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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만화책은 참으로 경이로운 책입니다. 어떻게 만화를 통하여 역사적인 문제를 사실적이면서도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아트 슈피겔만’인데, 1986년 <쥐> 1권이 완간되었고, 그후 미국이나 여러 나라에서 찬사를 받았으며, 2권은 1992년에 완간되었습니다.(그 해 퓰리처상을 수상함) 이 책은 나치의 ‘유대인학살’을 다루었는데, 2차대전 중 유대인학살(약 60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에서 살아남은 폴란드계 유대인인, 저자의 부친 ‘블라덱 슈피겔만’의 생존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일단 이 만화책을 펼치게 되면 그림이 낯설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주로 이현세, 허영만, 박봉성 등 국내작가의 만화들만 봤기 때문에 이 책의 그림들이 낯설게 느껴질 것이고, 특이한 것은 유대인을 쥐, 나치를 고양이, 폴란드인을 돼지, 미군을 개 등 등장인물을 동물로 묘사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형식으로도 유대인학살의 내용을 다른 어느 매체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 비평가들이나 독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은 것입니다.(작가가 1권을 그리는데 8년, 완간하는데 13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아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 당시 독일군 나치 치하에 있던 유대인들은 고양이 앞에 쥐신세였습니다. 이 책을 보면서 어떻게 인간이 이보다 악할 수 있을까? 아니면 어떻게 인간이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생존할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약 독일군 상황이였으면 그런 악을 행하였을까? 유대인이였으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를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당시 제가 독일군이였다면 명령에 불복종하면 총살감이였기 때문에 상부의 지시에 따라(즐기면서 하지는 않았더라도) 유대인학살에 동참하였을 것 같고(권세를 거슬려 행동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유대인이였다면 포로로 잡히기도 전에 전쟁 중 죽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이 책의 주인공 블라덱은 정말 신의 섭리나 우연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블라덱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요인들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생존본능,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 돈, 그리고 신의 도움(아니면 우연) 등으로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폴란드의 작은 도시에서 영세공장을 운영하던 블라덱이 2차대전에 참전하여 독일군 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상황, 그후 게토(유대인 거주지역)에서 살아남은 상황, 독일군의 체포를 피해 도망 다니던 상황,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상황, 종전후 퇴각하는 독일군에게서 살아남은 상황 등은 한편의 드라마처럼 느껴질 정도로 극적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당시 유대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 반유대주의는 당시 상황뿐만 아니라 2천년을 거슬려 올라가는 뿌리 깊은 것입니다. ‘유대인의 역사’(폴 존슨, 살림출판사)를 보면, 2천년 동안 유대인들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게토도 2차대전시기에 처음 생긴 것이 아니라 중세 때,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정녕 이들에 대한 박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대가를 자신뿐만 아니라 후손에게도 받겠다는 자신들의 외침의 성취일까요?(마27:25) 

같은 포로라도 비유대계 폴란드인의 지위와 유대계 폴란드인의 지위는 하늘과 땅차이였습니다. 무엇이 그토록 히틀러나 나치로 하여금 유대인들을 증오하게 한 것일까요? 하기야 당시 시대적인 분위기 자체가 나치뿐만 아니라 비유대계 폴란드인들도 유대계 폴란드인들을 증오하고 멸시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새삼 시대상황을 자각하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전쟁 중 유대인들을 숨겨주었다가 독일군에게 발각되면 죽을 수도 있는데, 목숨 걸고 이들을 숨겨주는 폴란드인들을 볼 때 대단한 용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돈(대가)을 받고 숨겨주는 사람, 숨겨주기로 약속하고 돈을 받고도 독일군에게 고발하는 사람 등 인간군상들을 이 책에서 보면서 인간에 대한 믿음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시 주인공 블라덱 및 유대인들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였는지 책의 내용 중 몇 대목을 보면, 수용소에서 작업을 나가는 유대인의 머리에 썼던 모자를 독일군 병사가 쳐서 땅바닥에 떨어지게 하여, 그 유대인이 모자를 줍게 한 후 대열을 이탈하였다며 총으로 쏴 탈영병을 죽였다고 하면서 며칠간 휴가를 가곤 하였답니다. 또한 영화 ‘쉰들러리스트’에 보면, 독일군 간부가 사격연습용으로 유대인들을 쏴 죽이는 장면도 나옵니다. 

하루에 멀건 수프 조금과 빵 한 조각을 주고 강제노동을 시키면서도 계속 말라가는 유대인들을 보고 노동능력이 없다면서 선별작업을 통해 가스실로 보내는 상황에서 안 마른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물만 먹어도 살이 찌는 체질인가요? (무척 말란 저로서는 1차로 선별 당하였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가스실에서 처리하는 것도 포화상태이고 시간도 걸려 나중에는 구덩이를 파서 그곳에 생매장까지 시키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블라덱이 하는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그래도 이 구덩이에 처넣어지기 전에 가스실에서 끝을 본 사람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지. 다른 사람들은 살아서 무덤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으니까...” 

결국 블라덱의 부모님과 친척, 아내인 ‘아냐’의 부모님과 친척, 그리고 아들 ‘리슈’도 전쟁 중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 전부 죽습니다만 블라덱과 아냐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블라덱과 아냐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1968년에 아냐는 자살을 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으로 인간 이성의 위기를 봅니다. 역사가 진보한다는 생각은 인간의 희망일 뿐인데도 아직 우리들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들을 애써 외면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지금도 같은 일들이 세계 곳곳에서 되풀이되고 있지요. 

정말 역설적인 것은 그렇게 인종핍박을 받았던 유대인들이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똑 같은 이유로 팔레스타인인들을 핍박한다는 사실입니다. 1948년 2천년만에 나라를 세운 이스라엘이 그곳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죽이고, 강제로 추방하고, 팔레스타인들을 위한 게토에 가두어놓은 상황을 현재 실시간으로 목도할 때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자신들이 그렇게 인종핍박을 받고도 다른 인종을 핍박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여기에 대해서는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이라는 만화책이 실상을 생생히 전하는데, 그 감동 또한 큽니다.) 

결론은 나치의 잔혹사(인간 이성의 잔혹사)를 만화로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만화라고 얕보면 안됩니다. 이 만화책은 예술입니다.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이 책 보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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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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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은 1991년경 겨울에 작가가 직접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를 찾아가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실상을 탐사한 내용을 그린 만화책입니다. 이 만화책은 (제가 생각하기에) 앞서 소개한 <쥐>와 짝을 이루는 만화책인데, <쥐>에서는 비유대인들이 유대인들을 박해하였다면 이번에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인종적으로 박해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역사의 역설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2천년 동안이나 박해받던 유대인들, 한 세대(20-30년) 전에 나치에 의해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엄청난 학살을 당하였던 그 피해자가 이번에는 가해자로 변해서 팔레스타인을 박해하고 있으니, 어찌 이를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합리적 존재라는 데에 대해서 저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인간의 비합리적인 행동들을 역사속에서, 현실속에서 볼 때마다 정말 인간은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작가가 전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실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합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에게 박해받던 상황과 비교하면, 그래도 우리 형편이 나았다고 생각이 될 정도로 이스라엘의 박해는 심합니다.

작년(2007.9.15.)에 MBC스페셜에서 <장벽>이라는 방송을 하였는데, 의미 있게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스라엘 내의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말이 자치지구이지 사실 옛날 유대인들이 강제로 격리되었던 ‘게토’와 같은 격리지역입니다)인 요르단 서안지구에 높이 10미터, 총 길이 700킬로미터의 거대 분리장벽을 2002년경부터 설치하고 전기철조망을 설치하여 외부와 차단시키고, 또한 세계 최대의 감옥으로 불리는 가자지구의 출입을 통제(명분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에 주민들이 동조한다는 것임)하여 가족들과 생이별한 수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생활상을 보았습니다. (이 방송은 인터넷에서 ‘다시보기’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작가가 방문한 1991년경보다 현재 팔레스타인의 형편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때는 출입증만 있으면 자유롭게 지역을 오갈 수는 있었으나 현재는 이동할 자유가 거의 없는 것입니다. 현재도 가자지구는 이스라엘 군의 폭격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녕 화해할 수 없을까요? 이 뿌리 깊은 적대감은 역사상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시기로 거슬려 올라갈 수 있고, 아브라함 시대의 이삭과 이스마엘 시기로 더 거슬려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종말의 때에는 열방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예루살렘의 시온산에서 모여 주를 찬양한다고 하였는데, 그때가 되어야 진정한 화해가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약속의 땅 예루살렘에 샬롬, 평화가 없습니다. 마치 교회에 성도가 없듯이?)


이 만화책은 우리에게 팔레스타인의 실상을 알게 해줍니다. 알면 어떻게 할 것이냐구요? 그렇게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알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책은 유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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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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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예비 고찰을 통하여 이 책에 대해서 약간 언급을 하였기 때문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은 이진경 교수 나름대로의 ‘경계짓기’(문제설정)를 통하여 근대 및 현대 철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철학의 가장 큰 주제를 ‘주체’로 파악하였고, 그래서 근대의 철학을 ‘주체철학’이라고 합니다.


1. 근대철학의 출발


왜 근대철학이 ‘주체철학’이 되었느냐하면,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의 문제설정이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예비 고찰에서도 살폈듯이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의심하는 나’는 확실하다는 것(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을 데카르트는 깨달았고, 이것을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주체가 객체(대상)와 분리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사고하는 ‘주체’가 있으면, 당연히 사고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러 문제가 등장하는데, 주체가 대상과 분리되었을 때 (인식하는) 주체가 (인식되는) 대상과 일치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주체가 대상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중세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신을 통하여 대상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알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제목인 『철학과 굴뚝청소부』도 이 대상과의 일치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제3자가 보증해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과학도 보증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이 교수가 말하는 ‘근대철학의 딜레마’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이 근대철학의 딜레마를 넘어섰다는 것이 이 교수의 설명입니다. 스피노자는 두 개의 실체를 가정하는 데카르트를 비판하고 실체는 한 개이지만, 속성은 여러 개로 나타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양태). 다시 말하면 실체는 양태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표현된다는 말은 ‘존재한다’는 뜻이구요.(p.68) 그래서 애초부터 주체와 객체의 분리문제, 정신과 물질의 분리문제를 비껴갈 수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진리(대상과의 일치문제)를 알려면 이미 진리의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진리와 허위의 기준이다.”


2. 근대철학의 위기


그 다음은 영국의 경험주의를 통하여 근대철학의 위기가 왔다고 이 교수는 설명합니다. 로크는 데카르트의 이성주의에 반대하여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경험’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완전한 개념’은 신이 준 것이 아니고, 오직 경험에서 추출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것은 단지 개별적인 것에서 추상된 것이며, 이 공통된 특징에 붙인 이름일 뿐이라는 주장은 ‘유명론’의 논지와 비슷합니다.


이 경험주의를 극한으로 밀고 간 사람은 버클리와 흄이였습니다. 특히 흄은 ‘나’, ‘주체’, ‘자아’로 불리는 것은 인상과 관념의 묶음, 지각의 다발일 뿐이라고 합니다. 결국 ‘나’, ‘정신’이라는 게 따로 없다는 것이지요. 흄의 주장은 모든 것을 의심하는, 급기야 ‘생각하는 나’까지 의심하는 극단적 회의주의였습니다.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였던 ‘주체’가 해체의 위기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흄의 주장도 여전히 근대적 문제설정의 한계 ‘안에’ 있었다고 이 교수는 설명합니다. ‘인간’에 대한 과학과 참된 지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검토하다보니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이 나오는데, 흄에게 있어서 ‘인과관계’는 습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상이나 관념을 결합시켜 어떤 지식을 형성합니다. 이 지식은 ‘법칙’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힘이 있어 믿은 사람에게 실재적인 효과를 가진다고 합니다. 즉, 흄은 어떤 지식이 진리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게 아니라 이 지식이 그걸 믿는 사람에게 어떤 효과를 갖는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3. 근대철학의 재건


칸트는 흄의 주체비판을 받아들여 이 주체가 과연 철학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지를 살폈습니다. 데카르트가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들을, 칸트는 그게 어째서 출발점이 될 수 있는지를 연구하였다는 것이지요. 이를 ‘이성비판’이라고 합니다.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 ‘선험적 주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선험적 주체는 관념이나 감각의 다발에 불과한 경험적 주체와 달리 모든 주체에 공통되며, 경험이나 감각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좌우하며, 확실하고 항구적이라는 특징을 가집니다. 이로써 칸트는 흄에 의해 해체되어 버린 근대적 주체를 ‘선험적 주체’라는 확고하고 튼튼한 것으로 되살려 낸 것입니다.


피히테를 거쳐 헤겔에 이르면, 근대철학은 정점에 이릅니다. 헤겔은 주체와 객체의 문제를 ‘절대정신’으로 동일화시킵니다. 절대정신은 자기 발전과정을 통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에 도달한다는 것이지요.(변증법) 이로써 절대정신은 다시 자기에게로 복귀하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절대정신의 실현이란 목적을 향해 발전해 가는 ‘목적론적 과정’이라고 합니다.


4. 근대철학의 해체


근대철학은 이제 해체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인간이나 주체를 출발점으로 삼는 ‘주체철학’을 근본적으로 넘어서려는 시도는 먼저 맑스의 '역사유물론'에서 나타납니다. 맑스는 ‘실천’이라는 개념을 통해 근대철학을 넘어서려고 합니다. 먼저 맑스는 ‘대상’의 개념 자체를 바꾸려고 합니다. 주체와 대비되는 ‘대상’이 아니라 활동적인 생활 과정, 실천 과정으로서 파악합니다. 그럼으로써 ‘대상’을 사회적 맥락과 역사 속에서 정의하려고 합니다. 중요한 말이지요. 또한 ‘진리’의 개념도 현실성과 힘의 문제로 바꾸어버립니다. 어떤 사물에 대한 영원한 진리는 불가능하고, 어떤 판단이나 지식의 현실성과 타당성이 힘을 가지게 되면 그것이 진리라고 합니다. 이러한 유물론을 ‘역사유물론’이라고 합니다.


이를 통해 맑스는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해체합니다.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파악합니다.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p.213)


두 번째로 근대철학을 해체한 사람은 프로이드입니다. 그는 처음으로 인간의 ‘무의식’을 발견합니다. 즉 의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영역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무의식은 우연적인 게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이라고 합니다. 후기의 프로이드는 이 무의식도 ‘이드’와 ‘초자아’로 분열되어 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무의식은 근대철학을 해체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근대철학은 주체를 의식과 동일시하였고, 투명하고 통일성이 있었다고 하였으나 이것이 깨어진 것이지요. 이제는 ‘생각하는 나’ 이외에 ‘생각하는 나’가 알지 못하는 ‘나’가 인간내부에 있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근대철학을 해체한 사람은 니체입니다. 니체는 질문 자체를 바꾸어버립니다. ‘진리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진리란 어떤 것인가?’라고 묻습니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라고 말입니다. 진리라는 것을 사로잡고 있는 힘은 어떤 것인가? 따라서 ‘의미’를 아는 것은 주어진 대상을 점령하고 있는 ‘힘’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힘을 구별해주는 것이 ‘의지’이고, 이 의지는 힘들간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어 지는 것입니다. 이를 ‘권력에의 의지’라고 합니다. 좀 어렵죠?


데카르트의 명제와 비교하면, 니체는 ‘생각’이라는 것은 내가 원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 원해서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그 무엇’은 ‘권력의지’이구요. 따라서 근대적인 주체 개념은 자명하지 않고, 출발점이 아니라 권력의지가 구성해내는 ‘결과물’인 것입니다. 주체가 해체된 것이지요.


5. 현대철학과 언어학


세 사람을 통하여 근대의 주체철학은 해체의 길을 가는데, 이를 더욱 가속화 시킨 것은 현대 언어학입니다.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제한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의 규칙에 따라서 사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훔볼트는 언어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구조를 제약하며, 세계를 파악하는 관점을 내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사고보다 언어의 우위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즉, 언어란 그걸 사용하는 주체들 모두에게 공통된 사고의 기반이며, 선험적인 구조라는 것입니다.


소쉬르는 언어에 있어서 기호와 지시체 간에는 어떤 유사관계나 일치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자의적이라는 것입니다. 유명한 말이지요. 또한 언어는 개인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약속된 규칙의 체계이기 때문에 개인은 그 규칙에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의미는 개인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언어체계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사고나 판단은 개개의 ‘주체’가 하는 게 아니라, 언어의 의미체계(구조) 속에 있는 것이며, 개인들은 그것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래서 소쉬르는 ‘구조주의’의 창시자라는 말을 듣지요.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용법’이라고 합니다.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 어떤 맥락 속에서 사용되었는가에 따라 의미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언어게임’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체스를 할 때와 바둑을 할 때는 그 규칙이 틀려서 다른 규칙을 배워야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말이지요. 이는 또한 규칙 자체가 가변적이라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언어규칙과 직장에서 사용하는 언어규칙이 틀리다고 하면 적절한 예가 될까요? 아무튼 이런 생각은 소쉬르의 구조언어학과 차이가 있습니다. 즉, 구조언어학처럼 항상 이미 정해진 의미구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용법에 따라 가변적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교수는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맑스의 ‘실천’개념과 연결하여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교수가 지극히 ‘맑스주의자’이고 ‘유물론자’이기 때문에 이런 사유를 하였을 것입니다.


6. 현대철학과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언어학의 연구방법을 인류학에 연결한 사람입니다. 인간에게 공통적인 무의식적 기초는 무엇인가? 그것은 ‘근친상간 금지’라는 규칙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인류의 ‘문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는 모든 사회적 집단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의 보편적이고 ‘선험적인’ 무의식을 기초로 친족관계의 보편적 구조를 찾아내며, 이로써 사회구조 전반을 관통하는 보편적인 사회질서를 찾아냈다고 생각합니다.


라캉은 소쉬르와 레비-스트로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프로이드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그의 핵심주장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욕망은 결핍에 대한 욕망입니다.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것이고, 타자와 동일시하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참고적으로 르네 지라르는 인간의 욕망을 ‘모방욕망’으로 보았다는 것을 저번 논의를 통해서 알 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주체가 해체되는 지점은 ‘주체’는 어떤 중심성과 통일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으로서 무의식의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알튀세르는 맑스를 극한까지 사고한 사람이랍니다. 먼저 맑스주의를 과학으로 정립하려고 하였는데, 새로운 과학적 성과는 ‘인식론적 단절’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인 효과를 갖는다고 합니다. 또한 이데올로기는 항상-이미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고 합니다. 생각해볼만한 대목이지요. 호명은 불러주는 것입니다. ‘너는 한국인이다’라는 호명에는 ‘너는 한국인답게 행동해야 된다.’라는 뒤의 말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너는 선택받았다.’라고 말하면, ‘너는 선택받은 백성답게 행동해야 된다.’(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죠.)가 아니라 ‘그래서 감사해야 해’가 생략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푸코는 경계를 허무는 철학자라고 이 교수는 말합니다. 정상과 비정상, 동일자와 타자, 내부와 외부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인간’이란 범주가 근대라는 시기에 만들어진 산물이라고 합니다. 즉 주체는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다는 것이지요. 역사유물론적인 관점입니다. 그리고 푸코는 권력에 대해서 사고한 철학자입니다. ‘생체권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학교에서, 공장에서, 감옥에서 감시와 처벌을 통해 사회가 요구하는 책임있는 주체, 법적인 주체로 만들어진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를 더 확장하여 현대교회는 이러한 감시와 처벌(지옥간다 등)을 통해서 ‘비기독교적인’ ‘교인’을 생산한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들뢰즈/가타리는 ‘배치’라는 개념을 통해 차이의 철학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동일성의 철학에 대한 반대개념이지요. 병원의 배치 안에서는 환자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의사라는 주체에 의해 진단받고 처방받는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를 보면 이를 잘 말해줍니다.) 가정의 배치 안에서는 자애로운 아버지가 되지만, 공안경찰이라는 직업적 배치 안에서는 잔인한 고문경관이 되고, 이를 확대하여 교회라는 배치 안에서는 믿음이 좋아 ‘보이는’ 목사나 집사가 됩니다.


즉 모든 인식이나 태도의 전제가 되는 확고한 출발점으로서 ‘주체’는 없으며, ‘배치’마다 만나는 이웃항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나’들의 반복이 있습니다. 그런 반복은 동일한 반복이 아니라 차이 나는 반복입니다. 이런 ‘나’는 차이가 나지요. 들뢰즈/가타리는 또한 욕망의 개념을 ‘생산하는 욕망’으로 봅니다. 욕망은 ‘하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고자 함’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떻게’ 하고자 함이라는 구체적인 양태로 존재합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스피노자의 실체와 양태 개념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돈을 벌고 싶다, 먹고 싶다, 구원받고 싶다 등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욕망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나와 만나는 것들의 ‘관계’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주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배치’에 따라 욕망은 틀려진다는 것입니다.


사실 들뢰즈/가타리는 현대철학의 중심에 놓여있습니다. 그 외 ‘영토화’, ‘탈주’, ‘재영토화’, ‘유목주의’ ‘기계’ 등등의 개념들은 중요하지만 여기에서는 전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데카르트에서 출발한 근대철학은 ‘주체철학’이였습니다. 너무 이른 시기에 이를 넘어서려는 스피노자의 자연주의철학은 약 300년을 기다려야 하였고, 영국의 경험주의는 이성주의에 반대하면서 이를 극한까지 밀고나갔으나 근본적인 ‘근대철학의 딜레마’는 극복하지 못하였으며, 칸트는 근대철학을 다시 재건하였고, 헤겔은 이를 정점에까지 가져갔습니다. 근대철학의 해체는 맑스, 프로이트, 니체에 의해 시작되었고, 언어학과 구조주의는 이를 더욱 가속화시켰으며 포스트구조주의는 새로운 주체 개념을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즉, 현대철학에서는 데카르트적인, 칸트적인 ‘주체는 없다’는 것입니다.


7. 서평


느낀 점이야 많지만 이를 전부 이야기하려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으니 간단하게만 언급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문제설정’과 ‘코기토’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예비고찰에서 상세하게 다루었습니다. 두 번째로 스피노자의 실체와 속성(양태) 개념은 저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주체)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을까요? 기존의 신학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파악하였습니다. 데카르트의 사유에 바탕을 둔 ‘이원론’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원론을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인간’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영혼’이 죽어서 천국간다는 말도 틀렸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몸’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개념이지만 스피노자의 개념을 빌려서 이를 설명할 수 있지도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인간의 실체는 하나인데, 속성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영혼’이라고 하더라도 이원론으로서의 영혼이 아니라 인간의 실체 중 하나로서의 영혼을 이야기(강조)한다고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좀더 분명하게 설명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지만 아무튼 이런 식의 표현은 “구약성서의 인간학”이라는 책에 보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로 칸트의 논의 중 제가 생략하였지만 ‘시간과 공간’에 대한 것입니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선험적 조건’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사고하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바탕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칸트적이 개념이고, 더 나아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이 이 교수가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입니다.(“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수학의 몽상” 참조) 우리가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하였던 뉴턴의 물리학, 유클리드의 기하학 등도 그 시대의 산물이고, 현대의 물리학, 기하학에서는 이것이 깨어졌습니다. 공간에 대해서는 공간도 질량에 따라 휘어지고, 시간에 대해서도 빛의 속도보다 빨리 이동하면 시간도 거슬러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 줍니까? 진리란 없다?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한 진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관은 근대의 진리관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중요한 내용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과 ‘영원’을 우리는 막연히 저세상에서 시간이 영원히 지속된다고만 생각하였습니다. 과학적으로는 증명이 되지 않는 ‘믿음’의 문제로만 보았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은 기독교인의 상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공간’에 존재하고, ‘영원’도 너무나 순진하게 시계의 시간이 영원히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시간’(그것을 굳이 시간이라고 불러야한다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완성된 ‘묵시세계’도 설명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눈앞에 보여야만 믿는다는 사고방식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아십니까? ‘잠재적’이라는 말은 확실한 사실이지만 아직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조들이 이러한 잠재적인 본향을 사모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경험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지만 눈으로 보아야만 믿겠다는 생각은 역시 너무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사실 우리는 현실세계도 똑바로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망막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맹점’이라고 하지요.


네 번째로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제한한다는 것입니다. 점심 먹고 졸릴 때 우리는 ‘자진다’라고는 표현을 못합니다. ‘자다’라는 자동사는 수동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졸음이 올 때는 내가 의지적으로 자는 것이 아니라 ‘자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언어규칙이 없기에 우리의 사고는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의식조차도 언어에 의해 구조화되어있다는 라캉의 주장은 의미가 큽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이 날 듯 말 듯한 낱말을 경험을 해보지 않았는가요? 입에서 맴도는데 말은 안나오는 경우 말입니다. 또한 언어는 용법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성경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역시 같은 단어라도 어떤 맥락에서 하였느냐에 따라 의미가 틀려질 것입니다. 같은 ‘구원’이라도 재난에서의 구원일 수가 있고, 죄에서의 구원일 수가 있습니다.


다섯 번째로 구조주의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우리의 죄가 구조화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구조화된 죄 아래 있는 인간에게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이를 ‘아담 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말이 나온 김에 한 시대를 특정 짓는 인간의 사고 구조라든지 행동양식 등을 여러 학자들이 말하였는데,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이라고 하고, 푸코는 ‘에피스테메’라고 하고, 부르디외는 ‘장(場)’이라고 하고, 들뢰즈는 ‘영토’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인간은 이러한 사고 구조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크게 보아 모든 시대 인간들의 사고 구조나 ‘선악체계’, 행동양식 등도 구조화되어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 교수는 ‘주체’라는 문제설정을 통하여 근대 및 현대 철학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설정을 통하여 ‘역사’라는 문제설정을 넘어서야 할까요? 역사 안(배치)에서 사고하는 사람들이 역사 너머를 사고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은혜가 있으면 역사 너머의 ‘묵시’를 사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성경은 철학이 아닌 ‘계시’가 아닐까 생각해 보면서 읽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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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13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도있는 글 잘 봤습니다!
 
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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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를 읽기 위한 두 가지 예비 고찰



이 책은 이진경 교수가 일반인들을 상대로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인데, 책의 완성도가 뛰어나서 두 번이나 개정판을 내면서(내용도 많이 바뀌였지만) 현재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너무나 쉽게 일반인들을 상대로 근대 및 현대 철학에 대해서 설명을 하였고, 베스트셀러가 된 책입니다. 많은 것을 배웠고, 느꼈습니다.


그후 이진경 교수의 책들을 계속해서 보고 있습니다. 그 외 완성도가 높은 책은 <철학의 외부>와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노마디즘1, 2> 정도 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텍스트인 『철학과 굴뚝청소부』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었기에 제가 충격을 받았을까요? 그것은 이 교수의 ‘문제의식’ 때문이였습니다. 여기서는 이 책을 읽기 위한 예비 고찰로써 간단히 두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1. 문제설정


이 책은 근대 및 현대철학에 대해서 이 교수만의 ‘문제설정’을 가지고 쓰여진 책입니다. 이 교수는, 철학이란 ‘의심하기’라는 방법을 통하여 기존의 지배적인 사고방식과 투쟁하여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정의를 합니다. 여기서 ‘넘어서는’ 것은 당시의 지배적인 어떤 사상을 넘어서는 것이요, 하나의 시대를 지배하는 특정한 사고방식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합니다.


넘어설 때 기존의 사고방식과 새로운 사고방식과의 경계선이 형성됩니다. 넘어서기는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철학한다는 것은 이 경계선들을 찾아내고 그것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라고 이 교수는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경계선을 찾아내는 것이 엄청 어렵다는 것입니다. 철학자 자신들이 경계선들을 말해 주는 경우는 없고, 철학책에서도 이 경계선들을 보여주는 표시는 없기 때문에 일반인들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부각됩니다. 그 찾기 어려운 경계선들을 이 교수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경계선을 찾아내고 있고, 이를 독자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몇몇 철학책들을 보다가도 완독을 하지 못하거나 내용이 거의 기억에 남지 않았던 것은 저자들 나름대로의 이 기준이 없었다는 데에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혼란스러웠고, 어려웠습니다. 철학 훈련이 되지 않은 일반인으로서는 저자가 직접 설명해주지 않으니 그 책을 따라가기가 힘에 부쳤던 것이지요.


이 교수는 저자의 기준, 이것을 ‘문제설정’이라고 합니다. 경계를 확인하고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개념적 도구로서 ‘문제설정’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입니다. 이 교수는 친절하게도 이 ‘문제설정’을 설명하기 위한 예를 들고 있습니다. 저의 집 대문 앞에 아무 양해 없이 며칠 동안 세워둔 남의 자동차를 보고 화가 나서 바퀴에 펑크를 내었다고 하면, 그 자동차 주인이 “아니, 차 좀 주차시켜놓았다고 이렇게 펑크를 낼 수가 있소? 이건 명백히 불법행위이니 배상해 주시오.”라고 항의를 한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 자동차로 인해 많은 불편을 겪었던 저는 그 말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그 사람을 ‘불법주차’로 맞고소를 하겠지요. 그럼 이제 ‘불법 주차한 자동차에 펑크낸 게 불법행위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는 ‘불법주차한 자동차에 펑크를 낸 행위가 불법인가 적법인가?’라는 문제가 설정된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대답 역시 그 문제를 설정한 방식에 크게 좌우되는 것이구요.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동차와 나, 자동차 주인과 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는 그밖에도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주차장이 아닌 남의 집 앞에 불편하게 주차해 둔 이유가 무엇인가? 그건 주차장이 모자라기 때문이며, 근본적으로 도시 교통정책이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회적 측면에서의 접근 방식이고, 해결 방법도 전혀 틀릴 것입니다.


또한 왜 나는 바람직한 일이 아님에도 그 자동차에 펑크를 냈나? 자동차 없는 것도 서러운데 남의 차 때문에 하루 종일 고생을 했으니 화가 나서 그랬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리적 측면에서의 접근 방식인 것입니다.


법적 측면에서의 접근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심리적 측면에서의 대답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즉, 어떻게 문제를 설정하느냐에 따라 그 대답도 틀리게 됩니다. 대답뿐만 아니라 해결 방법도 전혀 틀리게 됩니다. 법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때는 그 법이 정당하냐 아니냐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고, 기존 법의 올바름이 당연시 됩니다.


이건 과학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뉴턴의 이론이 나온 뒤에 다른 행성의 궤도는 다 그 이론에 따라 계산한 게 맞는데 오직 천왕성만 안 맞습니다. 이 경우 ‘이론을 반박하는 사례가 나오면 그 이론을 포기해야 한다.’는 실증주의나 반증주의의 입장에선 “이론과 사실 둘 중 어느 것이 옳은가? 사실이 안 맞는 이론은 버려야 한다.”는 문제설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왕성 궤도를 잘못 계산한 뉴턴의 이론은 거짓이라는 결론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지요.


반면 뉴턴 이론의 지지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다른 건 다 맞는데 오직 천왕성만 안 맞는다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요인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 요인이 대체 무얼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설정을 하면 이젠 다른 요인들을 찾아 나설 것이고, 결국엔 천왕성과 명왕성 사이에 해왕성이라는 행성이 하나 있기 때문이란 걸 발견하게 됩니다.


상이한 문제설정은 이처럼 상이한 대답과 상이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것은 그 문제를 가지고 사고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제한합니다. 여기서 ‘문제설정’을 통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사고방식을 찾아볼 수가 있으며, 그것을 분석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문제설정’이라는 도구를 통해 철학의 경계를 찾아내고, 그 경계의 의미를 읽어낼 수가 있는 것이라고 이 교수는 말합니다.


저는 이 ‘문제설정’이라는 개념이 엄청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성경을 읽는데, 왜 해석이나 그 의미는 개인에 따라 전혀 다르게 다가오는가? 여기에 대해서 고민해보지 않았는가요? 같은 본문을 읽더라도 구속사신학에서는 이렇게 읽고, 언약신학에서는 저렇게 읽고, 성화신학에서는 요렇게 읽는 이유가 ‘문제설정’ 자체가 틀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교수가 예를 든(전혀 다른 의미의 예지만.) 성경구절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라는 본문에서, 왜 말씀이 하나님이 되는지 ‘능력’의 차원에서 이해(문제설정)하는 것과 ‘존재론’적 차원에서 문제설정하는 것은 엄청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그 대답도 하늘과 땅 차이이지요.


2. 두개의 코기토


코기토(cogito)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뜻입니다. 근대철학을 연 데카르트의 명제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요. 그런데, 이 코기토가 중세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계셨나요? 4세기의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의 제1명제도 이것이였습니다. 어떻게 같은 명제가 서로 대비되는 중세(알다시피 중세는 어거스틴이 열었습니다.)와 근대를 열었을까요?


어거스틴은 플라톤과 기독교교리를 믿음과 이성으로 종합하여 중세철학을 기초지운 사람입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인식의 목표는 신과 영혼이였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겨냥해 제기되는 숱한 회의론을 반박하려고 하였는데, 그 기초가 되는 것이 이 ‘코기토’인 것입니다. 회의론자들이 의심하는 모든 것 중에서 의심하는 자신은, 회의론자들도 반박을 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의심하는 나’가 없으면 어떻게 ‘내’가 의심하겠습니까?


어거스틴은 여기서 더 나가, 이러한 의심하는 ‘내’가 모여서, 이들이 모두 인정하는 지식, 예를 들면 2+2=4와 같은 수학적 지식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긍정하는 도덕적 지혜 등도 확실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러한 것들이 확실한 것이라는 판단을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개인이 아닌 ‘다른 확실한 것’에 의존하여야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신’을 끌어드리죠.


즉, 신이 이런 확실한 판단을 할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인데, 반대로 이야기하면, ‘코기토’라는 확실한 지식을 통해 우리는 신이라는 확실하고 완전한 존재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문제설정’입니다.


그러면, 데카르트는 똑같은 ‘코기토’를 가지고 어떻게 나아갔을까요? 데카르트도 똑같은 회의에 빠집니다. 진리는 어떠한 의심에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확실한 것에 이르기 위한 회의, 이를 ‘방법적 회의’라고 합니다. 데카르트도 모든 것을 의심하지만, 의심하는 자신만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이 ‘의심하는 나’는 자신의 능력으로써 확실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칩니다. 좀 어렵는가요? 쉽게 말해 ‘의심하는 나’는 확실한데, 이 ‘의심하는 나’를 ‘내’가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심하는 ‘나’는 확실한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데카르트의 ‘문제설정’입니다. 더 어렵게 되었죠?


비교해서 말하면, 어거스틴에게는 이 확실한 ‘코기토’를 신이 제공해 주었다는 것이고,(어거스틴의 목표가 신에 대한 인식이였지요.) 데카르트에게는 이 ‘코기토’를 누가 주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라는 자아가 자신의 ‘능력’으로써 확실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며,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 이 능력이 인간 자신에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거스틴에게는 ‘코기토’가 신학의 기초를 제공해 주는 것이라면, 데카르트에게는 이것이 이성(과학)의 기초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핵심은 ‘코기토’가 상반된 역할을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맥락 속에 자리 잡고 있느냐, 어떤 ‘문제설정’ 속에 위치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인 것입니다.


너무 중요한 이야기이지요.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어떤 ‘문제설정’을 가지느냐, 또는 어떤 맥락 속에 있느냐에 따라서 같은 낱말도 상반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생각해보세요. 같은 낱말이라도, 예를 들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라는 의미도 어떤 문제설정이나 맥락 속에 위치하느냐에 따라서 상반된 의미를 가집니다. 이 구원이, 인간을 위한 구원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하나님(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구원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거기에 대한 인간의 반응도 틀릴 것입니다. 성경의 명령문이나 예수님의 말씀들도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 두 가지 개념만으로도 이 책의 의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개념들을 성경에만 적용하였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가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말을 얼마나 많이 오해하는가요? 그것은 나와 상대방의 ‘문제설정’ 자체가 틀리기 때문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상반된 의미가 됩니다.


이 책은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입니다. 내용이 너무 방대하지만 근대 및 현대 철학의 흐름을(물론 이진경 교수 나름대로의 ‘문제설정’에 의해 경계 지어진 흐름이지만) 쉽게, 명확하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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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13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심도있는 서평이네요~
 
데칼로그 - 십계, 키에슬로프스키, 그리고 자유에 관한 성찰
김용규 지음 / 바다출판사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김용규씨의 책 “데칼로그”는 특이한 책입니다. 부제가 말해주듯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십계명을 해석하는데, 폴란드의 영화감독 키에슬로프스키의 “데칼로그”라는 연작영화를 소재로 하여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데칼로그는 그리스어로 ‘십계명’을 말합니다. 책의 구성은 각 계명에 따라 영화의 줄거리를 소개하고, 위 계명에 대한 기독교사에 있었던 십계명에 대한 해석들을 설명한 후, 저자가 주장하는 존재론적 해석으로 마무리를 하는데, 이 입장으로 키에슬로프스키의 “데칼로그”에 대한 영화평도 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주장하는 존재론적 해석이 설득력이 있는 게 저자가 신학을 전공하였기 때문이고, 본문 뒤에 첨부된 만만치 않은 미주와 전문용어 해설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공을 들인 저작이라는 것이지요. 또한 키에슬로프스키 영화감독도 상당한 내공을 보여주고 있는데,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여러 권의 신학 책에 대해서 섭렵하였다고 하는군요. 나중에 보니 영화계에서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감독이였습니다. 제가 다행히 비디오를 보았더니 기존의 도덕적 해석으로는 “데칼로그” 영화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저자의 설명을 따라 존재론적으로 해석을 하니 이해가 가더군요. 즉, 저자의 말에 의하면 이 영화는 존재론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책의 대략을 살펴볼까요? 저자는 십계명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크게 윤리적인 해석과 크뤼제만이 주장한 사회적 해석과 자신이 주장하는 존재론적 해석으로 나누고, 윤리적, 사회적 해석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 후 존재론적 해석에 대한 타당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윤리적인 해석은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고 일부 기독교에 받아들이는 해석으로써 십계명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타당성을 간직한 윤리서라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반드시 지켜야할 도덕이라는 것이지요.


크뤼제만이 주장하는 사회적 해석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치적, 사회적으로 종되었던 애굽땅에서 출애굽(구원)시킨 후에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셨는데, 그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얻은 자유를 보존하라는 취지로 십계명을 주었다는 것입니다.(그래서 크뤼제만의 책 제목이 ‘자유의 보존’입니다.) “각각의 계명들을 다른 시대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할 때 그들을 굴복시키고 길들이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되며, 윤리적 금지행위가 아닌 사랑의 구체적 실현으로 이해해야 하고, 종교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실질적이고 적극적인 실행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면 이 책의 핵심인 존재론적 해석은 무엇일까요? 먼저 저자는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나는 있는 자이다’(출3:14)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역사상 ‘존재론’의 전통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십계명도 이 노선에 따라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1계명을 예로 들면, 신은 존재이고 창조주이고, 인격적이며, 유일자이지만 다른 우상은 ‘존재물’이고 어떤 열망의 형상화이기 때문에 이를 섬긴다는 것은 그 어떤 존재물이나 그에 대한 열망에 스스로 구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존재’로서 자유를 주는 자이기 때문에 우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라 라는 것이 1계명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데칼로그 1>은 주인공이 현대인의 여러 우상 중 ‘계산적 이성’을 신으로 섬겨 그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저자의 십계명 해석에 동의를 하는가요? 저는 이해는 가지만 동의는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십계명(율법도 마찬가지)을 달리 해석하기 때문이지요. 십계명은 저자의 말대로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구원)시킨 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을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계명을 통하여 확인하고 유지하라는 내용이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계명들(뿐만 아니라 다른 율법들도)을 지킬 수가 있었을까요? 당연히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사법을 함께 주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계명과 제사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계명을 어겼고, 그래서 늘 속죄가 이루어져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속죄제사도 나중에는 제사장들과 백성들의 탐욕과 외식으로 그들의 죄만 더할 뿐이였던 것이 성경이 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이고 인간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지키지도 못할 계명을 주었단 말인가요? 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율법에는 흠이 없습니다. 문제는 인간의 실상에 있는데, 그것은 탐욕이였습니다. 저자도 간파하였듯이 이 탐욕 때문에 인간은 십계명을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탐욕을 불교에서는 욕심이라고도 하고, 현대철학에서는 욕망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 탐욕(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하는데, 이 탐욕을 이길 인간은 아무도 없다고 증거합니다. 설명이 너무 길어졌으나, 결과적으로 십계명을 포함한 모든 율법은 인간의 죄성을 폭로하고 이를 통하여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참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있으나, 이를 완전히 이룰 인간이 없다는 것에서 인간의 절망이 있으며, 온몸으로, 죽기까지 이 계명을 지킨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또한 인간의 희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십계명에 대한 복음적인 해석입니다.


어째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제 말에도 동의하기가 힘드시죠? 하지만 이것이 제가 십계명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선이해(전제)이기 때문에 저는 이러한 전제에서 이 책을 읽었고 서평을 작성하였습니다. 저자가 심혈을 기울인 책이므로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런데 양장본이라 책값이 조금 비싸서....


사족 하나, 저희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위 “데칼로그” 영화(총10개)를 특선영화코너에서 한참을 찾았는데, 드디어 찾아내고는 위 비디오 2개를 빌리려고 하니까 주인아저씨가 저보고 이 영화감독을 아세요? 라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영화감독은 모르고 이 영화는 안다고 이야기를 하였는데, 주인아저씨 왈, 이 영화비디오는 엄청 귀한 거라서 시내의 비디오 가게에서 찾기가 힘들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이 비디오를 소장하고 있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더라구요.


사족 둘, 우연히 시립도서관 자료검색에서 이 “데칼로그”를 입력하였더니 세상에나! 글쎄 이 연작영화가 DVD 5장으로 비치되어 있더라구요. 위 영화는 보고 싶으나 주위 비디오 가게에 위 비디오 테이프가 없으신 분들은 공공도서관 자료검색에서 검색을 해보시지요. 그러면 혹시나?


사족 셋, 저자의 십계명 구분은 개신교에서의 구분법과 약간 틀립니다. 카톨릭에서 사용하는 구분법을 따랐는데, 개신교에서의 2계명에 해당하는 우상숭배금지 조항이 카톨릭에서는 1계명에 포함되었고, 개신교에서의 10계명에 해당하는 이웃의 것에 대한 탐심 조항을 카톨릭에서는 2개로 나누어 이웃의 아내에 대한 탐심 조항과 이웃의 소유에 대한 탐심 조항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7계명인 도적질하지 말라는 조항을 물건이 아닌 사람 도적질을 의미한다고 하는군요. 고대 노예 사회에서 자유인을 납치하여 파는 행위를 금하였다는 것이지요. 일리가 있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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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13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을 보니, 정말 읽고 싶군요! 당장 사야 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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