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군데의 도서관을 다닌다. 시립도서관 둘, 구립도서관 하나. 집 바로 옆에 있는 구립도서관보다 마을버스를 20분쯤 타야 하는 시립도서관을 자주 가는 이유는 장서량에서 워낙 차이가 나기 때문. 아, 또 하나,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볼 수 있는 시립도서관과 달리 구립은 연필과 공책을 제외하곤 암것도 반입금지다. 그래서 쾌적하긴 한데 그래도 커피를 딱 갖다놔야 책읽기의 분위기가 잡히니... 음, 고쳐야 할 습관이나 쉽지 않다.

두 개의 시립도서관에서 부지런히 책을 빌리지만 신간을 보기는 쉽지 않다. 웬만한 신간은 대기자가 두셋씩 된다. 이름을 올리고 기다리다보면 무슨 책을 예약했는지도 감감할 때가 있다. 오늘은 가까운 구립에나 갈까 했더니 "띠링띠링" 문자가 왔다. 예약한 책이 들어왔다는 소식. [만들어진 신]이 한 달만에 내 손에 들어왔다.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책을 읽는다. 무신론자인 내게 도킨스의 주장은 새로울 건 없다. 다만, 그가 인용하는 광신자나 무신자의 이야기가 커피를 뿜을 만큼 웃음을 자아낸다. 우주를 떠도는 주전자를 믿는 사람들도 있단다. 하긴 허연 수염을 늘어뜨린 할아버지가 저 하늘에서 굽어보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그 신을 섬기지 않아서 복지가 문제라는 복지부 장관 지망생도 있으니까. 책을 읽다보니 신은 웃음을 위해 창조해낸 장치가 아닌가 싶다. 신이 없다면 이렇게 웃을 일도 없겠다. (물론 역사적으로야 신이 있어서 통곡한 일이 더 많겠지만) 책은 잘 읽혀서 두어 시간만에 백 쪽이 금세 넘었다. 근데 슬슬 짜증이 난다. 신이 있어서 신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신이 있다고 믿고 싶은 거고, 신이 없다고 증명한다고 그들이 신이 없다고 믿을까 회의가 든다. 뭣보다 도킨스가 '신'의 위치에 '과학'을 두고 싶은 건 아닐까 의심스럽다. 과학이든 신이든 절대를 자임하는 존재는 거추장스럽다.

책을 덮고 나서는데 일층 강당이 소란하다. 이제 막 시작한 개척교회보다도 작은 강당인데 서울시향에서 온 현악오중주팀이 찾아가는 음악회를 한단다. 마침 입구에 의자 하나가 비었다. 얼른 자리를 잡자마자 음악회가 시작된다. 바이올린 둘,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 다섯 명의 연주자가 '사계의 봄'생상의 백조' 같은 유명한 곡들을 연주한다. 강당은 아이들을 데려온 엄마부터 노부부, 머리를 식히러 온 수험생, 호기심 많은 꼬마들까지 빈틈없이 꽉 찼다. 끊임없이 들고나는 사람들로 출입문은 바쁘지만 아름다운 현악의 선율을 놓칠 정도는 아니다. 몸을 비비 꼬면서도 꼬마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한 곡 한 곡 끝날 때마다 박수소리가 커지더니 나중엔 "와" 하는 함성까지 터져나와서 연주자들을 기쁘게 한다. 앵콜까지 아홉 곡이 끝나고 연주자들도 객석도 모두 환하게 웃는 얼굴로 자리를 일어선다.

시끄럽고 부산한 동네 음악회가 심드렁했던 마음을 활짝 깨운다. 우리의 연주자들은 성실하고 청중은 그들의 성실에 밝은 웃음과 환호로 응답한다. 신이 없어도 세상은 아름답다. 음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비록 넉넉치 않은 살림에도 음악을 즐길 줄 아는 마음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 더 무엇이 필요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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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1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57세의 고전문헌학 교사 그레고리우스는 어느날 아침 한 포루투갈 여자와 마주치고 삶이 흔들린다. 그리고 우연히 손에 넣은 아마데우 드 프라두라는 포루투갈 의사의 책. 그레고리우스는 무작정 리스본으로 떠난다. 자신도 깨닫지 못했던 내부의 열망, 다른 삶에 대한 동경이 그를 길 위에 서게 한 것이다. 리스본에서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의 글과 행적을 따라가며, 살아남은 친구와 가족, 동지와 선생, 연인들의 회고를 통해 그를 형상화한다. 이 과정은 그레고리우스가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며, 또한 똑같이 불면증으로 고통받은 프라두에게 자신을 동일시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전처 플로렌스에 대한 뒤늦은 이해와 연민, 베른에서 유일하게 소통했던 독시아데스와의 거리두기는 지금까지의 삶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표현이다. 그러나 프라두의 삶을 내면화하면서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고자 하는 이 시도는 결코 평탄하지 않다. 원인모를 현기증에 시달리면서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의 마지막 여행 -피니스테레(세상 끝)으로의 여행을 따라가고 거기서 프라두에게 최후의 충격을 주었던 여인 에스테파니아를 만난다. 이 여행으로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와의 일체감과 함께 감당할 수 없는 균열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를 강타하는 현기증은 나를 잊을지 모른다는 불안, 나를 구성하던 기억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이며, 프라두를 죽음으로 몰고간 뇌질환의 내면화이자 동시에 프라두와의 동일시에 불안을 느끼는 심리를 드러낸다. 그가 '오디세이아'의 한 단어를 떠올리기 위해 안간힘 쓰는 건 고향으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려는 안간힘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단어를 기억해낸 그는 고향 베른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막상 이곳에서 그는 불편함과 이질감을 느끼고, 낯설기만 한 고향에 사진기를 들이댄다. 이방인의 눈으로 그 도시를 보고 해석하려는 시도이지만 현상된 사진은 "낯설기만" 하다.

그가 마침내 귀향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에게 의미가 있던 장소를 찾고 익숙한 공간에서 과거를 떠올리면서였따. "영화는 지루했지만 옛날과 같은 냄새가 나서 끝까지 앉아 있었다."는 구절은, 그가 지루한 일상에서 자신을 확인하고 그 삶을 인정했음을 뜻한다.

소설은 그레고리우스의 이야기와 나란히, 화려한 수사와 현학적인 경구들로 가득한 프라두의 문장들을 배치한다. 그러나 이 문장들을 통해 프라두의 실체나, 그를 생과 불화하게 만든 근원적 고민을 알 수는 없다. 이 점은 작가 메르시어의 실패로도, 혹은 완벽한 소설적 장치로도 읽힌다. 프라두에 대한 사람들의 회고와 묘사는 너무나 극적이어서 마치 신화를 읽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으며, 그의 밑모를 탐구는 기원과 지향 모두 애매하다. 프라두의 문장은 읽은 이를 매혹시키지만 그의 삶은 안개 속의 부표처럼 희미하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생생함과는 이상하리만큼 대조적으로. 

어쩌면 '포르투게스'라는 낯선 단어의 울림이 그레고리우스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을 때 그것은 의미가 아니라 무의미, 무의미에 대한 동경이었을지도 모른다. 의미의 과잉으로 보이는 프라두는 그를 매혹시키지만 사실상 프라두가 분명하게 전하는 의미는 없다. 오히려 프라두는 언어로 삶을 구성하려 한 지식인의 실패를 보여준다. 그래서 언뜻 프라두에 대한 메르시어의 헌신 혹은 집착은 삶을 언어로 구성하고픈 작가의 욕망으로도 읽힌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라면 이 욕망은 이루어지지 못한 듯하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라는 프라두의 경구는 긴 언어의 향연이 아니라도 알 수 있는 것이며, 결국 삶이란 그런 문장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은 한편으론 일상의 속도를 거스르는 아름다운 '완행열차'로, 다른 한편으로 쓸데없이 돌아가는 완행열차로 보인다. 그리고 어떻게도 볼 수 있다는 게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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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vs 폴 고갱 다빈치 art 8
브래들리 콜린스 지음, 이은희 옮김 / 다빈치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고흐와 고갱의 갈등, 애증, 대립에 관한 이야기는 이젠 거의 신화가 되버린 것 같다. 착한 고흐와 나쁜 고갱, 이타적 고흐와 이기적 고갱의 이미지는 그들의 그림이 주는 인상과 더해져 단단한 사실로 굳어졌다. 이 책은 그런 인상이 오해일지도 모른다고 얘기한다. 이런 얘기도 새로운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의 장점은 고흐에 대해서도 고갱에 대해서도 그들이 어떻다고 판단하기 전에 그들의 예술을 이룬 정신의 상흔들을 찬찬히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착한 고흐와 나쁜 고갱'이 사실이라 해도 그게 뭐 그리 대순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이들이 다면적인 인간임을 보여준다. 저자는 고흐에 대해 좀더 호감을 갖고 있고 책의 비중도 고흐 쪽에 좀더 가 있지만, 고흐 신화를 부추기지는 않는다. 고흐는 균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게 그의 그림을 낳은 원천이었지만 현실에서 그를 감당해야 할 사람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

그의 그림을 보고 두 번 울었다. 이 책을 읽으며 왜 나는 고흐의 그림에서 그처럼 강렬한 감동을 느꼈을까, 스스로를 분석하게 되었다. 헌신과 배신감을 오가는 고흐식 사랑, 자기애와 자기혐오를 오가는 자아상, 그 극단의 심리가 어쩌면 고흐만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고흐는 그 끝을 밀고 갔지만 우리는 매일 조금씩 그걸 느끼고 감추고 피하면서 살고 있는지도. 그래서 고흐에게서 깊은 동질감을 느끼고 그를 안타까워하며 사랑하는 것인지도.

이 책은 그림과 두 미술가에 대한 예술적 정신분석을 시도하는데, 그게 어떤 틀에 갇혀 있지 않아서 더 설득력이 있고 풍부하다. 다만 그림들 중 꽤 여러 점이 흑백으로 실려 있어서 색채에 대한 설명을 읽을 때 아쉬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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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두 번째 도전하여 마침내 읽다. 처음 이 소설은 나를 불편하게 하고 책장을 넘기는 손을 자꾸 머뭇거리게 했다. 한달쯤 지나 다시 펴들었다. 일종의 오기. 그렇게 대단하다고, 이 기분나쁜 소설이? 진짜인지 확인해보자고 매달렸는데 아마 100쪽이 가까워지면서 드디어 나보코프의 활자망에 포획되고 말았다. 그리곤 단숨에 읽었다. 이런 마력, 악마 같은, 무섭도록 매혹적인 소설. 그게 읽은 뒤의 소감이다.

[롤리타]를 사랑에 관한 소설로 해석하는 건 어떤 점에서 도덕적 상투성의 확장 같다. 뭣보다 이 소설은 예술에 관한, 모든 것을 넘어선 지독한 미적 지복을 향한 한 예술가의 편집증적 성취다. 사랑은 그 다음에 온다, 곁가지처럼.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 나보코프는 옛 시구를 인용하는데

"인간들에게 도덕적 감각이란/ 우리가 덧없는 미적 감각에 지불해야 하는 의무다"

라는 이 구절이야말로 [롤리타]를 쓰는 나보코프의 태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롤리타의 아름다움, 미적 감각의 덧없음을 알지만 그를 위해 종교적 구원을 포기하며 도덕적 의무를 질 각오가 되어 있다. 이 찰나의 아름다움이야말로 그에겐 지고의 것이다.

미치광이 험버트는 왜 롤리타에 집착하는가? 어린시절의 연인, 놓쳐버린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바탕에 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끔찍스런 청소년의 은어 뒤, 깊은 마음 속에는 정원이 있고 황혼이 있고 궁전의 문이 있다...내 비참한 몸부림과 누더기같이 더럽혀진 몸은 결코 들어갈 수 없이 금지된 곳, 희미하고 사랑스러운 곳"을 향한 욕망이 있다. 그 비밀의 정원은 닫혀 있기에 더욱 강한 욕망을 부른다.

험버트는 소설의 3분의 2이상을 자신의 시각으로 롤리타와의 관계를 서술한다. 거기서 롤리타는 유혹하는 님펫, 어린 요부, 타락하고 까다롭고 애 먹이는 소녀-딸이다. 하지만 사라진 롤리타를 다시 만나고서 험버트는 다른 시각으로 둘의 역사를 회상한다. 32장은 육욕의 희생양이 된 롤리타, 절망한 고아, 청춘을 빼앗긴 가련한 소녀를 그린다. 그리고 험버트는 가엾은 롤리타를 착취한 퀼티를 죽이기 위해 떠난다. 퀼티는 누가 보아도 험버트다. 험버트와 퀼티는 같은 '문학인'이며, 험버트는 스스로 "나는 전신이 퀼티로 뒤덮여 있다"고 고백하며, 퀼티의 침실에서 전 부인 '샬로트'를 본다. 험버트와 퀼티가 롤리타를 두고 벌이는 싸움은 사실상 '미적 감각'의 소유권을 둘러싼 싸움이기도 하다. 어떤 점에서 험버트가 퀼티를 살해하는 것은 롤리타에 대한 죄의식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패배시킨 퀼티에 대한 분노와 패배의식 때문이다. 그는 죄의식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용서를 빌지 않는다. 그 용서가 자신이 감각한 지복의 순간을 부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순간의 육체성을 부인하는 대신 그는 살인자가 되어 영원히 저주받고 지옥을 떠돌기를 원한다.

나보코프의 무서운 욕망은 그에 걸맞은 참으로 무서운 소설을 낳았다. 이 소설은 너무나 유혹적이며 너무나 비극적이며 모든 소설가가 한번쯤은 꿈꾸었을 법한 순간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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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독일영화가 나를 여러 번 울린다. 새해 시작과 함께 본 '타인의 삶'이 가슴을 치더니 이번엔 '행복한 엠마 행복한 돼지 그리고 남자'가 눈을 띵띵 붓게 한다. 제목으론 그냥 돼지 치는 엠마와 남자의 전원일기 같은 것인가 했는데, 이 영화, 정말 드물게 가슴 뻐근한 러브스토리다. 끔찍한 장면은 아주 사소한 것도 싫어하는 나지만 이 영화에서의 느닷없는 도살장면은 이해가 되었다. 꼭 필요한 장면이니까.

그런데 그 장면이 도화선이 되어 문득 [화성의 인류학자]가 떠올랐다. 올리버 색스의 그 책에 나오는 '화성의 인류학자' 템플. 자폐증을 앓으면서도 교수로 성공한 템플은 도살용 압박기계를 만들어 보급했는데, 그녀의 기계가 지향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 없는 도살이다.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라는 엠마의 말이 떠오른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가끔씩 템플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커다란 체구의 남자를 거뜬히 들어옮기는 엠마의 건강함도 단단하고 건장한 느낌의 템플-본 적은 없지만 색스의 글에선 그런 느낌이다-을 떠올리게 했다. 홀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농장에서의 삶을 살아가지만 엠마가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늘에 뚝 떨어진 남자에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이끌리는 것도 그런 외로움 때문일텐데, 나는 툭하면 총을 겨누는 엠마와 따뜻하게 돼지를 위무하는 엠마를 보며 포옹기계에서 위로를 얻는 템플을 생각했다. 물론 '행복한 엠마 행복한 돼지..'는 '화성의 인류학자'와는 아무 연관도 없는 별개의 작품이다. 원작은 따로 있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두 여자, 가장 고독하기에 가장 따뜻하게 사랑할 줄 아는 그 아름다운 여자들이 자꾸만 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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