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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만화책은 참으로 경이로운 책입니다. 어떻게 만화를 통하여 역사적인 문제를 사실적이면서도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아트 슈피겔만’인데, 1986년 <쥐> 1권이 완간되었고, 그후 미국이나 여러 나라에서 찬사를 받았으며, 2권은 1992년에 완간되었습니다.(그 해 퓰리처상을 수상함) 이 책은 나치의 ‘유대인학살’을 다루었는데, 2차대전 중 유대인학살(약 6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에서 살아남은 폴란드계 유대인인, 저자의 부친 ‘블라덱 슈피겔만’의 생존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일단 이 만화책을 펼치게 되면 그림이 낯설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주로 이현세, 허영만, 박봉성 등 국내작가의 만화들만 봤기 때문에 이 책의 그림들이 낯설게 느껴질 것이고, 특이한 것은 유대인을 쥐, 나치를 고양이, 폴란드인을 돼지, 미군을 개 등 등장인물을 동물로 묘사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형식으로도 유대인학살의 내용을 다른 어느 매체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 비평가들이나 독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은 것입니다.(작가가 1권을 그리는데 8년, 완간하는데 13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아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 당시 독일군 나치 치하에 있던 유대인들은 고양이 앞에 쥐신세였습니다. 이 책을 보면서 어떻게 인간이 이보다 악할 수 있을까? 아니면 어떻게 인간이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생존할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약 독일군 상황이였으면 그런 악을 행하였을까? 유대인이였으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를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당시 제가 독일군이였다면 명령에 불복종하면 총살감이였기 때문에 상부의 지시에 따라(즐기면서 하지는 않았더라도) 유대인학살에 동참하였을 것 같고(권세를 거슬려 행동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유대인이였다면 포로로 잡히기도 전에 전쟁 중 죽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이 책의 주인공 블라덱은 정말 신의 섭리나 우연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블라덱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요인들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생존본능,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 돈, 그리고 신의 도움(아니면 우연) 등으로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폴란드의 작은 도시에서 영세공장을 운영하던 블라덱이 2차대전에 참전하여 독일군 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상황, 그후 게토(유대인 거주지역)에서 살아남은 상황, 독일군의 체포를 피해 도망 다니던 상황,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상황, 종전후 퇴각하는 독일군에게서 살아남은 상황 등은 한편의 드라마처럼 느껴질 정도로 극적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당시 유대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 반유대주의는 당시 상황뿐만 아니라 2천년을 거슬려 올라가는 뿌리 깊은 것입니다. ‘유대인의 역사’(폴 존슨, 살림출판사)를 보면, 2천년 동안 유대인들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게토도 2차대전시기에 처음 생긴 것이 아니라 중세 때,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정녕 이들에 대한 박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대가를 자신뿐만 아니라 후손에게도 받겠다는 자신들의 외침의 성취일까요?(마27:25)
같은 포로라도 비유대계 폴란드인의 지위와 유대계 폴란드인의 지위는 하늘과 땅차이였습니다. 무엇이 그토록 히틀러나 나치로 하여금 유대인들을 증오하게 한 것일까요? 하기야 당시 시대적인 분위기 자체가 나치뿐만 아니라 비유대계 폴란드인들도 유대계 폴란드인들을 증오하고 멸시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새삼 시대상황을 자각하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전쟁 중 유대인들을 숨겨주었다가 독일군에게 발각되면 죽을 수도 있는데, 목숨 걸고 이들을 숨겨주는 폴란드인들을 볼 때 대단한 용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돈(대가)을 받고 숨겨주는 사람, 숨겨주기로 약속하고 돈을 받고도 독일군에게 고발하는 사람 등 인간군상들을 이 책에서 보면서 인간에 대한 믿음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당시 주인공 블라덱 및 유대인들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였는지 책의 내용 중 몇 대목을 보면, 수용소에서 작업을 나가는 유대인의 머리에 썼던 모자를 독일군 병사가 쳐서 땅바닥에 떨어지게 하여, 그 유대인이 모자를 줍게 한 후 대열을 이탈하였다며 총으로 쏴 탈영병을 죽였다고 하면서 며칠간 휴가를 가곤 하였답니다. 또한 영화 ‘쉰들러리스트’에 보면, 독일군 간부가 사격연습용으로 유대인들을 쏴 죽이는 장면도 나옵니다.
하루에 멀건 수프 조금과 빵 한 조각을 주고 강제노동을 시키면서도 계속 말라가는 유대인들을 보고 노동능력이 없다면서 선별작업을 통해 가스실로 보내는 상황에서 안 마른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물만 먹어도 살이 찌는 체질인가요? (무척 말란 저로서는 1차로 선별 당하였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가스실에서 처리하는 것도 포화상태이고 시간도 걸려 나중에는 구덩이를 파서 그곳에 생매장까지 시키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블라덱이 하는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그래도 이 구덩이에 처넣어지기 전에 가스실에서 끝을 본 사람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지. 다른 사람들은 살아서 무덤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으니까...”
결국 블라덱의 부모님과 친척, 아내인 ‘아냐’의 부모님과 친척, 그리고 아들 ‘리슈’도 전쟁 중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 전부 죽습니다만 블라덱과 아냐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블라덱과 아냐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1968년에 아냐는 자살을 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으로 인간 이성의 위기를 봅니다. 역사가 진보한다는 생각은 인간의 희망일 뿐인데도 아직 우리들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들을 애써 외면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지금도 같은 일들이 세계 곳곳에서 되풀이되고 있지요.
정말 역설적인 것은 그렇게 인종핍박을 받았던 유대인들이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똑 같은 이유로 팔레스타인인들을 핍박한다는 사실입니다. 1948년 2천년만에 나라를 세운 이스라엘이 그곳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죽이고, 강제로 추방하고, 팔레스타인들을 위한 게토에 가두어놓은 상황을 현재 실시간으로 목도할 때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자신들이 그렇게 인종핍박을 받고도 다른 인종을 핍박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여기에 대해서는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이라는 만화책이 실상을 생생히 전하는데, 그 감동 또한 큽니다.)
결론은 나치의 잔혹사(인간 이성의 잔혹사)를 만화로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만화라고 얕보면 안됩니다. 이 만화책은 예술입니다.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이 책 보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