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소설을 읽지 않다가 요즘 열심히 읽는다. 손을 놓은 기간이 긴 만큼 읽을 것이 많다. 장르문학에 소홀했던 자신을 책하며 어슐라 르귄과 젤라즈니, 테드 창에 손을 뻗는다.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으나 해볼 만하다. 다만 테드 창은 장르문학이란 경계로 가둘 필요가 없을 듯하다. 최근에 읽은 소설 중 최고로 꼽고 싶다.

일본소설은 이야기의 힘이 있다. [플라이 대디 플라이]와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들에서 고무되어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와 히가시노 게이고의 [아내를 사랑한 여자]를 읽었으나 좀 실망스럽다. 다행히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을 읽으며 실망을 만회한다. 대단한 작품이다.

중국소설은 루쉰과 바진 이후로 격조했는데 최근 다시 몇몇 작가들을 만났다. 위화, 여화, 하진...그런데 루쉰의 작품에서 크게 나아간 바를 모르겠다. 처음엔 재미있게 읽었으나 나중엔 입이 썼다. 중국 사회의 묘사도 루쉰 시대와 별 다름이 없다. 중국 소설가들은 혹 전통적 지식인의 엘리트주의에 적어 있는 건 아닐까. 중국소설을 읽다보니 한국소설들의 도전정신이 새삼스럽게 감탄스럽다.

이어령이 편집한 [휴일의 소설]은 우리에겐 낯선 제3세계 작가들의 작품이 모여 있다. 낯선 세계를 만나는 새로움과 긴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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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여러 날째 보이질 않는다. 아프신 걸까, 드디어 오늘은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가벼운 목례 한 번 나눈 적 없는 할아버지지만, 도서관 장기출근자로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잘 아는 사이다. 거의 십년째 도서관에서 안면을 익혀왔는데 요 며칠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처음엔 좀 홀가분했는데, 이제는 슬슬 걱정이 된다.

할아버지의 출근지는 정기간행물실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정기간행물실을 찾는 나는, 처음엔 할아버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간행물실을 찾는 열람자들은 도서관의 다른 곳보다 전체적으로 연령대가 높은 탓이다. 주로 4,50대 중년남자들이 책상 가득 신문을 펼쳐놓고 코를 후비며 중요하지도 않은 기사를 달달 욀 정도로 열심히 보는 풍경을 떠올리면 된다. 그래서 간혹 꼭 봐야 할 기사라도 있을라치면 허벅지를 꼬집으며 인내심을 길러야 한다. '휴지통'이나 '부고란'에서도 이들의 시선은 10분씩 머물기 일쑤다. 개중엔 두 개의 신문을 동시에 펼쳐놓고 타의 접근을 불허하는 신문광도 있다. 아무튼, 워낙 눈길을 끄는 이들이 많은 탓에 할아버지가 있는 걸 깨닫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런데 어느날, 그날도 역시 하품을 참으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맨 앞쪽 책상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할아버지가 눈에 띄었다. 대학노트와 두꺼운 성경책을 펼쳐놓고 할아버지는 볼펜을 든 채 그대로 졸고 있었다. 그러다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갑자기 번쩍 깨어 두 손을 쭉 뻗고 기지개를 켜더니 다시 공책에 글씨를 써내려갔다. 성경구절을 베끼는 것 같았는데, 죽 베끼는 게 아니라 한 구절을 여러 번 쓰는 듯했다. 큼직큼직한 글씨가 노트에 빽빽했다. 하지만 워낙 쓰는 속도가 느려서 한 쪽을 다 채우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아니, 글씨 쓰는 속도가 느린 탓보다 졸음에 자주 붙들리는 게 문제인 듯했다. 한 두어 줄 계속 쓰는가 싶으면 어느새 또 꾸벅꾸벅. 기면증이든가, 어쩌면 그런 병 때문인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참, 대책없는 할아버지로군 하고.

그러고보니 할아버지는 도서관의 진정한 장기출근자였다. 도대체 몇 시에 출근을 하는지, 내가 좀 부지런을 떤 날도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와 있었다. 그리고 예의 정기간행물실에 앉아 성경 옮겨적기를 저녁 6시 무렵까지 계속했다. 그렇게 매일 오가면서도 아무와도 인사를 나누거나 아는 척을 하는 법은 없었다. 그래도 사서들은 장기출근자로서 할아버지를 대우하는 것 같았다. 원래 간행물실에는 다른 책을 갖고 들어갈 수 없는데도 성경책 반입을 허용하는 것이 그 하나였다. 할아버지의 일과는 빈틈이 없었다. 아침 일찍 도서관에 나와 성경책을 베끼고 점심 때면 지하 식당에서 도시락을 먹거나 라면을 사 먹고 다시 지정석으로 올라가 졸며 쓰며 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내려가니 할아버지가 있었다. 식사를 막 끝낸 할아버지는, 빈 도시락그릇을 벌여둔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주문한 우동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우렁찬 목소리로 할아버지가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행진곡풍의 찬송가였다. 식당 안의 모든 사람이 할아버지를 쳐다보았지만 할아버지는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씩씩하게 끝까지 노래를 불렀다. 꽤 긴 노래였다. 이윽고 노래가 끝났다. 할아버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도시락그릇을 챙겨 자리를 떴다. 그일이 있은 지 몇 년이 지났지만 다시 그런 일을 본 적은 없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누구와 인사 한 번 나눈 적 없는 조용한 할아버지가 왜 갑자기 지하식당에서 노래를 불렀던 걸까? 혹시 그 어름에 사랑하던 사람을 잃었던 걸까? 그이를 위해서 눈물 대신 노래를 바쳤던 것은 아닐까... 속절없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보곤 했다.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그 상상이 맞는지 묻고 싶어하면서. 벌써 여러 날째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으니 문득 그날이 떠오른다. 이러다 할아버지마저 그저 내 상상이 돼버리는 건 아닌지, 모든 게 다 속절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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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전만 해도 도서관의 주 이용층은 십대와 이십대였다. 그랬는데 최근에는 이용층의 연령대가 대폭 상향조정되었다. 연령층이 높아진 첫째 이유는 아이엠에프 사태다. 아이엠에프로 인해 어느날 갑자기 직장에서 밀려난 중년 남성들에게 시립도서관은 싸고 건전하며 나름대로 면목이 서는 쉼터가 되었던 것이다. 둘째 이유는 자격증 열풍이다. 공인중개사, 공무원시험을 비롯해 각종 자격증을 준비하는 늦깍이 수험생이 늘면서 열람실은 중고등학생보다 20대 후반 이후의 세대가 더 많아졌다. 뭐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 분석이니 사실 여부를 지나치게 따질 필요는 없겠다.

어쨌거나 처음엔 도서관을 오가는 장년층들을 발견하면 은근한 동료애가 동하며 반갑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 동료들이 왜 이리 불편해지는지... 얼마 전부터 열람실에서 자주 마주치는 50대 아주머니. 오전 10시경에 출근하여 쉼없이 공부하는 아주 성실한 분이다. 그런데 점심을 먹고난 1시 반에서 2시 사이가 이분에겐 마의 취침시간이다. 식곤증이야 인간의 본능 중 하나니 탓할 것이 없다. 문제는 코골이. 책상에 엎드려 자는 잠깐의 낮잠치고 이분의 코골이는 꽤 걸다. 지난번 40대 남자의 무호흡증을 동반한 코골이에 놀라 남녀 공용 열람실엔 발을 끊은 지 오래이나, 이번엔 여자 열람실이니 피할 데도 없다. 아주머니의 코고는 소리가 높아갈수록 열람실은 점점 더 조용히 가라앉는다. 앞자리 옆자리를 둘러보니 모두들 얼굴이 굳어 있다. 하지만 아무도 나서지 못한다. 결국, 나이깨나 먹은 이 아주머니가 나서기로 한다. 몸을 벌떡 일으켜 코골이 아주머니에게 다가가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꽂힌다. 제발 착한 분이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 혼곤한 잠에서 나올락말락 희미한 눈으로 영문을 묻는 아주머니에게, "저, 코고는 소리가 좀 커서요..." 순간 아주머니의 눈이 화들짝 커지며 얼굴이 새빨개진다. "아이고, 죄송해요."         
자리로 돌아와 앉는데 주위의 시선이 곱지가 않다. 나 또한 몹쓸 짓을 한 듯, 석연치가 않다. 모처럼 숙면을 취하는 아주머니를 기어코 깨웠어야 할까, 도서관에 코고는 소리쯤 울린다고 하루종일 그런 것도 아닌데 그리 까칠하게 굴었어야 했나, 결국 내 스스로 더 견디지를 못하고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오면서 생각해 보니 내 경우에도 도서관만큼 잠이 솔솔 잘 오는 장소가 드물었다. 불면증으로 며칠 잠을 설쳤을 때도 지루한 책을 들고 도서관에 앉아 있으면 금방 치유가 된 경험, 나만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러니 내일부턴 도서관을 책만 보는 곳이 아니라 책도 보고 잠도 자는 곳으로 넉넉히 생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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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도서관이 내 생에 처음 들어온 것은 이십여 년 전쯤. 이사한 집 근처에 시립도서관이 있었던 우연 덕분이엇다. 산 비탈에 위치한 도서관은 지은 지 오래된 듯, 전체적으로 낡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청소상태는 깨끗해서, 아침 일찍 도서관으로 올라가 금방 청소를 끝낸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열람실에 앉으면 기분이 환해지곤 했다. 후미진 위치 탓인지 도서관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한 1,2년 다니다 보니 웬만한 출입자들은 다 눈에 익게 되었다. 그런데 도서관에 매일 출근하는 이들을 죽 관찰하다 보니 한 가지 공통점이 눈에 띄었다. 통상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정상에서 슬쩍 벗어난 사람이 많다는 사실. 가령 이런 식이다.

어느 날, 자료열람실에서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를 펴놓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뿡!" 하는 소리가 열람실을 울렸다. 깜짝 놀라 머리를 쳐들었지만 그저 조용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다시 책에 코를 박는 순간, 다시 한번 "뿡" 연이어 다시 "뿡뿡!" 하, 이거야 원. 조용한 열람실에 뻔뻔하게 울리는 방귀소리에 기가 막혀 사방을 주욱 둘러보았다. 나처럼 어이없는 눈길로 주위를 살피는 사람들과 시선이 오가던 가운데, 모두의 시선이 한 군데로 모아졌다. 50대 혹은 60대의 남자가 책에 눈길을 고정시킨 채 주위의 부산함과 상관없이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어찌나 태연한지 방금 전의 "뿡" 소리가 나의 이명은 아니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뿡의 연원은 알았으나 그 뿡에게 다가가 "뿡 소리가 시끄러우니 방귀가 나올 것 같으면 밖으로 나가서 뀌어주시지요"라고 말할 만한 배짱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뿡의 연배가 열람실에 있었던 이들 중 가장 높은 편이었던 것도 이런 사태에 일조를 했다. 사서들 역시 난감한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 다음날도 어김없이 열람실에는 "뿡"이 울려퍼졌고, 그건 내가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를 끝내고 자료열람실에서 퇴각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중엔 그 뿡이 냄새 없는 뿡임에 감사할 지경이었으니, 사람은 역시 환경의 동물인가.

그런데 십 년 넘게 도서관을 다니며 '애서가상'까지 받은 내 경험에서, 이 뿡 사건은 그저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도서관이란 단지 책을 읽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읽는 곳이기도 함을 나는 그후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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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npix 2007-07-09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다음 글이 기대되는군요. 아직 도서관에 오래 다니지 않아서 저런 풍경은 잘 못본 듯.^^

스머프 2007-07-09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ㅎㅎ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슴다! 기다려주세요~
 

한때, 천재는 요절한다는 생각 땜에 일찍 죽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천재가 아니고 따라서 지금껏 잘 살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오래오래 잘 살고 싶다. 가늘고 길게, 오래 살아야만 보통사람들이 힘들게 도달한 경지를 맛이라도 볼 것 같다. 그러면서 어느 사이 요절을 잊었더랬다. 그런데 어제 주문한 '엘리엇 스미스'와 '에바 캐시디'의 씨디를 받아놓고 한 곡 한 곡 듣다보니 아, 이상하다, 둘다 요절했구나! 그런데 음악이 그들이 요절 때문에 꼭 슬프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살아 있는 느낌이 강렬해서, 그래서 오랫만에 '요절'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죽음이 그들의 음악에 턱없는 아우라를 씌운 것은 아니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이미 자기 생의 극한까지 살아낸 사람들에게 죽음은 새로운 의미를 보태지 않는다. 죽음을 넘은 음악을 오랫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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