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빈곤 - 이기주의는 자본주의의 필요악인가
찰스 핸디 지음, 노혜숙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7월
품절


나는 우리가 창조한 서구 사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염려스러워 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우리의 복지 증진에 기여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빈부 격차와 기진맥진한 근로자들을 보면 우리가 보다 만족스러운 세상을 향해 가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나로서는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경제체제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의 삶까지 하나의 사업으로 바꾸어버리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방식이 정답처럼 보이지는 않는다.-6-7쪽

문제점은 변화와 시대에 따라 불가피하게 생겨나기 마련이고, 기술과 경제의 성장으로 대부분 해결될 것이라는 가설에 나는 실망할 수밖에 없다. 풍족한 사회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가난에 허덕이며 삶을 탕진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화가 난다. 삶과 삶의 목적에 대한 보다 선험적인 성찰의 부재,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왜곡시키는 경제의 통념이 나는 걱정스럽다. 돈은 삶의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균형을 회복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7-8쪽

자본주의는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대신 경제적 의무를 강조함으로써 우리를 노예로 만들지도 모른다.-9쪽

믿음이란 사실을 밝힐 수 없는 시점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신의 믿음이 옳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만족스럽게 증명해줄 수는 없다. 그러나 진리에 대해 다른 사람과 이해를 같이한다면 강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사실 나는 언젠가 이 세상에 올 커다란 충돌은 국가나 상반된 경제 체계가 아닌 믿음의 체계, 즉 때때로 종교(예를 들어 이슬람교), 때로는 문명(인도와 중국), 그리고 때로는 문화(서구 문화)라 불리는 믿음 체계 사이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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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탐스 스토리
블레이크 마이코스키 지음, 노진선 옮김 / 세종서적 / 2012년 8월
판매중지


또한 이 여섯 가지의 지침은 당신의 삶과 일을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해줄 것이다. 즉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는 나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두려움은 유용한 자원이 될 수 있고, 돈은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고, 단순함이 기업을 성공으로 이끄는 핵심 목표이며, 신뢰가 사내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특질이고, 마지막으로 기부가 최고의 투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나와 비슷한 부류라면 단순한 사업적 성공 이상의 것, 즉 삶의 의미를 추구할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마음껏 하면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공헌하고 싶을 것이다.-5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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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1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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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책 읽는 일은 도가 아니다. 이번 책에 실린 많은 독후감이 그렇듯이 독서를 파고들면 들수록 도통하는 게 아니라, 현실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흔히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 길은 책 속으로 난 길이 아니라, 책의 가장자리와 현실의 가장자리 사이로 난 길이다.-11쪽

저자들도 말하듯이 "청소년들이 20대에 독립을 하거나 더 일찍 동거를 시작한다고 해서 세상이 그 자체로 좋아지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20대 독립'이 불가능한 사회는 그만큼 "경제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해 꽉 막혀 있고,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할 장치들을 갖추지 못한" 사회라고 할 수 있으며, 젊은 세대의 독립을 지체시키는 비효율적인 사회는 급격한 출산율 저하와 퇴행적 성인의 등장이라는 부메랑을 맞게 된다. 저자들은 묻는다. "10대 후반에 독립하고 동거를 경험하녀서 자연스럽게 성인이 된 선진국이 10대와 지체 현상 속에서 종속된 존재로서 어둡게 20대 초반을 맞는 우리나라의 10대들이 경쟁을 하면 누가 이길 것인가?"-18-19쪽

현재 취직난으로 고투하는 우리나라의 20대들은 IMF를 맞았을 때 10대였다. 이 지지리도 운 없는 세대는 IMF 이후 파상적으로 진척되어 온 세계화와 현 정부가 벌인 잘못된 경제정책의 이중 희생자다. 노무현 정부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구조 조정을 통해 대기업의 독과점을 부추겼는데, 이것은 중소기업을 육성했던 박정희나 '벤처기업'에 주력했던 김대중의 경제 정책과 역행한다. 중소기업은 그 자체가 사회적 안전망이랄 수 있으며, 자영업은 자본주의의 마지막 비상탈출구다. 하지만 독과점과 프렌차이징이 젊은이가 차지해야 할 새로운 일자리를 치워버리고 창업 시장에 장벽을 설치함으로써, 생존이 걸린 10퍼센터의 구직을 위해 20대끼리 과잉 경쟁을 벌이는 한편 나머지 90퍼센트는 비정규직을 감수하거나 실업자가 되었다.-19쪽

근대국가와 자본주의가 성취된 대부분의 서구 선진국에서 문학은 대중문화에 투항하거나 그저 과민한 자의식만을 표현한다. 결정적으로 작가와 평론가들은 대학과 출판계에 안주하거나 투신하여 스스로 제도가 됨으로써, 사회적 '공감' 능력을 잃어버렸다.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의 종언'이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도 감지된다면서 "1990년대에 만났던 한국의 문예비평가 모두가 문학에서 손을 떼었다"고 썼지만, 최원식의 말대로 "내가 알리론 김종철을 제외하고 문학을 떠난 비평가는 없다."(한겨례 2007년 10월 27일자) 하지만 그걸 책잡아 '종언'이 주는 문제의식의 핵심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은 오만이다. 근 15년 동안 한국 문학이나 문학평론가들은 <녹색평론>을 능가하는 어떤 사회적 의제도 만들지 못했다. 유일하게 문학계를 떠난 한 사람만이 그랬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반증하는 것일까?-37-38쪽

복거일이나 고종석의 저작을 읽으면서 그들이 지지하는 정치적 이념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책을 온전히 읽은 게 아니다. 참된 독서란 내 앞에 주어진 개별적인 책을 읽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책을 생성한 유무형의 생산 현장 전체를 읽는 일이다. 강조하기가 새삼스러울 만큼 평범한 이 교훈이야말로 피에르 바야르가 말하고자 했던 역설적인 주제라고 감히 말한다면, 저자가 의도하지 않는 나의 오독일 것이다.-43쪽

"일기의 방식은 삶의 방식이다"고 자자가 쓴 바대로, 어떤 책을 어떤 속도로 또 얼마나 읽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나의 삶과 밀접히 연동된다. 실제로 사회인이 되기 이전의 책과 사회인이 되고 나서의 책이 완연히 다른 것은, 나의 삶이 어떤 책을 선택하고 기피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 아닌가?-49쪽

인간은 '놀이'하는 존재다. 하여 에코는 스포츠 자체를 부인하진 않는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 만약 당신 주위에 섹스는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하는 섹스를 구경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번 씩 암스테르담(사창가)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정상이라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런 사람을 '관음증' 환자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체를 사용한 '놀이'(운동)는 전혀 하지 않으며서, 스포츠 관람에만 넋을 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똑같이 환자다.-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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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 - 생태주의 작가 최성각의 독서잡설
최성각 지음 / 동녘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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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가끔 유약함과 자기혐오, 반도덕적 광기, 퇴폐적인 자기부정을 통해 의도했든 안 했든, 맑은 순수와 서늘한 도덕을 드러내기도 한다.-52쪽

드러커는 어떻게 자신이 방관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가. 그의 나이 열네 살 때 드러커는 '오스트리아 청년단'의 선봉에 서서 깃발을 들고 거리행진을 한다. 근교의 공업도시에서 출발한 노동자들과 합류하기 전까지의 데모 행렬이었다. 그때 드러커는 갑자기 웅덩이를 만난다. 웅덩이를 드러커는 밟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군중들에 밀려 웅덩이를 밟게 된다. 그 순간, 드러커는 자신이 스스로 원치 않는 일을 타력에 의해 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타인과 다른 견해를 갖는 것이 자신의 숙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드러커는 폴라니 가문을 통해 배운 '인간의 도리'를 평생 동안 잊지 않았으나 공적 인간으로서의 이상이라는 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실현되기 어려운 일인가를 또한 술회한다.-69-70쪽

이 가슴 아프도록 슬픈 기행문(생명에세이)이 발간된 이후 다시 20년여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더 풍요로워졌는가? 그렇다고 치자. 그래서 우리는 과연 더 행복해졌는가? 풍요는 어디에 소용되는 가치인가? 풍요는 단지 풍요를 위한 것인가,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인가? 풍요가 만약 인간의 복된 삶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조국 근대화가 얼추 완수된 이 시점이라면 풍요로 인해 우리는 바랄 데 없이 행복해져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과연 우리는 오늘 행복한가?-154-155쪽

그러나 바라건데, 그분(김대중)을 끝으로 서럽고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 너무나 많은 내 나라에 다시는 큰 인물이 나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불완전한 인간이 큰 인물이 되어가는 과정 동안에 보잘것없는 이들이 치러야 하는 희생이 너무 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통사람들이 역사를 끌고 가고 그 내용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196쪽

풍요로운 나라의 행복도 지수가 높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자는 끔찍한 성장의 대가를 나열하면서 바로 풍요롭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닐까? 묻고 있다. 무한 성장의 신앙을 바탕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할 여러 조건들을 희생시켜 얻은 풍요는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는커녕 만악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201쪽

"가난이 불행의 절대조건이 아니다"라는 이야기와 "풍요가 행복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쉽게 꺼내기 힘든 이야기는 섬세한 주변 살피기와 냉정하고 무서운 자기비판이 동시에 수반되지 않으면 자칫 불필요한 오해나 거부감을 촉발하거나 공허한 이야기기 되기 쉬울 것이다.-211-212쪽

이 책(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은 또한 끝없는 성장론과 발전론이 허구에 바탕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환상이라는 것을 담백한 어조로 펼치고 있다. 지구가 스무 여남은 개 되면 모를까, 하나밖에 없는 지구로는 완전한 발전의 실현이 불가능한 노릇임을 밝히고 있다. 성장 이데올로기는 세계 어딘가에 아직 개발되지 않은 삼림이 남아 있는 한, 그 임무를 완수하지 않았다는 신념에 불타고 있기 때문이다. 발전 이데올로기는 아직 파괴되지 않은, 아직 매립되지 않은 갯벌이나 산호초가 어딘가에 있는 한 발전은 끝나지 않았다고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215쪽

"세상일의 십중팔구는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마음에 드는 일은 한두 가지밖에 없네", 이 시는 남송 시대의 방악의 시다. 지셴린은 그러면서 인생이란 완벽하지 않아서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소동파도 좋아하지만, 도연명의 시가 그의 좌우면이다. "선한 일을 하면 기쁘다 하나/ 누가 있어 그대를 알아줄까?/ 깊은 생각은 삶을 다치니/ 마땅이 운명에 맡겨야지/ 커다란 격랑 속에서도/ 기뻐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게나/ 해야 할 일을 다했으니/ 더는 걱정하지 마시게."-252쪽

사실 지셴린이 펼치는 소박한 지혜는 잘 살아낸 다른 노인들한테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가 제대로 살았기 때문에, 바로 보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정직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생태위기에 대한 우려가 다른 노인들보다 깊어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내 나라에서 노인들이 생태위기에 대해 우려하는 소리를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노인들은 이 나라를 풍요롭게 만드느라 뼈 빠지게 일했으므로 대접해달라고 한다. 자신들이 흘린 피땀 때문에 너희들이 오늘날 넘치는 풍요를 구가하고 있으니 감사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직도 쳐부숴야 할 '좌파 집단'이 있다고 기염을 토한다.-253-254쪽

모두 신 들린듯이 경제 타령을 해쌓는 마당에 '자발적 가난'을 잘못 이야기하다간 돌 맞기 십상인 발언이다. 그(김종철)가 말하는 가난에 대해 더러 곡해를 하는 모양인데, 그는 "나는 가난 그 자체를 예찬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문제는 '어떤 가난'이냐 하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시급히 해소되어야 하는 절대적 빈곤을 방치하자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빈곤'이 뜻하는 것, 즉 "오늘날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느끼는 가난은 생활에 필요한 물자나 서비스의 절대적 결핍 그 자체로 인한 궁핍감이라기 보다는 '생활의 질(質)'의 열악함에서 오는 고통을 뜻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물자나 서비스의 결핍이 재앙이 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호혜적 인간관계의 그물이 있다면 세상이 이토록 자기파멸적인 자원착취와 환경파괴, 삭막한 탐욕의 전투장이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게 김종철이 한결같이 토하는 외로운 소리다. 그 그물을 그는 세상이 이제 노골적으로 버리기로 작정한 농촌 공동체에서 찾고 있다.-270쪽

우리는 일찍이 보기로 한 것, 보기로 되어 있는 것, 그리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보면서 살고 있다. 세상은 열려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보고 싶은 것,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감옥 속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누가 닫혀 있는가? 인간의 야만에 침묵으로 대응하면서 죽어가고 있는 동물들이 닫혀 있는 존재일까? 기계처럼 자폐적인 사고방식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갑갑한 우리 인간들이 닫혀 있을까?-295쪽

그(프리먼 하우스)는 여전히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천 년의 시간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뿐더러 다만 사태를 바로잡는 데 걸리는 시간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305-306쪽

그(스콧 니어링)는 누구도 시키지 않은 '위험 천만한 자신과의 싸움'을 무쇠의 정신으로 실천했다. 실천하려고 노력했으며,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스콧 니어링 같은 이는 위대한 인물이라고 간주해버리고 곧바로 잊어버리기에는 아까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자신에게 지나칠 정도로 철저했던 요주의 인물'로서의 스콧 니어링은 애써 분석하고, 음미하고, 다시 재해석하면서, 나중에는 그의 성취와 그 성취가 가능했던 정치 사회적 조건, 그리고 인간적인 한계까지 헤아려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누구든 당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329-3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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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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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꿈꾸며 사는 사람만이 자신을 옥죄고 있는 담벼락과 조우할 수 있을 뿐이다. 자유로운 것 같지만 갇혀 있다는 사실. 제한된 것만을 하도록 허락된 자유. 자유정신이 어떻게 이런 허구적인 자유를 긍정할 수 있겠는가?-21쪽

그러니까 온갖 억압과 고통을 극복하여 현재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영위해야만 한다. 자신의 삶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지금 노예의 굴종과 비겁을 감내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노예로 살기를 결정한 셈이고, 지금 주인의 당당함과 자유를 쟁취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주인으로 살기를 결정한 셈이다. 마침내 우리는 자신을 가두어 길들이는 담벼락을 무너뜨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유롭고 싶은가? 그렇다면 니체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지금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24-25쪽

'내가 없다'는 주장은 부정적으로 '내가 공하다'고 표현된다. 이 주장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나는 수많은 인연들의 마주침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런 나에게 나의 것이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은 모두 인연이 있어서 내게 잠시 머무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도, 젊음도, 나의 아이도, 그리고 돈까지도 모두 그러하다. 그것들은 모두 인연이 되어서 나에게 왔고, 인연이 다해서 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나 자신이나 내가 가진 것이 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부질없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가르주나의 핵심적인 전언이다.-61쪽

'오래된 뇌'가 행동을 담당하고 '중간 뇌'가 정서를 관장한다면, '새로운 뇌'는 합리적인 사유를 담당하고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미래에 더 새로운 지층이 생기는 순간, 현재 새로운 지층은 낡은 지층으로 밑에 깔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지층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합리적 사유도 시간이 지나면 정서나 행동의 영역으로 이행한다. 이것이 바로 습관을 설명하는 현대 뇌과학의 방식이다. -78쪽

우리의 동일성identity을 규정하는 제일의 원리가 습관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미 습관이 된 것, 지금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 그리고 나중에 습관으로 획득하게 될 것, 이것이 바로 삶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살아가는 것이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새롭게 펼쳐진 삶의 환경과 우리 내면의 습관이 불일치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런 불일치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하나는 기존의 습관대로 환경을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경에 맞게 자신의 습관을 새롭게 형성하는 것이다. -80쪽

생각은 오직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event과 조우할 때에만 발생하는 것이다. -83쪽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이 '모던' '뒤에post' 오는 시대라고 보는 통념을 거부한다. 포스트모던이 모던을 낡게 만들고 도래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모던의 핵심, 즉 무한한 새로움을 지향하는 강박증적 운동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포스트모던'이란 말에서 중요한 것은 '모던modern'이 아니라 '포스트post'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마저 낡은 것으로 뒤로 보낼 수 있어야만 '새로움'은 진정으로 새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포스트모던은 진정한 의미의 모던이었던 셈이다. 모던이 모던으로 머물 때, 모던은 새로움의 의미를 잃고 낡아질 수밖에 없다. -231쪽

어떤 작품도 일단 포스트모던해야만 모던할 수 있다. 이렇게 이해된 포스트모더니즘은 곤경에 빠진 모더니즘이 아니라 발생 중에 있는 모더니즘이고, 이런 상태는 불변하는 것이다.
- <포스트모던의 조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232쪽

산업자본과 소비 사회가 추구하는 새로움은 역설적인 성격을 갖는다. 새롭다고 평가되는 어떤 상품도 자신의 존재를 계속 고집할 수 없다. 그렇게 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움은 부단히 자신을 극복해야만 새로움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새로움은 일종의 강박증으로 보아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제 우리는 리오타르가 왜 "어떤 작품도 일단 포스트모던해야만 모던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작품도 부단히 새로워야만 진정으로 새로울 수 있다'는 의미이다. 리오타르의 지적이 옳다면, 우리는 새로움을 강요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그렇지만 유한한 삶에 비추어보았을 때, 우리는 도대체 언제까지 새로움의 뒤를 쫓을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새로움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다가 지금 더 소중한 것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를 일이다. 가끔은 뒤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생각보다 오래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232쪽

베버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티즘은 직업을 일종의 소명, 즉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의무로 간주한다. 이런 생각은 직업을 뜻하는 'vocation'이라는 단어의 의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단어에는 '직업'이라는 의미와 함께 '소명召命', 즉 '신의 부르심'이란 의미가 있다. 그래서 기독교도들에게 있어 직업은 천직天職, 하늘로부터 유래한 임무라는 발상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산업자본조의가 발전하면서 천직은 자본가와 노동자로 양분되었다. 그렇지만 두 계급 사이에는 갈등의 요소가 있을 수 없다. 자본가나 노동자는 모두 자신의 역할을 하나의 소명으로서, 다시 말해 '금욕적'으로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두 계급이 '소비' 부분을 억제하고 '생산' 부분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다.-234쪽

결국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이미지들에 길들여짐에 따라 스펙터클 사회의 거주민들은 점점 현실에 대한 방관자, 혹은 구경꾼으로 변하게 된다. 대중매체를 통해 표현된 설악산과 직접 등정해본 설악산의 차이, 혹은 드라마를 통해 이미지화된 연애와 실제로 겪게 되는 연애의 차이, 뉴스를 통해서 드러난 정치권의 이미지와 실제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는 정치적 권력의 차이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온몸으로 겪어야만 했던 현실 세계는 사라지고 시각적으로 특화된 이미지의 세계만 남게 된 것이다. 기 드보르가 스펙터클 사회에서는 "특권적인 인간 감각을 당연히 시각에서 찾는데, 다른 시대에 그 특권적 인간 감각은 촉각이었다"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250쪽

권력의 입장에서는 좋을 것이다. 현실에 치열하게 참여하는 실천가가 줄어들고 거리를 두고 냉소적으로 구경하는 방관자가 늘어나게 되니까 말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대중매체의 볼거리들이 기본적으로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서 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볼거리가 선정적이고 자극적일수록, 우리는 대중매체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자본은 이를 이용해 우리의 내면에 신상품의 유행과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결국 우리는 여가시간마저 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는 셈이다.-250쪽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시간은 두 종류로 분할된다. 하나는 자본에 고용되어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노동 시간이다. 다른 하나는 직장을 떠나서 보내는, 기 드보르가 '비활동'이라고 부르는 여가 시간이다. 여가 시간은 노동을 하지 않는 시간이어서 자유로운 시간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대중매체는 우리의 자유를 가만두지 않는다. 대중매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노동해서 만든 상품에 대한 소비 욕망을 증폭시키고 있다. 결국 여가 시간의 활동마저도 자본주의는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활동의 외부에는 어떤 자유도 있을 수 없으며, 스펙터클의 맥락에서는 모든 활동이 부정된다"는 말의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252쪽

하위징아는 소중한 교훈을 준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수단이면서 목적일 때 우리는 기쁨으로 충만한 현재를 살 수 있는 반면 자신의 행동이 무엇인가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고단함으로 충만한 현재를 견디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현재'가 두 가지 의미로, 혹은 두 가지 가치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놀이에서 분명해지는 것처럼 그 자체로 향유되고 긍정되는 현재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의 경우처럼 미래를 위해 소비되어야 하고 견뎌야 하는 현재이다. -303-3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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