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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5년 2월
평점 :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읽기 위한 두 가지 예비 고찰
이 책은 이진경 교수가 일반인들을 상대로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인데, 책의 완성도가 뛰어나서 두 번이나 개정판을 내면서(내용도 많이 바뀌였지만) 현재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너무나 쉽게 일반인들을 상대로 근대 및 현대 철학에 대해서 설명을 하였고, 베스트셀러가 된 책입니다. 많은 것을 배웠고, 느꼈습니다.
그후 이진경 교수의 책들을 계속해서 보고 있습니다. 그 외 완성도가 높은 책은 <철학의 외부>와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노마디즘1, 2> 정도 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텍스트인 『철학과 굴뚝청소부』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었기에 제가 충격을 받았을까요? 그것은 이 교수의 ‘문제의식’ 때문이였습니다. 여기서는 이 책을 읽기 위한 예비 고찰로써 간단히 두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1. 문제설정
이 책은 근대 및 현대철학에 대해서 이 교수만의 ‘문제설정’을 가지고 쓰여진 책입니다. 이 교수는, 철학이란 ‘의심하기’라는 방법을 통하여 기존의 지배적인 사고방식과 투쟁하여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정의를 합니다. 여기서 ‘넘어서는’ 것은 당시의 지배적인 어떤 사상을 넘어서는 것이요, 하나의 시대를 지배하는 특정한 사고방식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합니다.
넘어설 때 기존의 사고방식과 새로운 사고방식과의 경계선이 형성됩니다. 넘어서기는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철학한다는 것은 이 경계선들을 찾아내고 그것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라고 이 교수는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경계선을 찾아내는 것이 엄청 어렵다는 것입니다. 철학자 자신들이 경계선들을 말해 주는 경우는 없고, 철학책에서도 이 경계선들을 보여주는 표시는 없기 때문에 일반인들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부각됩니다. 그 찾기 어려운 경계선들을 이 교수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경계선을 찾아내고 있고, 이를 독자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몇몇 철학책들을 보다가도 완독을 하지 못하거나 내용이 거의 기억에 남지 않았던 것은 저자들 나름대로의 이 기준이 없었다는 데에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혼란스러웠고, 어려웠습니다. 철학 훈련이 되지 않은 일반인으로서는 저자가 직접 설명해주지 않으니 그 책을 따라가기가 힘에 부쳤던 것이지요.
이 교수는 저자의 기준, 이것을 ‘문제설정’이라고 합니다. 경계를 확인하고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개념적 도구로서 ‘문제설정’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입니다. 이 교수는 친절하게도 이 ‘문제설정’을 설명하기 위한 예를 들고 있습니다. 저의 집 대문 앞에 아무 양해 없이 며칠 동안 세워둔 남의 자동차를 보고 화가 나서 바퀴에 펑크를 내었다고 하면, 그 자동차 주인이 “아니, 차 좀 주차시켜놓았다고 이렇게 펑크를 낼 수가 있소? 이건 명백히 불법행위이니 배상해 주시오.”라고 항의를 한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 자동차로 인해 많은 불편을 겪었던 저는 그 말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그 사람을 ‘불법주차’로 맞고소를 하겠지요. 그럼 이제 ‘불법 주차한 자동차에 펑크낸 게 불법행위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는 ‘불법주차한 자동차에 펑크를 낸 행위가 불법인가 적법인가?’라는 문제가 설정된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대답 역시 그 문제를 설정한 방식에 크게 좌우되는 것이구요.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동차와 나, 자동차 주인과 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는 그밖에도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주차장이 아닌 남의 집 앞에 불편하게 주차해 둔 이유가 무엇인가? 그건 주차장이 모자라기 때문이며, 근본적으로 도시 교통정책이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회적 측면에서의 접근 방식이고, 해결 방법도 전혀 틀릴 것입니다.
또한 왜 나는 바람직한 일이 아님에도 그 자동차에 펑크를 냈나? 자동차 없는 것도 서러운데 남의 차 때문에 하루 종일 고생을 했으니 화가 나서 그랬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리적 측면에서의 접근 방식인 것입니다.
법적 측면에서의 접근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심리적 측면에서의 대답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즉, 어떻게 문제를 설정하느냐에 따라 그 대답도 틀리게 됩니다. 대답뿐만 아니라 해결 방법도 전혀 틀리게 됩니다. 법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때는 그 법이 정당하냐 아니냐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고, 기존 법의 올바름이 당연시 됩니다.
이건 과학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뉴턴의 이론이 나온 뒤에 다른 행성의 궤도는 다 그 이론에 따라 계산한 게 맞는데 오직 천왕성만 안 맞습니다. 이 경우 ‘이론을 반박하는 사례가 나오면 그 이론을 포기해야 한다.’는 실증주의나 반증주의의 입장에선 “이론과 사실 둘 중 어느 것이 옳은가? 사실이 안 맞는 이론은 버려야 한다.”는 문제설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왕성 궤도를 잘못 계산한 뉴턴의 이론은 거짓이라는 결론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지요.
반면 뉴턴 이론의 지지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다른 건 다 맞는데 오직 천왕성만 안 맞는다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요인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 요인이 대체 무얼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설정을 하면 이젠 다른 요인들을 찾아 나설 것이고, 결국엔 천왕성과 명왕성 사이에 해왕성이라는 행성이 하나 있기 때문이란 걸 발견하게 됩니다.
상이한 문제설정은 이처럼 상이한 대답과 상이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것은 그 문제를 가지고 사고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제한합니다. 여기서 ‘문제설정’을 통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사고방식을 찾아볼 수가 있으며, 그것을 분석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문제설정’이라는 도구를 통해 철학의 경계를 찾아내고, 그 경계의 의미를 읽어낼 수가 있는 것이라고 이 교수는 말합니다.
저는 이 ‘문제설정’이라는 개념이 엄청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성경을 읽는데, 왜 해석이나 그 의미는 개인에 따라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가? 여기에 대해서 고민해보지 않았는가요? 같은 본문을 읽더라도 구속사신학에서는 이렇게 읽고, 언약신학에서는 저렇게 읽고, 성화신학에서는 요렇게 읽는 이유가 ‘문제설정’ 자체가 틀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교수가 예를 든(전혀 다른 의미의 예지만.) 성경구절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라는 본문에서, 왜 말씀이 하나님이 되는지 ‘능력’의 차원에서 이해(문제설정)하는 것과 ‘존재론’적 차원에서 문제설정하는 것은 엄청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그 대답도 하늘과 땅 차이이지요.
2. 두개의 코기토
코기토(cogito)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뜻입니다. 근대철학을 연 데카르트의 명제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요. 그런데, 이 코기토가 중세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계셨나요? 4세기의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제1명제도 이것이였습니다. 어떻게 같은 명제가 서로 대비되는 중세(알다시피 중세는 어거스틴이 열었습니다.)와 근대를 열었을까요?
어거스틴은 플라톤과 기독교교리를 믿음과 이성으로 종합하여 중세철학을 기초지운 사람입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인식의 목표는 신과 영혼이였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겨냥해 제기되는 숱한 회의론을 반박하려고 하였는데, 그 기초가 되는 것이 이 ‘코기토’인 것입니다. 회의론자들이 의심하는 모든 것 중에서 의심하는 자신은, 회의론자들도 반박을 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의심하는 나’가 없으면 어떻게 ‘내’가 의심하겠습니까?
어거스틴은 여기서 더 나가, 이러한 의심하는 ‘내’가 모여서, 이들이 모두 인정하는 지식, 예를 들면 2+2=4와 같은 수학적 지식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긍정하는 도덕적 지혜 등도 확실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러한 것들이 확실한 것이라는 판단을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개인이 아닌 ‘다른 확실한 것’에 의존하여야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신’을 끌어드리죠.
즉, 신이 이런 확실한 판단을 할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인데, 반대로 이야기하면, ‘코기토’라는 확실한 지식을 통해 우리는 신이라는 확실하고 완전한 존재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문제설정’입니다.
그러면, 데카르트는 똑같은 ‘코기토’를 가지고 어떻게 나아갔을까요? 데카르트도 똑같은 회의에 빠집니다. 진리는 어떠한 의심에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확실한 것에 이르기 위한 회의, 이를 ‘방법적 회의’라고 합니다. 데카르트도 모든 것을 의심하지만, 의심하는 자신만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이 ‘의심하는 나’는 자신의 능력으로써 확실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칩니다. 좀 어렵는가요? 쉽게 말해 ‘의심하는 나’는 확실한데, 이 ‘의심하는 나’를 ‘내’가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심하는 ‘나’는 확실한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데카르트의 ‘문제설정’입니다. 더 어렵게 되었죠?
비교해서 말하면, 어거스틴에게는 이 확실한 ‘코기토’를 신이 제공해 주었다는 것이고,(어거스틴의 목표가 신에 대한 인식이였지요.) 데카르트에게는 이 ‘코기토’를 누가 주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라는 자아가 자신의 ‘능력’으로써 확실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며,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 이 능력이 인간 자신에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거스틴에게는 ‘코기토’가 신학의 기초를 제공해 주는 것이라면, 데카르트에게는 이것이 이성(과학)의 기초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핵심은 ‘코기토’가 상반된 역할을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맥락 속에 자리 잡고 있느냐, 어떤 ‘문제설정’ 속에 위치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인 것입니다.
너무 중요한 이야기이지요.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어떤 ‘문제설정’을 가지느냐, 또는 어떤 맥락 속에 있느냐에 따라서 같은 낱말도 상반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생각해보세요. 같은 낱말이라도, 예를 들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라는 의미도 어떤 문제설정이나 맥락 속에 위치하느냐에 따라서 상반된 의미를 가집니다. 이 구원이, 인간을 위한 구원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하나님(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구원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거기에 대한 인간의 반응도 틀릴 것입니다. 성경의 명령문이나 예수님의 말씀들도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 두 가지 개념만으로도 이 책의 의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개념들을 성경에만 적용하였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가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말을 얼마나 많이 오해하는가요? 그것은 나와 상대방의 ‘문제설정’ 자체가 틀리기 때문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상반된 의미가 됩니다.
이 책은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입니다. 내용이 너무 방대하지만 근대 및 현대 철학의 흐름을(물론 이진경 교수 나름대로의 ‘문제설정’에 의해 경계 지어진 흐름이지만) 쉽게, 명확하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