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산문은 대체적으로는 읽기 쉽게 쓰여져 있고, 실생활과 관계된 생각이나 예시가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다수의 짧은 글을 모아놓은 형식이어서 소설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맥락을 잡고 읽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책을 읽다가 중간에 쉬어도 무방하다. 반면, 각각의 에피소드는 즐겁게 몰입하여 읽게 되지만 다 읽고 나면 그 조각들을 모은 한 권의 책에서 무엇을 남겨야 할지를 정확히 가려내기 어렵다는 단점도 있다. 오늘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단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절감하였는데, 그도 그럴것이 작년에 이미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책장에 꽂혀 있는 제목을 보고 '분명히 읽은 책이었는데, 무슨 내용이었지?'라며 스스로 했던 질문과 그 질문에 이렇다 할 대답을 해줄 수 없는 답답함이 다시 책을 펴게 만들었다(혹시 예전에 메모해놓은 것이 있나 살펴보았는데, 별다른 감상 없이 밑줄 그은 문장 몇 줄을 모아놓은 것 뿐이었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대개의 글들은 각 부나 장마다 포괄적인 제목을 달아 두고는 하는데, 이 책에는 각 부에 해당하는 제목이 달려 있지 않다. 따라서 이렇게 4부로 나눈 이유가 유사한 주제의 모음인지, 글을 써간 시간의 순서인지를 알기가 어렵다. 아무래도 후반보다 초반에 드러난 사건(저자의 초등학교나 대학 또는 대학원 때의 에피소드)이나 예시가 조금 더 오래된 것으로 볼 때 시간의 순서에 따라 글을 엮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하긴, 2년 남짓 쓴 글을 모았다고 하는데 이렇게 모아진 글을 또다시 유사한 주제나 시간의 순서로 분류하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 구성이야 어쨌든 이 책에 실린 글은 매우 쉽고 재미있다. 하루도 안되는 시간동안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가독성이 그만큼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 앞서 산문의 장점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했지만 독서방식에 대한 장점 뿐만이 아니라, 산문 그 자체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비유나 암시 없이 작가의 생각을 날 것 그대로 접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의 생각과 일치하는 점을 찾으며 반가워하거나 새로운 시각에 공감하며 즐거움을 얻는 일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매력적인 혜택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초반에 집중이 잘 되어서였는지 1부와 2부에 있는 글에 공감이 많이 갔다. 1부에는 상대적으로 부(富)나 노동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스마트폰에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행태와 이를 관리하고 있는 부유한 이들의 관계를 마르셀 에메의 소설에 빗대어 설명한 '시간 도둑', 정치적 해방으로서의 자유가 약탈적 권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변모된 세태를 이야기 하는 '자유 아닌 자유', 무소유라는 빈자들의 마지막 위안까지도 부자들의 옵션이 되고 있다는 '진짜 부자는 소유하지 않는다', 이제는 일반화 되었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던 비정규 노동이라는 현상을 다룬 '숙련 노동자 미스 김'이 그러하다.


한편, 책의 제목인 <보다>에 걸맞게 많은 에피소드에서는 영화를 통한 사회의 단상들도 많이 눈에 띤다. <설국열차>에 탄 가상적 인물들을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우리 사회상을 해부한 '머리칸과 꼬리칸', <신세계>에 드러난 두 아버지를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와 연계시킨 '부자 아빠의 죽음', <비포 미드나잇>과 저자 자신의 옛 추억을 연계하여 사랑을 대하는 20대와 40대를 회고한 '부다페스트의 여인', 타인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려고 하는 <건축학개론>의 서연을 심리적으로 분석한 '잘 모르겠지만 네가 필요해', <마스터>에 빗대어 부모의 경계를 벗어나는 자녀의 성장을 설명한 '나쁜 부모 사랑하기', <그래비티>를 통하여 에피쿠로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을 펼쳐낸 '어차피 죽을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이유', 앤디 워홀이나 백남준을 통해 <로마 위드 러브>와 <브로드웨이를 쏴라>의 아마추어의 한계라는 메세지를 극복을 설명한 '샤워부스에서 노래하기', 저자의 단편소설 <비상구>가 영화화 되는 에피소드를 다룬 '미래의 영화를 표절하다', <관상>을 통하여 인생에 있어 자기실현적 암시 필요성을 이야기 한 '앞에서 날아오는 돌', <변호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를 통해 가족의 미래상을 짐작해본 '아버지의 미래' 등이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하여 장면장면들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그것 또는 유사한 묶음들을 사회적 현상이나 인간의 심리로 연결시켜나가는 탁월함에 감탄을 하며 책을 읽었다.


덧: 책을 다 읽고 재미 삼아서 예전에 읽으면서 밑줄을 쳤던 부분과 비교를 해봤다. 방금 막 책을 다 읽었음에도 놀랍게도 예전에 밑줄 친 부분을 정리해 놓은 것 중에서는 '이런 글이 있었나?'할 정도로 생소한 문장들이 있었고, 이번에 반정도는 예전과 일치하지 않는 새로운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나'라는 동일인이 같은 글을 읽고 있지만 그 시간이나 상황에 따라 공감가는 부분이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했다. 그러나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미 밑줄을 그었던 문장에 이번에 또 밑줄을 그은 경우이다. 이것은 시간이나 상황에 따라 변함없이 내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문장들로, 나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시각각 변하는 단상들이 아니라 일관되게 나를 이끄는 이 글들을 잘 간직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타임즈는 최근 뉴욕에서 유행하는 ‘폰 스택(Phone Stack)’ 게임을 소개했다. 룰은 간단하다. 고급 식당에 모여 식사를 할 때 모두의 휴대폰을 테이블 한가운데 쌓아놓고는 먼저 폰에 손을 대는 사람이 밥값을 내는 것이다. 이 게임은 얼핏 보기에는 스마트폰에 주의를 빼앗기지 말고 대화와 식사에 집중하자는 건전한 뜻을 품고 있는 것 같지만, 파워 게임의 면모도 있다. 더 오랜 시간 스마트폰에 무심할수록 더 힘이 강한 사람, 더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는 모두가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부자들이 스마트폰으로부터 멀어지는 사이, 지위가 낮은 이들의 스마트폰 의존도는 더 높아지고 있다. 부자나 권력자와 달리 사회적 약자는 ‘중요한 전화’를 받지 않았을 때의 타격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 12, 14쪽

자본주의사회의 마케팅이라는 것은 고객이 굳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던 것도 필요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정말 필요한 것이었다면 고객에게 이미 있을 것이다. 아직 안 샀다는 것은 아직 그게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 18, 20쪽

물론 세일즈맨은 고객이 물건을 사도록 유혹할 자유가 있고 고객은 그 유혹에 넘어갈 자유가 있다. 이때의 자유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정치적 개념이라기보다 강력한 저항이 없는 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제 뜻을 이루겠다는 힘의 논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메이플라워호에 승선한 이들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그 후예들은 원주민의 땅을 차지할 자유를 찾아 총을 들고 서부로 향했다. 메이플라워호의 자유가 정치적 해방으로서의 자유라면 서부로 향한 이들의 자유는 약탈의 권리를 의미한다. 자유가 이렇게 힘의 논리를 포장하는 명분에 불과한 사회에선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는 홉스적 세계관이 진리가 된다. 초강대국 미국이 걸핏하면 들이대는 가치가 ‘자유’라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 20쪽

언젠가부터 여행은 신성불가침의 종교 비슷한 것이 되어서 누구도 대놓고 "저는 여행을 싫어합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혹시 신입사원 모집 공고마다 나오는 "해외여행에 결격사유가 없을 것"이라는 문구의 영향일까?). 여행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쩐지 나약하고 게으른 겁쟁이처럼 보인다. 폰 쇤부르크처럼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났더라면 ‘우리 귀족들은 원래 여행을 안 좋아해’라고 우아하게 말할 수 있겠지만 그건 우리 같은 평민들이 쓸 수 있는 레토릭이 아니다. - 57, 58쪽

<비포 미드나잇>에서 이제 사십대에 다다른 셀린(줄리 델피)은 제시에게 묻는다. "지금의 나를 만난다면 이번에도 기차에서 뛰어내릴 건가요?" 비엔나에서 만난 사람과 같이 살고 있지 않은 나는 비슷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그녀를 만나리가는 확신도 없이 무작정 부다페스트행 기차레 다시 오를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행동은 스물여덟 살에게나 어울린다. 그럼 사십대의 남자에게는 무엇이 어울리나? 바로 지금 하고 있는 것들. 극장의 어둠 속에 몸을 파묻고 영화 보기, 달콤쌉싸름한 회고담 늘어놓기, 그러다 혼자 괜히 쓸쓸한 기분에 젖어 맥주 마시기, 그리고 글쓰기.
이십대는 몸으로, 사십대는 머리로 산다. 살아보니 둘 다 나름대로 좋았다. 이제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가 찍을 다음 영화를 기다린다. 내가 어쩌면 살았을 수도 있었을 또다른 삶을 기다리는 기분으로. - 67, 68쪽

서연은 제 욕망을 타인의 욕망으로 바꾸려는 여자다. 그래서 늘 자기를 속인다. 옛 남자를 찾아간 이유는 오직 아버지에게 집을 지어주려는 효심의 발로이고 옛 남자에게 넥타이를 선물하려는 것은 오직 그 남자의 패션감각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자기 욕망을 차마 들여다볼 수 없기에 승민의 욕망을 통해 자기가 누구이고 뭘 원하는가를 알아내고자 하지만, 과거의 뼈아픈 경험을 통해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겪은 바 있는 승민은 그녀를 두려워한다. 자신이 뭘 욕망하는지를 모르(는 척 하)면서 오직 타인을 통해 그것을 알아내고자 하는 서연 같은 여자, 참 피곤하다. 그런데 남자들은 늘 그런 여자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남자 역시 여자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기를 원하기 때문일 터. - 74, 75쪽

현실적인 관점에서라면 늙고 병든 아내를 끝까지 책임지는 크레이그 같은 성숙한 남자가 최고겠지만 우리는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승민 같은 남자나 자기 욕망을 모르면서도 당당한 서연 같은 여자에게 더 끌린다. 우리의 내면은 자기 안에 자기, 그 안에 또 자기가 들어 있는 러시아 인형이 아니다. 우리의 내면은 언제 틈입해 들어왔는지 모를 타자의 욕망들로 어지럽다. 그래서 늘 흥미롭다. 인간이라는 이 작은 지옥은. - 75쪽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의 파국을 상상해보는 것은 지금의 삶을 더 각별하게 만든다. 그게 바로 카르페 디엠이다.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은 그렇게 결합돼 있다. - 90, 91쪽

그런데 ‘혼자 죽는 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노인들의 말은 그냥 어리석기만 한 것일까? 혹시 그들이 죽음이 아닌 ‘혼자’를 강조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인간이 정말 무서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철저하게 혼자가 되는 것이라고 읽을 수는 없을까? 죽음은 개별적이다. 탄생은 어미의 고통과 함께하지만 죽음은 홀로 겪는다. 요컨대, 우리는 모두 혼자 죽는다. - 93쪽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을 ‘진심’을 담아 전하기만 하면 상대에게 전달되리라는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호메로스는 이미 이천팔백여 년 전에 그런 믿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진심은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진심 역시 ‘잘 설계된 우회로’를 통해 가장 설득력 있기 전달된다. 그게 이 세상에 아직도 이야기가, 그리고 작가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 115, 116쪽

"안나 아르카디예브나는 책을 읽었고 이해도 했지만 읽는다는 것, 즉 책에 쓰인 타인의 생활을 뒤따라간다는 것이 불쾌했다. 그녀는 무엇이든 직접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안나 카레리나 1>, 문학동네, 2010) 파묵은 이 대목을 길게 인용하면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풍경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소설은 ‘심리적 3차원’의 세계라고 천명한다. 파묵의 이 언급은 폴 오스터가 영화와 소설을 각각 2차원과 3차원에 비유했던 아네트 인스도르프와의 인터뷰를 연상시킨다. 오스터는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말해 컬럼비아 대학교 영화학과장인 인터뷰어를 도발한다. 무슨 문제가 있냐니까, 영화는 ‘무엇보다도, 2차원’이라고 대답한다. - 125, 128쪽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우선은 자신이 예측 가능한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탐정의 눈으로 자신의 일상을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조금씩 변화를 주는 것이다. 출근길을 바꾸고 안 먹던 것을 먹고 안 하던 짓을 하며 난데없이 엉뚱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점차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 되어갈 것이다. 이런 엉뚱한 연습에서 얻어지는 부산물도 있다.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감수성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무심하게 내버려둔 존재, 가장 무지한 존재가 바로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 - 184, 185쪽

한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데에서 좀더 나아가야 한다. 보고 들은 후에 그것에 대해 쓰거나 말하고, 그 글과 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 접하지 않고서는, 다시 말해, 경험을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타자와 대화하지 않는다면, 보고 들은 것은 곧 허공으로 흩어져버린다. 우리는 정보와 영상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뭔가를 ‘본다’고 믿지만 우리가 봤다고 믿는 그 무언가는 홍수에 떠내려오는 장롱 문짝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우리 정신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다. - 208, 209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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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토익 만점 수기 - 제3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심재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책장에 꽂혀 있는 노란색 표지가 눈에 띄었다. 거기에 촌스러운 글씨체로 쓰여진 제목을 보고는 이색적이라고 생각했다, '만점 수기'를 소설로 낸다는 것 말이다. 도대체 토익 만점 수기라는 주제로 어떤 이야기를 펼쳐낼 수 있을 것인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적어도 토익 만점을 예찬하거나 나는 '토익 공부를 이렇게 했다'라는 평범한 노하우 따위를 소설화 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기대했다. 오히려 토익이 지배하는 젊은이들의 현실을 약간 비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기대를 하며 책을 펼쳤다. 그리고 그 기대는 어느 정도 맞은 것 같다.   

한국 대학생들처럼 영어에 스트레스를 받는 이들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일상 생활에서 쓸 일도 없고, 취업을 해서도 극히 일부에게만 필요한 영어 능력이라는 조건은 모든 취업자들 앞에 공통적으로 놓인 '허들'이 되어버렸다. 학교, 도서관, 커피숍과 같이 젊은 이들이 다니는 모든 장소에서 토익/토플과 관련된 책을 볼 수 있는 것이 전혀 낯선 현상이 아니다. 어느 학교에 다니든 무엇을 전공하든 토익은 삶의 필수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우선 기본은 갖추어야 지원이라도 해 볼 수 있다. 우리 사회가 미국에 완전히 종속되었다고, ETS의 돈벌이에 농락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영어가 아닌 다른 스펙으로도 취업이 가능하다고, 이런 상황을 비판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유용할 것인가. 또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적용되는 이처럼 견고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가.

이 소설은 토익 590점이라는 점수에 어디 한 군데도 제대로 지원해볼 기회도 찾지 못한 주인공이 남들보다 늦게 호주 브리스번으로 영어 공부를 하러 떠나면서 겪게 되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만약 그가 평범하게 어학원을 다니면서 열심히 노력하여 영어 능력을 향상시켰다면 별다른 이야기 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지만, 생활 자체를 어학연수 겸 여행삼아 머물기로 한 주인공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황당한 사건들(자발적 인질이 되어 마리화나 농장에서 숙식하며 영어를 배운다거나, 평양냉면만 먹는 기이한 외국인에게 우연히 한국어 강습을 하게 된다거나, 완벽한 발음을 갖춘 전적 토익 성우 부부를 만나기 위하여 바나나 농장의 일꾼을 하는 등)과 그 사건들을 겪는 중에 확인되는 토익 만점을 향한 주인공의 끈기와 집념은 웃음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자아내게 한다. 

목차도 독특하다. 리스닝 컴프리헨션, 토익 리스닝 대해부, 보통이 아닌 발음, (바나나만 파는 게 아니실 텐데요), 토익 완전정복이라는 총 5개의 장에서 주인공이 토익, 특히 비중을 많이 차지하고 있는 리스닝 해결을 위해 어떤 전략을 짜냈는지에 대한 흐름으로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토익을 위한 공부 계획이나 공부 방법의 순서를 보여주고 있지만, 각 장을 채우고 있는 에피소드에 대응하는 주인공의 공부 방식은 황당하다 못해 기발하기까지 하다. 눈 앞에 그려지는 상황을 리스닝 Part 1에 맞추어 (a), (b), (c), (d) 네 개의 보기로 바꾼다거나, 보기를 만들면서 함정을 만들어 스스로를 출제자의 시선과 일치시킨다거나, 외국인과의 대화를 Part 2에 맞춘다거나, 외국인들끼리의 대화를 듣고 Part 3의 문제를 연상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호주에서의 평범하지 않은 경험들은 결과적으로 주인공의 영어 능력을 향상시키게 된다. 이미 같이 사는 외국인들이 인정할 정도로 충분한 의사소통능력을 지녔음에도 805점 이라는 모의테스트 점수에 충격을 받고 가출을 하여 전직 성우들의 집에서 잡일을 해서라도 보다 정확한 발음의 영어를 배우겠다는 주인공의 집착에 외국인 친구는 “도대체 영어를 얼마나 잘해야 그 나라 국민이 되는 거야?” 라며 의아해 한다. 정작 영어가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테스트의 증표가 되어버린 이 나라에 대한 따가운 일침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그렇게 고대하던 토익 만점을 받고 "야, 요즘 토익 만점은 ‘나 눈 두 개 달렸소’하는 것과 같아"라고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런데 그 말을 하려고 보니 막상 잃은 것이 있다. 주인공의 성취에 마냥 기뻐하며 웃을 수만은 없는 이유이다. 그렇게 해서까지 이루려고 했던 것 혹은 그렇게 밖에 이루어 낼 수 없는 것이 고작 영어 점수라는 현실이 씁쓸하기도 하다. 소설에서는 다소 극단적으로 그려지긴 했지만, 무언가를 얻기 위해 무언가를 잃는 것이 비단 이 소설의 주인공만은 아닐 것이다. 스펙의 대명사인 토익을 추구하면서 우리가 잃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토익 문제집과 영자 신문, 늘 귀에 꼽고 다니는 리스닝 파일로 무장한 우리는 만족할 점수를 얻게 되기까지의 삶의 공백을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 것일까.

소설의 말미. 드디어 입사 면접을 보기 위하여 면접관들 앞에 선 주인공의 모습은 예전과 달리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좋은 배경과 뛰어난 스펙으로 무장된 다른 지원자들보다 당차고 강한 인상을 풍기기까지 한다. 이런 그의 모습이 토익 만점으로 얻은 자신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가 과거와 남들과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택한 토익 공부가 영어가 아니라 영어를 곁들인 삶 자체였기 때문이다. 정여울 작가의 해설처럼 호주에서의 경험은 그가 스스로 꿈꾸는 모습을, "‘두 눈 달린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토익 점수를 올리긴 하지만, 결코 ‘토익스러운 삶’에는 길들여지지 않는 것"으로 완성시킨 것인지도 모르겠다.

덧. 책 말미에 실린 정여울 작가의 작품해설은 정말 탁월하다.

"그건 ‘캐첩통 이데올로기’에 빠졌기 때문이야. 한번 이데올로기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지."
스티브가 말했다. 입에서 연기가 폴폴 새어나왔다.
"인간의 용도는 뭐라고 생각하나?" - 12쪽

"도대체 이 모기들은 뭣 때문에 있는 건가." 나는 중얼거렸다. 머릿속에서 ‘what are these mosquitoes for?’라는 문장이 뒤따랐다. 여덟 살짜리의 문장이다. ‘모기가 뭣 때문에 있냐?’니. 순수하다면 순수하고, 유치하다면 유치한 질문이다.
영어로 사고하면 이 점이 쓸 만하다. 천진무구한 질문이 스스럼없이 나온다. 어린애의 시각으로 세상을 다시 보게 된다. 머릿속에 낕 때와 오물이 벗겨지는 것이다.
지금 내 나이에 순진무구한 사고를 하기란 불가능하다. 신축 아파트를 보면 "분양가는 얼마일까"를 생각하고, 물고기를 보면 "회쳐 먹을 수 있을까"를 궁리한다. 소와 돼지를 보면 스테이크나 햄버거를 떠올린다. 데이트 중인 커플을 보면 "같이 잤군" 하며 이상한 상상을 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 109쪽

한국어에 없다고 이 세상에 정말 없는 건 아니다. 한국어로만 사고하는 한 그것을 깨우치기란 대단히 어렵다. - 110쪽

다른 빗방울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엔 짠맛이 난다. 보나마나 이건 아버지의 눈물.
2년 전, 앞마당에서 기도하며 흘린 눈물이라고 추정된다. 아버지가 남몰래 우셨구나, 나는 깨닫는다. 아버지의 눈물은 구름이 되어 지구를 열세 바퀴 돌다가 지금 내게 떨어졌다. 그 빗물 맛을 좀더 음미해본다. 아버지에겐 식도염이 있구나, 나는 분석했다.
나는 빗속에 우두커니 서 있다. 빗방울은 저마다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걸 깨닫는 건 신기했지만, 각 빗방울들이 자신의 과거를 떠들어대니 조금 피곤했다. - 146쪽

우리는 함께 빗방울의 사연을 들었다. 어느 빗방울이건 과거가 있다. 모두 비가 되기 전에 사연 많은 액체였던 것이다. 한때 강물이었던 놈이 가장 흔하다. 눈물, 침, 피, 심지어 오줌이었던 빗방울도 있다. 스티브와 나는 입을 벌려 그 빗방울들의 맛을 보았다. - 147쪽

그쯤에서 토익에 대한 비판은 그만뒀다. 그들과 논쟁을 벌일 마음은 없다. 토익시험은 정말 쓰레기인가. 미국인들 돈벌이 수단인가. 잘 모르겠다. 그들의 속내를 떠보기 전에 내 속부터 떠볼 일이었다.
990점을 생각하면 내 가슴은 벌렁벌렁 뛴다. 토익위원회에게 전형료를 갈취당한대도 상관없다. 2년 뒤에 성적이 말소되어도 상관없다. 단 한 번만이라도 990점을 따보고 싶다. 토익의 위대한 점은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 일종의 스포츠다. 모든 수험생들을 목마르게 해서 끝없이 달리게 한다. - 170쪽

"그것 참 이상하군. 너처럼 영어를 잘하는 어학연수생을 본 적이 없어."
"아냐. 부족해. 많이 부족해."
"한국이란 나라가 정말 궁금하군."
스티브는 말했다. "도대체 영어를 얼마나 잘해야 그 나라 국민이 되는 거야?"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 208쪽

안방에서 숨소리가 새근새근 들려온다. 중간 중간 호흡이 약해졌다. 흡, 하고 숨이 끊기는 때도 있다. 걱정이 되어서 문을 열려고 하면 다시 숨이 이어졌다. 정말 실날같은 호흡이었다. 나는 생닭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부엌으로 갔다. 닭을 수돗물에 헹궜다.
목이 잘리고, 내장도 다 빠진 생닭.
그 물컹한 몸통을 오래도록 주물렀다. 왠지 아버지를 목욕시키는 기분이었다. 욕탕 안에서 "이런 인생밖에 못 살았다"라고 아버지가 말하고, 나는 아버지의 겨드랑이를 닦아주는 미래가 눈앞에 그려졌다. 기왕이면, 떳떳한 사회인이 되어서 아버지의 겨드랑이를 닦아주고 싶다. - 249쪽

야, 요즘 토익 만점은 ‘나 눈 두 개 달렸소’하는 것과 같아.
나는 후배에게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렇게 말하면 멋있어 보일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 268쪽

성공학이나 처세술로 상징되던 ‘자기계발(self-development) 인력’은 이제 훨씬 강력하고 체계적이며 집단적인 관리를 요구하는 ‘자기계발하는 주체(self-empowering subject)’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사회분위기가 강요하는 허구적 자아 이미지이지만 개개인들이 그 강력한 상징조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이제는 너무도 절박한 ‘현실’로 굳어져가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토익 점수로 상징되는 스펙은 곧 인권지수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토익 점수가 만점 정도는 되어주어야 ‘눈이 두 개 달린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자조 섞인 농담은 더 이상 농담이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이 청년에게 너무도 절박한 과제로 다가오는 토익 점수 올리기는 그의 ‘잃어버린 남성성’을 되찾는 방식이기도 하다. 낮은 토익 점수로는 취직은커녕 사람구실도 할 수 없어 쫓기듯이 한국을 떠난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토익 점수가 아니라 ‘살아간다는 일’에 대한 자신감의 회복이다. - 282, 283쪽(정여울, 작품해설)

이 작품에서 ‘토익’은 인간의 능력을 점수로 환산하고 인간의 권리를 등수로 환산하는 세계의 알레고리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 청년이 꿈꾸는 자신의 모습은, ‘두 눈 달린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토익 점수를 올리긴 하지만, 결코 ‘토익스러운 삶’에는 길들여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일루미나티를 조심해!’라는 요코의 마지막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 296쪽(정여울, 작품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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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개인적 체험>외에는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읽어보지는 않았으나, 그가 몇 안 되는 존경할만한 일본인 중 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왠지 모르게 내 머릿속에 계속 남아 있었다. 그것은 내가 딱 한번밖에 읽어보지 않은 그의 책이 무척이나 감동적이서라거나 그가 단지 노벨상을 받은 유명한 문인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사실은 장애인 아들을 데리고 살아가는 평범한 아버지여서 일수도 있고, 천황의 훈장을 거부한 소신 있는 지식인이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일본사회에 대한 비판을 유지한 채 지속적으로 평화를 주장하는 양심적 문인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저자가 오에 겐자부로여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내 눈을 끌어들인 것은 책의 제목이었다. '읽는 인간(요무 닝겐)'이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그 표현이 참으로 간명하고 적확하다고 생각했다.

 

‘책벌레’, '간서치', '호모 부커스' 등 책을 읽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여러 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말들은 어쩐지 내게 바로 흡수되지 않았다. 나는 책을 갉아먹는 것과 읽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며, '바보'일 수는 있겠지만 이덕무 처럼 책에 미쳤다고 할 정도는 아니고, 나를 가장 일반화 할 수 있는 학명 앞에 '북(책)'이라는 용어를 붙일만큼의 허세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그동안 내게 제대로 흡수되지 않던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마치 그림처럼 내 눈앞에 그려졌다. 아, 그렇구나. 나는 책벌레도 간서치도 호모 부커스도 아니지만, 그냥 '읽는 인간'일 수는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부록을 포함하여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유년시절에 간직했던 책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을 한다. '읽는 만큼 성장한 나날들',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가장 아름답고 정확한 문체를 찾아서', '나를 지켜낸 책 읽기'라는 소제목들을 통해서도 그가 책과 자신의 삶을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을 시키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2부에서는 단테의 <신곡>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자신의 마지막 소설인 이른바 '삼부작'에 대한 배경을 풀어놓는다.

 

이 내용들은 모두 준쿠도 서점의 이케부쿠로 본점에서 6개월간 한시적으로 열린 '오에 겐자부로 서점'이라는 일종의 이벤트에서 강연한 내용을 취합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별칭에 맞게 그 서점에서는 저자가 읽었던 책들을 전시해놓고 다른 이들이 저자의 서재 일부를 엿볼 수 있도록 기획한 것 같다. 물론 이 모든 책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저자는 자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책 몇 권을 강의 주제로 선택하였고, 그 내용이 이 책에 소개되어 있다. 그렇기에 독자는 이 책을 서평으로서가 아니라 독서에 대한 개인의 회고로 맞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대중을 위한 강연이라고 해서 그 내용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고전에 대한 내 무지로 인해 몇몇 부분은 읽기 어렵거나 지루한 부분이 있었다. 몇 장을 넘기지 않아 <일리아스>, <오디세이아>가 나왔을 때는 '아, 이제 전형적인 고전 목록이 시작되는가?' 하면서 책에 대한 기대가 상당부분 줄어들었다. 적어도 오에 겐자부로에게는 다른 책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에. 그러나 명작이 어디 그냥 일부 사람들에게만 명작이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저자도 결국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를 피해갈 수 없었다는 평범함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홉 살이라는 어린 나이의 그가 다른 읽을 책을 다 소실하고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던 중 "그래 좋다,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는 한 줄의 대사를 자신의 삶의 지표로 삼았다는 부분은 놀라웠다. 어쩌면 아직 세상도, 지옥도 알 수 없는 나이에 신뢰를 위해서 기꺼이 두려움을 감수하겠다는 마음가짐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은 그가 지난 세월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단 한 마디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어서 <포 시집>이나 <오든 시집> 같은 책에 영향을 받은 일화가 소개되는데 내가 읽어보지 않은 것이라 그가 자아를 형성하던 시절에 시에 대한 감수성이 어떻게 그의 삶을 이끌었는지를 짐작하기란 쉽지는 않았다.

 

치열한 그의 독서기는 '재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번역본을 보고 원문과 대조하여 다시 읽는 행위를 통하여 그는 전신운동을 하듯 언어의 감각과 생각의 틀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동생에게 '사전을 공부하는 것이냐'라는 질문을 들을 정도로 단어와 문장에 깊숙이 천착하였던 모습에서 그가 그야 말로 ‘읽는 인간’임을 확인하였다.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가 되짚어본 지난날의 인생과 책의 밀접한 관련성은 그가 문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가 제시한 세 가지 연결고리, 즉 '배우기, 외우기, 깨닫기'야 말로 생활 속에서 글의 의미를 자연히 체득하게 되는 방법임은 분명한 것 같다. 렇게 그는 책을 통해 자신을 형성하였다고 말한다. 


나는 최근에 유행하는 '고전이 인생을 바꾼다'거나 '책이 삶을 바꾼다'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그들이 자신들의 책을 팔면서 제시하는 목록 또한 따라가며 읽지 않는다. 물론, 내 생각과 삶에 영향을 미친 책이 없지는 않을 것이나, 그들의 주장처럼 인생을 바꾸기 위해 또는 삶을 바꾸기 위한 목적으로 책을 읽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종교도 그렇지만 독서 또한 무척 사적이고 은밀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같은 생각과 행동으로 누군가를 획일적으로 찬양하는 광분과 배타성이 끔찍하듯이, 공통되고 보편적인 책의 목록을 통하여 모든 이들이 유사한 공감을 느끼며 그들의 삶을 바꿔야 한다는 제안도 어찌보면 끔찍하다. 저 사람의 삶의 목록이 있듯이, 내 삶의 목록도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오에 겐자부로는 이 길고 (다소) 지루한 강연을 통해서 바로 그 점, '인생을 통한 이해'를 이야기하고 있다.


추천사를 쓴 어느 유명인은 "이 책을 읽기 전에도 나는 오에 겐자부로의 독서법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기로 스스로 선택했다"고 하지만, 나는 나의 이 어수선한 독서에서 어느날 무심코 책장을 넘기던 중 너무나도 우연히 한줄기 빛 같은 운명적인 문장을 만나기를 기다린다. 읽는 행위로 어느 정도 채워질 수 있는 삶일 수는 있겠지만, 읽는 대로 살기에, 그래서 읽는 것과 사는 것의 연결을 말하기에는 아직 나는 턱없이 부족한 까닭이다.

"All right, then, I`ll go to hell(그래 좋다,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 지옥으로 가도 좋으니 짐을 배신하지 않겠다. 제가 영향을 받은 것은 이 한 줄입니다. 사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기 시작한 때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연달아 돌아가신 해라, 저도 지옥이라는 곳이 가까이 있을 거라고 상상했던, 그런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좋다,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 아이들도 이런 결심을 해야 하는 때가 있구나. 나도 이렇게 살아야지, 평생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겠어. 저는 다짐했습니다. - 21쪽

되돌아보면요, 지금 제게 저만의 언어 감각, 아울러 제대로 된 미의식이 있다고 한다면, ‘이 풍경은 아름답구나’, ‘이 사람은 아름답구나’와 같은 생각들을 포함해 사회와 인간에 대해 지니는 견해 등 그 모든 것을 명백히 이 네 권의 책(<엘리엇>, <오든 시집>, <프랑스 르네상스 단장>, <포 시집>을 말한다)이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책을 찾는 일, 책과 만나는 일이며, 제가 발견한 책을 집필해준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 가운데 한 사람에게 실제로 가르침을 받은 것은 제 인생 최대의 행운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가장 처음 책들을 발견했다면, 그것들을 하나로 이어 기틀이 되는 평면을 만듭니다. 그 뒤에는 이 책들이 불러들이는 다른 책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죠. ‘이 책이 불러들이는 사람을 기다린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정말 그런 사람이 스승으로, 친구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런 감정도 있구나’, ‘이렇게 훌륭한 생각도 있구나’하고 책을 통해 느끼는 사이에 신기한 인물들이 나타납니다. - 32, 33쪽

책 한 권을 처음 읽을 때, 우리는 언어의 라비린스(labyrinth), 즉 미로를 헤매듯 독서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하지만 한 번 더 읽을 때는 방향성을 지닌 탐구(‘탐구’를 노스럽 프라이는 퀘스트(quest)라고 썼습니다)가 됩니다. 무언가를 찾아 나서서 그것을 손에 넣고자 하는 행위로 전환되지요. 그것이 rereading, 한 번 더 읽는 까닭입니다. - 38쪽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보를 얻는 것과 같은 레벨이 아닙니다(이 역시 살아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여기서는 죽은 지식의 집적을 말합니다. 대형 대학 강의실에서 열리는 지루한 개론 강의를 떠올려 주십시오). 책을 읽음으로써 책을 쓴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한 인간이 생각한다는 건 그 정신이 어떻게 작용한다는 것인지 알 수 있어요. 이를 통해 사람은 발견을 합니다. 지금 내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에 맞닥뜨리고 있는지 깨닫고, 결국은 진정한 나 자신과 만나는 것이 가능해지지요. - 50쪽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는 프랑스어를 읽거나 영어를 읽으면서 갖춰졌습니다. 외국어 텍스트를 읽으면서, 그것도 주로 사전에 의지해 읽어가면서(공부하는 제게 간식을 주러 온 여동생이 진지하게 물어보기도 했어요. "지금 얇은 책을 읽는 거야, 아니면 두꺼운 책... 그러니까 사전을 읽는 거야?" 하고요) 제 마음속 혹은 머릿속에, 그러니까 제 언어의 세계에 다양한 형태의 영어나 프랑스어 원서가 메아리쳤습니다. 그것을 일본어로 옮겨놓고자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정말 새로운 언어와 만나게 됩니다. 혹은 새로운 문장이 떠오르기도 하죠.
이런 식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외국어와 일본어 사이를 오가면서요. 이렇게 언어의 왕복, 감수성의 왕복, 지적인 것의 왕복을 끊임없이 맛보는 작업이,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새로운 문체를 가져다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대부분은 번역을 하게 되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소설을 썼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 소설의 세계가 시작되었던 것이지요. - 67쪽

이렇듯 외국어 책을 읽는 것과 일본어 소설을 쓰는 것이(완전히 다른 행위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여운을 남깁니다. 어떤 소설의 근본적인 톤, 음악으로 보자면 선율 같은 것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문체’라고 부릅니다. 소설의 스타일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며, ‘grief’라는 작은 단어 하나에서 문장으로, 이어서 작품 전체로 전개됩니다. 나아가 한 사람의 소설가가 지닌 인간을 바라보는 견해, 사고방식, 소설가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자세와도 이어지는 것이죠. 그것이 ‘문체’이며, 결국 우리는 이것을 읽어내기 위해 소설을 읽고 소설로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 82쪽

이니욘이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사마스라는 남자의 부인인데, 늘 한탄하는 사람, 서글픈 사람입니다. 그 이니욘이 부르는 노래 가운데 하나가 I am like an atom..., ‘나는 일개 원자와 같은 존재다.’ 블레이크는 신비로운 시에서도 이런 과학용어를 사용합니다.

A Nothing left in darkness; yet I am an identity: I wish & feel & weep & groan. Ah, terrible! terrible! ...

나는 일개 원자와 같은 존재다(세계 속의 일개 원자, 외롭다. 나는 그런 존재다). A Nothing,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암흑 속에서 잊히고 사라진다. 그다음이 엄청나죠, yet I am an identity... 요즘은 아이덴티티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데요, 나는 ‘하나의 개인으로 실재하는 자신’과 같다. I wish--- 나는 ‘무언가를 애타게 찾아 헤매고 바라고, 느낀다(feel) 울고(weep) 그리고 신음한다(groan). 그렇게 새카만 어둠 속에 홀로 남겨져, 두렵고(terrible), 두렵다’라는 시구. - 107, 108쪽

젊었을 때는 슬픔이 격렬합니다. 난폭할 정도로 말이지요.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슬픔도 온화해지고 고요해진다고, 실제로 마흔 대여섯 때부터 그렇게 느꼈어요. 그리고 에세이를 썼습니다. 하지만 저보다 나이가 많은 친구 하나가, "아니, 그렇지 않아"라고 편지에 써 보냈죠. "젊은 시절 격렬했던 슬픔은 분명 어느 연령이 되면 고요한 슬픔이 된다, 온화한 슬픔이 되어 내게 다가온다. 그것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 이번에는 고요해야 할 슬픔이 거꾸로 더 광포하고 격렬한 슬픔이 된다. 그렇게 역전되어 자네에게 돌아올 거다"라고 경고하는 편지였죠. - 120쪽

일본 불교의 지옥과는 다르죠. 불교의 지옥은 거기에 빠진 영혼이라 해도 구원을 받을 수는 있다고 합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거미줄>이라는 작품이 있지요. 지옥에서 꿈틀거리는 자들에게 거미줄을 내려뜨려주면 죽은 자가 그걸 잡고 올라옵니다. 올라오면 극락으로 옮겨갈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기독교의 경우, 한번 지옥에 떨어진 영혼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중세 사람들이 ‘제3의 장소’인 연옥을 발견했죠. ‘제3의 장소’라는 표현은 천국과 지옥의 이분법에 대한 타협점으로 생각해낸 것인데, 이건 당시 프로테스탄트가 가톨릭을 빈정거리며 한 말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연옥은 민중에게 크게 환영받습니다. 르 고흐는 연옥이 탄생하고 백 년이 조금 지나 단테라는 시적 천재가 나타났고, 그가 훌륭히 이를 묘사해준 것은 행운이었다고 썼습니다. - 138쪽

연옥의 섬 낮은 곳은 연옥의 산에 올라 자신을 깨끗이 할 여행을 떠날 사람들이, 고행에 들어서기 전에 준비 비슷한 걸 하는 장소입니다. 또한 산을 오르며 수행을 거듭하는 영혼들이 구원받기 위해서 산 자의 세계에 남겨진 가족이나 친구, 지인들의 열렬한 기도도 필요한 듯합니다. 그들이 그 사람을 구원해달라고 신께 빌면, 거기에 자신의 노력이 더해져 마침내는 천국에 오를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 138, 139쪽

보통의 독서인으로 살아갈 경우엔 그다지 많은 고전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평생에 걸쳐 읽고자 하는 고전을 젊은 시절에 발견해두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건 자신 있게 드리는 말씀인데, 정신 차리고 지속적으로 책을 읽어나가면, 저절로 고전이 한 권, 두 권, 그것도 일생에서 아주 소중한 무언가가 될 작품이 여러분에게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그건 정말 신기할 정도예요. 어렵사리 만난 고전이 손에서 멀어져 갈 때도 있습니다. 제 경우엔 십 년이나 십오 년쯤, 무엇보다 소중한 고전을 읽지 않고 살았던 날도 가끔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기회가 생겨 그 책이 다시 제게 돌아와요. 책을 읽는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의 관계가 무척 신기하고 재미있다고 여겨지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 153쪽

여기서 잠깐, 제 ‘인생의 습관’이 된 독서의 기본 원리를 밝혀두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즈음, 야나기다 구니오라는 민속학자의 책을 읽고 그 뒤로 제가 쭉 해온 방법인데요, ‘배우기, 외우기, 나아가 깨닫기’입니다.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배우는데, 이 ‘배우다(まなぶ, 마나부)’라는 단어는 옛말인 ‘흉내 내다(まねぶ, 마네부)’와 어원이 같아요. 선생님 말씀을 흉내 내는 것에서 시작하죠. 그렇게 습득한 것을 실제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자전거 타는 걸 몸으로 기억하듯 제대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점차 타인에게 배워서 새로운 걸 알게 되는 단계를 넘어, 스스로 의미를 파악하는 것도 가능하게 됩니다. 그것이 ‘깨닫기’입니다. - 197쪽

저는 이 세 가지 단어의 연결 고리가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실제로 무슨 책을 읽든지 ‘배우기, 외우기, 깨닫기’를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문학 책을 읽으면서도 특히 시가 어렵다고 느낄 때면, 우선 그걸 외우기로 했습니다. 이토 시즈오의 어려운 시 역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한 줄 한 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생활 속에서 반복적으로 시를 중얼거리는 동안,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그 의미를 자력으로 깨닫게 된 것이죠. - 197, 198쪽

제가 소설 쓰기를 그만두려고 했던 건, 제 소설이 점차 역사와 현실을 등지고, 말하자면 자기류의 신비주의에 빠져드는 게 변변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화와 제국주의>는 그런 저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해준 책입니다. 소설 쓰기를 그만둔 것을 계기로, 문학적인 것과 일체 연을 끊을 생각이어서 다른 분야의 책만 읽고 있었는데, 사이드의 <문화와 제국주의>는 풍부하고 폭넓으며 우수한 세계문학 작품의 전망을 통째로 드러내는 책이었어요. 젊은 시절부터 문학에 푹 빠져온 저로서는,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저의 문학 서적에 대한 갈증을 채워준 책이기도 했습니다. - 219쪽

저는 일본의 전쟁 전후의 민주주의 체계의 사회에서 보수나 혁신을 떠나서 정치가, 정치 활동가, 학자와 같은 사람들이 훌륭하고 위대할수록 성직자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얼굴을 상실한 예를 많이 봐왔습니다. 그렇기에 사이드가 언제나 세속적인 인간임을 강조하는 것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의장이었던 아라파트가 UN에 데뷔했을 때만 해도, 사이드는 그를 도와 헌신적으로 일하는 동지였지만, 오슬로 합의 등을 계기로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과정에는(아라파트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인간이었다는 증언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 지도자가 어느새 현세적인, 세속적인 인간이 ‘아닌’ 사람이 되어버린 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저는 생각합니다. - 224, 225쪽

사이드는 ‘자신이 자연인가 역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비코나이븐 할둔의 말처럼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하며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 ‘자기 형성(selfmaking)’이 역사의 기본이라 믿고, 역사는 인간 노동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며 그 편에 서겠노라고 말합니다.
"저 자신이 뼛속 깊이 세속적, 현세적인 인간이기에"라고 사이드는 자신이야말로 세속적인 인간(secular person)임을 강조합니다. - 225쪽

사이드는 만년에, 자신이 사라져간다는 생각에는 끌려가지 않았습니다. 사이드는 계속해서 자기 형성을 해나가길 바랐어요. 그래서 만약 우리가 인생을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눈다고 한다면, 백혈병진단을 받고 12년이 지난 2003년에 예순일곱 살로 죽었을 때 그는 여전히 ‘중기’였고, 자신이 ‘만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나는 언제나 남겨지는 것들에 흥미를 가져왔다"고 사이드는 말합니다. "나는 말로 표현된 것과 표현되지 않는 것 사이의 긴장감에 흥미가 있다. 분명하게 침묵하는 것 사이의 긴장감에." 그런 의미에서 침묵은 그 자체가 스타일의 한 양상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단순하지는 않다"고 사이드는 미발표 노트에 썼습니다. "우리는 메시지와 신호의 사람들이다"라고 그는 팔레스타인인에 대해 말합니다. 과묵하고 간접적인 표현으로 그가 음악의 절제라고 부르는 부분은 ‘암시를 포함한 침묵’이니, 우리에게 무엇보다 큰 기쁨과 아울러, 정치적인 것이나 그 밖의 희망이 없는 가운데 희망의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 232쪽

나아가 "저 불확실한 고향 상실의 영역"에서 "우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에 대한 곤란함을 손에 쥐고, 어찌 되었든 도전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감각을 드러냅니다. - 232쪽

긴 안목으로 보면 희망은 있다. 저는 이에 찬성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그 긴 시간이 언제까지나 이어져 있고, 우리는 그전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버렸습니다. "언젠가는 분명 죽겠지만, 그건 상대적인 것이다. ‘후기 스타일’의 성과는 죽음 뒤로 던져두는 것도 가능하다. 눈앞의 작업을 대단원의 막으로 간주하고 긴박하게 이를 해낸 예술가들의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 역사의 가장 훌륭한 부분을 떠받치고 있는 건 아닐까?" 에드워드 사이드의 그러한 확신에 그야말로 연대감과 따뜻한 감정, 말하자면 다시금 우정(優情)을 느끼며, 저는 저의 ‘만년’의 시간을 살아가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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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7-29 15: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 인생을 즐겁게 해주고,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은 동의하지만, 인생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은 믿지 않아요. 독서를 하면서 생각의 변화가 있겠지만, 그것이 삶 전체를 바꿀만한 큰 영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요인은 다양합니다. ‘책이 삶을 바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요인을 간과하고, 마치 책이 만능인 것처럼 얘기합니다.

붉은눈 2016-07-29 16:03   좋아요 1 | URL
동감입니다. 책의 영향력을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삶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 중에 책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서는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삶의 파편 중 하나일 뿐이지요. 그런데 어설픈 독서가들이 책의 효용성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삶과의 일치, 인생의 변화, 심지어 성공을 들먹이는 것 같습니다.
 
콰이어트 Quiet -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힘
수전 케인 지음, 김우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에 한번 읽다가 중간 정도에서 멈추었던 책을 다시 뒤적거리며 읽는다. 생각해보면 요즘처럼 내가 결국 나일수 밖에 없음을 절감하는 시기도 없다. 소심하고, 유약하고, 우유부단하여, 무슨 일을 결정하기 전에는 홀로 생각에 잠겨야 할 절대적인 시간을 필요로 하는 모습 말이다. 군대에서 성질을 버려놓아서 한 번, 회사를 이직하면서 또 한 번,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는 계기가 있어서 그동안의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살아보고자 무척이나 노력했었다. 웅얼대는 목소리를 힘있게 바꾸고, 게슴츠레한 눈을 크게 뜨고 미간에 힘을 주며 다니고, 남에게 욕을 먹더라도 내 분명한 의견을 강변하며, 조금 더 강해보이기 위해 몸도 만들고자 했었는데, 그랬던 것들이 '변화'이 아닌 '가장'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약한 것으로 취급되는 내향성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허세였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내 올바른 모습을 파악하는데 이 책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될까? 라는 것이 책을 다시 펴게 된 동기이다.


이 책은 총 4부 11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부의 제목은 그다지 와닿지가 않아, 차라리 세부 장의 제목을 토대로 전체 구성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외향성이 어떻게 우리 문화의 이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는가에 대한 운을 띠우고(1장),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의 신화와 그 신화를 양산하고 있는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수업과 학생들을 분석하면서(2장), 사실은 이러한 팀워크가 개인이 홀로 작업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힌다(3장). 그러면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간다. 외향성은 '선(善)'인가? 예상했겠지만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외향성과 내향성이라는 기질은 불변의 천성인지에 대한 실험을 소개한다(4장), 그리고 특정 상황에서 내향성 기질을 넘어선 사례를 제시한다(5장). 앨리너 루스벨트의 섬세함이 완성시킨 루스벨트의 정치적 성공 사례를 통하여 내향성의 긍정적 면모를 탐구한다(6장). 이 내향성의 기질을 가진 사람에는 워런 버핏도 포함된다. '오하마의 현인'이라 불리는 이 고전적 투자가는 데일 카네기 코스에 참가하고 나서야 비로소 대중 강연을 할 수 있게되었다고 한다(7장). 


후반부에는 동양과 서양에서의 외향성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제시한다(8장). 동양인에게 부족한 외향성이 뛰어날 결과를 드러내는 분야를 살펴보면서, 간디의 예를 통하여 부드러운 힘에 대한 막대한 영향력도 검토한다. 한편, 내향적인 사람이 외향적으로 행동해야 할 때가 있음을, 그리고 이것이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내향성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추어 외향적 언행의 유인을 제시하고, 이런 행동으로 인한 과잉이 발생하지 않기 위하여 어떻게 다시 평소의 자신으로 되돌려 놓아야 하는지를 다룬다(9장). 결국 외향성과 내향성은 각각의 특성에 따른 소통의 선호가 있을 뿐이며, 이 상반된 성격의 조화를 위해서는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하는지를 제시하고(10장), 내향적인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함으로써 그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부드러운 힘을 긍정적으로 발현하도록 도울 수 있는지를 밝힌다(11장).


저자가 책 서두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외향성 지향의 시대에서 내향성은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열등한 것으로 취급받고 있다. 각종 스피치나 프레젠테이션, 회의석상에서의 언행이 곧 자신에 대한 +/- 평가가 된다. 혹시라도 수줍어하거나 머뭇거리며 어려워하는 기색이 보이면 그 자체로 능력에 대한 평가에도 감점이 생긴다. 발언에 대한 내용이 아닌 태도로 이미 긍정/부정에 대한 결론이 나기도 한다. 목소리를 높여야 의견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내향성을 숨기고 외향적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 어찌보면 우리사회에서도 하나의 생존방법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성격에 맞지 않는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사교적인 멘트로 시작하여 확신에 찬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삼다보면, 원래 그렇지 못한 내향적인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거나 세뇌시키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말 그래야 하는가? 내향성은 상대적으로 열등한 사람들이 타개해야 할 어떤 부족한 기질 같은 것인가? 세상의 3분의 1은 내향적인 사람들임에도?


저자는 한마디로 "자기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된다"는 결론을 제시한다. 초반부에 제시된 이 결론이 내겐 무척 위안이 되었다. 그 무엇을 위해서도 스스로를 바꿀 필요가 없다는 한 마디는 얼마나 큰 위안인가. 사회가 전반적으로 외향성을 추구하도록 편향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로도 내향적인) 저자는 내향적인 사람들의 입장에서 외향성과 내향성을 비교.분석하고 '외향성=리더십'으로 고정화 되어 있는 관념의 껍질을 벗겨내려고 한다. 이를 위해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생각들을 하나하나 반박해 나가는데, 강변이나 달변이 반드시 좋은 아이디어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리는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다거나, 팀워크나 브레인스토밍이 사실은 그다지 효율적이지도 않으며, 홀로 일한 것에 대한 결과와 크게 차이가 없다는 것을 분석함으로써, 외향성과 내향성의 차이는 근본적인 우열이 아닌,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의 민감도임을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오히려 어떠한 업무에 있어서는 내향성이 오류를 줄이고, 과도함을 억제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런 외향성과 내향성은 타고난 기질임은 분명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내향적인 사람이 매우 외향적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것도 가능하다. 


내향성에 대한 부정적 관점은 내향적인 사람이 비사교적이거나 부적응자라는 고정된 인식들은 생산해낸다. 나도 20대에는 종종 스스로를 '사회부적응자'라고 칭하며 타인과의 관계를 거부했던 기억이 난다. 당연히 내가 속한 조직에 정을 붙이고 생활할 수가 없었는데, 이러한 인식들은 내향적 개인들이 회피적인 행동을 하게끔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외향적/내향적 사람들이 모두 다 사회적임을, 타인과 친밀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음을 주장한다. 이러한 저자의 논리는 주말에 친구를 만난다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으며,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쉽사리 피로함을 느끼는 성격이지만, 페이스북에는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구체적으로 게시하는 나 같은 사람을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분석이기도 했다. 나 스스로도 가끔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피곤을 느낀다'면서 페이스북 활동을 하며 여러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이율배반적인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웠는데, 이 책을 통하여 내향적인 사람들이 직접 대면을 하고 대화를 하는 것보다 인터넷이라는 하나의 간접적인 장을 통하여 글로 표현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결론적에서는 저자는 독자들에게 삶에서 적절한 조명이 비치는 곳으로 가기를 권하고 있다. 그곳은 브로드웨이의 스포트라이트일 수도 있고 등불을 켠 책상일 수도 있다. 타고난 장점(끈기, 집중, 통찰, 섬세함)을 활용하여 자신에게 어떠한 장소가 더 적합한지를 선택하고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특히 내향적인 사람이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는 외향적인 일(공개 강연, 인맥쌓기 등)을 해야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는 그것을 회피하지 말고 받아들이기를 권하고 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자신에게 해줌으로써 지치거나 소진되지 않도록 관리할 것을 권하고 있는데, 자신의 기질에 맞는 적절한 '회복 환경'을 통하여 노출된 자신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외향성과 내향성에 대하여 이론적이기도 하지만 실증적인 면이 상당히 많이 제시되어 있는 이 책은 내향적인 내 모습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들을 어느 정도 제거하는데 분명 도움이 되었다. 또한 단순히 외향성과 내향성의 공존이나 생각의 다양성의 인정과 같은 추상적인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사례를 통하여 다른 내향적인 사람들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으며, 어떻게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가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도 제공하고 있다. '자기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여라'라는 말이 위안이 될 정도로 획일적인 사회에서 스스로의 내면을 부정하면서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다른 위안이 되는 여러 요소들을 찾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이 책을 통하여 스스로의 기질과 특성을 깊이 관찰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자신의 모습을 지키기 위한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내향적인 사람들이 자신마저 속이는 것도 납득이 간다. 내가 ‘외향적 이상’이라고 이름붙여본 신념 체계에 따라 우리는 살고 있다. 이상적인 자아란, 사교적이고 지배적이며 스포트라이트에 익숙한 외향적인 존재일 거라고 생각하는 만연한 믿음이다. 전형적인 외향인은 숙고보다는 행동을, 의심보다는 확신을 좋아하고, 조심하기 보다는 위험을 무릅쓴다. 틀릴 위험이 있을 때조차 빠른 판단을 선호한다. 팀으로 일할 때 능률이 높아지고 다수의 사람들과 어울린다. 타인의 개성을 최대한 존중할 줄 안다고 자부하지만, 막상 알고 보면 한 가지 유형만 찬양한다. 자신을 남들에게 드러내는 데 익숙한 유형 말이다. 물론 차고에 회사를 차린 기술적으로 재능 있는 사람들이라면 성격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겠지만, 그것은 드문 예외일 뿐 일반적인 사례가 아니며, 그런 사람을 용인하는 마음도 어마어마하게 부유하거나 그럴 만한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한다. - 20, 21쪽

내향성은 (그 친척뻘인 섬세함, 진지함, 수줍음과 함께) 이류로 여겨지고 있는 성격 특성으로, 실망스러운 일 아니면 병적인 것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 ‘외향성 이상’을 떠받드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내향적인 사람은 남자들의 세상에 사는 여자처럼,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는 특성 때문에 무시당한다. 외향성은 대단히 매력적인 성격 유형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동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억압적인 기준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다. - 21쪽

그래도 오늘날의 심리학자들이 동의하는 몇 가지 중요한 지점은 있다. 예를 들어,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외부 자극의 수준이 다르다. 내향적인 사람은 훨씬 적은 자극, 그러니까 가까운 친구와 와인을 한잔 홀짝이거나, 가로세로 낱말 맞추기를 풀거나, 책을 읽는 정도가 ‘딱 맞다’고 느낀다. 반면 외향적인 사람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가파른 슬로프에서 스키를 타고, 오디오 볼륨을 높이는 등 좀 더 강력한 자극을 즐긴다. 데이비드 윈터(David Winter)라는 성격 심리학자는, 왜 전형적인 내향성의 사람이 유람선에서 파티를 벌이느니 해변에서 책을 읽으며 휴가를 보내고 싶어하는지 설명한다. "타인이라는 존재는 매우 강한 자극이다. 위협, 두려움, 도주,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사람 100명은 책 100권이나 모래알 100개와 비교하면 매우 자극적이다." - 31, 32쪽

여러분이 이 책에서 가져갈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통찰이 있다면, 나는 그것이 ‘자기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된다’는 느낌이라면 좋겠다. 장담하건대 그런 관점은 우리 인생을 바꾸어놓을 수 있다. - 38쪽

‘애빌린으로 가는 버스’ 일화는 행동을 시작하는 사람이 누구든 그 사람을 따라가려는 성향을 보여준다. 그 행동이 무엇이건 상관없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역동적인 연사에게 권한을 주는 경향이 있다. 매우 성공한 한 벤처 자본가는 나에게, 자기가 젊은 기업가들의 사업 아이디어를 주기적으로 듣는데, 그 친구들이 훌륭한 프레젠테이션 기술과 진정한 리더십을 구분하지 못해서 속이 터질 때가 많다고 말했다. "걱정스럽게도 말은 잘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갔지만 좋은 아이디어는 없는 사람들이 있어요. 잡담 능력과 재능은 혼동하기가 아주 쉽죠. 어떤 사람이 프레젠테이션도 잘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면 그런 특성 때문에 보상을 받아요. 왜 그런 걸까요? 그런 특성도 물론 중요하지만, 우린 프레젠테이션에는 지나치게 무게를 싣고 내용과 비판적 사고에는 별로 무게를 싣질 않고 있어요." - 92, 93쪽

그랜트는 무엇이 문제인지 알 것 같았다. 첫째, 성격과 리더십에 관한 현재의 연구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외향성과 리더십 사이와 상관관계는 미미했다. 둘째, 이런 연구들은 실제 결과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좋은 지도자라고 느꼈는지를 토대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인식은 문화적 편견이 반영된 것을 불과할 때가 많다.
하지만 그랜트가 보기에 가장 흥미로운 점은 현재의 연구들이, 지도자가 맞닥뜨리게 될 다양한 상황들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특정 조직이나 상황은 내향적인 지도자 유형에 잘 맞는 반면 다른 상황은 외향적인 지도자 유형에 잘 맞을 수도 있는데, 기존의 연구들은 이런 점을 구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98, 99쪽

직원들이 수동적이거나 능동적이라는 사실에 지도자들의 실적이 좌우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랜트는 내향적인 사람들이 능동적인 사람들을 이끄는 데 유달리 잘 맞는다고 지적한다. 상대의 말을 듣고 상황을 지배하는 데 무관심하다는 성향 때문에, 내향적인 사람들은 제안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시도해볼 확률이 높다. 이들은 사람들의 재능에서 도움을 받고 나서 더더욱 그들에게 능동적으로 행동하도록 독려하기 쉽다. 바꿔 말해서 내향적인 지도자들은 능동성이라는 선순환을 만들어낸다. - 100쪽

반면 외향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데 몰두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좋은 아이디어를 놓치고 사람들이 수동성에 빠져들도록 할 소지가 있다. 프란체스카 지노는 말한다. "결국 지도자들은 말은 엄청 많이 하게 되고 사람들이 제시하려고 하는 아이디어를 전혀 듣지 않게 될 때가 많더군요." 하지만 영감을 주는 타고난 능력으로, 외향적인 지도자들은 수동적인 일꾼들과 함께할 때 훨씬 나은 결과를 보여준다. - 100, 101쪽

정말로, 연구 결과들을 보면 내향적인 사람들은 외향적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에 관한 깊은 사실들, 가족과 친구들이 보면 놀랄 만한 사실들을 온라인에 표현하고, ‘진짜 자신’의 모습을 온라인에서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하며, 몇몇 온라인 논의에 시간을 더 많이 쓰기 쉽다. 이들은 디지털로 소통하는 기회를 환영한다. 200명이 앉아 있는 강의실에서라면 절대로 손을 들지 않을 사람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2천 명, 아니 200만 명이 보는 블로그에 글을 쓰기도 한다. 낯선 사람 앞에서 자기를 소개하는 데 어색해하는 바로 그 사람이, 온라인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이 관계를 현실 세계로 넓히기도 한다. - 109쪽

내향적인 사람들의 창의성에 관해 그보다는 덜 명백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가설이 있다. 모두가 이 설명을 듣고 교훈을 얻을 수 있으리라. "내향적인 사람들은 홀로 일하기를 좋아하고, 고독은 혁신에 촉매가 될 수 있다." 영향력 있는 심리학자 한스 아이젱크(Hans Eyesenck)도 지적했듯이 내향성은 "눈앞에 있는 일에 집중하게 하고, 일과 무관한 사회적.성적 문제에 에너지가 흩어지지 않도록 방지한다." 바꿔 말해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테라스에서 술잔을 부딪치고 있는데 여러분 혼자 나무 아래에 앉아 있다면, 여러분 머리에 사과가 떨어질 확률이 더 높다. (뉴턴은 세계적으로 대단히 내향적인 사람에 해당한다. 윌리엄 위즈워스는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영원히 항해하는 마음/생각이라는 기이한 바다를 헤치며.") - 125쪽

협력 모형은,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에게서 배울 때 학습에 주인의식이 생긴다는 이론을 내세우는 정치적 진보 성향에 뿌리를 두지만 내가 뉴욕, 미시건, 조지아 주의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에서 면담한 초등학교 교사들에 따르면 그 방식은 기업계의 팀 문화에 따라 자신을 표현하도록 아이들을 길들이기도 한다. 맨해튼의 한 공립학교 5학년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교육 방식은 독창성이나 통찰력이 아니라 언어 구사력에 따라 사람을 존중하는 기업계를 따른 겁니다. 말을 잘해서 이목을 끌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하는 거죠. 능력이 아닌 다른 뭔가를 토대로 하는 엘리트주의입니다." - 129쪽

고독의 어떤 점에 그런 마법이 숨어 있는 것일까? 에릭슨에 따르면, 여러 분야에서 오직 혼자 있을 때만 ‘의도적 연습’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연습은 그가 보기에 탁월한 성과의 문을 여는 열쇠다. 의도적으로 연습할 때, 우리는 자신이 도달해야 할 정확한 지점을 알고 자기성과를 향상시키기 위해 애쓰며, 자신의 진전 정도를 점검하고, 그에 따라 방향을 조정한다. 이런 기준에 못 미치는 연습 시간은 덜 유용할 뿐 아니라 거꾸로 역효과를 낳는다. 기존의 인지 기제를 개선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하기 때문이다. - 134, 135쪽

‘의도적 연습’은 여러 가지 이유로 혼자 있을 때 가장 잘할 수 있다. 강한 집중력이 필요한데 다른 사람이 있으면 산만해질 소지가 있다. 강력한 동기도 필요하다(스스로 동기를 부여해야 할 때가 많다). 하지만 가장 중요하게, ‘그 사람 자신’에게 가장 힘겨운 일에 도전해야 한다. 에릭슨은 이렇게 말한다. 오직 혼자 있을 때만 "자신에게 힘겨운 일에 곧바로 도전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더 잘하려면, 상황을 ‘자기가’ 주도해야 하죠. 그룹 수업을 상상해보세요. 그때는 전체 중에서 아주 작은 시간만을 주도하게 됩니다." - 135쪽

실제로 과도한 자극은 사람들의 학습을 저해하는 듯 보인다. 최근의 한 연구에서는 사람들이 도심의 거리에서 시끄럽게 걷기보다는 숲에서 조용히 산책할 때 더 잘 배운다는 점이 발견되었다. 다양한 분야의 지식노동자 3만 8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다른 연구는 단순히 방해받는 것 자체가 생산성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점을 밝혔다. 현대의 사무실 전사(戰士)들의 귀중한 능력인 멀티태스킹조차 신화였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제 과학자들은 두뇌가 두 가지 일에 동시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점을 안다. 멀티태스킹처럼 보이는 행동은 사실 여러 가지 일을 왔다 갔다 하는 것에 불과하며, 이는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실수가 일어날 비율을 50퍼센트까지 높인다. - 140쪽

<스티브 워즈니악>에서 그는 휴랫팩커드가 능력주위 사회였다고 회고하면서 외모도 상관없고, 사내 정치를 벌여봐야 혜택도 없고, 누구도 그가 사랑하던 엔지니어 일을 그만두고 관리직으로 가라고 밀어붙이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워즈니악에게는 협력이 뜻하는 바였다. 동료들과 도넛과 아이디어를 나눌 수 있는 것 말이다. 태평스럽고 비판적이지 않고 옷도 엉성하게 입는 동료들, 진짜 일을 하려고 칸막이 안으로 사라져도 신경도 안 쓰는 그런 동료들 말이다. - 154쪽

케이건은 특별히 자극을 잘 받는 편도체를 타고난 아이들이 낯선 물체를 보게 되면 꿈틀거리고 소리를 지를 것이라고, 그리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좀 더 경계해야 한다고 느끼는 아이로 자라날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리고 결과는 예상과 같았다. 바꿔 말해서, 펑크 로커처럼 팔다리를 휘두르던 4개월짜리 아기들, 즉 ‘고 반응성’ 아이들은 외향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작은 몸이 새로운 물체와 소리와 냄새에 강하게 반응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조용한 아기들이 조용했던 이유도 앞으로 내향적으로 될 아이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는 정반대로 신경계가 새로운 것에 별 감흥이 없기 때문이었다. - 164쪽

반응성에 관한 케이건의 발견과 결합해보면, 이러한 연구들은 우리 성격을 들여다볼 매우 강력한 렌즈가 되어준다. 일단 내향성과 외향성을 자극 수준에 대한 선호도 정도로 이해하고 나면, 자신의 성격에 잘맞는 환경을 의식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자극이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지루하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게 만드는 것이다. 성격 심리학자들이 ‘최적 수준의 각성’이라고 하고 내가 ‘스위트 스폿(sweet spot)’이라고 하는 것에 따라서 생활을 구성하고, 그림으로써 전보다 더 활력 있고 생동감 있다고 느낄 수 있다.
‘스위트 스폿’은 최적으로 자극되는 지점이다 자기도 모르는 새 이미 그 지점을 찾고 있을지 모른다. 자신이 해먹에 만족스레 누워서 멋진 소설을 읽는다고 상상해보라. 이것이 ‘스위트 스폿’이다. - 196, 197쪽

"내향적인 사람은 ‘조사하게 되어’ 있고 외향적인 사람은 ‘반응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수수께끼 같은 행동에서 더 흥미로운 면은 외향적인 사람들이 잘못된 버튼을 누르기 ‘전에’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후에’ 무엇을 하느냐는 점이다. 내향적인 사람은 숫자 9에 버튼을 눌러서 자기가 점수를 잃었다는 점을 알면, 잘못을 되돌아보기라도 하듯 다음 숫자로 넘어가기 전에 속도를 늦춘다. 하지만 외향적인 사람은 속도를 늦추지도 않을뿐더러, 반대로 ‘속도를 높인다.’- 256, 257쪽

이상한 일이다. 왜 이런 행동을 할까? 뉴먼은 이것이 완벽하게 이치에 맞는다고 설명한다. 보상에 민감한 외향적인 사람처럼 목표를 달성하는 데 집중하면, 그것이 회의론자든, 숫자 9든 그 무엇도 자기 길을 가로막지 못하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장벽을 쓰러뜨려버리려고 속도를 높인다.
하지만 이것은 결정적인 과오다. 놀랍거나 부정적인 피드백을 만났을 때 더 오래 멈추었다가 시작할수록 거기에서 교훈을 얻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뉴먼에 따르면, 외향적인 사람에게 ‘강제로’ 멈췄다가 하라고 하면 이들도 내향적인 사람만큼 게임을 잘한다. 하지만 혼자서 하게 내버려두면, 이들은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눈앞에 빤히 보이는 곤경을 피하지 못한다. - 256, 257쪽

내향적인 사람들이 외향적인 사람들보다 똑똑한 것은 아니다. 지능지수 결과를 보면 두 유형은 지능이 동등하다. 그리고 여러 가지 임무에서, 특히 시간에 쫓기거나 사회적 압박을 받거나 멀티태스킹을 해야 할 경우 외향적인 사람들이 더 뛰어나다. 외향적인 사람은 내향적인 사람보다 정보 과부하를 잘 처리한다. 조셉 뉴먼의 말로는 내향적인 사람은 반성에 인지능력의 상당 부분을 활용한다. 어떤 임무에서든 "우리에게 인지능력이 100퍼센트 있다고 할 때 내향적인 사람은 약75퍼센트만을 임무에 쓰고 나머지 25퍼센트를 다른 데 쓰는 반면, 외향적인 사람은 임무에 90퍼센트를 쓸 수 있죠." 이것은 임무라는 것이 대체로 목표 지향적인 까닭이다. 외향적인 사람은 인지능력의 대부분을 눈앞의 목표에 할당하는 듯한 반면, 내향적인 사람은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파악하는 데 인지능력을 사용한다. - 259쪽

하지만 ‘천성인가, 양육인가’하는 논쟁이 상호작용론으로, 즉 두 가지 요인이 모두 우리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며 실제로 양쪽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으로 대체되었듯이 ‘성격인가, 상황인가’하는 논쟁도 좀 더 섬세한 이론으로 바뀌었다. 성격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오후 6시에는 사교적인 기분이 들다가도 오후 10시가 되면 혼자 지내고 싶어질 수 있다는 점과, 이러한 변동이 실제로 존재하고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고정된 성격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전제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산더미처럼 많다는 점 역시 강조한다. - 316쪽

리틀 교수처럼 철저하게 내향적인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대중 앞에서 효과적으로 연설할 수 있는지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들려주는 답은 간단한데, 그것은 그가 거의 혼자 힘으로 만들어낸 ‘자유특성이론(Free Traits Theory)’이라는 새로운 심리학 분야와 연관된다. 자유특성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특정한 성격 특성(이를테면 내향성)을 타고나거나 문화적으로 함양되지만, "개인에게 핵심이 되는 프로젝트"를 위해 거기에서 벗어난 행동을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내향적인 사람들도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 자기가 아끼는 사람, 혹은 다른 귀중한 것을 위해 외향적인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다. 자유특성이론은 어째서 내향적인 남편이 외향적인 아내를 위해 깜짝 파티를 준비하거나 딸의 학교에서 열리는 학부모회의에 참여할 수도 있는지 설명해준다. - 319쪽

언뜻 보기에 자유특성이론은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 중 하나에 역행하는 듯 보인다. 흔히 인용되는 셰익스피어의 조언 "너 자신에게 충실하라"는 우리의 철학적 유전자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사람들은 일정 시간 이상 ‘거짓된’ 모습을 보인다는 생각에 거리낌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의 거짓된 자아가 진짜라고 우리 자신을 설득함으로써 성격에서 벗어난 행동을 시도해보지만, 이유도 모르는 채 결국 소진되어버리고 만다. 리틀 교수의 이론이 천재적인 부분은 이러한 불편함을 깔끔하게 해결해준다는 점이다. 그렇다. 우리는 외향적인 척만 하고 있을 뿐이고, 그러한 진실하지 않은 행위는 도덕적으로 모호할 수도 있지만(지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랑이나 직업적 소명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셰익스피어가 조언한 그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 320, 321쪽

나 스스로 직업을 변경하기까지 수많은 시간을 보냈고 사람들이 자기 직업을 찾아나가도록 돕는 데도 상당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자신에게 핵심이 되는 프로젝트를 알아내려면 세 가지 중요한 단계를 밟아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첫째, 어린아이일 때 무엇을 좋아했는지 회상해보라. 어릴 적에, 크면 뭐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뭐라고 대답했는가? 그때 했던 구체적인 답변은 표적에서 빗나갔을 수도 있지만, 그 아래 깔려 있던 충동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어릴 때 소방관이 되고 싶었다면, 소방관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가?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구조하는 좋은 사람? 저돌적인 사람? 아니면 그저 트럭을 모는 것이 좋았는가? (...)
둘째, 자신이 끌리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자. 법률회사에서 일할 때 나는 기업법에 관련해서는 가외로 일을 맡겠다고 자원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비영리 여성 리더십 조직을 위해서는 무료로 봉사한 적이 무척 많다. 그리고 법률회사의 젊은 변호사들을 위해 멘토링과 훈련과 자기계발을 맡은 위원회에 참여한 적도 많았다. - 333쪽

셋째, 자신이 부러워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자. 질투는 추한 감정이지만, 진실을 알게 해준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갈망하는 것이 있는 사람을 시샘한다. 내가 나의 질투를 알게 된 것은 예전 법대 동기들이 모여서 동문들의 경력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은 이후였다. 동기들은 감탄하며, 그리고 질투하며, 주기적으로 대법원에서 변호하던 한 학우에 관해 얘기했다. 처음에 나는 비판하고 싶었다. 이내 ‘잘됐네!’하고 생각하며, 내 관대함을 칭찬했다. 그러다가 그렇게 쉽게 관대하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 내가 대법원에서 변호를 하고 싶은 열망도 없고 변호사 업무에 따라오는 다른 포상을 얻고 싶은 열망도 없기 때문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나는 누가 부러운 것인지 생각해보니, 즉각 답이 튀어나왔다. 내 대학 동기들 중 나중에 작가가 되거나 심리학자가 된 사람들이었다. 요즘 나는 이 두 가지를 내 나름의 방식으로 추구하고 있다. - 334쪽

하지만 핵심 프로젝트를 위해 애를 쓴다고 하더라도, 너무 자신과 동떨어진 행동을 하거나 너무 오래 그렇게 해서는 곤란하다. 리틀 교수가 강연이 끝난 뒤에 화장실에 가서 숨었던 일을 기억하는가? 그런 행동을 보면 역설적이게도,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되도록 자신에게 충실해지는 것이다. 그러자면 일상생활에서 되도록 ‘회복 환경(restorative niche)’을 많이 만들어두는 일부터 해야 한다.
‘회복 환경’이란 리틀 교수가 만든 말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 가는 장소를 가리킨다. 리슐리외 강처럼 물리적인 장소일 수도 있고, 판매를 위해 전화하는 사이사이에 조용히 쉬는 것처럼 시간적인 공간일 수도 있다. - 334, 335쪽

어쩌면 성격 유형에 관한 가장 흔하고도 파괴적인 오해는 내향적인 사람들이 반사회적이고 외향적인 사람들이 친사회적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살펴보았듯, 양쪽 다 옳지 않다.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은 서로 다르게 사회적이다. 심리학자들이 ‘친밀감 욕구’라고 부르는 것은 내향적인 사람에게나 외향적인 사람에게나 다 있다. - 346, 3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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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행 슬로보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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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내가 모르고 지나친 하루키 소설집이 있었다니?' 우연히 하루키의 책을 발견하고 반가움과 놀라움이 교차했다. 그래도 하루키의 단편들을 이리저리 짜집기한 책이 워낙 많다는 생각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표지와 서지정보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출판사가 문학동네이고 번역자가 양윤옥이라면 일단 확실한 것 같았다. 그런데 '불가사의한 세계와 그곳을 헤매는 존재의 고독을 예민한 감성으로 포착한 무라카미 하루키 첫 소설집'이라는 출판사의 광고 문구가 눈에 띠었다. 첫 소설집? 알고 보니,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은 하루키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을 쓴 이후에 문예지에 발표했던 단편이었다고 한다. 이 두 장편과 <양을 쫓는 모험> 사이, 그리고 약간의 그 이후 동안 발표된 단편들이니 나름 그의 초기작인 셈이다. 


단편집에 대한 독후감을 쓰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한 편, 한 편을 각기 다른 느낌을 갖고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은 분명하지만, 장편처럼 완결된 스토리가 없다보니 다 읽은 후에 내게 무엇이 남았는지를 반추하기가 쉽지 않다. 마치 연속된 기억은 다 물처럼 흘러 사라져 버린 이후에 기억의 단편들만이 뇌리 속에 박혀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져 든다. 그래도 어떻게든 독서에 대한 흔적을 남기고 싶다면,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을 하나 고르거나, 아니면 수록된 모든 작품을 다 언급하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다. 나는 후자를 택해본다.


이 소설집은 7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각각이 독립된 단편이며, 제목도 각양각색이다. 대부분 주인공인 '나'와 타인에 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소설집의 제목으로도 되어 있는 <중국행 슬로보트>는 스토리나 문체면에서 내가 좋아하는 하루키 풍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다. 논리적 인과가 없는 가운데 발견되는 낯선 사람 또는 지점과의 연계성, 불확실한 기억에 대한 접근, 남녀 사이에 발생하는 오해, 그리고 그것을 굳이 풀어내려고 하지 않는 주인공. 이 단편은 어찌보면 <노르웨이의 숲>에서 시작하여 <색체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까지도 계속 연결되는 사건에 대한 다른 관점, 오해, 망각, 기억이라는 하루키 소설의 스타일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나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는 하루키 소설 중 기이함과 관련성을 찾을 수 있다. 어느날 뜬금없이 가난한 아주머니가 주인공의 등에 업히게 된다든지, 양 사나이가 찾아와 잃어버린 자신의 귀를 찾아달라고 의뢰한다는 스토리는 상식과 논리를 넘어 창조된 기이함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예전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가 등장한 '양'이나 '쥐'가 무슨 은유일까를 한참 고민하며 소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었는데, 어쩌면 그것은 은유나 상징이 아닌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대화를 통하여 하루키의 아포리즘을 느낄 수 있는 글은 <뉴욕 탄광의 비극>이라는 단편이다. 평범하고 무덤덤한 주인공은 삶을 살아가는 주체이자, 친구들의 죽음을 경험하는 관찰자이자, 그와 전혀 다른 자아인 친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방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주인공이 친구와 나눈 대화는 곧 그가 거울 속의 다른 자아에게 하고자 하는 말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말미에 등장하는 탄광 속의 풍경이 곧 제목인 된 셈인데, 이 짧은 몇 단락이 앞에 썼던 주인공의 생활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명확히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남은 공기가 얼마 안되니 최대한 숨을 쉬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태도라는 것인가.


<캥커루 통신>은 편지글의 형식을 띠고 있다. 백화점 상품관리과에 근무하고 있는 주인공이 어느 휴일에 동물원에서 캥거루를 보고서는 며칠 전 상품을 교환해달라는 고객의 요청이 생각나서 편지를 쓴다. 편지형식이지만 마치 모노드라마를 연상시키는 듯한 기법을 선보이고 있다.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전혀 연관성이 없는 상황임에도 주인공은 너무나도 진지하게 캥거루와 고객 사이의 서른여섯 개의 미묘한 과정을 알아내어 비로소 편지를 쓴다. 이와 같은 약간의 엉뚱함을 제외하면 읽기에 무난하다.


<오후의 마지막 잔디>와 <땅속 그녀의 작은 개>는 특별한 스토리를 기대하지만 정작 특별할 것이 없이 끝을 맺는 소설이다. 특히 전자의 경우 정원에서 잔디를 깎는 아르바이트 생의 이야기로 주인공이 일을 그만두기 전 마지막 작업에 대한 묘사를 한다. 그는 마지막 작업을 하기 위해 찾아간 집에서 만난 한 여성의 말과 태도에 드러나는 독특함을 무시하지 않으며. 그녀의 과거나 배경이 상당부분 생략된 채 이루어지는 일에 대해 별다른 반감을 느끼지 않는다. 글을 읽으며 이후 일어나게 될 새로운 전개의 실마리를 기대해보기도 하지만 별다른 설명없이 마무리 된다. 마치 한 장의 사진을 설명하듯이. <땅속 그녀의 작은 개>는 이보다는 친절한 편인데, 비가 내리는 비수기 리조트호텔에서 만난 낯선 여자를 만나고 그녀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대하여 주인공이 받아들이고 이끌리다가, 왜 그녀가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는지 추후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책에는 하루키의 다른 책들과는 달리 맨 뒷부분에 '작가의 말'이라는 부록을 첨부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읽다보면 각 단편들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하여 웬만한 궁금증은 해소할 수가 있다(그러나 작품에 대한 작가의 설명은 없다. 설마, 하루키가. 그럴리가 없지 않은가). 독특한 것은 하루키가 소설을 쓸 때 내용은 정하지 않고 우선 제목을 먼저 생각한 후 첫 장면을 쓰면서 스토리를 펼친다는 점이다. 제목 지어내기를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나로써는 공감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었으며, 이러한 독특한 작법이 하루키의 글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 "'중국행 슬로보트'라는 말에서 어떤 소설이 나올지, 나 스스로도 무척 흥미로웠다"는 그의 후기에 웃고 말았다.

 

정작 궁금했던 것은 초기의 단편들을 왜 이제와서(국내 발행일은 2014년이다) 다시 발간을 하게 된 것인지였다. 그것도 일단 발표한 작품은 더이상 손을 대지 않는다는 원칙을 어겨가면서까지 왜 초기작품을 손봐서 다시 발간하게 되었나? 이 정도에서 작가로서의 자신을 한번 돌아보고 싶어서였을까? 그러나 이것은 내 추측일뿐, 아쉽지만 그 대답은 찾을 수 없었다. 아래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이 단편집의 의미나 향후 작품에 대한 연계성, 그리고 저자의 감회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보수공사를 하니 나라는 인간, 즉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의 대략적 모습이 이 단편집 안에 이미 드러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분명 그 후로 나는 나름대로 나이를 먹으면서 좀더 다면적으로 사물을 보고 문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뭘 해보고 싶은지도 좀더 명료하게 눈에 보이게 되었다. 현단계에서 작가로서 내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도 점점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내 세계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미완성인 나름대로, 어색한 나름대로, 균형감이 떨어지는 대로 이 첫 단편집에서 대부분 제시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스타일이며 모티프, 어법 같은 것들의 원형은 일단 빠짐없이 나와 있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하긴 내 기억의 대부분은 날짜가 없다. 내 기억력은 지독히 부정확하다. 지나치게 부정확해서 이따금 내가 그 부정확성을 근거로 누군가에게 뭔가를 증명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기분까지 든다. 하지만 그게 대체 무엇을 증명하느냐고 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애당초 부정확성이 증명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 아닐까.
어쨌거나 그런 식으로 내 기억은 지독히 흐릿하다. 앞뒤가 뒤집히거나 사실과 상상이 뒤바뀌고 어떤 때는 나 자신의 시선과 타인의 시선이 뒤섞이기도 한다. 그런건 이미 기억이라고 할 수조차 없는지도 모른다. - 11, 12쪽

이미 서른을 넘은 한 남자인 지금, 다시 한번 외야로 날아가는 공을 쫓아가다 농구대에 전속력으로 부딪히고 다시 한번 글러브를 베개 삼아 포도시렁 밑에서 눈을 뜬다면 나는 이번에는 뭐라고 말할까?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여기는 나를 위한 장소도 아니야, 라고.
이미 서른을 넘은 한 남자인 지금, 다시 한번 외야로 날아가는 공을 쫓아가다 농구대에 전속력으로 부딪히고 다시 한번 글러브를 베개 삼아 포도시렁 밑에서 눈을 뜬다면 나는 이번에는 뭐라고 말할까?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여기는 나를 위한 장소도 아니야, 라고. - 44, 45쪽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야마노테 선 전철 안이었다. 나는 문 앞에 서서 차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단단히 움켜쥔 채 유리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의 도시, 그 풍경은 왠지 내 마음을 지독히 어둡게 만들었다. 도시 생활자가 연중행사를 치르듯 빠져드는 낯익은 것, 탁한 커피젤리 같은 정신의 엷은 어둠이 다시금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지저분한 빌딩, 이름 없는 사람들의 무리, 끊이지 않는 소음, 꼼짝 못하는 자동차의 행렬, 잿빛 하늘, 공간을 가득 메운 광고판, 욕망과 포기와 초조와 흥분. 그곳에는 무수한 선택지가 있고, 무수한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무수한 동시에 제로였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손에 쥐었지만 우리 손안에 있는 것은 제로였다. 그것이 도시였다. 나는 문득 그 중국인 여자애의 말을 떠올렸다. "애초에 여기는 내가 있을 장소가 아니야." - 44, 45쪽

나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고 여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내게 다가왔고, 그리고 빨리 떠나버렸다. 언어는 투명한 탄도처럼 일요일 오후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시작은 항상 이렇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존재하고 그다음 순간에는 사라져버린다. - 53쪽

"새벽 세시에 인간은 온갖 생각이 드는 법이야. 이것저것 안 가리고. 누구든 그렇지. 그러니까 각자 대처법을 생각해놔야 해."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말했다.
"새벽 세시에는 심지어 동물도 뭔가 생각해." 문득 떠오른 듯 그는 말했다. "새벽 세시에 동물원 가본 적 있어?"
"아니." 나는 멍하니 대답했다. "없지, 물론."
"나는 딱 한 번 있어. 동물원에서 일하는 사람을 한 명 알거든. 그 친구가 밤근무를 하는 날 제발 부탁이라고 애원을 해서 들어갔어. 원래는 안 되는 일이지만." 그는 잔을 흔들었다. "그건 정말 기묘한 체험이었어. 말로는 잘 설명을 못 하겠지만, 마치 땅바닥이 사방에서 소리도 없이 갈라지고 거기서 뭔가 기어올라오는 느낌이 들었지. 그리고 밤의 어둠 속을, 땅 밑에서 기어올라온 보이지 않는 그 뭔가가 마구 날뛰는 거야. 싸늘한 공기덩어리 같은 게 말이야. 눈에는 안 보여. 하지만 동물들은 그것의 존재를 느껴. 그리고 나는 동물들이 느끼는 그것을 느꼈어. 결국 우리가 밟고 선 이 대지는 지구의 중심까지 이어지고, 그 지구 중심에는 엄청난 양의 시간이 빨려들어가 있는 거지." - 98, 99쪽

"텔레비전에는 적어도 한 가지 뛰어난 점이 있어." 잠시 생각한 뒤에 그는 말했다. "원할 때 꺼버릴 수 있다는 거. 끈다고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는 거."
그는 리모컨을 집어들고 스위치를 눌렀다. 순식간에 영상이 사라졌다. 방은 괴괴히 가라앉았다. 창밖에서 빌딩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는 참이었다. - 100쪽

"크리스마스 밤에 여자랑 마시려고 놔뒀던 거 아냐?" 나는 물었다.
그는 차가운 샴페인 병과 새 유리잔 두 개를 테이블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매우 쿨하게 미소지었다. "샴페인에 용도 같은 건 없어. 마개를 뽑아야 할 때가 있을 뿐이야." - 102쪽

"음악 좋아해?" 그녀가 내게 물었다.
"좋은 세계에서 듣는 좋은 음악이라면." 나는 말했다.
"좋은 세계에는 좋은 음악 따위 없어." 그녀는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는 듯한 투로 내게 말했다. "좋은 세계의 공기는 진동하지 않거든." - 104쪽

말하자면 이런 얘기입니다.
캥거루와 당신 사이에 서른여섯 개의 미묘한 과정이 있고, 그것을 합당한 순서대로 하나하나 따라가다보니 당신에게 가닿았다. 그냥 그뿐이에요. 그 과정을 일일이 설명해봤자 아마 당신은 잘 모를 테고 우선 나부터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럴만도 하죠. 서른여섯 개나 되잖아요!
그중 하나라도 순서가 어긋났다면 나는 당신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지 않았겠지요. 어쩌면 언뜻 충동이 들어 남극해에서 향유고래 등에 올라탔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근처 담뱃가게에 불을 질러버렸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 서른여섯 개의 우연한 조합이 이끄는 바에 따라, 나는 이렇게 당신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신기한 일 아닌가요? - 112, 113쪽

위대한 불완전함이 무엇이냐고 당신은 궁금해할지도 모르겠군요 - 당연히 궁금하겠죠. 위대한 불완전함이란, 간단히 말하면 누군가가 누군가를 결과적으로 용납한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캥거루를 용납하고 캥거루가 당신을 용납하고 당신이 나를 용납한다 - 예를 들자면 그런 얘기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이클은 물론 항구적이지 않아서, 어느 순간 캥거루가 이제 더는 당신을 용납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캥거루에게 화를 내지는 말아주세요. 그건 캥거루 탓도 당신 탓도 아니니까요. 혹은 내 탓도 아닙니다. 캥거루에게도 나름대로 매우 복잡한 사정이 있는 거에요. 대체 어느 누가 캥거루를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순간을 포착하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뿐입니다. 순간을 포착해 기념사진을 찍어두는 것이죠. 앞줄 왼쪽부터 당신, 캥거루, 나, 이런 식으로요. - 117, 118쪽

글을 쓰는 건 이제 포기했습니다. 간단한 사무통지 글이라도 안 됩니다. 글자 자체를 더는 신용할 수 없거든요. 이를테면 내가 ‘우연’이라는 글자를 쓴다고 합시다. 그런데 당신이 이 ‘우연’이라는 글자를 보고 느끼는 것은 내가 똑같은 글자를 보고 느끼는 것과 전혀 다를지도 - 어쩌면 정반대일지도 - 모릅니다. 이건 대단히 불공평하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나는 팬티까지 벗었는데 당신은 블라우스 단추 세 개밖에 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한 일 아닙니까? 저는 불공평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세계란 불공평한 것이죠. 그러나 적어도 일부러 나서서 적극적으로 그런 것에 가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나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그래서 나는 카세트테이프에다 당신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직접 녹음하기로 했습니다. - 118쪽

나는 동시에 두 군데의 장소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게 내 유일한 희망이에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이라는 개체성이 그런 내 희망을 방해하고 있어요. 몹시 불쾌한 사실 아닙니까? 불합리한 압박 같지 않습니까? 나의 이런 희망은 굳이 따지자면 소박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천재 예술가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에요. 하늘을 날겠다는 것도 아니고 천재 예술가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에요. 하늘을 날겠다는 것도 아니죠. 동시에 두 군데의 장소에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뿐입니다. 아시겠어요? 세 군데도 네 군데도 아니고 단 두 군데입니다. 나는 콘서트홀에서 오케스트라를 들으면서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싶은 겁니다. 백화점 상품관리 담당자이면서 맥도날드의 쿼터파운드 햄버거이고 도 싶고요. 나는 애인과 자면서 당신과도 자고 싶습니다. 나는 개체이면서 원칙이고도 싶습니다. - 133쪽

기억이라는 건 소설과 비슷하다. 혹은 소설이라는 건 기억과 비슷하다.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 뒤로 그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기억이라는 건 소설과 비슷하다. 혹은 소설이라는 건 어쩌고저쩌고.
아무리 말끔하게 가다듬으려고 애써도 문맥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다 결국에는 문맥 같지도 않은 것으로 바뀐다. 마치 축 늘어진 새끼고양이 몇 마리를 쌓아올린 것 같다. 미적지근하고, 게다가 불안정하다. 그런 걸 상품이랍시고 내놓다니 - 상품 말이다 - 나는 때때로 엄청나게 창피해진다. 정말로 얼굴이 붉어지는 때도 있다. 내가 얼굴을 붉히면 온 세상이 얼굴을 붉힌다.
하지만 인간의 존재를 비교적 순수한 동기에 근거한 상당히 어리석은 행위로 파악한다면,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올바르지 않으냐 하는 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거기서 기억이 태어나고 소설이 태어난다. 이건 어느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영구운동 기계와도 같다. 그것은 온 세상을 덜컹덜컹 돌아다니면서 땅바닥에 끝없는 선 하나를 긋는다. - 141쪽

내가 그녀를 정말로 좋아했는지, 이제 잘 모르겠다. 기억은 나는데 모르겠다. 나는 그녀와 식사하는 것을 좋아했고 하나씩하나씩 옷 벗는 그녀를 보는 것을 좋아했고 그녀의 부드러운 몸속에 들어가는 것도 좋아했다. 섹스 뒤에 내 가슴에 얼굴을 대고 재잘거리거나 잠드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도 좋아했다. 하지만 내가 알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와 만나는 몇 주간을 빼면 내 인생은 지독히 단조로웠다. 어영부영 학교에 가서 강의를 듣고 그럭저럭 남들 비슷하게 학점을 땄다. 그리고 혼자 영화를 보거나 이유도 없이 거리를 돌아다녔다. 친한 여자가 한 명 있었다. 그녀에게도 애인이 있었지만 우리는 곧잘 둘이서 어딘가에 가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혼자 있을 때는 내내 로큰롤 레코드를 들었다. 행복한 것 같기도 하고 행복하지 못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절이란 다 그런 법이다. - 143쪽

"옷을 보면 그 여자에 대해 웬만큼 알 수 있지." 여자는 말했다.
나는 애인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떠올려보았다.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그녀에 대해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막연한 이미지였다. 그녀의 스커트를 떠올리려고 하면 블라우스가 사라지고, 모자를 떠올리려고 하면 그녀의 얼굴이 어떤 딴 여자의 얼굴이 되었다. 기껏해야 반년 전 일인데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녀에 대해 대체 뭘 알고 있었던 걸까? - 168, 169쪽

「중국행 슬로보트」
이 작품은 가장 먼저 제목부터 시작했다. 내 단편소설의 대부분은 제목에서 시작되었다. 내용은 정하지 않고 우선 제목을 생각한다. 그리고 일단 첫 장면을 써본다. 그러면 거기서 스토리가 펼쳐져나간다 - 이런 식이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고, 그 방법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해 중간에 포기해버린 적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이 방식은 내 성격에 잘 맞는 것 같다. 이른바 제재니 주제니 하는 정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문장으로 풀어나가는 사이에 차츰차츰 저절로 줄거리가 펼쳐진다. 글로 써내려가는 사이에 나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던 뭔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자연스러운 작업 자체가 내게는 매우 스릴 넘치고 흥미 깊게 다가온다. -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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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7-20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기억에 남는 단편 위주로 소개합니다. 모든 단편 다 요약해서 정리하는 것이 힘들었어요. ^^;;

붉은눈 2016-07-20 14:40   좋아요 0 | URL
사실은 저도 그렇습니다. 괜히 모든 단편을 기록해보려고 욕심내다가 한 편에 대한 느낌마저도 제대로 남겨두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 또 다른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키 단편은 단편치고도 서사의 전개가 그리 많지 않아 하나도 제대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