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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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예비 고찰을 통하여 이 책에 대해서 약간 언급을 하였기 때문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은 이진경 교수 나름대로의 ‘경계짓기’(문제설정)를 통하여 근대 및 현대 철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철학의 가장 큰 주제를 ‘주체’로 파악하였고, 그래서 근대의 철학을 ‘주체철학’이라고 합니다.


1. 근대철학의 출발


왜 근대철학이 ‘주체철학’이 되었느냐하면,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의 문제설정이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예비 고찰에서도 살폈듯이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의심하는 나’는 확실하다는 것(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을 데카르트는 깨달았고, 이것을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주체가 객체(대상)와 분리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사고하는 ‘주체’가 있으면, 당연히 사고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러 문제가 등장하는데, 주체가 대상과 분리되었을 때 (인식하는) 주체가 (인식되는) 대상과 일치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주체가 대상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중세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신을 통하여 대상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알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제목인 『철학과 굴뚝청소부』도 이 대상과의 일치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제3자가 보증해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과학도 보증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이 교수가 말하는 ‘근대철학의 딜레마’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이 근대철학의 딜레마를 넘어섰다는 것이 이 교수의 설명입니다. 스피노자는 두 개의 실체를 가정하는 데카르트를 비판하고 실체는 한 개이지만, 속성은 여러 개로 나타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양태). 다시 말하면 실체는 양태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표현된다는 말은 ‘존재한다’는 뜻이구요.(p.68) 그래서 애초부터 주체와 객체의 분리문제, 정신과 물질의 분리문제를 비껴갈 수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진리(대상과의 일치문제)를 알려면 이미 진리의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진리와 허위의 기준이다.”


2. 근대철학의 위기


그 다음은 영국의 경험주의를 통하여 근대철학의 위기가 왔다고 이 교수는 설명합니다. 로크는 데카르트의 이성주의에 반대하여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경험’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완전한 개념’은 신이 준 것이 아니고, 오직 경험에서 추출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것은 단지 개별적인 것에서 추상된 것이며, 이 공통된 특징에 붙인 이름일 뿐이라는 주장은 ‘유명론’의 논지와 비슷합니다.


이 경험주의를 극한으로 밀고 간 사람은 버클리와 흄이였습니다. 특히 흄은 ‘나’, ‘주체’, ‘자아’로 불리는 것은 인상과 관념의 묶음, 지각의 다발일 뿐이라고 합니다. 결국 ‘나’, ‘정신’이라는 게 따로 없다는 것이지요. 흄의 주장은 모든 것을 의심하는, 급기야 ‘생각하는 나’까지 의심하는 극단적 회의주의였습니다.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였던 ‘주체’가 해체의 위기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흄의 주장도 여전히 근대적 문제설정의 한계 ‘안에’ 있었다고 이 교수는 설명합니다. ‘인간’에 대한 과학과 참된 지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검토하다보니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이 나오는데, 흄에게 있어서 ‘인과관계’는 습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상이나 관념을 결합시켜 어떤 지식을 형성합니다. 이 지식은 ‘법칙’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힘이 있어 믿은 사람에게 실재적인 효과를 가진다고 합니다. 즉, 흄은 어떤 지식이 진리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게 아니라 이 지식이 그걸 믿는 사람에게 어떤 효과를 갖는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3. 근대철학의 재건


칸트는 흄의 주체비판을 받아들여 이 주체가 과연 철학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지를 살폈습니다. 데카르트가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들을, 칸트는 그게 어째서 출발점이 될 수 있는지를 연구하였다는 것이지요. 이를 ‘이성비판’이라고 합니다.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 ‘선험적 주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선험적 주체는 관념이나 감각의 다발에 불과한 경험적 주체와 달리 모든 주체에 공통되며, 경험이나 감각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좌우하며, 확실하고 항구적이라는 특징을 가집니다. 이로써 칸트는 흄에 의해 해체되어 버린 근대적 주체를 ‘선험적 주체’라는 확고하고 튼튼한 것으로 되살려 낸 것입니다.


피히테를 거쳐 헤겔에 이르면, 근대철학은 정점에 이릅니다. 헤겔은 주체와 객체의 문제를 ‘절대정신’으로 동일화시킵니다. 절대정신은 자기 발전과정을 통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에 도달한다는 것이지요.(변증법) 이로써 절대정신은 다시 자기에게로 복귀하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절대정신의 실현이란 목적을 향해 발전해 가는 ‘목적론적 과정’이라고 합니다.


4. 근대철학의 해체


근대철학은 이제 해체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인간이나 주체를 출발점으로 삼는 ‘주체철학’을 근본적으로 넘어서려는 시도는 먼저 맑스의 '역사유물론'에서 나타납니다. 맑스는 ‘실천’이라는 개념을 통해 근대철학을 넘어서려고 합니다. 먼저 맑스는 ‘대상’의 개념 자체를 바꾸려고 합니다. 주체와 대비되는 ‘대상’이 아니라 활동적인 생활 과정, 실천 과정으로서 파악합니다. 그럼으로써 ‘대상’을 사회적 맥락과 역사 속에서 정의하려고 합니다. 중요한 말이지요. 또한 ‘진리’의 개념도 현실성과 힘의 문제로 바꾸어버립니다. 어떤 사물에 대한 영원한 진리는 불가능하고, 어떤 판단이나 지식의 현실성과 타당성이 힘을 가지게 되면 그것이 진리라고 합니다. 이러한 유물론을 ‘역사유물론’이라고 합니다.


이를 통해 맑스는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해체합니다.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파악합니다.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p.213)


두 번째로 근대철학을 해체한 사람은 프로이드입니다. 그는 처음으로 인간의 ‘무의식’을 발견합니다. 즉 의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영역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무의식은 우연적인 게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이라고 합니다. 후기의 프로이드는 이 무의식도 ‘이드’와 ‘초자아’로 분열되어 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무의식은 근대철학을 해체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근대철학은 주체를 의식과 동일시하였고, 투명하고 통일성이 있었다고 하였으나 이것이 깨어진 것이지요. 이제는 ‘생각하는 나’ 이외에 ‘생각하는 나’가 알지 못하는 ‘나’가 인간내부에 있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근대철학을 해체한 사람은 니체입니다. 니체는 질문 자체를 바꾸어버립니다. ‘진리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진리란 어떤 것인가?’라고 묻습니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라고 말입니다. 진리라는 것을 사로잡고 있는 힘은 어떤 것인가? 따라서 ‘의미’를 아는 것은 주어진 대상을 점령하고 있는 ‘힘’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힘을 구별해주는 것이 ‘의지’이고, 이 의지는 힘들간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어 지는 것입니다. 이를 ‘권력에의 의지’라고 합니다. 좀 어렵죠?


데카르트의 명제와 비교하면, 니체는 ‘생각’이라는 것은 내가 원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 원해서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그 무엇’은 ‘권력의지’이구요. 따라서 근대적인 주체 개념은 자명하지 않고, 출발점이 아니라 권력의지가 구성해내는 ‘결과물’인 것입니다. 주체가 해체된 것이지요.


5. 현대철학과 언어학


세 사람을 통하여 근대의 주체철학은 해체의 길을 가는데, 이를 더욱 가속화 시킨 것은 현대 언어학입니다.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제한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의 규칙에 따라서 사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훔볼트는 언어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구조를 제약하며, 세계를 파악하는 관점을 내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사고보다 언어의 우위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즉, 언어란 그걸 사용하는 주체들 모두에게 공통된 사고의 기반이며, 선험적인 구조라는 것입니다.


소쉬르는 언어에 있어서 기호와 지시체 간에는 어떤 유사관계나 일치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자의적이라는 것입니다. 유명한 말이지요. 또한 언어는 개인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약속된 규칙의 체계이기 때문에 개인은 그 규칙에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의미는 개인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언어체계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사고나 판단은 개개의 ‘주체’가 하는 게 아니라, 언어의 의미체계(구조) 속에 있는 것이며, 개인들은 그것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래서 소쉬르는 ‘구조주의’의 창시자라는 말을 듣지요.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용법’이라고 합니다.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 어떤 맥락 속에서 사용되었는가에 따라 의미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언어게임’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체스를 할 때와 바둑을 할 때는 그 규칙이 틀려서 다른 규칙을 배워야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말이지요. 이는 또한 규칙 자체가 가변적이라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언어규칙과 직장에서 사용하는 언어규칙이 틀리다고 하면 적절한 예가 될까요? 아무튼 이런 생각은 소쉬르의 구조언어학과 차이가 있습니다. 즉, 구조언어학처럼 항상 이미 정해진 의미구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용법에 따라 가변적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교수는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맑스의 ‘실천’개념과 연결하여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교수가 지극히 ‘맑스주의자’이고 ‘유물론자’이기 때문에 이런 사유를 하였을 것입니다.


6. 현대철학과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언어학의 연구방법을 인류학에 연결한 사람입니다. 인간에게 공통적인 무의식적 기초는 무엇인가? 그것은 ‘근친상간 금지’라는 규칙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인류의 ‘문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는 모든 사회적 집단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의 보편적이고 ‘선험적인’ 무의식을 기초로 친족관계의 보편적 구조를 찾아내며, 이로써 사회구조 전반을 관통하는 보편적인 사회질서를 찾아냈다고 생각합니다.


라캉은 소쉬르와 레비-스트로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프로이드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그의 핵심주장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욕망은 결핍에 대한 욕망입니다.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것이고, 타자와 동일시하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참고적으로 르네 지라르는 인간의 욕망을 ‘모방욕망’으로 보았다는 것을 저번 논의를 통해서 알 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주체가 해체되는 지점은 ‘주체’는 어떤 중심성과 통일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으로서 무의식의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알튀세르는 맑스를 극한까지 사고한 사람이랍니다. 먼저 맑스주의를 과학으로 정립하려고 하였는데, 새로운 과학적 성과는 ‘인식론적 단절’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인 효과를 갖는다고 합니다. 또한 이데올로기는 항상-이미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고 합니다. 생각해볼만한 대목이지요. 호명은 불러주는 것입니다. ‘너는 한국인이다’라는 호명에는 ‘너는 한국인답게 행동해야 된다.’라는 뒤의 말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너는 선택받았다.’라고 말하면, ‘너는 선택받은 백성답게 행동해야 된다.’(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죠.)가 아니라 ‘그래서 감사해야 해’가 생략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푸코는 경계를 허무는 철학자라고 이 교수는 말합니다. 정상과 비정상, 동일자와 타자, 내부와 외부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인간’이란 범주가 근대라는 시기에 만들어진 산물이라고 합니다. 즉 주체는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다는 것이지요. 역사유물론적인 관점입니다. 그리고 푸코는 권력에 대해서 사고한 철학자입니다. ‘생체권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학교에서, 공장에서, 감옥에서 감시와 처벌을 통해 사회가 요구하는 책임있는 주체, 법적인 주체로 만들어진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를 더 확장하여 현대교회는 이러한 감시와 처벌(지옥간다 등)을 통해서 ‘비기독교적인’ ‘교인’을 생산한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들뢰즈/가타리는 ‘배치’라는 개념을 통해 차이의 철학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동일성의 철학에 대한 반대개념이지요. 병원의 배치 안에서는 환자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의사라는 주체에 의해 진단받고 처방받는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를 보면 이를 잘 말해줍니다.) 가정의 배치 안에서는 자애로운 아버지가 되지만, 공안경찰이라는 직업적 배치 안에서는 잔인한 고문경관이 되고, 이를 확대하여 교회라는 배치 안에서는 믿음이 좋아 ‘보이는’ 목사나 집사가 됩니다.


즉 모든 인식이나 태도의 전제가 되는 확고한 출발점으로서 ‘주체’는 없으며, ‘배치’마다 만나는 이웃항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나’들의 반복이 있습니다. 그런 반복은 동일한 반복이 아니라 차이 나는 반복입니다. 이런 ‘나’는 차이가 나지요. 들뢰즈/가타리는 또한 욕망의 개념을 ‘생산하는 욕망’으로 봅니다. 욕망은 ‘하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고자 함’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떻게’ 하고자 함이라는 구체적인 양태로 존재합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스피노자의 실체와 양태 개념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돈을 벌고 싶다, 먹고 싶다, 구원받고 싶다 등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욕망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나와 만나는 것들의 ‘관계’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주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배치’에 따라 욕망은 틀려진다는 것입니다.


사실 들뢰즈/가타리는 현대철학의 중심에 놓여있습니다. 그 외 ‘영토화’, ‘탈주’, ‘재영토화’, ‘유목주의’ ‘기계’ 등등의 개념들은 중요하지만 여기에서는 전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데카르트에서 출발한 근대철학은 ‘주체철학’이였습니다. 너무 이른 시기에 이를 넘어서려는 스피노자의 자연주의철학은 약 300년을 기다려야 하였고, 영국의 경험주의는 이성주의에 반대하면서 이를 극한까지 밀고나갔으나 근본적인 ‘근대철학의 딜레마’는 극복하지 못하였으며, 칸트는 근대철학을 다시 재건하였고, 헤겔은 이를 정점에까지 가져갔습니다. 근대철학의 해체는 맑스, 프로이트, 니체에 의해 시작되었고, 언어학과 구조주의는 이를 더욱 가속화시켰으며 포스트구조주의는 새로운 주체 개념을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즉, 현대철학에서는 데카르트적인, 칸트적인 ‘주체는 없다’는 것입니다.


7. 서평


느낀 점이야 많지만 이를 전부 이야기하려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으니 간단하게만 언급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문제설정’과 ‘코기토’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예비고찰에서 상세하게 다루었습니다. 두 번째로 스피노자의 실체와 속성(양태) 개념은 저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주체)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을까요? 기존의 신학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파악하였습니다. 데카르트의 사유에 바탕을 둔 ‘이원론’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원론을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인간’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영혼’이 죽어서 천국간다는 말도 틀렸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몸’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개념이지만 스피노자의 개념을 빌려서 이를 설명할 수 있지도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인간의 실체는 하나인데, 속성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영혼’이라고 하더라도 이원론으로서의 영혼이 아니라 인간의 실체 중 하나로서의 영혼을 이야기(강조)한다고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좀더 분명하게 설명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지만 아무튼 이런 식의 표현은 “구약성서의 인간학”이라는 책에 보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로 칸트의 논의 중 제가 생략하였지만 ‘시간과 공간’에 대한 것입니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선험적 조건’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사고하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바탕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칸트적이 개념이고, 더 나아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이 이 교수가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입니다.(“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수학의 몽상” 참조) 우리가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하였던 뉴턴의 물리학, 유클리드의 기하학 등도 그 시대의 산물이고, 현대의 물리학, 기하학에서는 이것이 깨어졌습니다. 공간에 대해서는 공간도 질량에 따라 휘어지고, 시간에 대해서도 빛의 속도보다 빨리 이동하면 시간도 거슬러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 줍니까? 진리란 없다?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한 진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관은 근대의 진리관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중요한 내용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과 ‘영원’을 우리는 막연히 저세상에서 시간이 영원히 지속된다고만 생각하였습니다. 과학적으로는 증명이 되지 않는 ‘믿음’의 문제로만 보았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은 기독교인의 상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공간’에 존재하고, ‘영원’도 너무나 순진하게 시계의 시간이 영원히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시간’(그것을 굳이 시간이라고 불러야한다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완성된 ‘묵시세계’도 설명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눈앞에 보여야만 믿는다는 사고방식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아십니까? ‘잠재적’이라는 말은 확실한 사실이지만 아직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조들이 이러한 잠재적인 본향을 사모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경험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지만 눈으로 보아야만 믿겠다는 생각은 역시 너무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사실 우리는 현실세계도 똑바로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망막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맹점’이라고 하지요.


네 번째로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제한한다는 것입니다. 점심 먹고 졸릴 때 우리는 ‘자진다’라고는 표현을 못합니다. ‘자다’라는 자동사는 수동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졸음이 올 때는 내가 의지적으로 자는 것이 아니라 ‘자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언어규칙이 없기에 우리의 사고는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의식조차도 언어에 의해 구조화되어있다는 라캉의 주장은 의미가 큽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이 날 듯 말 듯한 낱말을 경험을 해보지 않았는가요? 입에서 맴도는데 말은 안나오는 경우 말입니다. 또한 언어는 용법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성경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역시 같은 단어라도 어떤 맥락에서 하였느냐에 따라 의미가 틀려질 것입니다. 같은 ‘구원’이라도 재난에서의 구원일 수가 있고, 죄에서의 구원일 수가 있습니다.


다섯 번째로 구조주의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우리의 죄가 구조화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구조화된 죄 아래 있는 인간에게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이를 ‘아담 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말이 나온 김에 한 시대를 특정 짓는 인간의 사고 구조라든지 행동양식 등을 여러 학자들이 말하였는데,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이라고 하고, 푸코는 ‘에피스테메’라고 하고, 부르디외는 ‘장(場)’이라고 하고, 들뢰즈는 ‘영토’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인간은 이러한 사고 구조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크게 보아 모든 시대 인간들의 사고 구조나 ‘선악체계’, 행동양식 등도 구조화되어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 교수는 ‘주체’라는 문제설정을 통하여 근대 및 현대 철학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설정을 통하여 ‘역사’라는 문제설정을 넘어서야 할까요? 역사 안(배치)에서 사고하는 사람들이 역사 너머를 사고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은혜가 있으면 역사 너머의 ‘묵시’를 사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성경은 철학이 아닌 ‘계시’가 아닐까 생각해 보면서 읽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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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13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도있는 글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