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김연수를 사랑하는 팬을 자처하면서도 이번에는 한동안 그의 신작을 구입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작년에 작가가 어느 팟케스트 방송에 나와 자신의 신작 소설 내용과 주제에 관해 비교적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걸 듣게 된 적이 있는데, 어쩐지 안 읽어봐도 알 것만 같은 살짝 뻔한 내용에다가 감상주의로 빠졌을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다작 작가라 할 수 있는 그의 작품을 지금껏 한 권을 제외하고 모조리 읽어 온 자칭 김연수빠였던 내가 원더보이를 읽고 나서 고개 들기 시작한 불안이 내 앞을 가로막고 나섰던 거다. 그러나... 팬으로서의 의무를 끝내 저버릴 수는 없었다고나 할까. ^^;;

 

안타깝게도, 우려는 어느 정도 현실로 드러났다. 책을 덮고 나자 마치 재미있고 적당한 감동을 주는 헐리웃 영화 한 편을 보고 난 기분이 들었지만, 뇌와 오감을 자극하는 그 무엇(문학적 매혹이라고나 할까...?) 혹은 뒤통수를 내려치는 깨달음 같은 건 없었다. 폴 오스터 식의 우연적인 얽히고설킴이 이어지고 약간의 반전 비슷한 것도 있고 줄리언 반즈 식의 비밀과 진실 추적도 있지만, 아쉽게도 독자로서의 내가 그로 인해 깜짝 놀라게 된다거나 손에 땀을 쥐게 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책장을 덮고 나서 한동안 멍해지게 만드는 삶의 아이러니도, 그렇다고 가슴이 먹먹해지게 만드는 처절한 회한도 없었다. 소설에 왜 이리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걸까?

 

1. 시점의 변화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혹 부적절한 시점의 이동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 소설에서는 시점이 여러 차례 바뀐다. 주인공 카밀라의 1인칭 화법에서 시작된 소설은 중반부에는 2인칭 화법(카밀라의 생모 정지은의 시점)이라는 독특한 시점으로, 다음엔 희재의 친구들인 우리의 시점, 그리고 마지막엔 또 다른 희재의 시점으로 바뀐다. 그런데 이런 시점의 다양한 변화는 동일한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기 위해서는 적절할지 몰라도, 단순히 스토리(진실이 점차 드러나는)의 전개를 떠맡는 역할을 주도하는 사람이 바뀌는 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오히려 소설에의 몰입을 떨어뜨리는 효과를 주는 게 아닐까? 만약 마지막에 한 두 페이지라도 다시 한 번 카밀라의 시점으로 돌아왔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시점 자체가 이동하다 보니, 진실과 점점 가까이 대면하게 되면서 극심한 내면적 갈등을 겪었을 카밀라(희재)의 내적 격동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아 이 또한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한 요인이 되었던 것 같다. 그녀가 (한동안은 점점 추해지는 모습으로) 점차 그 실체를 드러내는 진실을 마주하는 동안 느꼈을 내밀한 고통을 밀도 있게 경험하기를 기다렸던 나는 좀 김이 빠져버렸던 게 사실이니까.

 

2. 소문과 소통

이 소설에서 애초에 죄를 불러온 건 두 가지 마음이다. 타인의 명예와 안위를 위협해서라도 자신의 명예와 안위를 지키려는 본능과, 분노로 인한 복수심. 이 두 가지가 약간의 불운, 약간의 어리석음과 만나면 끔찍하고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이 만들어진다. 그리하여 때로는 사소한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재난을 몰고 오는 것이다. 신혜숙과 미옥은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타인에게 고통을 주거나 자신의 불운에 대한 복수심으로 죄 없는 타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인물들이다. 이들이 타인에게 상처 주는 방식에 대해 자연스레 줄리언 반즈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떠올리는 건 나 뿐일까? 그리고 악의와 무지가 결합하여 낳은 아기라고 할 수 있는 소문이 때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다는 내용은 이미 우리에게 충분히 낯익은 <올드보이>의 전설 아닌가?

 

저는 소문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서워요. 사람들은 자기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 들여다본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자기 마음 하나 제대로 모르는 바보들이니까요. 저는 자기 마음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들은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그 무지한 마음이 무서울 뿐이죠.”

 

대부분의 인간들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절망과 고통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무지와 이기심은 종종 고통과 절망에 빠진 타인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사악한 흉기로 돌변한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수라’ 세계의 가장 적나라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녕,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용기와 중단 없는 노력만이 구원의 동아줄이 되어줄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른다.

 

“...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건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날개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요. 꿈과 같은 일이라 네 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야 하나도 어렵지 않지만, 결국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날개는 왜 존재하는 것인가? 그 이유를 잘 알아야만 합니다. 날개는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날개가 없었다면, 하늘을 난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테니까요.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생각도 못했을 테지요.”

 

그런데 자신의 절망과 타인의 절망이 만나 마술 같은 이해와 소통에 이르는 순간을, 불가피하게 일찍 헤어진 엄마와 자식 사이만큼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관계가 또 있을까! 이 소설이 진부함을 무릅쓰고 쓰여졌다기 보다는 바로 그 진부함에 기대어 쓰여진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거두기 어려운 이유다.

 

또 이런 주제를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진실 찾기 행위를 통해 보여주는 다소 흔한 추리 소설적 방식 역시 아쉽게도 줄리언 반즈의 소설에서처럼 강한 긴장감을 유발하지도, 치명적인 충격을 주지도 못했다.

 

3. 이야기를 통한 구원

그런데 왜 인생은 이다지도 짧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건 모두에게 인생은 한 번뿐이기 때문이겠지. 처음부터 제대로 산다면 인생은 한 번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단번에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단 한 번뿐인 인생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는, 그게 제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는 모두 결정적이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우리는 그런 결정적인 실수를 수없이 저지른다는 걸 이제는 잘 알겠다. 그러니 한 번의 삶은 너무나 부족하다. 세 번쯤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번의 삶은 살아보지 않은 삶이나 마찬가지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미 사유된 바 있었던 삶의 진리다. 질문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차피 예외 없이 우리 모두는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는 존재들이니 삶에는 큰 의미란 게 없다는 건가, 아니면 최대한 실수를 적게 하기위해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인가? 소설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내내 이 문제를 고민하며 오락가락했던 쿤데라의 토마시와는 달리, 십대 소녀 지은의 단호한 선택은 후자였다.

 

난 최선을 다할 거야. 그런 소리들 사이에서 한 소녀의 목소리도 들렸다. 한 번의 인생으로는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에 들리는 목소리인 셈이었다. 난 최선을 다할 거야. 그건 그날 새벽, 조선소 사장에게 부탁하면 아버지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양관으로 달려가면서 지은이 수없이 읊조렸던 말이라는 걸 이제우리는 알게 됐다.

 

물론 이렇게 영민한 지은도 인생에 뜻대로 되는 일이 오히려 흔치 않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더많은 좌절을 겪어야 했으리라.

 

우리는 이제 안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이룰 수 없는 일들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을. 아니, 거의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다는 걸.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이제 우리가 그동안 김연수의 숱한 단편들을 통해서 공감해왔던 바로 그 이야기를 할 차례다. 좌절과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부지런히 전하고 듣는 일 말이다. 그러니까 이야기가 구원의 한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렇다면 꿈꾸었으나 이루지 못한 일들은, 사랑했으나 내 것이 될 수 없었던 것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바람의 말 아카이브에 그가 수집하고 싶었던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일어날 수도 있었던, 하지만 끝내 이뤄지지 않은 일들을 들려주는 이야기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연을 건너오지 못하고 먼지처럼 흩어진 고통과 슬픔의 기억들,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고 빛바램과 손때와 상처와 잘못 그은 선 같은 것만 보여줄 뿐인 물건들. 농무가 풍년을 기원하듯이, 두루미가 습지를 찾아가듯이, 이야기는 끝까지 들려지기를 갈망한다.


그런데 작가가 들려주는 어떤 슬픈 이야기에서도 사랑이 빠지는 일은 없다. 희재가 된 카밀라의 생모 지은의 절망과 좌절 사이에도 예쁜 사랑 이야기가 부록처럼 붙어있다. 가려진 진실은 대부분 추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사이에는 언제나 햇볕에 반짝 하고 아주 짧은 순간 그 존재를 드러내는 사금파리처럼 작고 아름다운 이야기도 숨어있다는 믿음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렇지만, 십대의 출산에 가슴 저릿하게 만드는 사랑의 기억이 녹아들어가 있는 경우가 정녕 그리 흔하겠는가?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를 찾아내는 일이 구원의 조건이라면 진실을 찾는 이들에게는 더한 절망만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게 나의 솔직한 생각이다.

 

4. 한없이 보드라운 문체의 아름다움

앞서 나열한 바대로 김연수의 이번 소설에서는 안타깝게도 주제, 구성, 인물 등 어떤 면에서도 일말의 새로움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는 없었던 게 사실이지만, 여전히 좌절과 소통에 대해 조심스레 읍조리는 변함없는 김연수를 만나는 기쁨은 내게 작은 위안을 주는 점도 있었다. 오랜 고향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떠는 것처럼 우리가 이미 서로 공감하고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또 나누며 편안한 시간을 함께하는 따듯한 느낌이랄까.... 책을 읽는 내내 그런 감성에 잠시나마 젖어 있을 수 있었던 건 꽤 좋은 느낌이었다.

 

또 빠뜨릴 수 없는 한 가지는 김연수의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아름답고 감성적인 문장들이다. 문장의 향기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 때로는 글 자체에 취하게까지 만드는 힐링 소설가로는 우리나라에서는 단연 그가 독보적이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는 그게 바로 김연수의 소설을 읽는 이유일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

 

첫 번째,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해. 고독을 즐기지. 그러니까 레드우드의 에너지에 끌려서 거기까지 걸어온 거야. 내면적이고 달의 영향권 안에 있어. 두 번째, 그래서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가장 강한 사람들과도 투쟁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아. 세 번째, 무엇보다도 네게는 쓸 이야기가 너무나 많아.”

 

흔들리는 뱃전에 서서 시내 쪽을 바라보는데, 그 불빛들이 점점 멀어지면서 정말 아름답게 반짝였다. 흩뿌린 보석 같기도 하고, 은하수 같기도 했다. 불빛이 참 예뻐요, 라고 좋아했더니 아빠는 아름다운 것들은 좀 떨어져서 봐야지 보인다고 말했다. 그 말은 전적으로 맞다. 그때가 우리 가족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걸 이제는 알겠으니까.

 

그러고 나니까 알겠더군요. 아름다움이란 솜씨의 문제이고, 솜씨는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라는 걸. 그렇구나. 괴로웠다고 생각하면 괴로운 글을 쓰는 것이고, 행복했다고 생각하면 행복한 글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태도가 진실을 만들어낸다는 긍정적인 믿음을 한없이 예쁘게 표현한 이런 문장들은 김연수만의 전매특허품이다. 김연수의 소설을 읽는 건 사실 그의 거창한 주제의식이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이런 말들의 잔치에 빠져들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가령, 지금 가려는 식당이 이테리 식당인건 아는데, 파스타나 피자가 나오고 주재료로 해산물이나 치킨이나 비프가 들어간다는 것도 아는데, 이번엔 어떤 새로운 첨가재료가 들어가서 색다른 맛을 내는 변종 메뉴가 소개될지를 기다리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그의 소설은 앞으로도 계속 나의 삶과 함께 할 것 같다는 말이다. 다만, 조금만 더 치열하게 질문하고 밀어붙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음 작품이 조금 더 느린 속도로 출간되더라도 말이다. 그가 달짝지근한 위로와 만족을 주는데 만족하는 대중소설가가 되기보다는 문학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주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램이다. 문학은 도덕 교과서나 주말 드라마와는 다른 것 아닌가? 그는 지금껏 우리나라의 가장 지적인 작가 가운데 선두주자 아니었던가!

 

2013. 0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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