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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에 이어 올해 '페미니즘'에 관하여 읽은 세번째 책이다. 최근에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와 저변을 넓이기 위한 노력들이 TED는 물론이고 서적을 통해서도 활발하게 진행되는 것 같다. 그래서 왠만하면 페미니즘 관련 신간들은 챙겨보려는 욕심이 있다. 이런 책들을 읽을 수록 완전히는 아니라도 '평등'이라는 개념에 조금은 다가서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정희진은 이 책의 추천사에서 제목에 포함되어 있는 '나쁜(bad)'의 뜻을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부족한', '못 미치는', '완벽하게 훌륭하지 못한'이라는 뜻으로 읽힌다고 했다. 즉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말의 뜻은 (남자들에게) 나쁘거나 독한 페미니스트라는 뜻이 아니라, '부족한 페미니스트'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저자인 록산 게이도 책에서 '소문자의 페미니즘(feminism)'과 대문자로 시작하는 '페미니즘(Feminism)' 혹은 '근본주의 페미니즘'을 구분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 말은 올바른 단 하나의 페미니즘의 관념에 사로잡혀 심지어 여성들 조차도 페미니스트이기를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곤 하는데, 실상 페미니즘은 어떤 대단한 사상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성 평등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매우 이상적인 페미니즘 외에도 각자에 맞는(소문자 형태의) 다양한 페미니즘이 존재하며, 평등을 추구하는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왠지 사상이 자유로울 것 같고, 개인주의적인 상식과 태도가 수용되어 있는 미국은 다를 것 같았는데, 그곳에서도 역시 페미니즘에 대한 굳은 편견과 오해는 만연하였다. 이러한 편견들은 여성에 대한 혐오를 확대하는 한편 차별을 너무나도 쉽게 정당화 한다. 사회에 만연해 있는 여성 신체에 대한 성적인 희롱,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자유를 구속하는 성추행이나 성폭행, 자기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빼앗는 생식의 자유(reproductive freedom) 제한의 예가 책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9페이지 분량의 서문만 읽어보더라도 페미니즘에 대한 편안한 이해가 가능할 정도로 글이 쉽고 간결하다. 기본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서문만 읽는 것으로도 충분할 정도이다. 본문에서는 미국 대중사회에 나타난 여성차별의 문제점들, 이를테면 성폭행, 낙태 제한, 공중파에서의 성희롱을 다루기도 하지만, <헝거게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나를 찾아줘>와 같이 국내에 번역된 소설들을 저자의 소문자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내용도 있다. 젠더를 중심으로 서술된 1부와 2부에 이어 제3부에서는 영화 <헬프>, <장고>, <노예 12년>을 관람평을 통하여 페미니즘을 미국 사회 내에서의 유색 인종 차별이라는 영역으로 확대하고 있어서, 소설이나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자기의 생각과 저자의 것을 비교하며 재미 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저자는 이러한 자신의 견해들이 불완전한 것이며, 자신도 수시로 흔들리는 모순덩어리의 인간임을 상기시킨다. 처음에는 저자 역시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가 부담스러웠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임을 주장하는 것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연한 차별(본문에서는 "개똥 같은 취급"이라 했다)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대로 페미니스트가 아닌 것보다는 차라리 나쁜 페미니스트로 남는 것이 훨씬 낫다.
나를 따라다닐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를 환영한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이니까. 그래서 엉망진창이니까. 누군가의 본보기가 되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는다. 완벽하려 하지 않는다. 내가 모든 해답을 갖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전부 옳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내가 믿고 있는 것을 지지하고, 이 세상에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내 글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면서도 온전히 나 자신으로 남고 싶을 뿐이다. 핑크색을 사랑하고 섹스를 좋아하고 가끔은 여성을 끔찍하게 표현한 노래에 엉덩이를 흔들기도 하고 때로는 정비공이나 수리 기사에게 마초 대점을 해주면 내게 이익이라는 것을 알기에 일부러 더 멍청한 척을 하는 이런 여자로 남고 싶을 뿐이다. - 14쪽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페미니즘을 부인하곤 했다. 나는 왜 여성들이 아직까지도 페미니즘을 부인하고 페미니즘과 거리를 두려다 자기 발에 자기가 걸려 넘어지는지 이해한다. 내가 가끔 손사래를 치며 나는 절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한 이유는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것이 마치 인신공격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현실에서 이 단어가 그런 의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 시절 누가 날 페미니스트라고 불렀을 때 최초로 떠오른 문장은 이것이었다. 왜 그러지? 나 페미니스트 아니야. 나 남자한테 오럴 섹스 해줄 수 있단 말이야. 그때 내 머릿속에는 페미니스트인 동시에 성적으로 개방적인 여자일 수 없다는 개념이 들어차 있었다. 물론 십 대와 이십 대는 이외에도 온갖 덜떨어진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 있었던 시기이긴 하다. - 14, 15쪽
나는 페미니즘을 부인했다. 이 운동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스트라는 소리를 들으면 이런 말로 들렸다. "너는 성깔 있고 섹스 싫어하고 남성 혐오에 찌든, 여자 같지 않은 여자 사람이야." 이런 우수꽝스러운 캐리커처는 페미니즘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 페미니즘이 성공하면 잃을 것이 가장 많은 사람들에 의해 조작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 15쪽
나는 페미니즘을 되도록 단순하게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페미니즘이 어렵고 복잡한 개념이고 지금도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으며 빈틈도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저 이렇게 생각할 뿐이다. 페미니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도 못하고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권리를 믿는다. 여성에게는 자신의 몸을 지킬 자유가 있고 필요할 때는 복잡한 절차 없이 의료 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남녀가 같은 일을 했을 때 동일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선택이기도 하다. 어떤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지 않다면 그 역시 그녀의 권리이기에 존중한다. 하지만 그녀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 또한 나의 의무이며, 나라면 하지 않을 법한 선택을 하는 여성들을 지지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근본 원칙이라고 믿는다. - 16쪽
하지만 페미니즘에 대해 배우면 배울수록 `소문자의 페미니즘(feminism)`과 대문자로 시작하는 `페미니즘(Feminism)` 혹은 `페미니스트(Feminist)` 혹은 단 하나의 진짜 페미니즘이 모든 여성 인류를 지배한다는 `근본주의 페미니즘`의 개념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페미니즘이 어떤 대단한 사상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성 평등임을 안 순간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건 놀라울 정도로 쉬워졌다. 페미니즘은 우리 사이 교집합을 찾기 위해, 우리가 누구이고 어떻게 이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하는지 알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편이다. - 16, 17쪽
남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그것을 가볍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 26쪽
남자들이 그럴 수도 있다고 한 번도 아니라 여러 번 우리는 당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유명한 남자건, 악명 높은 남자건, 전혀 유명하지 않은 남자건 남성이 여성을 학대할 수 있다고 믿게 내버려 두었다. 그럴 때마다 못 본 척했고 핑계를 만들어 냈다. 이 남자들의 나쁜 행동도 괜찮다고 하고 오히려 멋지다고까지 했다. 우리는 당신에게 이 사회에 젊은 여자를 위한 자리는 없다고 말했다. 아마도 우리는 이런 메시지들을 너무나 자주, 정기적으로, 일관적으로 전달하면서 당신이 눈을 똑바로 뜬 채, 팔을 벌린 채로 폭력적이고 끔찍한 세상으로 달려가도 된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 46쪽
대게 젠더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인 프레임 안에서 논의되곤 한다. 남자는 화성에서 왔고 여자들은 금성에서 왔다. 아니 그렇다고들 한다. 마치 남자와 여자는 태초부터 너무 다르게 태어났기에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젠더 문제를 이야기하다 보면 화성과 금성이 실은 같은 태양계 안에 있으며 생각보다 가까운 행성이란 사실을 잊게 된다. 사실 이 두 행성 사이에는 지구나는 하나의 행성 밖에 없으며 둘은 같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으며 같은 광선 안에 머물고 있다. 안타깝게도 최근에 출간된 많은 책들은 젠더에 관해 생산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편협한 시각으로 여성과 남성을 분리하여 바라보고 젠더 문제를 조금 더 신중하게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렸다. - 127쪽
어째서 여성이 더 야심이 넘치고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일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투표를 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워야 했고, 집 밖에서 일을 해보겠다고 기를 쓰고 싸워야 했고, 성희롱 없는 근무 환경에서 일하기 위해 싸워야 했고, 대학이나 학과를 스스로 선택하기 위해 싸워 왔으며, 작은 자리라도 차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나를 증명하고 또 증명해 내야 했다. - 130쪽
나는 동정과 연민이 한정된 자원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도 않다. 크건. 작건. 비극이. 부르면. 연민이. 응답한다. 가슴이. 응답한다. - 262쪽
아, 불쌍한 페미니즘이여. 페미니즘의 어깨에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 운동의 일차적 목표는 모든 분야에서의 양성평등임을 잊지 말자. - 364쪽
한때 내 머릿속에는 페미니스트는 특정한 부류의 여성들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페미니스트라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확한 신화를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전투적이고 정치적이며 인간으로서 완벽하고 남자를 증오하고 유머가 없는 사람들. 이러한 신화에 속았다. 나는 이런 신화에 속지 않을 만큼 똑똑한 사람이기에 이런 과거가 자랑스럽지 않고 더 이상은 속지 않으려 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정중하게 거절하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다. - 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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