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공지신 미실
이종욱 지음 / 푸른역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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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본 적이 없지만 '미실'이 하도 유행이라 그 이름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누군지는 알아야겠다 싶어 책을 찾았다. 이종욱은 '화랑세기'의 사료적 가치를 시종 옹호한 학자라 관심이 가던 터라 이 책을 들었다. 그런데 책을 읽을수록 미실과 신라에 대해 궁금증이 커진다. 책에선 미실이 '색공'을 통해 여러 대에 걸쳐 왕들의 총애를 받고 권력을 유지했음을 밝힌다. 그리고 이런 일이 당시엔 미실만이 아니라 일종의 관행처럼 행해졌음도 말한다.  

그래서 궁금하다. 왜 신라에 그런 관습이 있었을까. 한두 여자가 색으로 권력을 좌우한 역사는 있어도 그것이 사회적 관행이었던 역사는 본 적이 없다. 신라는 왜 그런 역사를 갖게 되었을까. 미실은 단순히 색공이 뛰어난 여자이기만 했던 걸까? 미실이 권력의 근거로 삼은 화랑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조직이었을까. 미실은 어떻게 해서 화랑을 제 권력의 한 축으로 활용할 수 있었을까? 사다함, 세종주, 설원랑. 미실과 연인이었던 이 남자들이 모두 화랑의 우두머리였던 것은 다만 우연일까?  

미실을 매개로 신라역사를 밝히기 위해서는 더 많은 상상, 더 자유로운 상상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 상상으로 나아가는 작은 첫 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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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눈물'입니다 - Tears in the Congo
정은진 글.사진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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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진의 책은 두번째다. 아프카니스탄의 경험을 담은 첫 책은 개인적 소회와 객관적 상황이 어정쩡하게 뒤얽혀 생각만큼의 감흥을 느끼기 힘들었다. 하지만 두번째 책은 훨씬 더 정리가 되어 있다. 콩고와 르완다에서 성폭행 당한 여성들을 취재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주제의식이 선명하여 집중이 잘 된다. 사진도 그녀들의 슬픔을 담담하게 전달한다. 사진 속의 여자들은 참 아름답다. 그런데 그녀들이 당한 일은 너무나 끔찍해서 읽는 내내 한숨과 신음이 터져나온다. 그 고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고 거기에 렌즈를 갖다 대야 했던 정은진의 아픔이 전해지는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안 사실이 있다. 르완다에서 벌여졌던 끔찍한 인종청소 사태의 연원이 19세기 말 유럽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 그전까지 차별도 차이도 느끼지 못하고 살던 후투족과 투치족이 그처럼 갈등하게 된 시작은 유럽인의 시각에서 비롯된 인종 간 우열 구도 때문이라고. 유럽인은 키가 크고 코가 높은 투치족은 우수 종족으로 인식하고, 키가 작고 코가 납작한 후투족은 열등하다고 인식했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존 해닝 스피크라는 영국 인류학자가 투치족이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아들 '함'의 후손인 함족이라며 치켜세웠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들은 백인과 유사한 민족이라며 투치족을 우대했고, 1933년부터 벨기에인이 실시한 인구조사에서 ㄹ완다인은 후투, 투치, 트와 세 종족으로 구분해 신분증을 발급했다. 이 신분증제도가 60년 뒤 두 종족 간에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단서가 되었다. 

자신들의 눈에 익숙한 것을 우등한 것으로 규정하고, 거기에 편견을 학문이란 이름으로 주장하는 이 익숙한 잘못이 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범죄의 단서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 아프리카만의 문제가 아니다. 손을 자르고 여성들의 몸에 온갖 끔찍한 것을 집어넣는 그들을 보며 야만적이라 비난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을까. 우리 또한 반세기 전에 같은 생김새, 같은 언어를 쓰는 이웃에게 사람으로 차마 못할 짓을 하지 않았던가. 그러고도 여전히 미제의 앞잡이니 빨갱이니 하며 그 범죄를 옹호하고 있지 않은가. 참 인간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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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스완 - 0.1%의 가능성이 모든 것을 바꾼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차익종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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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보고 흥미가 생겨 읽었다. 책은 아주 잘 읽혔고 가끔 웃음을 터뜨릴 만큼 재미있었다. 그런데 50쪽이 넘어가면서 슬슬 짜증이 일었다. 계속 같은 이야기, 그러니까 생각지도 못한 우연의 힘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 그 뜻밖의 사건=검은 백조의 존재를 인식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계속 변주되고 있었던 것. 그 점을 확인하기 위해 다양한 사례들이 등장하는데, 그 사례들의 신선함과 재미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어떡하라고?" 하는 의문 혹은 불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거의 5백쪽에 달하는 책이 결국 이 이야기로 일관한다. 

저자는 어떻게 책을 쓰고 어떤 제목을 달아야 베스트셀러가 되는지를 얄미울 만큼 잘 아는 것 같다. '블랙 스완'이라는 말로 자신의 주제를 요약해서 하나의 시대적 표제어로 만들 줄도 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블랙 스완이 있다는 걸 아는 사고과정이 기존의 설명적 사고방식과 어떻게 다른지, 블랙 스완의 존재를 현실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법 등에 대해선 변죽만 올리다 끝난다. 자신은 이걸 알아서 투자에 성공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책을 읽어도 그 방법을 모르겠다. 그러니 책을 덮으면서, 블랙 스완이 흔히 말하는 '우연'이나 '운명' 같은 말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아무튼 개운치 않은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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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들어오자마자 빌렸다. 음, 읽고난 소감은 잘 썼다는 것. 그냥 그 정도였다. 

[ 속마음을 들킨 위대한 예술가들]은 정신분석학으로 화가와 그의 작품을 분석했다. 본격적으로 화가의 트라우마를 분석하는 시도는 흥미롭고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작품 분석은 좀 허술한 느낌이다. 좀더 세밀하게 작품을 읽었으면 좋았을 것. 

 

레나타 세나클의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은 읽기가 쉽지 않은 책이다. 하지만 손에서 놓기도 쉽지 않다. 이 책을 읽고 [남아있는 나날]을 찾아 읽었다. 사뭇 아련하게 읽히는 사랑에서 히스테리와 강박을 읽어내는 세나클의 독법이 흥미롭고 재미있다. 소설과 영화를 통해 사랑의 도착을 읽어내는 시선이 세밀해서 더욱 재미있다.  

그중에도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크의 건축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었다. 루마니아를 집대성한 궁전을 짓겠다며 멀쩡하고 아름다운 건물과 마을들을 송두리째 파괴해버린 차우세스크에게서 세나클은 스스로를 공산주의의 메시아로 위치짓는 과대망상을 읽어낸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읽는데 왜 이렇게 가까운 누군가가 떠오르는지. 특히 차우세스크가 물을 '정리'하는데 집착했다는 대목. 운하를 파고(이놈의 운하가 무용지물이 되자 일부러 통행을 강제했다고, 아이고!), 수도 부크레시티를 흐르는 강을 '정비'하고 그 위를 포장해 분수 따위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자꾸 누군가를 생각나게 해서 남일 같지 않았다. 차우세스크가 공산주의의 실현자로 스스로를 망상했다면 그 누군가는 하나님의 아들로 스스로를 망상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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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
어빈 얄롬 지음, 임옥희 옮김 / 리더스북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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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귀맞은 영혼]을 읽다가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 브로이어와 니체의 대화라고? 독특한 설정에 끌려 읽었다.  

프로이트의 스승인 브로이어는 루 살로메의 요청으로 니체의 치료를 맡는다. 하지만 니체가 순순히 자신의 속내를 털어보일 사람이던가. 상담은 처음부터 난항을 겪고 고민 끝에 브로이어는 특단의 대책을 내놓는다. 한마디로 역할 바꾸기. 니체에게 자신의 실존적 고민을 치료하도록 함으로써 니체 자신의 문제를 드러내도록 하겠다는 이 도전은, 그러나 뜻밖의 결과를 가져온다. 

소설은 소설인지 사실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두 사람의 언어에 정통하며, 진지한 철학서로도 정신분석 입문서로도 읽힌다. 하지만 그보다 더 독자인 나를 사로잡은 것은, 중년에 이르러 삶의 허무에 빠진 브로이어의 고민이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고민이었지만 상담을 하는 과정에서 그 심연이 얼마나 깊고 헤아릴 수 없는지가 드러나고 그는 점점 더 절망한다. 치유 혹은 위로를 생각하고 시작한 대화는 오히려 절망을 더하는 듯하다.  

어쩌면 내가 허허로움을 느낌과 동시에 나 자신을 서둘러 추스르고 현실에 몰두하는 이유 또한 이 때문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더 깊은 절망에 빠질까 두려워 외면하는 것. 브로이어를 추동한 힘은 처음엔 의사로서의 책임감이다. 타인의 문제일 때 더 집중하는 나 자신을 보며 어이없어했지만 이 또한 자연스러운 모습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타인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에게 몰입할 용기가 없는지도. 니체 역시 이 점에선 마찬가지다. 철학을 위해 기꺼이 병을 앓는다고 말하던 니체지만, 그 역시 자신의 병을 병으로 인정하고 대면할 용기를 내기란 쉽지 않다. 브로이어의 헌신을 통해서 그는 관계를, 자신을, 자신의 인간학을 바라볼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대화를 나눈다면 그것은 참 고통스러우나 참 행복한 일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관계의 끝장까지도 염두에 둔 토론을 해본 기억이 꽤 멀다. 그건 내 인생의 문제일까, 이 시대의 관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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