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몸통에 커다란 머리를 가진 역사의 천사는 아마도 지식인을 가리킬 것이다. 천사의 작은 몸통은 현실의 무능함을, 커다란 머리는 과도하게 발달한 그의 관념성을 상징한다. 정의는 관념이고, 폭력은 물질이다. 그리고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원시적인 물질의 힘이다. 그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편 채로 거센 바람에 밀려 끝없이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 부조리야말로 삶의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정상적 상태라는 것, 그것이 <교수대 위의 까치>가 연출하는 풍경만큼이나 을씨년스러운 세상의 진리,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 말하지 않는 비밀인 모양이다. - 머리말
르네상스의 인간들이 신을 향하던 눈을 자신에게로 돌렸을 때, 그들이 제일 먼저 맞닥뜨린 것은 인간 내면의 야수성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갑자기 광우가 문학과 예술의 주제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이 때문이다. 문제는 이 광기를 대하는 태도이다. 인문주의자들의 텍스트는 인간의 광기에 화들짝 놀라 그것을 서둘러 이성의 지배 아래 도덕적으로 가두려 한다. - 90, 91쪽
어느 독일 주간지의 기사에 따르면, 브뤼헐은 실은 민중의 영웅이 되는 데 필요한 자질들, 가령 ‘당파성과 낙관주의, 휴머니즘적 진보의 신념’ 중 어느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진보주의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 세계가 바뀔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한다. 하지만 <이카루스의 추락>이나 <바벨탑의 건설>의 예가 보여주듯이,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노력은 대개 좌절과 실패로 끝난다. 게다가 브뤼헐은 자신이 민중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지도 않다. <소경의 인도>가 보여주듯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모두가 구렁텅이에 빠질 뿐이다. - 108쪽
그렇다면 그는 민중을 사랑했을까? 그는 성직자를 풍자하고, 탁발승들을 조롱하고, 고위 관료를 우롱하고, 스페인 세리(稅吏)를 비난하고, 부유한 시민을 비판했다. 하지만 가난한 민중들 역시 그의 신랄하고 날카로운 풍자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는 농민들의 어리석음 역시 공평하게 비웃었다. 대중을 바라보는 브뤼헐의 시선은 때로 고대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보여준 인간 혐오에 가까울 정도읻다. 사회주의 리얼리스트들은 ‘대중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브뤼헐은 민중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민중의 어떤 부분은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나, 그들의 다른 부분에는 차가운 냉소를 보낸다. - 108쪽
최고의 풍자는 역시 자기풍자이다. 진정한 풍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거쳐 마침내 자기 자신까지 비웃을 때에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 112쪽
미술사학자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 1858~1905년)에 따르면, 미술사를 움직이는 것은 ‘능력(Können)’이 아니라 ‘의지(Wollen)’라고 한다. 현대 화가들이 유년기로 돌아가는 것은 사실적 묘사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다만 그럴 ‘의지’가 없을 뿐이다. 미술사를 사실적 재현 기술이 발전하는 과정으로 볼 때, 아이들의 그림은 채 발달하지 못한 미숙함의 산물일 뿐이다. 하지만 미술사를 상이한 ‘의지들’이 교차하는 장으로 바라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 경우 아이의 그림은 어른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예술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현대의 화가들이 아이들의 그림에 주목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128, 129쪽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실물을 꼭 빼닮게 그리는 기술은 완성에 도달했다. 거기에 19세기에 카메라까지 발명되면서, 도처에서 사물을 꼭 빼닮는 이미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실물을 빼닮은 이미지에 그다지 깊은 인상을 받지 않는다. 이는 화가들에게 커다란 위기를 의미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새로운 출발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다시 시작하려면 역시 근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이다. 그리하여 현대의 화가들은 사회화를 겪지 않은 어린이, 문명화를 거치지 않은 미개인의 그림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거기서 그들은 르네상스 이후의 관행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예술의지’를 찾았던 것이다. - 129쪽
에스토니아의 기호학자 유리 로트만(Yuri Lotman, 1922~1993년)은 정물화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을 제공해준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모든 문화적 현상 속에는 ‘낱말과 사물의 대립’이 존재하는 바, 정물화는 이 두 요소가 교차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고 한다. 낱말과 사물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정ㅁ루화는 서로 대립되는 두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나는 그림이 낱말이 되는 길로, 그 대표적인 예는 바니타스 정물이다. 거기서 그려진 사물은 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낱말일 뿐이다. 다른 하나는 그림이 사물을 지향하는 길로, 그 대표적인 예가 트롱프뢰유 정물이다. 여기서 그려진 사물은 그려지지 않은 진짜 사물로 착각되거나 아예 그것을 대체하려 한다. - 166, 167쪽
페테르 클라스(Pieter Claesz, 1597~1661년)의 <바니타스 정물>을 보자. 여기에는 두개골과 시계, 낡은 책, 꺼진 촛대, 넘어진 술잔 등 다양한 모티프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사물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실은 삶의 ‘무상함’을 뜻하는 어휘들, 즉 생긴 것은 달라도 모두 같은 낱말로 번역되는 동의어들이다. 반면, 기스브레히츠의 트롱푸뢰유는 어떤가? 그것은 사물을 가리키는 기호에 머물지 않고 아예 자기가 사물이 되려고 한다. 바니타스와 트롱프뢰유의 대립은 거저 사물과 낱말의 경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더 높은 의미의 차원에서도 둘은 대립한다. 트롱프뢰유가 사물의 소유에 집착한다면, 바니타스는 그 반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허망하다고 말하지 않는가. -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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