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두 번째 도전하여 마침내 읽다. 처음 이 소설은 나를 불편하게 하고 책장을 넘기는 손을 자꾸 머뭇거리게 했다. 한달쯤 지나 다시 펴들었다. 일종의 오기. 그렇게 대단하다고, 이 기분나쁜 소설이? 진짜인지 확인해보자고 매달렸는데 아마 100쪽이 가까워지면서 드디어 나보코프의 활자망에 포획되고 말았다. 그리곤 단숨에 읽었다. 이런 마력, 악마 같은, 무섭도록 매혹적인 소설. 그게 읽은 뒤의 소감이다.

[롤리타]를 사랑에 관한 소설로 해석하는 건 어떤 점에서 도덕적 상투성의 확장 같다. 뭣보다 이 소설은 예술에 관한, 모든 것을 넘어선 지독한 미적 지복을 향한 한 예술가의 편집증적 성취다. 사랑은 그 다음에 온다, 곁가지처럼.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 나보코프는 옛 시구를 인용하는데

"인간들에게 도덕적 감각이란/ 우리가 덧없는 미적 감각에 지불해야 하는 의무다"

라는 이 구절이야말로 [롤리타]를 쓰는 나보코프의 태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롤리타의 아름다움, 미적 감각의 덧없음을 알지만 그를 위해 종교적 구원을 포기하며 도덕적 의무를 질 각오가 되어 있다. 이 찰나의 아름다움이야말로 그에겐 지고의 것이다.

미치광이 험버트는 왜 롤리타에 집착하는가? 어린시절의 연인, 놓쳐버린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바탕에 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끔찍스런 청소년의 은어 뒤, 깊은 마음 속에는 정원이 있고 황혼이 있고 궁전의 문이 있다...내 비참한 몸부림과 누더기같이 더럽혀진 몸은 결코 들어갈 수 없이 금지된 곳, 희미하고 사랑스러운 곳"을 향한 욕망이 있다. 그 비밀의 정원은 닫혀 있기에 더욱 강한 욕망을 부른다.

험버트는 소설의 3분의 2이상을 자신의 시각으로 롤리타와의 관계를 서술한다. 거기서 롤리타는 유혹하는 님펫, 어린 요부, 타락하고 까다롭고 애 먹이는 소녀-딸이다. 하지만 사라진 롤리타를 다시 만나고서 험버트는 다른 시각으로 둘의 역사를 회상한다. 32장은 육욕의 희생양이 된 롤리타, 절망한 고아, 청춘을 빼앗긴 가련한 소녀를 그린다. 그리고 험버트는 가엾은 롤리타를 착취한 퀼티를 죽이기 위해 떠난다. 퀼티는 누가 보아도 험버트다. 험버트와 퀼티는 같은 '문학인'이며, 험버트는 스스로 "나는 전신이 퀼티로 뒤덮여 있다"고 고백하며, 퀼티의 침실에서 전 부인 '샬로트'를 본다. 험버트와 퀼티가 롤리타를 두고 벌이는 싸움은 사실상 '미적 감각'의 소유권을 둘러싼 싸움이기도 하다. 어떤 점에서 험버트가 퀼티를 살해하는 것은 롤리타에 대한 죄의식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패배시킨 퀼티에 대한 분노와 패배의식 때문이다. 그는 죄의식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용서를 빌지 않는다. 그 용서가 자신이 감각한 지복의 순간을 부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순간의 육체성을 부인하는 대신 그는 살인자가 되어 영원히 저주받고 지옥을 떠돌기를 원한다.

나보코프의 무서운 욕망은 그에 걸맞은 참으로 무서운 소설을 낳았다. 이 소설은 너무나 유혹적이며 너무나 비극적이며 모든 소설가가 한번쯤은 꿈꾸었을 법한 순간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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