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나의 겁 많은 자존심과 존대한 수치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걸세. 내가 구슬이 아님을 두려워했기에 애써 노력해 닦으려 하지 않았고, 또 내가 구슬임을 어느 정도 믿었기에 평범한 인간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던 것이라네. ...인생은 아무것도 이루지 않기에는 너무도 길지만 무언가를 이루기에는 너무도 짧은 것이라고 입으로는 경구를 읊조리면서, 사실은 자신의 부족한 재능이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비겁한 두려움과 고심(苦心)을 싫어하는 게으름이 나의 모든 것이었던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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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 흐느낌 문학동네 시집 88
신기섭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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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스물이 넘고 서른이 넘고 마흔이 넘어서도 죽지 않았으니 이제는 죽어봐야 요절은 아니다. 그러고나니 오래 살고 싶어졌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게 나날의 목표가 된 듯, 병원을 들락거리고 약을 먹는다. 그러면서 요새도 요절하는 천재가 있나, 다들 잘사는 걸로 생각하고 있었다.

신기섭의 시집을 선물받은 자리에서 첫번째 시를 읽고 '미치겠다' 싶었다. 한 편의 시에 이렇게 오래 마음이 머물기는 참 오랫만이다. 그런데 집에 와서 시집을 펼쳐도 첫 시에서 자꾸 진도가 안 나간다. 시 한 편을 읽는 게 이렇게 무섭고 끔찍하기는....

신기섭은 요절한 시인이다. 죽음을 동경한 시인은 아니다. 아무래도 기형도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시와 삶, 둘 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으나 죽음을 꿈꾼 시인은 아니었다. 둘 다 삶을 지독하게 사랑했으나 죽음을 정면으로 보았기에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신기섭의 시에는 죽음이 시종 함께한다. 그가 얼마나 끔찍하게 고독했을지, 차마 눈 뜨고 그의 시를 읽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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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공감 - 김형경 심리 치유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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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에 연재될 때 간간히 읽었는데 사실 그때는 큰 공감을 못 느꼈다. 그런데 책으로 나온 걸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읽으니 수긍이 가기도 하고 내 자신을 비춰보게도 되었다.

저자의 말대로 읽다보면 왠지 거북하고 이물감이 느껴지는 대목들이 있었는데, 마음을 순하게 갖고 이 부분이 어쩌면 내 안의 억압인지도 모른다고 받아들이려 애썼다. 사실 이런 책들은 비판적으로 읽으면 별 도움이 안 된다. 이 책에서 확실한 해답을 얻을 수도 없다. 책 한 권이 어떻게 마음의 혼란을 가라앉히고 문제해결의 방안을 제시해줄 수 있으랴. 다만, 애써가는 과정 중의 하나일 뿐이다. 한 가지, 저자가 계속 강조하는 자기분석의 중요성은 크게 공감한 부분이다. 자기분석의 어려움을 새삼 깨닫고 있던 참이라 더욱 그랬다. 자기분석과 원망 해소의 한 방법으로 편지쓰기는 실제적 도움도 될 듯했다.

다만,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핵으로 한 프로이트의 가족 로망스구조가 너무 부각되어서, 자칫 가족과 부모로 과도하게 경도되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건 아닌지 우려되었다. 이 책을 읽고 몇 사람과 토론했을 때도 그런 점이 많이 지적되었다. 가족과 부모의 역할이 강조되는 건 환경의 주요 요소로서이지 헤어날 수 없는 늪과도 같은 관계는 아닐진대, 프로이트의 부-모-자로 구성된 삼각형 애증은 너무 결정적으로 보이는 문제점이 있다. 그리고 이 책에서도 그런 점이 보여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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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와 <생일편지>


격렬히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도

황금빛 연꽃이 심겨질 수 있으리라.

 

1963년 실비아 플라스가 서른의 나이로 목숨을 끊었을 때, 이 글귀가 그녀의 묘비에 새겨졌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그녀를 보며 전 남편 테드 휴즈가 자주 인용하던 산스크리트어 경구였다.

두 격렬한 시혼(詩魂)이 처음 마주친 곳은 책의 거리로 유명한 런던 채링크로스가였다. 둘은 바로 사랑에 빠지고 결혼한다. 결혼은 늘 그렇듯 사랑의 무덤, 영화 <실비아>는 두 시인의 무덤을 현실감 있게 재현한다.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와 테드 휴즈의 시집 <생일편지>를 토대로 한 이 영화에서 기네스 펠트로는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뜨겁고 순수한 한 영혼이 사랑으로 파멸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아프다.    

실비아 플라스는 “죽는다는 것은/ 예술, 다른 매사에 그렇듯이/ 난 그것을 예외적으로 잘한다”고 읊었듯이 오만과 절망을 동시에 내보였던 아름다운 천재였고, 그런 여자를 잊는다는 건 불가능인지도 모른다.

젊은 날 그녀를 놓아버렸던 테드 휴즈는 35년 뒤, 실비아와의 첫 만남부터 죽음 이후까지를 담은 88편의 시를 내놓아 세상을 놀라게 한다. <생일편지>라는 제목의 이 시집을 펴내고 불과 보름 만에 테드 휴즈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그에겐 실비아의 세상으로 떠나는 죽음이야말로 새로운 탄생이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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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17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비아플러스의 일기를 사려다 실비아dvd를 사면 실비아 플러스일기책을 주는 행사덕분에 2개를 다 가질수가 있었답니다. 지금도 하는지 모르겠네요..^^

스머프 2007-05-18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작년 겨울에 그런 행사를 했지요. 지금은 안 하는 것 같아요. [너무 너무]라는 책에 실비아 플라스의 아름다운 사진이 실려 있더군요.
 
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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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의 글은, 발부터 어깨까지 이불을 덮고 읽어야 한다. 발이 시리고 몸이 서서히 얼어붙는 느낌, 그의 글은 내게 늘 그런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중에서도 이번에 읽은 [디아스포라 기행]의 더욱 그랬다. 머리는 뜨거워지는데 가슴은 차가워지는, 그래서 목울대는 아픈데 눈물은 나오지 않는 독서랄까.

'노마드 '라는 말이 유행이다. 우리는 경계를 허물고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해석하는 존재를 꿈꾼다. 하지만 이 어마어마한 자본의 시대에 과연 그 유목의 꿈이 가능할까? 자본 없는 유목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싸워야 할까, 어떻게 그 꿈의 연대를 만들어낼까? 노마디즘은 내겐 질문의 연쇄였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디아스포라'를 만나니 이젠 온통 슬픔과 부끄러움의 연쇄다. 유배당한 자, 지배권력에 의해 뿌리뽑히고 유배당한 디아스포라에게 조국은 끔찍한 꿈이고 고향은 절망이다. 조국을 가진, 모국어를 가진 내게 이 절망은 도달불능이다. 민족주의를 '탈'하는 것은 이 절망, 이 끔찍한 꿈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은 또하나의 회색 이론이며, 또하나의 지배담론일 뿐이다.

서경식이 우리 사회의 민족주의 담론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대목에서 크게 공감했다. 과문한 탓인지, 그만큼 진지하게 민족주의에 대해 고민하는 저자를 최근에 본 기억이 없다. 탈민족주의가 유행할 수록 국수주의 이데올로기가 더욱 성행하는 세태를 보면, 이론의 공허함이 현실에 얼마나 무기력한지 실감하게 된다.

서경식의 '디아스포라'를 통해 몰랐던, 아니 모르고 싶었던 내 존재의 한 부분을 만났다. '타인'을 생산하고 '그들'을 배제함으로써 나를 살고 있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이 책을 읽고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도 읽었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인간, 광주 이후의 인간을 묻는 이 책들을 보며 어느새 그 질문조차 잊고도 편안한 내 삶의 끔찍함을 보았다. 이불을 덮고 서경식의 글을 읽으며 오랫만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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