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에 브레드 피트 주연의 “바벨”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재미는 별로 없었습니다. 재미가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여러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받았더라구요. 원래 재미없는 영화가 상은 잘 받는다는 사실을 전부 알고 계시죠?

영화는 네 개의 사건들이 교차하는 방법으로 진행되는데, 별개의 사건들이 총이라는 매개에 의해서 연결이 됩니다. 이 영화는 서로간의 의사소통의 부재에 의한 충돌을 이야기하는데, 이 소통의 부재는 언어가 틀리기 때문에 나타납니다. 이 영화에서 각 배우들은 약 5개의 언어를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영화평이 아니고, ‘언어’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도 “바벨의 언어”입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런 언어의 혼란에 의한 의사소통이 단절되었을까요? 성경에는 ‘바벨탑사건’이후부터 언어의 혼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벨의 언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아담의 언어”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구약성경의 창세기를 따라 언어의 본질에 대해서 논의할 것인데, 이 논의는 중앙대 교수 진중권의 설명에 의존하였습니다. 대부분이 진중권의 설명이고, 저의 코멘트도 중간 중간에 있지만 구별하지는 않겠습니다. 물론 진중권도 독일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사유에 빚진바가 큽니다. (우리의 모든 언어는 사실 다른 사람들의 언어의 간접인용입니다.)

아담의 언어


“언어는 도구다. 언어가 사람에게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그리고 우리 모국어가 우리에게 아무리 소중하다고 해도, 언어가 도구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고 그것을 우상으로 떠받드는 것은 비합리적이라는 사실은 오롯이 남는다”

위 말에서 우리는 근대의 도구주의적 언어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언어를 ‘도구’이상으로 보는 것은 ‘비합리적’ 우상숭배가 된다는 말인데,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은 ‘기술합리성’을 이성의 유일한 형태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진중권은 말합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언어가 한갓 도구로 전락해버린 것일까요? 이것을 찾아 벤야민은 구약성경 창세기로 돌아갑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말’로 세상을 창조하였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1:3) 하나님의 피조물은 이렇게 원래 ‘말’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본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였기 때문에 그때만 해도 자연은 제 몸 안에 ‘언어적 본질’을 구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소리 없는 자연도 그 언어적 본질에 힘입어 인간과 의사소통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유년기의 인류는 자연을 그저 쓰고 버리는 도구로 간주하지 않았고, 말 못하는 자연에서 언어적 본질을 보고, 그것과 평등하게 소통하며 미메시스(mimesis)를 하였습니다. 이 미메시스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존재론적 닮기’를 말합니다. 가령 어린이들은 의사나 선생님만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와 달님도 연기를 합니다. 이게 ‘미메시스’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이것을 ‘되기’라고 이야기하겠지요. ‘의사되기’, ‘자동차되기’ 등등.

이렇듯 ‘언어’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성경에도 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19:1-4)라고 하였습니다. 자연의 언어적 본질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지요.


모든 사물이 언어를 가지고 있지만 인간의 언어는 여러 언어 중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집니다. ‘말’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인간만큼은 직접 흙을 빚어 만드셨고, 그에게 당신의 작품에 이름을 붙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도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2:29) 이렇게 인간의 언어는 이름하는 언어이고 이것이 사물의 언어와 구별된다고 합니다.

“말함”속에서 사물은 창조되고 또한 인식됩니다. 하나님은 말함으로써 세상을 지으시고, 인간은 이름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를 계속합니다. “있으라”는 창조의 말함, “일컫다”는 인식의 말함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사물 속에서 ‘언어적 본질’을 발견해내어 그것을 ‘이름’합니다. 소리 없는 사물의 ‘언어적 본질’을 인간의 음성으로 “번역”합니다. 사물의 본질이 고스란히 인간의 음성으로 옮겨지기에 사물과 이름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이 유사성은 독일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의 초기언어철학이기도 합니다. 그림이 실제 세계를 반영하듯 언어도 실제 사물을 반영한다는 것이지요.

앞에서 말한 번역은 ‘인식’입니다. 이름을 들으면 그 사물의 정신적 본질(성경적으로 말하면 창조적 본질)이 저절로 알려지는 그런 직관적 인식입니다. 아담의 언어에서 ‘명명된 것’과 ‘인식된 것’은 직접적으로 일치합니다.


목소리가 없는 사물은 인간의 언어 속에 제 언어적 본질을 전달합니다. “모든 자연은 자신을 전달할 때 언어 속에, 즉 인간 속에 전달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소쉬르에게 ‘이름’은 사물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였지만(이것을 ‘언어의 자의성’이라고 하지요.) 이름하기는 결코 자의적인 게 아닙니다. 이름은 사물의 언어적 본질을 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자연의 ‘주인’으로 드높였을 때, 이는 결코 자연을 제멋대로 소비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물 속에 담아놓은 언어를 보존하는 관리자(Walter)가 되라는 뜻입니다.(이 ‘발터’는 발터 벤야민의 이름의 뜻이기도 합니다.)

사물이 제 정신적 본질을 언어에 담아 인간에게 전달한다면, 인간은 제 정신적 본질을 언어에 담아 하나님께 전달합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언어 ‘속에서’ 제 정신적 본질을 전달합니다.

사물과 이름이 보이지 않는 유사성으로 묶여 있었던 언어.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언어를 잃어버렸습니다. 창조를 마친 후 하나님은 제 작품에 평가를 하였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4) 뱀은 아담에게 바로 이 능력, 즉 좋고 나쁨을 판별하는 신적 인식을 약속하였습니다. 물론 그 열매는 이 지혜를 줄 수는 없었고, 결국 신이 되려는 이 주제넘음은 우스꽝스러운 패러디가 되었습니다. “외적으로 전달하는 말..., 창조하는 하나님의 말의 패러디...”

 

 

바벨의 언어

진중권은 인간의 타락의 결과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는 언어가 이제 한갓 자의적 기호로, 전달수단으로 전락하였고, 인류의 모어(母語)가 여러 개의 언어로 갈라지고, 이로써 소위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사물에 관한 직관적 인식 대신 판단의 마술이 발생하였고, 이는 하나님의 심판(판단)을 흉내낸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참칭하였다는 것이지요. 세 번째는 ‘추상’이라는 것이 언어에 도입되었다는 것입니다. ‘사과’는 추상적 개념이고, 개념은 개별자들의 고유명사를 지워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타락의 결과에 대해서 동의를 하십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아담의 타락의 결과 중 첫 번째와 세 번째는 맞는 것 같은데, 첫 번째에서 인류의 모어가 여러 개의 언어로 갈라졌다는 것은 ‘바벨탑사건’이후에 발생합니다.


‘아담의 언어’의 타락은 판단을 위해 고유명사를 지우고, 구체적인 개별자들을 획일적인 개념의 감옥에 집어 넣어버립니다. 이로써 개별자들의 고유성은 무시되고 인간이 추상적 판단에 의존할수록 개별자들의 고유성을 보는 ‘직관’의 능력도 점점 사라집니다. 이제 인간은 사물을 개념의 눈으로 봅니다. 과거에 자연은 목소리가 없어도 인간과 소통을 할 수가 있었지만 자신의 언어적 본질을 부정당한 자연은 이제 침묵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상 자연이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소리를 우리가 못 듣는 것이지요. 로마서에 보면, 피조물들이 함께 탄식하며 고통한다고 하였습니다.(롬8:22) 진중권도 여기에 대해서 인용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또 다른 형태의 침묵이 시작된다. 이를 우리는 자연의 가슴 아픈 애도라 부르자. 이는 형이상학적 진리다. 자연에 말을 부여한다면, 모든 자연은 소리높여 탄식을 하리라...초목이 바스락 소리를 내기만 해도, 거기에서 한탄의 소리가 들린다. 말을 잃었기에 자연은 탄식한다. 자연의 슬픔은 그녀를 침묵하게 만든다. 그 모든 애도 속에서 자연은 말이 없으려고 한다.”

유년기의 인류는 추수를 할 때 곡식이 낫에 베여 쓰러지며 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래 전에 이 미메시스적 소통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자연과 소통하기를 멈추고 그것을 죽은 사물로 간주하자, 사물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기를 멈추었습니다. 하기야 인간이 어디 자연과만 소통하기를 멈추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소통도 멈추었고, 한발 더 나아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바벨탑을 쌓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잠시 ‘바벨탑’사건을 이야기하자면, 구약성경 창세기에는 태초에 언어가 하나였는데 인간들이 하늘까지 닿고자 바벨에서 탑을 쌓았고,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케 하여 인간을 지면에 흩었다고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언어의 혼잡으로 의사소통에 애로사항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들이 전부 ‘바벨의 언어’들입니다.

진중권에 의하면, ‘역사’는 타락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타락이 언어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그 언어가 나타내는 양상의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타락 이후 근원적 언어는 단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수많은 개별 언어들 속에 제 흔적을 흩어놓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하나의 사물을 가리키는 낱말을 다른 언어의 역어(譯語)들과 함께 모아놓으면, 그 역어들 사이에서 불현듯 그 말의 근원적 의미가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원문은 번역을 통해 의미의 손실을 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높고 순수한 언어의 분위기로 상승”한다고 본 것이지요.

진리는 번역과 원문의 동일성 속에 있지 않고, 원작과 번역의 차이, 그 번역과 다른 번역들의 차이를 통해 전개된다고 합니다. 순수한 언어, 궁극적 진리는 이 차이들의 운동의 총결산으로, 다시 말해 “언어상호간의 상호작용을 통한 총체성” 속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좀 어려운데 성경과 비교를 해보면, 성경도 구약의 원문인 히브리어나 신약의 원문인 헬라어로만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각국의 번역을 통해 성경의 (원문의) 의미가 더 잘 드러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번역작업이 중요한 것이고요. 우리는 이제 사물의 근원적 언어를 잃어버렸지만 그 언어들의 양상의 ‘변화’를 통해 근원적 의미를 추적해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벤야민은 아담의 언어, 즉 “모든 사고가 추구하는 궁극적 진리”를 “은밀하게 담고 있는 진리의 언어”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이데거의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과 연관이 있습니다. 언어의 본질은 세상을 지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없었던 것을 있게 하는’ 존재수립의 기능이나 아담의 이름처럼 사물의 참된 모습을 현전시키는 개시(開示) 기능에 있고, 벤야민과 하이데거는 언어의 이 근원적 힘을 회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가능할까요?


언어의 근원적 힘에 대한 회복은 인간의 노력으로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회복은 다시 하나님께서 회복하셔야만 가능한데, 그때가 언제일까요?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전면적으로 임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인간을 새롭게 하심으로, 창조를 새롭게 하심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언어는 하나입니다. 그때 사용될 언어는 아담의 언어처럼 분명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언어일 것입니다.


성경도 각국 언어로 번역되어 있지만 알아들을 사람만 알아듣고 나머지 사람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성경이 방언이 되었습니다. 듣기는 듣고 읽기는 읽어도 내용이 이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귀를 막고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막4:11-12)


우리가 예수님의 비유와 성경을 이해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성령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아는 자는 뭔가 통하는 게 있습니다. 소통한다는 것이지요. 바벨의 세상에서 만약 우리가 소통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언어 때문이 아니고 복음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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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호 2013-12-28 0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 글 담아가겠습니다~
 

 

오늘 오후 예배시간에 학개서 1-2장을 공부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기 위하여 기초공사를 하던 중 사마리아 백성들의 방해로 성전건축이 중단되고, 자신들의 집만 새로 지어서 살고 있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 학개 선지자에게 임합니다. 그래서 학개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외칩니다.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板璧)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학1:4) (* 판벽한 집은 지붕과 벽에 조각한 판을 붙인 화려한 집을 말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열심을 불러일으키다, 깨우치다) 그들이 15년 동안 중단되었던 성전건축을 재개하게 됩니다. 그러나 옛 솔로몬 성전보다 초라한 ‘스룹바벨’ 성전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전 영광은 솔로몬 성전의 영광이고, 나중 영광은 장차 새성전으로 오실 예수님의 영광을 예언하는 말씀이 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입니다. 예수님은 이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려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자신이 참 성전임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공생애 기간 동안 성전을 무시하고, 죄를 용서하거나 병을 치유하거나 불결한 자를 정결케 하는 등 성전의 기능을 스스로 수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부패하였던 성전을 공격하는데, 그 사건이 바로 ‘성전청결’ 사건입니다.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기구(器具)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許)치 아니 하시고”(막11:15-16)

이 사건은 단순한 ‘성전청결’을 넘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에게 자신의 죄목에 대한 기소와 죽음을 유발시키기 위한 상징적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전 행위는 우연한 것이 아니라 미리 계산된 행위였습니다. 위 구절의 앞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막11:11) 마치 성전 행위를 하기 전에 미리 조사하는 듯한 인상을 받지 않습니까?


또한 예수님은 성전 제사를 적극적으로 방해까지 하였습니다. “아무나 기구(器具)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 하시고” 제사장들이 성전 제사에 필요한 제사 기구들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방해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현재의 성전 제사는 타락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성전이 되어서, 자신의 죽음을 통한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속죄와 새언약의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파괴될 것이라는 것과 자신이 새성전을 건축하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공격에 대해서 당연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 이들 세 집단은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멤버들임)은 예수님을 죽일려고 모의를 하게 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막11:18) 이런 사실들을 비추어 보면 예수님의 성전 행위는 사실상 성전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성취하고 ‘새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촉발시키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행위에 대해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심문’을 합니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막11:27)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즉답을 피하면서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는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막11:30) 이 말씀에는 중요한 내용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요한의 ‘사역’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면 예수님 자신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성전 행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의미를 포함한 것이고, 더 나아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고,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막1:11)라고 말씀하신 것을 들었기 때문에,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전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러한 질문에 이들이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이 사실(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전 행위를 한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심문’ 다음에 바로 나오는 예수님의 ‘포도원의 악한 농부 비유’에 의해서도 입증됩니다.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갔다가 때가 되어 농부들에게 세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내는데 농부들이 종들을 때리고, 죽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아들은 공경하겠지 하면서 아들을 보내지만 농부들은 아들마저 죽이면서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주인이 농부들을 진멸하지 않겠습니까?(막12:1-9)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아들은 농부들(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과 포도원 주인(하나님)이 악한 농부들을 진멸할 것이라는 내용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암시적인 말씀들 때문에 이들은 예수님을 죽일려고 모의를 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체포되어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게 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막14:55) 증인 2명이 증언을 하여야 처벌을 할 수 있는데, 특별히 예수님을 죽일 증거가 없자 그들은 ‘거짓 증거’를 찾아서 증언합니다.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막14:58)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성전이 파괴될 것을 말씀하셨는데, ‘거짓’ 증인들은 예수님이 직접 성전을 파괴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지요.

대제사장이 예수님의 대답을 재촉하였지만 대답이 없자 자신이 다시 질문합니다.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막14:61) 여기서 ‘찬송받을 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를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둘러서 표현합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질문입니다. 대제사장이 이런 질문(네가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야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단의 신탁’에 의해 종말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메시야 사상이 있음)을 하게 된 배경을 지금까지 자세히 설명하였는데, 연결이 되십니까? (예수님의 성전 행위-옛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새성전을 짓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포도원의 악한 농부 비유)


대제사장의 이 질문은 사무엘하 7장 12절의 예언의 말씀이 배경에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지금 예수님이 하나님을 위해 새성전(집)을 지을 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긍정적으로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막14:62)

 

 

이 말을 들은 대제사장은 자기의 옷을 찢으면서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막14:63-64)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참람죄’로 정죄합니다. 미쉬나에 의하면 참람죄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때에 해당되는데,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성전을 허물 것이라고 위협한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역하는 ‘참람죄’에 해당한다고 본 것입니다.

성전을 허무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거역하는 것이 될까요? 그것은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고, 이 집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이 거하는 처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 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신12:11)


이렇게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에 의해 참람죄에 해당하는 죄목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오히려 새성전을 짓는 행위가 되었던 것이고, 예수님이 성전이기 때문에 다시 성전 제사를 드리지 않더라도,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젠 예수님을 향해 예배하는 것이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신 그 말씀이 예수님이 친히 새성전되심으로서 성취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영광이고,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네요. 이번 성탄절은 새성전되시기 위해서 친히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본 글은 김세윤 교수의 논문모음집인 “예수와 바울” 중 ‘예수와 성전’ 논문 및 오늘 오후에 공부한 학개서 말씀을 토대로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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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어린이 성경 1 - 신약
박종관 그림, 장길수 글 / 문공사 / 200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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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 만화는 ‘문공사’에서 만들었는데, 신약은 2권, 구약은 5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선 신약 1권만 구입하여 아들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요즘 어린이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것은 만화책이던군요. 그런데, 잠시 ‘알라딘’ 인터넷서점에서 조회해 봤더니 이 만화책을 그린 사람이 박종관인데, 이 작가는 요즘 만화계에서 엄청 인기가 있는 과학학습만화인 "why?" 시리즈(35권으로 구성)를 그린 그 작가인 것을 알았습니다. 어쩐지 그림이 좋더라니까요..(준성이도 이 시리즈 3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 1권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사역,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모습까지 그리고 있는데, 제가 오늘 아침에 읽어보니 너무 은혜스럽고 감동스러웠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들의 행간의 뜻을 그림으로 잘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들이 현실감 있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만화가인 박종관과 공동작업을 한 이동호나 구성을 하였다는 장길수의 약력을 보면 성경만화 작업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데도 당시 예루살렘의 시대상황과 배경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6-7세 유치부에서 초등학교 저학년인 1,2,3학년들에게 적합할 것 같은데, 사실 어른들도 간단하게 읽으면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준성엄마가 이 책을 먼저 읽고 있습니다. 이만한 책을 보지 못했는데, 현재 ‘알라딘’에서 30퍼센트나 할인판매를 하고 있네요.(그래서 즉시 나머지 책들을 주문하였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읽히면 좋은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옥의 티가 있군요. 헤롯 대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셉이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이집트에서 ‘갈릴리 나사렛’ 마을로 돌아왔다는 내용을 ‘베들레헴 나사렛’으로 잘못 표시하였고,(p.43) 예수님께서 첫 번째 이적을 베푸신 ‘가나’ 혼인잔치를 ‘가나안’으로 잘못 표시하였군요.(p.64. 76) 또한 예수님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만화책(p.104)에서는 쉽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성경에는 못 알아들을 사람에게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눅8:10)


이러한 실수는 사소하고, 전체적인 책의 내용은 너무나 성경적이고 은혜스럽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황 및 기적을 행하시는 상황,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상황 및 예수님이 죽음을 예고하시는 상황 등등. 아무튼 성경에 나오는 내용들이 너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꼭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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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만화책은 참으로 경이로운 책입니다. 어떻게 만화를 통하여 역사적인 문제를 사실적이면서도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아트 슈피겔만’인데, 1986년 <쥐> 1권이 완간되었고, 그후 미국이나 여러 나라에서 찬사를 받았으며, 2권은 1992년에 완간되었습니다.(그 해 퓰리처상을 수상함) 이 책은 나치의 ‘유대인학살’을 다루었는데, 2차대전 중 유대인학살(약 6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에서 살아남은 폴란드계 유대인인, 저자의 부친 ‘블라덱 슈피겔만’의 생존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일단 이 만화책을 펼치게 되면 그림이 낯설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주로 이현세, 허영만, 박봉성 등 국내작가의 만화들만 봤기 때문에 이 책의 그림들이 낯설게 느껴질 것이고, 특이한 것은 유대인을 쥐, 나치를 고양이, 폴란드인을 돼지, 미군을 개 등 등장인물을 동물로 묘사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형식으로도 유대인학살의 내용을 다른 어느 매체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 비평가들이나 독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은 것입니다.(작가가 1권을 그리는데 8년, 완간하는데 13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아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 당시 독일군 나치 치하에 있던 유대인들은 고양이 앞에 쥐신세였습니다. 이 책을 보면서 어떻게 인간이 이보다 악할 수 있을까? 아니면 어떻게 인간이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생존할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약 독일군 상황이였으면 그런 악을 행하였을까? 유대인이였으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를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당시 제가 독일군이였다면 명령에 불복종하면 총살감이였기 때문에 상부의 지시에 따라(즐기면서 하지는 않았더라도) 유대인학살에 동참하였을 것 같고(권세를 거슬려 행동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유대인이였다면 포로로 잡히기도 전에 전쟁 중 죽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이 책의 주인공 블라덱은 정말 신의 섭리나 우연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블라덱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요인들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생존본능,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 돈, 그리고 신의 도움(아니면 우연) 등으로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폴란드의 작은 도시에서 영세공장을 운영하던 블라덱이 2차대전에 참전하여 독일군 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상황, 그후 게토(유대인 거주지역)에서 살아남은 상황, 독일군의 체포를 피해 도망 다니던 상황,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상황, 종전후 퇴각하는 독일군에게서 살아남은 상황 등은 한편의 드라마처럼 느껴질 정도로 극적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당시 유대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 반유대주의는 당시 상황뿐만 아니라 2천년을 거슬려 올라가는 뿌리 깊은 것입니다. ‘유대인의 역사’(폴 존슨, 살림출판사)를 보면, 2천년 동안 유대인들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게토도 2차대전시기에 처음 생긴 것이 아니라 중세 때,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정녕 이들에 대한 박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대가를 자신뿐만 아니라 후손에게도 받겠다는 자신들의 외침의 성취일까요?(마27:25) 

같은 포로라도 비유대계 폴란드인의 지위와 유대계 폴란드인의 지위는 하늘과 땅차이였습니다. 무엇이 그토록 히틀러나 나치로 하여금 유대인들을 증오하게 한 것일까요? 하기야 당시 시대적인 분위기 자체가 나치뿐만 아니라 비유대계 폴란드인들도 유대계 폴란드인들을 증오하고 멸시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새삼 시대상황을 자각하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전쟁 중 유대인들을 숨겨주었다가 독일군에게 발각되면 죽을 수도 있는데, 목숨 걸고 이들을 숨겨주는 폴란드인들을 볼 때 대단한 용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돈(대가)을 받고 숨겨주는 사람, 숨겨주기로 약속하고 돈을 받고도 독일군에게 고발하는 사람 등 인간군상들을 이 책에서 보면서 인간에 대한 믿음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시 주인공 블라덱 및 유대인들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였는지 책의 내용 중 몇 대목을 보면, 수용소에서 작업을 나가는 유대인의 머리에 썼던 모자를 독일군 병사가 쳐서 땅바닥에 떨어지게 하여, 그 유대인이 모자를 줍게 한 후 대열을 이탈하였다며 총으로 쏴 탈영병을 죽였다고 하면서 며칠간 휴가를 가곤 하였답니다. 또한 영화 ‘쉰들러리스트’에 보면, 독일군 간부가 사격연습용으로 유대인들을 쏴 죽이는 장면도 나옵니다. 

하루에 멀건 수프 조금과 빵 한 조각을 주고 강제노동을 시키면서도 계속 말라가는 유대인들을 보고 노동능력이 없다면서 선별작업을 통해 가스실로 보내는 상황에서 안 마른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물만 먹어도 살이 찌는 체질인가요? (무척 말란 저로서는 1차로 선별 당하였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가스실에서 처리하는 것도 포화상태이고 시간도 걸려 나중에는 구덩이를 파서 그곳에 생매장까지 시키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블라덱이 하는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그래도 이 구덩이에 처넣어지기 전에 가스실에서 끝을 본 사람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지. 다른 사람들은 살아서 무덤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으니까...” 

결국 블라덱의 부모님과 친척, 아내인 ‘아냐’의 부모님과 친척, 그리고 아들 ‘리슈’도 전쟁 중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 전부 죽습니다만 블라덱과 아냐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블라덱과 아냐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1968년에 아냐는 자살을 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으로 인간 이성의 위기를 봅니다. 역사가 진보한다는 생각은 인간의 희망일 뿐인데도 아직 우리들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들을 애써 외면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지금도 같은 일들이 세계 곳곳에서 되풀이되고 있지요. 

정말 역설적인 것은 그렇게 인종핍박을 받았던 유대인들이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똑 같은 이유로 팔레스타인인들을 핍박한다는 사실입니다. 1948년 2천년만에 나라를 세운 이스라엘이 그곳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죽이고, 강제로 추방하고, 팔레스타인들을 위한 게토에 가두어놓은 상황을 현재 실시간으로 목도할 때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자신들이 그렇게 인종핍박을 받고도 다른 인종을 핍박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여기에 대해서는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이라는 만화책이 실상을 생생히 전하는데, 그 감동 또한 큽니다.) 

결론은 나치의 잔혹사(인간 이성의 잔혹사)를 만화로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만화라고 얕보면 안됩니다. 이 만화책은 예술입니다.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이 책 보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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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 / 2002년 9월
평점 :
품절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은 1991년경 겨울에 작가가 직접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찾아가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실상을 탐사한 내용을 그린 만화책입니다. 이 만화책은 (제가 생각하기에) 앞서 소개한 <쥐>와 짝을 이루는 만화책인데, <쥐>에서는 비유대인들이 유대인들을 박해하였다면 이번에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인종적으로 박해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역사의 역설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2천년 동안이나 박해받던 유대인들, 한 세대(20-30년) 전에 나치에 의해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엄청난 학살을 당하였던 그 피해자가 이번에는 가해자로 변해서 팔레스타인을 박해하고 있으니, 어찌 이를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합리적 존재라는 데에 대해서 저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인간의 비합리적인 행동들을 역사속에서, 현실속에서 볼 때마다 정말 인간은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작가가 전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실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합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에게 박해받던 상황과 비교하면, 그래도 우리 형편이 나았다고 생각이 될 정도로 이스라엘의 박해는 심합니다.

작년(2007.9.15.)에 MBC스페셜에서 <장벽>이라는 방송을 하였는데, 의미 있게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스라엘 내의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말이 자치지구이지 사실 옛날 유대인들이 강제로 격리되었던 ‘게토’와 같은 격리지역입니다)인 요르단 서안지구에 높이 10미터, 총 길이 700킬로미터의 거대 분리장벽을 2002년경부터 설치하고 전기철조망을 설치하여 외부와 차단시키고, 또한 세계 최대의 감옥으로 불리는 가자지구의 출입을 통제(명분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에 주민들이 동조한다는 것임)하여 가족들과 생이별한 수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생활상을 보았습니다. (이 방송은 인터넷에서 ‘다시보기’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작가가 방문한 1991년경보다 현재 팔레스타인의 형편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때는 출입증만 있으면 자유롭게 지역을 오갈 수는 있었으나 현재는 이동할 자유가 거의 없는 것입니다. 현재도 가자지구는 이스라엘 군의 폭격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녕 화해할 수 없을까요? 이 뿌리 깊은 적대감은 역사상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시기로 거슬려 올라갈 수 있고, 아브라함 시대의 이삭과 이스마엘 시기로 더 거슬려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종말의 때에는 열방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예루살렘의 시온산에서 모여 주를 찬양한다고 하였는데, 그때가 되어야 진정한 화해가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약속의 땅 예루살렘에 샬롬, 평화가 없습니다. 마치 교회에 성도가 없듯이?)


이 만화책은 우리에게 팔레스타인의 실상을 알게 해줍니다. 알면 어떻게 할 것이냐구요? 그렇게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알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책은 유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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