을 돌보면서 형제에게 의지해서 살거나 남의 가정교사로 입주하여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니 말이다.) 물론 한 권의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동일한 비중을 부여하긴 힘들 것이다.
그런데 엘리자베스처럼 성격이 활달하고 매사에 자신감 넘치는 사교적인 인물이 내성적이고 낯을 가리고 과묵한 상대에 대해 오만하다든지 반대로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다는 식으로 오해하는 경우는 얼마나 흔한지! 자신의 판단력과 선함을 절대화하는 사람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그런 사람의 작지만 적극적으로 행해진 실수가 타인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불행을 야기할 수 있는지...! 이런 것을 잡아낼 줄 아는 제인 오스틴의 성격은 어떤 쪽에 가까웠을지 궁금해진다. 제인 오스틴에 관한 영화 <비커밍 제인>을 봐야겠다. 작가의 실재 모습과 얼마나 가깝게 그렸을지는 모르겠지만.
책장을 덮으며, 이 천재적인 작가가 일찍 죽지만 않았더라면 얼마나 더 다채로운 인물상을 발굴해 냈을까 싶어 새삼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다섯 자매, 특히 리디아, 메리와,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럿이 이후에 어떻게 살아갔을 지 궁금증을 풀어주었을 것도 같다. 인물 탐구에 있어 제인 오스틴의 작품은 그야말로 교과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