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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어린이 성경 1 - 신약
박종관 그림, 장길수 글 / 문공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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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 만화는 ‘문공사’에서 만들었는데, 신약은 2권, 구약은 5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선 신약 1권만 구입하여 아들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요즘 어린이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것은 만화책이던군요. 그런데, 잠시 ‘알라딘’ 인터넷서점에서 조회해 봤더니 이 만화책을 그린 사람이 박종관인데, 이 작가는 요즘 만화계에서 엄청 인기가 있는 과학학습만화인 "why?" 시리즈(35권으로 구성)를 그린 그 작가인 것을 알았습니다. 어쩐지 그림이 좋더라니까요..(준성이도 이 시리즈 3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 1권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사역,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모습까지 그리고 있는데, 제가 오늘 아침에 읽어보니 너무 은혜스럽고 감동스러웠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들의 행간의 뜻을 그림으로 잘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들이 현실감 있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만화가인 박종관과 공동작업을 한 이동호나 구성을 하였다는 장길수의 약력을 보면 성경만화 작업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데도 당시 예루살렘의 시대상황과 배경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6-7세 유치부에서 초등학교 저학년인 1,2,3학년들에게 적합할 것 같은데, 사실 어른들도 간단하게 읽으면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준성엄마가 이 책을 먼저 읽고 있습니다. 이만한 책을 보지 못했는데, 현재 ‘알라딘’에서 30퍼센트나 할인판매를 하고 있네요.(그래서 즉시 나머지 책들을 주문하였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읽히면 좋은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옥의 티가 있군요. 헤롯 대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셉이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이집트에서 ‘갈릴리 나사렛’ 마을로 돌아왔다는 내용을 ‘베들레헴 나사렛’으로 잘못 표시하였고,(p.43) 예수님께서 첫 번째 이적을 베푸신 ‘가나’ 혼인잔치를 ‘가나안’으로 잘못 표시하였군요.(p.64. 76) 또한 예수님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만화책(p.104)에서는 쉽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성경에는 못 알아들을 사람에게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눅8:10)


이러한 실수는 사소하고, 전체적인 책의 내용은 너무나 성경적이고 은혜스럽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황 및 기적을 행하시는 상황,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상황 및 예수님이 죽음을 예고하시는 상황 등등. 아무튼 성경에 나오는 내용들이 너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꼭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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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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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화책은 참으로 경이로운 책입니다. 어떻게 만화를 통하여 역사적인 문제를 사실적이면서도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아트 슈피겔만’인데, 1986년 <쥐> 1권이 완간되었고, 그후 미국이나 여러 나라에서 찬사를 받았으며, 2권은 1992년에 완간되었습니다.(그 해 퓰리처상을 수상함) 이 책은 나치의 ‘유대인학살’을 다루었는데, 2차대전 중 유대인학살(약 6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에서 살아남은 폴란드계 유대인인, 저자의 부친 ‘블라덱 슈피겔만’의 생존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일단 이 만화책을 펼치게 되면 그림이 낯설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주로 이현세, 허영만, 박봉성 등 국내작가의 만화들만 봤기 때문에 이 책의 그림들이 낯설게 느껴질 것이고, 특이한 것은 유대인을 쥐, 나치를 고양이, 폴란드인을 돼지, 미군을 개 등 등장인물을 동물로 묘사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형식으로도 유대인학살의 내용을 다른 어느 매체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 비평가들이나 독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은 것입니다.(작가가 1권을 그리는데 8년, 완간하는데 13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아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 당시 독일군 나치 치하에 있던 유대인들은 고양이 앞에 쥐신세였습니다. 이 책을 보면서 어떻게 인간이 이보다 악할 수 있을까? 아니면 어떻게 인간이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생존할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약 독일군 상황이였으면 그런 악을 행하였을까? 유대인이였으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를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당시 제가 독일군이였다면 명령에 불복종하면 총살감이였기 때문에 상부의 지시에 따라(즐기면서 하지는 않았더라도) 유대인학살에 동참하였을 것 같고(권세를 거슬려 행동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유대인이였다면 포로로 잡히기도 전에 전쟁 중 죽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이 책의 주인공 블라덱은 정말 신의 섭리나 우연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블라덱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요인들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생존본능,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 돈, 그리고 신의 도움(아니면 우연) 등으로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폴란드의 작은 도시에서 영세공장을 운영하던 블라덱이 2차대전에 참전하여 독일군 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상황, 그후 게토(유대인 거주지역)에서 살아남은 상황, 독일군의 체포를 피해 도망 다니던 상황,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상황, 종전후 퇴각하는 독일군에게서 살아남은 상황 등은 한편의 드라마처럼 느껴질 정도로 극적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당시 유대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 반유대주의는 당시 상황뿐만 아니라 2천년을 거슬려 올라가는 뿌리 깊은 것입니다. ‘유대인의 역사’(폴 존슨, 살림출판사)를 보면, 2천년 동안 유대인들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게토도 2차대전시기에 처음 생긴 것이 아니라 중세 때,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정녕 이들에 대한 박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대가를 자신뿐만 아니라 후손에게도 받겠다는 자신들의 외침의 성취일까요?(마27:25) 

같은 포로라도 비유대계 폴란드인의 지위와 유대계 폴란드인의 지위는 하늘과 땅차이였습니다. 무엇이 그토록 히틀러나 나치로 하여금 유대인들을 증오하게 한 것일까요? 하기야 당시 시대적인 분위기 자체가 나치뿐만 아니라 비유대계 폴란드인들도 유대계 폴란드인들을 증오하고 멸시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새삼 시대상황을 자각하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전쟁 중 유대인들을 숨겨주었다가 독일군에게 발각되면 죽을 수도 있는데, 목숨 걸고 이들을 숨겨주는 폴란드인들을 볼 때 대단한 용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돈(대가)을 받고 숨겨주는 사람, 숨겨주기로 약속하고 돈을 받고도 독일군에게 고발하는 사람 등 인간군상들을 이 책에서 보면서 인간에 대한 믿음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시 주인공 블라덱 및 유대인들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였는지 책의 내용 중 몇 대목을 보면, 수용소에서 작업을 나가는 유대인의 머리에 썼던 모자를 독일군 병사가 쳐서 땅바닥에 떨어지게 하여, 그 유대인이 모자를 줍게 한 후 대열을 이탈하였다며 총으로 쏴 탈영병을 죽였다고 하면서 며칠간 휴가를 가곤 하였답니다. 또한 영화 ‘쉰들러리스트’에 보면, 독일군 간부가 사격연습용으로 유대인들을 쏴 죽이는 장면도 나옵니다. 

하루에 멀건 수프 조금과 빵 한 조각을 주고 강제노동을 시키면서도 계속 말라가는 유대인들을 보고 노동능력이 없다면서 선별작업을 통해 가스실로 보내는 상황에서 안 마른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물만 먹어도 살이 찌는 체질인가요? (무척 말란 저로서는 1차로 선별 당하였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가스실에서 처리하는 것도 포화상태이고 시간도 걸려 나중에는 구덩이를 파서 그곳에 생매장까지 시키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블라덱이 하는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그래도 이 구덩이에 처넣어지기 전에 가스실에서 끝을 본 사람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지. 다른 사람들은 살아서 무덤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으니까...” 

결국 블라덱의 부모님과 친척, 아내인 ‘아냐’의 부모님과 친척, 그리고 아들 ‘리슈’도 전쟁 중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 전부 죽습니다만 블라덱과 아냐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블라덱과 아냐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1968년에 아냐는 자살을 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으로 인간 이성의 위기를 봅니다. 역사가 진보한다는 생각은 인간의 희망일 뿐인데도 아직 우리들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들을 애써 외면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지금도 같은 일들이 세계 곳곳에서 되풀이되고 있지요. 

정말 역설적인 것은 그렇게 인종핍박을 받았던 유대인들이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똑 같은 이유로 팔레스타인인들을 핍박한다는 사실입니다. 1948년 2천년만에 나라를 세운 이스라엘이 그곳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죽이고, 강제로 추방하고, 팔레스타인들을 위한 게토에 가두어놓은 상황을 현재 실시간으로 목도할 때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자신들이 그렇게 인종핍박을 받고도 다른 인종을 핍박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여기에 대해서는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이라는 만화책이 실상을 생생히 전하는데, 그 감동 또한 큽니다.) 

결론은 나치의 잔혹사(인간 이성의 잔혹사)를 만화로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만화라고 얕보면 안됩니다. 이 만화책은 예술입니다.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이 책 보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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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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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은 1991년경 겨울에 작가가 직접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찾아가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실상을 탐사한 내용을 그린 만화책입니다. 이 만화책은 (제가 생각하기에) 앞서 소개한 <쥐>와 짝을 이루는 만화책인데, <쥐>에서는 비유대인들이 유대인들을 박해하였다면 이번에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인종적으로 박해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역사의 역설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2천년 동안이나 박해받던 유대인들, 한 세대(20-30년) 전에 나치에 의해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엄청난 학살을 당하였던 그 피해자가 이번에는 가해자로 변해서 팔레스타인을 박해하고 있으니, 어찌 이를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합리적 존재라는 데에 대해서 저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인간의 비합리적인 행동들을 역사속에서, 현실속에서 볼 때마다 정말 인간은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작가가 전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실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합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에게 박해받던 상황과 비교하면, 그래도 우리 형편이 나았다고 생각이 될 정도로 이스라엘의 박해는 심합니다.

작년(2007.9.15.)에 MBC스페셜에서 <장벽>이라는 방송을 하였는데, 의미 있게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스라엘 내의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말이 자치지구이지 사실 옛날 유대인들이 강제로 격리되었던 ‘게토’와 같은 격리지역입니다)인 요르단 서안지구에 높이 10미터, 총 길이 700킬로미터의 거대 분리장벽을 2002년경부터 설치하고 전기철조망을 설치하여 외부와 차단시키고, 또한 세계 최대의 감옥으로 불리는 가자지구의 출입을 통제(명분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에 주민들이 동조한다는 것임)하여 가족들과 생이별한 수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생활상을 보았습니다. (이 방송은 인터넷에서 ‘다시보기’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작가가 방문한 1991년경보다 현재 팔레스타인의 형편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때는 출입증만 있으면 자유롭게 지역을 오갈 수는 있었으나 현재는 이동할 자유가 거의 없는 것입니다. 현재도 가자지구는 이스라엘 군의 폭격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녕 화해할 수 없을까요? 이 뿌리 깊은 적대감은 역사상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시기로 거슬려 올라갈 수 있고, 아브라함 시대의 이삭과 이스마엘 시기로 더 거슬려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종말의 때에는 열방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예루살렘의 시온산에서 모여 주를 찬양한다고 하였는데, 그때가 되어야 진정한 화해가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약속의 땅 예루살렘에 샬롬, 평화가 없습니다. 마치 교회에 성도가 없듯이?)


이 만화책은 우리에게 팔레스타인의 실상을 알게 해줍니다. 알면 어떻게 할 것이냐구요? 그렇게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알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책은 유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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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갈라디아서
진 에드워즈 지음, 전의우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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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에 서점에서 발견하고 손에 들었다가 다시 놓았던 이 책을 1개월 후 다시 손에 들고 이번에는 계산대로 간 것이 저에게는 큰 행운이였습니다. 누군가 책에도 운명이 있다고 말하였듯이 책과 독자와도 인연이 있는가 봅니다. 그다음날 이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는데, 중간에 책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들 때문에 가슴 설레이는 기분을 오랜만에 가져보았습니다.

 

이 책은 바울의 동역자 실라의 입을 빌려,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디아 지방으로 1차 전도여행을 떠났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책의 제목은 ‘이야기 갈라디아서’이지만 원서의 제목은 ‘실라의 일기’입니다. 실라의 회상일기 형식으로 당시 바울의 1차 전도여행 상황과 ‘갈라디아서’를 작성하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실라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에 동행하지만 이 책에서는 1차 전도여행 상황을 바울과 바나바로부터 들어 나중에 독자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은 사도행전 13-15장에 나오는데, 이 성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가가 이야기를 창작한 것이 이 책입니다. 작가의 능력이 뛰어난 게 당시 바울 및 이스라엘, 이방인의 상황, 갈라디아 교회들이 처한 상황 및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배경을 너무나 생생하게 재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당시 현장에 있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이 책을 읽고 관련 성경내용을 읽으면 성경 말씀이 2,000년 전으로 돌아가 살아 숨쉴 것입니다.


처음 시작부분은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마가(마가복음의 저자)가 안디옥 교회의 파송으로 1차 전도여행을 떠나는 모습이 나오는데, 처음 구브로 섬에서는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라고 바울이 자서전적으로 서술하는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매질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는 정말 자신이 직접 안 맞아보고는 모르겠지요?


구브로 섬에는 이미 복음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오순절 성령강림 때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받고 돌아간 신자들이 있었음) 복음이 전혀 전하여지지 않은 곳(갈라디아 지방)으로 가기 위하여 배를 타고 앗달리아 및 버가로 가는데, 여러분들도 바울과 같이 이 배에 오르면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의 의미가 팍 다가올 것입니다. 이곳에서 망가진 몸을 회복한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마가는 이곳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감) 당시 복음이 전하여지지 않은 갈라디아 지방으로 가기 위하여 험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우여곡절 끝에 바울과 바나바는 로마제국 영토에서도 험하기로 소문나고, 시민들의 대부분이 노예와 자유인(해방된 노예)으로 구성되어 있는 위 갈라디아 지방 중 첫 번째 도시인 비시디아 안디옥(유대인 회당으로 찾아감)에서 첫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대부분이 노예)가 생기게 되고, 이곳에 에클레시아(교회)를 세워지게 된 후 4개월을 머물면서 율법에서 자유한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이고니온으로 떠나게 됩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이고니온에서도 4개월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과 이방인, 관원들이 돌로 치려하여 다시 루스드라로 옮겨 5개월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을 계기로 이곳 사람들이 전설에 따라 바나바를 제우스신으로, 바울을 헤르메스(신의 메세지를 전하는 전령)로 착각하여 신으로 섬기려는 사건도 발생합니다. 루스드라에는 디모데가 살고 있었는데, 바울은 여기서 디모데와 첫대면하고, 디모데는 바울의 전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그런데,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핍박하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까지 따라와서 바울을 돌로 치고,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시 일어나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참 대단합니다.


그후 더베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올 때 편한 육로를 버리고 다시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을 거치면서 교회들을 권면하고 앗달리아에서 배를 타고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오면서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 네 곳(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에서 전한 복음은 ‘율법의 행위’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지금 현대상황에서 이 말씀은 당연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그러나 아직도 율법주의적 복음이 도처에 있습니다.) 2천년전 갈라디아 지방의 이방인들에게는 이 복음이 분명 혁명적인 내용이였고, 할례와 율법준수를 자랑으로 여기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모독적인 내용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유대인들은, 예수도 믿고 할례도 받고 율법도 준수해야 구원받는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수리아 안디옥을 방문한 베드로의 외식을 책망하고(당시 베드로의 초석적인 지위와 바울의 지위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베드로가 우위였던 상황임을 염두에 두어야 함) 결국 예루살렘 회의가 열리게 되는 상황이 됩니다. 그 회의에서 이방인들도 할례없이 구원받는다는 내용을 확정하고 그 내용을 이방인 신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편지로 써  유다와 실라를 이방인 교회로 파송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의 적대자(책에서는 유대인이고 바리새인으로 묘사됨)가 갈라디아의 네 교회에 차례로 방문하여 그곳 신자들에게 온갖 감언이설로 바울을 비방하고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도 믿고 할례도 받고 율법도 지켜야 된다고 유혹(책에 보면 이 적대자의 감언이설이 얼마나 교묘한지, 정말 저도 모르게 넘어갈 정도로 잘 설명되어 있음)하게 되고, 갈라디아 교회들이 갈등하는 상황 중에 바울은 실라와 함께 위 교회들을 방문하기에 앞서 편지를 써 부치는데, 그 편지가 ‘갈라디아서’인 것입니다.

 

바울이 성령의 인도따라 목숨 걸고 세운 교회이지만 오래 머물지 못하여 아직 연약한 가운데 있는 갈라디아 교회들을 향한 바울의 외침은 거칠고, 가격하였습니다. 이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에게 받은 ‘이방인의 사도’라는 사명을 그대로 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이 복음 때문에 오늘 저도 할례없이, 율법 준수없이, 예수 믿어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너무 감사한 일이지요. 그런데, 이 갈라디아서의 메세지가 세월이 지나면서 현대 교회들에게는 너무 순화된 것이 아닌가 반성해봅니다.

 

아무튼 이 책은 성경에 표현된 사도행전의 내용 및 바울의 자전적 서술들, 갈라디아서의 내용들을 다시 보게 합니다. 뭐랄까 성경의 글자가 살아 움직인다고 해야 되나...(너무 과찬인가?) 이 책의 작가인 ‘진 에드워드’의 책들이 우리나라에 여러 권 번역되어 있던데, 이 책에 반하여 몇 권을 주문하여 두었습니다.


(그중 ‘이야기 사도행전’은 사도행전 내용을 그린 것 같은데,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읽었더라면 연대기순으로 더 적합하였을 거라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이 작가는 사도행전 이야기들을 시리즈로 책을 낸 것 같은데, 디도의 일기, 디모데의 일기, 브리스길라의 일기, 가이오의 일기 등도 하루 빨리 번역되길 바랍니다.)


당시 바울의 치열하였던 갈라디아 교회의 전도 상황을 이보다 더 리얼하게 묘사한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을 것 같습니다. 강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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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책 + DVD) - 김우현 다큐북 김우현의 팔복 시리즈 2
김우현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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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김우현 다큐멘터리 감독의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이하 ‘애통’이라 표현함)라는 다큐북을 읽었는데, 그 감동이 커서 몇 자 적어보려고 합니다. 이 책은 인터넷 서점에서 많이 선전하였으나 선뜻 구매를 하지 못하였다가 목사님을 통하여 소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김우현 감독이 기획하고 있는 “팔복”시리즈 중 두 번째 책으로, 몇 명의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DVD 영상물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세 번째 책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는 근간 예정)


저번에 “팔복”시리즈 중 첫 번째 책인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이하 ‘가난’이라 표현함)도 읽었는데, 우리에겐 너무 유명한 맨발천사 최춘선 할아버지 이야기를 담고 있었고, 책이 나온 이후의 후일담은 ‘애통’에도 나와 있습니다.


위 책들을 읽다보면, 김우현 감독에 대해서 친근감이 생기는데, 그 원인은 김우현 감독이 좋아하였던 작가들이 저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였기때문이였고, 김 감독이 책을 많이 읽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글을 아주 잘 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영상물 보다는 책의 내용이 더 좋았습니다.


김 감독이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예수님의 “팔복” 이야기를 매개로 하여 “팔복”시리즈를 기획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가난’에 잘 나오는데, 그 계기가 폴란드 영화감독인 키에슬로프스키의 “데칼로그”(우리말로 번역하면 ‘십계명’이라는 뜻임)시리즈를 본따서 기획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위 “데칼로그”에 대해서는 제가 따로 서평을 작성한 것이 있는데, 이 감독은 각 계명으로 한편씩의 영화(총 10편)로 만들었습니다.


‘애통’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이 땅에서 ‘애통’을 가지고 살거나 살았던 다섯 명의 선교사들이 나옵니다. 처음 등장하는 사람은 배기철씨로서 이태리계 백인 남성과 한국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이고, 자신의 부인(애니)도 흑인 혼혈인인데, 특이하게도 위 사람이 전도하는 대상이 무속인들과 혼혈인들입니다. 이 땅의 사마리아인들이지요. 김 감독이 배기철씨를 알게 된 것은 KBS 인간극장을 통해서인데, 그렇게 해서 “애니의 사랑”이라는 내용이 방송도 되었다고 합니다. 영상물에 보면 무속인의 문앞에서 손을 대고 기도하는 모습이 나오고, 스크랩북에는 ‘내가 사랑할 곳, 사마리아.’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성경에서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것은 ‘혼혈’ 때문입니다. 배기철씨는 한국땅에서 ‘혼혈인’으로 멸시를 받으면서도 또다른 사마리아인들인 한국땅의 혼혈인과 무속인을 선교의 대상으로 정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마리아인들을 만나고, 말씀을 전하셨다는 것이지요. 그 내용이 요한복음 4장에 나옵니다.(그 감격적인 장면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지면상 생략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집사 빌립도 사마리아에서 전도하게 되고, 성령이 역사하게 되는데 그 내용은 사도행전 8장에 나옵니다. 빌립의 전도로 사마리아에서 무속인, 마술사 시몬이 변화됩니다. 이렇듯 예수님과 제자들이 품었던 사마리아인들을, 자신도 사마리아인으로서 그 사랑 받았으니, 이 땅의 사마리아인들에게 전도를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담으로 현재 사마리아인들이 704명밖에 남지 않아 멸종위기에 있다는 내용의 인터넷뉴스를 최근에 접하게 되었는데, 위 사실을 기독인으로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였습니다.


배기철씨는 어떻게 무속인들에게 전도할 생각을 하였을까요?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김 감독은 배기철씨를 ‘애통’의 주인공으로 정하고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중에 한통의 전화를 받게 되는데, 조신원이라는 사람으로서 최춘선 할아버지의 제자라는 것이지요. 조신원씨의 증언으로 최춘선 할아버지의 제자들이 천명이나 된다는 것이나 다른 여러 사실들을 알게 되고, 그렇게 해서 그 내용을 촬영하여 ‘애통’에서 최춘선 할아버지의 후일담(맨발로 서다)으로 제작하게 됩니다.


김 감독은 최춘선 할아버지에 대해서 여러 교회나 기독교단체에서 간증을 하러다니다가 조은령이라는 다큐멘터리 감독을 알게 됩니다. 뉴욕대 영화과 출신으로 단편영화 ‘스케이트’로 칸 영화제 초청을 받았던 촉망받던 감독이였는데, 하나님의 풍경을 담고자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재일 조선인에 대한 영화를 제작하던 2003년경에 집에서 실족사하는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연속해서 온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김선일씨에 대해서도 알게 되지요. 부산신대, 한국외대 아랍어과를 나와서 모슬렘 선교를 위해서 무역회사 직원으로 이라크에 갔다가 이라크 무장단체에 의해서 납치되어 순교하였던 그 김선일씨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된 것입니다.


당시 저도 그 사건 때문에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김선일씨가 알자지라 방송에서 살려달라고 절규하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한데, 노무현 정권이 그 김선일씨를 버렸다는 사실에 많이 분개하였지요. 조국이, 국가가 우리 국민의 목숨을 지켜준다는 생각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였습니다.


김 감독은 조은령씨와 김선일씨의 죽음에 대해서 촬영을 하다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품고 살아온 사람들이 왜 어이없이 죽게 된 것일까? 여기서 김 감독의 깨달음 이야기를 직접 인용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을 보면 옛사람들은 십계명을 따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그렇게 가르쳤지만 주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이미 살인이고 음욕을 품는 것만으로도 실제적인 간음이다. 무언가 죄를 행해야만 죄악의 실재(實在)가 아니라 행하지 않았어도 우리가 마음속에 품은 욕망, 소욕조차 곧 실재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계수법(計數法)입니다.”(애통 P.77)


“조은령 감독이나 김선일 형제가 바라고 열매 맺기 원했던 것을 다 이루지 못하고 어이없이 갔지만... 마음에 품은 소욕, 곧 미움이 살인이고, 음욕이 간음이라면... 그 반대로 우리가 품은 하나님나라를 위한 소망과 꿈들도 다 실재라는 것입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결실을 안 보여도 그들이 하나님나라를 향해 품고 갔던 그 모든 것, 천국을 향한 소망과 기도와 헌신의 모든 과정들이 실재요 이미 열매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평가해주시는 것입니다.”(애통 P.78)


마음에 품은 것이 곧 실재라는 것이지요. 김 감독이 이런 깨달음을 가지게 된 계기가 ‘르네 지라르’라는 프랑스 인류사회학자의 책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이하 ‘사탄’이라 표현함)를 통해서라고 합니다. 지라르는 이 책에서 십계명의 폭력들-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을 분석하면서 마지막 계명인 “네 이웃의 집을 탐(貪)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는 계명은 어떤 ‘행위’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욕망’을 금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탐내지 말라’는 어원적 말이 ‘욕망하다’라는 말이고, 그 말은 금지된 과일에 대한 하와의 욕망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김 감독은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욕망,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이미 간파하였다는 것이지요. 김 감독의 통찰력과 인문학적 소견이 남달라 보입니다. 김 감독은 이(탐심)를 통해 ‘천국의 소욕’도 같은 이치라는 것입니다. 천국의 소욕을 품은 자체가 기도요 선교요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은령씨나 김선일씨의 죽음이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실재라는 것이고, 그것 자체가 열매라는 것이고, 이를 통해 실재로 열매가 맺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저도 ‘르네 지라르’의 책들에 관심이 많고, 김 감독이 언급한 ‘사탄’에 대해서도 서평을 작성한 적이 있습니다. 앞에서 김 감독에게 친근감이 간다는 이유도 키에슬로프스키 영화감독이나 르네 지라르, 그리고 ‘로이드 존스’ 목사에 대해서 김 감독이 잘 알고 있다는 것인데, 특히 로이드 존스 목사는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라고 하는데서 제가 어떤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도 로이드 존스를 통해서 복음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거던요.


2006년에 나온 김 감독의 “부흥의 여정”이라는 책도 보면-아직 안 읽었지만- 20세기 부흥의 진원지인 영국 웨일즈 지방을 촬영하면서부터 시작이 된다고 하는데, 이 웨일즈의 부흥은 로이드 존스 목사가 부흥에 대해서 언급할 때면 어김없이 나오는 내용입니다. 물론 이 책은 흔히 부흥회에서 말하는 부흥이 아니고 선교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차후 읽어야 하겠지요.


아무튼 김 감독은 이런 통찰을 얻고 계속 조은령 감독을 촬영하다가 이 조은령 감독도 자신과 똑같이 “가난한 사람들” “애통하는 자”란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하나님의 풍경’을 영상에 담겠다는 생각도 같았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성령님이 총감독이라는 생각도 비슷하구요.


김 감독은 또다른 인연으로 한재성 선교사를 알게 되는데, 2004년경에 카자흐스탄에서 선교사역을 하던 한재성 선교사와 김진희 선교사 부부의 집에 강도가 들어 김진희 선교사가 죽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처절한 애통 속에 있는 한재성 선교사의 모습이 영상물에 담겨있는데, 그 모습은 너무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촬영 당시 딸 2명과 아파트에서 살면서 강도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김진희 선교사를 그리워하는 모습은 제가 보기에도 한재성 선교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고통이였습니다. 그 선교지역에서는 김진희 선교사의 순교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게 되고, 한재성 선교사는 다시 아내를 죽인 땅, 카자흐스탄에서 아내의 피값을 열매로 받기 위해 준비중에 있다고 합니다.


김 감독은 이렇게 배기철, 조은령, 김선일, 한재성 선교사들을 알아가면서 ‘애통’의 의미에 대해서 통찰을 얻게 됩니다. 구약의 이사야, 예례미야, 느혜미야 선지자들이 애통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伸寃)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花冠)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사61:2,3)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계6:10,11)


김 감독은 신원의 날이 위로하는 날이고, 모든 피 흘린 증인들이 가진 애통의 한을 풀어주려면 피흘리는 숫자가, 희생의 양이 더 차야한다는 것을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여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팔복 말씀도 구약적인 배경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이들 구약 선지자들의 애통의 이유가 예루살렘의 회복, 하나님의 성전의 회복에 대한 애통이라는 것이랍니다. 김 감독의 성경에 대한 통찰력이 매우 고무적입니다.


계속하여 김 감독은 성전의 회복을 놓고 진정으로 ‘애통’하는 자들에게 주는 ‘위로’는 ‘부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내용은 뜻밖인데, 김 감독의 생각은 이사야는 슬픈 자를 위로하는 것을 ‘여호와의 날’ ‘신원의 날’로 표현하고, 하나님께서 성전이 파괴되고 포로로 끌려가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과 원한을 풀어주는데, 위 회복과 위로는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사61:1, 66:15)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위로하다’라는 말은 ‘보혜사(保惠師)’ 즉 위로의 영에서 나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진정한 ‘위로의 영’은 성령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애통하는 자들에게 위로가 임하는데 성령께서 임하셔서 그들의 본질적 소망인 ‘성전의 회복’을 이루어주시며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부흥”(애통 P.137)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흥의 본질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성경의 애통하는 자들은 거의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시며 애통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애통은 하나님의 성전의 회복에 대한 애통이고, 그에 대한 위로는 부흥이라는 김 감독의 생각에 동의하세요? 저는 대체적으로 동의를 합니다.


김 감독은 몽골에서 사역하는 이용규 선교사(하버드대 역사학 전공)를 통해서 또다른 통찰을 얻는데, ‘백 투 예루살렘 운동’은 서진(西進)운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진운동은 예수님이 전파한 복음이 바울과 제자들을 통해 서유럽에 전해졌고, 청교도들의 이주로 아메리카, 미국 땅에서 열매 맺었으며,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 일본, 중국으로 이동했으며, 이제 중앙아시아를 통해 이슬람권과 예루살렘에 전해질 것이다. 백 투 예루살렘 운동은 복음이 결국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서진운동은 서유럽이나 미국 교회의 안목에서 본 것이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그 땅들은 복음의 씨앗이 파종되지 않은 개척지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뿌려진 곳이고,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들을 다시 찾으시는 것이지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을 개척하거나 개종하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역사와 상황 속에서 순교와 희생으로 뿌려진 씨를 하나님의 방식으로 다시 불러 모으신다.’ 꽤 설득력 있는 설명으로 들립니다.


사실 사도행전에 보면, 수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각지로 흩어져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집트에는 마가와 마태가, 인도에는 도마가 복음을 전하였다고 하지요. 그래서 중앙아시아나 이집트 등도 회복해야할 땅이라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서 여러 열매를 맺듯이 한 명의 순교자를 통해 여러 믿는 자들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비유로 말씀하셨고,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이 생겨났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예수님처럼 한 알의 밀알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길이 자진해서 가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김 감독은 이런 깨달음의 와중에 김상렬이라는 선교사를 알게 됩니다. 김상렬씨는 2001년경 태국 치앙라이 빠마이에서 산족 아이들이 학교 다니는 길을 닦다 스무 살의 나이로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죽게 되는데, 그 죽음이후 여러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 감독이 김상렬씨의 아버지 김종준 교수를 만났을 때, 그 아버지의 고백을 들어보겠습니다.


“그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심장병으로 위험할 때, 우리 부부는 상렬이를 주님께 드리고 주님께서 주신 비전을 확실히 갖게 되었습니다. 상렬이가 치앙라이에서 주님 품에 안겼을 때, 히스기야는 기도해서 15년을 생명을 연장해주셨는데 우리 상렬이는 20년이나 연장해주셨구나 하는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애통 P.178)


아들의 생명을 20년이나 연장해주셨다고 감사 고백하는 아버지. 이는 분명 감동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오지 못하는 고백일 것입니다.


김 감독은 이렇게 배기철, 조은령, 김선일, 한재성, 김상렬 등 5명의 선교사들의 삶과 애통을 촬영하였고 다른 선교사들의 삶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마지막으로 고백합니다. “당신의 애통은 그 어디나 편재(遍在)하군요.” ‘애통’을 쓰면서 너무나 많은 이들이 희생과 고통으로 드려졌음을 보았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드려진 그 헌신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도도히 이어져왔음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이제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김 감독의 생각에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에 대해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서 너무 편협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생각을 해보았고, 제가 알고 있는 복음의 내용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정죄하는 듯한 모습에서 주님의 사랑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된 것은 아닌가 반성도 해보았습니다.(진리를 우리가 소유한 것이 아니라 진리가 우리를 소유(자유)한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이루시는 성령님의 사역은 우리의 이성과 사고를 초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족함을 알고 날마다 애통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심정으로 ‘세상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위로가 있지 않을까요?


‘가난’ 영상물의 삽입곡이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이고 ‘애통’ 영상물의 삽입곡이 “좋은 나라”인데, 좋은 나라는 하덕규가 처음 작사작곡하여 불렀던 노래로서, 이를 2001년경에 ‘하진’이라는 가스펠가수가 다시 불렀다가, 영상물에서는 다시 김도현이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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