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후의 기이한 유럽 편력 - 조너선 스펜스, 1723년 파리의 정신병원에서 후를 접견하다 서해역사책방 22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김복미 옮김 / 서해문집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조너선 스펜스의 필력이야 익히 아는 바지만, 이 책은 특히 새롭고 독특하다. 원제가 Question of Hu인데 책을 읽고나면 이게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중국인 후를 둘러싼 문제가 하나둘이 아닌 듯싶어서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 후라는 인물도 그렇고, 그를 둘러싼 서구인들도 그렇고, 그들이 만나면서 만드는 문제들도 그렇다. 모든 게 문제적이다.

이야기는 짧고 단순하다. 결말은 좀 맥빠진다 싶게 총총하다. 그런데 이 짧은 역사가 주는 울림이 만만치 않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음에도 중국인 후에게 가톨릭 국가 프랑스는 이해불능의 대상이다.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벌였음에도 유럽인 푸케 신부는 중국인 신도 후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할 수 없는 대상들이 부딪쳤을 때 해법은 권력의 소재에 의해 결정된다. 이 경우 권력을 가진 건 푸케였고, 그에게 이해불능의 대상은 정상이 아닌 미친자다. 정신병이란 사실, 정상인이란 권력이 자신들의 이해가 닿지 못하는 대상을 규정하는 한 이름이 아니던가. 솔직히 후의 행동은 지금 내가 봐도 이해불능인 대목이 있고 정신병원에 갈 만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만큼 그간의 역사는 중국인 후와 조선인 나 사이의 거리를 벌려놓았던 것이다. 유럽인 푸케와 조선인 나 사이의 거리보다도 더.

어쩌면 아주 사소해 보이는 사건에서 역사학의 문제를 끌어내고, 그걸 별다른 수식도 강변도 없이 풀어내는 조너선 스펜스의 내공이 돋보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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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은 소모되기 쉬우며 세월은 빨리 지나가버린다. 세상에서 가장 애석한 일은 아마도 이 두 가지일 것이다.

진정 너그러운 사람은 참으로 드물다. 더러 관대하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대개 옳고 그름에 대해 분명하지 못해서 그릇된 것을 바로잡지 못하니, 그것이 어찌 너그러움이 되겠는가.

태어나서 땅에 떨어진 것은 크게 깨달은 것이고 죽어서 땅에 들어가는 것은 크게 잊는 것이다. 깨우친 뒤는 한계가 있고 잊은 이후는 무궁한 것이다. 태어나서 죽기까지는 마치 주막과 같아 한 기운이 머물러 자고가는 시간이다. 저 벽의 등잔이 올올히 밝다가 새벽에 불똥이 떨어지면 불꽃이 걷히고 타던 기름도 어느새 조용해진다. 올올히 밝은 것이 다함이 있는 것인가. 조용하고 쓸쓸한 것이 한계가 있는 것인가.

  --이덕무, <키 큰 소나무에게 길을 묻다>에서

마음이 어지러운 며칠, 이덕무를 읽는다. 어찌 책 속에 깨우침이 있으랴. 다만 책을 읽으며 언젠가의 깨우침을 그릴 뿐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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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 시즌 1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1
EBS 지식채널ⓔ 엮음 / 북하우스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텔레비전에서 몇 번 이 책의 모태가 된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책으로 나올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왔다. 워낙 짧은 내용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살까 말까 망설이다 샀다. 첫 장 운디드니의 '성난말'이야기를 읽을 때부터 가슴이 먹먹했다. 운디드니 이야기는 새로울 게 없었지만, 생을 걸고 '성난말'의 바위 얼굴을 조각한 지올코브스키의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책은 이런 식으로 무식한 내게 새로운 지식을 알려준다. 그 지식을 알아서 내 삶이 행복해졌을까? 아니, 불편하고 슬퍼졌다. 부끄럽고 답답했다. 그래서 좀 착해지고, 마음을 열게 되었다. 그게 이 책의 힘이다. 좋은 책이다, 한 점의 의혹도 없이.

다만, 편집디자인에는 불만이 좀 있다. 책의 모양내기에 신경을 쓰다보니 글자는 턱없이 작아졌고, 나처럼 노안을 걱정하는 세대에게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준다. 꽤 부피가 있는데 책이 좁다보니 자꾸만 책장이 덮이는 것도 불편하다. 이 책이 담은 정신을 디자인이 무시하는 듯해서 기분이 좀 상한다. 보기 좋은 것보다 읽기 편한 책을 만드는 게 언제부터 촌스런 일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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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의 글쓰는 두 가지 후원을 모색했습니다. 자본과 권력입니다. 우파 지향의 문인이 자본을 지향했다면, 좌파 지향의 문인은 권력을 지향합니다. 체제와 권력에 의지하려는 좌파 문단의 지향은 월북이란 형태로 구체화되지만, 해방 직후의 친일파 비판에서 그 단초를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광수가 해방 이후에 글을 쓰면서 독서 대중, 나아가 그들의 구매를 통한 '자본'에 의지하고자 한 현상입니다. (일제)강점 말기의 '권력'이라는 후원자가, 자본주의 출판제도 아래에서 '독서대중'이란 후원자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강점 말기에 이광수의 '글'은 대중과 권력이란 두 지향이 있었고, 점차 전자에서 후자로 옮겨갔습니다.   

-이중연, <책, 사슬에서 풀리다> 318쪽, 322쪽에서

대중이란 이름으로 인정되고 추구되는 자본의 후원. 얼굴을 드러낸 권력의 지배보다 무서운 건 가면을 쓴 자본의 지배. <시사저널>의 편집권 투쟁과 그를 지켜보는 지식인들의 침묵은 자본 지향이 마침내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이광수의 아이들이 뛰어노는 세상, 그 세상을 기웃거리는 나. 참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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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정말 많은 사람에게 회자된 책을 이제야 읽다. 용서할 수 없는 게으름! 책은 재미있게 잘 읽힌다. 그런데 왜 들뢰즈, 가타리의 개념을 중간중간 사용하는지는 좀 의문이다. 반드시 그 개념을 사용해야 할 내적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박지원에게서 발견되는 대목이 서구사상이나 누구누구에게서 이런 식으로도 발견되더라, 라는 정도의 인용이라면 모를까.

이 책도 그렇지만 요즘 대폭 늘어난 영, 정조 시대에 관한 책들, 특히 백탑파 인물들을 다룬 책들을 보다보면 몇 가지 지울 수 없는 의문들이 있다. 당시 사회에서 노론이 가진 위치를 생각할 때 박지원이 갖는 지점은 어딜까, 그의 진보성을 어느만큼 인정해야 할까, 박지원의 정치적 지향이 과연 그의 문체만큼 전복적이었을까, 왜 정조는 백탑파를 중용하면서도 문체반정을 한 것일까, 그것의 성공실패를 떠나 서학보다 문체를 문제시했던 정조의 사상적 지향은 뭘까, 아니 그의 정치적 구상은 무엇이었을까... 권력은 문체에서 작동하듯 정치의 현장에서도 관철되기에, 요즘의 책들을 보며 박지원의 정치를 그의 문체로 대치하려는 것은 아닌지, 아니 문체가 문화가 정치의 전부인 양 순진하게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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