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에 브레드 피트 주연의 “바벨”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재미는 별로 없었습니다. 재미가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여러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받았더라구요. 원래 재미없는 영화가 상은 잘 받는다는 사실을 전부 알고 계시죠?
영화는 네 개의 사건들이 교차하는 방법으로 진행되는데, 별개의 사건들이 총이라는 매개에 의해서 연결이 됩니다. 이 영화는 서로간의 의사소통의 부재에 의한 충돌을 이야기하는데, 이 소통의 부재는 언어가 틀리기 때문에 나타납니다. 이 영화에서 각 배우들은 약 5개의 언어를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영화평이 아니고, ‘언어’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도 “바벨의 언어”입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런 언어의 혼란에 의한 의사소통이 단절되었을까요? 성경에는 ‘바벨탑사건’이후부터 언어의 혼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벨의 언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아담의 언어”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구약성경의 창세기를 따라 언어의 본질에 대해서 논의할 것인데, 이 논의는 중앙대 교수 진중권의 설명에 의존하였습니다. 대부분이 진중권의 설명이고, 저의 코멘트도 중간 중간에 있지만 구별하지는 않겠습니다. 물론 진중권도 독일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사유에 빚진바가 큽니다. (우리의 모든 언어는 사실 다른 사람들의 언어의 간접인용입니다.)
아담의 언어
“언어는 도구다. 언어가 사람에게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그리고 우리 모국어가 우리에게 아무리 소중하다고 해도, 언어가 도구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고 그것을 우상으로 떠받드는 것은 비합리적이라는 사실은 오롯이 남는다”
위 말에서 우리는 근대의 도구주의적 언어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언어를 ‘도구’이상으로 보는 것은 ‘비합리적’ 우상숭배가 된다는 말인데,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은 ‘기술합리성’을 이성의 유일한 형태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진중권은 말합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언어가 한갓 도구로 전락해버린 것일까요? 이것을 찾아 벤야민은 구약성경 창세기로 돌아갑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말’로 세상을 창조하였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1:3) 하나님의 피조물은 이렇게 원래 ‘말’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본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였기 때문에 그때만 해도 자연은 제 몸 안에 ‘언어적 본질’을 구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소리 없는 자연도 그 언어적 본질에 힘입어 인간과 의사소통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유년기의 인류는 자연을 그저 쓰고 버리는 도구로 간주하지 않았고, 말 못하는 자연에서 언어적 본질을 보고, 그것과 평등하게 소통하며 미메시스(mimesis)를 하였습니다. 이 미메시스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존재론적 닮기’를 말합니다. 가령 어린이들은 의사나 선생님만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와 달님도 연기를 합니다. 이게 ‘미메시스’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이것을 ‘되기’라고 이야기하겠지요. ‘의사되기’, ‘자동차되기’ 등등.
이렇듯 ‘언어’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성경에도 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19:1-4)라고 하였습니다. 자연의 언어적 본질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지요.
모든 사물이 언어를 가지고 있지만 인간의 언어는 여러 언어 중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집니다. ‘말’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인간만큼은 직접 흙을 빚어 만드셨고, 그에게 당신의 작품에 이름을 붙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도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2:29) 이렇게 인간의 언어는 이름하는 언어이고 이것이 사물의 언어와 구별된다고 합니다.
“말함”속에서 사물은 창조되고 또한 인식됩니다. 하나님은 말함으로써 세상을 지으시고, 인간은 이름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를 계속합니다. “있으라”는 창조의 말함, “일컫다”는 인식의 말함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사물 속에서 ‘언어적 본질’을 발견해내어 그것을 ‘이름’합니다. 소리 없는 사물의 ‘언어적 본질’을 인간의 음성으로 “번역”합니다. 사물의 본질이 고스란히 인간의 음성으로 옮겨지기에 사물과 이름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이 유사성은 독일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의 초기언어철학이기도 합니다. 그림이 실제 세계를 반영하듯 언어도 실제 사물을 반영한다는 것이지요.
앞에서 말한 번역은 ‘인식’입니다. 이름을 들으면 그 사물의 정신적 본질(성경적으로 말하면 창조적 본질)이 저절로 알려지는 그런 직관적 인식입니다. 아담의 언어에서 ‘명명된 것’과 ‘인식된 것’은 직접적으로 일치합니다.
목소리가 없는 사물은 인간의 언어 속에 제 언어적 본질을 전달합니다. “모든 자연은 자신을 전달할 때 언어 속에, 즉 인간 속에 전달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소쉬르에게 ‘이름’은 사물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였지만(이것을 ‘언어의 자의성’이라고 하지요.) 이름하기는 결코 자의적인 게 아닙니다. 이름은 사물의 언어적 본질을 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자연의 ‘주인’으로 드높였을 때, 이는 결코 자연을 제멋대로 소비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물 속에 담아놓은 언어를 보존하는 관리자(Walter)가 되라는 뜻입니다.(이 ‘발터’는 발터 벤야민의 이름의 뜻이기도 합니다.)
사물이 제 정신적 본질을 언어에 담아 인간에게 전달한다면, 인간은 제 정신적 본질을 언어에 담아 하나님께 전달합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언어 ‘속에서’ 제 정신적 본질을 전달합니다.
사물과 이름이 보이지 않는 유사성으로 묶여 있었던 언어.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언어를 잃어버렸습니다. 창조를 마친 후 하나님은 제 작품에 평가를 하였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4) 뱀은 아담에게 바로 이 능력, 즉 좋고 나쁨을 판별하는 신적 인식을 약속하였습니다. 물론 그 열매는 이 지혜를 줄 수는 없었고, 결국 신이 되려는 이 주제넘음은 우스꽝스러운 패러디가 되었습니다. “외적으로 전달하는 말..., 창조하는 하나님의 말의 패러디...”
바벨의 언어
진중권은 인간의 타락의 결과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는 언어가 이제 한갓 자의적 기호로, 전달수단으로 전락하였고, 인류의 모어(母語)가 여러 개의 언어로 갈라지고, 이로써 소위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사물에 관한 직관적 인식 대신 판단의 마술이 발생하였고, 이는 하나님의 심판(판단)을 흉내낸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참칭하였다는 것이지요. 세 번째는 ‘추상’이라는 것이 언어에 도입되었다는 것입니다. ‘사과’는 추상적 개념이고, 개념은 개별자들의 고유명사를 지워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타락의 결과에 대해서 동의를 하십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아담의 타락의 결과 중 첫 번째와 세 번째는 맞는 것 같은데, 첫 번째에서 인류의 모어가 여러 개의 언어로 갈라졌다는 것은 ‘바벨탑사건’이후에 발생합니다.
‘아담의 언어’의 타락은 판단을 위해 고유명사를 지우고, 구체적인 개별자들을 획일적인 개념의 감옥에 집어 넣어버립니다. 이로써 개별자들의 고유성은 무시되고 인간이 추상적 판단에 의존할수록 개별자들의 고유성을 보는 ‘직관’의 능력도 점점 사라집니다. 이제 인간은 사물을 개념의 눈으로 봅니다. 과거에 자연은 목소리가 없어도 인간과 소통을 할 수가 있었지만 자신의 언어적 본질을 부정당한 자연은 이제 침묵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상 자연이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소리를 우리가 못 듣는 것이지요. 로마서에 보면, 피조물들이 함께 탄식하며 고통한다고 하였습니다.(롬8:22) 진중권도 여기에 대해서 인용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또 다른 형태의 침묵이 시작된다. 이를 우리는 자연의 가슴 아픈 애도라 부르자. 이는 형이상학적 진리다. 자연에 말을 부여한다면, 모든 자연은 소리높여 탄식을 하리라...초목이 바스락 소리를 내기만 해도, 거기에서 한탄의 소리가 들린다. 말을 잃었기에 자연은 탄식한다. 자연의 슬픔은 그녀를 침묵하게 만든다. 그 모든 애도 속에서 자연은 말이 없으려고 한다.”
유년기의 인류는 추수를 할 때 곡식이 낫에 베여 쓰러지며 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래 전에 이 미메시스적 소통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자연과 소통하기를 멈추고 그것을 죽은 사물로 간주하자, 사물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기를 멈추었습니다. 하기야 인간이 어디 자연과만 소통하기를 멈추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소통도 멈추었고, 한발 더 나아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바벨탑을 쌓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잠시 ‘바벨탑’사건을 이야기하자면, 구약성경 창세기에는 태초에 언어가 하나였는데 인간들이 하늘까지 닿고자 바벨에서 탑을 쌓았고,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케 하여 인간을 지면에 흩었다고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언어의 혼잡으로 의사소통에 애로사항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들이 전부 ‘바벨의 언어’들입니다.
진중권에 의하면, ‘역사’는 타락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타락이 언어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그 언어가 나타내는 양상의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타락 이후 근원적 언어는 단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수많은 개별 언어들 속에 제 흔적을 흩어놓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하나의 사물을 가리키는 낱말을 다른 언어의 역어(譯語)들과 함께 모아놓으면, 그 역어들 사이에서 불현듯 그 말의 근원적 의미가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원문은 번역을 통해 의미의 손실을 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높고 순수한 언어의 분위기로 상승”한다고 본 것이지요.
진리는 번역과 원문의 동일성 속에 있지 않고, 원작과 번역의 차이, 그 번역과 다른 번역들의 차이를 통해 전개된다고 합니다. 순수한 언어, 궁극적 진리는 이 차이들의 운동의 총결산으로, 다시 말해 “언어상호간의 상호작용을 통한 총체성” 속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좀 어려운데 성경과 비교를 해보면, 성경도 구약의 원문인 히브리어나 신약의 원문인 헬라어로만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각국의 번역을 통해 성경의 (원문의) 의미가 더 잘 드러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번역작업이 중요한 것이고요. 우리는 이제 사물의 근원적 언어를 잃어버렸지만 그 언어들의 양상의 ‘변화’를 통해 근원적 의미를 추적해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벤야민은 아담의 언어, 즉 “모든 사고가 추구하는 궁극적 진리”를 “은밀하게 담고 있는 진리의 언어”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이데거의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과 연관이 있습니다. 언어의 본질은 세상을 지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없었던 것을 있게 하는’ 존재수립의 기능이나 아담의 이름처럼 사물의 참된 모습을 현전시키는 개시(開示) 기능에 있고, 벤야민과 하이데거는 언어의 이 근원적 힘을 회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가능할까요?
언어의 근원적 힘에 대한 회복은 인간의 노력으로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회복은 다시 하나님께서 회복하셔야만 가능한데, 그때가 언제일까요?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전면적으로 임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인간을 새롭게 하심으로, 창조를 새롭게 하심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언어는 하나입니다. 그때 사용될 언어는 아담의 언어처럼 분명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언어일 것입니다.
성경도 각국 언어로 번역되어 있지만 알아들을 사람만 알아듣고 나머지 사람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성경이 방언이 되었습니다. 듣기는 듣고 읽기는 읽어도 내용이 이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귀를 막고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막4:11-12)
우리가 예수님의 비유와 성경을 이해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성령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아는 자는 뭔가 통하는 게 있습니다. 소통한다는 것이지요. 바벨의 세상에서 만약 우리가 소통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언어 때문이 아니고 복음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