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렌트가 생각하기에 사유란 `타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무사유란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지요. 히틀러에게 받은 명령서에 서명하면서 아이히만은 그 명령을 수행햇을 때 자신의 서명이 그 서명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어떤 효과를 미치는지 `사유`했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서명한 수용소 수감 명령서를 받았을 때 유대인들이 과연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지 `사유`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수용소 공간이 부족해지자 이제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야만 한다는 정책이 채택되었을 때, 가스실로 걸어 들어가는 유대인들의 극심한 공포를 그는 `사유`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아이히만은 반드시 사유해야만 했을 것을 전혀 `사유`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 78, 79쪽
막스 베버(Max Wever, 1864-1920)가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가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는 분업과 전문화가 급속도로 진행됩니다. 이 때문에 같은 조직에 속해 있어도 우리는 옆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알기 힘든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가 <심판(Der Prozess) 1925>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 점이지요. - 79쪽
모든 일들이 너무나 전문화되고 분업화되어 있어 우리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도대체 어떤 일인지,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거의 반성할 틈이 없습니다. 그저 내게 주어진 서류를 정리하고 거기에 서명하고 있을 따름이지요. 그 서류에는 유대인의 검거와 수용소 수용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렇다며 아이히만이 저지른 악, 즉 무사유로 인해서 발생한 악은 도처에서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누구든지 제2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 79, 80쪽
바타이유의 생각은 `금지된 것은 인간에게 강력한 욕망을 부여한다`는 통찰을 전제로 전개됩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경제 사정으로 인해 지금 내가 구매할 수 없는 핸드백에서 느꼈던 감정과도 유사하게, 가질 수 없는 것은 대개 인간에게 강렬한 열망을 심어 주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런 금지와 금기의 대상이 성적인 대상에 적용될 때 우리가 가지는 열망이 바로 에로티즘입니다. 따라서 에로티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금지와 금기 자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 이 때문에 바타이유는 에로티즘이 동물들의 성적인 충동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던 겁니다. 동물들에게는 금지나 금기에 대한 의식 혹은 그러한 제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110, 111쪽
바타이유에게 결혼은 `성행위와 존경의 결합된 형태`입니다. 결혼이란 주어진 금기에 입각하여 이루어진 합법적 성행위 제도입니다. 다시 말해 결혼을 한다는 것은 배우자를 제외하고는 다른 타인과는 결코 성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결혼 생활에 충실하면, 다시 말해 금기를 잘 지키면 사회적으로 인정과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보면 이러한 사회적 존경의 논리 이면에는 금기를 넘어서려는 욕망이 강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존경이란 이와 같은 강렬한 금기 위반에 대한 욕망을 잠재우려는 미끼라고도 볼 수 있지요. - 114, 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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