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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김연수를 사랑하는 팬을 자처하면서도 이번에는 한동안 그의 신작을 구입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작년에 작가가 어느 팟케스트 방송에 나와 자신의 신작 소설 내용과 주제에 관해 비교적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걸 듣게 된 적이 있는데, 어쩐지 안 읽어봐도 알 것만 같은 살짝 뻔한 내용에다가 감상주의로 빠졌을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다작 작가라 할 수 있는 그의 작품을 지금껏 한 권을 제외하고 모조리 읽어 온 자칭 김연수빠였던 내가 원더보이를 읽고 나서 고개 들기 시작한 불안이 내 앞을 가로막고 나섰던 거다. 그러나... 팬으로서의 의무를 끝내 저버릴 수는 없었다고나 할까. ^^;;

 

안타깝게도, 우려는 어느 정도 현실로 드러났다. 책을 덮고 나자 마치 재미있고 적당한 감동을 주는 헐리웃 영화 한 편을 보고 난 기분이 들었지만, 뇌와 오감을 자극하는 그 무엇(문학적 매혹이라고나 할까...?) 혹은 뒤통수를 내려치는 깨달음 같은 건 없었다. 폴 오스터 식의 우연적인 얽히고설킴이 이어지고 약간의 반전 비슷한 것도 있고 줄리언 반즈 식의 비밀과 진실 추적도 있지만, 아쉽게도 독자로서의 내가 그로 인해 깜짝 놀라게 된다거나 손에 땀을 쥐게 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책장을 덮고 나서 한동안 멍해지게 만드는 삶의 아이러니도, 그렇다고 가슴이 먹먹해지게 만드는 처절한 회한도 없었다. 소설에 왜 이리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걸까?

 

1. 시점의 변화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혹 부적절한 시점의 이동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 소설에서는 시점이 여러 차례 바뀐다. 주인공 카밀라의 1인칭 화법에서 시작된 소설은 중반부에는 2인칭 화법(카밀라의 생모 정지은의 시점)이라는 독특한 시점으로, 다음엔 희재의 친구들인 우리의 시점, 그리고 마지막엔 또 다른 희재의 시점으로 바뀐다. 그런데 이런 시점의 다양한 변화는 동일한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기 위해서는 적절할지 몰라도, 단순히 스토리(진실이 점차 드러나는)의 전개를 떠맡는 역할을 주도하는 사람이 바뀌는 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오히려 소설에의 몰입을 떨어뜨리는 효과를 주는 게 아닐까? 만약 마지막에 한 두 페이지라도 다시 한 번 카밀라의 시점으로 돌아왔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시점 자체가 이동하다 보니, 진실과 점점 가까이 대면하게 되면서 극심한 내면적 갈등을 겪었을 카밀라(희재)의 내적 격동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아 이 또한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한 요인이 되었던 것 같다. 그녀가 (한동안은 점점 추해지는 모습으로) 점차 그 실체를 드러내는 진실을 마주하는 동안 느꼈을 내밀한 고통을 밀도 있게 경험하기를 기다렸던 나는 좀 김이 빠져버렸던 게 사실이니까.

 

2. 소문과 소통

이 소설에서 애초에 죄를 불러온 건 두 가지 마음이다. 타인의 명예와 안위를 위협해서라도 자신의 명예와 안위를 지키려는 본능과, 분노로 인한 복수심. 이 두 가지가 약간의 불운, 약간의 어리석음과 만나면 끔찍하고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이 만들어진다. 그리하여 때로는 사소한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재난을 몰고 오는 것이다. 신혜숙과 미옥은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타인에게 고통을 주거나 자신의 불운에 대한 복수심으로 죄 없는 타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인물들이다. 이들이 타인에게 상처 주는 방식에 대해 자연스레 줄리언 반즈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떠올리는 건 나 뿐일까? 그리고 악의와 무지가 결합하여 낳은 아기라고 할 수 있는 소문이 때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다는 내용은 이미 우리에게 충분히 낯익은 <올드보이>의 전설 아닌가?

 

저는 소문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서워요. 사람들은 자기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 들여다본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자기 마음 하나 제대로 모르는 바보들이니까요. 저는 자기 마음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들은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그 무지한 마음이 무서울 뿐이죠.”

 

대부분의 인간들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절망과 고통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무지와 이기심은 종종 고통과 절망에 빠진 타인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사악한 흉기로 돌변한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수라’ 세계의 가장 적나라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녕,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용기와 중단 없는 노력만이 구원의 동아줄이 되어줄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른다.

 

“...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건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날개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요. 꿈과 같은 일이라 네 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야 하나도 어렵지 않지만, 결국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날개는 왜 존재하는 것인가? 그 이유를 잘 알아야만 합니다. 날개는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날개가 없었다면, 하늘을 난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테니까요.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생각도 못했을 테지요.”

 

그런데 자신의 절망과 타인의 절망이 만나 마술 같은 이해와 소통에 이르는 순간을, 불가피하게 일찍 헤어진 엄마와 자식 사이만큼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관계가 또 있을까! 이 소설이 진부함을 무릅쓰고 쓰여졌다기 보다는 바로 그 진부함에 기대어 쓰여진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거두기 어려운 이유다.

 

또 이런 주제를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진실 찾기 행위를 통해 보여주는 다소 흔한 추리 소설적 방식 역시 아쉽게도 줄리언 반즈의 소설에서처럼 강한 긴장감을 유발하지도, 치명적인 충격을 주지도 못했다.

 

3. 이야기를 통한 구원

그런데 왜 인생은 이다지도 짧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건 모두에게 인생은 한 번뿐이기 때문이겠지. 처음부터 제대로 산다면 인생은 한 번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단번에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단 한 번뿐인 인생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는, 그게 제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는 모두 결정적이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우리는 그런 결정적인 실수를 수없이 저지른다는 걸 이제는 잘 알겠다. 그러니 한 번의 삶은 너무나 부족하다. 세 번쯤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번의 삶은 살아보지 않은 삶이나 마찬가지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미 사유된 바 있었던 삶의 진리다. 질문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차피 예외 없이 우리 모두는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는 존재들이니 삶에는 큰 의미란 게 없다는 건가, 아니면 최대한 실수를 적게 하기위해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인가? 소설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내내 이 문제를 고민하며 오락가락했던 쿤데라의 토마시와는 달리, 십대 소녀 지은의 단호한 선택은 후자였다.

 

난 최선을 다할 거야. 그런 소리들 사이에서 한 소녀의 목소리도 들렸다. 한 번의 인생으로는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에 들리는 목소리인 셈이었다. 난 최선을 다할 거야. 그건 그날 새벽, 조선소 사장에게 부탁하면 아버지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양관으로 달려가면서 지은이 수없이 읊조렸던 말이라는 걸 이제우리는 알게 됐다.

 

물론 이렇게 영민한 지은도 인생에 뜻대로 되는 일이 오히려 흔치 않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더많은 좌절을 겪어야 했으리라.

 

우리는 이제 안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이룰 수 없는 일들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을. 아니, 거의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다는 걸.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이제 우리가 그동안 김연수의 숱한 단편들을 통해서 공감해왔던 바로 그 이야기를 할 차례다. 좌절과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부지런히 전하고 듣는 일 말이다. 그러니까 이야기가 구원의 한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렇다면 꿈꾸었으나 이루지 못한 일들은, 사랑했으나 내 것이 될 수 없었던 것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바람의 말 아카이브에 그가 수집하고 싶었던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일어날 수도 있었던, 하지만 끝내 이뤄지지 않은 일들을 들려주는 이야기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연을 건너오지 못하고 먼지처럼 흩어진 고통과 슬픔의 기억들,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고 빛바램과 손때와 상처와 잘못 그은 선 같은 것만 보여줄 뿐인 물건들. 농무가 풍년을 기원하듯이, 두루미가 습지를 찾아가듯이, 이야기는 끝까지 들려지기를 갈망한다.


그런데 작가가 들려주는 어떤 슬픈 이야기에서도 사랑이 빠지는 일은 없다. 희재가 된 카밀라의 생모 지은의 절망과 좌절 사이에도 예쁜 사랑 이야기가 부록처럼 붙어있다. 가려진 진실은 대부분 추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사이에는 언제나 햇볕에 반짝 하고 아주 짧은 순간 그 존재를 드러내는 사금파리처럼 작고 아름다운 이야기도 숨어있다는 믿음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렇지만, 십대의 출산에 가슴 저릿하게 만드는 사랑의 기억이 녹아들어가 있는 경우가 정녕 그리 흔하겠는가?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를 찾아내는 일이 구원의 조건이라면 진실을 찾는 이들에게는 더한 절망만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게 나의 솔직한 생각이다.

 

4. 한없이 보드라운 문체의 아름다움

앞서 나열한 바대로 김연수의 이번 소설에서는 안타깝게도 주제, 구성, 인물 등 어떤 면에서도 일말의 새로움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는 없었던 게 사실이지만, 여전히 좌절과 소통에 대해 조심스레 읍조리는 변함없는 김연수를 만나는 기쁨은 내게 작은 위안을 주는 점도 있었다. 오랜 고향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떠는 것처럼 우리가 이미 서로 공감하고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또 나누며 편안한 시간을 함께하는 따듯한 느낌이랄까.... 책을 읽는 내내 그런 감성에 잠시나마 젖어 있을 수 있었던 건 꽤 좋은 느낌이었다.

 

또 빠뜨릴 수 없는 한 가지는 김연수의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아름답고 감성적인 문장들이다. 문장의 향기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 때로는 글 자체에 취하게까지 만드는 힐링 소설가로는 우리나라에서는 단연 그가 독보적이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는 그게 바로 김연수의 소설을 읽는 이유일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

 

첫 번째,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해. 고독을 즐기지. 그러니까 레드우드의 에너지에 끌려서 거기까지 걸어온 거야. 내면적이고 달의 영향권 안에 있어. 두 번째, 그래서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가장 강한 사람들과도 투쟁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아. 세 번째, 무엇보다도 네게는 쓸 이야기가 너무나 많아.”

 

흔들리는 뱃전에 서서 시내 쪽을 바라보는데, 그 불빛들이 점점 멀어지면서 정말 아름답게 반짝였다. 흩뿌린 보석 같기도 하고, 은하수 같기도 했다. 불빛이 참 예뻐요, 라고 좋아했더니 아빠는 아름다운 것들은 좀 떨어져서 봐야지 보인다고 말했다. 그 말은 전적으로 맞다. 그때가 우리 가족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걸 이제는 알겠으니까.

 

그러고 나니까 알겠더군요. 아름다움이란 솜씨의 문제이고, 솜씨는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라는 걸. 그렇구나. 괴로웠다고 생각하면 괴로운 글을 쓰는 것이고, 행복했다고 생각하면 행복한 글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태도가 진실을 만들어낸다는 긍정적인 믿음을 한없이 예쁘게 표현한 이런 문장들은 김연수만의 전매특허품이다. 김연수의 소설을 읽는 건 사실 그의 거창한 주제의식이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이런 말들의 잔치에 빠져들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가령, 지금 가려는 식당이 이테리 식당인건 아는데, 파스타나 피자가 나오고 주재료로 해산물이나 치킨이나 비프가 들어간다는 것도 아는데, 이번엔 어떤 새로운 첨가재료가 들어가서 색다른 맛을 내는 변종 메뉴가 소개될지를 기다리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그의 소설은 앞으로도 계속 나의 삶과 함께 할 것 같다는 말이다. 다만, 조금만 더 치열하게 질문하고 밀어붙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음 작품이 조금 더 느린 속도로 출간되더라도 말이다. 그가 달짝지근한 위로와 만족을 주는데 만족하는 대중소설가가 되기보다는 문학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주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램이다. 문학은 도덕 교과서나 주말 드라마와는 다른 것 아닌가? 그는 지금껏 우리나라의 가장 지적인 작가 가운데 선두주자 아니었던가!

 

2013. 0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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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구애 - 2011년 제42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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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에 갇힌 우리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 스토리의 재미도, 세부묘사의 깨알같은 즐거움도, 문장의 미학도 다 생략하고 단순한 주제의식만 덩그러니. 도무지 동일시가 안된다. 차라리 홍상수 영화를 보는게 나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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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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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란 모름지기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면서 재미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나게 그 이야기에 빠져있다가 마침내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뭔가 생각해 보게 되는 그런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다.' 작가 이기호가 이 단편집을 통해 하고싶은 말이 바로 이런 말이라면 그는 어느정도 성공한 거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계속해서 소설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뭇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유머와 익살을 빼면 이기호표 소설이 아니다. 오쿠다 히데오와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로망스가 특별한 인간이 성공하는 판타지 같은 이야기라면, 소설은 정의가 자기편이 아닌 사람, “꿈은 반드시 이루어 진다따위의 말이 해당되지 않을 실패자, 소외된 사람들, 인생에서 가진 패가 별로 없는 보통 인간들의 실패담이라고 한다. 그러니 성공하고 싶은 사람은 소설을 읽을 필요가 없다. 뭐 소설가로 성공하고 싶은 경우는 예외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소설은 진짜 가치 있는 삶이란 어떤 삶인지, 진짜 치명적인 실수란 어떤 건지를 볼 수 있는 혜안을 길러준다고 나는 믿는다. 나락으로 한없이 미끄러져 내리는 기분이 들 때 소설은 친구처럼 내 곁에 앉아서 가만히 용기를 북돋워준다. 내가 대체 어찌하면 좋은 건지, 다시 일어설 수는 있는 건지에 대해서도 슬며시 힌트를 주면서 말이다. 인간이 숭고해지는 순간에 대해, 고귀한 삶이란 게 어떤 건지에 대해 궁금하다면 오백 원도 필요 없다. 그냥 도서관에 가서 소설을 한 권 빌려보면 된다. 어릴적 동네친구가 그립거나 좀 웃고싶은 어느 날엔 이기호 소설을 집어들면 되고.

 

2013. 0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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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잘해요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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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대로, 이 소설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속의 쌍둥이 캐릭터와, 카프카 소설에 나오는 암울한 의 이미지(혹은 푸코의 원형감옥)를 떠올린다. 폭력적인 시설은 벗어날 길 없고 실체를 알 길 없는 거대한 권력 세계인 시설’(이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군부 독재시절에 있었던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을 떠올린다)에 갇힌 시봉과 는 온종일 거듭되는 온갖 폭력과 정신을 마비시키는 약에 시달리며, 무감각과 무사유를 특징으로 하는 기계인간화라는 최후의 방어막으로 겨우 생존해나간다. 이런 시설에서 모든 주체성이 말살되고 철저하게 순응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진 시봉과 는 더 이상의 직접적인 폭력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시설밖 세상으로 나와서도 시설에서의 삶의 방식을 반복하는 좀비적인 삶을 산다. 과연 이들은 잠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좀비가 아닌 인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 소설의 표지 그림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시봉과 내가 어떤 자기 인식도 없이 동일한 행위를 반복하는 꼭두각시 인생에 전환을 맞게 되는 계기는 무엇일까?

 

이 소설에서 친구 살해를 통한 주체 회복을 보는 장정일(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에서)에 따르면, 구원은 진정한 자기만의 욕망을 인식하고 친구를 배반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의 살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은 시봉의 누이 시연을 살리고 싶다는 사랑의 욕망에서 싹튼 것이다. 진정한 자신의 욕망을 되찾은 는 친구의 죽음을 발판으로, 그 누이와 스스로를 죽음에서 구한다. 아직 온전한 기력을 되찾지 못한 시연을 업고 병원 밖으로 걸어 나가는 는 아무리 열심히 걷고 걸어도 시연과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병원의 파란 십자가 네온의 시야를 아직 벗어나지 못한 채 소설의 막은 내려지고 말지만, 계속해서 앞을 향해 걷는 것 이외에 이들에게 다른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어쨌건 는 이제 계속해서 앞을 걸어갈 힘을 얻었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닐까? 좀비처럼 빙글빙글 떠도는 게 아니라 길을 찾아 앞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힘 말이다.

 

소설의 또 다른 한 축은 죄와 벌에 대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온종일 구타를 당하며 시설에서 배운 건 자신이 육체적 징벌을 받는 이유, 즉 자신의 를 찾아내는 일이가 때문이다. ‘을 스스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일단 을 먼저 받고(구타를 당하고), 그 이유를 찾아내어(만들어내어) 고백하고 사과를 한 다음, 실재로 스스로 고백한 잘못을 저지르는, 우리의 상식과는 정반대로 전도된 행위가 반복적으로 행해진다. 나아가, 이들은 타인의 를 고백 받아 을 대신 받아주기도 한다. 얼핏 보기에, 이는 마치 편협한 고대 신앙이 성립하는 방식을 은유하는 것만 같다.

 

유아기의 신앙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하는 온갖 불행이 나의 에 대한 징벌임을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고 나서, 일단 전능하신 하나님께 죄인임을 고백한 다음,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찬찬히 헤아려 본다. 죄는 널려 있으므로 별로 고민할 것도 없다. 그런 다음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확신하기 위해, 즉 벌 받는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무의식의 발로로 죄를 짓는다. 그렇게 신앙은 완결된다.

 

그런데 바로 이런 기괴한 전도가 바로 예수가 율법을 폐지하러 왔다고 선포한 이유 아닌가? 율법이 죄를 유도하는 통로가 되고 있음이 무려 2천 년 전에 간파되었단 말이다. 예수는 십계명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금지 규칙을 나열한 율법’(금지와 처벌)이 바로 와 죽음을 가져온 원흉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하고, 그 자리에 사랑을 들여놓을 것을 역설한다. 살아있는 한 어떤 인간도 겪을 수밖에 없는 불행과 고통에 대해, 예수는 이를 율법을 어긴 의 표식으로 보지 않고 무한한 연민과 자비심으로 껴안으려 한다. 예수의 연민을 받아들이는 인간이라면, 그에게서는 를 지을 동기 자체가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논리로 말이다.

 

과연 모든 이들이 신의 사랑을 인지하고 받아들인다면 가 사라질 것인지, 이런 세상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에 관한 논의는 접어두고, 이 소설이 기독교의 원죄론을 비꼬기 위해 죄와 벌의 은유를 가져온 것이라면, 신학에 대한 저자의 이해가 너무 얄팍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는 말을 나는 하고 싶은 것이다.

 

종교에 대한 비꼬기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에 대한 성찰을 철학적이기보다는 사회 현상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가령 와 같은 방에 수감되어 있다가 자살한 이가 바로 의 아버지인지를 시설 원장에게 찾아가 묻자, 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원장의 입에서 나온 다음과 같은 말은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죄는 모른 척해야 잊혀지는 법이거든.” 아버지가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방식이 정말 자살밖에 없었을 지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우뚱해지지만, 아버지가 자신의 죄를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만큼은 원장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죄는 억지 자백의 강요를 통해 요술처럼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망각과 부인을 통해 마술처럼 사라지기도 하는 게 바로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사이좋던 정육점 주인과 과일가계 주인은 와 시봉의 집요한 사과 요청으로 인해 점점 죄의식에 시달려 불화를 겪는 반면, 시설 원장과 두 복지사는 자신의 죄를 끝내 부인함으로써 무죄 또는 가벼운 형량을 받게 되는 것처럼. 자신의 죄를 대면하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는 김밥집 주인 아들과 가족을 버리고 떠난 가장 사이의 화해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통해서 드러난다. 진정한 속죄는 스스로 그 죄의 결과와 정면으로 대면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이게 전부라면 사실 이건 너무 뻔한 이야기 아닌가? 시스템의 꼭두각시 인형처럼 살아가는 비주체적인 우리 인간의 모습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진정한 속죄의 어려움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소재나 인물만큼 신선하지 못한 이 주제 마저도 기대만큼 잘 직조되지 못한 듯한 느낌에 많이 아쉬웠던 게 사실이다. 만약, 이소설이 자기 자신에게 숨겨진 욕망을 깨닫고 자기 의지로 죄를 짓는 일이 바로 주체적 삶의 출발점이 된다는 생의 아이러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를 망각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며 죄의식을 평생의 동반자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게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가장 중요한 인간 윤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려는 의도로 쓰여진 소설이었다면, 작가는 좀 더 분투했어야 했다.

 

2013. 0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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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꿈이었을까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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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현실인 속에서의 , 기시감, 고독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


전반에 흐르는 몽상적 분위기로 낯설게 하기에는 성공하나, 크게 공명을 울리는 부분은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란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조차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목적도 방향도 없이 그저 그렇게 속에서처럼 이리저리 둥둥 떠다니는, 형체가 불분명한 자아의 허우적거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가? 방향과 실체가 없으니 만남도 일시적일 밖에 없을 . 사랑 역시 찰나적이다.


말미에 작가는 준의 결혼 생활을 생명인 나비를 날려 보낸 허물, 껍데기라고 명명한다. 자유롭게  떠돌아 다니는 것이 본질인 인간의 영혼을 일상이라는 견고한 말뚝으로대 붙잡아 두려 한다면 본질은  날려 보낸 껍데기 같은 일상만 부여잡고 살게 되리라는 말이다.


지나치게 작위적인 우연과 불친절하기만 , 꿈과 현실의 지루한 넒나듦 끝에 마침내 우리에게 무척이나 친근한 도식이 형체를 드러낸다. 자유로운 영혼은 고독하다. 고독은 자체로 인간을 지치게 만들고 사랑을 갈구하게 만드는 특성이 있다. 그러나 경험을 통해 결국 사랑의 완성이란 불가능함을 깨닫는다. 대신 일상은 고독을 잊게 주는 특효약이다. 고독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몸부림으로 결혼 생활이라는 일상을 선택한다. 영혼의 자유를 댓가로 말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영혼은 자유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전과는 반대로, 이제 자유에의, 고독에의 향수와 갈망을 간직한 일상에 지쳐간다….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진부한 인생의 아이러니! 과연 우리는 같은 고독과 사랑의 우로보로스로부터 빠져나올 있을까? 작가의 대답은 부정적인 같다. 나는 작가의 이런 태도가 정직하다고 생각한다.     


고독과 사랑과 일상의 아이러니에 대한 생각은 별반 새로울 것이 없지만 대신 작가의 적은 사랑에 대한 가지 아포리즘은 생각해 볼만 하다.

새로운 애인을 만나면 헤어진 애인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갈급을 뜻하는 걸까. 그런 연유로 사랑이란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리는 모양이다.”

                                                            

작가의 말대로 정말 인생의 진리는 되나 보다. 위의 도식에 밀란 쿤데라의 통찰을 끼워 넣을 수도 있겠다. 갈급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자신이 하고픈 이야기, 자신이 만든 상대방의 이미지)만을 전면에 내세우기 때문에 상대방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게 하고 따라서 이해, 소통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홍상수의 영화 <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남자 주인공이 무턱대고 화가의 젊은 아내 유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우스꽝스런 장면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갈급이 알맹이인 낭만적 사랑은 애초에 실패가 예정된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진정 수긍할 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젊은 날의 경험을 통해 희미하게라도 이런 사랑의 허무함을 깨닫고는 결연하게 인생의 다음 단계, 가족 만들기라는 편리한 공식에 투항하고 마는게 아닐까? 그러니까 애초에 가족이란 낭만적 이상이 아니라 오히려 허무주의를 기반으로 한다고 말할 있으리라이 허무를 철저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끊임없이 낭만적 사랑의 기억을 기웃거리며 상실감에 허우적댈 것이다. 그러니 결혼 남녀들이여, 낭만적 사랑의 허무를 철저하게 긍정하라!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고독과 소통에의 열망이 일상이라는 괴물에 완전히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서 여전히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자명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도저히 달아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실존적 과제인 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 내 감정을 완전히 동화시키는데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 소설의 주제의식 만큼은 모두가 깊이 고민해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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