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유행에 따라 책을 읽고 싶지 않다는 다짐 때문일까? "나는 베스트셀러는 믿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곤 했다. 그러면서도 내 장바구니나 보관함에는 항상 당시의 베스트셀러들이 담겨 있었다. 아닌 척은 해도 결국 나도 지금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관심과 유행이 무엇인지를 흘끔거리며 궁금해 하는 속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된 지 많은 시간이 흘러서 읽게 되었다. 몇 주 반짝였던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내 기억에는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에게 1위를 내어주기 전까지) 꽤 오랜 기간 상위에 랭크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상하게도 상위 랭킹에서 떨어지자 비로소 이 책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프로이트나 융이야 워낙에 유명한 이름이어서 심리학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의 귀에도 흔한 이름이지만, 아들러라는 이름은 내게 생소했다. 더욱이 그가 프로이트, 융과 함께 3대 심리학자라고 일컬어진다고 하니, 이쯤이면 나의 무지를 탓할만 하다.


아들러의 심리학은 프로이트의 심리학과 대비된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원인론'이라고 한다면, 아들러의 심리학은 '목적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전자에 따르면, 지금의 나의 상태는 과거의 어떠한 원인으로 인해 형성된 것이며, 미래의 나 또한 현재의 모습이 투영된 것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내가 경험했던 과거의 '트라우마'와 같은 것이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후자에 의하면,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질 수는 없겠으나) 현재를 결정하는 건 과거의 그 사건이 아니라 그것을 통한 경험에 내가 어떠한 의미를 부여했느냐이다. 따라서 인과관계가 아닌 내 삶의 목적을 회복함으로써 보다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결국 필요한 것은 과거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를 변화시키기 위한 '용기'뿐이다. 그래서 아들러의 심리학을 '용기의 심리학'이라고도 한다.


이 책의 제목인 '미움받을 용기'는 스스로 자유롭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미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따온 것 같다. 자기 중심적인 인정욕구에서 벗어나 타인이 바라는 내 모습을 버리고, 나 또한 타인에게 내 바람을 강요하지 않음으로써 내가 원하는 자유로운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누군가가 부모를 빨리 실망시킬수록 자식이 빨리 자립하게 된다고 한 우스개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런 것도 일맥상통하는 것일까. 


과거의 트라우마에 빠져 현재의 삶을 망치는 것, 타인과 경쟁하느라 스스로 불행해지는 것,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려고 눈치를 보는 것... 현대인들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이것들은 '지금, 여기'의 삶을 방해하는 것들이다. 아들러는 이와 같은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했는데, 행동적 측면에서는 '자립할 것'과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을, 심리적 측면에서는 '내게 능력이 있'으며, '사람들은 내 친구'라는 의식을 갖는 것이다. 구체적인 목표라고는 했지만, 이런 뻔한 도덕 교과서 수준의 이야기를 목표라고 제시하는 것에 답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 속 철학자의 설명을 끝까지 경청하다보면 행동적 측면을 통하여 자기수용을, 심리적 측면을 통하여 타자신뢰와 타자공헌을 함으로써 나를 인정하고, 남과 비교하지 않으며, 내 본연의 삶을 찾을 수 있다는 논리에 수긍하게 된다.


저자인 기시미 이치로가 플라톤 철학과 아들러 심리학을 공부해서인지는 몰라도 책의 구성은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처럼 철학자와 청년이 대화를 하며 기존 관념의 오류를 바로잡고 새로운 인식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심리학 책이지만 아들러 심리학의 이론을 그렇게 어렵지 않게 대화를 하듯 읽을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철학자 :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지. 객관적인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네. 자네가 보는 세계와 내가 보는 세계는 달라.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세계일 테지. - 12쪽

철학자 : 아들러 심리학은 트라우마를 명백히 부정하네. 이런 면이 굉장히 새롭고 획기적이지. 분명히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이론은 흥미진진한 데가 있어. 마음의 상처(트라우마)가 현재의 불행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인생을 거대한 ‘이야기’라고 봤을 때, 그 이해하기 쉬운 인과법칙과 드라마틱한 전개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매력이 있어. 하지만 아들러는 트라우마 이론을 부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네.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즉 트라우마-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 36쪽

청년 :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철학자 : 말 그대로일세.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한다는 말이지. 가령 엄청난 재해를 당했다거나 어린 시절에 학대를 받았다면, 그런 일이 인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네. 분명히 영향이 남을 테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이 무언가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점이야.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네. 인생이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걸세. 어떻게 사는가도 자기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고. - 36, 37쪽

철학자 : 과거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과거를 바꿀 수 없다고 한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유효한 수단도 써보지 못한 채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네. 그 결과 어떻게 될까? 나를 둘러싼 세계에 절망하고 인생을 포기하며 살다가 결국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pessimism)에 빠지게 되겠지. 트라우마 이론으로 대표되는 프로이트의 원인론은 형태만 다른 결정론이자 허무주의의 입구일세. 자네는 그런 가치관을 인정할 셈인가?
청년 : 그야 저도 인정하고 싶지는 않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과거의 힘은 그만큼 세다고요!
철학자 : 가능성을 생각하게. 인간이 변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한다면 원인론에 근거한 가치관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자연히 목적론에 입각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말일세. - 46쪽

철학자 : 다시 아들러가 했던 말을 인용해보지.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자네나 Y나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이 주어졌는가’에만 주목하기 때문일세. 그러지 말고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주목하게나. - 53쪽

철학자 : 내가 내 키에 대해 느낀 열등감은 어디까지나 타인과의 비교-다시 말해 인간관계-를 통해 만들어낸 주관적인 감정이었네. 만약 비교해야 할 타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내 키가 작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자네도 지금 이런저런 열등감에 괴로워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객관적인 ‘열등성(劣等性)’이 아니라 주관적인 ‘열등감(劣等感)’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키에 관한 문제조차 주관이 개입하지. - 88쪽

청년 : 요컨대, 우리를 괴롭히는 열등감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이라는 건가요?
철학자 : 그렇지. 나는 "너한테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재능이 있잖아"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네. 내 키도 사람을 편안하게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보면 나름대로 장점이 된다는 것을. 물론 이는 주관적인 해석일세.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 마음대로 생각하는 거지. 그런데 주관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점이 하나 있네. 자신의 뜻대로 선택이 가능하다는 점. 내 키를 장점으로 볼 것인가, 단점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은 모두 주관에 달린 문제라서 나느 어느 쪽이나 선택할 수 있지. - 88, 89쪽

철학자 : 그렇지 않네. 앞서 걸으나 뒤에서 걸으나 관계없어. 쉽게 말해 우리는 세로축이 존재하지 않는 평평한 공간을 걷고 있네. 우리가 걷는 것은 누군가와 경쟁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지금의 나보다 앞서 나가려는 것이야말로 가치가 있다네.
청년 : 선생님은 모든 경쟁에서 자유로우십니까?
철학자 : 물론일세. 지위와 명예를 좇지 않고 재야의 철학자로서 세속의 경쟁과는 연이 없는 삶을 살고 있으니까.
청년 : 그것은 경쟁에서 내려왔음을, 즉 패배를 인정한다는 뜻입니까?
철학자 : 아니. 승부를 다투는 장소에서 물러났다는 표현이 맞겠지. 내가 나로서 살려고 할 때 경쟁은 필히 방해가 된다네. - 107, 108쪽

철학자 : 나는 옳다, 즉 상대는 틀렸다. 그렇게 생각한 시점에서 논쟁의 초점은 ‘주장의 타당성’에서 ‘인간관계의 문제’로 옮겨가네. 즉 ‘나는 옳다’는 확신이 ‘이 사람은 틀렸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는 ‘그러니까 나는 이겨야 한다’며 승패를 다투게 된다네. 이것은 완벽한 권력투쟁일세.
청년 : 으음
철학자 : 애초에 주장의 타당성은 승패와 관계가 없어. 자네가 옳다고 믿는다면 다른 사람의 의견이 어떻든 간에 이야기는 거기서 마무리되어야 하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권력투쟁에 돌입해서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려고 하지. 그러니까 ‘나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곧 ‘패배를 인정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거라네.
청년 : 맞아요. 그런 측면이 있죠.
철학자 : 지고 싶지 않다는 일념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결과적으로 잘못된 길을 선택하게 되지. 잘못을 인정하는 것, 사과하는 것, 권력투쟁에서 물러나는 것. 이런 것들이 전부 패배는 아니야. 우월성 추구란 타안과 경쟁하는 것과는 상관없네. - 123, 124쪽

철학자 : 아들러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과 심리, 양 측면에서 아주 분명한 목표를 제시했지.
청년 : 허, 어떤 목표입니까?
철학자 : 먼저 행동의 목표로는 ‘자립할 것’과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이라는 두 가지를, 이러한 행동을 뒷받침하는 심리적 목표로는 ‘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갖는 것과 그로부터 ‘사람들은 내 친구다’라는 의식을 갖는 것을 제시했네. - 125쪽

철학자 : 함께 있으면 왠지 숨이 막히고 긴장으로 몸이 뻣뻣해지는 관계는, 연예는 가능해도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네. 인간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할 수 있네.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고, 우월함을 과시할 필요도 없는, 평온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할 수 있지. 진정한 사랑이란 그런 걸세. 반면에 구속이란 상대를 지배하려는 마음의 표징이며, 불신이 바닥에 깔린 생각이기도 하지. 내게 불신감을 품은 상대와 한 공간에 있으면 자연스러운 상태로 있을 수 없겠지? 아들러는 말했네. "함께 사이좋게 살고 싶다면, 서로를 대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 133, 134쪽

철학자 : 자네는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네. 나도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기대 같은 것은 만족시킬 필요가 없다는 말일세. - 154쪽

철학자 : 인정받기를 바란 나머지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는 타인의 기대를 따라 살게 되지. 즉 진정한 자신을 버리고 타인의 인생을 살게 되는 거라네. 기억하게. 자네가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타인 역시 ‘자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걸세. 상대가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더라도 화를 내서는 안 돼. 그것이 당연하지. - 155쪽

철학자 : 단적으로 말해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일세.
청년 : 네? 무슨 말씀이신지?
철학자 : 자네가 누군가에게 마움을 받는 것. 그것은 자네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스스로의 방침에 따라 살고 있다는 증표일세.
청년 : 아, 아니. 하지만...
철학자 : 자네 말대로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괴로운 일이야. 가능하면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지 않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며 살면 좋겠지.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다는 건 부자유스러운 동시에 불가능한 일일세. 자유를 행사하려면 대가가 뒤따르네. 자유를 얻으려면 타인에게 미움을 살 수밖에 없어. - 185, 186쪽

철학자 : 인정욕구의 진의를 생각해보게. 사람들이 자신을 얼마나 주목하는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즉 자신의 욕구를 얼마나 만족시켜주는가. ... 인정욕구에 사로잡힌 인간은 얼핏 타인을 보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밖에 보지 않아. ‘나’ 이외에는 관심이 없지. 즉 자기중심적이라네.
청년 : 그러면 저처럼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사람도 자기중심적이라는 말입니까?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쓰고 사람들에게 맞추려고 하는데도요?
철학자 : 그래. ‘나’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의미에서 자기중심적일세. 자네는 타인에게 잘 보이려고 남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걸세. 그것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집착이나 다름없지. - 210쪽

철학자 : 어떤 사람이 과제를 앞에 두고 망설이는 것은 그 사람에게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야. 능력이 있든 없든 ‘과제에 맞설 용기를 잃은 것’이 문제라고 보는 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견해지. 그러면 이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게 뭘까? 잃어버린 용기를 되찾는 것이겠지. - 232쪽

철학자 : 인간은 ‘나는 공동체에 유익한 존재다’라고 느끼면 자신의 가치를 실감한다네. 이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대답이지.
청년 : 나는 공동체에 유익한 존재다?
철학자 : 공동체, 즉 남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것.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을 필요 없이 자신의 주관에 따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게 된다네. 지금까지 논의했던 ‘공동체 감각’이나 ‘용기 부여’에 관한 말도 전부 이와 연결되네. - 236쪽

철학자 : 과제를 분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하네. 우리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바꿀 수가 없어. 하지만 ‘주어진 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내 힘으로 바꿀 수가 있네. 따라서 ‘바꿀 수 없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하란 말이지. 내가 말하는 자기수용이란 이런 거네.
청년 : ...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
철학자 : 그래. 교환이 불가능함을 받아들이는 것. 있는 그대로의 ‘이런 나’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낸다. 그것이 자기수용이야. - 261쪽

철학자 : 편의상 지금까지 자기수용, 타자신뢰, 타자공헌이라는 순서로 설명을 했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되는, 말하자면 순환구조로 연결되어 있네.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인다, 즉 ‘자기수용’을 한다->그러면 배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타자신뢰’를 할 수 있다->타인을 무조건 신뢰하고 그 사람들을 내 친구라고 여기게 되면 ‘타자공헌’을 할 수 있다->타인에게 공헌함으로써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실감하게 되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 즉 ‘자기수용’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수용을 하면... - 276쪽

철학자 : 우리는 좀 더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야 하네. 과거가 보이는 것 같고, 미래가 예측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자네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지 않고 희미한 빛 속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일세. 인생은 찰나의 연속이며,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아. 자네는 과거와 미래를 봄으로써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려하고 있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지 간에 자네의 ‘지금, 여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미래가 어떻게 되든 간에 ‘지금, 여기’에서 생각할 문제는 아니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고 있다면 그런 말은 나오지 않을 걸세.
청년 : 하, 하지만... - 308쪽

철학자 : 프로이트의 원인론에 서게 되면 인생을 원인과 결과로 구성된 하나의 큰 이야기로 보게 된다네.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서, 어떤 어린 시절을 보내고, 어떤 학교를 나와서 어떤 회사에 들어갔는가.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고, 미래의 내가 있다고 하는 식으로 말이야. 확실히 인생을 이야기에 비유하면 재미있고 이해하기도 쉽지. 그래봤자 그 이야기 끝에는 ‘흐릿한 미래’가 보일 뿐이야. 그럼에도 그 이야기에 따라 살려고 하지. 내 인생은 이러니까 이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쁜 것은 내가 아니라 과거인 환경이다. 이렇게 과거를 들먹이며 탓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면죄부를 주는 걸세. 인생의 거짓말과 다름없지. 하지만 인생이란 점의 연속이며, 찰나의 연속이다. 그것을 이해한다면 더는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을 걸세. - 308, 3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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