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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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에 이어 올해 '페미니즘'에 관하여 읽은 세번째 책이다. 최근에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와 저변을 넓이기 위한 노력들이 TED는 물론이고 서적을 통해서도 활발하게 진행되는 것 같다. 그래서 왠만하면 페미니즘 관련 신간들은 챙겨보려는 욕심이 있다. 이런 책들을 읽을 수록 완전히는 아니라도 '평등'이라는 개념에 조금은 다가서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정희진은 이 책의 추천사에서 제목에 포함되어 있는 '나쁜(bad)'의 뜻을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부족한', '못 미치는', '완벽하게 훌륭하지 못한'이라는 뜻으로 읽힌다고 했다. 즉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말의 뜻은 (남자들에게) 나쁘거나 독한 페미니스트라는 뜻이 아니라, '부족한 페미니스트'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저자인 록산 게이도 책에서 '소문자의 페미니즘(feminism)'과 대문자로 시작하는 '페미니즘(Feminism)' 혹은 '근본주의 페미니즘'을 구분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 말은 올바른 단 하나의 페미니즘의 관념에 사로잡혀 심지어 여성들 조차도 페미니스트이기를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곤 하는데, 실상 페미니즘은 어떤 대단한 사상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성 평등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매우 이상적인 페미니즘 외에도 각자에 맞는(소문자 형태의) 다양한 페미니즘이 존재하며, 평등을 추구하는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왠지 사상이 자유로울 것 같고, 개인주의적인 상식과 태도가 수용되어 있는 미국은 다를 것 같았는데, 그곳에서도 역시 페미니즘에 대한 굳은 편견과 오해는 만연하였다. 이러한 편견들은 여성에 대한 혐오를 확대하는 한편 차별을 너무나도 쉽게 정당화 한다. 사회에 만연해 있는 여성 신체에 대한 성적인 희롱,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자유를 구속하는 성추행이나 성폭행, 자기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빼앗는 생식의 자유(reproductive freedom) 제한의 예가 책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9페이지 분량의 서문만 읽어보더라도 페미니즘에 대한 편안한 이해가 가능할 정도로 글이 쉽고 간결하다. 기본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서문만 읽는 것으로도 충분할 정도이다. 본문에서는 미국 대중사회에 나타난 여성차별의 문제점들, 이를테면 성폭행, 낙태 제한, 공중파에서의 성희롱을 다루기도 하지만, <헝거게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나를 찾아줘>와 같이 국내에 번역된 소설들을 저자의 소문자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내용도 있다. 젠더를 중심으로 서술된 1부와 2부에 이어 제3부에서는 영화 <헬프>, <장고>, <노예 12년>을 관람평을 통하여 페미니즘을 미국 사회 내에서의 유색 인종 차별이라는 영역으로 확대하고 있어서, 소설이나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자기의 생각과 저자의 것을 비교하며 재미 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저자는 이러한 자신의 견해들이 불완전한 것이며, 자신도 수시로 흔들리는 모순덩어리의 인간임을 상기시킨다. 처음에는 저자 역시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가 부담스러웠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임을 주장하는 것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연한 차별(본문에서는 "개똥 같은 취급"이라 했다)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대로 페미니스트가 아닌 것보다는 차라리 나쁜 페미니스트로 남는 것이 훨씬 낫다.

나를 따라다닐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를 환영한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이니까. 그래서 엉망진창이니까. 누군가의 본보기가 되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는다. 완벽하려 하지 않는다. 내가 모든 해답을 갖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전부 옳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내가 믿고 있는 것을 지지하고, 이 세상에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내 글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면서도 온전히 나 자신으로 남고 싶을 뿐이다. 핑크색을 사랑하고 섹스를 좋아하고 가끔은 여성을 끔찍하게 표현한 노래에 엉덩이를 흔들기도 하고 때로는 정비공이나 수리 기사에게 마초 대점을 해주면 내게 이익이라는 것을 알기에 일부러 더 멍청한 척을 하는 이런 여자로 남고 싶을 뿐이다. - 14쪽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페미니즘을 부인하곤 했다. 나는 왜 여성들이 아직까지도 페미니즘을 부인하고 페미니즘과 거리를 두려다 자기 발에 자기가 걸려 넘어지는지 이해한다. 내가 가끔 손사래를 치며 나는 절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한 이유는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것이 마치 인신공격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현실에서 이 단어가 그런 의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 시절 누가 날 페미니스트라고 불렀을 때 최초로 떠오른 문장은 이것이었다. 왜 그러지? 나 페미니스트 아니야. 나 남자한테 오럴 섹스 해줄 수 있단 말이야. 그때 내 머릿속에는 페미니스트인 동시에 성적으로 개방적인 여자일 수 없다는 개념이 들어차 있었다. 물론 십 대와 이십 대는 이외에도 온갖 덜떨어진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 있었던 시기이긴 하다. - 14, 15쪽

나는 페미니즘을 부인했다. 이 운동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스트라는 소리를 들으면 이런 말로 들렸다. "너는 성깔 있고 섹스 싫어하고 남성 혐오에 찌든, 여자 같지 않은 여자 사람이야." 이런 우수꽝스러운 캐리커처는 페미니즘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 페미니즘이 성공하면 잃을 것이 가장 많은 사람들에 의해 조작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 15쪽

나는 페미니즘을 되도록 단순하게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페미니즘이 어렵고 복잡한 개념이고 지금도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으며 빈틈도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저 이렇게 생각할 뿐이다. 페미니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도 못하고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권리를 믿는다. 여성에게는 자신의 몸을 지킬 자유가 있고 필요할 때는 복잡한 절차 없이 의료 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남녀가 같은 일을 했을 때 동일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선택이기도 하다. 어떤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지 않다면 그 역시 그녀의 권리이기에 존중한다. 하지만 그녀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 또한 나의 의무이며, 나라면 하지 않을 법한 선택을 하는 여성들을 지지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근본 원칙이라고 믿는다. - 16쪽

하지만 페미니즘에 대해 배우면 배울수록 `소문자의 페미니즘(feminism)`과 대문자로 시작하는 `페미니즘(Feminism)` 혹은 `페미니스트(Feminist)` 혹은 단 하나의 진짜 페미니즘이 모든 여성 인류를 지배한다는 `근본주의 페미니즘`의 개념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페미니즘이 어떤 대단한 사상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성 평등임을 안 순간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건 놀라울 정도로 쉬워졌다. 페미니즘은 우리 사이 교집합을 찾기 위해, 우리가 누구이고 어떻게 이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하는지 알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편이다. - 16, 17쪽

남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그것을 가볍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 26쪽

남자들이 그럴 수도 있다고 한 번도 아니라 여러 번 우리는 당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유명한 남자건, 악명 높은 남자건, 전혀 유명하지 않은 남자건 남성이 여성을 학대할 수 있다고 믿게 내버려 두었다. 그럴 때마다 못 본 척했고 핑계를 만들어 냈다. 이 남자들의 나쁜 행동도 괜찮다고 하고 오히려 멋지다고까지 했다. 우리는 당신에게 이 사회에 젊은 여자를 위한 자리는 없다고 말했다. 아마도 우리는 이런 메시지들을 너무나 자주, 정기적으로, 일관적으로 전달하면서 당신이 눈을 똑바로 뜬 채, 팔을 벌린 채로 폭력적이고 끔찍한 세상으로 달려가도 된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 46쪽

대게 젠더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인 프레임 안에서 논의되곤 한다. 남자는 화성에서 왔고 여자들은 금성에서 왔다. 아니 그렇다고들 한다. 마치 남자와 여자는 태초부터 너무 다르게 태어났기에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젠더 문제를 이야기하다 보면 화성과 금성이 실은 같은 태양계 안에 있으며 생각보다 가까운 행성이란 사실을 잊게 된다. 사실 이 두 행성 사이에는 지구나는 하나의 행성 밖에 없으며 둘은 같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으며 같은 광선 안에 머물고 있다. 안타깝게도 최근에 출간된 많은 책들은 젠더에 관해 생산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편협한 시각으로 여성과 남성을 분리하여 바라보고 젠더 문제를 조금 더 신중하게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렸다. - 127쪽

어째서 여성이 더 야심이 넘치고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일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투표를 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워야 했고, 집 밖에서 일을 해보겠다고 기를 쓰고 싸워야 했고, 성희롱 없는 근무 환경에서 일하기 위해 싸워야 했고, 대학이나 학과를 스스로 선택하기 위해 싸워 왔으며, 작은 자리라도 차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나를 증명하고 또 증명해 내야 했다. - 130쪽

나는 동정과 연민이 한정된 자원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도 않다.
크건. 작건. 비극이. 부르면. 연민이. 응답한다. 가슴이. 응답한다. - 262쪽

아, 불쌍한 페미니즘이여. 페미니즘의 어깨에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 운동의 일차적 목표는 모든 분야에서의 양성평등임을 잊지 말자. - 364쪽

한때 내 머릿속에는 페미니스트는 특정한 부류의 여성들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페미니스트라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확한 신화를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전투적이고 정치적이며 인간으로서 완벽하고 남자를 증오하고 유머가 없는 사람들. 이러한 신화에 속았다. 나는 이런 신화에 속지 않을 만큼 똑똑한 사람이기에 이런 과거가 자랑스럽지 않고 더 이상은 속지 않으려 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정중하게 거절하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다. - 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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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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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특유의 감각으로 우리가 애써 외면하는 현실을 깊숙히 파고드는 만화가, 최규석.

그의 눈이 밝혀낸 낯선 현실이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을테지만, 반대로 우리가 느끼는 낯설음이 어쩌면 그가 너무도 견고히 견뎌낸 과거였을지도 모른다.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없지만 내 마음 깊숙한 곳에는,
도시에서 태어나 유치원이나 피아노학원을 다녔고 초등학교 때 소풍을 엄마와 함께 가봤거나
생일파티란 걸 해본 사람들에 대한 피해의식, 분노, 경멸, 조소 등이 한데 뭉쳐진 자그마한 덩어리가 있다.
부모님이 종종 결혼을 재촉하는 요즘 이전에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어쩌면 존재하게 될지도 모를 내 자식을 상상하게 된다.

상상하다보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 아이의 부모는 모두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고
아버지는 화려하거나 부유하지 않아도 가끔 신문에 얼굴을 들이밀기도 하는 나름 예술가요
아버지의 친구라는 사람들 중에는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인사들이 섞여 있어
그 아이는 그들을 삼촌이라 부르며 따르기도 할 것이다.
엄마가 할머니라 놀림 받지도 않을 것이고
친구들에게 제 부모나 집을 들킬까봐 숨죽일 일도 없을 것이고
부모는 학교 선생님과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할 것이며
어쩌면 그 교사는 제 아비의 만화를 인상 깊게 본 기억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간혹 아버지를 선생님 혹은 작가님 드물게는 화백님이라 부르는
번듯하게 입은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들 것이고 이런저런 행사에 엄마아빠 손을 잡고 참가하기도 하리라.
집에는 책도 있고 차도 있고 저만을 위한 방도 있으리라.
그리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리지도 않을 것이고
고함을 치지도 술에 절어 살지도 않을 것이고 피를 묻히고 돌아오는 일도 없어서
아이는 아버지의 귀가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 아이의 환경이 부러운 것도 아니요,
고통 없는 인생이 없다는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리도 아니다.
다만 그 아이가 제 환경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제 것으로 여기는,
그것이 세상의 원래 모습이라 생각하는,
타인의 물리적 비참함에 눈물을 흘릴 줄은 알아도 제 몸으로 느껴보지는 못한
해맑은 눈으로 지어 보일 그 웃음을 온전히 마주볼 자신이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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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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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에 따라 책을 읽고 싶지 않다는 다짐 때문일까? "나는 베스트셀러는 믿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곤 했다. 그러면서도 내 장바구니나 보관함에는 항상 당시의 베스트셀러들이 담겨 있었다. 아닌 척은 해도 결국 나도 지금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관심과 유행이 무엇인지를 흘끔거리며 궁금해 하는 속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된 지 많은 시간이 흘러서 읽게 되었다. 몇 주 반짝였던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내 기억에는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에게 1위를 내어주기 전까지) 꽤 오랜 기간 상위에 랭크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상하게도 상위 랭킹에서 떨어지자 비로소 이 책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프로이트나 융이야 워낙에 유명한 이름이어서 심리학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의 귀에도 흔한 이름이지만, 아들러라는 이름은 내게 생소했다. 더욱이 그가 프로이트, 융과 함께 3대 심리학자라고 일컬어진다고 하니, 이쯤이면 나의 무지를 탓할만 하다.


아들러의 심리학은 프로이트의 심리학과 대비된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원인론'이라고 한다면, 아들러의 심리학은 '목적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전자에 따르면, 지금의 나의 상태는 과거의 어떠한 원인으로 인해 형성된 것이며, 미래의 나 또한 현재의 모습이 투영된 것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내가 경험했던 과거의 '트라우마'와 같은 것이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후자에 의하면,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질 수는 없겠으나) 현재를 결정하는 건 과거의 그 사건이 아니라 그것을 통한 경험에 내가 어떠한 의미를 부여했느냐이다. 따라서 인과관계가 아닌 내 삶의 목적을 회복함으로써 보다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결국 필요한 것은 과거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를 변화시키기 위한 '용기'뿐이다. 그래서 아들러의 심리학을 '용기의 심리학'이라고도 한다.


이 책의 제목인 '미움받을 용기'는 스스로 자유롭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미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따온 것 같다. 자기 중심적인 인정욕구에서 벗어나 타인이 바라는 내 모습을 버리고, 나 또한 타인에게 내 바람을 강요하지 않음으로써 내가 원하는 자유로운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누군가가 부모를 빨리 실망시킬수록 자식이 빨리 자립하게 된다고 한 우스개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런 것도 일맥상통하는 것일까. 


과거의 트라우마에 빠져 현재의 삶을 망치는 것, 타인과 경쟁하느라 스스로 불행해지는 것,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려고 눈치를 보는 것... 현대인들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이것들은 '지금, 여기'의 삶을 방해하는 것들이다. 아들러는 이와 같은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했는데, 행동적 측면에서는 '자립할 것'과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을, 심리적 측면에서는 '내게 능력이 있'으며, '사람들은 내 친구'라는 의식을 갖는 것이다. 구체적인 목표라고는 했지만, 이런 뻔한 도덕 교과서 수준의 이야기를 목표라고 제시하는 것에 답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 속 철학자의 설명을 끝까지 경청하다보면 행동적 측면을 통하여 자기수용을, 심리적 측면을 통하여 타자신뢰와 타자공헌을 함으로써 나를 인정하고, 남과 비교하지 않으며, 내 본연의 삶을 찾을 수 있다는 논리에 수긍하게 된다.


저자인 기시미 이치로가 플라톤 철학과 아들러 심리학을 공부해서인지는 몰라도 책의 구성은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처럼 철학자와 청년이 대화를 하며 기존 관념의 오류를 바로잡고 새로운 인식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심리학 책이지만 아들러 심리학의 이론을 그렇게 어렵지 않게 대화를 하듯 읽을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철학자 :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지. 객관적인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네. 자네가 보는 세계와 내가 보는 세계는 달라.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세계일 테지. - 12쪽

철학자 : 아들러 심리학은 트라우마를 명백히 부정하네. 이런 면이 굉장히 새롭고 획기적이지. 분명히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이론은 흥미진진한 데가 있어. 마음의 상처(트라우마)가 현재의 불행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인생을 거대한 ‘이야기’라고 봤을 때, 그 이해하기 쉬운 인과법칙과 드라마틱한 전개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매력이 있어. 하지만 아들러는 트라우마 이론을 부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네.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즉 트라우마-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 36쪽

청년 :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철학자 : 말 그대로일세.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한다는 말이지. 가령 엄청난 재해를 당했다거나 어린 시절에 학대를 받았다면, 그런 일이 인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네. 분명히 영향이 남을 테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이 무언가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점이야.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네. 인생이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걸세. 어떻게 사는가도 자기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고. - 36, 37쪽

철학자 : 과거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과거를 바꿀 수 없다고 한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유효한 수단도 써보지 못한 채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네. 그 결과 어떻게 될까? 나를 둘러싼 세계에 절망하고 인생을 포기하며 살다가 결국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pessimism)에 빠지게 되겠지. 트라우마 이론으로 대표되는 프로이트의 원인론은 형태만 다른 결정론이자 허무주의의 입구일세. 자네는 그런 가치관을 인정할 셈인가?
청년 : 그야 저도 인정하고 싶지는 않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과거의 힘은 그만큼 세다고요!
철학자 : 가능성을 생각하게. 인간이 변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한다면 원인론에 근거한 가치관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자연히 목적론에 입각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말일세. - 46쪽

철학자 : 다시 아들러가 했던 말을 인용해보지.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자네나 Y나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이 주어졌는가’에만 주목하기 때문일세. 그러지 말고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주목하게나. - 53쪽

철학자 : 내가 내 키에 대해 느낀 열등감은 어디까지나 타인과의 비교-다시 말해 인간관계-를 통해 만들어낸 주관적인 감정이었네. 만약 비교해야 할 타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내 키가 작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자네도 지금 이런저런 열등감에 괴로워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객관적인 ‘열등성(劣等性)’이 아니라 주관적인 ‘열등감(劣等感)’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키에 관한 문제조차 주관이 개입하지. - 88쪽

청년 : 요컨대, 우리를 괴롭히는 열등감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이라는 건가요?
철학자 : 그렇지. 나는 "너한테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재능이 있잖아"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네. 내 키도 사람을 편안하게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보면 나름대로 장점이 된다는 것을. 물론 이는 주관적인 해석일세.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 마음대로 생각하는 거지. 그런데 주관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점이 하나 있네. 자신의 뜻대로 선택이 가능하다는 점. 내 키를 장점으로 볼 것인가, 단점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은 모두 주관에 달린 문제라서 나느 어느 쪽이나 선택할 수 있지. - 88, 89쪽

철학자 : 그렇지 않네. 앞서 걸으나 뒤에서 걸으나 관계없어. 쉽게 말해 우리는 세로축이 존재하지 않는 평평한 공간을 걷고 있네. 우리가 걷는 것은 누군가와 경쟁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지금의 나보다 앞서 나가려는 것이야말로 가치가 있다네.
청년 : 선생님은 모든 경쟁에서 자유로우십니까?
철학자 : 물론일세. 지위와 명예를 좇지 않고 재야의 철학자로서 세속의 경쟁과는 연이 없는 삶을 살고 있으니까.
청년 : 그것은 경쟁에서 내려왔음을, 즉 패배를 인정한다는 뜻입니까?
철학자 : 아니. 승부를 다투는 장소에서 물러났다는 표현이 맞겠지. 내가 나로서 살려고 할 때 경쟁은 필히 방해가 된다네. - 107, 108쪽

철학자 : 나는 옳다, 즉 상대는 틀렸다. 그렇게 생각한 시점에서 논쟁의 초점은 ‘주장의 타당성’에서 ‘인간관계의 문제’로 옮겨가네. 즉 ‘나는 옳다’는 확신이 ‘이 사람은 틀렸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는 ‘그러니까 나는 이겨야 한다’며 승패를 다투게 된다네. 이것은 완벽한 권력투쟁일세.
청년 : 으음
철학자 : 애초에 주장의 타당성은 승패와 관계가 없어. 자네가 옳다고 믿는다면 다른 사람의 의견이 어떻든 간에 이야기는 거기서 마무리되어야 하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권력투쟁에 돌입해서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려고 하지. 그러니까 ‘나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곧 ‘패배를 인정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거라네.
청년 : 맞아요. 그런 측면이 있죠.
철학자 : 지고 싶지 않다는 일념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결과적으로 잘못된 길을 선택하게 되지. 잘못을 인정하는 것, 사과하는 것, 권력투쟁에서 물러나는 것. 이런 것들이 전부 패배는 아니야. 우월성 추구란 타안과 경쟁하는 것과는 상관없네. - 123, 124쪽

철학자 : 아들러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과 심리, 양 측면에서 아주 분명한 목표를 제시했지.
청년 : 허, 어떤 목표입니까?
철학자 : 먼저 행동의 목표로는 ‘자립할 것’과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이라는 두 가지를, 이러한 행동을 뒷받침하는 심리적 목표로는 ‘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갖는 것과 그로부터 ‘사람들은 내 친구다’라는 의식을 갖는 것을 제시했네. - 125쪽

철학자 : 함께 있으면 왠지 숨이 막히고 긴장으로 몸이 뻣뻣해지는 관계는, 연예는 가능해도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네. 인간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할 수 있네.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고, 우월함을 과시할 필요도 없는, 평온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할 수 있지. 진정한 사랑이란 그런 걸세. 반면에 구속이란 상대를 지배하려는 마음의 표징이며, 불신이 바닥에 깔린 생각이기도 하지. 내게 불신감을 품은 상대와 한 공간에 있으면 자연스러운 상태로 있을 수 없겠지? 아들러는 말했네. "함께 사이좋게 살고 싶다면, 서로를 대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 133, 134쪽

철학자 : 자네는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네. 나도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기대 같은 것은 만족시킬 필요가 없다는 말일세. - 154쪽

철학자 : 인정받기를 바란 나머지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는 타인의 기대를 따라 살게 되지. 즉 진정한 자신을 버리고 타인의 인생을 살게 되는 거라네. 기억하게. 자네가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타인 역시 ‘자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걸세. 상대가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더라도 화를 내서는 안 돼. 그것이 당연하지. - 155쪽

철학자 : 단적으로 말해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일세.
청년 : 네? 무슨 말씀이신지?
철학자 : 자네가 누군가에게 마움을 받는 것. 그것은 자네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스스로의 방침에 따라 살고 있다는 증표일세.
청년 : 아, 아니. 하지만...
철학자 : 자네 말대로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괴로운 일이야. 가능하면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지 않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며 살면 좋겠지.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다는 건 부자유스러운 동시에 불가능한 일일세. 자유를 행사하려면 대가가 뒤따르네. 자유를 얻으려면 타인에게 미움을 살 수밖에 없어. - 185, 186쪽

철학자 : 인정욕구의 진의를 생각해보게. 사람들이 자신을 얼마나 주목하는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즉 자신의 욕구를 얼마나 만족시켜주는가. ... 인정욕구에 사로잡힌 인간은 얼핏 타인을 보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밖에 보지 않아. ‘나’ 이외에는 관심이 없지. 즉 자기중심적이라네.
청년 : 그러면 저처럼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사람도 자기중심적이라는 말입니까?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쓰고 사람들에게 맞추려고 하는데도요?
철학자 : 그래. ‘나’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의미에서 자기중심적일세. 자네는 타인에게 잘 보이려고 남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걸세. 그것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집착이나 다름없지. - 210쪽

철학자 : 어떤 사람이 과제를 앞에 두고 망설이는 것은 그 사람에게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야. 능력이 있든 없든 ‘과제에 맞설 용기를 잃은 것’이 문제라고 보는 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견해지. 그러면 이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게 뭘까? 잃어버린 용기를 되찾는 것이겠지. - 232쪽

철학자 : 인간은 ‘나는 공동체에 유익한 존재다’라고 느끼면 자신의 가치를 실감한다네. 이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대답이지.
청년 : 나는 공동체에 유익한 존재다?
철학자 : 공동체, 즉 남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것.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을 필요 없이 자신의 주관에 따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게 된다네. 지금까지 논의했던 ‘공동체 감각’이나 ‘용기 부여’에 관한 말도 전부 이와 연결되네. - 236쪽

철학자 : 과제를 분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하네. 우리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바꿀 수가 없어. 하지만 ‘주어진 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내 힘으로 바꿀 수가 있네. 따라서 ‘바꿀 수 없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하란 말이지. 내가 말하는 자기수용이란 이런 거네.
청년 : ...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
철학자 : 그래. 교환이 불가능함을 받아들이는 것. 있는 그대로의 ‘이런 나’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낸다. 그것이 자기수용이야. - 261쪽

철학자 : 편의상 지금까지 자기수용, 타자신뢰, 타자공헌이라는 순서로 설명을 했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되는, 말하자면 순환구조로 연결되어 있네.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인다, 즉 ‘자기수용’을 한다->그러면 배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타자신뢰’를 할 수 있다->타인을 무조건 신뢰하고 그 사람들을 내 친구라고 여기게 되면 ‘타자공헌’을 할 수 있다->타인에게 공헌함으로써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실감하게 되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 즉 ‘자기수용’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수용을 하면... - 276쪽

철학자 : 우리는 좀 더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야 하네. 과거가 보이는 것 같고, 미래가 예측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자네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지 않고 희미한 빛 속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일세. 인생은 찰나의 연속이며,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아. 자네는 과거와 미래를 봄으로써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려하고 있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지 간에 자네의 ‘지금, 여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미래가 어떻게 되든 간에 ‘지금, 여기’에서 생각할 문제는 아니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고 있다면 그런 말은 나오지 않을 걸세.
청년 : 하, 하지만... - 308쪽

철학자 : 프로이트의 원인론에 서게 되면 인생을 원인과 결과로 구성된 하나의 큰 이야기로 보게 된다네.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서, 어떤 어린 시절을 보내고, 어떤 학교를 나와서 어떤 회사에 들어갔는가.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고, 미래의 내가 있다고 하는 식으로 말이야. 확실히 인생을 이야기에 비유하면 재미있고 이해하기도 쉽지. 그래봤자 그 이야기 끝에는 ‘흐릿한 미래’가 보일 뿐이야. 그럼에도 그 이야기에 따라 살려고 하지. 내 인생은 이러니까 이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쁜 것은 내가 아니라 과거인 환경이다. 이렇게 과거를 들먹이며 탓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면죄부를 주는 걸세. 인생의 거짓말과 다름없지. 하지만 인생이란 점의 연속이며, 찰나의 연속이다. 그것을 이해한다면 더는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을 걸세. - 308, 3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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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 - 상처받지 않고 사람을 움직이는 관계의 심리학
양창순 지음 / 센추리원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일 하면서 '까칠하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데, 그것을 딱히 비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쉽게 대충 넘어가는 일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내심 계속 그런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내가 생각하는 '까칠함'이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넘기지 않는, 다소 피곤하기도 하지만 꼼꼼한, 그래서 결국 일적인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면이 많은 태도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이런 태도가 나를 외롭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나 혼자만 당당하다고 주장하는 오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은지, 까칠하면서 외롭거나 고독하지 않은 인간관계를 할 수는 없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는 익숙한 제목의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불행히도 이 책에서는 내가 찾으려던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제목과 달리 이 책은 신경정신과 전문의가 생각하는 삶에 대한 바람직한 방향을 몇 개의 에피소드와 함께 엮어 놓은 책이었다. 프롤로그인 "세상이 내 진심을 알게 하는 법"에서 아주 간략하게 언급한 "그것은 상대방의 의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죄책감 없이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신 '명확하고 간결하게'가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 내 본심을 당당히 표현하는 것이 좋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건강한 까칠함'이다" 정도 외에 "왜 세상은 내 마음을 몰라줄까?", "마음 가는 대로 살아라", "똑똑한 거리두기가 건강한 인간관계를 만든다", 상처받지 않고 사람을 움직이는 관계의 심리학"이라는 각 챕터의 제목과 내용들이 도대체 '까칠함'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음대로 말하거나 마음대로 사는 것이 까칠하게 사는 게 아니지 않은가? 내가 생각하는 까칠함과 저자가 생각하는 그것이 물론 다르기는 하겠지만.


제목에 비해 그 주제에 집중하지 않은 내용이나 처방들이 아쉬웠다.


어차피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일이라면 내 생각을 당당히 주장하는 것이 인간관계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는 직접 경험했다. 그것은 상대방의 의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죄책감 없이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신 `명확하고 간결하게`가 핵심이 되어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하고 나면 상대방도 내 의사를 수용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상대방이 표현을 안 하면 본심을 모른다. 좋아서 좋다고 하는 것인지, 상처가 두려워서 좋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피곤하고 지친 나머지 갈등을 회피하려고 그러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러니 내 본심을 당당히 표현하는 것이 좋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건강한 까칠함`이다. - 9쪽

물론 거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첫 번째는 내 의견에 대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정보가 필요하다. 알지도 못하면서 주장만 한다면 그것은 까칠함이 아니라 무식하고 거친 것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당당하게 자기를 주장하면서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갈등을 수용하고 해결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매너를 지키는 것이다. 음식도 날것으로 먹으면 자칫 소화장애를 동반할 수 있다. 인간의 감정도 서로가 날것인 채로 부딪치다 보면 불필요한 상처가 생길 수밖에 없다. 매너는 그와 같은 날 것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 10쪽

늘 말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지독하게 나르시시즘적인 존재다. 지금 이 순간의 나만큼 세상에 중요한 사람은 없다. 호르헤 보르헤스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 표현한 저 유명한 문장, `수십, 수천 세기의 시간이 흘러가지만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현재뿐이다. 공기 중에, 땅에, 바다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바로 나한테 일어난 일뿐이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보르헤스는 오로지 지금의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어렵다. 자신은 중요하고도 특별한 존재라는 자의식이 우리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는 탓이다. 따라서 남에게 하듯이 나에게 조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면 자신에게도 객관적인 시각을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내게 일어나는 여려 가지 문제 역시 그냥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받아 들이려고 애쓰는 것이다. - 54, 55쪽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인간은 그렇게 외부에서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없으면 이번에는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면서 또한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상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내 안에 있으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들은 무엇인지, 내가 갖고 태어난 잠재능력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외부세계와 대적해서 살아나가면서 자기를 발전시키는 첫번째 과정이다. - 77쪽

<학습된 낙관주의>의 저자 마틴 셀리그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공하려면 인내력이, 다시 말해 실패를 겪어도 포기하지 않는 능력이 필요하다. 난 낙관적인 언어 습관이 바로 인내력의 열쇠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나 역시 그 말에 동의한다. 인생이 때때로 말하는 대로 되어가는 것이 분명하다면 가능한 한 나쁜 언어 습관은 갖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 109쪽

셀리그먼은 언어 습관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생을 연구하기 위해 그들을 십대 시절부터 추적하는 실험을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결과 중의 하나가 바로 그들의 언어 습관이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십대의 일기장 비교에 따르면 좋은 일에 대한 언어 습관은 비교적 들쑥날쑥했다. 그러나 나쁜 일에 대한 언어 습관은 50년 동안 변함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십대 때 자신이 `매력이 없어서` 남자애들이 자기한테 관심이 없다고 쓴 여성은 50년 뒤에도 자신이 `매력이 없어서` 손자들이 놀러 오지 않는다고 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매우 슬픈 일이지만 그녀 역시 평생 말하는 대로 인생이 되어간 셈이다. - 109, 110쪽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스스로를 믿고 사랑해야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는데도 어쩌다 보니 그런 말 자체가 지나치게 진부하고 상투적이 되어버렸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진부하고 상투적이란 건 그만큼 보편적으로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글로 쓰고 강의 주제로 삼는 것일 테지만.
스스로를 믿고 사랑하는 일이 중요한 까닭은, 그렇지 못할 경우 지나치게 남의 말, 남의 판단, 남의 이목에 휘둘리게 되기 때문이다. - 110, 111쪽

무슨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심하게 망설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자신이 그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완벽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는 법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있을 수 없듯이, 완벽한 조건을 갖춘 순간이란 것 역시 애초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별한 기회를 기다리지 마라. 평범한 기회를 잡아서 위대한 것으로 만들라"는 말이 있다. "오직 하느님만이 처음 하는 일도 완벽하게 하는 법이다"란 말도 있다. 완벽주의에 대한 욕구 때문에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유용한 경구가 있을까 싶다. - 125, 126쪽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크게 괴로워하고 갈등에 빠지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내가 아닌 내가 되고자 하는 욕망`에 있지 않던가. 자신과 불화하는 욕망으로 인해 잠재력은 낭비되고 정신은 신경증에 걸리고 결국 인생에는 `손실되었음`이란 꼬리표가 붙고 만다면 이보다 비극적인 일도 없다.
그런데 펄스는 인간이 때로 그런 함정에 빠지는 이유 중의 하나가 현재의 힘을 무시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현실로서 `현재`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집중하다 보면 당연히 갈등에 빠지고 헛된 욕망으로 괴로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마치 아직도 과거 속에 있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 미래가 오늘 벌써 와 있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경우 결코 균형 잡힌 성격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은 이미 지나가버렸거나 아직 오지 않아서 현실에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시간들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 127쪽

매너를 보면 그 사람이 머리가 좋은지 나쁜지 단박에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머리가 나쁘면 매너도 나빠서 "나 이렇게 형편없는 인간이오"하고 사방에 시위를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멋대로 살아간다는 말씀이었다. 평소 매너를 그런 식으로 연관지어 생각해보지 않은 터라 그분 말씀이 흥미로우면서도 곧 수긍이 갔다. - 147, 148쪽

헤밍웨이의 문체는 단순, 간결한 것으로 유명하다. 빙빙 돌리거나 늘어지는 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난 글을 쓰는 내내 어느 정도에서 그치려고 애썼고 그건 엄격하고 유용한 규칙이 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에게 전범이 되어준 사람은 에즈라 파운드였다. 파운드는 작가가 너무 많은 단어를 사용하면 무능력이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 문장론이 분노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지나친 분노는 대개 당사자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것 외에 별 효용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분노야말로 어느 정도에서 그치려고 앴는 편이 좋다. 또한 그것이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유용한 규칙이 되어준다면 삶의 많은 부분에서 낭비와 손실을 줄일 수 있다. - 203쪽

영국 작가 마크 해먼은 말했다.
"세상 그 어떤 일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문하는 태도, 그것이 사라지는 순간 사람들은 늙기 시작한다." - 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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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당신의 욕망이 보인다 - 빅 데이터에서 찾아낸 70억 욕망의 지도
송길영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우선 제목이 너무 매력적이다. <여기에 당신의 욕망이 보인다>라니. 뭔가 은밀하고 내밀한 욕망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 같은 것을 상상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관심법 같은 걸 다루는 것은 아니고, 이미 흔해져 버린 용어 '빅 데이터'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다. 굳이 말하자면, 빅데이터를 알기 위한 입문서의 느낌이라고 할까.


방대한 양의 빅데이터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정보의 덩어리일 뿐이다. 그러나 이 데이터를 분석하고 향방을 예측할 수 있다면 데이터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가 된다. 이런 데이터마이닝을 통하여 기업은 자신들의 제품 판매가 부진한 이유, 현재의 트렌드, 향후의 방향, 전략적 대책들을 알아낼 수 있다. 아이패드, 화장품 모델, 팻다운, 배즙, 카페, 캠핑 등 이 책에서 언급된 많은 예도 기업들이 적절한 타이밍에 데이터를 제대로 분석하였는지에 따라 새로운 도약을 맞이하거나 시장에서 퇴출되어 버리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어(예를 들면, 30-40대를 겨냥한 화장품 광고에 20대인 소녀시대를 모델로 한 탓에 부진한 매출을 이어갔지만, 비오템이라는 다른 화장품 회사는 공효진을 모델로 하여 매출이 늘어났다), 실제 발생한 사실과 현상에 대한 사후적 이해라는 재미도 준다. 


책을 읽다 보니, 이러한 빅테이터의 분석을 기업에서만 활용할 것이 아니라 정부도 채택하여 정부 정책에도 반영시켜보는 것은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여율도 적고 매번 뻔한 결과가 나오는, 그래서 민의를 정확히 분석해내지 못하는 ARS 여론조사가 아니라, 빅데이터의 분석을 통해 현 정치상황에 대한 진단과 평가는 물론 향후 정책에 대한 방향을 잡아본다면, 정치라는 것이 세대간, 계층간, 지역간의 대립의 장이 아니라, 보다 나은 정책 마련을 위한 제안의 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마천루 지수(Sky Scrapper Index)`라는 사회 분위기 지표가 있다. 어떤 나라가 100층짜리 빌딩을 올린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낙관주의가 팽배해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는 것이다. 100층짜리 건물을 올리려면 사업비만 조 단위의 돈이 들어가고, 그것을 지어서 유지하려면 거의 모든 층이 임대돼야 한다. 그런데 낙관주의가 우세하면 이 어마어마한 투자와 임대가 다 완료되고, 이 모습을 본 사람들 사이에 `우리도 한번 해볼까`하는 심리가 발동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잔치는 계속되지 않는다. 투자를 받은 후 건물이 완공되는데는 대략 4년 정도 걸린다. 그때까지 이 건물과 경제상황에 대한 낙관론이 유지될까? 그렇지 않다. 멋들어진 건물이 막 완공될 즈음이면 경제는 조금씩 하강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한다. 캐스티는 자신의 책에서 한국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을 짓겠다고 선언한 사실을 언급했다. 그는 이 건물이 2015년에 완공될 예정이니, 곧 한국 주식이 정점을 찍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 28, 29쪽

우리는 흔히 사회가 거대한 사건을 계기로 변화한다고 생각한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저격사건을 계기로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식이다. 그러나 존 캐스티는 그러한 통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사회가 이미 한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무작위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 가운데 변화의 방향에 부합하는 것들을 사회가 `선택`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사회가 사건을 선택하는 메커니즘이 곧 `대중의 직관`이다. 핵발전이나 스마트폰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처럼 거대한 사건들은 미래의 변화를 활성화하는 촉매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 자체가 변화의 원인은 아니다. - 30쪽

그보다는 눈에 보이는 거대한 변화의 이면, 즉 어떤 음식을 먹을지, 어떤 TV 프로그램을 볼지 같은 수많은 자잘한 선택과, 그런 선택을 하는 사회 구성원들의 상호작용에 주목해야 한다. 선택이란 사회 구성원들의 이성적, 감성적 판단을 기초로 이루어지며, 이에 따른 선택의 결과를 통해 어떤 사건이나 유행, 경향이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배척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진화론적인 생로병사가 되어 문화나 일상의 `미래`가 된다. 수많은 `미래의 가능태`들 가운데 사회 구성원의 정서와 기호에 부합하는 것들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적자생존의 논리에 따라 도태된다는 것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미래는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한다는 의미다. 새로운 현상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우연히 생겨나지 않는다. - 30, 31쪽

기술적인 면에서의 발전은 눈부시다. 흔히 빅 데이터라 함은 `기존의 방법으로 분석하기에 너무 큰 데이터(too big to handle)`를 뜻한다. 그러나 데이터를 수집, 분석, 관리하는 기술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발전하고 있다. 어찌 보면 `빅 데이터`라는 단어가 오늘날처럼 흔히 쓰인다는 사실 자체가 데이터를 실용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 만큼 방대한 데이터를 다루는 기술이 발전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핵심은 자연어 처리 기술이다.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정보의 90%는 문자나 사진, 동영상 같은 비정형(unstructured) 데이터다. 이제 우리는 길게 두서없이 써내려간 한국어 텍스트를 분석해 측정 가능하고(scalable, countable) 구조화된(structured) 데이터를 산출할 수 있다. 소셜미디어에 어떤 키워드가 나왔는지(발현), 그것이 늘었는지 줄었는지(추세), 어떤 키워드와 연관돼 있는지(연관성) 등을 계측해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추출해낼 수 있게 됐다. - 42쪽

빅 데이터의 의의는 `사고의 확장`에 있다. 이는 데이터의 양과 크기가 아니라, 시각의 고도(高度)와 조망에 관한 것이다. 숲을 보려면 숲 밖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산 위로 올라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데이터로부터 의미 있는 통찰을 얻으려면 시각 자체를 더 위로 올려야 한다. 고도가 높을수록 더 멀리, 더 넓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무리 속에서는 결코 접할 수 없는 바깥쪽을 보기 위해, 기존과 다르게 보고, 그 이상을 보기 위해 빅 데이터를 활용하자는 것이다. - 71, 72쪽

기업마다 그런 아이디어가 수천 가지는 될 것이다. 예전에 어느 기업에 가서 새로운 모바일폰 아이디어를 낸 적이 있는데, 그때 이런 말을 들었다. "그건 우리 회사에 있는 3,000가지 아이디어 중 하나예요."
그들이 그 3,000개 아이디어를 다시 열어볼 날이 있을까? 타당성을 입증할 증거가 없기 때문에 아이디어를 쌓아놓기만 하고, 다시는 열지 않는다. 그 아이디어가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만에 하나 실패했을 때 책임지기도 싫으니까. 그래서 업력(業歷)이 오래될수록 파괴적 혁신이 힘들다. 안 되는 이유를 너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 155, 156쪽

소비자들로서는 짜증난다. 필요 없는데도 자꾸 우기니. 사람들은 제품에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소비자들의 니즈와 욕망이다. 니즈란 것은 솔루션을 기대하게 마련이니, 니즈를 보고 솔루션을 만들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사갈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니즈가 없는 솔루션을 자꾸 팔려고 한다. 재차 강조하지만, 솔루션이 아니라 니즈가 먼저다. - 158, 159쪽

진화론이 우리에게 준 교훈이 있다면, 미래는 과거나 현재와 단절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일깨운 것이다. 과거에 선택받은 존재들이 현재에 남은 것이고, 현재에 선택받은 것들이 미래로 간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이 선택하는 바를 알면 미래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선택받은 것은 계속 진화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사멸할 것이므로. 과거, 현재, 미래가 분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의 선호(選好)를 가지고 풀어나가면 미래의 닫혀 있는 문을 열 수 있다. 이것이 트렌드 예측이요, 데이터마이닝의 가치다. - 171쪽

욕망을 조절하는 출발점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다. 기업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책임과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볼 때, 우리 기업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 걸맞은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유산, 즉 `헤리티지`다. 이 연장선 상에서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가치를 고민해보아야 한다.
이와 함께 눈에 보이는 가치보다 한 단계 위의 상위가치를 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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