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만화로 보는 어린이 성경 1 - 신약
박종관 그림, 장길수 글 / 문공사 / 2002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시리즈 만화는 ‘문공사’에서 만들었는데, 신약은 2권, 구약은 5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선 신약 1권만 구입하여 아들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요즘 어린이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것은 만화책이던군요. 그런데, 잠시 ‘알라딘’ 인터넷서점에서 조회해 봤더니 이 만화책을 그린 사람이 박종관인데, 이 작가는 요즘 만화계에서 엄청 인기가 있는 과학학습만화인 "why?" 시리즈(35권으로 구성)를 그린 그 작가인 것을 알았습니다. 어쩐지 그림이 좋더라니까요..(준성이도 이 시리즈 3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 1권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사역,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모습까지 그리고 있는데, 제가 오늘 아침에 읽어보니 너무 은혜스럽고 감동스러웠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들의 행간의 뜻을 그림으로 잘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들이 현실감 있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만화가인 박종관과 공동작업을 한 이동호나 구성을 하였다는 장길수의 약력을 보면 성경만화 작업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데도 당시 예루살렘의 시대상황과 배경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6-7세 유치부에서 초등학교 저학년인 1,2,3학년들에게 적합할 것 같은데, 사실 어른들도 간단하게 읽으면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준성엄마가 이 책을 먼저 읽고 있습니다. 이만한 책을 보지 못했는데, 현재 ‘알라딘’에서 30퍼센트나 할인판매를 하고 있네요.(그래서 즉시 나머지 책들을 주문하였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읽히면 좋은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옥의 티가 있군요. 헤롯 대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셉이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이집트에서 ‘갈릴리 나사렛’ 마을로 돌아왔다는 내용을 ‘베들레헴 나사렛’으로 잘못 표시하였고,(p.43) 예수님께서 첫 번째 이적을 베푸신 ‘가나’ 혼인잔치를 ‘가나안’으로 잘못 표시하였군요.(p.64. 76) 또한 예수님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만화책(p.104)에서는 쉽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성경에는 못 알아들을 사람에게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눅8:10)


이러한 실수는 사소하고, 전체적인 책의 내용은 너무나 성경적이고 은혜스럽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황 및 기적을 행하시는 상황,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상황 및 예수님이 죽음을 예고하시는 상황 등등. 아무튼 성경에 나오는 내용들이 너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꼭 읽어보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야기 갈라디아서
진 에드워즈 지음, 전의우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전에 서점에서 발견하고 손에 들었다가 다시 놓았던 이 책을 1개월 후 다시 손에 들고 이번에는 계산대로 간 것이 저에게는 큰 행운이였습니다. 누군가 책에도 운명이 있다고 말하였듯이 책과 독자와도 인연이 있는가 봅니다. 그다음날 이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는데, 중간에 책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들 때문에 가슴 설레이는 기분을 오랜만에 가져보았습니다.

 

이 책은 바울의 동역자 실라의 입을 빌려,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디아 지방으로 1차 전도여행을 떠났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책의 제목은 ‘이야기 갈라디아서’이지만 원서의 제목은 ‘실라의 일기’입니다. 실라의 회상일기 형식으로 당시 바울의 1차 전도여행 상황과 ‘갈라디아서’를 작성하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실라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에 동행하지만 이 책에서는 1차 전도여행 상황을 바울과 바나바로부터 들어 나중에 독자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은 사도행전 13-15장에 나오는데, 이 성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가가 이야기를 창작한 것이 이 책입니다. 작가의 능력이 뛰어난 게 당시 바울 및 이스라엘, 이방인의 상황, 갈라디아 교회들이 처한 상황 및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배경을 너무나 생생하게 재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당시 현장에 있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이 책을 읽고 관련 성경내용을 읽으면 성경 말씀이 2,000년 전으로 돌아가 살아 숨쉴 것입니다.


처음 시작부분은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마가(마가복음의 저자)가 안디옥 교회의 파송으로 1차 전도여행을 떠나는 모습이 나오는데, 처음 구브로 섬에서는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라고 바울이 자서전적으로 서술하는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매질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는 정말 자신이 직접 안 맞아보고는 모르겠지요?


구브로 섬에는 이미 복음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오순절 성령강림 때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받고 돌아간 신자들이 있었음) 복음이 전혀 전하여지지 않은 곳(갈라디아 지방)으로 가기 위하여 배를 타고 앗달리아 및 버가로 가는데, 여러분들도 바울과 같이 이 배에 오르면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의 의미가 팍 다가올 것입니다. 이곳에서 망가진 몸을 회복한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마가는 이곳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감) 당시 복음이 전하여지지 않은 갈라디아 지방으로 가기 위하여 험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우여곡절 끝에 바울과 바나바는 로마제국 영토에서도 험하기로 소문나고, 시민들의 대부분이 노예와 자유인(해방된 노예)으로 구성되어 있는 위 갈라디아 지방 중 첫 번째 도시인 비시디아 안디옥(유대인 회당으로 찾아감)에서 첫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대부분이 노예)가 생기게 되고, 이곳에 에클레시아(교회)를 세워지게 된 후 4개월을 머물면서 율법에서 자유한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이고니온으로 떠나게 됩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이고니온에서도 4개월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과 이방인, 관원들이 돌로 치려하여 다시 루스드라로 옮겨 5개월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을 계기로 이곳 사람들이 전설에 따라 바나바를 제우스신으로, 바울을 헤르메스(신의 메세지를 전하는 전령)로 착각하여 신으로 섬기려는 사건도 발생합니다. 루스드라에는 디모데가 살고 있었는데, 바울은 여기서 디모데와 첫대면하고, 디모데는 바울의 전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그런데,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핍박하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까지 따라와서 바울을 돌로 치고,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시 일어나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참 대단합니다.


그후 더베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올 때 편한 육로를 버리고 다시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을 거치면서 교회들을 권면하고 앗달리아에서 배를 타고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오면서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 네 곳(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에서 전한 복음은 ‘율법의 행위’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지금 현대상황에서 이 말씀은 당연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그러나 아직도 율법주의적 복음이 도처에 있습니다.) 2천년전 갈라디아 지방의 이방인들에게는 이 복음이 분명 혁명적인 내용이였고, 할례와 율법준수를 자랑으로 여기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모독적인 내용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유대인들은, 예수도 믿고 할례도 받고 율법도 준수해야 구원받는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수리아 안디옥을 방문한 베드로의 외식을 책망하고(당시 베드로의 초석적인 지위와 바울의 지위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베드로가 우위였던 상황임을 염두에 두어야 함) 결국 예루살렘 회의가 열리게 되는 상황이 됩니다. 그 회의에서 이방인들도 할례없이 구원받는다는 내용을 확정하고 그 내용을 이방인 신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편지로 써  유다와 실라를 이방인 교회로 파송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의 적대자(책에서는 유대인이고 바리새인으로 묘사됨)가 갈라디아의 네 교회에 차례로 방문하여 그곳 신자들에게 온갖 감언이설로 바울을 비방하고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도 믿고 할례도 받고 율법도 지켜야 된다고 유혹(책에 보면 이 적대자의 감언이설이 얼마나 교묘한지, 정말 저도 모르게 넘어갈 정도로 잘 설명되어 있음)하게 되고, 갈라디아 교회들이 갈등하는 상황 중에 바울은 실라와 함께 위 교회들을 방문하기에 앞서 편지를 써 부치는데, 그 편지가 ‘갈라디아서’인 것입니다.

 

바울이 성령의 인도따라 목숨 걸고 세운 교회이지만 오래 머물지 못하여 아직 연약한 가운데 있는 갈라디아 교회들을 향한 바울의 외침은 거칠고, 가격하였습니다. 이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에게 받은 ‘이방인의 사도’라는 사명을 그대로 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이 복음 때문에 오늘 저도 할례없이, 율법 준수없이, 예수 믿어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너무 감사한 일이지요. 그런데, 이 갈라디아서의 메세지가 세월이 지나면서 현대 교회들에게는 너무 순화된 것이 아닌가 반성해봅니다.

 

아무튼 이 책은 성경에 표현된 사도행전의 내용 및 바울의 자전적 서술들, 갈라디아서의 내용들을 다시 보게 합니다. 뭐랄까 성경의 글자가 살아 움직인다고 해야 되나...(너무 과찬인가?) 이 책의 작가인 ‘진 에드워드’의 책들이 우리나라에 여러 권 번역되어 있던데, 이 책에 반하여 몇 권을 주문하여 두었습니다.


(그중 ‘이야기 사도행전’은 사도행전 내용을 그린 것 같은데,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읽었더라면 연대기순으로 더 적합하였을 거라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이 작가는 사도행전 이야기들을 시리즈로 책을 낸 것 같은데, 디도의 일기, 디모데의 일기, 브리스길라의 일기, 가이오의 일기 등도 하루 빨리 번역되길 바랍니다.)


당시 바울의 치열하였던 갈라디아 교회의 전도 상황을 이보다 더 리얼하게 묘사한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을 것 같습니다. 강추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책 + DVD) - 김우현 다큐북 김우현의 팔복 시리즈 2
김우현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에 김우현 다큐멘터리 감독의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이하 ‘애통’이라 표현함)라는 다큐북을 읽었는데, 그 감동이 커서 몇 자 적어보려고 합니다. 이 책은 인터넷 서점에서 많이 선전하였으나 선뜻 구매를 하지 못하였다가 목사님을 통하여 소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김우현 감독이 기획하고 있는 “팔복”시리즈 중 두 번째 책으로, 몇 명의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DVD 영상물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세 번째 책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는 근간 예정)


저번에 “팔복”시리즈 중 첫 번째 책인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이하 ‘가난’이라 표현함)도 읽었는데, 우리에겐 너무 유명한 맨발천사 최춘선 할아버지 이야기를 담고 있었고, 책이 나온 이후의 후일담은 ‘애통’에도 나와 있습니다.


위 책들을 읽다보면, 김우현 감독에 대해서 친근감이 생기는데, 그 원인은 김우현 감독이 좋아하였던 작가들이 저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였기때문이였고, 김 감독이 책을 많이 읽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글을 아주 잘 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영상물 보다는 책의 내용이 더 좋았습니다.


김 감독이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예수님의 “팔복” 이야기를 매개로 하여 “팔복”시리즈를 기획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가난’에 잘 나오는데, 그 계기가 폴란드 영화감독인 키에슬로프스키의 “데칼로그”(우리말로 번역하면 ‘십계명’이라는 뜻임)시리즈를 본따서 기획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위 “데칼로그”에 대해서는 제가 따로 서평을 작성한 것이 있는데, 이 감독은 각 계명으로 한편씩의 영화(총 10편)로 만들었습니다.


‘애통’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이 땅에서 ‘애통’을 가지고 살거나 살았던 다섯 명의 선교사들이 나옵니다. 처음 등장하는 사람은 배기철씨로서 이태리계 백인 남성과 한국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이고, 자신의 부인(애니)도 흑인 혼혈인인데, 특이하게도 위 사람이 전도하는 대상이 무속인들과 혼혈인들입니다. 이 땅의 사마리아인들이지요. 김 감독이 배기철씨를 알게 된 것은 KBS 인간극장을 통해서인데, 그렇게 해서 “애니의 사랑”이라는 내용이 방송도 되었다고 합니다. 영상물에 보면 무속인의 문앞에서 손을 대고 기도하는 모습이 나오고, 스크랩북에는 ‘내가 사랑할 곳, 사마리아.’라는 글자가 보입니다.


성경에서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것은 ‘혼혈’ 때문입니다. 배기철씨는 한국땅에서 ‘혼혈인’으로 멸시를 받으면서도 또다른 사마리아인들인 한국땅의 혼혈인과 무속인을 선교의 대상으로 정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마리아인들을 만나고, 말씀을 전하셨다는 것이지요. 그 내용이 요한복음 4장에 나옵니다.(그 감격적인 장면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지면상 생략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집사 빌립도 사마리아에서 전도하게 되고, 성령이 역사하게 되는데 그 내용은 사도행전 8장에 나옵니다. 빌립의 전도로 사마리아에서 무속인, 마술사 시몬이 변화됩니다. 이렇듯 예수님과 제자들이 품었던 사마리아인들을, 자신도 사마리아인으로서 그 사랑 받았으니, 이 땅의 사마리아인들에게 전도를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담으로 현재 사마리아인들이 704명밖에 남지 않아 멸종위기에 있다는 내용의 인터넷뉴스를 최근에 접하게 되었는데, 위 사실을 기독인으로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였습니다.


배기철씨는 어떻게 무속인들에게 전도할 생각을 하였을까요?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김 감독은 배기철씨를 ‘애통’의 주인공으로 정하고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중에 한통의 전화를 받게 되는데, 조신원이라는 사람으로서 최춘선 할아버지의 제자라는 것이지요. 조신원씨의 증언으로 최춘선 할아버지의 제자들이 천명이나 된다는 것이나 다른 여러 사실들을 알게 되고, 그렇게 해서 그 내용을 촬영하여 ‘애통’에서 최춘선 할아버지의 후일담(맨발로 서다)으로 제작하게 됩니다.


김 감독은 최춘선 할아버지에 대해서 여러 교회나 기독교단체에서 간증을 하러다니다가 조은령이라는 다큐멘터리 감독을 알게 됩니다. 뉴욕대 영화과 출신으로 단편영화 ‘스케이트’로 칸 영화제 초청을 받았던 촉망받던 감독이였는데, 하나님의 풍경을 담고자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재일 조선인에 대한 영화를 제작하던 2003년경에 집에서 실족사하는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연속해서 온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김선일씨에 대해서도 알게 되지요. 부산신대, 한국외대 아랍어과를 나와서 모슬렘 선교를 위해서 무역회사 직원으로 이라크에 갔다가 이라크 무장단체에 의해서 납치되어 순교하였던 그 김선일씨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된 것입니다.


당시 저도 그 사건 때문에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김선일씨가 알자지라 방송에서 살려달라고 절규하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한데, 노무현 정권이 그 김선일씨를 버렸다는 사실에 많이 분개하였지요. 조국이, 국가가 우리 국민의 목숨을 지켜준다는 생각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였습니다.


김 감독은 조은령씨와 김선일씨의 죽음에 대해서 촬영을 하다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품고 살아온 사람들이 왜 어이없이 죽게 된 것일까? 여기서 김 감독의 깨달음 이야기를 직접 인용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을 보면 옛사람들은 십계명을 따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그렇게 가르쳤지만 주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이미 살인이고 음욕을 품는 것만으로도 실제적인 간음이다. 무언가 죄를 행해야만 죄악의 실재(實在)가 아니라 행하지 않았어도 우리가 마음속에 품은 욕망, 소욕조차 곧 실재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계수법(計數法)입니다.”(애통 P.77)


“조은령 감독이나 김선일 형제가 바라고 열매 맺기 원했던 것을 다 이루지 못하고 어이없이 갔지만... 마음에 품은 소욕, 곧 미움이 살인이고, 음욕이 간음이라면... 그 반대로 우리가 품은 하나님나라를 위한 소망과 꿈들도 다 실재라는 것입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결실을 안 보여도 그들이 하나님나라를 향해 품고 갔던 그 모든 것, 천국을 향한 소망과 기도와 헌신의 모든 과정들이 실재요 이미 열매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평가해주시는 것입니다.”(애통 P.78)


마음에 품은 것이 곧 실재라는 것이지요. 김 감독이 이런 깨달음을 가지게 된 계기가 ‘르네 지라르’라는 프랑스 인류사회학자의 책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이하 ‘사탄’이라 표현함)를 통해서라고 합니다. 지라르는 이 책에서 십계명의 폭력들-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을 분석하면서 마지막 계명인 “네 이웃의 집을 탐(貪)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는 계명은 어떤 ‘행위’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욕망’을 금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탐내지 말라’는 어원적 말이 ‘욕망하다’라는 말이고, 그 말은 금지된 과일에 대한 하와의 욕망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김 감독은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욕망,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이미 간파하였다는 것이지요. 김 감독의 통찰력과 인문학적 소견이 남달라 보입니다. 김 감독은 이(탐심)를 통해 ‘천국의 소욕’도 같은 이치라는 것입니다. 천국의 소욕을 품은 자체가 기도요 선교요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은령씨나 김선일씨의 죽음이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실재라는 것이고, 그것 자체가 열매라는 것이고, 이를 통해 실재로 열매가 맺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저도 ‘르네 지라르’의 책들에 관심이 많고, 김 감독이 언급한 ‘사탄’에 대해서도 서평을 작성한 적이 있습니다. 앞에서 김 감독에게 친근감이 간다는 이유도 키에슬로프스키 영화감독이나 르네 지라르, 그리고 ‘로이드 존스’ 목사에 대해서 김 감독이 잘 알고 있다는 것인데, 특히 로이드 존스 목사는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라고 하는데서 제가 어떤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도 로이드 존스를 통해서 복음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거던요.


2006년에 나온 김 감독의 “부흥의 여정”이라는 책도 보면-아직 안 읽었지만- 20세기 부흥의 진원지인 영국 웨일즈 지방을 촬영하면서부터 시작이 된다고 하는데, 이 웨일즈의 부흥은 로이드 존스 목사가 부흥에 대해서 언급할 때면 어김없이 나오는 내용입니다. 물론 이 책은 흔히 부흥회에서 말하는 부흥이 아니고 선교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차후 읽어야 하겠지요.


아무튼 김 감독은 이런 통찰을 얻고 계속 조은령 감독을 촬영하다가 이 조은령 감독도 자신과 똑같이 “가난한 사람들” “애통하는 자”란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하나님의 풍경’을 영상에 담겠다는 생각도 같았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성령님이 총감독이라는 생각도 비슷하구요.


김 감독은 또다른 인연으로 한재성 선교사를 알게 되는데, 2004년경에 카자흐스탄에서 선교사역을 하던 한재성 선교사와 김진희 선교사 부부의 집에 강도가 들어 김진희 선교사가 죽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처절한 애통 속에 있는 한재성 선교사의 모습이 영상물에 담겨있는데, 그 모습은 너무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촬영 당시 딸 2명과 아파트에서 살면서 강도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김진희 선교사를 그리워하는 모습은 제가 보기에도 한재성 선교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고통이였습니다. 그 선교지역에서는 김진희 선교사의 순교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게 되고, 한재성 선교사는 다시 아내를 죽인 땅, 카자흐스탄에서 아내의 피값을 열매로 받기 위해 준비중에 있다고 합니다.


김 감독은 이렇게 배기철, 조은령, 김선일, 한재성 선교사들을 알아가면서 ‘애통’의 의미에 대해서 통찰을 얻게 됩니다. 구약의 이사야, 예례미야, 느혜미야 선지자들이 애통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伸寃)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花冠)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사61:2,3)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계6:10,11)


김 감독은 신원의 날이 위로하는 날이고, 모든 피 흘린 증인들이 가진 애통의 한을 풀어주려면 피흘리는 숫자가, 희생의 양이 더 차야한다는 것을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여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팔복 말씀도 구약적인 배경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이들 구약 선지자들의 애통의 이유가 예루살렘의 회복, 하나님의 성전의 회복에 대한 애통이라는 것이랍니다. 김 감독의 성경에 대한 통찰력이 매우 고무적입니다.


계속하여 김 감독은 성전의 회복을 놓고 진정으로 ‘애통’하는 자들에게 주는 ‘위로’는 ‘부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내용은 뜻밖인데, 김 감독의 생각은 이사야는 슬픈 자를 위로하는 것을 ‘여호와의 날’ ‘신원의 날’로 표현하고, 하나님께서 성전이 파괴되고 포로로 끌려가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과 원한을 풀어주는데, 위 회복과 위로는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사61:1, 66:15)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위로하다’라는 말은 ‘보혜사(保惠師)’ 즉 위로의 영에서 나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진정한 ‘위로의 영’은 성령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애통하는 자들에게 위로가 임하는데 성령께서 임하셔서 그들의 본질적 소망인 ‘성전의 회복’을 이루어주시며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부흥”(애통 P.137)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흥의 본질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성경의 애통하는 자들은 거의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시며 애통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애통은 하나님의 성전의 회복에 대한 애통이고, 그에 대한 위로는 부흥이라는 김 감독의 생각에 동의하세요? 저는 대체적으로 동의를 합니다.


김 감독은 몽골에서 사역하는 이용규 선교사(하버드대 역사학 전공)를 통해서 또다른 통찰을 얻는데, ‘백 투 예루살렘 운동’은 서진(西進)운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진운동은 예수님이 전파한 복음이 바울과 제자들을 통해 서유럽에 전해졌고, 청교도들의 이주로 아메리카, 미국 땅에서 열매 맺었으며,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 일본, 중국으로 이동했으며, 이제 중앙아시아를 통해 이슬람권과 예루살렘에 전해질 것이다. 백 투 예루살렘 운동은 복음이 결국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서진운동은 서유럽이나 미국 교회의 안목에서 본 것이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그 땅들은 복음의 씨앗이 파종되지 않은 개척지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뿌려진 곳이고,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들을 다시 찾으시는 것이지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을 개척하거나 개종하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역사와 상황 속에서 순교와 희생으로 뿌려진 씨를 하나님의 방식으로 다시 불러 모으신다.’ 꽤 설득력 있는 설명으로 들립니다.


사실 사도행전에 보면, 수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각지로 흩어져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집트에는 마가와 마태가, 인도에는 도마가 복음을 전하였다고 하지요. 그래서 중앙아시아나 이집트 등도 회복해야할 땅이라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서 여러 열매를 맺듯이 한 명의 순교자를 통해 여러 믿는 자들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비유로 말씀하셨고,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이 생겨났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예수님처럼 한 알의 밀알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길이 자진해서 가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김 감독은 이런 깨달음의 와중에 김상렬이라는 선교사를 알게 됩니다. 김상렬씨는 2001년경 태국 치앙라이 빠마이에서 산족 아이들이 학교 다니는 길을 닦다 스무 살의 나이로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죽게 되는데, 그 죽음이후 여러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 감독이 김상렬씨의 아버지 김종준 교수를 만났을 때, 그 아버지의 고백을 들어보겠습니다.


“그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심장병으로 위험할 때, 우리 부부는 상렬이를 주님께 드리고 주님께서 주신 비전을 확실히 갖게 되었습니다. 상렬이가 치앙라이에서 주님 품에 안겼을 때, 히스기야는 기도해서 15년을 생명을 연장해주셨는데 우리 상렬이는 20년이나 연장해주셨구나 하는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애통 P.178)


아들의 생명을 20년이나 연장해주셨다고 감사 고백하는 아버지. 이는 분명 감동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오지 못하는 고백일 것입니다.


김 감독은 이렇게 배기철, 조은령, 김선일, 한재성, 김상렬 등 5명의 선교사들의 삶과 애통을 촬영하였고 다른 선교사들의 삶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마지막으로 고백합니다. “당신의 애통은 그 어디나 편재(遍在)하군요.” ‘애통’을 쓰면서 너무나 많은 이들이 희생과 고통으로 드려졌음을 보았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드려진 그 헌신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도도히 이어져왔음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이제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김 감독의 생각에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에 대해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서 너무 편협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생각을 해보았고, 제가 알고 있는 복음의 내용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정죄하는 듯한 모습에서 주님의 사랑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된 것은 아닌가 반성도 해보았습니다.(진리를 우리가 소유한 것이 아니라 진리가 우리를 소유(자유)한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이루시는 성령님의 사역은 우리의 이성과 사고를 초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족함을 알고 날마다 애통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심정으로 ‘세상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위로가 있지 않을까요?


‘가난’ 영상물의 삽입곡이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이고 ‘애통’ 영상물의 삽입곡이 “좋은 나라”인데, 좋은 나라는 하덕규가 처음 작사작곡하여 불렀던 노래로서, 이를 2001년경에 ‘하진’이라는 가스펠가수가 다시 불렀다가, 영상물에서는 다시 김도현이 부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교자의 열심
박영선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199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본 서평을 작성하기가 조금은 혼란스럽습니다. 제가 진작에 박영선 목사님의 “하나님의 열심”과 “성령론”에 대해서 서평을 작성하면서, 박 목사님의 성화론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본 책의 구도도 “성화”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박 목사님의 한국교회에 대한 분노와 애틋한 마음은 충분히 알겠지만 성경의 말씀을 오해한 부분도 없지 않아, 다시 이 부분을 지적하려고 하니 주저하게 되는군요. 마치 감정이 있는 사람처럼. 일단 이 서평의 취지가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을 적는 것으로 생각하고 나가보겠습니다.


본 책은 1999년경에 초판이 나왔는데, 5년 동안 합동신학대학원에서 신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했던 내용을 모은 것입니다. 이 책은 총 4부로 나누어지는데, 1부는 설교를 위한 신학의 준비, 2부는 설교의 10가지 중심기둥, 3부는 설교자론, 4부는 설교촌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의 1장은 ‘계시의 인격성’에 대해서 나오는데,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하고, 박 목사님의 계시의 개념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일단 계시는 우리가 이해하여야 계시이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으면 계시가 성립할 수가 없고, 이해하려면 이성에 호소하여야 한다고 박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시하실 때 인격적으로 다가오셔서 우리의 전인적인 항복을 하게끔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인간적(?)으로 대하셔서 우리가 설복하게끔 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격과 인격의 관계로 우리를 대하신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경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한에서 ‘계시의 인격성’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즉 계시가 인격(예수 그리스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박 목사님의 의미하고는 많이 다르지요. 아무튼 박 목사님의 그 다음 주장은, 하나님의 은혜는 원인이 없는 결과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인과율로 설명될 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원인이라고 합니다. 나의 결단이나 열심이 구원의 원인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우리는 원인이 없는 결과에 대해서 사고를 전개시키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박 목사님은, 계시는 우리가 이해하여야 계시라고 하였는데, 그러면, 이해할 수 없는 인과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 생각에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 같은데...


1부의 2장은 ‘성화를 큰 앵글로 잡아라’인데, 즉 목사가 설교를 할 때 항상 신자의 성화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신앙을 권면하는 것이지요. 실제로 박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면 성경을 중심으로 강해설교를 하시다가, 끝에 가면 항상 성화되어야 된다고 하면서 마무리를 하십니다. 박 목사님은 ‘성화’에 목숨을 거는 것 같은데, 마치 이근호 목사님이 ‘언약’에 목숨을 걸듯이. 사실 책에서도 박 목사님은, ‘칭의’ 위주로 설교하는 목사들이 대부분이지만 자신은 ‘성화’ 위주로 설교를 하는 은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성화’ 위주의 설교를 하고, ‘칭의’ 위주의 설교를 하는 목사님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이 박 목사님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1부의 3장은 ‘성경 보는 안목을 계발하라’인데, 안목을 키우려면 책을 많이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박 목사님은 주로 벤자민 워필드, 존 머레이, 게할더스 보스, 헤르만 리덜보스, 헤르만 바빙크 등의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책은 말할 것도 없구요. 이 부분에서 ‘성화설교’를 언급하면서 삼손의 예를 장황하게 들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삼손은 나실인으로 구별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는데, 훈련(여자문제?)이 되지 않아서 망했다는 것이고, 우리는 여기에서 교훈을 받아 실패하더라도, 다시 훈련하여 기어이 이기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삼손이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까? 하나님은 부족한 삼손을 통해서라도 자기 할 일을 하신다는 것이 핵심 아닙니까? 하나님은 삼손이 죽는 것에 개이치 않고, 아니 오히려 삼손이 망함(죽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대적을 죽이는 것)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사기에는 삼손이 살아있을 때 죽인 대적보다 삼손이 죽으면서, 죽인 대적이 더 많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짜 삼손에 대해서 제대로 분석한 분은 이근호 목사님이라는 것만 언급하겠습니다.


2부는 ‘설교의 10가지 중심 기동’인데, 중요한 것만 대략적으로 살피면서 넘어가겠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의 대등한 인격관계이기 때문에 우리를 인격적으로 항복시킨다고 합니다. 앞에서 박 목사님이 말씀하셨죠. 그리고 ‘죄’는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불경, 적개심이라고 합니다. 아주 좋은 말씀이죠?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이 죄다! 수긍이 가지 않는가요? 또한 죄는 형태가 아니라 경향이라고 합니다. 죄의 경향성! 그리고 목사가 국가와 사회에 대해서 설교할 때는 ‘구조화된 죄’와 결부되도록 이끌어야 된다고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아주 공감하는 부분인데, 저는 세상에서 죄가 구조화되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저는 이것을 ‘죄 아래’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박 목사님은 강해설교에 대해서 설명을 하시면서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역시 박 목사님의 아브라함에 대한 분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단하고 섬세합니다. 이 본문을 로마서 4장 18절, 히브리서 11장 17절, 야고보서 2장 15절과 연결하면서, 아브라함이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네 후사가 이삭으로 말미암음이니라.’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는 그 풍성한 뜻을 다 알지 못했을지라도 이삭을 번제로 바쳐도 어쨌든 이 약속이 끊어질 수 없기에 하나님의 다른 어떤 방법이 동원될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p134)


야고보서 2장 21절 말씀엔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삭을 바친 것은 결국은 말씀의 성취라는 의미로 해석하여야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박 목사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침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입증이 되었다고 하는데, 제 생각에는 오히려 말씀이 응하여져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의 역동성! 박 목사님하고는 의미가 틀리지요?


박 목사님은 ‘인격의 항복’이라는 단락에서, 자유의지를 설명하면서 이런 주장을 합니다. “구원을 받으면 인격이 변해야 합니다. 내 인격에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인격은 내가 바뀌지 않는 한 바뀌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세요? 내가 거룩해지지 않는 이상 그것은 나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거룩해져야지요. 그런데 내가 거룩해질 것이냐 말 것이냐는 나에게 일어난다는 차원에서 내 권리입니다. 나를 배제하고는 거룩이고 속되고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유의지의 몫과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p141)


이 대목에서 박 목사님의 ‘성화’개념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성화는 자신이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화 되고 안되고는 ‘나’의 ‘자유’이고 ‘권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나, 성화는 자신이 평생을 두고 이루어야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혜는 성화에서 온데간데 없어집니다. 아무리 박 목사님을 좋게 보더라도 이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성화라는 단어가 없고, 거룩이라고 하는데, 거룩은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속죄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 속죄가-레위 지파에 의해서-매번 드려짐으로써 그때마다 거룩이 주어졌지만, 신약에서는 단 한번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드리심으로 거룩함을 받은 것입니다.(히10;10) 거룩은 받는 것입니다.


4부는 ‘설교촌평’인데, 구약(12편)과 신약(32편)의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고 설교할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게 촌평이 너무 짧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본문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제가 읽어보니, 짧긴 짧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할 것이 없는데, 히브리서의 해석 문제는 집고 넘어가겠습니다.


박 목사님은 히브리서 7장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 직분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여야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왜 레위 지파로 오시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셨냐하면, 레위 지파는 예수님의 하신 일 전체를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영원한’ 제사장이심을 강조하는 것이고, 그 속죄의 사역도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제사장이므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것이지요.(롬8;34)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박 목사님이 이렇게 예수님의 영원한 제사장이심을 강조하는 이유는 딴 데 있습니다. 그 대목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구원에는 신분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구원, 다시 말해서 속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속죄함을 얻은 후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심으로써 이루어지게 해야 할 성화, 거룩의 문제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아직도 제사장이십니다.”(p272)


한마디로, 예수님이 영원한 제사장인 이유는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 지금도 하늘에서 제사장 사역을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맞습니까? 히브리서 7장의 멜기세덱 반차를 좇는 예수님을 가지고 성화로 연결하는 것이 가히 대단하십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7장에서 이야기하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 사역은 제사장이 죽음으로 중단이 되고, 그래서 다른 제사장이 다시 제사장이 되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멜기세덱처럼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않고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레위 계통으로 제사가 온전하였으면 예수님이 아론의 반차를 따라 오시지 별다른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실 필요가 있느냐고 성경은 말합니다.(히7:11)


예수님은 레위 지파보다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셨는데,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준 자이고, 레위 지파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멜기세덱으로부터 복빎을 받았다고 합니다. 복이라는 것은 큰 자가 낮은 자에게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레위 지파보다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는 율법으로 제사장이 되었는데, 예수님이 제사장이 되신 것은 하나님의 맹세로 되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육체와 연관된 계명의 법을 따르는 레위 지파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나셨다고 합니다.


3부는 ‘설교자론’인데, 이 부분에서 박 목사님의 설교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설교를 하라는 것이지요. 절박함을 가지고 신자들에게, 그 하나님의 사랑과 열심을 알고 제발 좀 신앙 좀 성숙해지라는 것이고, 설교자는 그러한 자세로 설교를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해 못할 바 아닙니다. 박 목사님의 그동안 설교사역을 통하여 보더라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성화를 강조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하나님의 은혜와 열심을 강조합니다.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박 목사님의 노력이 폄하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어떻게 하여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목사나 신자나 매한가지로 성경에는 관심이 없고, 돈에 대한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는 모습이-물론 저의 모습이기도 하지만-분노가 치밀다가 못해 이제는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이런 교계 분위기에서 박 목사님의 사역은 충분히 인정되어야 하고, 실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박 목사님의 성경해석에 문제점이 있으면 이것을 넘어서야 되지 않을까요?


이 책의 핵심은 설교자는 하나님의 열심처럼, 설교자도 열정과 열심을 가지고 설교를 하여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저는 이렇게 책을 읽었습니다. (앗! 그런데 이 책이 품절이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령론 - 박영선 목사
박영선 지음 / 크리스챤서적 / 2001년 8월
평점 :
절판


 

박영선 목사님의 “성령론” 이라는 책은 1986년경에 처음 나왔으니까 약 20년 전에 나왔던 책인데, 저에게는 이 책을 통해서 최초로 박영선 목사님의 책들을 알게 되었으니까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뜻 깊은 책입니다. 당시 고등학생때 이 책을 읽을 때에는 어려워서 완독을 하지 못하였던 기억이 나는데, 최근에 다시 읽으면서 많은 유익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전에는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박 목사님이 성령론을 이야기하면서도 성화에 대해서 강조를 하더란 말이지요. 그러면, 유익된 부분과 저의 생각과 틀린 부분들을 순서에 따라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 삼위일체론


박 목사님은 성령론을 이야기하면서 제일 먼저 삼위일체론을 들고 나옵니다. 먼저 삼위일체가 정립이 되어야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삼위일체론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무심코 알고 있는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삼위로 계신다는 내용인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것은 단일신론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즉, 항상 숫자적으로 한 분이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박 목사님은 삼위일체가 하나님만이 유일(唯一)한 신이고 다른 신은 없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유일신이지 단일신(單一神)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예로,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계시고, 예수님은 그 보좌 우편에 있으며,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에서 내, 즉, 예수님이 계시고, 아버지, 즉, 하나님이 계시고, 또 다른 보혜사, 즉, 성령님이 따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3 인격체, 즉, 구별된 3위(位)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삼위일체에서 일체(一體)는 무엇입니까? 그 말은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동일하다는 것이지요. 역사적으로 이 삼위일체는 여러 논쟁이 있었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단으로 정죄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만큼 기독교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박 목사님은 단일신론을 주장할 때, 양자론과 양태론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양자론은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원래는 인간이였는데, 성부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인간 중에서 예수님을 불러내어서 아들로 삼았다고 주장합니다. 즉, 예수님을 피조물이라고 봅니다. 양태론은 한 분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는 성부 하나님으로 나타났고, 신약 시대에는 성자 예수님으로, 현 교회 시대에는 성령 하나님으로 가면을 바꾸어 쓰고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많이 들어본 이야기이죠? 여자의 위치가 가정에서는 어머니이고, 남편에게는 아내이고, 부모에게는 딸로서, 한 사람이지만 그 역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박 목사님은 이야기하기를 “3위는 각각 100% 하나님이시다. 성자도 성령도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라고 합니다.


기존에 가졌던 잘못된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바른 시각을 가지게 해주는 내용이였습니다. 박 목사님은 “삼위일체는 신비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논리를 초월합니다” 여기서 신비는 “숫자적으로 어떻게 하나이면서 셋이냐? 하는 것이기 보다 어떻게 독립된 개체인데 본질이 동일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본 단락을 맺습니다.


2. 성령과 불로써의 세례


이 단락에서 “세례”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데, 이 부분이 앞의 “삼위일체론”과 뒤의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와 함께 이 책에서 가장 유익을 얻은 부분입니다. 박 목사님은 먼저 세례는 동일시, 동질화, 연합이라고 합니다. 세례주는 자의 세계로 세례받는 자가 동일시, 연합이 된다는 의미이겠죠. 그래서 골로새서 2:12절에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라고 하면서 “함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원래 인간이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심으로서, 그 물세례 아래 친히 들어가심으로 자신도 죽어 마땅한 인간들과 동등한 위치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죄인과 “함께” 하기 위해서 물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물세례 주는 것을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만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길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는 자리에 동참하고 그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새로 부활하는 자리에까지 동참케 되는 것입니다.(롬6:3-8) 여기서 박 목사님은 세례 요한의 물세례를 노아의 홍수사건과 연결을 시킵니다. 베드로전서 3장 20,21절에서 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는 표, 곧 세례라고 합니다.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요. 물은 모든 육체를 그 아래 삼켜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것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방주는 물이 없으면 뜨지 못합니다. 즉, 물이 사망이 되게도 하고, 생명이 되게도 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물은 멸망 받을 것과 사망 아래 있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를 구별해 내고 분리해 내는 방법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방주 안에 있으면, 그 심판의 물로 말미암아 물 위에 뜨게 되고 살아남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박 목사님은 물세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홍해사건과 연결을 시킵니다. 고린도전서 10:1,2절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데 홍해를 건널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 홍해에서 빠져 죽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속하여 홍해를 건넜습니다. 홍해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입니다. 마치 노아홍수에서 방주 안에서 살아남은 것과 같이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에게 속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연합입니다. 이것이 세례의 의미라고 박 목사님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 말한 “성령과 불”로서 세례를 준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불이란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가치 없는 것을 태우고 소멸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친히 “성령과 불”로서 세례를 주심으로 우리 안에 성령님이 내주하신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박 목사님의 설명이 약간 미흡한데, 보충하자면 먼저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받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시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 위에 임하심으로서 성령 세례를 받으셨고,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심으로서 불세례, 즉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죄 없으신 분이 대신하여 불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도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서 우리가 이제 심판(불세례)에서 면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되었기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3.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의미


박 목사님은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시게 된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오순절(칠칠절, 맥추절)과 안식일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칠칠절이라고 하는 것은 유월절부터 일곱 안식일을 지나기 때문이고, 그때가 보리 수확하는 시기라서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즉, 오순절이라는 것이 안식일에서 나왔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안식일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에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데, 이것의 의미는 천지창조를 생활로 간증하는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쉰다는 것,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레 되는 날 쉼으로써 앞의 엿새 동안에 하나님께서 일해서 온 천하 만물을 만들었다는 신앙고백을 형식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5장에서는 안식일의 개념이 한 단계 더 진전되는데,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땅에서, 종이 되었던 것을 출애굽시킨, 구원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 첨가됩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였을 때의 거룩도 구별됨임으로 이러한 구약의 내용들은 우리가 종되었던 곳에서 구원을 받았고, 자유를 받았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킴으로 그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희년의 개념도 같은 것이구요. 이 일이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죄의 종이였던 우리를 꺼내어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오순절에 오셨다는 것은 그런 안식일과 희년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 대로,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종에서 꺼내셨다는 것을 증명하고 보증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좀더 보충하자면, 오순절, 칠칠절의 절기가 안식일의 내용도 포함하지만 이 절기를 계산하는 기준점은 유월절에 있는 것입니다. 즉,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으로 살아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고, 이 유월절로부터 계산하여 칠칠절을 지켰으며, 수장절을 지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유월절 절기 때 십자가를 지셨고, 안식일 이튿날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고, 칠칠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셨고, 앞으로 추수때인 수장절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의 재림때는 가라지는 불에 태우고 알곡은 거두어 저장하실 것입니다.(계14:15,16) 이렇듯 모든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골2:16,17)


4. 성령강림, 그 자체가 갖는 메시지


여기서부터 박 목사님은 성령강림에 대해서, 그 뒷부분에 나오는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에 대해서 본인의 생각과 전혀 틀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박 목사님은 오순절 성령강림에 있어서 성령님의 사역을 객관적 사역과 주관적 사역으로 나누고, 또한 객관적 사역은 예수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모두 주어지는데, 그 객관적 사역은 먼저, 죄인인 인간들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었으나(창 6장의 하나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제 성령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존재로 바뀌어졌다(요엘 2장의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는 것이 객관적인 증거요 사역이라고 합니다.


그럴 듯해 보이는 내용이나,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존재로 우리가 바뀐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을 성령님께서 직접 신자들에게 적용시킴으로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성령님은 혼자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보내신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아들의 영이고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이나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존재가 바뀐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여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약간 어려워 보이나 차이점은 분명 있습니다.


박 목사님은 성령님의 객관적 사역의 두 번째로 성령님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라(요16:7-11)고 하면서 성령님의 오신 것 자체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는 증거라고 합니다. 이 구절은 중요한 구절인데, 그러나 박 목사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성령님의 오심 자체가 이런 객관적 사역을 증거한다고 하지만, 성령님의 오심을 가지고 객관적, 주관적으로 나누는 것도 문제가 있고, 또한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사역 때문에 우리가 책망을 받는 것이지 성령님의 오심 자체가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 박 목사님이 성령 강림 자체를 강조하는 것은 박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성령의 주관적 사역을 염두에 두기 때문에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16장에서 이야기하는 성령님께서 세상을 책망하시는 내용은 무슨 의미일까요?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즉,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다른 윤리 도덕적인 것이 죄가 아니고 말입니다. 이렇게 성령님은 죄에 대해서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죄인이다. 왜? 예수 믿지 않으니까. 그리고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보지 못함이요” 즉, 예수님만이 유일한 의인데, 이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지 않음으로 의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진정한 의인을 몰라보느냐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즉, 이 세상 임금, 마귀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세상을 심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심판을 확인하는 작업인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십니까? 안믿어지신다구요? 그러니까 성령님께서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5. 성령이 주시는 세례로써의 성령세례


박 목사님은 “성령강림, 그 자체가 갖는 메시지” 단락에서부터 엉뚱한 주장을 하더니, 여기서는 아예 성령이 주시는 세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고린도전서 12:12,13절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느니라.” 라고 하면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성령님에 의해서 세례를 받았다는 뜻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세례를 베푸셨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본문은 그런 뜻이 아니라 앞 구절에서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듯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데, 여러 지체가 있다고 하면서 우리가 한 몸인 증거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느니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각자 받은 성령이 한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니고요. 아니, 성령님이 무슨 세례를 베푼단 말입니까? 그런 말이 구약에 있습니까? 신약에 있습니까? 오히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아 우리에게 베풀었다고 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요?


박 목사님은 자꾸 구원받은 우리를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덧붙이시는 작업을 성령님께서 베푸시는 “성령 세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즉,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는 세례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성령님께서 베푸시는 성령세례가 아니라 성령님의 사역이라고 이야기를 해야 더 올바르다고 생각을 합니다.


6. 예수님이 주시는 세례로써의 성령세례(성령의 부어주심)


이 단락에서 박 목사님은 더욱더 헷갈리게 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박 목사님은 성령세례를 총 3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 번째 성령님께서 베푸시는 세례로써의 ‘성령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즉 연합되게 하는 세례이고, 두 번째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신다고 했을 때의 그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세례’는 우리 모든 신자에게 성령님이 내주케 되는 그런 의미에서의, 즉 주께서 베푸시는 1차적 의미로서의 성령세례이고, 세 번째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의 부어주심으로서의 ‘성령세례’는 구원 얻은 것과는 다른 그 이상의 선물이고 그 이상의 경험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성령세례들은 성경에서 분명한 차이를 둔다고 합니다. 아니, 성령세례가 박 목사님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렇게 구분이 되는 것인가요? 그것도 3가지로 말입니다.


그러면, 박 목사님이 말하는 2차적 의미에서의 예수님께서 성령의 부어주심의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박 목사님은 예수님이 주시는 2차적 의미에서의 성령의 부어주심의 근거의 대표 구절로 요한복음 7장 38,39절 말씀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라고 하면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표현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서의 성령세례(1차적 의미)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 표현이 너무 강하여 본인도 인식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는 예수님께서 주실 것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에 성령님이 주시는 세례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령님이 안계신다는 묘사는 성령님이 내주하시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성령의 부어주심이 없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표현은 구약적인 표현이고, 상징으로서 성령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인이 인식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면, 즉, 부활승천하시면 성령님께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성령님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성령님께서 내주하고, 안하고의 문제도 아닙니다. 박 목사님이 왜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게 되느냐 하면, 구원 중심으로 성경을 보게 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7. 성령의 부어주심과 성령 충만의 차이


박 목사님은 이번에는 한 술 더 떠서 성령의 부어주심과 성령 충만과도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정리를 해보면, 먼저 성령님께서 베푸시는 세례로서의 성령세례(그리스도와 연합됨)가 있고, 두 번째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1차적 의미로서의 세례(성령의 내주)가 있고, 세 번째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2차적 의미로서의 세례(성령의 부어주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락에서는 이 성령의 부어주심과 성령 충만은 또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박 목사님은 성령세례를 총 4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성령세례는 3가지로 나누어지고, 이 성령세례 중 세 번째 성령세례(성령의 부어주심)는 다시 성령 충만과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박 목사님의 말을 들어봅시다. “성령님의 내주가 신자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라면 이제 성령의 부어주심(성령세례)라는 것은 그 외의 일로 인하여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것으로 나에게 확실한 인식되는 것이요, 내가 감각하는 것이요, 내가 분명히 ‘이것이다’라고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독교사에서 부흥의 시기를 그 증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요나단 에드워드, 찰스 웨슬레, 조지 휫필드 등등.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박 목사님은 성경을 오해한 것 같습니다. 박 목사님이 이 책에서 솔직하게 어려운 부분을 토로하고 있지만 결과는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저는 부흥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그 사실이 성령세례와 성령의 부어주심, 성령의 내주하심 등으로 나누어진다고는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님의 사역으로 얼마든지 그런 부흥이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박 목사님이 생각하는 성령의 부어주심과 성령 충만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성화가 등장하거든요. 박 목사님은 확실하게 성령의 부어주심과 성령 충만은 다르다고 하면서 에베소서 5장 18절(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구절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표현은 권고형이고, 성령 세례는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라는 것으로서 권고형은 아니기에 다르다고 합니다. 성령의 부어주심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사하시는 은사임으로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으나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은 열심히 추구할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다르고 구별해야 되며,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은 원래 성경에서 성화의 원리로서 요구되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왜 박 목사님께서 앞 단락들에서 그토록 성령 세례를 3-4가지로 구분하였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구분함으로서 성령 세례는 주어야 받지만 성령 충만은 우리가 노력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점차 성화되어 완전한 길로 나아가듯이...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여러분들은 성화가 되던가요? 성령 충만이 되던가요?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말은 내가 노력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너라는 인간은 안되기 때문에 성령 충만이 있어야 돼! 라는 책망의 말씀이 아닐까요? 그리고 내가 아니고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하시기 때문에 위로가 되는 말씀이기도 하구요. 제가 성경을 잘못 보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명령문들을 우리는 흔히 우리가 지킬 수 있다고 오해를 합니다. 즉,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지 못하여서 예수님께서 이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셨다. 그럼으로 이제는 예수님으로 구원받았고, 중생되었으니 우리가 신약의 권면의 말씀들을 지키자고 생각합니다만 이 사고방식 자체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선택받았으니 율법을 지키자는 것하고 뭐가 다릅니까?


구약이나, 신약에서 성화의 개념은 없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에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거룩함을 얻었습니다. 거룩은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8.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들


박 목사님은 이 단락에서 아예 성령 충만을 성화라고 못을 박습니다. 갈라디아 5장 16-23절 말씀에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라는 권면의 말로 되어 있다면서 이것은 성화, 즉 성령 충만에 관한 것이 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화의 결과는 성령의 열매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본문이 과연 그러한 말씀일까요? 앞에 서도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성경에서 권면한다고 권면을 지킬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오히려 그 권면들이나 명령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더 바라보아야만 하는 자들입니다. 내가 구원받고, 안받고 상관없이 말입니다. 혹시 우리에게 사랑이나 자비 등 성령의 열매가 나왔습니까? 그래서 그것이 우리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맺으신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세례를 받은 자들은 내적, 외적으로 어떤 일이 발생한다고 하는데, 간략하게 요약하면, 내적 현상의 처음은 자기의 내면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 하나님 존재에 대한 자각이 생기고 두 번째는 기쁨과 거기에 따르는 확신이 생기고, 세 번째는 주를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이 생기고, 네 번째는 빛에 대한 이해가 생긴다고 하며, 외적 현상의 처음은 성령 세례를 받은 본인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도 분명히 느낄 수 있는 어떤 증거가 있고, 두 번째는 얼굴이 달라지고, 세 번째는 말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던데, 저는 그러면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것인가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박 목사님의 주장이 사실일까요? 얼굴에 빛이 나지 않는 사람은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일까요?


9. 성령의 인침과 성령의 은사


이 단락에서도 박 목사님은 ‘성령 세례’와 ‘성령의 인침’에 대해서 구분을 시도합니다. 성령 세례와 성령의 인침은 본질은 같으나 초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 세례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라는 내용에 초점이 있고, 성령의 인침은 자기의 구원문제,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를 확인하는 ‘확인’쪽에 초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침을 설명하면서 사도행전 8장의 빌립의 전도와 베드로의 성령 안수사건, 10장의 이방인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 19장의 바울의 에베소에서 성령 안수사건 등을 언급하면서 예수믿는 것과 성령이 임하는 것이 동일한 사건이 아니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 사건들은 계시가 완성되기 전의 초대교회에서 성령이 임하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차원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한 것은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리차드 개핀의 <성령은사론>을 보시면 많은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박 목사님은 성령의 은사를 이야기하면서 성령의 은사는 능력적인 것인데, 이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능력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한 능력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말씀을 가지고 설명을 하는데, 여기도 애매한 문제가 있습니다. 박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교회의 유익’은 뉘앙스가 현실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이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에서 ‘유익’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유익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령의 은사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박 목사님은 또한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 중에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도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납니다. 왜 그럴까요? 같은 성령이고, 한 성령이기 때문입니다.(고전12:11)


10. 성령세례, 어떻게 받을 것인가?


박 목사님은 이 단락을 끝으로, 이제까지 이야기하였던 모든 것을 통하여 본인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면 그 내용이 무엇일까요? 박 목사님은 성령 세례에 대해서 하나님의 약속들을 어떻게 소유할 것인가를 생각하라고 합니다. 즉,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우리가 잘 준비하라는 말이지요. 성령 세례를 소유개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성령 세례는 인과율적인 믿음과 안수라는 방법으로 온다는 오류를 없애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들은 방법론이 아니란 것입니다.


박 목사님은 이런 것들이 방법론이 아니라고 하면서 성령 세례를 받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라고 하면서 다른 방법론을 들고 나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축복의 길에 서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를 받는 곳에 가 있을 것인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성령 세례를 만들 수는 없지만 성경을 잘 보아서 그 축복의 길에 서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는 곳에 가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어떻게 허물과 죄로 죽은 자가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박 목사님의 말을 들어 봅시다. “이제 그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들어갑시다. 첫 번째로 우리는 항상 이 약속을 목표와 생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마치 대학 입시를 앞에 둔 자녀에게 부모가 신경을 쓰듯이 이 약속에 대해서도 그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답니다. 그래야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성령 세례를 받는 이 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고 합니다. 죄들로부터 자기를 거룩케 하기 위해서 애를 써야 된다고 하면서, 죄를 윤리,도덕적인 목록들로 생각을 하고 그러한 구절들을 증거구절로 언급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아를 떨쳐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기도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기도하라는 것은 이것이 인간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큰 상징이라고 하면서도 기도에 관한 증거구절들을 설명하면서 전심전력으로 기도해야 된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 앞뒤가 안맞습니다.


이상으로 박 목사님의 “성령론” 책을 상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제가 보기에 박 목사님께서 네 번째 단락부터 성령 세례와 성령의 부어주심 등을 구별하면서 엉뚱하게 주장하는 이유가 성화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마지막 단락은 제목 자체가 “성령세례, 어떻게 받을 것인가?”가 아닙니까? 우리가 잘 준비하면 성령세례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날마다 성화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은혜가 왕노릇하는 세계)에 소속된 사람입니다. 그것을 날마다 확인하면서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더욱더 죄의 깊이를 깨달아 가는 사람입니다. 아닙니까? 그리고 이 책에서는 선택의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성령 세례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총 177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얇은 책인데, 아무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