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시비돌이 > 우리의 기억은 건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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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은 왜? - 두 위대한 철학자가 벌인 10분 동안의 논쟁
데이비드 에드먼즈 외 지음, 김태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에 불과하다', '기억은 현재의 나를 일깨우기 위해 있는거다'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은 10분 전의 일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상실증의 환자다. 그래서 그는 그 순간순간 기억해야할 것들을 포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어두고, 그 느낌을 쪽지에 적어두거나 중요한 것은 심지어 문신으로 새겨두기도 한다. 하지만 그 기록이 진실이 아닐 수 있는 것은 단지 그 기록은 사실이 아니라 그 기록을 적을때의 느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환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상당부분 지워가면서 살기도 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억을 조작하기도 한다. 성형수술을 받은 환자들의 경우 예전의 기억을 왜곡해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런 경우는 어떤 원인으로든 첫 번째 수술에 불만을 가져서 재수술을 하는 경우에 흔히 보게 되는데 '전 아주 쪼금만 세웠거든요'라고 말하던 환자도 과거에 수술했던 보형물을 제거한 후의 자기 코를 보고는 아연 실색하는 경우도 많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전문가들은 그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조작된 기억을 믿고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그 외에도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기록에 많은 의존을 한다. 그러나 그 기록이라는 것 역시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 또는 그 당시에 가지고 있던 생각(진실이 아닌)을 주로 기록한다는 측면에서 자기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기억일 소지는 충분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왜?'라는 책에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책은 유럽 지성사에서 유명했던 비트겐슈타인의 '부지깽이 스캔들'을 여러 사람과 자료를 통해 추리형식으로 논증한 책이다.
'부지깽이 스캔들(?)'이란 1946년 10월 25일 비트겐슈타인이 케임브리지에서 벌어진 토론회 중에 초청발표자 칼 포퍼에게 고성을 지르며, 부지깽이를 휘두른 후 문을 꽝 닫으며 나가버린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한동안 철학계를 뒤흔들었다고 하는데, 당대의 대철학자 비트겐슈타인과 칼 포퍼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자리였고, 그 자리에 버트란트 러셀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자리였을 것이다.
포퍼의 지지자들은 이 사건을 논쟁에서 진 비트겐슈타인이 흥분해서 나가버렸다고 해석했고, 포퍼 역시 자서전 등을 통해 그 날의 승리(?)와 그 과정에 있었던 에피소드에 대해 기록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은 두 천재의 엇갈린 삶의 궤적을 통해 두 사람의 스타일과 그 날의 사건을 추리 형식으로 풀어나가고 있는데, 결론(결국은 추론이 되겠지만)은 악마적인 카리스마를 지녔던 비트겐슈타인을 꺽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던 정열적인 철학자 칼 포퍼가 비트겐슈타인 마저 꺽었다는 자부심에 따른 과도한 의미부여로 인해 그 날의 기억을 왜곡시킨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흥분하면 소리를 높이고, 부지깽이 같은 것을 들고 흔들어대던 비트겐슈타인에게 그 날의 세미나는 약간 더 흥분한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마저 포기한 비트겐슈타인의 초기학설에 대한 반론을 듣고 흥미를 잃고 중간에 자리를 떳다고 훗날 제자에게 밝혔다는 것이다.
평생 비트겐슈타인에게 열등감을 느꼈던 칼 포퍼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운명적인 만남에서의 일에 과도한 의미부여를 통해 기억을 왜곡시켰다는 '부지깽이 스캔들'의 예를 보면서 새삼 인터넷이 얼마나 무서운(?) 공간 인가도 생각하게 된다.
평생을 준비해 한번의 토론에서 이겼다는 기억을 간직하며 자서전에 글을 남겼던 칼 포퍼가 살던 시대와 달리 우리는 한달에도 몇 번씩, 아니 하루에도 몇 번씩의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것도 공간적인 제약없이 말이다.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도 토론을 벌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기술의 발달로 인해 지식인은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린 우리의 기억을 왜곡시키고 있지는 않을까? 주위에서 가끔 그런 경우를 본다. 현재 벌어진 일을 자신만의 언어로 해석한 후 그것을 진리인 양 받아들이는 경우를 말이다. 그 자신만의 언어로 왜곡된 기억(사실은 해석인)을 되씹으면서 그것에 세뇌되는 경우도 흔히 있는 것 같다. 난 혹시 그렇지 않을까? 다행히 인터넷이란 공간은 수많은 관중들과 감시자가 있어서 좀 더 다양한 시점을 종합한 객관적인 해석을 내릴 여지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 비트겐슈타인과 칼 포퍼
'비트겐슈타인은 왜?'라는 책은 누가 논쟁에서 이기고 지고의 의미를 부각시키고자 한 책은 아니었을 것이다. 악마적 카리스마의 비트겐슈타인과 정열적인 철학자 칼 포퍼가 성장했던 배경과 그 시대 상황 등을 통해 그 사람의 사상과 성향을 들여다본 인물평전에 가까운 책일 것이다.
버트란트 러셀이 "그(비트겐쉬타인)가 눈사태라면 나는 한 주먹으로 뭉칠 수 있는 눈에 불과할 것이다(이에 비해 포퍼는 러셀에게 서평을 써달라는 부탁을 거절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라는 고백을 했다는 것을 볼 때 비트겐슈타인의 카리스마에 악마적이란 단어가 붙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 비유를 한 평도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주류학파였던 '빈 서클'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비트겐슈타인은 이 서클에 관여하지 않고도 대부나 우상처럼 추앙받았지만, 포퍼는 이 서클의 회원으로 받아들여지기를 고대했으나 초대받지 못했다고 한다. 포퍼가 빈 서클과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은 그를 외톨이 독설가로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최상류층 집안(라벨이 그의 동생을 위해 피아노 협주곡을 써주기도 하고, 브람스가 그 집안 아이들의 음악교육을 담당할 정도로 ^^)에서 태어나 귀족적이고, 오만하고(카리스마는 거기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학문적으로도 아주 쉽게 천재성을 인정받았던 비트겐슈타인보다는 비교적 어려운 환경에서 많은 노력을 통해 여러가지를 쟁취했고,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열등감(13살이라는 나이차이로 인한 사회적 위치에도 기인했을 것이다)으로 인해 훨씬 더 어렵게 학문적 성과를 이룬 포퍼에게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최상류층이었던 비트겐슈타인은 당연히(?) 보통사람들의 삶의 대한 성찰이 부족했었을 수 있고, 그에 철학에 대해 "까페" 분위기가 난다고 빈정거린 포퍼에게 단지 출신성분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었다고만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열등감이 있었다곤 하더라도 포퍼는 그로 인해 전체주의와 권위주의를 배격하는 위대한 저서 '열린 사회와 그 적들' 등을 저술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포퍼는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열등감 내지는 보이지 않는 무시, 편견 등을 극복하고, 동등한 평가를 받는 철학자가 되었지만, 수많은 '살리에리'들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그라들지고 있는 지도 모르는 일이다. 단지 그것이 타고난 재능의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