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 - 생태주의 작가 최성각의 독서잡설
최성각 지음 / 동녘 / 2010년 8월
장바구니담기


문학은 가끔 유약함과 자기혐오, 반도덕적 광기, 퇴폐적인 자기부정을 통해 의도했든 안 했든, 맑은 순수와 서늘한 도덕을 드러내기도 한다.-52쪽

드러커는 어떻게 자신이 방관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가. 그의 나이 열네 살 때 드러커는 '오스트리아 청년단'의 선봉에 서서 깃발을 들고 거리행진을 한다. 근교의 공업도시에서 출발한 노동자들과 합류하기 전까지의 데모 행렬이었다. 그때 드러커는 갑자기 웅덩이를 만난다. 웅덩이를 드러커는 밟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군중들에 밀려 웅덩이를 밟게 된다. 그 순간, 드러커는 자신이 스스로 원치 않는 일을 타력에 의해 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타인과 다른 견해를 갖는 것이 자신의 숙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드러커는 폴라니 가문을 통해 배운 '인간의 도리'를 평생 동안 잊지 않았으나 공적 인간으로서의 이상이라는 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실현되기 어려운 일인가를 또한 술회한다.-69-70쪽

이 가슴 아프도록 슬픈 기행문(생명에세이)이 발간된 이후 다시 20년여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더 풍요로워졌는가? 그렇다고 치자. 그래서 우리는 과연 더 행복해졌는가? 풍요는 어디에 소용되는 가치인가? 풍요는 단지 풍요를 위한 것인가,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인가? 풍요가 만약 인간의 복된 삶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조국 근대화가 얼추 완수된 이 시점이라면 풍요로 인해 우리는 바랄 데 없이 행복해져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과연 우리는 오늘 행복한가?-154-155쪽

그러나 바라건데, 그분(김대중)을 끝으로 서럽고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 너무나 많은 내 나라에 다시는 큰 인물이 나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불완전한 인간이 큰 인물이 되어가는 과정 동안에 보잘것없는 이들이 치러야 하는 희생이 너무 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통사람들이 역사를 끌고 가고 그 내용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196쪽

풍요로운 나라의 행복도 지수가 높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자는 끔찍한 성장의 대가를 나열하면서 바로 풍요롭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닐까? 묻고 있다. 무한 성장의 신앙을 바탕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할 여러 조건들을 희생시켜 얻은 풍요는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는커녕 만악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201쪽

"가난이 불행의 절대조건이 아니다"라는 이야기와 "풍요가 행복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쉽게 꺼내기 힘든 이야기는 섬세한 주변 살피기와 냉정하고 무서운 자기비판이 동시에 수반되지 않으면 자칫 불필요한 오해나 거부감을 촉발하거나 공허한 이야기기 되기 쉬울 것이다.-211-212쪽

이 책(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은 또한 끝없는 성장론과 발전론이 허구에 바탕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환상이라는 것을 담백한 어조로 펼치고 있다. 지구가 스무 여남은 개 되면 모를까, 하나밖에 없는 지구로는 완전한 발전의 실현이 불가능한 노릇임을 밝히고 있다. 성장 이데올로기는 세계 어딘가에 아직 개발되지 않은 삼림이 남아 있는 한, 그 임무를 완수하지 않았다는 신념에 불타고 있기 때문이다. 발전 이데올로기는 아직 파괴되지 않은, 아직 매립되지 않은 갯벌이나 산호초가 어딘가에 있는 한 발전은 끝나지 않았다고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215쪽

"세상일의 십중팔구는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마음에 드는 일은 한두 가지밖에 없네", 이 시는 남송 시대의 방악의 시다. 지셴린은 그러면서 인생이란 완벽하지 않아서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소동파도 좋아하지만, 도연명의 시가 그의 좌우면이다. "선한 일을 하면 기쁘다 하나/ 누가 있어 그대를 알아줄까?/ 깊은 생각은 삶을 다치니/ 마땅이 운명에 맡겨야지/ 커다란 격랑 속에서도/ 기뻐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게나/ 해야 할 일을 다했으니/ 더는 걱정하지 마시게."-252쪽

사실 지셴린이 펼치는 소박한 지혜는 잘 살아낸 다른 노인들한테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가 제대로 살았기 때문에, 바로 보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정직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생태위기에 대한 우려가 다른 노인들보다 깊어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내 나라에서 노인들이 생태위기에 대해 우려하는 소리를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노인들은 이 나라를 풍요롭게 만드느라 뼈 빠지게 일했으므로 대접해달라고 한다. 자신들이 흘린 피땀 때문에 너희들이 오늘날 넘치는 풍요를 구가하고 있으니 감사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직도 쳐부숴야 할 '좌파 집단'이 있다고 기염을 토한다.-253-254쪽

모두 신 들린듯이 경제 타령을 해쌓는 마당에 '자발적 가난'을 잘못 이야기하다간 돌 맞기 십상인 발언이다. 그(김종철)가 말하는 가난에 대해 더러 곡해를 하는 모양인데, 그는 "나는 가난 그 자체를 예찬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문제는 '어떤 가난'이냐 하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시급히 해소되어야 하는 절대적 빈곤을 방치하자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빈곤'이 뜻하는 것, 즉 "오늘날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느끼는 가난은 생활에 필요한 물자나 서비스의 절대적 결핍 그 자체로 인한 궁핍감이라기 보다는 '생활의 질(質)'의 열악함에서 오는 고통을 뜻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물자나 서비스의 결핍이 재앙이 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호혜적 인간관계의 그물이 있다면 세상이 이토록 자기파멸적인 자원착취와 환경파괴, 삭막한 탐욕의 전투장이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게 김종철이 한결같이 토하는 외로운 소리다. 그 그물을 그는 세상이 이제 노골적으로 버리기로 작정한 농촌 공동체에서 찾고 있다.-270쪽

우리는 일찍이 보기로 한 것, 보기로 되어 있는 것, 그리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보면서 살고 있다. 세상은 열려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보고 싶은 것,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감옥 속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누가 닫혀 있는가? 인간의 야만에 침묵으로 대응하면서 죽어가고 있는 동물들이 닫혀 있는 존재일까? 기계처럼 자폐적인 사고방식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갑갑한 우리 인간들이 닫혀 있을까?-295쪽

그(프리먼 하우스)는 여전히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천 년의 시간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뿐더러 다만 사태를 바로잡는 데 걸리는 시간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305-306쪽

그(스콧 니어링)는 누구도 시키지 않은 '위험 천만한 자신과의 싸움'을 무쇠의 정신으로 실천했다. 실천하려고 노력했으며,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스콧 니어링 같은 이는 위대한 인물이라고 간주해버리고 곧바로 잊어버리기에는 아까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자신에게 지나칠 정도로 철저했던 요주의 인물'로서의 스콧 니어링은 애써 분석하고, 음미하고, 다시 재해석하면서, 나중에는 그의 성취와 그 성취가 가능했던 정치 사회적 조건, 그리고 인간적인 한계까지 헤아려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누구든 당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329-33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