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도서관이 내 생에 처음 들어온 것은 이십여 년 전쯤. 이사한 집 근처에 시립도서관이 있었던 우연 덕분이엇다. 산 비탈에 위치한 도서관은 지은 지 오래된 듯, 전체적으로 낡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청소상태는 깨끗해서, 아침 일찍 도서관으로 올라가 금방 청소를 끝낸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열람실에 앉으면 기분이 환해지곤 했다. 후미진 위치 탓인지 도서관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한 1,2년 다니다 보니 웬만한 출입자들은 다 눈에 익게 되었다. 그런데 도서관에 매일 출근하는 이들을 죽 관찰하다 보니 한 가지 공통점이 눈에 띄었다. 통상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정상에서 슬쩍 벗어난 사람이 많다는 사실. 가령 이런 식이다.

어느 날, 자료열람실에서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를 펴놓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뿡!" 하는 소리가 열람실을 울렸다. 깜짝 놀라 머리를 쳐들었지만 그저 조용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다시 책에 코를 박는 순간, 다시 한번 "뿡" 연이어 다시 "뿡뿡!" 하, 이거야 원. 조용한 열람실에 뻔뻔하게 울리는 방귀소리에 기가 막혀 사방을 주욱 둘러보았다. 나처럼 어이없는 눈길로 주위를 살피는 사람들과 시선이 오가던 가운데, 모두의 시선이 한 군데로 모아졌다. 50대 혹은 60대의 남자가 책에 눈길을 고정시킨 채 주위의 부산함과 상관없이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어찌나 태연한지 방금 전의 "뿡" 소리가 나의 이명은 아니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뿡의 연원은 알았으나 그 뿡에게 다가가 "뿡 소리가 시끄러우니 방귀가 나올 것 같으면 밖으로 나가서 뀌어주시지요"라고 말할 만한 배짱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뿡의 연배가 열람실에 있었던 이들 중 가장 높은 편이었던 것도 이런 사태에 일조를 했다. 사서들 역시 난감한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 다음날도 어김없이 열람실에는 "뿡"이 울려퍼졌고, 그건 내가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를 끝내고 자료열람실에서 퇴각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중엔 그 뿡이 냄새 없는 뿡임에 감사할 지경이었으니, 사람은 역시 환경의 동물인가.

그런데 십 년 넘게 도서관을 다니며 '애서가상'까지 받은 내 경험에서, 이 뿡 사건은 그저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도서관이란 단지 책을 읽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읽는 곳이기도 함을 나는 그후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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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npix 2007-07-09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다음 글이 기대되는군요. 아직 도서관에 오래 다니지 않아서 저런 풍경은 잘 못본 듯.^^

스머프 2007-07-09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ㅎㅎ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슴다! 기다려주세요~
 

동네에 비디오 대여점이 다 없어졌다. 그 바람에 아쉽게 놓친 영화나 숨어 있는 보석 같은 영화를 만나는 즐거움도 사라졌다. 해서, 길 가다 폐업정리를 내건 비디오 대여점을 만나면 가물가물한 노안을 부릅뜨고 진열대를 살핀다. 그렇게 만난 영화가 [문라이트 발렌티노]다. 영화의 낮은 지명도에 비해 나오는 배우들의 지명도는 사뭇 높다. 엘리자베스 퍼킨스, 기네스 펠트로, 우피 골드버그, 알베르타 터너. 이 여자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본전 생각은 안 난다. 여기에 조지아 오키프를 알게 되는 건 보너스.

조지아 오키프는 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한 꽃 그림을 그린 화가다. 그녀의 꽃 그림을 보고도 이내 꽃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사람, 빨간 잡지를 꽤 애독했음에 분명하다. 그녀는 37세 때 60세인 사진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결혼하는데, 둘은 인생의 동반자이자 예술적 동지가 무엇인지를 삶으로 보여준 환상의 커플이다. 오키프는 건강하게 백 년을 살았고, 죽기 전까지도 세계를 여행하고 사진작가들의 작업에 참여하며 밀도 높은 생을 살았다. 멕시코 사막에서의 그녀의 구도자적인 삶의 모습은 그 자체로 예술이 되었고 영감을 주었다. 기념 미술관을 가진 미국의 유일한 여성 화가이기도 한 조지아 오키프. 영화 속 미국 여자들에게도, 한 눈 팔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간 오키프는 달처럼 선망의 대상이다. 그러니, 문 닫은 비디오 가게에서 중고 비디오테이프를 뒤지는 한국의 아줌마야 더 말해 무엇하랴. 누구보다 정직하게 자신의 욕망과 승부했던 조지아 오키프, 그리하여 그 욕망을 훌쩍 넘는 자유를 구현했던 그녀의 그림도 삶도, 그래, 꿈결 같은 달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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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넌 누구니? - 어린이와 함께 문화 읽기 진경문고 4
최기숙 지음 / 보림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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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을 처음 읽었을 때, 충격을 받았다. 아, 이런 식의 역사서술이 가능하구나, 어린이라는 존재가 역사적 구성물이구나! 덕분에 촘촘한 자료와 해석을 지루한 줄 모르고 읽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한국사에서 어린이는 어떤 존재일까, 어린이를 프리즘으로 한국사를 본다면 어떤 모양이 나타날까? 최기숙의 [어린이, 넌 누구니?]를 처음 접했을 때 그런 궁금증이 해갈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결과는 절반의 성공. 어린이에 초점을 맞춘 참신한 시도는, 서술의 과정에서 종종 주제의식을 잃고 좌충우돌한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싶은 욕심이 더 좋은 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막았달까. 주제와 서술 모두에서 집중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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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2 - 스페인 산티아고 편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2
김남희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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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글을 오마이뉴스에서 종종 접했지만 책으로 읽기는 이게 처음. 청소하면서 걸리적거리기에 슬쩍 펼쳤다가 내처 끝까지 읽고 말았다. 사진이 많지만 사실 사진이 크게 기억에 남진 않는다. 글이 자기만의 힘과 색깔을 갖고 독자를 잡아끌기 때문이다. 산티아고로 가는 긴 여정을 저자와 함께하다가 마침내 도착했을 때는 나도 눈물을 글썽였다. 내 생에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걷게 될까? 아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늘 그렇듯 동네 골목을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집 옆 공원을 산책하며 만족하리라. 그러다 가끔 산티아고로 가는 붉은 흙길을 그리워하겠지. 김남희보다 더 겁 많고 까탈스러운 내겐 대리만족을 주는 아름다운 책이다. 숱한 여행서가 있지만 깊이와 울림이 있는 드물게 정직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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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죽고 싶고 죽이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안으로 향하든 밖으로 향하든 살의가 팽팽히 솟아오를 때인데, 보통은 아주 가까운 사람과 부딪혔을 때 그렇다. 가족들이 힘이 되는 때가 없는 건 아니지만, 사실 가족들이 짐이 되거나 독이 될 때가 적은 것도 아니다. 특히 부부 싸움은 자신의 끝을 보게 한다. 자기도 몰랐던 자기의 밑바닥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이럴 땐 조용히 물러나 책을 펼치거나 음악을 듣는 게 낫다. 두 사람이 날밤을 새며 서로의 치부를 드러낸다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은 없다. 정확히 무엇이 화가 나게 했는지를 말한 뒤에는 '긴 수식어'를 생략하고 조용히 침잠하여 자신을 돌아보는 게 자신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안팎으로 뻗는 살의를 가라앉히는 데도 좋다.

이럴 때 권하고픈 책은 무조건 어려운 철학책. 지극한 어려움을 대하면 스스로의 무지와 한계가 선명해져서 마음이 곧 순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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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모차르트 : '마술피리' 전곡
Anton Dermota 외 노래, 모차르트 (Mozart) 작곡, 토머스 비첨 (Sir / Golden Melodram / 2006년 9월
33,600원 → 29,300원(13%할인) / 마일리지 290원(1% 적립)
2007년 07월 05일에 저장
품절
모차르트는 늘 위로가 되지만 마술피리는 더욱 그렇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언제 어디에서 들어도 기쁨이고 위로인 음악!
존재와 시간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이기상 옮김 / 까치 / 1998년 2월
30,000원 → 27,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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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가장 효과를 본 책. 계속 같은 줄을 읽다 보면 어느새 분노가 가라앉는다.
거대한 고독- 토리노 하늘 아래의 두 고아, 니체와 파베세
프레데릭 파작 지음, 이재룡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11월
12,800원 → 11,520원(10%할인) / 마일리지 640원(5% 적립)
2007년 07월 05일에 저장
품절
칙칙한 그림과 함께, 외롭게 죽은 두 천재의 난해한 글들을 읽노라면 살 만해진다.
Hedwig And The Angry Inch (헤드윅 앤 더 앵그리 인치) - O.S.T.- 영화 헤드윅
존 카메론 미첼 (John Cameron Mitchell) 노래 / Music Zoo(뮤직 주) / 2006년 12월
18,500원 → 14,900원(19%할인) / 마일리지 150원(1% 적립)
2007년 07월 05일에 저장
품절
앵그리 인치로 시작해 오리진 오브 러브로 끝낸다. 미첼을 따라서 미친 듯이 춤추고 흐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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