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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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본성이었다. 생명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본성. 그가 쉬차를 버리지 않았다면 쉬차가 그를 버렸을 터였다. 그것이 삶이 가진 폭력성이자 슬픔이었다. 자신을, 타인을, 다른 생명체를 사랑하고 연민하는 건 그 서글픈 본성 때문일지도 몰랐다. 서로 보듬으면 덜 쓸쓸할 것 같아서. 보듬고 있는 동안만큼은 너를 버리지도 해치지도 않으리란 자기기만이 가능하니까. - 345, 346쪽

"욕망이 없다면 잃어버릴 것도 없어. 잃을 게 없으면 두려움도 없고. 드림랜드에 있으면 그렇게 살 수 있을 줄 알았어. 잃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적어도 그때보다 무서운 일은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야."-3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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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라 문서
파울로 코엘료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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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연의 대순환 속에는 승리나 패배 같은 개념이 없다. 오직 변화가 있을 뿐이다.
겨울은 맹위를 떨치며 줄곧 버티려 하나, 결국 꽃과 행복을 가져오는 봄의 도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여름 또한 온기가 땅에 유익하다 믿으며 따뜻한 나날을 영윈히 지속시키려 하나, 결국 땅을 쉬게 하는 가을의 도래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가젤은 풀을 먹고, 사자에게 잡아먹힌다. 이런 현상을 통해 신께서 보여주시려는 것은 누가 제일 강한 존재인가가 아니라 죽음과 생명의 순환이다.
자연의 대순환 속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그저 거쳐가야 할 단계가 있을 뿐이다. 이 이치를 깨달을 때 우리 마음은 자유로워지며, 역경의 시기를 받아들이게 되고, 영광의 순간에 도취되어 그 순간이 영원할 것으로 착각하지 않게 된다.
역경의 시기도, 영광의 순간도 다 지나간다. 힘든 시절이 지나면 좋은 시절이 온다. 우리가 육신에서 해방되어 ‘신성한 힘’을 찾아낼 때까지 이 순환은 계속된다. - 30쪽

포기하는 사람이 패자이고, 그 외에는 모두 승리자이다.
언젠가 그대가 귀기울여 듣는 자들을 향해 역경의 시절을 자랑스레 이야기할 날이 올 것이다. 그들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들으며 세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행동할 적기가 올 때까지 참고 기다려라.
다음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마라.
상처를 자랑스럽게 여겨라.

상처는 피부에 새겨진 훈장이다. 상처는 그대가 오랫동안 전장에서 경험을 쌓았음을 나타내는 증표이므로, 적들은 그 상처를 보고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렇기에 그대와의 충돌을 피하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 때도 종종 있을 것이다.
상처를 낸 칼보다 상처 그 자체가 더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 33쪽

패배자는 패배한 사람이 아니라 실패를 선택한 사람이다.
패배는 특정한 전투나 전쟁에서 지는 것을 의미한다. 실패는 아예 싸우러 나가지도 않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패배했다고 느낀다. 실패는 애초에 무언가를 꿈꿀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아무것도 기대화지 마라. 그러면 실망도 없을 것이다’가 실패의 표어이기 때문이다.
패배의 끝에 우리는 다시 떨치고 일어나 싸우러 나간다. 그러나 실패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평생 그렇게 좌절한 채로 살아갈 뿐이다. - 37, 38쪽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내일은 다를 거야.’
그러나 내일이 오면 그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질문이 마음에 떠오른다. ‘해봐야 소용없으면 어쩌지?’
그래서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싸움에 져본 적 없는 사람은 불행하다! 인생에서 승자가 될 일도 없으니. - 40쪽

홀로인 때가 없으면 자기 자신에 대해 알 수가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면 내면의 공허를 두려워하게 된다.
하지만 내면의 공허라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영혼에는 발견해주기를 기다리는 광대한 세계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온전한 힘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존재하고 있지만 너무나 새롭고 강력한 세계이기에, 우리는 차마 그 존재를 인정하길 두려워한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보다 멀리 갈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한다. - 44쪽

그들은 종교라는 것이 신비를 공유하기 위해 생겨난 것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타인을 억압하거나 개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세상에 왔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신의 기적은 일상의 삶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 54쪽

쓸모없는 삶이란 없다. 모든 영혼은 나름의 이유가 있어 지상에 내려온 것이다.
진정으로 타인을 돕는 사람들은 억지로 쓸모 있는 삶을 살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저 유익한 삶을 이끌어갈 뿐이다. 남들에게 이래라저래라 조언을 하지도 않는다. 그저 조용히 모범을 보이며 살아간다.
자신이 늘 바라온 삶을 사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타인에 대한 비판을 그만두고 자신의 꿈을 이루는 데 집중하라. 그런 삶이 대단찮게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만물을 주관하는 신의 관점에서는 남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그런 삶이야말로 세상을 개선하려는 신의 뜻에 부합한다. 따라서 신은 그런 삶을 사는 이에게 매일 더 많은 축복을 내릴 것이다. - 56, 57쪽

아름다움은 같음이 아닌 다름 속에 존재한다. 기다란 목이 없는 기린, 가시 없는 선인장을 어느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우리를 둘러싼 산봉우리들은 그 높이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웅장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다. 산봉우리들의 높이를 전분 똑같이 만들어버리면 더 이상 그런 분위기를 내지 못할 것이고 우리의 우러름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를 놀라게 하고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은 바로 불완전함이다. - 76쪽

인생의 큰 목표는 사랑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침묵이다. - 91쪽

군더더기를 모두 덜어내고 단순함과 집중에 초점을 맞추면 우아함을 얻을 수 있다. 자세가 단순할수록 더 좋고, 수수할수록 더 아름답다.
단순함이란 무엇일까? 단순함은 인생의 진정한 가치와 맞닿아 있다.
하늘에서 내린 눈이 고운 이유는 한 가지 색깔이기 때문이다.
바다가 멋진 이유는 표면이 고르기 때문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모래와 바위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하나를 좀더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것들이 얼마나 심오하고 완전한지를 알게 되고 그 귀함을 깨닫게 된다.
삶에서는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훌륭한 것이기도 하다. 단순한 것들은 스스로 그 가치를 드러낸다. - 122쪽

나는 잠들어, 삶은 그저 행복이라는 꿈을 꾸었네.
깨어보니 삶은 의무였네.
의무를 다하고 보니 삶은 행복이었네. - 127쪽

성공만을 좇는 사람은 오히려 성공하기 어렵다. 성공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살다보면 주어지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강박은 성공을 일구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강박적으로 일하다보면 어느 길로 가야 할지 혼란에 빠지고 삶의 기쁨도 느끼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 137쪽

사랑은, 늘 같은 모습으로 변화를 거부하기 때문이 아니라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임을, 사랑의 힘은 그 모순됨에 있음을 깨닫게 하소서. - 144, 145쪽

피곤에 지쳐도 마음의 힘으로 계속 걸어갈 수 있음을, 마음마저 지치면 믿음의 힘에 의지해 나아갈 수 있음을 알게 하소서.
사막의 모래들 가운데서 다름의 기적을 볼 수 있게 도와주시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사막의 모래들이 똑같아 보여도 전부 다르듯, 사람은 누구나 생각하고 행동하는 바가 다름을 깨닫게 하소서. - 145쪽

증오를 증오로 갚지 말고 정의로움으로 갚아라.
세상은 적군과 아군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로 나뉜다.
강한 자들은 승리했을 때 아량을 베푼다.
약한 자들은 승리했을 때 무리를 지어 패자들을 괴롭힌다. 그 중에서도 제일 약해 보이는 자들을 골라 괴롭힌다. 그들은 승리와 패배가 일시적인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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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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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가 생각하기에 사유란 `타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무사유란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지요. 히틀러에게 받은 명령서에 서명하면서 아이히만은 그 명령을 수행햇을 때 자신의 서명이 그 서명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어떤 효과를 미치는지 `사유`했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서명한 수용소 수감 명령서를 받았을 때 유대인들이 과연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지 `사유`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수용소 공간이 부족해지자 이제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야만 한다는 정책이 채택되었을 때, 가스실로 걸어 들어가는 유대인들의 극심한 공포를 그는 `사유`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아이히만은 반드시 사유해야만 했을 것을 전혀 `사유`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 78, 79쪽

막스 베버(Max Wever, 1864-1920)가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가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는 분업과 전문화가 급속도로 진행됩니다. 이 때문에 같은 조직에 속해 있어도 우리는 옆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알기 힘든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가 <심판(Der Prozess) 1925>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 점이지요. - 79쪽

모든 일들이 너무나 전문화되고 분업화되어 있어 우리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도대체 어떤 일인지,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거의 반성할 틈이 없습니다. 그저 내게 주어진 서류를 정리하고 거기에 서명하고 있을 따름이지요. 그 서류에는 유대인의 검거와 수용소 수용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렇다며 아이히만이 저지른 악, 즉 무사유로 인해서 발생한 악은 도처에서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누구든지 제2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 79, 80쪽

바타이유의 생각은 `금지된 것은 인간에게 강력한 욕망을 부여한다`는 통찰을 전제로 전개됩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경제 사정으로 인해 지금 내가 구매할 수 없는 핸드백에서 느꼈던 감정과도 유사하게, 가질 수 없는 것은 대개 인간에게 강렬한 열망을 심어 주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런 금지와 금기의 대상이 성적인 대상에 적용될 때 우리가 가지는 열망이 바로 에로티즘입니다. 따라서 에로티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금지와 금기 자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 이 때문에 바타이유는 에로티즘이 동물들의 성적인 충동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던 겁니다. 동물들에게는 금지나 금기에 대한 의식 혹은 그러한 제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110, 111쪽

바타이유에게 결혼은 `성행위와 존경의 결합된 형태`입니다. 결혼이란 주어진 금기에 입각하여 이루어진 합법적 성행위 제도입니다. 다시 말해 결혼을 한다는 것은 배우자를 제외하고는 다른 타인과는 결코 성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결혼 생활에 충실하면, 다시 말해 금기를 잘 지키면 사회적으로 인정과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보면 이러한 사회적 존경의 논리 이면에는 금기를 넘어서려는 욕망이 강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존경이란 이와 같은 강렬한 금기 위반에 대한 욕망을 잠재우려는 미끼라고도 볼 수 있지요. - 114, 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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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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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몸통에 커다란 머리를 가진 역사의 천사는 아마도 지식인을 가리킬 것이다. 천사의 작은 몸통은 현실의 무능함을, 커다란 머리는 과도하게 발달한 그의 관념성을 상징한다. 정의는 관념이고, 폭력은 물질이다. 그리고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원시적인 물질의 힘이다. 그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편 채로 거센 바람에 밀려 끝없이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 부조리야말로 삶의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정상적 상태라는 것, 그것이 <교수대 위의 까치>가 연출하는 풍경만큼이나 을씨년스러운 세상의 진리,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 말하지 않는 비밀인 모양이다. - 머리말

르네상스의 인간들이 신을 향하던 눈을 자신에게로 돌렸을 때, 그들이 제일 먼저 맞닥뜨린 것은 인간 내면의 야수성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갑자기 광우가 문학과 예술의 주제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이 때문이다. 문제는 이 광기를 대하는 태도이다. 인문주의자들의 텍스트는 인간의 광기에 화들짝 놀라 그것을 서둘러 이성의 지배 아래 도덕적으로 가두려 한다. - 90, 91쪽

어느 독일 주간지의 기사에 따르면, 브뤼헐은 실은 민중의 영웅이 되는 데 필요한 자질들, 가령 ‘당파성과 낙관주의, 휴머니즘적 진보의 신념’ 중 어느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진보주의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 세계가 바뀔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한다. 하지만 <이카루스의 추락>이나 <바벨탑의 건설>의 예가 보여주듯이,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노력은 대개 좌절과 실패로 끝난다. 게다가 브뤼헐은 자신이 민중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지도 않다. <소경의 인도>가 보여주듯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모두가 구렁텅이에 빠질 뿐이다. - 108쪽

그렇다면 그는 민중을 사랑했을까? 그는 성직자를 풍자하고, 탁발승들을 조롱하고, 고위 관료를 우롱하고, 스페인 세리(稅吏)를 비난하고, 부유한 시민을 비판했다. 하지만 가난한 민중들 역시 그의 신랄하고 날카로운 풍자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는 농민들의 어리석음 역시 공평하게 비웃었다. 대중을 바라보는 브뤼헐의 시선은 때로 고대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보여준 인간 혐오에 가까울 정도읻다. 사회주의 리얼리스트들은 ‘대중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브뤼헐은 민중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민중의 어떤 부분은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나, 그들의 다른 부분에는 차가운 냉소를 보낸다. - 108쪽

최고의 풍자는 역시 자기풍자이다. 진정한 풍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거쳐 마침내 자기 자신까지 비웃을 때에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 112쪽

미술사학자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 1858~1905년)에 따르면, 미술사를 움직이는 것은 ‘능력(Können)’이 아니라 ‘의지(Wollen)’라고 한다. 현대 화가들이 유년기로 돌아가는 것은 사실적 묘사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다만 그럴 ‘의지’가 없을 뿐이다. 미술사를 사실적 재현 기술이 발전하는 과정으로 볼 때, 아이들의 그림은 채 발달하지 못한 미숙함의 산물일 뿐이다. 하지만 미술사를 상이한 ‘의지들’이 교차하는 장으로 바라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 경우 아이의 그림은 어른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예술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현대의 화가들이 아이들의 그림에 주목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128, 129쪽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실물을 꼭 빼닮게 그리는 기술은 완성에 도달했다. 거기에 19세기에 카메라까지 발명되면서, 도처에서 사물을 꼭 빼닮는 이미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실물을 빼닮은 이미지에 그다지 깊은 인상을 받지 않는다. 이는 화가들에게 커다란 위기를 의미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새로운 출발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다시 시작하려면 역시 근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이다. 그리하여 현대의 화가들은 사회화를 겪지 않은 어린이, 문명화를 거치지 않은 미개인의 그림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거기서 그들은 르네상스 이후의 관행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예술의지’를 찾았던 것이다. - 129쪽

에스토니아의 기호학자 유리 로트만(Yuri Lotman, 1922~1993년)은 정물화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을 제공해준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모든 문화적 현상 속에는 ‘낱말과 사물의 대립’이 존재하는 바, 정물화는 이 두 요소가 교차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고 한다. 낱말과 사물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정ㅁ루화는 서로 대립되는 두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나는 그림이 낱말이 되는 길로, 그 대표적인 예는 바니타스 정물이다. 거기서 그려진 사물은 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낱말일 뿐이다. 다른 하나는 그림이 사물을 지향하는 길로, 그 대표적인 예가 트롱프뢰유 정물이다. 여기서 그려진 사물은 그려지지 않은 진짜 사물로 착각되거나 아예 그것을 대체하려 한다. - 166, 167쪽

페테르 클라스(Pieter Claesz, 1597~1661년)의 <바니타스 정물>을 보자. 여기에는 두개골과 시계, 낡은 책, 꺼진 촛대, 넘어진 술잔 등 다양한 모티프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사물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실은 삶의 ‘무상함’을 뜻하는 어휘들, 즉 생긴 것은 달라도 모두 같은 낱말로 번역되는 동의어들이다. 반면, 기스브레히츠의 트롱푸뢰유는 어떤가? 그것은 사물을 가리키는 기호에 머물지 않고 아예 자기가 사물이 되려고 한다. 바니타스와 트롱프뢰유의 대립은 거저 사물과 낱말의 경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더 높은 의미의 차원에서도 둘은 대립한다. 트롱프뢰유가 사물의 소유에 집착한다면, 바니타스는 그 반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허망하다고 말하지 않는가. -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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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쌀 한 알 - 일화와 함께 보는 장일순의 글씨와 그림
최성현 지음 / 도솔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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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글이다.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들이 그가 있다는 정도만 알고, 그 다음 지도자는 사람들이 친근하게 여기며 받들고, 그 다음 지도자는 무서워하고, 그 다음 지도자는 경멸한다."- 100쪽

무엇을 이루려 하지 마라
앉은 자리 선 자리를 보라
이루려 하며는 헛되느니라
자연은 이루려 하는 자와 함께 하지 않느니라 - 101쪽

어느 시대나 깨어서 살고자 했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돌아온다. 모든 것은 돌아온다. 한 생각조차 그냥 사라지지 않고 돌아온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고, 미래는 현재의 결과다. 그러므로 내일의 자기 삶이 알고 싶은 사람은 오늘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면 된다. - 105쪽

오늘은 입추
산길을 걸었네
소리없이 아름답게 피었다 가는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 129쪽

장일순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회를 변혁하려면 상대를 소중히 여겨야 해. 상대는 소중히 여겼을 적에만 변하거든. 무시하고 적대시하면 더욱 강하게 나오려고 하지 않겠어?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면 다르다는 것을 적대 관계로만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말이야."
김기봉은 그것을 풀어 이렇게 설명했다.
"내 것이 옳다고 하는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틀을 갖고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들끼리만 판을 짜려고 하는 걸로는 세상의 큰 변화는 어렵다는 말씀을 하시고 싶었다고 생각합니다."- 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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