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톨로지 (반양장) - 창조는 편집이다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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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 특히 미국에서 논의되는 것들을 끊임없이 힐끔대야만, 비주류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주변부 지식인의 슬픔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지식의 종속이다. 지식 체계 구축의 기본단위인 개념 하나 스스로 만들 수 없다면 ‘창조사회’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 6쪽

‘이이토코도리(良いとこ取り)’, 즉 ‘좋은 것은 기꺼이 취한다!’는 일본식 문화 편집 방식이야말로 일본의 정체성이라고 세이고는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아예 ‘방법으로서의 일본’을 주장한다. 일본 문화에는 특별한 주제가 없다는 거다. 따라서 특별한 내용의 일본 정체성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서로 다른 것들이 대립이나 갈등 없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바로 그 편집 방법에 일본의 정체성이 있다는 거다. - 9쪽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해가 진 다음에 난다’는 헤겔의 주장은, 문장으로 구성되는 논리적 사유는 항상 2차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찰을 직업으로 하는 지식인은 비겁할 수밖에 없는 거다. 치열한 싸움이 다 끝나고, 해가 진 다음에야 어슬렁거리며 나타나기 때문이다. 비겁함은 지식인의 존재적 본질이다. (그래서 난 교수가 정치인이 되는 것에 절대 반대다!) - 33쪽

창조적 사고는 이 같은 일상의 당연한 경험들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된다. 이를 가리켜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적 이론가 시클롭스키(Shklovsky)는 ‘낯설게 하기(ostranenie)’라고 정의한다. 인간의 가장 창조적 작업인 예술의 목적은 일상의 반복과 익숙함을 낯설게 해 새로운 느낌을 느끼게 만드는 데 있다는 거다. - 35쪽

정보가 부족한 세상이 아니다. 정보는 넘쳐난다. 정보와 정보를 엮어 어떠한 지식을 편집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인 세상이다. 편집의 시대에는 지식인이나 천재의 개념도 달라진다. 예전에는 많이, 그리고 정확히 아는 사람이 지식인이었다.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정보를 외우고 있으면 천재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다. 이제 지식인은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검색하면 다 나오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지식이은 정보와 정보의 관계를 ‘잘 엮어내는 사람’이다. 천재는 정보와 정보의 관계를 ‘남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엮어내는 사람’이다. - 43쪽

자연과학의 기초는 실험이다. 실험의 결과가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여지려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누가 실험해도 같은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는 ‘객관성(objectivity)’, 반복해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한다는 ‘신뢰성(reliability)’, 측정하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측정했는가의 ‘타당성(validity)’, 그리고 그 결과를 일반화할 수 있는가의 ‘표준화(standardization)’ 및 ‘비교 가능성(comparability)’이다. - 68쪽

서구 원근법의 전제는 두 가지다. 첫째, 세상을 보는 눈은 하나여야 한다. 소실점에 대칭되는 위치의 시선이다. 바로 이때부터 서구 ‘객관성의 신화’가 시작된다. 세상을 보는 눈은 오직 하나여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다. 보는 사람마다 세상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 서구 원근법은 모든 사람의 관점을 하나로 통일하고, 이 관점을 중심으로 세상을 재편하려는 시도다. 오늘날 다양성과 상대성을 뜻하는 관점, 즉 퍼스펙티브의 시작은 이렇게 ‘독점적’이고 ‘권력적’이었다. - 144, 145쪽

퍼스펙티브(perspective)를 한자로 번역해보면, 이 주관과 객관의 양면성이 절묘하게 표현된다. ‘주관적’ 시점을 뜻할 때는 ‘관점’으로, 객관적 시점을 뜻할 때는 ‘원근법’으로 번역되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이 관점의 문제가 서양처럼 그리 간단하게 정리되지 않는 까닭이다. 서양의 ‘싱글 퍼스펙티브(single perspective)’와 동양의 ‘멀티플 퍼스펙티브(multiple perspective)’ 사이에는 근본적인 세계관의 차이가 존재한다.
르네상스 시대 원근법의 발견으로 비롯된 주체와 객체의 인식론적 통찰이 의사소통의 문제로 연결되는 이유는 ‘객관성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객관적 관점이란 각기 다른 인식의 주체들이 ‘같은 방식으로 보기(joint-attention)’로 서로 약소해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객관성이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합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인문학에서는 객관성이란 단어를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으로 대체한다. - 155, 156쪽

상호주관성의 시대에는 각 주체들 간의 소통이 중요하다. 그래야 서로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혹은 상호주관적 시점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퍼스펙티브를, 각 주체들 간 상호 합의의 결과가 아니라 객관적 관점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자주 있다. 이때는 반드시 어떤 권력이 개입되어 있다고 의심해야 한다. - 156쪽

좌표가 잡히지 않는 공간은 ‘공포’다. 도무지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디로 흐르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은 더 큰 공포다. 공간은 발이라도 붙어 있지만, 시간은 그저 붕 떠 있다. 그래서 존재의 본질은 ‘불안’이다.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다.
하이데거의 ‘세계-내(內)-존재(In-der-Welt-Sein)’란 시간과 공간에 아무 대책 없이 ‘내던져짐(Geworfenheit)’을 의미한다. 내던져짐을 한자로 표현하면 ‘피투성(被投性)’이다. ‘아무 곳도 아니고, 아무 곳에도 없다’라고 하는 불안의 존재는 피투성이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어디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이 불안을 견디지 못해 인간은 ‘여기와 지금(here and now)’이라고 하는, 존재의 확인을 위한 좌표를 정하기 시작한다. - 158, 159쪽

시간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시간을 ‘분절화’한다. 시간을 숫자로, 마치 셀 수 있는 물체처럼 만든 것이다. 일단 하루를 24시간으로 쪼갠다. 하루는 모여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된다. 그리고 365일이 모여 1년이 된다. 중요한 것은 이 1년이 매번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아니, 반복된다고 믿는 것이다. 반복되는 것은 하나도 안 무섭다.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한 해가 잘못되며 그 다음 해에 다시 잘하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새해가 오는 것을 매번 그렇게 축하하며 반기는 것이다. - 159쪽

시선은 권력이다. 권력을 가진 자만이 시선을 소유할 수 있다. 그곳에 들어가 보면, 왕의 의자는 항상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각종 국가 행사에서 대통령의 의자는 가장 높고, 정 가운데 있다. 원근법의 소실점처럼 모든 절차의 기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176쪽

`텍스트(text)`는 항상 해당 `콘텍스트(con_text, 맥락)`에서 기록된다. 따라서 모든 텍스트는 반드시 그 텍스트가 쓰인 문화적 역사적 콘텍스트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 274쪽

포스트모더니티의 핵심을 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라고 규정한다. 근대 후기의 성과 사회는 각 개인을 끊임없는 자기 착취의 나르시스적 장애로 몰아넣는다. 타인에 의한 착취가 아니라 `자발적 자기 착취`다. 끊임없이 발전해야 한다는 일원론적 발달과 성장에 대한 강박으로 인해 주체는 죽을 때까지 안정된 자아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런 후기 근대적 주체의 미완결적 성격은 자신을 태워버리는 `번아웃(burn-out)`과 우울증으로 이어진다.
프로이트적 억압은 타율적 규율 사회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부정성`이다. 슈퍼에고의 본질은 사회적 규율의 내면화다. `~을 해서는 안 된다` `~을 해야만 한다`는 타율적 규제, 억압, 강제로 인해 주체는 끊임없이 불안함을 느낀다. `독일식 개인`의 모습이다. 반면 주체의 자율성이 극대화된 성과 사회의 본질은 `긍정성`이다.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를 수 있다`는 `미국식 개인`이다. 미국식 개인에게 나타나는 능력의 무한 긍정은 독일식 개인의 금지와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위협적이고 위험하다는 것이 한병철 교수의 주장이다. 끝 모르는 자기 착취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 322, 3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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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모를 뿐 - 숭산 대선사의 서한 가르침
현각스님 엮음 / 물병자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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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공부란 삶과 죽음을 초월한 자유(自由)를 얻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는 삶과 죽음이 있지만, 참된 자기(自己)에게는 삶과 죽음이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참된 자기를 찾는다면, 한 시간이나 하루 또는 한 달 후에 죽는다 해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몸을 치유하는` 명상만을 한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몸에만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언젠가, 당신의 몸이 죽어버릴 때 이런 종류의 명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런 종류의 명상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이런 종류의 명상은 올바른 공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올바른 공부를 한다면, 어느 때 병이 들어도 OK, 고통을 겪어도 OK, 설사 죽는다 하여도 OK, 문제 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순간순간마다 청정한 마음을 지키면, 어디에서나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얼마나 믿습니까? 다른 이들을 얼마나 돕고 사십니까? 이 두 가지는 매우 중요한 물음입니다. 참다운 마음 공부는 여러분이 자신의 참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 16쪽

선(禪)이란 이런 `아무것도 없는, 바로 그 마음`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무심(無心)의 마음을 증득(證得)할 수 있을까요? 먼저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일까?` 라고 물어 보아야만 합니다. 만약 당신이 말로써 답변을 한다면, 그것은 단지 생각일 뿐입니다. - 17쪽

모르는 마음은 생각을 끊어 버립니다. 그것은 생각 이전입니다. 생각 이전에는 의사도, 환자도, 그리고 하느님도, 부처도, `나`도, 언어(言語)도, 아무것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우주와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무심(無心)이라 부르기도 하고, 원점(primary point)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하느님이나, 우주적 기운, 희열이나 적멸(寂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만 이 말들은 그저 가르치기 위해 쓰는 말일 뿐입니다. 무심(無心)이란 언어 이전 입니다. - 17, 18쪽

만약 당신이 깨달음을 원하면 깨달음은 멀리, 멀리 달아나 버립니다. 만약 당신이 깨달음을 원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보고, 듣고, 냄새 맡는 모든 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러니 "나는 무엇인가를 원한다."는 생각을 놓아 버리십시오. 만일 `나-나의-나를`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좌선을 한다면, 당신은 영원토록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만일 당신의 `나-나의-나를`이라는 마음을 사라지게 하면, 이미 당신은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 25쪽

당신이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에는, 그것만 하십시오. 당신이 무언가를 100퍼센트 할 때, 자신의 중심을 찾게 됩니다. 그것은 청정한 맑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만 합니다. 만약 당신의 생각이나 조건 또는 상황에 집착한다면, 어떤 일을 하건 당신은 중심을 잃게 됩니다. - 34쪽

아플 때에는, 아프기만 하세요. 그러면 당신은 모든 것을 얻게 되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64쪽

스즈키 노사(老師)는 "바위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지 혜성의 꼬리를 잡을 수 있을지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신적이 있습니다. - 87쪽

만일 당신이 이 본분사를 지키면, 당신은 여유로운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당신이 여유로운 마음을 지니면, 몸이 하는 어떤 직업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아울러 순간순간 행하는 당신 몸뚱이의 일이 그대로 진리이며, 일체 중생을 제도할 것입니다.
어떤 조사께서 말씀하시길, "마음이 완전하면, 만사가 완전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마음이 완전하면, 어떤 일을 하든 어떤 행위를 하든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 89쪽

당신이 하늘을 보면, 푸를 뿐입니다. 나무를 보면, 파랄 뿐입니다. 설탕을 맛보면, 달 뿐입니다. 당신이 무성르 하면, 하기만 하십시오. 둘을 만들지 마십시오. 하나도 만들지 마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이미 세상의 평화와 완전한 자유를 누린 것입니다. 이것이 순간순간 자신의 올바른 상황을 지키는 것입니다. - 95쪽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매일매일의 당신의 삶은 꿈에 불과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딸에게 순간순간의 올바른 행동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 111쪽

즉여는 자신의 올바른 상황을 순간순간 지키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이 배가 고프면 무엇을 합니까? 만약 당신이 "하늘은 푸르고, 풀은 파랗다."라고 답하면, 그 답은 충분한 답이 아닙니다. 당신이 밥을 먹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당신이 배가 고플 때 지켜야 하는 올바른 상황입니다. - 213쪽

"당신들의 신을 죽이지 못하면, 결코 참된 신을 알 수 없습니다. 참된 신은 이름도 모양도 없으며, 말도 문자도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각기 자기들의 마음속에 신을 만듭니다. 그래서 그들은 참된 신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신을 죽여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참된 신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선(禪)과 기독교는 하나입니다."

당신이 잠에서 깨어나면 먼저 세수를 하고 그런 다음에는 차를 마십니다. 이것뿐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길입니다. 만약 당신이 꿈을 완전하게 안다면, 당신은 올바른 길을 안 것입니다. 너무 간단하죠? 하지만 모두들 복잡한 삶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 세상 전체가 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당신의 탐욕도 꿈이고, 당신의 노여움도 꿈이며, 당신으 ㅣ어리석음도 꿈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당신을 꿈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을 위한 탐욕을 버리고 오직 다른 이들을 위하여 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안다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꿈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자신의 참된 자기를 알 것 입니다. - 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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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쿨은 끝났다 - 어느 명문 로스쿨 교수의 양심선언
브라이언 타마나하 지음, 김상우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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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로스쿨 교수가 돼서 좋은 일이 여럿 있지만 그중 가장 좋은 것은 (결정된 강의 외에 다른) 일을 할지 말지, 혹은 언제 할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원할 때 한다. 그리고 그 누구도 (로스쿨 학장을 포함해) 우리에게 뭘 하라고 지시하지 않는다. 집에서 연구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학교에 거의 나오지 않는 교수들도 있다. 또 어떤 교수는 매일 겪어야 하는 출퇴근 전쟁을 피하고 싶어 한다(내가 아는 교수 몇은 심지어 다른 도시에 살면서, 기차나 비행기로 학교에 오기도 한다). 일부 교수는 로펌 관련 법률 업무르 ㄹ보는 사무실로 출근하기도 한다. 개인적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교수들을 학교에 붙어 있게 하고,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이 만날 수 있게 만드는 일은 정말이지 힘든 일이 되었다. - 23, 24쪽

"1년 차에는 죽도록 겁을 주고, 2년 차에는 죽도록 공부시키며, 3년 차에는 죽도록 심심하게 만든다." 이 오래된 속담에 담겨 있는 진실은 로스쿨 3년 차 과정을 없애자는 계속된 요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스탠퍼드 로스쿨(Stanford Law School)의 래리 크레이머(Larry Kramer) 학장은 2010년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로스쿨에 대해 한 가지 잘 알려진 사실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는 데는 절대 3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2년이면 충분하다. 어쩌면 1년 6개월이면 될지도 모른다." 3년 과정의 로스쿨들(노스웨스턴 대학교, 사우스 웨스턴 대학교, 데이턴 대하교)이 최근 2년 과정(JD과정)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는 진정한 2년 과정이 아니라 3년 과정을 2년으로 압축한 것으로 등록금은 3년 과정과 같다. - 45쪽

여기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로스쿨 교수들이 많은 변호사들보다 부유하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가 조장하고 있는 두 가지 허상, 즉 변호사가 되려면 상당한 재정적 희생(투자)을 해야 한다는 것과 로스쿨 교수가 된다는 것은 일종의 공익활동을 하는 것이라는 허상이 여지없이 깨져버린다는 것이다. 로스쿨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청렴`의 모델이 된다는 로스쿨협회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우리가 받는 보수는 상당하고, 업무 스트레스는 낮다. 우리는 자유롭게 시간을 쓰고 있으며, 귀찮게 구는 보스도 없다. 더욱이 우리의 고용 보장은 거의 난공불락이다. 우리 연봉은 다른 학과 교수들보다 훨씬 많고, 강의시간은 그들 대부분보다 적다. 우리의 삶의 질은 변호사들보다 훨씬 좋고, 그들 대부분보다 더 많은 돈을 번다. - 91쪽

로스쿨 교수들은 `법학과`가 아니라 `로스쿨`에서 가르친다. 바로 이 때문에 교수단의 지나친 학문 지향에 계속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로스쿨 교수들(그리고 로스쿨 교수단의 다른 박사학위 소지자들)은 그들이 법학과 교수일 때 받을 수 있었던 보수보다 훨씬 많은 보수를 받고 있다. 로스쿨 학생들은 현업 법률가가 되기 위해 로스쿨에 들어오며, 로스쿨에서 법률가로 성공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우고 능력을 쌓기를 웒나다. 그런데 현업 경험이 거의, 혹은 전혀 없는 교수들이 이런 학생들을 교육해 현업 법률가로 배출한다는 게 과연 이상적인지는 의문이다. - 99쪽

LLM과정 학생들은 이미 개설된 JD과정 수업을 듣기 때문에, 로스쿨 입장에서 LLM과정 학생들은 공짜 돈이나 다름없다. 돈을 내고 JD과정 강의실 빈자리를 메워주는 존재인 것이다. - 106쪽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우리가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고 해도 우리에게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이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며, 대놓고 거짓말을 해대는 소수의 사기꾼들 말고는 개인적으로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 자기편의적인 주장이다. 사실 우리 로스쿨 교수들은 모든 선택 단계에서 지금 이 길로 오게 된 선택을 했다. 어떤 로스쿨 운영자도 그리고 어떤 로스쿨 교수도 자리에서 일어나 "당장 그만둬라. 그런 일이 규정을 위반하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분명 옳지 않은 일이다"라고 외친 사람은 없었다. - 134쪽

전액 장학금을 받고 듀크로 갈지, 아니면 전액 장학금을 못 받아도 하버드나 컬럼비아 등 최고 명문으로 갈지의 문제가 그다지 심각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잇따. 듀크도 좋은 학벌이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법조계는 매우 엘리트주의적이며 학벌을 중시하는 곳이다. 이는 미국 대법원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대법원 판사 중 하버드 출신은 17명, 예일 출신은 10명, 컬럼비아 출신은 7명에 이른다. 그 외 로스쿨 중 대법원 판사를 3명 이상 배출한 곳은 전혀 없다. 듀크는 1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5대 명문 로스쿨을 나와야 명문 로펌과 법무부에 취직하거나 로스쿨 교수가 되기에 훨씬 쉽다. 듀크 졸업장이 많은 기회의 문을 열어주는 엘리트 자격증이긴 하지만 하버드, 예일, 스탠퍼드, 혹은 컬럼비아 졸업생과의 차이는 결코 적지 않다. - 157, 158쪽

부의 효과는 학부 대학들에서도 발견된다. 로스쿨과 학부 대학들에서 나타나는 이런 부의 효과는 미국에서 악화되고 있는 양극화와 중산층 붕괴 현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로스쿨의 경우, 특별한 문제는 부의 효과 현상 그 자체보다 그로 인해 더 큰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법이 갖아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미국 사회에서 부유층 출신의 명문 로스쿨 졸업생들이 법조계 최고위직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 160쪽

진보세력은 항상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다. 그리고 사회 정의의 핵심은 평등한 기회와 법에 대한 평등한 접근이다. 예일을 포함한 대부분의 명문 로스쿨 교수들은 진보적이다. 그런데 명문 로스쿨과 `그를 따르는 다른 모든 로스쿨`이 거리낌 없이 등록금을 올린 것은 법조계 진입을 가로막는 거대한 경제적 장벽을 쌓는, 따라서 사회 정의를 거스르는 행동을 한 것이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부채의 망령에 겁을 낼 수밖에 없는 중산층과 저소득층 학생들은 갈수록 로스쿨 진학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과도한 부채를 안고 있는 많은 로스쿨 졸업생들은 부채만 없었으면 가지 않았을지도 모를 기업 로펌으로만 몰리고 있다. 현재의 등록금과 장학금 메커니즘은 명문 로스쿨을 포함한 미국 사회의 최상위 법학계와 법조계에 대한 부유층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 201쪽

학교의 평균 연봉과 페이스케일의 평균 연봉이 비슷한(1,000~2,000달러 정도 높거나 낮은) 로스쿨은 13개다. 따라서 페이스케일의 정보가 구조적으로 하향 편향된 자료일 수는 있지만, 적어도 13개 로스쿨의 경우에는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하향 편향이 없었다. 전국에 있는 이 13개 로스쿨은 샌프란시스코 대학교, 드폴, 노스웨스턴, 유타,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 뉴멕시코, 캔자스, 오클라호마, 마케트, 오리곤, 루이빌,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 버펄로 로스쿨 등이다. 공립 로스쿨이 많다는 점을 제외하고, 이들의 공통점은 학교가 발표한 평균 연봉이 5만 달러에서 7만 5,000달러 정도로 그렇게 터무니 없이 높은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 226쪽

나는 2009년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3개 목록을 작성해 비교했다. 첫째는 졸업생 평균 부채가 가장 많은(10만~13만 2,000달러 사이) 70개 로스쿨이고, 둘째는 `JD학위 필수` 직에 취업한 비율이 가장 낮은(26~62%) 70개 로스쿨이며, 셋째는 민간업체 정규직 연봉 보고 비율이 가장 낮은(5~50%) 70개 로스쿨이다. 이 목록은 해당 범주마다 전체 로스쿨의 약 3분의 1(70개)을 `가장 문제가 있는 로스쿨`로 자의적으로 규정해 추린 결과다. (...) 이 3개 목록에 포함된 로스쿨 중 처음 2개 목록에 함께 오른 로스쿨은 27개다. 그리고 이 27개 중 세 번째 목록에도 오른 3관왕 로스쿨은 15개다. 이 27개 로스쿨을 졸업생 평균 부채가 많은 순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별표는 3관왕 로스쿨들이다).
토머스제퍼슨*, 뉴욕 로스쿨*, 아메리칸 대학교, 존마셜(시카고)*, 버몬트*, 로저윌리엄스*, 골든게이트*, 스테트슨*, 뉴햄프셔, 찰스턴*, 애틀랜타 존마셜*, 가톨릭, 샌프란시스코*, 노바 사우스이스턴, 플로리다코스탈*, 리젠트, 서퍽, 채프먼*, 팬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 발파라이소*, 배리, 뉴잉글랜드, 드폴, 덴버, 산타클라라*, 오클라호마시티, 와이드너* - 228, 229쪽

만약 주요 법률시장에 있는 기업 로펌에 취직하는 게 목표라면 로스쿨 순위가 중요하다. 이럴 경우 상위권 로스쿨 진학이 필수다. 그러나 그런 목표가 아니라면, 로스쿨 순위는 덜 중요하다. 로스쿨 지망새은, 훨씬 많은 돈이 들더라도, 예컨대 80위 로스쿨보다 50위 로스쿨로 가는 게 당연히 더 낫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순위가 높다고 반드시 취업 전망이 좋은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지역에서 일하고 싶은지, 그리고 해당 로스쿨이 그 지역에서 취업률이 높은지 하는 것이다. - 234쪽

그러나 각 주에는 2만 달러 미만의 저렴한 등록금을 부과하고 있는 훌륭한 공립 로스쿨들이 아직 많다. 노스캐롤라이나, 앨라배마, 조지아, 조지아 주립대학교, 위스콘신, 유타, 플로리다,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테네시, 템플, 켄터키 대학교, 오클라호마, 캔자스, 뉴멕시코,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 버펄로, 네브라스카, 하와이, 웨스트버지니아, 루이빌, 미주리 등이 바로 그런 로스쿨들이다. 이들은 각 주의 대표 로스쿨이란 확고한 지위를 바탕으로 지역 법률시장의 강자로 군림하면서 <US 뉴스>의 순위 경쟁 압력을 버텨왔다. 이들은 고액 연봉을 주는 상위권 로스쿨들에게 좋은 학자들을 주기적으로 빼앗기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학교 운영이나 지위에 별문제가 없다. - 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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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
프레드 로델 지음, 이승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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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 시대에는 주술사가 있었다. 중세에는 성직자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법률가가 있다. 어느 시대에나, 자신들이 갈고닦은 특수한 지식의 권위를 지켜 내기 위해, 기술적 수법에 뻔뻔하고 그럴듯한 말장난을 첨가해, 인간 사회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던 영특한 무리들이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그 직업적 속임수가 문외한들에게 발각되지 않게 숨기고, 당대의 문명사회를 자기들의 방식대로 운영하던, 사이비 지성의 독재 체제가 존재했다. - 21쪽

이 모든 것은 일상적인 사실이지, 허공에 있는 추상 관념이 아니다. 그리고 법이란 단지 이런 수많은 사실들을 어떤 방법으로 다룰 것이냐의 문제일 뿐이다. 요점은 추상적인 법적 관념들은 땅으로 내려오기 전까지는 전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땅으로 내려와서, 물리적 사실에 적용되면, 관념은 단지 하나의 말(word)이 될 뿐이다. 법률가가 열심히 서술하고, 정당화하며, 밥벌이로 삼는 말 말이다. 법률가는 언제나 그들이 말하고 사용하는 법의 원칙이 간단하고, 구체적이며 비법률적인 문제들을 복잡하게 말하는 방법 이상의 그 무엇이라고 믿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틀렸다. 그래서 고(故) 올리버 홈스 판사는 다음과 같이 말해 실질적으로 업계의 반역자가 되었다. "일반 개념이 개별 사건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 28, 29쪽

법이란 학문 세계의 `킬리루`새(killy-loo bird)다. 아일랜드 신화에 의하면, 킬리루새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관심이 없고 지나쳐 온 곳에만 흥미가 있는 까닭에 뒤로 날기만을 고집하는 새다. 그리고 법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나갈 때는 어색한 날갯짓으로 머뭇거리며, 그 눈은 지나쳐 온 곳에 변함없이 고정되어 있다. 의학, 수학, 사회학, 심리학과 같은 대다수 학문의 목적은 앞을 내다보고 새로운 진리, 기능, 유용성에 다가서는 데 있다. 오직 법만이, 자신의 오랜 원칙과 선례(precedents)에 끊임없이 집착하며, 구태의연을 덕으로, 혁신을 부덕으로 삼는다. 오직 법만이 시대에 뒤떨어진 방식을 고쳐 변화하는 세계의 필요에 부응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저항하고 분개한다. - 44쪽

그러나 법적 결정을 내리는 법관은 대체로 자신이 결정을 내리는 사건의 결과에 그 어떤 관심(이해관계)도 갖고 있지 않다. 물론, 만약 그들이 관심이 있다면 - 법관이라 해도 정치나 사회적인 감정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뉴딜이나 노동조합이나 대기업에 대한 나름의 호오를 가지고 있다 - 그들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부인의 법적 판단 과정(결정을 내리고, 이에 원칙을 끼워 맞추는)을 되풀이할 수 있으며 실제로 자주 그렇게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먼저 판결하고 나중에 정당화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최소한 사법적이 아닌 실질적인 방법으로 일을 하게 된다(실질적인 것과 사법적인 것은 사오 배타적이다). - 168쪽

법이 엄밀한 과학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엄밀한 과학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법이 추상적인 원치에 근거해 특정 사안을 해결하는 한 말이다. 악마가 언제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성서를 인용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안에서 양쪽 변호사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항상 법을 인용할 수 있다. - 181쪽

요점은, 서로 완전히 동일한 두 개의 사실 상황이란 그 언제 그 어느 때고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원은 언제나 두 사실 상황 간의 어떤 사소한 비본질적인 차이점도 `본질적인` 사실 간의 차이점이라고 칭할 수 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자동차 사고에서, 먼젓번 사고로부터의 사실변화 가운데 아무것이나 선택되어, `본질적` 변동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리고 무엇이 본질적 변동이냐에 따라 그 사건이 포함되는 사건의 그룹(판례), 그리고 그 사건을 결정하는 법적 원칙이나 원칙들이 달라진다. - 186쪽

그러나 잠시만이라도 생각해 보라. 왜 사람들은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성문법과, 서명해야 하는 사업 문서와, 그 감독 아래 계속 살아야 하는 규칙과 제한을 완전하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일까? 모든 법률 용어의 배후에 존재한다고 하는 관념이, 항상 그렇듯이 누군가에게 극히 중요하다면, 법률가 집단의 사적이고 은밀한 소유물이 아닌, 관계된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유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 198, 199쪽

그러나 그들은 법의 은어(隱語)를 결코 평범한 일상 언어로 번역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법적 관념의 전달은 법률가의 특수한 방언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은 명백해 보인다. 이는 불행히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 201쪽

이는 법이란, 앞서 여러번 말했듯이, 그 모두가 추상적인 일반 원칙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원칙들은 인간사의 구체적 실체와 실질적이고 필연적인 연관이 전혀 없다. 그들은 모두 모호하고 그들 중 대다수는 모순적이므로 법을 구성하는 원칙의 덩어리에서 가장 간단하고 작은 문제에 대한 명쾌하고 확실한 해답을 찾아내는 일조차 말 그대로 불가능하다. 이런 진실이 법률가는 물론이고 비법률가에 의해서도 인식되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 원칙이 표현된 언어가 그 자체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사의 구체적 실체와 실질적이고 필연적인 관련이 없는 단어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 201쪽

그러므로 모든 법의 주문(呪文)은 일종의 순환적인 모순의 고리를 맴돈다. 법률 언어는 (제정법과 문서와 판결문에서) 이상하고 생소한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이유는 그런 단어들이 법을 구성하는 추상 원칙과 한 묶음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원칙과 관련해서 쓰이지 않는 이상, 그 단어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나 법 원칙은 자신을 표현하는 법률 단어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다. - 201쪽

법이 부자, 보수주의자, 자신이 가진 엄청난 돈과 재산을 유지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늘리려는 사람이나 회사들을 정기적으로 편드는 중요한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그 이유는 법 자체의 본성에 내재한다. 왜냐하면 여러분도 알다시피 법이란 불변하는 관념적 진리의 거대한 몸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시대는 흐르고 삶의 방식은 변하고 인간사의 양상도 변화하지만, 법의 원칙들은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은 채 그대로다. 요컨대 법이란, 그 자체의 정의에 의하면, 현상 유지의 과학이다. - 247쪽

인간 분쟁의 질서 있는 처리에서 확실성과 일관성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으므로, 현명한 방책은 구체적인 개별 문제의 해결에서 우직하게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의라는 것 역시 분명히 형태가 없고 불확실한 이념이다. 어떤 사람의 정의가 다른 사람에게는 독약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성문법이 존재한다. 무엇이 공평하고 무엇이 옳으냐에 대해 사람들의 생각이 정면으로 충돌할 때는, 가능하면 민주적 절차에 따라 제정된 성문법이 그 해답을 내려 주어야 한다. - 257쪽

법률 용어가 수행하는 주된 기능은 관념을 명쾌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법률적 사고의 혼란 모호 공허함을 은폐함으로서, 법을 이해하고자 애쓰는 보통 사람들을 괴롭히는 난해함이, 관념이 아니라 언어 자체에 기인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길고 생소한 언어와 끊임없이 반복되는 문장이 그와 같은 책략을 작동시킨다.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엄숙하게 서술되거나 낭독됨으로써 깊고 심각한 인상을 전달한다. 실제로는 아무런 내용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더해, 계속 언급해온 바와 같이, 법률가 본인들 역시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법률 용어의 장중한 거드름에 거의 예외 없이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위대하고도 놀라운 생각이 법률 용어로 전달된다고 실제로 믿으며 결연히 주장한다. - 200쪽

만약 정부와 기업과 개인의 사적인 활동이 어떤 논리적인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마 혼란에 빠지거나, 폭력이 분쟁 중재자로 재등장하는 것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핵심을 놓쳤다. 그 핵심은 법률가들이 우리의 규칙을 만들고, 전체 문명사회는 그들을 따르며, 그렇지 않으면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명사회를 구성하는 절대다수의, 법률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은, 규칙이 어떻게 그리고 왜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어떤 규칙이 좋은 규칙인지 혹은 나쁜 규칙인지, 도움이 되는 규칙인지 혹은 방해만 되는 규칙인지, 사회에 이로운 규칙인지 아니면 법률가에게만 유리한 규칙인지 묻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두 눈을 감은 채 자신들의 삶의 대부분을 법률가가 운영하도록 방치하고 있다. - 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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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스테이트 오브 더 유니언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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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는 바로 그 점이 현실적이라는 거야. `인간은 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인생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로 사랑을 선택하는가`라는 게 <보바리 부인>이 던지는 메시지니까." - 9쪽

"플로베르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얽매는 감옥과 맞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최초로 깨달은 소설가야."
"아빠에게도 스스로 자신을 얽매는 감옥이 있어요?"
"누구에게나 자신을 얽매는 감옥이 있지. 나 역시 가끔 삶이 지겹다고 느낀단다." - 10쪽

양면적인 건 나쁘지 않아. 프랑스에 이런 말이 있어. `Tout le monde a un jardin secret. 누구에게나 비밀의 정원이 있다.`" - 20쪽

우리는 스스로 덫을 놓는다.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 상황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 - 53쪽

"네가 엄마의 세계에 들어온 걸 환영해. 내 경험상 아직 고난은 시작되지도 않았어. 제프리를 키우느라 21년 동안 애쓰고 나면 결국 넌 그 아이에게 미움을 받게 될 거야." - 58쪽

"쉰 살만 넘어봐. 시간이 그냥 증발해버리는 것 같아. 눈 한 번 깜박하면 크리스마스고, 또 한 번 깜박하면 여름이지. 그러다보면 인생이란 뭘까 생각하게 돼." - 85쪽

"조셉 콘래드가 말했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만이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라고요." - 114쪽.

왜 사람들은 가진 것과 갖고 싶은 것들을 이야기하는데 이처럼 많은 시간을 쏟아 부을까? - 177쪽

NPR에서 브람스의 <저먼 레퀴엠>이 흘러나왔다. 진행자가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짧다는 깨달음을 주는 곡이라고 설명했다. 브람스 음악이 나를 뒤흔들었다. 온갖 걱정 속에서 가느다란 희망의 빛이 반짝였다. 마치 브람스가 내 마음을 알고 위로하는 듯했다. 좋든 싫든 우리는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208쪽

사람들은 마치 삶이 영원할 것처럼 살아간다. 언젠가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삶이 유한하다는 것, 즉 우리가 어느 날 세살에서 사라져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아간다.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이 그저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우리가 걸어온 발자취와 애써 이루어놓은 성취들이 죽음과 함께 모두 사라진다는 걸 깨닫는 순간마다 우리는 몸서리치며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 건 아닐까? - 208쪽

우리는 누구나 자기가 누리지 못하는 걸 갖고 싶어 한다. 자기 자신에게는 없는 걸 바란다. 아무리 성공적인 삶을 살았더라도 자기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를 돌이켜보며 후회한다. 작금의 현실에, 자기 자신이 이루어놓은 것에 대해 결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 212쪽

"우리는 가장 가꾸운 사람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며 살아가지. 82년이란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배운 게 있다면 용서하고 용서받는 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거야." - 220쪽

인생이란 일상의 사이사이로 섬광처럼 번쩍이다가 지나가는 순간에 불과했다.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설레는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나 오늘 하루를 또 즐겁게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 하루하루 그저 순탄하게 지낼 수 있기만 바랐다. 물론 나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어느 정도 간직해 왔고, 긍정적으로 생활하려고 애써왔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 281쪽

"희망은 모호한 거야. 어떤 일이든 가능하고, 어떤 일이든 불확실하니까." - 448쪽

"어떤 일도 가능하고, 어떤 일도 불확실하다." - 4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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