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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아킴 데 포사다 지음, 이의수 옮김 / 인사이트북스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한때 자기계발서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특히 특정한 행동패턴을 열거하며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듣기 좋은 혹은 선문답 같은 한 두 문장을 던지며 시종일관 그와 유사한 말만 되풀이 하는, 그러면서 적당한 삽화로 승부하는 그런 책들은 정말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런 책을 만들기 위해 희생된 나무들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니 차츰 무뎌지는 것인지 너무 그렇게 빡빡한 기준으로 독서를 안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전혀 읽지 않는 것보다는 그런 책이라도 읽는 게 낫다는 생각도 한다.


사람마다 책을 읽는 이유나 효용이 다양하겠지만, 내게 이와 같은 얇은 자기계발서는 일종의 '슬럼프 극복용'이다. 그런데 그 슬럼프라는 것이 삶의 슬럼프가 아닌 독서 슬럼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거나 중간에 읽던 책을 다시 펴기가 싫을 때에는 다 포기하고 새로운 책을 찾을 때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때 묵직하고 신경써서 읽어야 하는 책을 고르기보다는 가볍고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는 것을 찾게 된다. 독서라는 습관을 멈추지 않아도 되고 어찌되었던 한 권을 다 읽었다는 행위의 완료는 독서에 대한 성취감과 함께 다시 다른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내게 여유와 동기를 부여해준다.


삶을 대하는 태도나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게 과연 학습될 수 있는 것일까? 자기계발서를 대할 때면 나는 종종 그런 의문이 든다. 물론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라'라든가 '현재를 살아라' 같은 어떤 상황에 쓰여도 통용될 수 있을 것 같은 말들도 있긴 하지만, (굳이 '주의(ism)'를 선택하라면 경험주의자임을 주장하는 나는) 자기계발서를 읽는 것이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기는 아무래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물론 '변해야 겠다'는 생각을 갖기 위한 간접적인 계기는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한 권이 아닌 몇 권의 책을 통하여 스스로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여야 가능한 일이다.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성공한다는 것은 모두 현재의 틀을 깨야만 가능하다고들 한다. (자기계발서는 대부분 개인을 둘러싼 현재의 상태를 뭔가 부족하고 불만족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는 것 쯤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갇혀 있는 현재라는 틀을 깨기 위해서는 (뻔한 진리이지만)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아야 한다. 내가 즐길 수 없는 일은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속하지 못하면 성공이고 뭐고 없다. 그런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이것은 학습을 통해 알아낼 수도 없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것이어서, 오로지 자기만의 방식으로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은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포인트나 책을 읽은 후의 감상들이 다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핵심은 본문에 등장하는 이 질문이다. “100미터라 가정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면 몇 미터를 파야 할까?” 대부분 나를 알기 위해서는 더 깊이 파고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답이 고작 1미터라는 것을 들으면, 이 질문이 how much 보다 더 중요한 의문사 where를 생략해버린 반쪽짜리 질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1미터만 파더라도 자신을 온전히 알 수 있으려면 '정확한' 지점을 파야 한다. 즉 이 질문의 숨겨진 핵심은 자기를 알고자 함에 있어서도 무조건 열심히 노력해서 깊이 파들어가라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지점을 포착하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섣부른 행동들은 크고 작은 좌절의 연속이라는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무턱대고 알을 깨려고 하기 전에 조금 더 자신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아니, 그 전에 현재라는 알을 깰 필요가 있는지부터 고민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모두들 '변화'를 말하지만, 그 변화라는 것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모델에 나 자신의 스펙을 기계적으로 맞추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 이상적인 모델은 결국 나의 이상일 뿐이니, 따지고 보면 변화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제대로 알고 내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숙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한편의 짧은 이야기 속에서는 주인공인 올리버의 재능을 우연히 알게 된 필란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드디어 올리버가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세상 밖으로 나서게 된다. 비록 현실의 우리에게 이런 행운이 함께할 리는 없겠지만, 부족한 상황과 배경 가운데에서도 진심으로 나를 위로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지속하고, 그들의 조언을 가벼히 여기지 않으며, 내 욕망과 그들이 발견한 내 모습이 일치하는 지점을 탐색하는 것만으로도 (성공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히 좋은 삶을 기대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 인간은 전부 고독해. 남을 잘 모르기 때문이지. 또한 나 자신도 잘 모르기 때문이지. 하지만 인간의 고독감은 삶의 공포일 뿐이야." - 20쪽

"왼발은 단순한 방문객이고 오른발은 손님이라고 했잖아. 병원은 너에게 단순한 곳이 아니라는 뜻이야. 그곳에 있는 죽음은 사실 우리 모두에게 익숙해져야 할 것이지. 우리는 어둠 속에서 태어나 잠시 밝은 세상에서 살다가 결국 다시 어둠으로 돌아가지."
머리가 지끈거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짧은 순간에 어떻게 살 것인가야. 그것이 우리의 숙제이지." - 24쪽

"그런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마. 네 가슴의 깊이는 몇 미터일까?"
나는 그런 생뚱맞은 질문에는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100미터라 가정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면 몇 미터를 파야 할까?"
"적어도 50미터는 파야 하지 않을까?"
"틀렸어. 단 1미터만 파면 돼." - 48쪽

"배운다는 것은, 그런 말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돼.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아야 해. 깨달은 뒤에는 행동을 해야 하지. 하지만 나는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행동 할 수 없었어." - 57쪽

"그것이 무엇이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네 마음을 속여서는 안 돼. 특히 사랑은 속이기 어렵지. 사랑은 꽃과 같은 거야. 그 향기가 반드시 퍼지기 때문에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지. 하지만 그 꽃을 따기 위해서는 벼랑 끝까지 갈 용기가 있어야 해." - 58쪽

"올리버, 가장 중요한 것이 뭔지 아니? 나 자신을 정확하게 알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란다." - 107쪽

"우리 인생에는 적어도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들 하지. 하지만 그 말은 틀렸단다. 기회는 백 번이 올 수도 있고, 천 번이 올 수도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그 기회를 알아보는 것이야. 더욱더 중요한 것은 그 기회를 내 자신이 만드는 것이지." - 119쪽

우리가 실제로 인정하는 일들과 성공으로 평가하는 일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두려움보다 긍정적 마음으로 시작한 일들이 성공을 가져온다. 불가능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할 때 성공은 시작된다. 실패하는 사람은 성공의 문턱에서 포기할 때가 많다. 오늘 나의 삶이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핑계는 끝이 없다. 하지만 내가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 하나를 찾으면 나의 발목을 붙잡는 허다한 이유들은 자취를 감춘다. - 170, 171(역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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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7-19 1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기계발서대로 살아가기가 어렵고도 힘든 것 같아요. 의지력이 부족한 원인도 있겠지만, 언제 생길지도 모르는 주변 환경의 변화도 무시 못 하죠.

붉은눈 2016-07-19 17:12   좋아요 0 | URL
동감입니다. 이제 더이상 자기계발에 현혹당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자기만족으로 살아보려고 해도 주변을 보면 그러기가 쉽지 않지요.
 
판결 VS 판결 - 법대로 하는데 왜 판결은 다를까?
김용국 지음 / 개마고원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법이라는 것. ‘정의’라는 관념과 같이 읽기에는 왠지 거창한 것 같고, ‘판례’라는 용어와 같이 읽기에는 매우 복잡해 보이며, ‘생활’이라는 단어와 같이 읽더라도 뭔가 불명확하게 다가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법과 관련된 교양서들을 챙겨보려고 노력한다. 조국의 <나는 왜 법을 공부하는가>와 같은 자기고백적 에세이에서부터 봉욱의 <미국의 힘 예일 로스쿨>과 같은 리포트 형식의 글, 김욱의 <법을 보는 법>이나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와 같은 말 그대로의 교양서, 금태섭의 <디케의 눈>, 김두식의 <헌법의 풍경>과 같은 보다 현실적인 해설을 포함하여, 박홍규의 <그들이 헌법을 죽였다> 같은 학계 비판적 글과 임종인의 <법률사무소 김앤장>, 김두식의 <불멸의 신성가족>,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와 같은 법조계에 대한 고발과 자성의 목소리를 담은 에세이까지.

 

그런데 최근 김영란의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를 읽다가 맥이 탁 풀려버렸다. 그 책을 골랐을 때에는 그동안 대법관으로 이 사회의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 된 사건들을 판결해온 그의 글에서 뭔가 일반인이 쉽게 파악하지 못하는 생각이나 관점을 한수 배울 것으로 기대했는데, (물론 책에 언급된 사건들이 앞으로도 기억될 중요한 사건이기는 하였으나)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게 글을 쓰려는 의도가 너무 강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는 그 책이 판결에 얽힌 법관들의 다수와 소수 의견을 정리한, 정말 제목 그대로 다시 ‘생각’만 한 글로 다가왔다. 잘 읽히지 않던 그 책을 덮고 다른 책을 펼쳤는데, 공교롭게도 그것이 또 판결에 관한 책이다. 실망을 해서 책을 덮었는데, 또 같은 분야의 책을 골랐다니... 그런데 <판결 vs 판결>이라는 제목과 ‘법대로 하는데 왜 판결은 다를까?’라는 부제를 보니 상반된 판결을 분석함으로써 무엇이 더 옳은지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도 같았다. 이런 식의 구성이 나처럼 어떤 판단에 대한 분명한 긍정 혹은 부정을 원하는 독자에게는 더욱 적절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책장을 넘겼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판결은 완벽할 수 없다’는 주제 하에 정당방위, 증거가 부족한 살인죄의 판단, 성폭행과 화간의 구분, 미성년자와의 성관계 처벌, 존엄사의 인정, 자살 원인제공자에 대한 책임 등 유사한 사건이지만 다른 결론이 난 것들을 독자가 대비하여 읽어볼 수 있도록 엮어 놓았다. 2부 ‘재판대에 오른 판결’에는 강기훈 유서대필조작사건, 황제노역, 스폰서 검사와 같은 사법부에 대한 비판적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다. 정권에 따라 다른 태도를 보인 사법부의 굴욕적인 민낯이나 21세기임에도 여전히 ‘유전무죄’라는 말을 되뇔 수밖에 없게 만드는 형평에 어긋난 잣대, 강자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진 현행법의 문제점, 사법불신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서의 국민참여재판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3부 ‘법정 안의 사회’에서는 김대중과 이석기의 내란음모 해프닝을 대비시키고, ‘종북’이라는 프레임으로 단순히 매도당했던 정치인들의 사례, 강용석과 신지호의 모욕죄 적용 여부, 친일파의 재산권에 대한 법원의 태도와 같이 우리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모순들을 풀어낸다. 3부의 마지막에는 한진중공업과 쌍용자동차의 파업을 통해 살펴본 노동권의 현실이 담겨져 있기도 하다.

 

대체적으로는 꽤 만족스러운 책이었다. 사법부의 판결은 법률이라는 추상적인 문구가 단지 법전이라는 두꺼운 책에 적힌 장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사회규범으로서 작용할 수 있도록 숨을 불어 넣어 주는 역할을 한다. 저자는 비슷한 사안에 대한 상반된 판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원리.원칙이나 판결의 관점, 그밖에 실질적 요인들을 검토하고자 한 것이다. 일반 국민들이 판례를 찾아볼 일은 거의 없다. 고작 한쪽이나 반쪽짜리의 뉴스를 보고는 자신이 갖고 있는 프레임에 맞춰 ‘이건 말도 안 돼’ 혹은 ‘사법부가 모처럼 제대로 판단했군’이라고 나름의 정리를 할 뿐이다. 어차피 이런 고정된 생각과 이분적 프레임을 갖고 있는 나와 같은 이들에게는 ‘A vs B'와 같은 상반된 사안을 대비시키는 방식이 더 명확하게 다가온다. 찬성의 논리를 더욱 강화하거나 반대편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기 때문이다.

 

다만, 책 제목이 주는 대립(vs)구도가 너무 강렬해서인지 유사하게 분류할 수 있는 사건이지만 결과가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을 ‘판결 vs 판결’이라는 형태로 엮은 것에서는 약간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정당방위에 관하여 도둑을 폭행하여 사망하게 한 사건과 남편의 폭력을 피하려고 밀고 발로 차 사망하게 한 사건은 둘 다 정당방위로 인정되지 않았다(후자는 아직 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다고 한다). 한편, 사건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을지가 불분명해 보이는 것도 있었다. 노숙자를 방치하여 사망하게 한 사건과 공공임대주택의 임차인 명의가 아닌 노인의 퇴거 사건은 ‘법대로’라는 범주에 같이 묶어 다루기는 하였으나, 두 사건이 대비되는 공통분모가 있는 것인지는 다소 의문이었다. 책을 읽다보니 대법원에서 뒤집힌 판결이 많아, '판결 vs 판결'이 각 장마다 엮인 두 사건의 대비라기보다는 동일 사건에 대한 ‘지방법원.고등법원 vs 대법원’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특히 2부의 강기훈 유서대필조작사건이나 KTX 여승무원 복직사건은 더욱 그러하다).

 

가끔 판결문을 보면 판사들의 작문실력은 정말 형편없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들이 일부로 어렵고 난해하게 쓰는 것을 일종의 특권적 글쓰기인 줄로 알고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도록 쓰는 것일 수도 있다. 어려운 법률 용어를 써가며 도저히 끝이 날것 같이 않게 만연체로 쓰는 걸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 모든 걸 감안하더라도 판결문의 문장들은 글쓰기 작법의 나쁜 사례로 꼽을만한 것들이 즐비하다. 그렇기 때문에 판결을 분석하거나 해설한 책을 읽을 때에도 동일한 우려가 생긴다. 대개의 저자들은 판결문을 그대로 인용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해는 온전히 독자의 몫인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사건의 발생과 경과, 판결의 쟁점을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평이하고 간결하게 분석하여 해설하고 있다. 판결문의 경우도 인용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일부 필요한 경우는 보정을 하고, 매 사건 말미에 간단한 저자의 생각을 덧붙여 놓기도 하였는데, 짧지만 분명한 그의 생각에 공감가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저자의 노력만큼 글의 문체나 내용이 독자들에 분명하게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저자는 “우리편에 유리한 판결은 ‘정의의 승리’로 추켜세우고, 불리한 판결은 ‘썩은 판결’로 매도하지 않았으면 한다”라고 밝히고 있으나, 그의 우려가 무색하게도 판결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결과에 따라 사법정의를 ‘세운’ 판결과 ‘죽인’ 판결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검찰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모든 판사가 정의롭거나 공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도 실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법원의 판결은 제도적으로 ‘최종’의 결론일 뿐이지 정의롭고 공평타당한 결론은 아닌 것이다. ‘최상과 최선 사이에서’라는 이 책의 머리말 제목처럼 많은 판결이 ‘최상’을 찾지 않고 ‘최선’에서 타협하는 것을 자주 목격하기 때문이다.

법원은 "가장 세심하고 사려 깊은 사람도 세상사 모두를 예상하고 대비할 수는 없는 법"이듯이 "가장 사려 깊고 조심스럽게 만들어진 법도 세상사 모든 사안에서 명확한 정의의 지침을 제공하기는 어려운 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법을 미리 만들어놓은 기성복으로 비유했다. 아무리 다양한 치수의 옷을 만들어도 팔이 더 길거나 짧은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다. 재판부는 이렇게 반문한다. "당신의 팔이 너무 길거나 짧은 것은 당신의 잘못이니 당신에게 줄 옷은 없다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다소 번거롭더라도 옷의 길이를 조금 늘이거나 줄여 수선해줄 것인가?"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수선을 할 의무와 권한이 법원에 있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다.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보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에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재판부는 70대 노인을 구제해주는 판결을 내렸다. 현행법을 뛰어넘어 법의 정신을 꿰뚫으려는 판결이었다. - 40, 41쪽

대법원은 보편타당성과 법적 안정성을 강조했다. 이것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구체적 타당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준을 함부로 뛰어넘어 개념을 확장.변경하여 법률 문언을 넘거나 반하는 해석을 하면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2심 판결은 결국 이렇게 뒤집어졌다.
대법원은 평소엔 소수자 보호, 정의나 공평의 관념을 강조하지만 실제 법해석에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노숙자를 보호하지 않는 서울역 직원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처벌 법규가 없으면 제재를 가할 수가 없다. 반대로 이씨처럼 법을 잘 몰라서 중요한 실수를 한 사람을 법은 좀처럼 보호해주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법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전고법의 판결처럼 법의 해석은 때로는 적극성을 띠어야 하지 않을까? 국가가 홀로 사는 칠순노인에게 임대주책을 분양해준다고 해서 ‘불법행위’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지 않을까. 법률을 해석하는 법원은 자신의 역할과 의무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법대로’라는 게 법전의 문구에만 정답이 있을까. 행간에 숨어 있는 정신까지도 판결에 녹여낸다면 법원의 신뢰는 한층 더 높아지리라. - 42, 43쪽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은 피고인 강기훈의 승리가 아니라 건전한 상식의 승리이다. 지금 저 피고인석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은 강기훈이 아니라 ‘공권력의 남용’이다. 강기훈은 무죄이다. - 132쪽

모든 재판이 고도의 법률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사실관계가 쟁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국민참여재판이 도입된 취지가 기존 사법제도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민감한 사건에 대해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것 아닐까. 법원에 대한 불신 해소와 공정한 형사재판의 정착을 위해서는 앞으로 국민참여재판을 더 확대해야 한다.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배심원들의 평결과 법원의 판결 일치도는 90% 이상이었다. 선거법 위반 등 이른바 정치적인 사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 197쪽

대중의 판단은 잘못되거나 편향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전문가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면, 선거제도도 없애야 하지 않을까. 각종 선거에서 유권자의 선택이 항상 최선이 아닌데도 왜 우리는 선거제도를 유지하는가. 바로 민주적 정당성 때문이다. 만일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는 일을 소수 정치전문가들에게 맡기면 어떻게 될까? 그들 나름대로 정치인들의 자질과 능력을 검증하여 국민들을 대표할 만한 인물을 선출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결과에 수긍할 사람은 없다.
물론 재판절차와 선거절차는 다르다. 하지만 그동안 사법부는 판사들의 선발부터 재판까지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판사를 포함한 소수의 법률전문가 집단이 ‘그들만의 언어’로 재판을 해오던 시대는 이제 지났다. 일반 시민들의 요구를 이해하고 그들을 참여시키는 사법제도의 개혁은 그래서 불가피하다.
그런 차원에서 유용한 수단이라 할 국민참여재판은 지금보다 더 많아져야 한다. 사법비리와 사법불신이 사라지길 원한다면! 좀 더 투명한 사회, 상식에 맞는 판결을 원한다면! - 198쪽

결국 2004년의 사법부는 김대중의 ‘내란음모’에 대해 ‘헌정질서 수호’로 평가를 바꾼다. 한때 ‘내란음모 주동자’였던 이가 ‘헌정질서 수호’로 평가를 바꾼다. 한때 ‘내란음모 주동자’였던 이가 ‘헌정질서의 수호자’가 되었다. 23년 전과 판이하게 달라진 판결이다. 사법부는 불법구금과 잘못된 재판으로 949일 동안 갇혀야만 했던 김대중에게 보상금으로 9490만 원을 지급하기까지 한다. 이로써 사법정의는 바로잡힌 것일까?
사법부 입장에서 보면 낯부끄러운 판결이 아닐 수 없다. 사법부의 입장 변화는 김영삼정부 시절 5.18특별법이 제정되고 1996년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반란수괴.내란수괴죄 등으로 처벌받은 뒤에야 나온 것이다. 만사지탄이 있지만 사법부가 뒤늦게나마 재판을 바로잡아 무고한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군사정권 시절까지 그들의 논리를 따르다가 정권이 바뀌고 시대가 변하고 나서야 이런 판결을 내놓았으니, 사법부가 결코 내세울 만한 일은 아니다. - 223쪽

지금은 변호사가 된 한 퇴직 판사가 현직에 있을 때 항상하던 말이 있다. "지연된 정의는 부인된 정의다(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 판사가 ‘바로 지금’ 자신의 소신대로 판결을 하지 못한다면 정의를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이 표현을 빌린다면 김대중 내란음모 무죄판결도 혹시 "지연된 정의"는 아니었을까. - 224쪽

법원은 그러나 ‘종북’은 다르다고 선을 긋는다. "그 표현의 해악이 처음부터 해소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거나 다른 사상이나 표현을 기다려 해소되기에는 "너무나 심대한 해악을 지닌 표현"까지 허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법원은 "구체적 근거나 명확한 증거가 없이 배제와 차별, 증오, 적의의 고취를 목적으로 하는 표현이 다원성, 관용, 관대함을 이유로 허용될 수 없다"고 경고했다. 한국 사회에서 ‘종북’이 바로 그런 표현에 해당한다. 따라서 종북과 같은 의혹제기는 일반적인 경우보다 훨씬 더 신중함과 엄격함이 요구된다고 당부했다. - 239쪽

두 글자면 된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려면 종북 두 글자면 충분하다. 법원도 종북이라는 낙인찍기를 타인에 대한 심각한 공격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무분별한 종북 꼬리표 남발은 자제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통합진보당 해산결정과 이석기 의원 내란선동 유죄 판결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질 수도 있겠다. 그때마다 피해 당사자는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형사고소하는 일로 해결해야 하는가.
법적인 판단 여부를 떠나 북한과 관련된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섣불리 예단하고 공격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법원의 말마따나, 표현의 자유 관점에서 보더라도 "배제.차별.증오"를 담은 표현을 "다원성.관용"이라는 이름으로 허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종북 낙인은 또 하나의 반공주의일 뿐이다. - 239, 240쪽

수사기관은 미네르바의 수많은 글 중 단 두 편만을 문제 삼았고, 홍씨 역시 SNS 글 한 편과 방송인터뷰 하나로 전격 구속했다. 결국 둘은 무죄로 풀려났지만 100여 일이나 옥고를 겪어야 했고 네티즌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법이 정부에 비판적인 여론에 재갈을 물리는 수단이 돼서는 곤란하다.
세월호 해경 명예훼손 사건에서 법원은 "공공적.사회적인 의미를 가진 사안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완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기관의 명예보다 표현의 자유가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정부나 수사기관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 253쪽

반세기 지난 시점에서 친일파에 대한 형사처벌은 불가능하더라도 친일 부역으로 획득한 재산까지 법이 지켜주어야 한다는 건 국민정서상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근호의 땅을 돌려달라는 소송의 재판을 맡은 이종광 수원지법 판사(현재 수원지법 부장판사)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헌법은 장식적인 말이 아니라 재판 규범"이라는 인식으로 판결에 접근했다. 그의 결정은 소 각하였다. - 273쪽

이제 파업 손배소는 더 이상 ‘신종’ 노동탄압이 아니다. 노사관계에서 일상이 됐다. 노동자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억대 손해소는 노조에겐 해고나 감옥보다 무서운 존재가 돼버렸고, 사측에게는 파업과 노조활동을 막는 강력한 무기가 되고 있다. - 281쪽

1128억8802만4953원.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하여 사측이 법원에 청구한 손해배상 소송에 걸려 있는 총액(2014년 1월 현재 민주노총 잠정집계)이다. 연봉 4000만원을 받는 직장인이 한 푼도 쓰지 않고 2822년을 모아야 마련할 수 있는 돈이다. 이 천문학적인 액수의 손배소 상황은 대한민국 노사관계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준다. - 282쪽

반면, 노조의 파업은 목적이나 수단 모두 정당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노조가 경영주체의 고도의 경영상 결단에 속하는 사항인 정리해고 자체를 반대하기 위하여 파업에 나아갔다고 할 것이므로, 목적의 정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정리해고를 반대하기 위한 파업은 불법이라는 것이다. 경영권을 상당히 ‘존중’하는 기존 대법원의 판례를 그대로 수용한 결과다. 파업의 방식에 대해서도 "폭력이나 파괴행위를 수반하는 등 반사회성을 띤 행위"라고 보았다.
이에 대해 노조는 "2010년 당시 파업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조합원 총회를 거쳐 실시한 합법파업"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노조는 파업의 목적에 대해서도 "임단협 교섭과 관련된 조합원들의 처우개선이 주목적이었다"고 반박했다. 노조는 "단체협약 갱신 교섭을 하는 자리에 회사가 일방적인 구조조정안을 의제로 들고 교섭을 계속적으로 요구"했다며 "부득이하게 파업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입장이다. - 284, 285쪽

대법원은 헌법상 권리인 노동권과 경영권이 충돌할 때 십중팔구 경영권의 손을 들어준다. 판례가 바뀌지 않는 한 우리 사회는 ‘파업=불법’이라는 공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임금인상 등 근로조건 개선을 하면 귀족노조의 밥그릇 싸움으로 매도되고, 민영화 반대 등으로 공공성을 목표로 내걸면 그것대로 불법파업이 되는 현실에서 노동자들만 죽어가고 있다.
파업은 자제해야 할 일인가? 아니다. ‘감수해야 할 손해’다. 이건 노조의 주장이 아니다. 이미 1979년에 법원에서 내린 판결이다.

단체행동권의 행사란 근로계약상 근로의무 있는 경우에 그 근로의무의 제공을 거부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며 이를 시민법의 원리에서 본다면 위법된 행위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헌법이 이를 허용한 이유는 노동력을 유일한 생계수단으로 하고 있는 경제적 약자인 근로자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행해지는 한 사용자는 근로자들의 그 위법된 행위를 용인하고 이로 인하여 발생하는 손해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헌법에 규정하여 제도적으로 보장한 것이다.(대법원 1979.3.13. 선고 76도3657 판결) - 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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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슨 스토리 - 창의와 혁신의 브랜드
레인 캐러더스 지음, 박수찬 옮김 / 미래사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가끔 외국에 출장 갈 일이 생기면, 호텔이나 공공기관 또는 공중 화장실 같은 곳에 설치된 기계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편이다. 그 지역에서 유행하는 제품이 무엇이며, 내가 머물러 있는 곳의 성향이나 수준을 확인하기에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호주에 갔을 때 건물 화장실에 가서 보니 대부분이 다이슨(Dyson) 에어블레이드(Airblade)라는 멋들어진 이름의 건조기를 설치하고 있었다. 별로 들어보지 못한 브랜드인데 이곳에서는 자주 보이는 걸 보면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번 손을 넣어보았는데 강력한 바람으로 젖은 손이 금방 건조된다는 느낌은 있었지만(소음은 엄청났다), 다른 건조기에 비하여 특별히 월등한 장점을 지닌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다이슨은 내게 별로 특별히 기억되지 않은 제품 브랜드였다. 그러다가 얼마전 도서관에서 우연히 이 책을 보게 되자, 잠들어 있던 약간의 호기심이 깨어났다. 잘 모르는 브랜드이니 한번 알아보고 싶어 책을 집었다.


이 책은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개의 목차는 창업에서부터 전개되어 몇 번의 위기를 맞이하고 그것을 극복한 성공기라는 시간적 수순을 밟지만, 여기서는 중간중간에 '작동하거나 말거나(2장)', '기업가 이야기(5장)', '생산적 나르시스트(7장)'과 같이 중간중간에 다이슨에 대한 분석이나 해설을 끼워 넣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구성이 딱히 장점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2장에서의 다이슨에 대한 소비자 설문조사나, 5장에서 다이슨의 스토리를 영웅서사에 비교하며 각 시기들을 분류한 표, 7장의 제임스 다이슨과의 면담들은 내게 오히려 독서의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였다.  


대체적으로 특정 기업을 분석하는 책에는 '창의'나 '혁신'이라는 단어가 붙는데 이 책도 역시 그러하다. <창의와 혁신의 브랜드 다이슨 스토리>. 그러나 그 창의와 혁신이 어떤 생각에 의하여 동기화되었는지는 그 기업의 특징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그것은 'Think Different'(애플)이기도 하고, 'Leg Godt'(레고)이기도 하고, 'Just Say Yes'(스타벅스)이기도 하며, 'Story is King'(픽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다이슨사의 정신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는 단지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I just think things should work properly)"라고 말한 제임스 다이슨(James Dyson)의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즉 다이슨의 이야기는 창의성과 고집에 관한 이야기다.


제임스 다이슨은 스스로가 디자이너이자 엔지니어임을 자부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매우 섬세한 소비자이기도 하다. 그는 후버(Hoover) 청소기를 몇 번이고 분해한 끝에 청소기로 빨려 들어가는 먼지가 먼지봉투의 미세한 구멍을 막으면서 흡입력을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성공신화가 그렇듯) 그의 집 뒷마당 창고에서 3년을 더 실험한 끝에 '사이클론(Cyclone)'이라는 방식의 모터를 개발하는데, 이것은 먼지봉투 없이 먼지를 분리하면서도 흡입력을 잃지 않는 방식이다. 몇 번의 고전을 했지만 그의 청소기 DC01은 영국과 호주는 물론 미국에까지 입성을 하며 후버의 아성을 무너뜨리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도대체 다이슨이 그 특별함을 어떻게 소비자들에게 어필을 했을까? 


그것은 전략적인 마케팅도 적극적인 홍보도 아니었다. 너무나 뻔하게도 제품 자체로 승부한 것이다. 그는 제품이 중요하다는 것을 매우 강조하는 경영자다. 카페트는 물론이고 그 아래 숨어 있는 먼지까지도 죄다 빨아들이는 다이슨 청소기의 강력한 흡입력은, 그동안 사람들이 낮은 성능의 제품을 썼다는 생각과 더불어 자신의 주변이 매우 더럽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후버를 사용하고 있던 한 소비자가 다이슨을 쓰고 나서는 먼지통을 두번이나 비웠다는 입소문이 여기저기에서 전해지며 그 강력한 힘이 소비자들의 마음을 이끈 것이다. 게다가 디자인에 대한 안목도 있기 때문에 마치 우주선에서 사용하는 기기를 연상시키듯 독특한 제품의 형태와 청소기에서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 오렌지 배색을 사용한 제품은 소비자들에게 이 제품에 대한 뭔가 다른 것을 어필하게 된다. 


비록 드럼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는 강력한 세탁효과로 세탁시간을 줄여주는 CR01은 큰 호응을 받지 못했지만, 이후 다이슨은 에어블레이드의 원리를 응용하여 제작한 날개 없는 선풍기 에어멀티플라이어로 다시 한번 그 창의성을 인정받기에 이른다. 그의 생각은 단순하다. 왜 사람들은 100년이 넘게 날개 있는 선풍기를 불평없이 사용하는가, 이다. 청소도 불편하고, 날개에 아이들 손이 다칠 수도 있고, 안전을 위해 망을 씌우면 바람의 출력이 뚝 떨어지는 선풍기를 말이다. 그의 이런 생각은 처음에 밝혔던 바와 같이 기기가 그 목적에 맞게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에 있었다. 본질에 충실하지 않은 채 요란한 외형이나 색체만을 내세웠다면, 기기 자체가 아니라 그 마케팅에 많은 집중을 하였다면, 지금의 다이슨이 누리는 성공은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업에 관련 경영서적들은 대체로 그 기업의 정신과 조직운영 방식에 초점을 맞춘다. 아무래도 현대 경영학이 제품 자체보다는 제품의 생산과 관리 그리고 마케팅, 재무와 인력 관리 같은 것에 더 비중을 두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성공한 기업을 대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기업의 이미지나 분위기, 스타일을 궁금해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보다는 엔지니어링 자체에 대한 다이슨의 노력에 보다 많은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인지 다이슨사가 어떻게 일하고 성과를 공유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이 책을 통해 명쾌하게 풀리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다. 또 하나의 단점은 문체가 너무 번역투여서 부드럽게 읽히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우리는 제임스 다이슨이 기존 산업계, 특히 자신이 속한 업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세계는 차선이 충분히 좋은 것으로 여겨지고, 좋은 제품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실제 제품을 써 볼 때 경험하는 것과 같지 않은 곳이다."와 같은 문장이다. 무슨 말인지...

  

엔지니어는 일생의 대부분을 실패하느라 쓴다. 예상대로 작동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고통스러운 실험을 반복한다.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은 전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실패를 거듭했지만 그럼에도 전구가 작동하지 않는 2000가지 방법을 찾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순간에도 수천 곳의 공방, 실험실,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수 없는 실패 속에서 엔지니어들은 왜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점점 더 분명하게 생각하게 된다. 엔지니어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이 겪었던 고통과 불편함을 당신이 또 다시 겪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한다.
다이슨사는 그들 스스로를 브랜드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누군가를 속이고 등쳐먹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이념의 대변자들이다. 더 나은 물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엔지니어의 이념 말이다. - 49쪽

다이슨사의 사람들을 비롯해 엔지니어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그들이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실용주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더 좋은 제품과 기술을 만들고 싶어 하고 그래서 끊임없이 탐구한다. 땅에 발을 딛고 선 이상주의자들인 셈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해 엔지니어들은 거대한 계획과 길고 긴 실험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몇 달, 몇 년을 수없이 실패작을 버리느라 소비한다. 클라이맥스는 그들이 만든 제품이 실제 작동했을 때다. 그 클라이맥스는 진공청소기 밑, 아무도 보지 않는 플라스틱 부품을 조립할 때일 수도 있고, 오랫동안 개발한 비행기가 시험비행에 나설 때일수도 있다. 우주 조종사가 임무를 마치고 지구로 귀환했을 때일수도 있다. 그 누구도 이 순간만큼은 엔지니어들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다.
엔지니어들은 인생의 상당부분을 문제 해결에 매달리는 사람들로 묘사된다. 엔지니어의 삶에서 두 가지 기본 가치가 있다. 첫째는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완성하는 것이다. 도로든 소프트웨어든 말이다. 둘째는 그 완성을 통해 엔지니어로서의 신념이 더 공고해진다는 것이다. - 50, 51쪽


인간은 오직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만 확신할 수 있다. 첫째는 인간은 결국 죽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게 언제인지 모른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언제나 우리 일상생활에 작동되고, 우리 대부분은 최대한 사실을 무시하려고 한다. 우리가 이 문제를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은 일련의 믿음을 체계화해 이 문제를 대비하는 것이다. 진보라는 것이 하나일 수 있다. 우리는 과학과 기술을 사용해 우리 주변을 통제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가 지금보다 더 좋길 원한다. 다이슨사는 이런 믿음의 상징이다. 우리는 다이슨 제품을 사면서 이런 진보의 믿음에 재투자한다. 다른 제품들처럼 다이슨의 제품은 우리가 삶에서 겪는 문제들을 일시적으로 해결해 준다. 그 문제란 우리 집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깨끗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 51쪽

다윈주의의 접근법은 여전히 급진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1990년대 초반 코넬대의 마이클 해넌(Michael Hannan)과 존 프리먼(John Freeman)이 다윈주의를 조직이론에 적응했을 때처럼 말이다. 이 접근이 급진적인 이유는,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변화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조금씩 변화시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터져 나온다고 보기 때문이다. 삶이란 우리의 계획을 뛰어 넘는 우연에 따라 더 크게 변하고, 따라서 성공의 여부는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끊임없이 시도하고 실패하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는 것뿐이다. - 106쪽

인류학자이자 자연사가인 그레고리 바터슨(Gregory Bateson)이 말했듯이 흥미로운 일은 언제나 변방에서 일어난다. 우리가 날씨를 관리, 통제할 수 없듯이 혁신을 관리할 수 없다. 당신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은 좋은 아이디어와 유연성, 규범, 주변으로부터 오는 좋은 피드백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 107쪽

다이슨은 브랜딩에 대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숨기는 것이란 뜻이다.

a. 첫째 당신의 제품이 다른 제품과 비교해 다르지 않다.
b. 당신도 남과 다를 게 없다.

내 생각에 이런 다이슨의 생각은 ‘해결책 순수성(purity of solution)`학파식 접근이다. 그는 실험복을 입은 사람처럼 말한다. 이 장비, 도구, 약품, 코드는 완벽하게 만들어졌고 철저한 테스트를 거쳤다. 이것은 우리가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적의 방법이다. 필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이 제품을 쥐어주는 것뿐이다.
많은 엔지니어들과 디자이너들이 마케팅을 혐오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실제 그들은 마케팅이 소비자와 해결책 사이를 가로 막는 장애물이라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 174쪽

어떤 정의를 쓰더라도, 다이슨은 브랜드다. 제품의 의미가 성공적으로, 그리고 생생하게 관리되어온 제품이다. 하지만 스스로가 브랜드가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자유로운 느낌을 준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경쟁사 분석이나 소비자 조사에 갇히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스포츠 경기로 비유하면 다이슨은 그저 다이슨 자신만의 게임을 하면 된다. 괜히 상대팀의 지난 경기 녹화 비디오를 돌려보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다이슨은 자신만의 확신을 따른다. 기술에 신경을 쓰며 당신의 P(좋은 제품)를 세계 최고로 만들면 된다. D(특별한 정체성)를 확고히 하라. 그리고 F(느낌)는 저절로 따라오게 하라. - 181, 182쪽

다이슨 기술자들이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이들이 개발한 원리는 이렇다. 모터를 선풍기 몸체에 해당하는 부분에 설치하고, 이 모터가 작은 바람을 흘려보내주면 주변의 바람이 합쳐지면서 큰 바람을 일으킨다. 마치 우물물을 길어 올릴 때 약간의 마중믈을 넣어서 큰 물을 뽑아 올리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기술자들이 금속 시제품을 만들고 다듬기를 4년. 다이슨은 2009년 10월 영국 시장에 에어멀티플라이어를 내놨다. 2009년 미국 주간지 <타임(Time)>이 ‘올해의 발명품’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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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7-10 1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자가 전문적으로 번역을 해본 사람이 아니군요. 그래서 어설픈 문체가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붉은눈 2016-07-10 17:15   좋아요 0 | URL
역시 꼼꼼하시네요. 책이 기대에 못미쳐서였는지 마지막 본문을 읽고 저는 책을 그냥 덮어버려서 역자가 누군지 확인하지도 못했네요.
 
지성에서 영성으로 - 최신개정판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이 책이 출간된 것을 알게 되었을 때가 그의 책 <디지로그>를 막 읽고 난 무렵이었던 것 같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제목을 보고는 다소 복잡한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이어령이라는 분도 별 수 없는지 이제 늙어서는 결국 종교로 회귀한다는 결과에 대한 한탄이나 노령의 나이지만 당당하게 끝까지 이성의 날카로운 끝자락에서 첨병의 역할을 하실 것 같은 분에 대한 알 수 없는 실망감도 있었겠지만, 자신의 영적인 입장 변화를 굳이 책으로 내서 사람들에게 읽히고 싶을까, 라는 의문 때문이기도 하였다. 

당시에는 이 책을 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읽고 나서 실망하느니 차라리 외면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누군가가 종교를 갖는 것에 반감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는 왠지 그의 이전 책들을 읽으며 탄복했던 유연한 사고와 정교한 언어의 향연을 이제는 더는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잠시 해외에 머무르던 중 우연히 그 지역 도서관에서 한국어로 된 서가를 발견하였다. 며칠 간의 e북 독서에 눈이 피로하여 종이책이 너무도 반가웠지만, 한국어 책들 중에서 읽을만한 것이 별로 없었기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총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자가 교토대학교에서 홀로 지내면서 느꼈던 경험과 생각들을 적은 1부, 딸에게 발생한 문제들을 겪고 해결해 나아가면서 자신이 세례를 받게 이유를 설명한 2부, 한국 교회에서 강연한 내용을 수록한 3부, 딸의 편지와 회고, 간증을 수록한 4부, 인터뷰를 수록한 5부이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단지 1부에서만 예전의 이어령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말대로 영성은 경험이다. 아주 철저한 개인적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경험하지 않은 영성은 맹목적 추종일 뿐이다. 하지만 현 시대에 이성과 지성의 습득을 우리는 개인적 경험이라 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적 경험 보다 시대적이고, 일반적이며, 사변적이고, 실증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이 책에서는 이것들을 혼합하여 이야기하고 있다(이것도 '통섭'인가?). 그의 표현대로 ‘예수쟁이’가 된 그의 글은 지성에 반하는 영성을 부정하고, 이성을 마비시키는 맹목적 신앙에 대해 경고하고는 있지만, 이 개인적이고 회고적인 글은 지난 수십 년간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글을 써왔던 한 이성적 인간의 회고적인 신앙간증일 뿐이다. 

물론 그의 간증을 비판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는 단지 경험한대로 느낀대로 글을 쓴 것이며 그가 경험했던 아프고 놀라운 고통과 기적의 순간들 속에서 그가 느꼈어야 할 인간적 한계와 고뇌는 이해할 수 있다. 그는 현재를 말하며 과거를 떠올리지만 그의 과거는 다시 그가 종교를 찾게 된 현재와 연결이 된다. 인생이라는 퍼즐의 한 조각 한 조각을 다시 맞추어 가듯 지금에 와서 생각보니 과거 순간들은 모두 연결되는 의미였던 것이다. 다만 독자로서 아쉬운 점은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기 위하여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을 너무 많이 붙였다는 것이다.

70이 훌쩍 넘은 노인네가, 그것도 인문학자로서 이성과 지성을 강조하면서 그동안 개신교를 그렇게 비판했던 그가 세례를 받는다고 하니 많은 이들의 관심꺼리가 되었나보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부터 그런 사람들의 관심이나 실망에 대응하기 위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그러면서 내내 자신은 지성을 버리고 영성으로 온 것이 아니라 지성과 이성을 갖추어 그것을 넘어서는 영성에까지 의지한 것이라는 설명을 한다. 

"내 작은 머리에서 나온 언어와 판단이 더 큰 영성에 의지한다면 지성이나 두뇌 순발력이 더 좋아지지 않겠습니까?" "니체나 카뮈에 매료되어, 허무주의, 실존주의,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거침없이 성서를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 관심이 아예 없었다면 그렇게 핏대를 올리지 않았겠지요" 라는 문장처럼 말이다. 

하지만 글을 끝까지 읽다보니, 대부분의 페이지에 녹아 있는 '나는 이성과 지성을 버린 것이 아니라는' 이런 주장은 흡사 자기변명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그냥 영성에 관한 책을 쓰면 될 것을 왜 이렇게 끝까지 이성과 지성을 물고 늘어지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자신의 탑을 허물기 싫어서였을까?

제목인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것이 ‘전환’이 아닌 ‘확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글을 읽다보니 종교적이든 철학적이든 홀로 자신으로 침잠하는 것은 평면상 하나의 작은 점으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더 깊은 고뇌와 성찰로 들어서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 스스로가 제목에서부터 지성과 영성을 이분화 해놓았으면서 이 둘이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지성을 기반으로 영성에 의지하고 있다고 강변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냥 개신교 출판사를 통해 자신의 신앙과 영성에 대한 글을 썼다면 공지영 작가의 <수도원 기행>처럼 좋아하는 신앙 에세이로 기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저녁이 되고 황혼이 땅으로 내려앉으면 빛과 어둠의 경계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는 그레이존의 노을이 뜹니다.”라는 그의 말을 인생의 황혼기에 느끼는 혼미함으로 이해하려 한다.


오랜 세월 글을 써 왔지만 누구도 내 면전에다 대고 ‘글쟁이’라고 욕하는 사람은 없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세례를 받자마자 어느새 나를 ‘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이따금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쟁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이 ‘욕쟁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아요. 화내지도 않습니다.
세례를 받자마자 갑자기 성인이 돼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들의 얼굴과 거동에서 내 자신이 그동안 걸어왔던 외롭고 황량한 벌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남을 찌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막의 전갈 같은 슬픈 운명 말입니다. - 13, 14쪽

멕시코 감독이 만든 영화 <21그램>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인간 영혼의 무게는 라면 한 젓가락 정도밖에 안된다는 말이 있지요. 실제로 미국 매사추세스 병원에서는 임종직전의 말기결핵 환자를 3시간 40분동안 체중의 변화를 관찰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숨을 거두는 순간 그 환자의 몸무게가 1.25 온즈(35.gm) 줄어든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요. 2년 반 뒤에도 임종직전의 다섯 환자를 똑같은 방법으로 조사해보았더니 역시 영혼의 평균 무게는 1온즈(28.4gm)였다는 겁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가봅니다. 최근에도 스웨덴의 룬데박사팀이 정밀 컴퓨터 제어장치로 그 실험의 진위를 검증해보았더니 임종 시 환자의 체중 변동은 21.26214그램이었다고 합니다.
어느새 나는 어깨 위의 쌀 한 자루 무게와 내 머릿속 영혼의 무게를 의학실험을 하듯이 예민한 저울로 번갈아 재고 있었던 겁니다. 분노가 치밀었지요. 그것이 영혼을 저울로 달고 있는 과학자들을 향한 것이었는지 너무나도 빈약한 내 영혼에 대한 것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웃음이 연민이 되고 연민이 분노로 변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 23, 24쪽

무신론자들도 기도를 드린다는 모순 어법을 그때 찾았습니다. 쌀 한자루의 무게와 영혼의 무게를 그때 처음으로 저울질해보았습니다. 빛의 무게, 향기의 무게, 공기의 무게, 영혼의 무게는 그냥 가벼운 것이 아니라 하늘로 상승하고 있었지요.
많은 사람들은 쌀자루를 채우기 위해서 기도를 드리지만 오히려 이 무신론자는 무거운 쌀자루를 비우고 내려놓기 위해서 그리고 방안을 물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혼으로 채우기 위해서 기도를 올렸던 겁니다. - 25, 26쪽

나는 나무들을 자유로운 거리에서 바라볼 수가 있듯이 이국의 모든 풍경과 뉴스와 그 이방의 사람들을 아무 부담 없이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토생활을 하는 지금의 내 행복입니다. 도구가 아닌 존재의 나무로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하나하나의 이파리에 묻어나는 여름과 그리고 조금씩 물들어가는 겨울의 죽음들이 보입니다. - 57쪽

바람이 불면 미친 듯이 나무들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나무 이파리 하나하나가 말갈퀴처럼 흔들릴 때 비로소 나무는 무엇으로도 풀이할 수 없는 나무 자신의 생명력을 지니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이곳에 온 지 겨우 하루가 지난 그때부터 새로 만나는 사람과 새로 구한 물건들로 나에게도 개목거리의 끈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무리 버리고 버려도 쓰레기통을 비우고 또 비워도 하루치씩 온갖 생의 찌꺼기들이 쌓여갑니다.
미구에 쓰레기가 될 물건들이 내일의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이 인간의 끈입니다. 사람들을 피해 이곳에 왔는데 사람들이 그리워 치와와 같은 애완용 개목걸이를 구하러 다닙니다. 개를 끌고 산책을 하는 저 많은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것 없이 나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 57, 58쪽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빈것을 견디지 못하지요. 그래서 무엇인가 의미를 채우려고 기를 씁니다. 일기를 쓴다는 것, 그것도 결국 빈 종이의 하얀 공백을 문자로, 의미로 메워가는 행위일 것입니다.
에이하브 선장이 흰 고래 모비딕을 죽이기 위해 평생 목숨 걸고 쫓아다닌 것은 작가가 원고지의 흰 공백을 죽이기 위해 일생 동안 글을 써 나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평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예리한 펜의 창으로도 그 흰 공백의 심장을 꿰뚫을 수 없었기에 나는 매이 ㄹ공일의 그 바다에서 익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 59, 60쪽

하늘에서 축복처럼 내려주신 눈 내리는 교토의 벌판을 바라보면서 헛기침을 해 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봅니다.
그래 집으로 돌아가는 거다. 아무리 부정해도 내 가족 내 고향 말고 은둔할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할퀴고 침뱉고 아우성쳐도 눈도 한국말로 내리는 내 나라로 돌아가야 한다. 꽤 잘난 체하는 컨실리언스(통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도 토포필리아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던가. 모든 생명체를 관통하고 있는 장소에 대한 깊은 애정. 가위 바위 보의 문명론을 탈고했으니 내 DNA에 찍혀진 토포필리아에 내 몸을 맡겨야 한다.
한국말로 내리는 설경을 보기 위해서 어서 짐을 싸자. - 113쪽

우리가 살아서 하늘의 별 지상의 꽃을 보는 것이 그리고 사람의 가슴에서 사랑을 보는 것이 바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매일 매일 우리는 당신께서 내려주시는 기적 속에 삽니다. 그러니 기적이 아니라 당신께서 주신 그 지적들을 거두어 가지 마시기를 진실로 기도합니다. - 122쪽

제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옛 바탕을 버리고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 속에 묻혀 있던 영성이 이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예술가적 기질과 초월적 영성의 기질이 있습니다. 과학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며, 예술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합니다. 종교는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설명합니다. 종교적 현상은 체험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영성입니다. 신앙은 경험하는 것입니다. - 152쪽

지성과 이성이 사라지고 영성만 남으면 도에 넘치는 열광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종교가 탄생합니다. 기독교는 이성과 지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지성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성과 지성이 없어져야 영성이 맑아진다는 태도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 152쪽

절망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영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기파괴라는 극적인 경험이 없이는 영성을 갖기 힘듭니다. 그래서 세속적으로 편안한 사람은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힘들지요. 이땅에는 빛뿐 아니라 어둠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이 합쳐진 `그레이 존(회색지대)`인 궁창에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빛과 어둠을 알아야 인간 한계를 초월해 영성의 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영어에 `플런지(Plung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팍 던져 넣는다`는 의미입니다. 영성의 세계는 이해하거나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절망을 계기로 영성의 세계로 던져 넣어지는 것입니다. - 153쪽

로맹 롤랑(Romain Roalland)은 인생은 15분 늦게 들어간 영화관과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놓쳐버린 15분의 줄거리를 찾기 위해 신앙을 가지고 철학에 매달리는지도 모릅니다. - 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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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고화질세트] 기생수 애장판 (전8권/완결)
이와아키 히토시 지음 / 학산문화사 / 2014년 10월
평점 :
판매중지


만화가 보고 싶어 뒤적이다가 골랐다. 일본 만화를 '쫌 봤다'는 사람들을 통해서 익히 많이 들었던 책이라 진작부터 보고 싶었지만, (손 발에 눈 달린) 이런 그림체를 좋아하지는 않는터라 그동안 읽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일종의 슬럼프가 생겼고 그에 따른 무료함을 이겨내기 위하여 만화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중 완결된 만화책을 찾다보니 이 책 <기생수>가 걸려 들었다. 


작가가 이 만화를 일본 잡지에 연재를 시작한 것이 90년대 초반이고, 이후 2-3년에 걸쳐 완결되었다고 해도, 발간된지는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일본도 그랬던 것 같은데, 90년대 초에 우리나라에도 이른바 '에콜로지'에 대한 붐이 일었던 때가 있었다. 이것은 환경보전을 둘러싼 국제적인 흐름과 전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환경정책이나 환경법의 연혁상으로는 1992년 리우회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용어가 매우 중요하게 언급되기 시작하였고, 의제 21과 더불어 '기후변화협약'이나 '생물다양성협약'이 체결된 것도 이 때이다. 만화 얘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국제환경조약 얘기를 해서 이상하기는 하지만, 모든 작품은 시대적 산물일 수밖에 없으므로, 이 만화 역시 한창 에콜로지에 대한 논의가 치열했던 그 시기에 발행되었다는 것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존재의 이유도 모른 채 어느날 기생수가 등장한다. 인간의 뇌에 침투해서 그 인간을 숙주로 조정하며, 숙주의 육체적 생존을 위해 다른 인간을 잡아 먹는다. 이것만으로는 괴기만화 혹은 영화 <연가시>와 같은 류의 재난 만화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작가는 여기에서 독자들에게 '종'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생존에 맞물린 살육에 대한 선과 악의 모호성이 그 뒤를 따라온다. 분명 기생수들이 인간을 잡아먹으며 숙주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살육일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살육은 거시적으로 보면 지구적 관점에서의 개체에 대한 균형 유지일수도 있다. 인간들에 의해 훼손되고 오염된 지구, 인간들에 의해 지배 혹은 멸종된 동식물들의 처참함을 생각한다면, 기생수라는 천적으로 통하여 인간의 개체수를 자연발생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인가 악인가?

 

일부 지각을 갖춘 기생수들에게는 자신들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기생수는 왜 존재할까? 기생수는 생존을 위해 반드시 인간을 먹어야만 하는 것일까? 인간과 기생수가 공생할 수 없을까? 이러한 의문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실험이 시작되고, 기생수 집단들은 마침내 작은 지역을 거점화하는데 성공한다. 기반을 확보하여 인간과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기생수와의 공생을 전혀 원하지 않는다. 공존에 대한 질문에 인간은 군대를 동원하여 기생수를 박멸 혹은 멸종시키는 것으로 답한다. 이것은 선인가 악인가?


동물이 식물을 먹는 것, 동물이 동물을 잡아먹는 것, 인간이 동물을 먹는 것, 먹이사슬에서 생존을 위한 살육에 선과 악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면서도 그것이 인간이라는 종에 해가 된다면 '악'이 된다. 얼마전 읽은 <종의 기원>에서의 유진처럼 본능적이고 태생적인 사이코패스의 살인에 대해서는 그것을 '악'이라고 명명하는데는 주저함이 없지만, 단순히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살육이 아니라 유희를 위하여 또는 보다 편한 식육을 위하여 비윤리적으로 행해지는 사냥이나 공장식 축산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것을 '악'으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은 얼마나 자의적이고 편협한가.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는 현재와 이 책이 발간되었을 과거와의 시간차를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이 책은 분명 생각할 여지를 많이 제공하는 책이었다. 읽으면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이 있다. 바로 주인공이 외부적 상황에서만 선과 악에 대한 고민을 한다는 점이었다. 주인공 신이치는 기생수가 뇌로 침투하지 못한채 오른팔에 침투하여 본의 아니게 기생수와 공생하게 된다. 그는 인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선을 지키고 악을 섬멸하기 위하여) 기생수와 싸우고 그의 팔에 기생하는 '오른쪽이'는 신이치의 의지대로 다른 기생수들을 죽인다. 그러나 신이치는 그런 오른쪽이를 악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른쪽이가 변형을 해서 다른 사람의 차를 열거나 다른 사람의 주머니에서 돈을 슬쩍하는 것을 더욱 크게 문제 삼는다. 기생수를 통해 그 기생수의 동족을 살해하면서도 그것이 악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고민이 신이치에게는 생략되어 있는 셈이다.


작가는 기생수와의 최후의 결투에서 그의 생명을 끊는 것을 주저하는 신이치 보여준다. 신이치를 통하여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규정하는 것이 있다고 독자들에게 말한다. 그러나 작가가 강조하는 '그것'이 과연 인간을 인간일 수 있게 하는 본질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내 의문은 단 하나... 기생생물이 존재하는 의미에요. 대체 무엇 때문에..."
"간단한 것 아닌가? 지구에 있어서 인간은 `독소`가 된 거지. 그래서 `중화제`가 필요해진 거고." - 3권 95, 96쪽

"비관적인 미래상을 보이며 `조금만 있으면 이렇게 됩니다`하고 협박하면서 효과를 얻는 방법도 있지만, 저는 도리거 `이렇게 하면 이만큼 아름다운 세상이 옵니다` 하며 아름답고 이상적인 미래를 보이고 싶습니다. 물론 그것은 누구라도 납득할 만한 현실적인 것이어야 하겠지요." - 4권 102쪽

"다른 생물을 예로 들어봐야 허사겠지만... 인간과 가축들도 공존하고 있잖아! 물론 대등하진 않지. 돼지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일방적으로 자기들을 잡아먹는 괴물일 뿐이야. 인간들 자신도 거창하게 떠들어대고 있잖아? `지구의 모든 생물은 공존해야 한다` 개중에는 `사람은 자연보호, 자연은 사람보호` 같은 말도 안되는 슬로건도 있고." - 5권 97, 98쪽

"난 인간이 아니니까, 인간이 만든 법률이니 도덕을 들먹이면 곤란해."
"그래도 내 손이라구!"
"신이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판에 사소한 거 가지고 고민하지 말자. 내가 살기 위해 내가 한 짓이야. 알겠어? 너와 나는 협력관계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종이 다른 생명체다. 각각이 종이 갖는 성질을 되도록 존경하고, 자기측의 이념을 강요하는 것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 후, 우리의 공동 목표가 무엇인지 생각해 봐. 그건 우선 `살아남는` 거야. 안 그래?" - 6권 13쪽

"이번은 너희들의 승리라고 해도 좋다. `살상`에 관해서는 지구상에 인간을 능가할 생물이 없으니까. 하지만 자네들이 지금 들고 있는 도구는 다른...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해 쓰여야 해. 즉... 생물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 7권 182쪽
"너희들의 진짜 역할은... `솎아내기`야. 조금만 더 있으면 온 인류가 알게 되겠지. 인간의 수를 당장 줄여야 한다는 것을..." - 183쪽
"좀 더 있으면 `살인`보다 `쓰레기 투기`가 훨씬 중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조금 더 있으면 우리 존재의 중요성을 깨닫고 보호하려 들지도 몰라. 너희들은 자신의 `천적`을 좀더 존중할 줄 알아야 해. 그리고 이 천적은 아름다운 대자연의 피라미드 정상에 우뚝 선다! 인간보다 위에! 그러므로써 균형을 회복된다! 지구상의 누군가가 문득 생각한거다... 모든 생물의 미래를 지켜야 한다고..." - 184쪽

"인간 한 종의 번영보다 생물 전체를 생각해! 그래야 만물의 영장이다! 정의를 위한다고 떠들어대는 인간! 이 이상의 정의가 어디 있단 말인가!" - 7권 186쪽
"인간에 기생하여 생물 전체의 균형을 지키는 역할을 맡은 우리에 비하면... 인간이야말로 지구를 좀먹는 기생충... 아니... 기생수다!" - 187쪽

`누가 정하지? 인간과... 그밖의 생명의 기준은 누가 정해주는데?` - 8권 179쪽
"이놈은 인간과는 다른 생물이야. 인간의 편익만을 생각할 수는 없어."
`나는 지금... 인간으로서 터무니없는 중죄를 범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에게 해롭다고 그 생물에게 살 권리가 없다는 건가? 인간에게 해롭다 해도 지구 전체로 보면 도리어...` - 180쪽
"생물은 때로는 서로를 이용하고 때로는 죽인다. 그러나 이해하는 것은 무리다. 아니 상대를 자신이라는 `종`의 잣대로 재면서 다 파악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 211쪽
"다른 생물의 마음을 아는 체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다. 다른 생물들은 무엇도 인간의 친구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설령 전혀 이해할 수 없어도 존중해야 할 동거인임에는 틀림없다.다른 생물을 보호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 외롭기 때문이다. 환경을 보호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 멸망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인간 개인의 만족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 그게 전부니까. 인간의 잣대로 인간 자신을 비하해봤자 의미는 없다." - 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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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여행 2016-06-25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읽어 볼 기회가 없을 것 같지만 덕분에 이런 장르의 만화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요. 기생수... 제목만 보면 무슨 내용인지 예측이 안 되었지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