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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달 전에 브레드 피트 주연의 “바벨”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재미는 별로 없었습니다. 재미가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여러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받았더라구요. 원래 재미없는 영화가 상은 잘 받는다는 사실을 전부 알고 계시죠?

영화는 네 개의 사건들이 교차하는 방법으로 진행되는데, 별개의 사건들이 총이라는 매개에 의해서 연결이 됩니다. 이 영화는 서로간의 의사소통의 부재에 의한 충돌을 이야기하는데, 이 소통의 부재는 언어가 틀리기 때문에 나타납니다. 이 영화에서 각 배우들은 약 5개의 언어를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영화평이 아니고, ‘언어’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도 “바벨의 언어”입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런 언어의 혼란에 의한 의사소통이 단절되었을까요? 성경에는 ‘바벨탑사건’이후부터 언어의 혼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벨의 언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아담의 언어”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구약성경의 창세기를 따라 언어의 본질에 대해서 논의할 것인데, 이 논의는 중앙대 교수 진중권의 설명에 의존하였습니다. 대부분이 진중권의 설명이고, 저의 코멘트도 중간 중간에 있지만 구별하지는 않겠습니다. 물론 진중권도 독일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사유에 빚진바가 큽니다. (우리의 모든 언어는 사실 다른 사람들의 언어의 간접인용입니다.)

아담의 언어


“언어는 도구다. 언어가 사람에게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그리고 우리 모국어가 우리에게 아무리 소중하다고 해도, 언어가 도구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고 그것을 우상으로 떠받드는 것은 비합리적이라는 사실은 오롯이 남는다”

위 말에서 우리는 근대의 도구주의적 언어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언어를 ‘도구’이상으로 보는 것은 ‘비합리적’ 우상숭배가 된다는 말인데,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은 ‘기술합리성’을 이성의 유일한 형태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진중권은 말합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언어가 한갓 도구로 전락해버린 것일까요? 이것을 찾아 벤야민은 구약성경 창세기로 돌아갑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말’로 세상을 창조하였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1:3) 하나님의 피조물은 이렇게 원래 ‘말’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본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였기 때문에 그때만 해도 자연은 제 몸 안에 ‘언어적 본질’을 구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소리 없는 자연도 그 언어적 본질에 힘입어 인간과 의사소통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유년기의 인류는 자연을 그저 쓰고 버리는 도구로 간주하지 않았고, 말 못하는 자연에서 언어적 본질을 보고, 그것과 평등하게 소통하며 미메시스(mimesis)를 하였습니다. 이 미메시스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존재론적 닮기’를 말합니다. 가령 어린이들은 의사나 선생님만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와 달님도 연기를 합니다. 이게 ‘미메시스’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이것을 ‘되기’라고 이야기하겠지요. ‘의사되기’, ‘자동차되기’ 등등.

이렇듯 ‘언어’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성경에도 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19:1-4)라고 하였습니다. 자연의 언어적 본질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지요.


모든 사물이 언어를 가지고 있지만 인간의 언어는 여러 언어 중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집니다. ‘말’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인간만큼은 직접 흙을 빚어 만드셨고, 그에게 당신의 작품에 이름을 붙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도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2:29) 이렇게 인간의 언어는 이름하는 언어이고 이것이 사물의 언어와 구별된다고 합니다.

“말함”속에서 사물은 창조되고 또한 인식됩니다. 하나님은 말함으로써 세상을 지으시고, 인간은 이름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를 계속합니다. “있으라”는 창조의 말함, “일컫다”는 인식의 말함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사물 속에서 ‘언어적 본질’을 발견해내어 그것을 ‘이름’합니다. 소리 없는 사물의 ‘언어적 본질’을 인간의 음성으로 “번역”합니다. 사물의 본질이 고스란히 인간의 음성으로 옮겨지기에 사물과 이름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이 유사성은 독일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의 초기언어철학이기도 합니다. 그림이 실제 세계를 반영하듯 언어도 실제 사물을 반영한다는 것이지요.

앞에서 말한 번역은 ‘인식’입니다. 이름을 들으면 그 사물의 정신적 본질(성경적으로 말하면 창조적 본질)이 저절로 알려지는 그런 직관적 인식입니다. 아담의 언어에서 ‘명명된 것’과 ‘인식된 것’은 직접적으로 일치합니다.


목소리가 없는 사물은 인간의 언어 속에 제 언어적 본질을 전달합니다. “모든 자연은 자신을 전달할 때 언어 속에, 즉 인간 속에 전달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소쉬르에게 ‘이름’은 사물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였지만(이것을 ‘언어의 자의성’이라고 하지요.) 이름하기는 결코 자의적인 게 아닙니다. 이름은 사물의 언어적 본질을 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자연의 ‘주인’으로 드높였을 때, 이는 결코 자연을 제멋대로 소비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물 속에 담아놓은 언어를 보존하는 관리자(Walter)가 되라는 뜻입니다.(이 ‘발터’는 발터 벤야민의 이름의 뜻이기도 합니다.)

사물이 제 정신적 본질을 언어에 담아 인간에게 전달한다면, 인간은 제 정신적 본질을 언어에 담아 하나님께 전달합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언어 ‘속에서’ 제 정신적 본질을 전달합니다.

사물과 이름이 보이지 않는 유사성으로 묶여 있었던 언어.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언어를 잃어버렸습니다. 창조를 마친 후 하나님은 제 작품에 평가를 하였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4) 뱀은 아담에게 바로 이 능력, 즉 좋고 나쁨을 판별하는 신적 인식을 약속하였습니다. 물론 그 열매는 이 지혜를 줄 수는 없었고, 결국 신이 되려는 이 주제넘음은 우스꽝스러운 패러디가 되었습니다. “외적으로 전달하는 말..., 창조하는 하나님의 말의 패러디...”

 

 

바벨의 언어

진중권은 인간의 타락의 결과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는 언어가 이제 한갓 자의적 기호로, 전달수단으로 전락하였고, 인류의 모어(母語)가 여러 개의 언어로 갈라지고, 이로써 소위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사물에 관한 직관적 인식 대신 판단의 마술이 발생하였고, 이는 하나님의 심판(판단)을 흉내낸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참칭하였다는 것이지요. 세 번째는 ‘추상’이라는 것이 언어에 도입되었다는 것입니다. ‘사과’는 추상적 개념이고, 개념은 개별자들의 고유명사를 지워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타락의 결과에 대해서 동의를 하십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아담의 타락의 결과 중 첫 번째와 세 번째는 맞는 것 같은데, 첫 번째에서 인류의 모어가 여러 개의 언어로 갈라졌다는 것은 ‘바벨탑사건’이후에 발생합니다.


‘아담의 언어’의 타락은 판단을 위해 고유명사를 지우고, 구체적인 개별자들을 획일적인 개념의 감옥에 집어 넣어버립니다. 이로써 개별자들의 고유성은 무시되고 인간이 추상적 판단에 의존할수록 개별자들의 고유성을 보는 ‘직관’의 능력도 점점 사라집니다. 이제 인간은 사물을 개념의 눈으로 봅니다. 과거에 자연은 목소리가 없어도 인간과 소통을 할 수가 있었지만 자신의 언어적 본질을 부정당한 자연은 이제 침묵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상 자연이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소리를 우리가 못 듣는 것이지요. 로마서에 보면, 피조물들이 함께 탄식하며 고통한다고 하였습니다.(롬8:22) 진중권도 여기에 대해서 인용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또 다른 형태의 침묵이 시작된다. 이를 우리는 자연의 가슴 아픈 애도라 부르자. 이는 형이상학적 진리다. 자연에 말을 부여한다면, 모든 자연은 소리높여 탄식을 하리라...초목이 바스락 소리를 내기만 해도, 거기에서 한탄의 소리가 들린다. 말을 잃었기에 자연은 탄식한다. 자연의 슬픔은 그녀를 침묵하게 만든다. 그 모든 애도 속에서 자연은 말이 없으려고 한다.”

유년기의 인류는 추수를 할 때 곡식이 낫에 베여 쓰러지며 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래 전에 이 미메시스적 소통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자연과 소통하기를 멈추고 그것을 죽은 사물로 간주하자, 사물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기를 멈추었습니다. 하기야 인간이 어디 자연과만 소통하기를 멈추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소통도 멈추었고, 한발 더 나아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바벨탑을 쌓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잠시 ‘바벨탑’사건을 이야기하자면, 구약성경 창세기에는 태초에 언어가 하나였는데 인간들이 하늘까지 닿고자 바벨에서 탑을 쌓았고,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케 하여 인간을 지면에 흩었다고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언어의 혼잡으로 의사소통에 애로사항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들이 전부 ‘바벨의 언어’들입니다.

진중권에 의하면, ‘역사’는 타락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타락이 언어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그 언어가 나타내는 양상의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타락 이후 근원적 언어는 단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수많은 개별 언어들 속에 제 흔적을 흩어놓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하나의 사물을 가리키는 낱말을 다른 언어의 역어(譯語)들과 함께 모아놓으면, 그 역어들 사이에서 불현듯 그 말의 근원적 의미가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원문은 번역을 통해 의미의 손실을 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높고 순수한 언어의 분위기로 상승”한다고 본 것이지요.

진리는 번역과 원문의 동일성 속에 있지 않고, 원작과 번역의 차이, 그 번역과 다른 번역들의 차이를 통해 전개된다고 합니다. 순수한 언어, 궁극적 진리는 이 차이들의 운동의 총결산으로, 다시 말해 “언어상호간의 상호작용을 통한 총체성” 속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좀 어려운데 성경과 비교를 해보면, 성경도 구약의 원문인 히브리어나 신약의 원문인 헬라어로만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각국의 번역을 통해 성경의 (원문의) 의미가 더 잘 드러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번역작업이 중요한 것이고요. 우리는 이제 사물의 근원적 언어를 잃어버렸지만 그 언어들의 양상의 ‘변화’를 통해 근원적 의미를 추적해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벤야민은 아담의 언어, 즉 “모든 사고가 추구하는 궁극적 진리”를 “은밀하게 담고 있는 진리의 언어”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이데거의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과 연관이 있습니다. 언어의 본질은 세상을 지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없었던 것을 있게 하는’ 존재수립의 기능이나 아담의 이름처럼 사물의 참된 모습을 현전시키는 개시(開示) 기능에 있고, 벤야민과 하이데거는 언어의 이 근원적 힘을 회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가능할까요?


언어의 근원적 힘에 대한 회복은 인간의 노력으로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회복은 다시 하나님께서 회복하셔야만 가능한데, 그때가 언제일까요?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전면적으로 임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인간을 새롭게 하심으로, 창조를 새롭게 하심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언어는 하나입니다. 그때 사용될 언어는 아담의 언어처럼 분명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언어일 것입니다.


성경도 각국 언어로 번역되어 있지만 알아들을 사람만 알아듣고 나머지 사람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성경이 방언이 되었습니다. 듣기는 듣고 읽기는 읽어도 내용이 이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귀를 막고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막4:11-12)


우리가 예수님의 비유와 성경을 이해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성령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아는 자는 뭔가 통하는 게 있습니다. 소통한다는 것이지요. 바벨의 세상에서 만약 우리가 소통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언어 때문이 아니고 복음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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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호 2013-12-28 0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 글 담아가겠습니다~
 

 

오늘 오후 예배시간에 학개서 1-2장을 공부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기 위하여 기초공사를 하던 중 사마리아 백성들의 방해로 성전건축이 중단되고, 자신들의 집만 새로 지어서 살고 있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 학개 선지자에게 임합니다. 그래서 학개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외칩니다.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板璧)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학1:4) (* 판벽한 집은 지붕과 벽에 조각한 판을 붙인 화려한 집을 말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열심을 불러일으키다, 깨우치다) 그들이 15년 동안 중단되었던 성전건축을 재개하게 됩니다. 그러나 옛 솔로몬 성전보다 초라한 ‘스룹바벨’ 성전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전 영광은 솔로몬 성전의 영광이고, 나중 영광은 장차 새성전으로 오실 예수님의 영광을 예언하는 말씀이 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입니다. 예수님은 이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려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자신이 참 성전임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공생애 기간 동안 성전을 무시하고, 죄를 용서하거나 병을 치유하거나 불결한 자를 정결케 하는 등 성전의 기능을 스스로 수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부패하였던 성전을 공격하는데, 그 사건이 바로 ‘성전청결’ 사건입니다.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기구(器具)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許)치 아니 하시고”(막11:15-16)

이 사건은 단순한 ‘성전청결’을 넘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에게 자신의 죄목에 대한 기소와 죽음을 유발시키기 위한 상징적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전 행위는 우연한 것이 아니라 미리 계산된 행위였습니다. 위 구절의 앞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막11:11) 마치 성전 행위를 하기 전에 미리 조사하는 듯한 인상을 받지 않습니까?


또한 예수님은 성전 제사를 적극적으로 방해까지 하였습니다. “아무나 기구(器具)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 하시고” 제사장들이 성전 제사에 필요한 제사 기구들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방해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현재의 성전 제사는 타락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성전이 되어서, 자신의 죽음을 통한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속죄와 새언약의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파괴될 것이라는 것과 자신이 새성전을 건축하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공격에 대해서 당연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 이들 세 집단은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멤버들임)은 예수님을 죽일려고 모의를 하게 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막11:18) 이런 사실들을 비추어 보면 예수님의 성전 행위는 사실상 성전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성취하고 ‘새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촉발시키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행위에 대해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심문’을 합니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막11:27)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즉답을 피하면서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는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막11:30) 이 말씀에는 중요한 내용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요한의 ‘사역’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면 예수님 자신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성전 행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의미를 포함한 것이고, 더 나아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고,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막1:11)라고 말씀하신 것을 들었기 때문에,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전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러한 질문에 이들이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이 사실(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전 행위를 한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심문’ 다음에 바로 나오는 예수님의 ‘포도원의 악한 농부 비유’에 의해서도 입증됩니다.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갔다가 때가 되어 농부들에게 세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내는데 농부들이 종들을 때리고, 죽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아들은 공경하겠지 하면서 아들을 보내지만 농부들은 아들마저 죽이면서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주인이 농부들을 진멸하지 않겠습니까?(막12:1-9)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아들은 농부들(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과 포도원 주인(하나님)이 악한 농부들을 진멸할 것이라는 내용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암시적인 말씀들 때문에 이들은 예수님을 죽일려고 모의를 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체포되어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게 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막14:55) 증인 2명이 증언을 하여야 처벌을 할 수 있는데, 특별히 예수님을 죽일 증거가 없자 그들은 ‘거짓 증거’를 찾아서 증언합니다.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막14:58)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성전이 파괴될 것을 말씀하셨는데, ‘거짓’ 증인들은 예수님이 직접 성전을 파괴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지요.

대제사장이 예수님의 대답을 재촉하였지만 대답이 없자 자신이 다시 질문합니다.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막14:61) 여기서 ‘찬송받을 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를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둘러서 표현합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질문입니다. 대제사장이 이런 질문(네가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야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단의 신탁’에 의해 종말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메시야 사상이 있음)을 하게 된 배경을 지금까지 자세히 설명하였는데, 연결이 되십니까? (예수님의 성전 행위-옛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새성전을 짓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포도원의 악한 농부 비유)


대제사장의 이 질문은 사무엘하 7장 12절의 예언의 말씀이 배경에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지금 예수님이 하나님을 위해 새성전(집)을 지을 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긍정적으로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막14:62)

 

 

이 말을 들은 대제사장은 자기의 옷을 찢으면서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막14:63-64)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참람죄’로 정죄합니다. 미쉬나에 의하면 참람죄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때에 해당되는데,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성전을 허물 것이라고 위협한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역하는 ‘참람죄’에 해당한다고 본 것입니다.

성전을 허무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거역하는 것이 될까요? 그것은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고, 이 집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이 거하는 처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 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신12:11)


이렇게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에 의해 참람죄에 해당하는 죄목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오히려 새성전을 짓는 행위가 되었던 것이고, 예수님이 성전이기 때문에 다시 성전 제사를 드리지 않더라도,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젠 예수님을 향해 예배하는 것이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신 그 말씀이 예수님이 친히 새성전되심으로서 성취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영광이고,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네요. 이번 성탄절은 새성전되시기 위해서 친히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본 글은 김세윤 교수의 논문모음집인 “예수와 바울” 중 ‘예수와 성전’ 논문 및 오늘 오후에 공부한 학개서 말씀을 토대로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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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코드』를 보고..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를 영화화한 <다빈치코드>가 개봉되었습니다. 주위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별루 재미없다는 반응이였는데, 저도 책을 읽어보지 않고 영화를 보아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리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였습니다.


영화평을 작성하기 전에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핵심 내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아기를 임신하고 있었고,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박해를 피해 마리아는 프랑스로 넘어가서 아기(여자)를 낳았으며, 그 자손들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 사실이 밝혀질 경우 예수님의 ‘신성’에 타격을 입을 것과 교황청의 권위가 무너질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 후손들을 제거하려고 주교들의 비밀조직(요푸스데이)을 이용하여 예수님의 후손을 찾는데(그리고 제거하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시온수도회’라는 비밀조직은 이에 대항하여 예수님의 후손을 수호하는데 조직의 사활을 걸고 지켜내고 있으며, 예수님의 후손이 있다는 사실과 위치를 암호화(코드화)해서 다른 사람들은 이 암호를 풀 수 없고, 핵심멤버(시온수도회의 수장)만 이를 풀 수가 있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예수님의 후손을 둘러싼 쫓고 쫓기는 싸움은 1세기부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던 15세기까지 이어지고,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면서, 예수님의 후손이 있다는 사실을 이 그림에 암호화(코드화)시켜놓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빈치는 ‘시온수도회’의 수장이였구요.


그러면, 이 그림의 어디에 코드화시켜 놓았을까요? 이 “최후의 만찬” 그림에는 ‘성배’가 없다고 합니다.(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아니 최후의 만찬에 성배가 없다니요?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에서 떡을 떼시고, 술을 잔에 부으시면서 이는 내 살과 피라고 하시면서 이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였지 않은가요?

그런데, 왜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의 핵심인 술잔(성배)을 빼버렸을까요? 그것은 성배는 술잔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인 것을 나타내기 위해 성배를 빼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의 우측옆(예수님쪽에서)에는 공간이 비어있고, 예수님의 반대방향으로 비스듬이 누워있는 사람이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공간의 라인을 따라가면 성배가 그려진다는 것입니다. 성배가 코드화(고대에는 잔이 여자를 상징한다나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스듬이 기대어 있는 마리아를 예수님의 좌측옆으로 이동시키면 정확하게 예수님의 좌측으로 기대어있는 모습과 자연스럽게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그림을 보고 설명을 하면 더 쉬울 텐데(네이버에서 조회해서 보시면 됩니다.) 아쉽지만 일단 넘어갑시다. 그동안 예수님의 성배를 찾는 전설이나 영화, 소설 등이 무수히 많았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 실체가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15세기의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에 코드화시켜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까지 잘 보존(시온수도회 덕분?)되어 그 예수님의 후손이 ‘소피’라는 여자주인공이라는 것이 결론입니다.


이 후손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극적인 요소들이 배치가 되면서 영화가 구성되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약간 지루한 면도 있었으나, 소설을 읽어본 사람들의 반응은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영화를 관심있게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 내용이 사실일까요?

여러분, <다빈치코드>는 소설이고 영화입니다. 즉, 허구라는 것입니다. 착각하지 마시고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역사소설이나 대하소설을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저도 옛날에 역사소설 등을 좋아해서 읽어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실존인물’이 등장하면서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작품이 ‘구성’되면 그 소설 전체를 사실로 오인을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작가가 실존인물과 역사적 사건만을 발췌하여서 세밀하게 새로이 구성한 플롯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면 그 작가의 뛰어난 ‘구성’ 때문입니다. 이를 역사적 사실과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이 소설도 댄 브라운이라는 작가가 쓴 소설입니다. 여기서 실존인물과 역사적 사실로 등장하는 것은 다빈치와 “최후의 만찬”인 그림입니다.


여기서부터 영화에 대한 비평입니다. 다빈치가 실존인물임에는 틀림없으나 이 다빈치가 ‘시온수도회’ 수장이였다는 말은 금시초문이고, 허구입니다. “최후의 만찬”도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가 만찬 자리에 있었다고 쳐도 그 사실이 예수님과의 관계(결혼)를 통해 후손을 낳았다는 결론은 비약입니다. 설사 성배가 없다손 치더라도, 이것을 막달라 마리아와의 결혼으로 연결하는 것은 비약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셨다는 내용이 나오는 복음서나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가 있다고 해도,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과 결혼하였다는 결론으로 이끄는 것도 비약입니다. 사실 이런 내용(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였다는 내용)은 “예수의 마지막 유혹”이라는 영화에도 언급되었던 내용이지요.

 

또한, 성배가 마리아를 상징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예수님의 후손하고 뭐가 상관이 있습니까? 이것(즉, 성배가 마리아를 상징하더라도)이 예수님의 후손이 있다는 내용에 결정적인(혹은 정황적인)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마치 진화론자들의 진화단계 이론에서 결정적인 ‘연결고리’가 빠졌듯이.


따라서 이 영화의 핵심요소인 다빈치의 그림에서 마리아를 발견할 수는 있어도 그 외 추가적인 요소(예수님이 마리아와 결혼한 사실과 후손이 있다는 사실)는 작가의 상상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 진지하게 대응하였는가요? 단지 소설일 뿐인데...


사람들은 열광합니다. 현대인들은 이슈를 찾아서, 이벤트를 찾아서 몰려듭니다. 할인점이나 백화점에 이벤트 행사한다면 물불 가리지 않습니다. 언론에서는 이러한 이슈들만 노리고 뉴스에 게재를 하고, 폭발적인 조회수가 현대인의 이런 경향을 증명합니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사건으로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지루하고 평범한 것은 견디지를 못합니다.


모든 회사에서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이런 대중심리를 마케팅에 적극 이용하여야 성공합니다. 이것은 영화산업이나, 소설이나, 음악계나 차이가 없습니다. 댄 브라운은 이 심리를 적극 이용하였습니다. 이 심리는 현대인의 고유한 심리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고유한 심리입니다. 세계 최대의 종교인 기독교에서 핵심교리인 예수님의 ‘신성’을 공격하는 소설책에, 세계가 열광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돈방석에 앉았습니다.(세계적으로 4,300만부가 팔렸다고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260만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당연히 영화로도 만들어져야지요.


비기독교인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정말 기독교인들의 행태를 보니 미워죽겠는데, ‘울고 싶은데 뺨때려준다’고 기독교의 핵심교리를 공격하고, 또한 기독교 교리 자체에 대한 거부감으로 열광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악마의 책이라는 둥, 사실일까? 라는 둥 온갖 호기심을 갖게 하니 열광합니다. 흥행이 되니 출판계, 영화계, 부수사업 등에서 등달아 이슈화시킵니다. 원래 세상의 구조가 이렇게 흘러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개봉된다고 하니, 한기총에서 결사반대한다고 하고, 이것이 다시 이슈화되고, 사람들은 영화를 더 많이 봅니다. 한기총이 오히려 흥행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역설이지요.

교회에서는 목사님들이 앞 다투어 이런 악마의 영화를 보면 안된다고 하는데, 교인들은 보고 싶어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은 속은 후련하지만 목사님이 보지 말라고 했는데 봐서 내 믿음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불안하고, 끝까지 안보는 사람은 믿음이 좋다고 스스로 자위해 봅니다만, 어딘지 찝찝합니다.

뭐가 그리 불안한가요? 예수님의 복음하고 이 소설하고 뭐가 상관입니까? 예수님의 후손이 있다는 허구의 사실이 무슨 비밀이라도 되는 양 안달입니까? 이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것을 비밀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십자가’를 비밀이라고 합니다. 정말 이것만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후손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구요. 이 ‘십자가’의 코드(비밀)는 ‘시온수도회’ 수장도 모릅니다. 제발 오해하지 마세요.


정말 우리는 믿음이 없습니다. 안 그런가요?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바다에 던지울 것이라는 말씀이 실감나지 않은가요? 우리들의 ‘믿음없음’을 고발하기 위해서 이 영화는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믿음이 선물로 주어진 자만 찾는 작업, 이것이 예수님의 추수작업일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란 말인가요? 말란 말인가요? 저는 별루던데 보고 싶으면 보세요. 그런데 아마 “미션임파서블 3”보다 재미없을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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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았는데, 이 영화가 저에게는 기대이상으로 다가오기에 몇 자 적어봅니다.

 

대충 줄거리를 이야기하면, 박정희 군사독재시절이 최절정에 이르는 1969년을 배경으로 대학을 다니던 부잣집 아들 윤석영(이병헌 분)이 여름방학 때 농활(농촌봉사활동)을 가서 그 마을 도서관 사서로 있는 서정인(수애 분)을 만나면서 서로 사랑이 싹튼다는 내용입니다.


약 열흘 동안 머물면서 서정인과의 추억을 쌓아가는 중에 서정인의 부모님이 도서관을 만들었으나 월북하는 바람에 그 마을 전체에 피해를 입히게 되고 서정인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농활의 마지막 날 밤에 대학생들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영화를 상영해주고, 그 와중에 마을 도서관이 불에 타버리면서 서정인은 윤석영을 따라 서울로 가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대학생과 농촌처녀의 그렇고 그런 사랑이야기인데, 그후 사건이 급반전 됩니다.


일단 윤석영은 서정인과 함께 자신이 다니는 대학교정으로 가서 서정인에게 자신의 가방을 맡기고 학생회 사무실로 올라가는데, 학생회측에서는 박정희 3선 개헌반대 집회를 개최하고, 윤석영과 서정인은 이 데모에 휩싸이게 되면서 서정인이 경찰서로 연행이 되고, 윤석영도 연행이 됩니다.


문제는, 서정인이 부모님(연좌제) 때문에 사상을 의심받게 되고, 서정인이 들고 있던 윤석영의 가방 때문에 윤석영도 간첩혐의로 의심을 받게 되면서 폭력과 협박에 의한 취조가 진행되는데, 윤석영의 아버지는 윤석영에게 서정인을 모르는 여자라고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경찰관의 심문에 윤석영은 서정인을 모르는 여자라고 부인을 합니다. 그러자 경찰관은 윤석영을 서정인의 취조실로 데려가서 대질심문을 합니다. 서정인은 윤석영을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으로 쳐다보는데(여기서 수애의 연기가 일품이지요), 윤석영은 자신이 살려고(당시 시대상황에서 간첩 혐의가 인정되면 최대 사형, 최소 몇 년은 징역살이를 하여야 합니다.) 서정인을 모르는 여자라고 합니다.


서정인은 결국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도 윤석영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여 윤석영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결과 윤석영은 바로 석방이 되고, 서정인은 남한산성에서 징역살이를 하는데, 윤석영은 사랑하는 여자, 서정인을 부인하였다는, 버렸다는 죄책감에 아버지에게 부탁을 하여 서정인도 석방을 시키고, 이제는 절대 서정인과 떨어지지 말자며 무작정 기차를 타고 둘이서 떠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대기실에서 윤석영이 약을 사러 간 사이 서정인은 홀연히 떠나게 되고, 윤석영은 이 서정인을 찾아 36년 동안 전국을 헤매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독신으로 대학교수를 하며 지내는데, 방송국에 다니는 제자를 통하여 편백나무 잎으로 만든 카드를 보고, 추적하여 서정인이 자신과 헤어진 후의 행적을 알게 됩니다.(물론 서정인은 죽었죠.) 그리고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이 영화를 통하여, 두 가지를 느꼈습니다. 먼저 취조실에서 서정인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윤석영의 모습이 베드로가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 예수님을 부인하는 모습과 오버랩이 되었습니다. 윤석영이 서정인을 사랑한다고 자신하던 모습이 취조실에서는 자신이 살려고 부인하는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 베드로와 꼭 같습니다. 저나 여러분도 당시 상황에서 윤석영처럼, 베드로처럼 부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어떻게 다시 예수님을 믿게 되었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승천 후에 주어진 성령의 역사 때문일 것이고, 예수님의 기도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베드로는 평생 그 흔적을 가지고 살 것입니다. 윤석영이 서정인을 그리워하면서 살듯이...


두 번째 느낀 점은, 이미 사랑하심을 입은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언젠가는 미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서정인이 언젠가는 윤석영에게 전달될 거라고 확신하며 편백나무 잎으로 만든 카드를 주위 사람들에게 전달하여 그 향기가 전해졌듯이...

 

성경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합니다. 문제는 생명의 향기를 담당하는 자도 있는 반면에 사망의 향기를 담당하는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고후5:16) 이것을 우리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오직 주님께서 감당케 하심으로 가능할 것입니다.


올 겨울엔 이 영화를.... 아니면 편백나무 향기를 맡으심이 어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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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20세기의 이론서 21권

지난 월요일 교보에 잠시 들렀다가 발견한 의외의 책은 <테오리아 - 20세기를 대표하는 21권의 책>(개마고원, 2006)이었다. '이론(theory)'이란 말의 그리스 어원인 '테오리아'를 국역본의 제목으로 삼았는데, 독어본의 원제는 '세기의 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세기가 지난 세기이므로 '20세기의 책'이라 해야겠고, 그 책들이 모두 분류상 '이론서'들이다. 그러니까 테오리아의 어원적 의미대로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들을 대표하는 책 21권에 대한 평설집이라고 해야겠다. '20세기의 이론서 21권'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이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독일에서 개최된 ‘세기의 책-20세기의 이론들’이라는 기획 강의를 바탕으로 했다. 크게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의 사유전통과 학문분야가 20세기에 거두었거나 적어도 거두려고 애쓴 성과는 무엇인가?”와, “그 학문들은 어떻게 그것들의 시대에 관여했고, 구체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위대한 이론은 무엇인가?”의 두 가지 문제 제기를 통해 산출된 결과물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이론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 21세기에도 지속적인 시사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판단되어 선정한 프로이트에서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모두 21명의 사상가들과 그들의 책, 이론들을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각각의 독특한 접근방법과 깊이를 가지고 밀도 있게 소개했다."

국내에서도 쏟아지고 있는 고전해제서들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문제는 그 해제/평설의 수준이겠다. "난해한 이론서들에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해당 이론서들을 직접 읽어보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해줄" 수 있는 수준 말이다. 그리고 물론 그것이 적절하고 정확하게 우리말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조건하에서.

21권의 이론서를 다루고 있는 만큼 600쪽 이상의 분량을 자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겠다. 일단은 관심이 가는 책을 다루는 장들만 골라서 읽으면 되는 것이니까. 그런 시간조차 낼 수 없다면, 20세기를 '이론적으로' 관조하는 일에는 마음을 접고 눈길을 떼는 게 옳다. 그리고는 21세기만을 한눈팔지 않고 질주하는 게. 굿바이!

남은 자들끼리 누리는 호사가적 관심거리는 과연 21권을 고른 주최측의 안목(편견 혹은 혜안)을 음미해보는 것이겠다. 대략 '상식적인' 리스트인지라 모험적이라고 할 만한 책을 그닥 눈에 띄지 않지만 몇 권 정도는 '독일'쪽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한데, 이 21권 가운데 우리말로 읽을 수 있는 책은 몇 권이나 될까? '아르바이트' 중에 잠시 머리도 식힐 겸 세어보도록 한다.

1.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 레나테 슐레지어

 

 

 

 

프로이트의 대표적인 저작 <꿈의 해석>은 주지하다시피 여러 종의 국역본이 나와 있다. 비록 번역서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기에는 좀 찜찜하다는 의견이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2006)에서 제기된 바 있지만.

2. 후설의 <논리 연구> - 미하엘 아스트로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의 저작들이 제법 소개되었고 연구서/논문들도 적지 않게 나와 있지만, 특이하게도 그의 초기 대표작인 <논리연구>는 번역돼 있지 않다. 분량의 방대함이 이유인지 내용의 난해함이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 여하튼 '고전'의 네임밸류에 걸맞는 번역본이 조만간 나오기를 기대해본다(여담으로 덧붙이자면, 후설의 책은 왜 <논리적 탐구>가 아니라 <논리연구>인가, 혹은 비트겐슈타인의 책은 왜 <철학연구>가 아니라 <철학적 탐구>일까?).

3.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 헤르베르트 야우만

 

 

 

 

지난 1995년에 범우사판으로 나와 있는 <서구의 몰락>이 유일한 완역본이 아닌가 한다. 대학원 시절에 필요 때문에 1권만 사서 부분적으로 읽은 기억이 있다. 나름대로 '세기의 책'에 꼽힐 만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책이지만, 프랑스에서 21권을 꼽았다면 들어갈 수 있었을까? 

4.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 한스 위르겐 헤링어

 

 

 

 

올해 책세상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새로운 전집이 나오고 있고, <논리철학논고>는 그 전집의 첫권이었다. 두툼한 <철학적 탐구>보다 얇은 <논고>가 선정된 건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 아닐까? <탐구>를 읽어야 한다는 부담을 약간은 덜어주니까 말이다. <논고>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해설서로는 박영식 교수의 <비트겐슈타인 연구>(현암사, 1998)가 있다.

5. 베버의 <경제와 사회> - 볼프강 슐룩흐터

국역본은 <경제와 사회 1>(문학과지성사, 2003)으로 출간되었다. 소장도서가 아니어서 당장에 확인할 수는 없지만 완역본은 아니고 더 출간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한다. 국역본의 이미지가 뜨지 않아 대신에 영역본의 것을 옮겨놓는다.

6.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 위르겐 미텔슈트라스

 

 

 

 

두말할 것도 없는 책. 5권의 파이날(결선)을 꼽더라도 당연히 들어가야 할 책이다. 국역본으로는 이기상(까치글방, 1998), 소광희(경문사, 1995) 두 분의 번역본과 해설서를 각각 참조할 수 있다.  

7.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 - 헬무트 레텐

독일의 정치학자 칼 슈미트의 저작들은 비교적 많이 소개돼 있는 편이고 거기엔 물론 <정치적인 것의 개념>(법문사, 1992)도 포함된다. 하지만 당장 서점에서 구해볼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짐작에 21권의 책들 가운데 가장 얇은 책이지 않을까 싶다. <논리철학논고>보다는 얇은 듯하니까. 이미지는 역시나 영역본의 것을 옮겨놓는다.

8. 겔렌의 <인간> - 카를-지크베르트 레베르크

 

 

 

 

아르놀트 겔렌은 '철학적 인간학'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보다 잘 알려진 철학적 인간학자로는 막스 셸러가 있지만(국내에도 더 많이 소개돼 있다), 독일에서는 겔렌의 <인간>이 대표적인 저작으로 꼽히는 모양이다. 겔렌이 책으론 <인간학적 탐구>(이문출판사, 1998)이 유일하게 번역돼 있는 책이지만, <인간>은 그보다 좀더 두툼한 책이다.

 

9.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 페터 뷔르거

 

 

 

 

사르트르에 대해서는 굳이 군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고(<존재와 무>도 새 번역본이 나올 수 있을까?), 다만 해설을 쓴 '페터 뷔르거'란 이름이 반갑다. <해설자들 가운데 내가 아는 두엇 중의 한명이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론으로 유명한 문예이론가 뷔르거의 책은 <전위예술의 새로운 이해>(심설당, 1986)를 필두로 하여 현재 네 권 가량이 번역/소개돼 있다.

10.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 게르하르트 쉬베펜호이저

 

 

 

 

이 또한 두말하면 잔소리인 책이겠다. 또한 <계몽의 변증법>이 확실한 고전인 것은 완독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어쨌든 국역본의 역자가 전면 개정판을 내야했을 만큼 '난해한' 책이기도 해서 적절한 안내서의 도움을 받는 게 좋겠다(영역본의 경우도 몇년 전 전면개역판이 나왔다). 아도르노를 술술 읽는 사람들이 나는 부럽고 미심쩍다.

11. 보부아르의 <제2의 성> - 크리스타 뷔르거

 

 

 

 

사르트르 커플의 책들이 나란히 선정된 것도 눈길을 끈다. 이젠 여성학의 '고전'이라고 해야할 책(크리스타 뷔르거는 혹 페터 뷔르거의 부인일까?). 보부아르와 관한 특이사항이 그녀가 국내에서는 철학자로서는 거의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점. 주로 출간되는 건 '사랑밖엔 난 몰라' 수준의 보부아르이다(그런 그녀가 여성학의 대모이다!).

12. 바흐친의 '변증법적 사유와 수사학' - 레나테 라흐만

 

 

 

 

특이한 일이지만 21권의 책이라고 해놓고 유일하게 구체적인 대표작이 명시돼 있지 않은 사상가가 바흐친이다. 일단은 국역본 <말의 미학>(길, 2006)을 대표작으로 꼽아둔다. 그리고 걸출한 연구서 <바흐친의 산문학>(책세상, 2006)은 나의 추천서이다. 해설자인 레나테 라흐만은 독일에서 활동하는 저명한 러시아문학 연구자이자 바흐친 학자이다. 역시나 아는 이름이어서 반갑다.

13.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의 기본 구조> - 발터 에어하르트

 

 

 

 

물론 <친족의 기본구조>는 국역본이 나와 있지 않다. 레비스트로스의 박사학위논문인데, <구조주의 인류학>이나 <신화학>보다 중요한 업적으로 간주하는 데에는 이 책이 구조주의 인류학뿐만 아니라 구조주의의 프로그램 자체를 가장 잘 보여준다는 판단이 전제돼 있지 않나 싶다. 회고 대담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에서 뒷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고, 책의 보다 구체적인 내용 해설은 김형효 교수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을 참조할 수 있다.

14. 루카치의 <이성의 파괴> - 라이너 로젠베르크

 

 

 

 

흔히 루카치의 범작으로 평가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세기의 책'으로 꼽혀 있어서 놀랐다. 미완의 번역본까지 치면 세 종류의 국역본이 나와 있기도 한 책. 데카당스(반합리주의) 철학 비판서 정도로 나는 알고 있다. 보통 루카치의 주저로는 <역사와 계급의식>을 꼽는 게 일반적인데, 해설을 읽어보고 소장여부를 판단해봐야겠다.

15.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 기젤라 페벨

 

 

 

 

두말하면 잔소리인 책. 하지만, 국역본은 분량상 아직 1/3밖에 나오지 않은 책. 그 사이에 영역본은 개역본이 나왔다. <논리연구>가 한국현상학회의 아킬레스건이라면 <진리와 방법>은 한국해석학회의 '굴욕'이라 할 만하다. 고전 번역에 단합해야 하실 분들이 담합하고 계신 건 아니신지?

16.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 프란츠 폰 쿠체라

 

 

 

 

<과학혁명의 구조>는 국내에 2종의 번역이 있다. 까치글방본과 이화여대출판부본이 그것인데, 교수신문의 번역비평에 따르면 일장일단이 있지만 원저 자체의 난해함을 해소시켜주지는 못한다고. 학부 2학년 때 읽으면서 고전했던 기억이 새롭다(반면에 해설서들은 얼마나 단순명쾌한 것인지!).  

17. 푸코의 <말과 사물> - 우르줄라 링크-헤르

 

 

 

 

바케트빵처럼 팔려나갔다는 푸코의 이 주저 <말과 사물>(민음사, 1986)이 국내에선 절판중이다. 새 번역본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지만 '언제'라는 건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의 빵집들이 고급 바케트를 내놓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리기도 하고(제빵공은 있나?). 이미지로 대신 올려놓은 것은 개리 거팅의 <미셸 푸꼬의 과학적 이성의 고고학>(백의, 1999)이다. <광기의 역사>부터 <지식의 고고학>까지의 자세한 해설을 담고 있는 책이다.

18.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 베르너 슈테크마이어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도 절판된 민음사판까지 포함하면 2종의 번역이 나와 있다. 초기 데리다의 간판격이 책이지만 역시나 읽은 사람 몇 되지 않는다(나도 완독하지는 못했다). 개인적으로 국역본들 외에 영어, 불어, 러시아어본까지 갖고 있어서 언젠가는 마스터해줄 책으로 꼽고는 있다. 조만간 해설서들도 나올 듯하고. 현재까지는 마이클 페인의 <읽기 이론/ 이론 읽기>(한신문화사, 1999)의 해설이 요긴하다.

19. 부르디외의 <실천이론 연구> - 에곤 프레이크

 

 

 

 

부르디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물론 <구별짓기>이지만, '이론서'로 꼽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나 보다. 한데, <실천이론 연구>가 정확히 어느 책을 가리키는지 모르겠다. <실천이성>도 국역본이 나와 있지만 짐작엔 'The Logic of Practice'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영역본의 제목이 그렇고, 불어본의 제목은 <실천의 의미> 정도이다. 러시아어본도 출간돼 있는 책.

20. 하버마스의 <소통행위이론> - 콘라트 오트

 

 

 

 

올해 가장 번듯한 번역본이 나온 책. 역시나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21. 루만의 <사회의 사회> - 위르겐 포르만


 

 

 

하버마스와 함께 독일 사회학을 양분하고 있는 니클라스 루만의 책들은 국내에 좀 얄팍한 책들만 세권쯤 출간돼 있다. 거기에 입문서 한두 권. 그의 방대한 저작 <사회체계>가 구내에 번역/소개되기를 기대한다. <사회의 사회>가 그 사회체계론의 일부인지 독립된 저작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해서 결론적으로 21권의 책들 가운데 5-6권 정도가 아직 번역되지 않은 듯하다. 양호한 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저작들의 지명도를 생각하면 3-4권은 더 번역돼 있어야 했다. 21권의 책들 가운데 독어권의 책이 13권이니까 과반수가 넘는다. 불어 6권, 영어 1권, 러시아어 1권 순이다. 한편, 우리가 자랑할 만한 '세기의 책'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06. 1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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