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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코드』를 보고..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를 영화화한 <다빈치코드>가 개봉되었습니다. 주위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별루 재미없다는 반응이였는데, 저도 책을 읽어보지 않고 영화를 보아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리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였습니다.


영화평을 작성하기 전에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핵심 내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아기를 임신하고 있었고,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박해를 피해 마리아는 프랑스로 넘어가서 아기(여자)를 낳았으며, 그 자손들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 사실이 밝혀질 경우 예수님의 ‘신성’에 타격을 입을 것과 교황청의 권위가 무너질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 후손들을 제거하려고 주교들의 비밀조직(요푸스데이)을 이용하여 예수님의 후손을 찾는데(그리고 제거하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시온수도회’라는 비밀조직은 이에 대항하여 예수님의 후손을 수호하는데 조직의 사활을 걸고 지켜내고 있으며, 예수님의 후손이 있다는 사실과 위치를 암호화(코드화)해서 다른 사람들은 이 암호를 풀 수 없고, 핵심멤버(시온수도회의 수장)만 이를 풀 수가 있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예수님의 후손을 둘러싼 쫓고 쫓기는 싸움은 1세기부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던 15세기까지 이어지고,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면서, 예수님의 후손이 있다는 사실을 이 그림에 암호화(코드화)시켜놓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빈치는 ‘시온수도회’의 수장이였구요.


그러면, 이 그림의 어디에 코드화시켜 놓았을까요? 이 “최후의 만찬” 그림에는 ‘성배’가 없다고 합니다.(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아니 최후의 만찬에 성배가 없다니요?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에서 떡을 떼시고, 술을 잔에 부으시면서 이는 내 살과 피라고 하시면서 이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였지 않은가요?

그런데, 왜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의 핵심인 술잔(성배)을 빼버렸을까요? 그것은 성배는 술잔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인 것을 나타내기 위해 성배를 빼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의 우측옆(예수님쪽에서)에는 공간이 비어있고, 예수님의 반대방향으로 비스듬이 누워있는 사람이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공간의 라인을 따라가면 성배가 그려진다는 것입니다. 성배가 코드화(고대에는 잔이 여자를 상징한다나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스듬이 기대어 있는 마리아를 예수님의 좌측옆으로 이동시키면 정확하게 예수님의 좌측으로 기대어있는 모습과 자연스럽게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그림을 보고 설명을 하면 더 쉬울 텐데(네이버에서 조회해서 보시면 됩니다.) 아쉽지만 일단 넘어갑시다. 그동안 예수님의 성배를 찾는 전설이나 영화, 소설 등이 무수히 많았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 실체가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15세기의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에 코드화시켜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까지 잘 보존(시온수도회 덕분?)되어 그 예수님의 후손이 ‘소피’라는 여자주인공이라는 것이 결론입니다.


이 후손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극적인 요소들이 배치가 되면서 영화가 구성되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약간 지루한 면도 있었으나, 소설을 읽어본 사람들의 반응은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영화를 관심있게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 내용이 사실일까요?

여러분, <다빈치코드>는 소설이고 영화입니다. 즉, 허구라는 것입니다. 착각하지 마시고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역사소설이나 대하소설을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저도 옛날에 역사소설 등을 좋아해서 읽어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실존인물’이 등장하면서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작품이 ‘구성’되면 그 소설 전체를 사실로 오인을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작가가 실존인물과 역사적 사건만을 발췌하여서 세밀하게 새로이 구성한 플롯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면 그 작가의 뛰어난 ‘구성’ 때문입니다. 이를 역사적 사실과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이 소설도 댄 브라운이라는 작가가 쓴 소설입니다. 여기서 실존인물과 역사적 사실로 등장하는 것은 다빈치와 “최후의 만찬”인 그림입니다.


여기서부터 영화에 대한 비평입니다. 다빈치가 실존인물임에는 틀림없으나 이 다빈치가 ‘시온수도회’ 수장이였다는 말은 금시초문이고, 허구입니다. “최후의 만찬”도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가 만찬 자리에 있었다고 쳐도 그 사실이 예수님과의 관계(결혼)를 통해 후손을 낳았다는 결론은 비약입니다. 설사 성배가 없다손 치더라도, 이것을 막달라 마리아와의 결혼으로 연결하는 것은 비약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셨다는 내용이 나오는 복음서나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가 있다고 해도,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과 결혼하였다는 결론으로 이끄는 것도 비약입니다. 사실 이런 내용(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였다는 내용)은 “예수의 마지막 유혹”이라는 영화에도 언급되었던 내용이지요.

 

또한, 성배가 마리아를 상징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예수님의 후손하고 뭐가 상관이 있습니까? 이것(즉, 성배가 마리아를 상징하더라도)이 예수님의 후손이 있다는 내용에 결정적인(혹은 정황적인)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마치 진화론자들의 진화단계 이론에서 결정적인 ‘연결고리’가 빠졌듯이.


따라서 이 영화의 핵심요소인 다빈치의 그림에서 마리아를 발견할 수는 있어도 그 외 추가적인 요소(예수님이 마리아와 결혼한 사실과 후손이 있다는 사실)는 작가의 상상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 진지하게 대응하였는가요? 단지 소설일 뿐인데...


사람들은 열광합니다. 현대인들은 이슈를 찾아서, 이벤트를 찾아서 몰려듭니다. 할인점이나 백화점에 이벤트 행사한다면 물불 가리지 않습니다. 언론에서는 이러한 이슈들만 노리고 뉴스에 게재를 하고, 폭발적인 조회수가 현대인의 이런 경향을 증명합니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사건으로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지루하고 평범한 것은 견디지를 못합니다.


모든 회사에서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이런 대중심리를 마케팅에 적극 이용하여야 성공합니다. 이것은 영화산업이나, 소설이나, 음악계나 차이가 없습니다. 댄 브라운은 이 심리를 적극 이용하였습니다. 이 심리는 현대인의 고유한 심리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고유한 심리입니다. 세계 최대의 종교인 기독교에서 핵심교리인 예수님의 ‘신성’을 공격하는 소설책에, 세계가 열광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돈방석에 앉았습니다.(세계적으로 4,300만부가 팔렸다고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260만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당연히 영화로도 만들어져야지요.


비기독교인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정말 기독교인들의 행태를 보니 미워죽겠는데, ‘울고 싶은데 뺨때려준다’고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공격하고, 또한 기독교 교리 자체에 대한 거부감으로 열광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악마의 책이라는 둥, 사실일까? 라는 둥 온갖 호기심을 갖게 하니 열광합니다. 흥행이 되니 출판계, 영화계, 부수사업 등에서 등달아 이슈화시킵니다. 원래 세상의 구조가 이렇게 흘러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개봉된다고 하니, 한기총에서 결사반대한다고 하고, 이것이 다시 이슈화되고, 사람들은 영화를 더 많이 봅니다. 한기총이 오히려 흥행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역설이지요.

교회에서는 목사님들이 앞 다투어 이런 악마의 영화를 보면 안된다고 하는데, 교인들은 보고 싶어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은 속은 후련하지만 목사님이 보지 말라고 했는데 봐서 내 믿음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불안하고, 끝까지 안보는 사람은 믿음이 좋다고 스스로 자위해 봅니다만, 어딘지 찝찝합니다.

뭐가 그리 불안한가요? 예수님의 복음하고 이 소설하고 뭐가 상관입니까? 예수님의 후손이 있다는 허구의 사실이 무슨 비밀이라도 되는 양 안달입니까? 이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것을 비밀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십자가’를 비밀이라고 합니다. 정말 이것만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후손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구요. 이 ‘십자가’의 코드(비밀)는 ‘시온수도회’ 수장도 모릅니다. 제발 오해하지 마세요.


정말 우리는 믿음이 없습니다. 안 그런가요?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바다에 던지울 것이라는 말씀이 실감나지 않은가요? 우리들의 ‘믿음없음’을 고발하기 위해서 이 영화는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믿음이 선물로 주어진 자만 찾는 작업, 이것이 예수님의 추수작업일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란 말인가요? 말란 말인가요? 저는 별루던데 보고 싶으면 보세요. 그런데 아마 “미션임파서블 3”보다 재미없을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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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았는데, 이 영화가 저에게는 기대이상으로 다가오기에 몇 자 적어봅니다.

 

대충 줄거리를 이야기하면, 박정희 군사독재시절이 최절정에 이르는 1969년을 배경으로 대학을 다니던 부잣집 아들 윤석영(이병헌 분)이 여름방학 때 농활(농촌봉사활동)을 가서 그 마을 도서관 사서로 있는 서정인(수애 분)을 만나면서 서로 사랑이 싹튼다는 내용입니다.


약 열흘 동안 머물면서 서정인과의 추억을 쌓아가는 중에 서정인의 부모님이 도서관을 만들었으나 월북하는 바람에 그 마을 전체에 피해를 입히게 되고 서정인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농활의 마지막 날 밤에 대학생들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영화를 상영해주고, 그 와중에 마을 도서관이 불에 타버리면서 서정인은 윤석영을 따라 서울로 가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대학생과 농촌처녀의 그렇고 그런 사랑이야기인데, 그후 사건이 급반전 됩니다.


일단 윤석영은 서정인과 함께 자신이 다니는 대학교정으로 가서 서정인에게 자신의 가방을 맡기고 학생회 사무실로 올라가는데, 학생회측에서는 박정희 3선 개헌반대 집회를 개최하고, 윤석영과 서정인은 이 데모에 휩싸이게 되면서 서정인이 경찰서로 연행이 되고, 윤석영도 연행이 됩니다.


문제는, 서정인이 부모님(연좌제) 때문에 사상을 의심받게 되고, 서정인이 들고 있던 윤석영의 가방 때문에 윤석영도 간첩혐의로 의심을 받게 되면서 폭력과 협박에 의한 취조가 진행되는데, 윤석영의 아버지는 윤석영에게 서정인을 모르는 여자라고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경찰관의 심문에 윤석영은 서정인을 모르는 여자라고 부인을 합니다. 그러자 경찰관은 윤석영을 서정인의 취조실로 데려가서 대질심문을 합니다. 서정인은 윤석영을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으로 쳐다보는데(여기서 수애의 연기가 일품이지요), 윤석영은 자신이 살려고(당시 시대상황에서 간첩 혐의가 인정되면 최대 사형, 최소 몇 년은 징역살이를 하여야 합니다.) 서정인을 모르는 여자라고 합니다.


서정인은 결국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도 윤석영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여 윤석영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결과 윤석영은 바로 석방이 되고, 서정인은 남한산성에서 징역살이를 하는데, 윤석영은 사랑하는 여자, 서정인을 부인하였다는, 버렸다는 죄책감에 아버지에게 부탁을 하여 서정인도 석방을 시키고, 이제는 절대 서정인과 떨어지지 말자며 무작정 기차를 타고 둘이서 떠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대기실에서 윤석영이 약을 사러 간 사이 서정인은 홀연히 떠나게 되고, 윤석영은 이 서정인을 찾아 36년 동안 전국을 헤매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독신으로 대학교수를 하며 지내는데, 방송국에 다니는 제자를 통하여 편백나무 잎으로 만든 카드를 보고, 추적하여 서정인이 자신과 헤어진 후의 행적을 알게 됩니다.(물론 서정인은 죽었죠.) 그리고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이 영화를 통하여, 두 가지를 느꼈습니다. 먼저 취조실에서 서정인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윤석영의 모습이 베드로가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 예수님을 부인하는 모습과 오버랩이 되었습니다. 윤석영이 서정인을 사랑한다고 자신하던 모습이 취조실에서는 자신이 살려고 부인하는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 베드로와 꼭 같습니다. 저나 여러분도 당시 상황에서 윤석영처럼, 베드로처럼 부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어떻게 다시 예수님을 믿게 되었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승천 후에 주어진 성령의 역사 때문일 것이고, 예수님의 기도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베드로는 평생 그 흔적을 가지고 살 것입니다. 윤석영이 서정인을 그리워하면서 살듯이...


두 번째 느낀 점은, 이미 사랑하심을 입은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언젠가는 미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서정인이 언젠가는 윤석영에게 전달될 거라고 확신하며 편백나무 잎으로 만든 카드를 주위 사람들에게 전달하여 그 향기가 전해졌듯이...

 

성경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합니다. 문제는 생명의 향기를 담당하는 자도 있는 반면에 사망의 향기를 담당하는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고후5:16) 이것을 우리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오직 주님께서 감당케 하심으로 가능할 것입니다.


올 겨울엔 이 영화를.... 아니면 편백나무 향기를 맡으심이 어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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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제목이 좀 이상하지요? 제가 오늘 영화평을 하려는 영화가 “쉰들러리스트”와 “너는 내운명” 등 2편이기 때문에 이런 제목을 붙였습니다. 이 영화들은 전부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점과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면서 많이 울었다는 점, 그리고 내용 중 일부가 복음적으로 은혜롭다는 점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쉰들러리스트”는 1994년경(?) 개봉하였을 때 한 번 보고, 오늘 유선으로 한 번 더 보았고, “너는 내운명”은 작년에 개봉하였을 때 본 영화입니다.


먼저 “쉰들러리스트”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강제로 노역을 시키거나 죽이는데, 독일군은 이 유대인들을 사람취급을 하지 않고, 동물보다도 못한 존재로 취급을 하고, 실제로 그런 법률도 통과를 시킵니다. 그곳의 소장인 괴트는 전쟁중 대략 1만명의 유대인을 살해합니다.(혼자 죽인 인원인지, 그 수용소 안의 독일군들이 죽인 인원인지는 확실하게 모르겠습니다.) 수용소 안이 내다보이는 자신의 높은 저택의 테라스에서 총으로 단지 앉아있던가 길을 걸어가고 있는 유대인(가슴에 다윗의 별을 달고 있음)들을 사냥하듯이, 아니면 사격연습 하듯이 죽입니다. 죽이는 데 이유가 없습니다. 괴트에게 유대인은 인간이 아니며, 어떻게든 처리하여야 할 쓰레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 유대인들을 고용하여 사업을 하고 있는 나치당원인 ‘쉰들러’라는 사람이 있는데, 유대인들을 따뜻하게 보살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이 쉰들러가 운영하는 그릇공장에 들어가기를 소원하는데, 왜냐하면 그곳은 유대인에게는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작업장에서 일하다가도 아우슈비츠로 끌려가서 가스실에서 죽거나, 아니면 일하다가 독일군에게 사소한 실수로 총 맞아 죽거나, 정기검진에서 건강이 좋지 않으면 죽어야하거나, 일할 능력이 없는 아이들과 노인들은 죽어야하거나 하는 현실에서 그 공장은 목숨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고, 독일군은 그 수용소를 폐쇄하고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로 보내 가스실에서 한 번에 대량살상을 하려고 하고, 이 소식을 들은 쉰들러는 자기 공장의 유대인들을 살릴 묘안을 찾다가 소장인 괴트에게 제안을 합니다. 유대인 1인당 얼마씩 돈으로 계산하여 지불을 하고, 이들을 자신의 고향인 체코로 데려가서 독일군을 위한 탄피공장을 운영하여 독일군을 위해 일할 것이고, 또한 소장은 어짜피 죽을 유대인들 중 몇 백명을 빼낸다고 하여 크게 탈 날 일도 없으며 본인은 엄청난 돈을 벌거라고 말입니다. 괴트는 이를 승낙하고, 그날 저녁 쉰들러는 공장직원 이름 하나 하나를 불러주면 공장관리인(회계사)은 이를 타이프를 칩니다. 이 명단이 바로 ‘쉰들러리스트’이고, 이 명단에 든 사람은 전부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성한 명단에는 총 1천 1백명이 있었고, 한 명이라도 더 살려내려고 최대한 공장의 인부들 이름을 기억해내려고 하는데, 쉰들러의 대사가 아주 감동적입니다. “이 명부는 생명부입니다.” 다른 사업을 하는 사업가에게 이 일에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지만(힘을 합치면 4천명 정도의 유대인을 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사업가는 거절을 합니다. 이 수용소가 폐쇄되기 직전 유대인들이 기차에 올라타는데, 이 장면도 아주 극적입니다. “쉰들러리스트”에 포함된 유대인(이를 영화에서는 ‘쉰들러의 유대인’이라고 표현하더군요.)들은 구원의 기차(죽음의 수용소에서 살 소망이 있는 쉰들러의 고향인 체코로 향하는 기차이기 때문에.)에 올라타고, 이 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유대인들은 죽음의 기차(‘사망에서 사망으로’가 연상되는군요.)에 올라탑니다. 출발은 같지만 방향만 틀립니다.


잘 마무리 될 것 같았으나, 위기는 옵니다. 쉰들러의 유대인 중 남자들이 탄 기차는 무사히 체코의 수용소에 도착을 하지만, 여자들이 탄 기차는 착오로 아우슈비츠로 가게 되고, 이들은 머리가 깍이고, 알몸으로 가스가 나오는 목욕탕으로 들어가고 문은 잠깁니다. 이들의 절망감과 공포감을 생각해보셨나요? 분명히 몸값을 치렀기 때문에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죽음이라뇨? 소문으로만 듣던 그 가스실의 천장에 매달린 스프링쿨러만 쳐다보며 공포에 떨고 있는데, 그 스프링쿨러가 서서히 돌아가더니, 단비와 같은, 아니 생명수와 같은 물이 뿌려지는 것입니다. 쉰들러가 극적으로 구한 것입니다. 십년감수하였지요. 아니 죽다가 살아난 것입니다.


체코의 수용소는 그야말로 천국입니다. 쉰들러가 체코 수용소의 독일군에게 이들은 자신의 노동자이기 때문에 간섭을 말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수용된 유대인 중 랍비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까지 합니다. 드디어 독일군이 연합군에 항복을 하게 됩니다. 포로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은 체코의 독일군들에게 조용히 떠나라고 하고, 유대인들에게도 자유가 주어졌으니 각자 고향으로 떠나라고 하는데, 자신도 나치당원이기 때문에 도망을 가야할 처지입니다. 헤어질 때 ‘쉰들러의 유대인들’이 서명한 문서(쉰들러가 유대인들의 생명을 구하여주었다는 내용)와 반지를 주는데, 이 반지에는 ‘한 생명을 구한 것이 세계를 구한 것이다’라는 문구가 써있습니다. 그때 쉰들러는 울부짖습니다. 자신이 타고갈 자동차를 가리키면서 이것으로도 유대인 열 명은 구하였을 것이고, 자신의 가슴에 단 나치당원 뺏지를 빼면서 이것으로도 유대인 목숨 두 명, 아니 한 명은 충분히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쉰들러의 유대인들’은 말합니다. “당신은 최선을 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쉰들러는 1천 1백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하였습니다. 나레이터는 폴란드에서 살아남은 유대인과 그 자손이 현재 4천명이고, 쉰들러가 구한 유대인과 그 자손이 6천명이라고 말합니다. 한 국가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 보다 쉰들러가 구한 유대인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위 영화의 감독은 세계적인 감독 스필버그인데, 그도 역시 유대인입니다. 이 영화의 비장미가 더한 것이 이 영화를 흑백으로 처리하였다는 것이고, 곳곳에서(유대인들이 죽을 때) 음악(그 음악이 바흐인지, 바그너인지, 모차르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이 흘러나왔던 것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울었습니다. 왜 울 수밖에 없었을까요? 유대인들의 죽음이 안타까워서 울었고, 계몽주의(17-18세기) 이래 이성의 역사가 진보한다는 허구 및 역사의 비극에 울었고, 나는 한 생명도 구할 입장이 못 되기 때문에 울었고, 더구나 제가 바로 유대인처럼 그렇게 죽으면 죽어야 할,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에 울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셨나요?(아직 안 보셨다구요? 그럼 빨리 보세요.) 쉰들러의 인류애적인 구원이 감동적이지 않던가요? 쉰들러는 돈으로 유대인의 목숨을 구하였습니다. 목숨값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오죠? 맞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때문에 죽어야할 자기 백성들을 돈이 아닌, 당신의 목숨으로 우리의 목숨을 사셨습니다. 이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누구를 대속하였다고요? 예, 자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서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리스트”에 기록되어야만 삽니다. 영화에서처럼 위기가 닥쳐옵니다. 그러나 한 명도 빠짐없이 이들의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쉰들러처럼요. 그러나 쉰들러에게는 한계가 있었죠. 그 많은 유대인들을 전부 구원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은 원하였으나 못 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계가 없으십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당신의 백성은 빠짐없이 구하였습니다. 어디에서요? 사망 중에서, 아니 요한계시록에 보면 심판 중에서입니다. 그래서 저는 또다시 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에는 왜요? 그 사랑과 은혜가 고맙고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 울었냐구요? 아닙니다. 아직 울 일이 남았습니다. “너는 내운명”이 있거든요.



“너는 내운명”은 황정민이 작년에 시상식장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소감을 이야기한 것으로도 유명하지요. “너(전도연)를 만난 것은 나에게 기적이였어!” 이 영화는 시골 동네에서 시골노총각인 황정민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다방에 레지로 일하는 전도연이 오토바이를 타고 차배달을 가는 것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을 합니다. 첫눈에 반하였습니다. 그래서 둘이는 사랑을 하게 되고, 결혼을 합니다. 그러면서 벚꽃이 허드러지게 핀 밤에 평상에 둘이 누워 전도연에게 약속을 하죠. “너만을 사랑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지켜줄꺼야!”


그러나, 전도연은 과거가 있는 여자였습니다. 전에 살던 남편이 하도 폭력을 행사하여서 시골로 도망와서 살았는데, 이 남자가 전도연을 찾아냅니다. 그래서 위기가 오는데, 이 남자는 황정민에게 돈 300만원(여기서 영화를 같이 본 준성엄마는 1천만원이라고 하는군요.)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황정민은 자기가 가장 아끼는, 남의 소농장에서 일하지만 유일하게 자신의 소유인, 새 끼때부터 자식같이 키운 소를 팔아서 이 돈을 남자에게 주면서 다시는 전도연과 자신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합니다. 이를 안 전도연은 황정민에게 편지 한 통을 남기고 떠나는데, 돈을 벌면 꼭 돈을 갚겠다고 하면서. 그래서 전도연은 창녀촌으로 들어가고, 미리 받은 선 불금을 황정민에게 부치고, 황정민은 이 주소지를 가지고 전도연을 찾으러 창녀촌으로 가지만 전도연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황정민은 어떻게 하였을까요? 기다립니다. 백방으로 알아봐도 찾을 수가 없으니 기다리면서 술로 한 세월을 보내면서 삶은 점점 피폐해져 갑니다.


그러면, 전도연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거와 아픈 상처와 아련한 사랑이 있는 이 여자에게 천형과도 같은 에이즈가 찾아옵니다.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왜죠? 에이즈는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가 없기 때문에 살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도연이 더욱더 절망하는 것은 주위 사람들의 기피와 냉대입니다. 병도 병이지만 주위 사람들의 기피와 냉대는 전도연을 더욱더 비참하게 하고 절망하게 합니다. 사람들이 왜 전도연을 기피하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 병이 전염병이고, 성병이기 때문이고, 언론에도 이슈가 된 것은 전도연이 에이즈에 걸린 것을 알면서도 사회에 복수하기 위해서 손님들과 성관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골에서는 해프닝이 일어납니다. 동네 보건소에서 마을 주민들 전체에게 에이즈검사를 하는데, 얼마나 인간이 이기적입니까? 하기야 그렇게 사랑한다던 황정민도 에이즈검사를 받으니 두 말할 필요가 없겠죠?


전도연은 교도소로 가게 되고, 황정민은 그래도 이 여자를 사랑한다고 홀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하고, 나문희(홀어머니)는 그러면 너와의 인연을 끊자고 하면서 위협용으로 탄 양젯물을 황정민은 마시고, 병원으로 실려가 위세척을 하지만 목이 상하여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매번 교도소에 면회를 가지만 전도연은 면회를 거절하다가, 마지막으로 매몰차게 황정민에게 미련을 가지지 못하도록 자신을 떠나게 하려고, 만나면서 자신은 황정민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들어가는데, 황정민이 쉰 목소리로 울부짖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전도연이 면회창에 다가와서는 왜 목이 상하였냐고 울부짖고, 황정민도 울부짖습니다. 손을 서로 잡으려고 하여도 면회창이 서로를 갈라놓으니 황정민은 면회소 위 창문에 설치된 스피커를 떼어내고 전도연의 손을 잡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면회소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아마 영화를 보던 사람들 대부분이 울었을 것입니다. 제가 영화볼 때도 훌쩍거리는 소리가 주위에 났었고, 저는 아예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더군요. 제가 왜 울었을까요? 울음이 헤퍼서? 그 말도 사실이지만 여러분은 감동적이지 않던가요? 단지 심파극이라고요? 맞습니다. 심파극이기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세대들은 그런 영화나 창극 등을 보면서 사랑에 울고 사랑에 웃고, 배신에 분노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황정민 같은 사랑을 할 자신이 있습니까? 세 쌍이 결혼하면 한 쌍이 이혼한다는 요즘 세상에 살고있는 여러분들은 말입니다. 과거가 있는 여자, 다방 출신인 여자는 경상도 말로 버겁죠. 결혼하기가 힘들단 말입니다. 더구나 죽을 병인 에이즈에 걸렸으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암이라도 걸렸으면 그래도 병수발을 들 용기가 있을 분들도 있겠지만, 그 병이 에이즈라면 우리가 어떻게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장담을 하겠습니까?


솔직히 인정합시다. 우리는 이 실화의 주인공인 남자보다도 더 사람을 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이 감동적이라서 울고, 그 사랑이 없음에 울고, 그 사랑에 감사하면서 울고...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던가요? 예, 저는 고멜이 생각나던군요. 바람난 여자, 창녀 출신인 이 고멜은 구약의 호세아 선지자의 아내입니다. 하나님이 창녀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호세아 선지자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하는 수없이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는데, 자식 낳고 살다가 딴 남자가 좋다며 바람나서 가출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호세아에게, 고멜을 찾아서 돈을 치른 후 다시 데려와서 살아라고 합니다. 이 호세아 선지자가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바람난 창녀처럼 이방신들을 숭배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사랑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와 우리 처지가 뭐가 다릅니까? 우리가 바로 주를 멀리 떠난 이스라엘이고, 탕자입니다. 우리가 바로 고멜이고, 전도연입니다. 신약에서 말하면 남편 다섯을 갈아치운 현남편도 본남편이 아닌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이런 자들을 주님은 사랑하시데,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요한복음에선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요? 끝까지입니다. 세상 끝까지. 또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것이라.” 이런 주님 앞에서 창녀 같은, 죽을 병에 걸린 우리가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목사님의 오후 말씀처럼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신’(엡4:8) 것입니다. 선물 받을 자격도 없는 자가 이 사랑, 이 은혜 받았으니, 감사의 눈물 외에 달리 우리는 할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새하늘과 새땅에서는 눈물이 없을 것입니다. 질고의 눈물 뿐만 아니라 감사의 눈물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곳은 오직 기쁨의 찬양만 있을 것입니다. 이 두 편의 영화 제목을 이어보면, 주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 영생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운명입니다.


실화는 늘 감동적이죠. 감동적이지 않으면 영화로 만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실화가 있습니다.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가물가물하지만 2,000년전에 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영원한 창조주시고,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으로 세상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구원자로서 말입니다.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구원자인데, 이 구원자는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정치적 메시야나, 세상을 심판할 묵시적 심판자(인자)나, 모세 율법이 고대하던 그 선지자(고난의 개념이 없음)로서가 아니라, 고난받는 종으로서 오신 것입니다. 분명 이사야 등에 ‘고난받는 종’에 대해서 예언되어 있었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생소한 개념이기 때문에 믿으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오셨습니다. 고난받는 종으로서, 고난받는 인자로서, 고난받는 메시야(왕)으로서, 고난받는 선지자로서, 고난받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말입니다.


어떻게 고난받는 메시야, 고난받는 인자, 고난받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을 당시 유대인들이 받아들일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이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신성모독자로. 그러나 자기 백성은 믿었습니다. 주님은 정말 자기 백성을,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전부 남김없이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운명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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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충격적인 내용이였습니다. 약간의 줄거리를 듣고 영화를 보았지만, 실제 영화를 보고 감상평을 적으려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난감한군요.


희망의 섬, 아일랜드에 갈 수 있는 추첨에 당첨되기만을 기다리면서 지내는 인간들, 이들은 자신들이 지구오염의 환경에서 기적적으로, 선택받아 살아남은 것에 감사를 하면서 관리자들과 컴퓨터에 의해 오염되지 않도록 관리(통제)되면서 살아갑니다. 통제되면서 살아가는 것이 조금은 불편하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습니다. 옛날 원초적 지구가 있었을 때처럼, 전혀 오염되지 않은 섬에서는 오염 걱정이 없기 때문에 통제받지 않고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시작부터 주인공 링컨 6-에코(이완 맥그리거 역)는 악몽에 시달립니다. 그 꿈의 내용에 대해서 의문을 품은 채 일상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다른 구역에서 생활하는 친구 맥코드를 만나면서, 나방 한 마리를 잡아가지고 자기 구역으로 돌아옵니다. 이 나방을 여자 주인공 조던 2-델타(스칼렛 요한슨 역)에게 보여주면서 의문을 제기하죠. 다른 지역은 분명 오염되어 생물이 살 수가 없는데도 왜 이 나비는 죽지 않고 살아 있는지? 나방을 잡았던 자리에 다시 나방을 놓아주면서 이 나방을 따라 가서, 보았던 광경은 너무나 엄청난 내용이였습니다.


영화 시작에 산모는 출산일이 다가오면 무조건 아일랜드에 갈 수 있었는데,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 속에 아일랜드로 가려고 관리자들을 따라 갔던 그 산모가 아이를 낳고는 한 번 안아보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하고 그 아이는 다른 부부의 손에 인계가 되는 것과, 아일랜드에 당첨되어 마냥 좋아하면서 따라 갔던 흑인은 수술용 침대에 누워 살아있는 채 간을 떼어내려다 흑인이 살려고 수술실을 뛰쳐나와 도망가다가 관리자들에 의해 다시 끌려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완전히 조작된 현실에서 살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주인공은 전체적인 윤곽은 파악을 하지 못하고, 다시 자기 구역으로 돌아와 막 아일랜드에 당첨되어 내일이면 떠나는 여자주인공을 데리고 탈출을 감행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아일랜드는 없다” “나를 믿고 따라와라”


사건의 진실은 이렇습니다. 때는 2019년, 인류는 인간을 복제할 수 있을 만큼 과학이 발달하였고, 인간복제 회사(메릭 바이오테크사)에서는 돈많은 사람들(스폰서)로부터 미리 주문을 받습니다. 자기의 복제인간(클론)을 만들어두고 만약 자기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장기를 이식할 필요가 있을 때, 아니면, 대신 아이를 낳아줄 대리모를 주문할 때 이 클론을 사용하려고 보험에 가입하듯이 이 회사에 돈을 지불하는 것입니다.(약 50만달러 정도). 그런데, 주문한 사람들은 클론들이 사물을 인식하지 못하는 수면상태에 있는 식물인간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윤리문제에서 면피할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하죠. 하지만 회사에서는 클론들도 인간과 똑같이 사고를 하고, 감정이 있다는 것을 주문자들에게 속입니다.


주문자의 DNA를 그대로 스캔해서(체세포 복제가 아님) 12개월 만에 새로운 성인 복제인간을 만들어서 주문자가 필요할 때까지 구역(치유센터)안에서 관리를 하다가, 필요하면 아일랜드에 보내준다고 하면서 복제인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과 똑같이 사고를 하고, 인식을 하는 복제인간을 어떻게 속일 수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복제인간을 만드는 과정에서 12개의 프로그램을 복제인간의 눈을 강제로 뜨게 한 후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자기가 있게 된 과정을 보여줍니다. 세뇌를 시키는 것이죠. 그래서 복제인간들은 자기가 과거도 있고, 부모도 있었고, 추억도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에 안주하면서 살도록 아일랜드라는 유토피아도 보여주고요. 거의 완벽하게 가상현실을 조작해 낸 것입니다.


복제인간의 지능은 15세 정도, 복제인간끼리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면 안되니까 섹스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신에 대한 감정도 없으며, 진짜 세계와는 차단된 채 살아가는 복제인간들은 자기의 구역밖을 벗어난 적이 없고,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왜요? 다른 지역은 오염된 지역이고, 자기는 오염되면 죽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의문은 있지만, 아일랜드에 당첨만 되기를 기다리면서 다른 것은 참을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박사는 처음부터 식물인간처럼 지각하지 못하는 복제인간을 만들 수 없었을까요? 있었습니다만, 식물인간처럼 만들면 주문자에게 거부반응이 생기기 때문에 지각있는 복제인간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잔인함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면, 여주인공을 데리고 통제된 구역을 탈출하여 진짜 세상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때의 충격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는 너무나 낯선 진짜 세상을 경험하면서 친구 맥에게서 앞에서 이야기한 사건의 진실을 알고는 자기의 주문자(원본)을 찾아 떠납니다. 그런데 이 진짜 현실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탈출한 사실을 안 메릭 박사는 킬러(사설경호대)를 고용하여 이 탈출한 제품(제품으로 호칭됨)들을 수거하거나 제거하려고 하면서, 쫓고 쫓기는 화려한 액션장면이 영화의 중반을 장식합니다.


결국 자기의 진짜와 마주한 남주인공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죠. 스캔으로 복제가 되면서 진짜의 기억까지도 복제가 되었고, 그래서 악몽의 내용도 이 기억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자, 그러면 이 진짜(주문자)의 현실은 무엇일까요? 돈은 많이 벌었으나, 자신의 간 때문에 2년 밖에 살지 못한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는 복제인간을 주문한 것입니다. 복제인간인 주인공이 진짜에게 물어보죠. “나는 얼마냐?” 그러자 진짜는 대답합니다. “50만 달러다, 영원의 대가치고는 싸지?” 남주인공이 진짜를 찾아온 것은 이 사실(수면상태에서 인간복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복제인간들도 사고하고, 활동한다는 사실, 그리고 장기를 적출당하거나, 대리출산후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을 진짜 세상에 폭로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회사는 망할 것이고, 자기 및 수천 명의 복제인간들도 살 수 있다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현실 세상도 진실(복제인간들이 사고할 수 있고, 살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속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요? 메릭 박사가 그 사실을 숨겼기 때문입니다. 남주인공이 혼자 이 사실을 방송국에 폭로를 하면 미쳤다고 할 것이 뻔하죠?


어째든, 진짜 링컨은 가짜 링컨을 살리면, 자기는 2년 안에 죽어야 되기 때문에 자기가 살려고 가짜 링컨을 속여서 킬러들에게로 데려가게 되는데, 중간에 가짜 링컨은 이 사실을 눈치를 채고, 킬러와 진짜, 가짜가 대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아이러니하게도 킬러는 진짜를 죽이게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누가 진짜인지 킬러로서는 구분이 안되고, 서로 진짜라고 우기면서, 가짜가 차고 있던 복제인간 인식 팔찌를 진짜에게 채우고, 킬러는 그 팔찌만 보고 진짜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 장소가 창고같은 곳으로 거기에는 날개달린 사람(천사?)의 동상이 한쪽은 팔이 떨어져 나간 채 소품으로 나오는데 이것을 어디서 봤더라? 결국 집에 돌아와서 확인해보니, 똑같은 그림은 아니지만 진중권의 ‘미학에디세이’ 3권에 나오는 피라네시가 만든 동판 <미네르바의 조각이 있는 환상의 페허>, 1778년작과 이미지가 비슷하였습니다. 여기서 감독은 현 세상을 시뮬라크르의 시대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원본이 없는 세상, 복제가 원본이 되고, 복제가 다시 복제되고, 가상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가상이 되는...


계속 진행하면, 살아남은 가짜 링컨은 복제인간의 어떤 계열 전체가 잘못 만들어져서 수십 명을 리콜(?)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다시 조작된 세계(치유센터)로 들어갑니다. 복제된 인간들을 구하려고. 결국 홀로그램을 파괴하여, 땅 속에서 수천 명의 복제인간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이들도 진짜 현실과 마주하게 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이 영화에서 최고의 조크는 맥 친구집에서(사실 이 친구는 이 복제회사에 출근하여 어떤 업무를 담당하는 기술자입니다.) 부인이 링컨과 조단이 찬 복제인간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팔찌를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야, 커플 팔찌가 예쁘네!”, “여보, 우리도 한 개 해요.” 참, 속도 모르고...


여러분, 어떻습니까? 좀 무섭지 않는가요? 아니면, 앞으로 우리 살아있을 때 이런 일이 생긴다면, 주문자처럼 영원을 바라보나요? 여러분은 이 영화에서 누구랑 동일시합니까? 주문잡니까? 복제인간들입니까? 아니면, 신과 같은 박사입니까? 이 영화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윤리적인 문제만 해결되면 인간은 복제인간을 식물인간(수면상태)으로 만들어서라도 영원을 소망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인간이 무서운 것입니다.


황우석 교수가 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했다고 해서, 세계를 빛낸 한국인이라고 자랑스러운가요? 세상은 인간의 의도가 아무리 선하다고 하더라도 선한 대로 움직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앞자리에서 보았던 젊은 여자가 친구에게 하는 말이 “야, 이 영화 완전 싸이코다!”, 어째 영화의 느낌이 이렇게 다를 수가!


저는 이 영화에서 복음을 봅니다. 영화처럼, 이 세상 현실은 마귀에 의해서 거의 완벽하게 조작되었습니다. 어떻게요? 여러분이 살아가는 이 현실이 진짜 현실인데, 비록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하더라도 이 현실에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 기적이기 때문에 조금은 통제받더라도 이해하고 살아라고. 그리고 희망도 있지 않냐고. 여러분에게는 아일랜드가 있으니까. 여기에서 열심히 살면 아일랜드에 갈 수 있는데, 이게 꿈이 아니고 실제 당첨돼서 떠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보지 않냐고. 이렇게 위로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렇게 조작된 현실에서 빠져나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현실도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거의”라고 하였던 것이구요. 이 조작된 현실에서 탈출한 사람이 있거든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만이 조작된 역사속에서 진짜 현실을 보았던 분입니다. 그런데 이 진짜 현실이 묵시란 말이죠. 역사속에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영 믿을 수가 없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고마운 게 하나 있습니다. 그렇게 조작된 현실에서 조작된 꿈(천국, 극락)을 가지고 죽기만을 기다리는 인간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진짜 현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탈출한 우리들은 그래서 감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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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일상적인 하루였습니다. 뉴욕 항구부두에서 크레인 전문 운전기사였던 주인공 톰 크로즈는 일요일에도 나와서 일해 달라는 부두관리자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으로 와서, 이혼하면서 전처와 살고 있는 아들과 딸을 주말마다 만나서 그날도 평범하게 아들과 딸에 대한 특별한 애정없이 지내던 중이였습니다.

 

갑자기 집이 흔들려 밖으로 나가보니 하늘에는 온통 먹구름이 끼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으며,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번개가 구름에서 땅으로 내리쳤지만, 그후에 나타나야 될 천둥 소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영화의 전개과정에 대한 복선이겠지요.


불안한 주인공은 딸을 집안에 있게 한 후, 자신의 자동차를 운전하고 나간 아들을 찾을 겸  밖으로 나가보니, 불안한 시민들도 주인공처럼 밖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길거리에는 전부 자동차가 멈춰져 있었고, 주위의 모든 전기는 정전이 되어서 외부와의 연락도 차단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인 군중들 밑에서 땅이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땅에서 엄청나게 큰, 빌딩 높이만한 세 발이 달린 기계(머리 부분은 타원형의 문어대가리 모양?)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필버그는 외계인이 만약 지구를 침공할 거면 대기권 밖에서부터 들어올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상을 깨려고 하였지만, 이 구상이 그렇게 치밀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계가 땅에 묻히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거든요.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이쯤 되면 아!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죽도록 도망을 가야지요. 그런데 인간의 호기심은 죽기까지 끝이 없는 것 같더군요. 아니, 죽고 나서도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까요? 여기가 어딘가??? 그래서 호기심 천국 아니면 호기심 지옥인가?(썰렁~) 도망을 가면서도 그 기계의 실체에 대해서 계속 뒤를 돌아보며, 궁금해 하던 사람들... 그러면서 죽어가는 사람들... 이 기계는 드디어 가공할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두 눈처럼 생긴 촉수같은 곳(자동차의 전조등과 비슷하게 생김)에서 자기장 광선이 나오더니 순식간에 사람들을 재로 만들고, 빌딩과 자동차들을 파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도저히 감당이 안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상상속의 일들이, 아니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현실로 발생하다니!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지구의 멸망을 예고하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급히 집으로 돌아와서 비상식량을 챙기고 아들과 딸을 데리고, 멈춰진 자동차들 중 주인공의 이웃인 자동차정비공이 유일하게 수리한 남의 자동차에 타고, 위 저주받은, 아니 외부로부터 침공을 받은 뉴욕을 떠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갈 때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뉴욕에서의 위기를 모면하여야 하지만 어디를 가야 안전한가?


특별한 대안없이 그저 이 기계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자동차를 운전하는데, 여기서 자동차정비공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주인공이 남의 자동차를 타고 가려니, 당연히 자동차정비공이 문을 열면서 내리라고 합니다. 남의 자동차를 가져가면 자기가 물어주어야 한다나요... 그런데 이야기하는 중에 뒤에는 기계가 자기장 광선을 싸대면서 모든 것을 파괴하며 다가오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너도 빨리 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자세히 설명을 할 시간이 없으니 내 말을 믿고 타라고 하는 주인공의 간절한 눈빛을 대하던 자동차정비공은 이것을 외면한 채 주인공을 끌어내리려고 하고, 주인공은 사정없이 자동차문을 닫고 출발을 합니다. 그와 동시에 자동차정비공은 자기장 광선을 맞고 순식간에 재가 되어 버립니다.


출발은 하였으나 갈 때는 없고, 일단 이 기계로부터 멀리 떨어지려고 무작정 길을 떠났습니다. 도로는 정차된 자동차들과 피난가는 사람들로 가득 찹니다. 가면서 주인공의 간절한 바램은 무엇이였을까요? (영화를 그냥 즐기면 되는데, 뭐한다고 주인공의 생각까지 알려고 하냐고 핀잔을 줘도, 궁금한데 어떻게 합니까?, 역시 호기심은 끝이 없죠?) 제발 주인공이 본 이 기계가 1대만 있기를 간절히 바랬을 것이고, 그러면 살 희망은 있다. 이 기계는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고, 일부 세상에 대해서 비관적인 정신병적인 과학자가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면 어찌 살 방도를 찾아볼 수도 있는데... 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를 저 혼자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가면서 주인공이 경험한 것은 공격하는 기계들이 하나 둘이 아니고, 무수히 많다는 것과 이 기계들의 공격 범위가 전지구적이라는 것과 이 기계들이 점령한 지역은 거의 초토화되어 있어, 전부 핏빛으로 물들어 있으며, 생존한 인간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또한 기계들의 목표는 지구에 사는 인류들을 포로로 잡아 부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류 멸망이였습니다. 여기에서 오는 절망감을 이루 말을 할 수 없겠지요? 흐르는 강물에는 수많은 시체들이 떠내려가고, 푸르러야 할 산과 들에는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지구를 한 번이라도 상상해 보셨나요? 이것이 현실로 나가올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해보셨나요? 가상현실이 실제 현실이고, 실제 현실이 가상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경험을 매트릭스 영화나 진중권의 책들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실제로 생각해 보지는 않았는가요?


주인공은 추락된 비행기에서 생존한 여기자(?)로부터 기계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얻는데, 여기서 스필버그 감독은 다소 황당한 설정을 합니다. 이 기계들이 땅에서 나왔는데, 이 기계들이 땅 속에 있었던 기간은 인류가 생기기도 훨씬 전에 땅 속에 묻혀 있었다는 것이지요. 진화론에 의하면 인류가 100만년 전에 생겼나요? 그전에 땅 속에 묻혀 있었다면서 외계인의 지구침공 계획은 인류가 지구에 있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런 스필버그의 의도는 인간이 이 지구상의 주인공이고, 주인이라는 거만한 생각을 떨쳐버리라는 멧세지인가요?  아무튼 이 땅속에 묻힌 기계들이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번개 속에 비밀이 있습니다. 또한 번개가 치면서 천둥소리가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구요. 외계인(외계인의 모습을 보니 이미지가 E.T나 골룸과 비슷한데, 영화에 나오는 외계인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징그럽다는 것이지요. 이것도 인간을 기준으로 한 편견인가요?)들이 지구 땅 속에 묻혀 있는 기계에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은 번개(자기장?)를 통해서였습니다.


그후 영화는 기계들이 인류를 공격하는 장면들과 인류들은 전혀 대항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모습들로 수를 놓습니다. 이제 주인공은 아들과 딸을 데리고 이혼한 전처가 있는 보스톤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인간 생존본능을 경험하게 되는데, 자동차가 피난하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이 피난하는 사람들이 유일한 이동수단인 이 자동차에 함께 타려고 주인공의 자동차를 공격하게 되고, 급기야 주인공과 아들, 딸은 자동차에서 쫒겨나고, 이 자동차를 탈취한 사람은 5미터도 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 의해서 총격을 당하여 살해되고, 다시 이 사람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살해당할 것이고....


지구 멸망의 위기에서, 자기 목숨에 대한 생존본능은 가히 상상도 할 수가 없는데, 인간의 윤리와 도덕은 여기에서 힘을 발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타인의 목숨은 나의 목숨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방해가 된다면, 없어져도 상관없다는 이 인간 실존의 모습을 스필버그 감독은 상정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 주인공도 자기 생존본능과 딸의 안녕을 위해서, 지하실에 함께 숨어있던 사람을 살해한다는 암시가 나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영화에는 인간애라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기계들의 무차별 공격만이 있고, 무력한 미군의 방위력은 이 기계들 앞에서 힘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 생존본능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스필버그가 끝까지 놓치지 않는 부분은 가족애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인가요??? 전지구적 멸망의 위기에서 대책없는, 그래서 너무도 두려운 주인공이 아들과 딸을 구하는 장면에서는 자기의 목숨조차 아까와 하지 않습니다. 실제 딸이 기계에 잡혀서 기계 속으로 사라졌을 때, 우리의 주인공은 수류탄 주머니를 들고 과감하게 기계에 잡혀 기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여기서 이 기계의 실체가 드러나는데, 문어대가리 모양의 머리 부분의 안쪽에는, 양쪽으로 철창이 있고, 그 철창안에는 사로잡혀 있는 인간들이 빨판으로 빨아드리려는 기계의 촉수를 이리저리 피하고 있는 아수라장이였습니다. 거기서 딸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주인공이 그만 이 빨판의 표적이 되어 잡혀, 빨판 안쪽으로 계속 밀려들어가는 것입니다. 실제 주인공이 머리부터 다리까지 빨려들어가다가 다른 사람이 다리를 잡고, 여러 사람들이 함께 도와주어서 겨우 빠져나왔습니다. 주인공은 죽다가 살아남은 것이지요. 여기서 모든 영화의 특징인 주인공은 죽을 수 없다. 죽더라도 영화가 끝나갈 때 죽는다는 철칙이 나타납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주인공은 빨판에서 빠져나오면서 수류탄 주머니를 빨판에 던지고, 멋도 모르는 기계는 이 수류탄을 삼킨 후 수류탄이 폭발하여 기계는 쓰러지고 철창 속에 있던 사람들은 살아남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왜 기계나 외계인들은 인간의 피를 원할까요? 영화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만 영화를 보는 내내 가진 의문이였습니다. 기계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피가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외계인들의 에너지원으로서 필요한 것일까?


영화 중간에 기계들의 점령지인 지하실에서 주인공과 딸, 그리고 집주인이 숨어 있는데, 기계의 촉수가 지하실로 내려와서 움직이는 물체가 있는지를 탐색하는 장면과 외계인 몇이 지하실에 나타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주인공은 처음으로 외계인을 보게 되죠. 그런데 이 장면들(기계가 탐색하는 장면)이 낯이 익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봤더라? 그렇죠. 쥬라기공원에서 공룡들이 주인공들을 잡으려고 탐색하는 장면과 흡사하더군요.


영화는 종반으로 치달아가고 있는데, 어떻게 주인공이 외계인의 약점을 밝혀내고, 이를 이용하여 외계인과 기계들을 물리쳐서 자기도 살아남고, 가족들을 살리고, 그리고 우리의 바램인 지구를 지킬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고 있는데, 의외로 단순하게 해결이 되더군요. 너무나 간단해서 얼척(?)이 없을 정도로....


자 그러면, 처음에는 거창하게 시작하였던 인류멸망의 위기상황에서, 스필버그 감독은 어떻게 위기를 해결하면서 마무리를 짓는지 살펴볼까요. 우선 주인공이 기계들의 공격으로부터 피하면서, 기계가 파괴되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는 미군에게 물어보죠. 어떻게 이 기계가 쓰러졌냐고. 미군의 대답은 기계가 그냥 빙빙 돌더니 쓰러지더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다른 기계들을 보니 까마귀가 기계들 위에 달라붙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장으로 보호막을 치고 있던 기계들에게서 자기장 보호막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 보호막 때문에 미군의 화력이 소용이 없었던 것이구요. 그러면 까마귀가 지구를 구했냐구요? 아닙니다. 여기서 주인공은 원인을 찾지 못합니다만 미군에게 보호막이 사라진 기계들을 향하여 화력으로 공격하라고 하고, 미군들은 이 기계들에게 공격을 가하여 기계들이 하나 둘 쓰러집니다.


주인공은 딸과 함께 무사히 보스톤으로 가서 이혼한 전처와 그리고, 피신 중간에 미군을 도와서 지구를 구하겠다며 떠난 아들도 만나면서 영화는 엔딩을 하는데, 원래 주인공의 목표인 가족들의 생존은 이루어졌군요. 역시 대단합니다.


아직 기계가 쓰러진 원인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원인을 나레이터는 지구에 존재하는 미생물들에 있다는 것이지요. 이 미생물들은 지구가 생겨나면서부터 있었을 것이고, 그런 환경에서 진화한 인류는 미생물로부터 알레르기를 일으키지 않지만, 외계인들은 다르다는 거죠. 이 외계인들이 인류는 죽일 수 있지만, 이 지구상에 있는 미생물들에게는 적응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외계인들의 입장에서는 지구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외계인들이 미생물에 감염되어 하나 둘 죽으면서, 기계들도 쓰러졌던 것이구요. 그러면 지구는 누가 구하였는가요? 스필버그의 대답은 미생물이라는 것이지요. 어째 좀 황당하지 않은가요?


그러면, 이 영화의 주제는 뭐일까요? 지구는 인류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인도 아니니까 조금은 겸손하게, 그리고 자연환경을 보존하면서 살자! 아니면 역시 지구는 누가 지키던 멸망하지 않아! 하는 안도감? 글쎄요? 과연 그런지 두고 볼 일입니다. 이상으로 영화평을 적었는데, 분량이 너무 길어져버렸습니다.


여기서 주님 재림과 비교하여 느낀 점을 간략하게 적어 보겠습니다.


1. 주님 재림은 이 영화처럼 우리의 일상중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노아 때처럼,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중에.....

 

2. 이 재림은 인간 누구나가 감당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영화의 인류처럼, 기계들의 무차별 공격에 대처할 방법이 없었듯이....

 

3. 이 세상 심판 때 인간들은 생존본능으로 몸부림칠 거라는 것이지요. 몇 시간이라도 더 살려고....

 

4. 그러나 갈 때가, 피할 때가 없다는 것이지요. 주님의 심판은 전지구적이고, 전우주적이기 때문에...

 

5. 주인공의 말을 믿지 않은 자동차정비공처럼, 인간은 심판이 임박하였으니 나를 믿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지를 않는 것입니다. 마치 소돔성에 있던 롯의 사위가 소돔멸망 소식을 농담으로 여겼듯이.... 그러나 심판이 막상 닥치면 그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만사에 때가 있다고, 하였지 않은가요?

 

6. 이 심판에서 살아남을 방법이 없습니다. 주인공도 죽다가 살아났지 않던가요? 우리도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심판 그대로, 죽다가 살아나는 방법만이 살 길입니다. 주님이 살려주어야 삽니다.

 

7. 영화에서는 요행으로 미생물이 지구를 구합니다만, 실제 심판 때는 이런 요행이 통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구는 멸망합니다. 가상현실 갔죠? 하기야 우리가 어떻게 보지 않고 이것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8. 그러면 지구가 멸망하면 그것으로 끝인가요? 아니죠. 다시 만들죠. 이것을 재창조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거야 저는 모르죠. 방법은 모르고, 사실만 안다는 것입니다.

 

9. 그러면, 어짜피 죽을 인생 멋대로 살자? 아니죠. 인간은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계속 멋대로 살았습니다. 지구 멸망한다고 멋대로 살지는 않죠.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죠? 심판주이신 예수믿고 살자는 이야기입니다. 결론이 너무 간단하고 황당한가요? 영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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