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

 

지난 겨울에 내린 눈
잊지 말라는 당부 같은

춘삼월에 내린 폭설도

또다시 눈 녹듯 사라진 삼월 십이 일 저녁

신문에 난 ‘한국의 책 100권’의 목록을 들여다보다

조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공자(孔子)가

그토록 꿈에 그리던

주(周)나라의 눈 덮인 겨울을 생각합니다

 

막소주 한 되를 사러

질척이는 거믄절 고갯길을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뒤따라 나선 아이가 자꾸

집 쪽을 돌아보며 중얼거립니다

나무가

나무가 없다고

까치집을 머리에 이고 있다고

그 손바닥만 한 밭뙈기에 그늘을 지운다고

오늘 아침나절에

옆집 늙은이가 덜컥 베어버린

집 뒤에 늘 서 있던

그 커다란 굴참나무가 보이지 않는다고

향음주례(鄕飮酒禮)하고

천천히

활시위를 당기다

이창기의 시집을 읽다. 표제작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도 좋고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도 좋다. 예전 [이생이 담 안을 엿보다] 보다 더 좋은 것같다. 요즘 나이 좀 들고 시도 좀 오래 쓴 시인들이 툭하면 인생에 대한 잠언 같은 걸 시라고 쓰는 폐단이 있는데, 이창기는 그걸 슬쩍 비껴가는 듯하여 반갑다. 김수영의 시제에서 따온 윗 시는 오래 읽고 음미할 수록 행간의 뜻이 새록하여 재미있다. 다만, 시집 뒤에 실린 이남호의 해설은 사족 중에도 사족이요, 시집의 안내글로서도 영 미흡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