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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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몸통에 커다란 머리를 가진 역사의 천사는 아마도 지식인을 가리킬 것이다. 천사의 작은 몸통은 현실의 무능함을, 커다란 머리는 과도하게 발달한 그의 관념성을 상징한다. 정의는 관념이고, 폭력은 물질이다. 그리고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원시적인 물질의 힘이다. 그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편 채로 거센 바람에 밀려 끝없이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 부조리야말로 삶의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정상적 상태라는 것, 그것이 <교수대 위의 까치>가 연출하는 풍경만큼이나 을씨년스러운 세상의 진리,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 말하지 않는 비밀인 모양이다. - 머리말

르네상스의 인간들이 신을 향하던 눈을 자신에게로 돌렸을 때, 그들이 제일 먼저 맞닥뜨린 것은 인간 내면의 야수성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갑자기 광우가 문학과 예술의 주제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이 때문이다. 문제는 이 광기를 대하는 태도이다. 인문주의자들의 텍스트는 인간의 광기에 화들짝 놀라 그것을 서둘러 이성의 지배 아래 도덕적으로 가두려 한다. - 90, 91쪽

어느 독일 주간지의 기사에 따르면, 브뤼헐은 실은 민중의 영웅이 되는 데 필요한 자질들, 가령 ‘당파성과 낙관주의, 휴머니즘적 진보의 신념’ 중 어느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진보주의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 세계가 바뀔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한다. 하지만 <이카루스의 추락>이나 <바벨탑의 건설>의 예가 보여주듯이,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노력은 대개 좌절과 실패로 끝난다. 게다가 브뤼헐은 자신이 민중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지도 않다. <소경의 인도>가 보여주듯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모두가 구렁텅이에 빠질 뿐이다. - 108쪽

그렇다면 그는 민중을 사랑했을까? 그는 성직자를 풍자하고, 탁발승들을 조롱하고, 고위 관료를 우롱하고, 스페인 세리(稅吏)를 비난하고, 부유한 시민을 비판했다. 하지만 가난한 민중들 역시 그의 신랄하고 날카로운 풍자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는 농민들의 어리석음 역시 공평하게 비웃었다. 대중을 바라보는 브뤼헐의 시선은 때로 고대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보여준 인간 혐오에 가까울 정도읻다. 사회주의 리얼리스트들은 ‘대중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브뤼헐은 민중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민중의 어떤 부분은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나, 그들의 다른 부분에는 차가운 냉소를 보낸다. - 108쪽

최고의 풍자는 역시 자기풍자이다. 진정한 풍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거쳐 마침내 자기 자신까지 비웃을 때에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 112쪽

미술사학자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 1858~1905년)에 따르면, 미술사를 움직이는 것은 ‘능력(Können)’이 아니라 ‘의지(Wollen)’라고 한다. 현대 화가들이 유년기로 돌아가는 것은 사실적 묘사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다만 그럴 ‘의지’가 없을 뿐이다. 미술사를 사실적 재현 기술이 발전하는 과정으로 볼 때, 아이들의 그림은 채 발달하지 못한 미숙함의 산물일 뿐이다. 하지만 미술사를 상이한 ‘의지들’이 교차하는 장으로 바라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 경우 아이의 그림은 어른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예술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현대의 화가들이 아이들의 그림에 주목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128, 129쪽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실물을 꼭 빼닮게 그리는 기술은 완성에 도달했다. 거기에 19세기에 카메라까지 발명되면서, 도처에서 사물을 꼭 빼닮는 이미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실물을 빼닮은 이미지에 그다지 깊은 인상을 받지 않는다. 이는 화가들에게 커다란 위기를 의미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새로운 출발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다시 시작하려면 역시 근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이다. 그리하여 현대의 화가들은 사회화를 겪지 않은 어린이, 문명화를 거치지 않은 미개인의 그림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거기서 그들은 르네상스 이후의 관행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예술의지’를 찾았던 것이다. - 129쪽

에스토니아의 기호학자 유리 로트만(Yuri Lotman, 1922~1993년)은 정물화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을 제공해준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모든 문화적 현상 속에는 ‘낱말과 사물의 대립’이 존재하는 바, 정물화는 이 두 요소가 교차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고 한다. 낱말과 사물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정ㅁ루화는 서로 대립되는 두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나는 그림이 낱말이 되는 길로, 그 대표적인 예는 바니타스 정물이다. 거기서 그려진 사물은 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낱말일 뿐이다. 다른 하나는 그림이 사물을 지향하는 길로, 그 대표적인 예가 트롱프뢰유 정물이다. 여기서 그려진 사물은 그려지지 않은 진짜 사물로 착각되거나 아예 그것을 대체하려 한다. - 166, 167쪽

페테르 클라스(Pieter Claesz, 1597~1661년)의 <바니타스 정물>을 보자. 여기에는 두개골과 시계, 낡은 책, 꺼진 촛대, 넘어진 술잔 등 다양한 모티프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사물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실은 삶의 ‘무상함’을 뜻하는 어휘들, 즉 생긴 것은 달라도 모두 같은 낱말로 번역되는 동의어들이다. 반면, 기스브레히츠의 트롱푸뢰유는 어떤가? 그것은 사물을 가리키는 기호에 머물지 않고 아예 자기가 사물이 되려고 한다. 바니타스와 트롱프뢰유의 대립은 거저 사물과 낱말의 경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더 높은 의미의 차원에서도 둘은 대립한다. 트롱프뢰유가 사물의 소유에 집착한다면, 바니타스는 그 반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허망하다고 말하지 않는가. -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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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쌀 한 알 - 일화와 함께 보는 장일순의 글씨와 그림
최성현 지음 / 도솔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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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글이다.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들이 그가 있다는 정도만 알고, 그 다음 지도자는 사람들이 친근하게 여기며 받들고, 그 다음 지도자는 무서워하고, 그 다음 지도자는 경멸한다."- 100쪽

무엇을 이루려 하지 마라
앉은 자리 선 자리를 보라
이루려 하며는 헛되느니라
자연은 이루려 하는 자와 함께 하지 않느니라 - 101쪽

어느 시대나 깨어서 살고자 했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돌아온다. 모든 것은 돌아온다. 한 생각조차 그냥 사라지지 않고 돌아온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고, 미래는 현재의 결과다. 그러므로 내일의 자기 삶이 알고 싶은 사람은 오늘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면 된다. - 105쪽

오늘은 입추
산길을 걸었네
소리없이 아름답게 피었다 가는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 129쪽

장일순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회를 변혁하려면 상대를 소중히 여겨야 해. 상대는 소중히 여겼을 적에만 변하거든. 무시하고 적대시하면 더욱 강하게 나오려고 하지 않겠어?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면 다르다는 것을 적대 관계로만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말이야."
김기봉은 그것을 풀어 이렇게 설명했다.
"내 것이 옳다고 하는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틀을 갖고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들끼리만 판을 짜려고 하는 걸로는 세상의 큰 변화는 어렵다는 말씀을 하시고 싶었다고 생각합니다."- 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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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란 무엇인가 1 - 소설가들의 소설가를 인터뷰하다 파리 리뷰 인터뷰 1
파리 리뷰 지음, 권승혁.김진아 옮김 / 다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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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가 언제나 우리보다 먼저 어떤 생각을 해냈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 자체는 독창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창적이지 않은 생각에서 소설을 만들어냄으로써 그 생각을 독창적인 것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한다, 이건 전혀 독창적인 사고가 아니지요. 하지만 문학적인 솜씨를 발휘해서 남녀의 사랑에 대해 멋진 소설을 쓴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독창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 - 37쪽

저는 희극적 감정이라는 것은 인간이 자신들이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답니다. 다른 동물들은 그걸 알지 못해요. 동물들은 자신이 죽는 순간에, 그 자리에서만 그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들은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진술 같은 걸 이해할 수가 없답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있지요. 아마 이것이 종교나 제의 등등이 존재하는 이유일 거에요. 희극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향한 인간의 본질적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움베르토 에코) - 59쪽

글을 쓰는 공간은 잠을 자거나 배우자와 공유하는 공간과 분리되어야 한다고 항상 생각했습니다. 집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의식ritual이나 세부적인 일들이 상상력을 죽이지요. 그런 일들은 제 안에 들어 있는 일종의 악마를 죽여버립니다. 가정적이고, 길들어진 하루 일과는 상상력을 사용해야 하는 다른 세계에 대한 열망을 사라지게 만들어요. 그래서 여러 해 동안 저는 사무실이나 집이 아닌 다른 작은 장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오르한 파묵) - 71쪽

반면에 소설가는 본질적으로 개미처럼 끈기 있고 천천히 장거리를 나아가는 사람이에요. 소설가는 악마적이고 낭만적인 비전 때문이 아니라 끈기 때문에 인상적이지요. (오르한 파묵) - 74쪽

제가 사유하는 방식에서는 책 한 권을 여러 장으로 나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소설을 쓸 때 줄거리 전체를 미리 생각하고 있다면 - 대개는 미리 알고 있지요. - 전체 줄거리를 각 장으로 나누어서 각각의 장에서 일어나게 하고 싶은 세부 사항들을 생각하지요. 그렇지만 반드시 1장에서 시작해서 순서대로 써 나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글이 막히게 되더라도 별로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지요. 생각이 가는 대로 계속 쓰면 되니까요. 첫 장부터 다섯 번째 장까지 쓰고 나서 재미가 없으면 15장으로 넘어가서 거기서부터 계속 쓸 수도 있답니다. (오르한 파묵) - 75쪽

소설을 쓸 때는 네 시에 일어나서 대여섯 시간 일합니다. 오후에는 10킬로미터를 달리거나 1.5킬로미터 수영을 합니다. (둘 다 할 때도 있고요.) 그러고 나서 책을 좀 읽고 음악을 듣습니다. 아홉시에 잠자리에 들지요. 이런 식의 일과를 변함없이 매일매일 지킵니다. 반복 자체가 중요해지지요. 일종의 최면이 되거든요. 저는 좀 더 깊은 정신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자기 최면을 겁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예를 들어 6개월에서1년 동안 이런 일과를 반복하려면 심신이 상당히 강해야 되지요. 이런 점에서 긴 소설을 쓰는 것은 서바이벌 훈련과 비슷해요. 신체적인 강인함이 예술적인 감수성만큼이나 중요하거든요. (무라카미 하루키) - 122, 123쪽

우리는 마음속에 제정신이 부분과 제정신이 아닌 부분이 함께 있어요. 이 두 부분을 타협해가면서 사는 거지요. 이게 제 신념입니다. 저는 글을 쓸 때 특히 제 마음의 제정신이 아닌 부분을 잘 볼 수 있어요. 아니, 제정신이 아니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군요. 오히려 비일상적인, 비현실적인 부분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저는 물론 현실세계로 돌아오고 제정신을 되찾지요. 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부분, 즉 아픈 부분이 없다면 저는 존재하지 않을 거에요. 다시 말하지면, 주인공은 이 두 여성에 의해서 지탱되는 것이랍니다. 둘 중의 하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살아갈 수 없어요. (무라카미 하루키) - 127쪽

19세기와 20세기에 작가들은 실제를 보여줬습니다. 그게 그 작가들의 임무였지요. <전쟁과 평화>에서 전장을 너무나 자세하게 묘사해서 그게 진짜라고 믿었지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그리는 것이 실제인 척하지 않아요. 우리는 가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 속에 살면서 가짜 저녁 뉴스를 보고 가짜 전쟁을 수행하지요. 우리 정부도 가짜에요. 하지만 우리는 이 가짜 세계에서 실제를 찾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이야기들도 마찬가지랍니다. 우리는 가짜 장면들을 지나쳐 가지만, 이 장면들을 걸어서 통과하는 우리 자신들은 실제이거든요. 상황은 진짜에요. 그 상황에 몰입하고 진정한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에서 진짜라는 것이지요. 그 점이 제가 쓰고 싶은 것이랍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 137쪽

저는 이 이야기들은 이론이나 어떤 철학적인 무게가 없는 일종의 시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일생에는 이상한 일들이 많았고, 또 예상할 수도 없고 있을 법하지도 않은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더 이상 무엇이 현실인지 확신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의 역학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며,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증거를 모으는 것이며, 가능한 한 충실하게 그것을 기록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저는 제 소설에서 이러한 접근법을 써왔습니다. 이것은 방법이 아니라 신념에 따른 행위입니다.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 대로가 아니라, 또는 이렇게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대로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을 그대로 제시하는 것 말입니다. 물론 소설은 허구입니다. 따라서 (그 용어의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소설을 거짓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소설가는 거짓을 통해서 세상에 관한 진실을 말하려고 애를 씁니다. (폴 오스터) - 165쪽

‘새 작품을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한 어떤 것도 미리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문제 해결 방법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문제 자체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야기를 쓰기 시작할 때 제게 저항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 하지요. 저는 문젯거리를 찾습니다. 종종 글을 처음 쓸 때 확신이 서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는 글쓰기가 어려워서라기보다는 글쓰기가 충분히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침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증표입니다. 거침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실제로는 글쓰기를 멈춰야 한다는 증표이지요. 한 문자에서 다른 문장으로 넘어갈 때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되면, 계속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필립 로스) - 240쪽

물고기가 헤엄치거나 새가 나는 것과 달리 제게 글쓰기는 자연스런 일이 아닙니다. 글쓰기는 어떤 종류의 자극 또는 특별한 긴박감하에 이루어집니다. 글쓰기는 정교한 가면을 씀으로써 개인적인 것을 공적인public 행위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 단어의 두 가지 의미인 공적이며 대중적이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글쓰기는 당신의 도덕적인 성품에는 낯선 특질을, 당신이란 존재를 통해 빨아올리는 매우 고된 정신적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필립 로스) - 249쪽

제가 바뀌어서 다른 사람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곧 제 삶이 결국에는 전혀 바뀌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답니다. 어쨌든 눈에 띄든 아니든, 제가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는 바뀌지 않았답니다. 그때 예술은 제가 시간이 있을 때, 제가 그렇게 할 여유가 있을 때 추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것, 단지 그런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술은 사치이고 그것은 저 자신이나 제 삶을 바꾸지 않을 거라는 거죠. 예술이 어떤 일도 일어나게 하지 않는다는 걸 어렵게 깨달았답니다. (레이먼드 카버) - 347쪽

문학과 목수 일 모두 매우 힘듭니다. 무엇인가를 글로 쓴다는 것은 탁자를 만드는 것만큼 힘이 들어요. 이 두 가지 모두 나무처럼 딱딱한 재료인 현실을 이용해 일합니다. 온갖 기교와 기술을 사용해야 하고요. 근본적으로 이 두 가지는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마술 같은 것은 매우 적은 반면 일은 엄청나게 많이 고되게 해야 하지요. 프루스트가 말했다고 생각되는데, 10퍼센트의 영감과 90퍼센트의 노력을 필요로 한답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369쪽

자신에게 글쓰기란 권투와 같아고 한 헤밍웨이의 글이 제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374쪽

훌륭한 작가가 되기 위해 작가는 글을 쓰는 매 순간 절대적으로 제정신이어야 하며 건강해야 합니다. 저는 글 쓰는 행위는 희생이며, 경제적 상황이나 감정적 상태가 나쁘면 나쁠수록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낭만적인 개념의 글쓰기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작가는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주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375쪽

글을 쓸 때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는 첫 번째 단락입니다. 저는 첫 번째 단락을 쓰는 데 여러 달이 걸립니다. 일단 첫 단락을 마치면 나머지는 매우 쉽게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 단락에서 저는 제 책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 대부분을 처리합니다. 여기서 주제와 스타일과 어조가 정해집니다. 최소한 저의 경우 첫 번째 단락은 제 책의 나머지 부분이 어떨지 보여주는 견본입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377쪽

그러나 지식은 작가로서 더 큰 책무를 요구하고 글쓰기를 더 어렵게 만듭니다. 영원한 가치에 관해 글을 쓰고자 한다면, 작가는 전업 작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가 실제로 글을 쓰는 게 하루에 몇 시간밖에 안 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작가는 우물에 비유될 수 있어요. 작가들의 수만큼 많은 종류의 우물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물에 좋은 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물을 마를 만큼 퍼내고 다시 차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일정한 양만 푸는 것이 더 낫습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 406쪽

작가가 글을 쓰는 것은 눈으로 읽히길 바라는 것이지, 어떤 설명이나 논문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독자들이 처음 책을 읽을 때 그들이 읽어낸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책에 있으리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에 대해 설명하거나, 작품에서 보다 어려운 부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안내하는 것은 작가의 일이 아닙니다. - 4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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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 천 가지 표정의 도시 살림지식총서 330
유영하 지음 / 살림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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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해방은 여성해방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여성해방은 주방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홍콩은 여성해방의 공간이다. - 8쪽

한 국가나 지역을 안다고 할 때, 그것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는 그곳의 음식을 마음대로 시킬 줄 아느냐 하는 것이다. 현지 음식을 모르고 현지에서 적응할 수 없는 법이다. 특히 중화권에서 살면서 중국음식을 모른다거나 싫다고 하는 것은 중화권에서 그저 목숨만 연명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소극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말이다. 중국음식은 중국문화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10쪽

외국에서 유학하고 있거나 살고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면, 체류국의 언어 실력이 현지 적응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현지어를 잘 할 경우 자신감을 가지고 현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 현지인 접촉을 가능한 기피하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외국어 실력에 대해서 자신감을 갖고 있을 경우 현지인과의 접촉이나 현저어로 된 정보의 취득이 그만큼 더 쉽게 이루어진다. 이렇게 보면 언어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된다.
따라서 외국에서 외국어 실력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일 수밖에 없고 때로는 삶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홍콩인들의 경우, 그들은 이미 세 개의 언어로 외국을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홍콩인들은 세 가지 언어를 구사 할 수 있다. 광둥어와 영어, 그 다음은 보통화이다. 이 말은 해외에서 그들은 그만큼 적응이 빠르고, 아울러 외국인과의 교류에 만반의 준비가 됐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이 획득할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질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 16, 17쪽

홍콩에 대한 주권 회복을 위한 담판을 전개하면서 중국정부가 내세운 최고의 카드는 1국가 2체제라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정치제도였다. 이른바 1국가 2체제 방침은 타이완과의 통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중국 측의 구상으로, 홍콩과 마카오의 주권 회수를 위한 방안으로 우선 적용되었다. 즉, 중국 본토에는 사회주의를, 타이완․마카오․홍콩은 자본주의 제도를 시행하는 것이다.
영국에 의해서 150년간 자본주의가 시행되어온 홍콩에 사회주의를 시행한다는 것은 실현가능성이 매우 낮을뿐더러 사회혼란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현실을 우선 고려한 해결 방법이라고 보아야 한다. 바로 중국사회주의라는 주체 안의 홍콩에서 자본주의 제도와 그 생활방식을 실행한다는 것이었고, 그것을 앞으로 50년 동안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 44쪽

주지하다시피 사회주의 발전 모델은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5단계 이론에 근거한다. 즉, ‘원시 공산사회-노예제 사회-봉건제 사회-자본주의 사회-사회주의 사회’의 발전 모델이 그것이다. 마르크스의 견해에 따르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출범으로 중국은 사회주의시기로 진입했다. 이에 대해 우파 성향의 학자들은 중국대륙의 자본주의 단계 존재 여부에 대해 의심한다.
즉,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전복해야만 진입이 가능한 것인데 중국대륙에 자본주의 시기가 과연 존재했는가 하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이에 대해서는 아편전쟁 이후 외세에 의해 점령당한 조차지 내에 나타난 자본주의적 현상을 내세우고 있다. 작게는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상하이를 비롯한 대도시에 출현했던 빈부격차를 그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 46쪽

주권 이양을 1년 앞둔 1996년 패튼 총독은 홍콩의 성공은 영국의 4대 공헌에 있다고 했다. 법치와 공무원제도, 경제, 자유, 민주화 등이다. 홍콩의 정치와 경제 관계의 특징을 집약하자면, 고효율성과 불간섭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적극적 불간섭 정책으로 일관되게 자유무역정책을 추진했고, 국제무역의 자유화를 지지했으며, 무역보호주의를 반대했다. 기업 경영에 있어서도 일관되게 자유경쟁과 적자생존 원칙을 고수했다.
주권 이양을 1년 앞둔 1996년 패튼 총독은 홍콩의 성공은 영국의 4대 공헌에 있다고 했다. 법치와 공무원제도, 경제, 자유, 민주화 등이다. 홍콩의 정치와 경제 관계의 특징을 집약하자면, 고효율성과 불간섭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적극적 불간섭 정책으로 일관되게 자유무역정책을 추진했고, 국제무역의 자유화를 지지했으며, 무역보호주의를 반대했다. 기업 경영에 있어서도 일관되게 자유경쟁과 적자생존 원칙을 고수했다. - 59쪽

영국의 법치와 고효율의 행정을 도입, 민주는 없지만 고도의 법치와 자유로 그것을 상쇄시켜왔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회 내에 법률에 대한 보편적인 동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홍콩의 매우 중요한 자산이다. 즉, 적자생존이 장려되는 철저한 자본주의의 홍콩사회이지만, 적어도 그것이 공정한 룰에 의해 보장된다는 분위기야말로 홍콩을 홍콩답게 발전시키고 유지하고 있는 정신이다. 자유가 자유로서 보장받기 위한 최소한의 제한이 정착되었다는 말이다. 홍콩에서 공적 신용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과 같다. 그렇게 볼 경우 사실 민주는 없고 자유만 있다는 홍콩사회에서 민주는 합리성으로 존재한다. 요컨대 민주는 부족할지 모르지만, 사회 내 합리성은 어느 사회나 국가보다 앞서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59, 60쪽

홍콩을 아는 사람들이 말하는 홍콩문화의 장점은 중립, 개방, 자유이다. 이것은 홍콩문화에 대한 총괄적인 결론이지만, 마찬가지로 홍콩경제의 비약적인 성장 비결을 압축하는 표현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홍콩은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인 자유항으로서, 상품과 외환의 진출입이 자유롭고, 기업경영이 자유롭고 대외 자본과 현지 자본이 동일시되는 곳이다. 그것에 앞서 지리적으로 중국대륙과 세계를 연결하는 관문이자, 태평양과 인도양으로 통하는 해운의 요충이고, 아시아 태평양의 중심이다. 게다가 세계 3대 항구로 꼽히는 빅토리아항의 깊은 수심 역시 홍콩의 경제발전을 논하는 데 빠질 수 없는 조건이다. - 60,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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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삶에 관하여 (2017 리커버 한정판 나무 에디션)
허지웅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타인의 순수함과 절박함이 나보다 덜할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절대악과 절대선이 존재하는 세상을 상정하며 어느 한 편에만 서면 명쾌해질 것이라 착각하지 말되, 마음속에는 오래도록 지키고 싶은 문장을 한 가지씩 준비해놓고 끝까지 버팁시다. 우리의 지상 과제는 성공이나 이기는 것이 아닌 끝까지 버텨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버티고 버텨서 다음 세대에게 후하고 창피하지 않은 우리가 됩시다. 버티고 버텨서 앞선 세대에게 손을 내밀고 관용할 수 있는 우리가 됩시다.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고 버텨 남 보기에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나 자신에게는 창피한 사람이 되지 맙시다. - 8쪽

나는 그날 이후로 영영 달라졌다. 힘들 때마다 내 비굴한 웃음을 기계적으로 떠올리며, 그날의 나를 해명하기 위해 살아왔다. 그 웃음을 떠올리면 아무리 나쁜 것도 마냥 나쁘게만은 보이지 않고, 제아무리 아름답다는 것도 마냥 아름답게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자신이 받은 알량한 상처의 총량을 빌미로, 타인에게 가하는 상처를 아무것도 아닌 양 무마해버리는 비겁함을 쉽게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 17, 18쪽

뉴스를 보다보면 세상의 속살이 드러나 그 추잡함과 헐거움, 촌스러움에 치를 떨게 될 때가 있다. 나는 그게 근본적으로 서로 앞다투어 멋지고 잘났고 괜찮고 근사하고 옳다고 믿는 사람들투성이라 초래된 세상이라고 본다. 그것이 체계 안의 인간이기 때문이든, 태생적 한계이든 간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모순적이고 흠결투성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확신한다. 자신의 흠결을 들여다보고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은 외부 세계의 그 어떤 분야에 대해서도 고쳐나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나아가 남의 흠결을 공격하는 데에만 혈안이 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제일 별로라고 말하고 다닌다. 너도 사실 별로라고 말하려고. - 21, 22쪽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된다는 건 자기 주변을 책임질 일이 늘어간다는 것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책임을 진다는 건 말처럼 그리 고상한 일이 아니다. 더럽고 치사한 일이다. 내 소신이 아니라 남의 소신을 지켜주어야 하는 일이다. - 33, 34쪽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주변 세계를 향한 애정을 조금씩 잃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 47쪽

사실 냉소는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편리한 방법 가운데 하나다. 비관과 냉소는 대개의 경우 피폐한 자들의 가장 쉽고 편한 도피처다. 나는 냉소의 영향력 아래 있을 때가 제일 아늑하고 좋다. 글쓰는 자에게는 냉소적인 태도가 객관성을 담보해주기도 한다. 뜨겁고 충만할 때보다 냉소적일 때 했던 말과 글이 더 오랜 시간 유효하다. 그래서 나는 곧잘 타인의 진심을 무시한다. 정확히 말하면 진정성을 주장하는 말들을 무시한다.
실제 모든 종류의 ‘진심’이란 아무 의미가 없는 호소다. 진심, 진정성은 주관의 영역에 있는 것이지 남에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진심을 몰라준다고 세상을 탓할 일도 아니다. - 101쪽

모든 노인이 지혜로운 건 아니지만, 시간의 녹을 먹은 노인들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울 수 있는 자들임에 틀림없다. 세상이 늘 어리석고 파괴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지혜로운 노인이 늘 사라져갈 수밖에 없는 원리를, 그 모든 아비규환과 부정과 폭력과 살인과 슬픔이 끊임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까닭을, 노인의 주름은 알고 있는 듯했다. - 110쪽

이 나라에서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70퍼센트에 달한다. 하지만 실제 한국의 중산층은 40퍼센트가 채 되지 않는다. 이 놀라운 통계의 마술은 한 가지 명징한 진실을 환기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가상의 필터를 ‘가치관’이라고 부른다. 수많은 장르영화들이 이 같은 소재를 다뤄왔다. 사람들은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에 따라 투표하지 않는다. 바로 이 가치관에 따라 투표한다.
요컨대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위한 정책 정당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들이 부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부유함이나 풍요로움 같은 부자의 가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와 함께 수반돼 연상되는 보수적 언어를 ‘옳은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누가 혹은 어떤 정당이 서민을 대변하고 말고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사람들은 부자를 보며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다. 성공신화에 매료될 뿐이다. 부와 이익이라는 (그들이 생각하기에) 긍정적인 에너지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 155쪽

도대체 내가 좌파여선 왜 안되나. 좌파라면 그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 것인가. 너는 좌파라서 안 된다는 말을 꺼내는 사람들은, 오히려 나는 좌파가 아니라는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 잡음과 논란은 많을수록 좋다. 가져선 안 될 신념을 상정하고 현실화하는 것. 그것이 말의 힘이고 마법이다. - 175쪽

집단행위란 거기 가담하는 개인을 익명으로 만들기 때문에 개별의 지분을 축소하는 착시효과를 낳기 마련이다. 스스로 폭력의 주체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1/N의 폭력이 무서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 185쪽

그렇게 한국의 디즈니를 찾기 시작했다. 한국의 스티븐 스필버그를 찾기 시작했다. 이제는 한국의 닌텐도를 찾는다. 십 수 년이 지났어도 달라진 건 없다. 오히려 공고해졌다. 지금 한국 문화계를 바라보며 혀를 차는 시장주의자들의 핵심 논점은 변함없이 ‘한국에는 왜 아무개가 없느냐’는 것이다. 저 수많은 문화계 지원정책의 핵심 키워드 또한, 여전히 ‘한국의 아무개를 육성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아무개를 찾는 말들에는 당연한 오류가 있다. 그 아무개가 한국이라는 환경 아래에서도 그 놀라운 시장가치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냐는 문제다. - 211, 212쪽

살아 있는 누군가는 깎아내려짐으로써 상품화된다. 이미 죽은 누군가는 신화화됨으로써 상품화된다. 어제 잭슨을 욕해 배를 채웠던 사람들이 오늘 잭슨을 우러러 다시 배를 채운다. 잭슨에 대한 평가는 하루아침에 바뀌었지만, 정작 그를 둘러싼 세계의 동기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진심과 진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본질에 대한 어떤 규명이나 확인도 없이 괴물은 우상이 되고 우상은 괴물이 된다. 돈이 된다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세상에서 가장 쉽고 천박하며 공공연한 진실이다. - 234쪽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일들은 대개, 정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 288쪽

우리가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다름 아닌 가능성이다. 우리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나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커티스와 남궁민수는 지금의 체계와 규칙을 물려주고 그 안에서 아프니까 청춘이고 밖은 추우니까 열차는 달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가능성을 물려준다. 그것은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선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 310쪽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는 이름의 코끼리를 기르고 있다. 공공연한 폭력의 최전선은 전쟁터가 아니라 가정이다. 남이 하면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어, 삿대질할 것도 엄마에게 형제에게 자식에게 남김없이 쏟아낸다. 문제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나마 잠깐 후회하고 금세 망각하고 다시 되풀이 된다. 나와 나의 행동을 분리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한 저열함이다. 수십 년을 함께한 가족관계 안에서 나 자신과 부모와 형제자매를 개별적인 인격체로 객관화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 317, 318쪽

<레 미제라블>이 제시하는 이슈는 정의의 궁극적 승리 따위가 아니다. 장발장과 자베르가 벌이는 신념의 대결, 장발장과 코제트-마리우스의 마지막 해후는 무엇을 의미하나. 혁명이라는 거대서사의 소용돌이 안에서조차, 서로 다른 가치관과 계급과 세대에 속한 이들을 공히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개인의 평생에 걸친 자기비판과 성찰, 그리고 그로부터 얻어지는 박애뿐이라는 사실이다.
고작 상대 진영과 특정 세대에 책임을 돌리는 증오의 해법으로 이미 일어난 일을 설명하려는 사람들은, 적어도 이 텍스트에서만큼은 힐링을 누릴 자격이 없다. 우리는 이 숭고한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기 이전에 앙졸라가 아닌 장발장의 염려를 껴안아야만 한다. 장발장이 숲속에서 코제트를 만난 이후 최후의 순간까지 골몰했던 바로 그것.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인가. - 351쪽

세상에 운명 따윈 없다. 약속된 땅도 계획도 다음 생 같은 것도 기대하지 마라. 덜 낭만적으로 들리겠지만 정신 차리고 제대로 살기 위해, 결코 도래하지 않을 행복을 빌미로 오늘을 희생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의 정체를 규명해야만 한다. 그것이 연애든, 고용이든, 혈연이든 마찬가지이다. 너와 나의 관계가 주는 만족감의 뿌리가 정말 이 관계로부터 오고 있는 것일까. 혹은 단지 세상으로부터 정의 내려진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던 것뿐일까. 역할에 휘둘릴 것인가, 아니면 정말 관계를 할 것인가. 그 쉽지 않은 답을 찾는 것으로 우리는 정말 나아질 수 있다. 끝이 어떠하든,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 357쪽

인생의 좌표라는, 그 단어부터 너무나 거대해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 세상의 말에 더 이상 무심할 수 없는 나이에 닿아가면서, 결국 버티어내는 것만이 유일하게 선택 가능하되 가장 어려운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기는 것도, 좀더 많이 거머쥐는 것도 아닌 세상사에 맞서 자신을 지키고 버티어내는 것. 록키 발보아가 그랬듯이 말이다. 언제나 록키 발보아 이야기로 끝을 맺고 싶었다. 마지막이다. 모두들, 부디 끝까지 버티어내시길. - 3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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