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여러 날째 보이질 않는다. 아프신 걸까, 드디어 오늘은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가벼운 목례 한 번 나눈 적 없는 할아버지지만, 도서관 장기출근자로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잘 아는 사이다. 거의 십년째 도서관에서 안면을 익혀왔는데 요 며칠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처음엔 좀 홀가분했는데, 이제는 슬슬 걱정이 된다.

할아버지의 출근지는 정기간행물실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정기간행물실을 찾는 나는, 처음엔 할아버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간행물실을 찾는 열람자들은 도서관의 다른 곳보다 전체적으로 연령대가 높은 탓이다. 주로 4,50대 중년남자들이 책상 가득 신문을 펼쳐놓고 코를 후비며 중요하지도 않은 기사를 달달 욀 정도로 열심히 보는 풍경을 떠올리면 된다. 그래서 간혹 꼭 봐야 할 기사라도 있을라치면 허벅지를 꼬집으며 인내심을 길러야 한다. '휴지통'이나 '부고란'에서도 이들의 시선은 10분씩 머물기 일쑤다. 개중엔 두 개의 신문을 동시에 펼쳐놓고 타의 접근을 불허하는 신문광도 있다. 아무튼, 워낙 눈길을 끄는 이들이 많은 탓에 할아버지가 있는 걸 깨닫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런데 어느날, 그날도 역시 하품을 참으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맨 앞쪽 책상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할아버지가 눈에 띄었다. 대학노트와 두꺼운 성경책을 펼쳐놓고 할아버지는 볼펜을 든 채 그대로 졸고 있었다. 그러다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갑자기 번쩍 깨어 두 손을 쭉 뻗고 기지개를 켜더니 다시 공책에 글씨를 써내려갔다. 성경구절을 베끼는 것 같았는데, 죽 베끼는 게 아니라 한 구절을 여러 번 쓰는 듯했다. 큼직큼직한 글씨가 노트에 빽빽했다. 하지만 워낙 쓰는 속도가 느려서 한 쪽을 다 채우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아니, 글씨 쓰는 속도가 느린 탓보다 졸음에 자주 붙들리는 게 문제인 듯했다. 한 두어 줄 계속 쓰는가 싶으면 어느새 또 꾸벅꾸벅. 기면증이든가, 어쩌면 그런 병 때문인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참, 대책없는 할아버지로군 하고.

그러고보니 할아버지는 도서관의 진정한 장기출근자였다. 도대체 몇 시에 출근을 하는지, 내가 좀 부지런을 떤 날도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와 있었다. 그리고 예의 정기간행물실에 앉아 성경 옮겨적기를 저녁 6시 무렵까지 계속했다. 그렇게 매일 오가면서도 아무와도 인사를 나누거나 아는 척을 하는 법은 없었다. 그래도 사서들은 장기출근자로서 할아버지를 대우하는 것 같았다. 원래 간행물실에는 다른 책을 갖고 들어갈 수 없는데도 성경책 반입을 허용하는 것이 그 하나였다. 할아버지의 일과는 빈틈이 없었다. 아침 일찍 도서관에 나와 성경책을 베끼고 점심 때면 지하 식당에서 도시락을 먹거나 라면을 사 먹고 다시 지정석으로 올라가 졸며 쓰며 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내려가니 할아버지가 있었다. 식사를 막 끝낸 할아버지는, 빈 도시락그릇을 벌여둔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주문한 우동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우렁찬 목소리로 할아버지가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행진곡풍의 찬송가였다. 식당 안의 모든 사람이 할아버지를 쳐다보았지만 할아버지는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씩씩하게 끝까지 노래를 불렀다. 꽤 긴 노래였다. 이윽고 노래가 끝났다. 할아버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도시락그릇을 챙겨 자리를 떴다. 그일이 있은 지 몇 년이 지났지만 다시 그런 일을 본 적은 없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누구와 인사 한 번 나눈 적 없는 조용한 할아버지가 왜 갑자기 지하식당에서 노래를 불렀던 걸까? 혹시 그 어름에 사랑하던 사람을 잃었던 걸까? 그이를 위해서 눈물 대신 노래를 바쳤던 것은 아닐까... 속절없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보곤 했다.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그 상상이 맞는지 묻고 싶어하면서. 벌써 여러 날째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으니 문득 그날이 떠오른다. 이러다 할아버지마저 그저 내 상상이 돼버리는 건 아닌지, 모든 게 다 속절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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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74
클로드 티에보 지음 / 시공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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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문만 무성한 작가들이 있다. 실체는 정작 본 적도 없이 그저 바람이 전하는 그의 그림자와 자취만을 좇게 되는 작가들이 있다. 카프카는 아마도 그런 대표적인 작가일 것이다. 그의 장편을 사놓고 오래도록 먼지만 부르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이 작은 책을 봤다. 젊은 나를 매혹시켰던 카프카의 얼굴이 책장에 가득한 작은 책이다. 사진이 많은 책이니 내용이야 별 것 있으랴 싶었지만 아니다. 카프카의 여러 작품들을 짧은 평전 속에 솜씨좋게 배치한 소책자는, 그의 작품세계로 안내하는 편안한 안내자다. 얇은 부피가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고, 그 부피를 뛰어넘는 객관적인 시선이 소문에 가리워진 카프카를 차분히 보여준다. 이 책을 읽고 책장에서 홀로 늙어가던 [심판]을 읽기로 하였다. 이번엔 끝까지 읽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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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npix 2007-07-13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카프카 이름만 듣다가 처믕 읽어봤는데, 잘 안 읽히네요. 문체 때문인지. 'ㅁ' 아무튼 계속 도전하려고 노력 중에 있습니다. 다 읽고 나서 이 책도 꼭 읽고 싶네요.^^

스머프 2007-07-14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다가 포기했던 [소송]을 오늘 시작했습니다. 카프카에 대한 모든 소문을 다 잊고 마음 비우고 읽기로 했어요. ㅎㅎ 이번엔 부디 성공했으면 좋겠어요.
 

요정은 만인을 위해 존재하며 누구나 스스로 바라는 소원을 그에게 털어놓을 수 있다. 다만 몇몇 사람만이 그들이 바랐던 소원을 기억해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만이 자신의 소원이 나중에 자신의 삶 속에서 성취되었음을 깨달을 뿐이다.

- 발터 벤야민,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한 도시에서 길을 헤매는 일은 많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가지에서 길을 잃으면 사람들은 -마치 숲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할 때처럼- 훈련을 필요로 한다. 이때 거리의 이름들은 마치 메마른 어린 나뭇가지처럼 방황하는 자에게 말을 건네며, 마치 움푹 패인 평지처럼 아주 분명하게 하루의 시각들을 비춰준다."로 시작하는 벤야민의 글을 읽다가 몇 번이고 눈을 들어 창밖을 본다.

동화에는 세 가지 소원을 말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면 모두들 기대에 부풀어 무얼 말할까 고민한다. 하지만 정작 소원을 말할 때에 이르면 기대와는 무관한 너무나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을 말하게 된다. 그렇다. 지금의 일상은 언젠가의 내 소원일 것이다. 다만 그 소원을 빌었던 내 자신을 잃었던, 잊었던 것뿐. 그리고 소원을 빌 때의 내겐 이 일상의 남루함이 보이지 않았을 터, 그러니 스스로 성취한 소원에 아연해져서 우는 소리를 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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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전만 해도 도서관의 주 이용층은 십대와 이십대였다. 그랬는데 최근에는 이용층의 연령대가 대폭 상향조정되었다. 연령층이 높아진 첫째 이유는 아이엠에프 사태다. 아이엠에프로 인해 어느날 갑자기 직장에서 밀려난 중년 남성들에게 시립도서관은 싸고 건전하며 나름대로 면목이 서는 쉼터가 되었던 것이다. 둘째 이유는 자격증 열풍이다. 공인중개사, 공무원시험을 비롯해 각종 자격증을 준비하는 늦깍이 수험생이 늘면서 열람실은 중고등학생보다 20대 후반 이후의 세대가 더 많아졌다. 뭐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 분석이니 사실 여부를 지나치게 따질 필요는 없겠다.

어쨌거나 처음엔 도서관을 오가는 장년층들을 발견하면 은근한 동료애가 동하며 반갑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 동료들이 왜 이리 불편해지는지... 얼마 전부터 열람실에서 자주 마주치는 50대 아주머니. 오전 10시경에 출근하여 쉼없이 공부하는 아주 성실한 분이다. 그런데 점심을 먹고난 1시 반에서 2시 사이가 이분에겐 마의 취침시간이다. 식곤증이야 인간의 본능 중 하나니 탓할 것이 없다. 문제는 코골이. 책상에 엎드려 자는 잠깐의 낮잠치고 이분의 코골이는 꽤 걸다. 지난번 40대 남자의 무호흡증을 동반한 코골이에 놀라 남녀 공용 열람실엔 발을 끊은 지 오래이나, 이번엔 여자 열람실이니 피할 데도 없다. 아주머니의 코고는 소리가 높아갈수록 열람실은 점점 더 조용히 가라앉는다. 앞자리 옆자리를 둘러보니 모두들 얼굴이 굳어 있다. 하지만 아무도 나서지 못한다. 결국, 나이깨나 먹은 이 아주머니가 나서기로 한다. 몸을 벌떡 일으켜 코골이 아주머니에게 다가가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꽂힌다. 제발 착한 분이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 혼곤한 잠에서 나올락말락 희미한 눈으로 영문을 묻는 아주머니에게, "저, 코고는 소리가 좀 커서요..." 순간 아주머니의 눈이 화들짝 커지며 얼굴이 새빨개진다. "아이고, 죄송해요."         
자리로 돌아와 앉는데 주위의 시선이 곱지가 않다. 나 또한 몹쓸 짓을 한 듯, 석연치가 않다. 모처럼 숙면을 취하는 아주머니를 기어코 깨웠어야 할까, 도서관에 코고는 소리쯤 울린다고 하루종일 그런 것도 아닌데 그리 까칠하게 굴었어야 했나, 결국 내 스스로 더 견디지를 못하고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오면서 생각해 보니 내 경우에도 도서관만큼 잠이 솔솔 잘 오는 장소가 드물었다. 불면증으로 며칠 잠을 설쳤을 때도 지루한 책을 들고 도서관에 앉아 있으면 금방 치유가 된 경험, 나만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러니 내일부턴 도서관을 책만 보는 곳이 아니라 책도 보고 잠도 자는 곳으로 넉넉히 생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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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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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니던 직장 건물은 요즘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건축가의 작품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사진을 찍으러 오는 건축학도들도 많고, 지나다가 '멋있다'며 구경하러 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데 이 멋있는 작품에 사는 사람은 죽을 맛이었다. 사방 막힌 데 없는 공간 배치 탓에 회사 어디에도 비밀이 없었다. 좋을 것 같다고? 글쎄... 거기에 사방이 온통 유리다 보니 조금만 해가 들어도 뜨겁고 눈이 부셔서 죽을 맛이었다. 더구나 겨울에 천장이 높고 툭 트인 공간을 덥히려면 하염없이 연료가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도 건축잡지에 소개된 이 집의 콘셉트는 환경친화! 그리하여 나는, 건축은 사기다, 라는 극단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알랭 드 보통의 [행복의 건축]을 읽으니, 그 유명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지은 집에 입주한 집주인, 끊임없이 물이 새는 천장 덕에 아이는 폐렴으로 요양소 신세를 지고 온 가족이 류머티즘으로 고생했단다. 더구나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철학 때문에 이 뻔한 문제점조차 개선하지 못했다니! 

보통은 건축이 미학과 과학 사이에서 시소를 타던 이야기를 소개하며 건축가들이 밟아온 허방을 슬쩍 보여준다. 물론 그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게 아니다. 내가 듣고 싶은 얘기였을 따름이지. 집은 짓는 사람의 꿈과 철학의 반영체이며 동시에 그 집에 사는 삶의 구현체이기도 함을, 보통은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문장 속에 담아 보여준다. 요즘처럼 집이 삶이 아니라 돈이 되어버린 세태에 [행복의 건축]이란 제목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한다. 집을 샀다 하면 얼마에 샀냐로 시작해서 오를 것 같으냐로 이어지는 게 대화의 순서가 된 마당에, 과연 건축은 행복을 지을 수 있을까? 값이 전혀 오르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으려면 내 마음을 먼저 건축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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