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전기는 가능하다 - 우리가 몰랐던 전기 이야기, 2015 올해의 청소년 환경책 팸플릿 시리즈 (한티재) 1
하승수 지음 / 한티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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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출발점은 원전 같은 대규모 발전소를 많이 짓는 것이다. 그런 발전소들을 많이 짓다 보니 전기를 송전하기 위해 송전선을 많이 짓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기를 누군가가 쓰게 만들어야 하니, 원가 이하로 기업들에게 `산업용 전기`를 공급해 왔던 것이다.
"왜 이렇게 하나?"하는 의문을 갖고 들여다보니, 모든 것이 다 `돈` 때문이었다. 발전소와 송전선 건설을 둘러싸고 엄청난 돈들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 돈을 버는 기업들이 있었다. 그들 때문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정책을 반복해 온 것이다. - 11쪽

본래 대한민국 발전(發電)은 한국전력(한전)이라는 공기업이 대부분 해 왔다. 그런데 한전이 운영하던 발전소들은 2001년 `전력산업 선진화`라는 명분으로 한전 산하에 만들어진 6개의 발전자회사로 이관되었다. 6개 발전회사는 남부발전, 중부발전, 동서발전, 남동발전, 서부발전과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이었다.
그리고 정부는 한전의 발전자회사들 외에 민간대기업들이 발전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것을 허용했다. `민자발전`이라고 불리는 이 발전회사들은 포스코, SK, GS, 동부 같은 대기업들이 세운 발전회사들이다. 이들이 석탄화력발전, 천연가스발전에 뛰어들 수 있도록 정부가 허용했다. 그리고 한전은 전려거래소를 통해 민간발전회사들이 발전한 전기를 수익을 보장하고 매입하도록 했다.
(...) 핵심은 한전이 민간대기업들로부터 원가와 일정한 수익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전기를 매입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대기업들은 민자발전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기기 시작했다. - 23, 24쪽

엉터리 계획은 전력수요가 무한정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2013년 2월에 발표된 <6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정부는 대한민국의 전력수요가 연평균 2.2퍼센트 정도 계속 늘어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1년 중 전기를 가장 많이 쓴느 시점의 전력소비량을 말하는 `최대전력`은 그보다 더 높은 연평균 2.5퍼센트 늘어난다고 전제하고 있다.
연평균 2.2퍼센트라고 하면 얼마 안 되는 것 같지만, 숫자의 마술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1년차보다 2년차에 2.2퍼센트가 늘어나고, 3년차에는 다시 2년차를 기준으로 2.2퍼센트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그래서 연 평균 2.2퍼센트 증가가 15년 동안 누적되면 39.7퍼센트가 증가하는 것으로 나온다. 바로 <6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 그랬다. - 37쪽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원전이나 석탄화력발전소를 한 곳에 몰아 짓고 초고압 송전선으로 연결하기 때문에 더 문제가 많다. 이 발전소들과 연결된 76만5천 볼트 송전선에서 사고가 나면, 그 충격으로 원전이나 석탄화력발전소의 발전기들이 한꺼번에 탈락할 수가 있고, 그것이 대규모 정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런 대규모 발전소가 한 곳에 몰려 있지 않다면, 송전선에 고장이 나더라도 국가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수 있는데, 대한민국은 그 반대의 상황인 것이다.
결국 발전소를 한 곳에 몰아 짓고, 초고압 송전선으로 전기를 송전하는 방식이 국가 전체의 전력계통에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만약 76만5천 볼트 송전선에서 자연재해나 테러가 발생한다면, 연결된 발전기들에 문제가 생겨 국가 전체의 전력망이 마비되는 일도 벌어질 수 있다. 진짜 `블랙아웃`이 올 수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대한민국의 `안보`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문제부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53쪽

이런 초고압 송전선이 필요한 이유는 발전소와 소비지 사이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장거리 송전을 위해 발전소에서 전기의 전압을 올려 76만5천 볼트, 34만5천 볼트, 15만4천 볼트 송전선으로 전기를 보내고, 나중에 최종 소비자에게 전기를 공급(`배전`이라고 한다)할 때에는 다시 전압을 낮추는 것이다.
이렇게 전압을 변경하는 곳을 변전소라고 한다. 그리고 송전선로와 변전소를 거친 전기를 최종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선로를 배전선로라고 한다. 우리가 보는 전봇대에 걸려 있는 전선이 배전선인 것이다. - 55, 56쪽

전자파 허용기준치
스웨던 왕립 카롤린스카 연구소가 스웨덴에서 송전선로 인근 300미터 이내에 사는 인구와 그렇지 않은 인구에 대해 20-30년간 장기 추적조사를 해 보았다. 카롤린스카 연구소는 조사결과 암 발생빈도가 유의미하게 차이난다는 결과를 1990년대에 발표했다. 그리고 스웨덴은 이런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2밀리가우스를 노출기준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833밀리가우스를 노출기준으로 설정하고 있다. 과연 이런 기준을 신뢰할 수 있을까? 스웨덴이 2밀리가우스를 기준으로 설정한 것은 나름대로 자신들이 직접 행한 조사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사를 하지도 않고, 무조건 `안전하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 70쪽

더 근본적으로 보면, 신고리-북경남 송전선은 고리 원전의 수명연장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문제가 있다. 지금 고리에는 6개의 원전이 운영중에 있다. 고리 1,2,3,4호기와 신고리 1,2호기가 그것이다. 그리고 신고리 3,4호기가 가동을 앞두고 있고, 신고리 5,6호기가 착공할 예정이다. 신고리 7,8호기 계획도 있다. 고리-신고리 원전단지에 무려 12개의 원전이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기존에 이 원전단지에는 3개의 34만5천 볼트 송전선(고리-신울산, 고리-신양산, 고리-울주)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전기를 잘 송전해 왔다. 정부와 한전의 주장은 지금 있는 6개에 신고리 3, 4호기가 추가로 가동하게 되면 송전선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제 자체가 잘못이다. 고리 1호기는 이미 폐쇄했어야 하는 원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리 1호기만 폐쇄해도 송전선에는 여유가 있다.
고리 1호기는 30년의 설계수명으로 만들어진 원전이다. 그리고 2007년에 30년의 설계수명이 끝났다. 그런데 정부는 이 원전의 수명을 10년 연장해서 가동하고 있다. 연장한 수명도 2017년이면 끝난다. - 79쪽

그런데 정부는 고리 1호기의 수명을 다시 10년 재연장해서 2027년까지 가동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전제로 해서 새로운 송전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즉 정부와 한전은 국민들 모르게 고리 1호기의 수명을 재연장하는 것을 전제로 밀양 송전탑 공사를 강행한 것이다. 만약 국민들이 이런 진실을 알았다면, 밀양 송전탑 공사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낡은 고리 1호기의 수명 재연장에 대해서는 부산시의 여론도 강력 반대이고, 전국적으로도 반대 여론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리 2,3,4호기도 2023-2025년이면 모두 수명이 끝난다. 그렇게 되면 송전선이 부족해질 리가 없다. 정부의 정책은 앞뒤도 맞지 않고, 몇 년만 지나면 송전선이 남아돌 상황이 되는데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기만 하는 것이다. - 80쪽

이런 의문점들에 대해 꼼꼼하게 검토해서 밀양 송전탑이 과연 필요한지부터 따져보는 것이 필요했다. 그런데 정부는 2014년 10월 서둘러 공사를 강행했다. 짓고 있는 신고리 3,4호기가 완공되면 송전을 해야 하는데, 밀양 송전탑 공사를 더 늦출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그 직후에 신고리 3,4호기는 위조부품 때문에 완공이 지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원전부품 비리가 드러난 것이다. - 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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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창.통 - 당신은 이 셋을 가졌는가?
이지훈 지음 / 쌤앤파커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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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들은 저마다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고, 생각도 달랐다. 하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성공과 성취의 비결엔 공통의 키워드가 있었다. `혼魂`, `창創`, `통通`이 그것이다. 요약하자면 개인이든 조직이든 가슴 깊숙이 혼을 품고, 늘 새로워지려는 노력을 아끼지 말고, 마음과 마음이 하나로 연결되어 흐르는 통을 이루어내라는 것이다. - 7쪽

손정의 소프트뱅크(SoftBank) 회장은 비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눈앞을 보기 때문에 멀미를 느끼는 것이다. 몇백 킬로미터 앞을 보라. 그곳은 잔잔한 물결처럼 평온하다. 나는 그런 장소에 서서 오늘을 지켜보고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 17쪽

이에 대해 앤더슨은 "공짜 경제를 피할 수 없는 현실로 간주하고 이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창의적인 대안들을 마련하라"고 강조했다. 그가 21세기의 비즈니스 모델로 치켜세우는 것 중 하나가 이른바 `프리미엄(Freemium=Free+Premium) 모델`이다. 95%의 범용 서비스는 공짜로 제고하되 나머지 5%의 차별화되고 개인화된 서비스를 소수에게 비싸게 팔아서 수지를 맞추라는 것이다. - 31쪽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He who has a `why` to live for can bear almost any `how`.
프리드리히 니체
- 38쪽

세계 최대 제약회사인 화이자(Pfizer)의 제프 킨들러(Jeff Kindler) 회장은 조직 운영에 있어 혼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기업은 뭔가 어려운 때일수록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 도대체 우리가 세상을 위해 뭘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되새겨야 한다. 존재 이유가 분명해야 조직원들 사이에 위기를 돌파해야겠다는 강한 모멘텀이 생긴다." - 43쪽

케네스 토머스(Kenneth W. Thomas) 미 해군대학원 경영학과 교수의 연구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저서 <열정과 몰입의 방법(intrinsic Motivation at work)>에서 사람들은 4가지 조건이 충족될 경우, 일에서 재미와 열정을 느끼게 딘다고 설명한다. `1. 자신이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느낄 때, 2. 그 일을 할 때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느낄 때, 3. 그 일을 할 만한 기술과 지식이 있다고 느낄 때, 4. 실제로 진보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그것이다. - 49쪽

죽음 문턱까지 다녀온 그는 인생에 대해 더욱 큰 교훈을 얻게 됐다. 그는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고 삶의 시간은 제한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이야기에 얽매여 `다른 사람의 삶`을 살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부탁한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타인의 소리들이 여러분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심장과 직관이 이끄는 대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의 심장과 직관은 당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다 부차적인 것입니다." - 66쪽

"나는 때때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재미있는지, 그 속에서 행복한지를 스스로 묻는다. 그것만이 유일한 잣대라 할 수 있다. 만약 즐겁지 않다면 그 이유가 뭔지 곰곰히 생각해본다. 궁리 끝에 그 문제점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나는 더 이상 그 일을 하지 않는다.
나는 만약 어떤 일에서 재미와 즐거움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다면, 드디어 다른 일을 찾아야 할 때가 된 것이라고 믿는다. 행복하지 않게 시간을 보내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다.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스트레스를 견뎌야 하고, 비참한 기분으로 일터로 나간다면 삶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 69, 70쪽

내발적 동기의 경우, 활동에 열중하는 것 자체가 보상이 되므로 언제까지나 높은 동기가 부여될 수 있고, 활동이 계속 유지돼 자연스럽게 좋은 성과를 내게 된다. 반면 외발적 동기 부여의 경우 대부분 효과가 한시적일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외발적 동기 부여가 자칫 잘못하면 내발적 동기마저 꺾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즉, 원래 내발적 동기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시작한 활동에 대해 보상(외발적 동기)을 줌으로써, 역으로 원래 그 사람이 가졌던 자발적인 의욕(내발적 동기)이 줄어들 수 있다. - 90, 91쪽

"누구도 해낸 적 없는 성취란,
누구도 시도한 적 없는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If we are to achieve results never before accomplished,
we must expect to employ methods never before attempted.
프랜시스 베이컨
- 106쪽

아웃라이어들은 창의적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나 1만 시간 법칙은 반복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얼핏 모순되게 보인다. 이에 대해 글래드웰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빌 게이츠와 비틀즈, 체스게임 챔피언들은 한결같이 창츼적이고 창조적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창의와 창조는 일정한 시간의 준비를 필요로 한다. 그들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창의적인 음악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음악을 숙달해야 한다. 탁월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려면 먼저 바이올린을 잘 다뤄야 한다. 그냥 일반적인 차원이 아니라 대단히 전문적인 수준에서 숙달돼야 한다. 지식의 기초가 있어야 창의와 창조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이 1만 시간의 법칙이다. 특별한 일을 하기 위한 훈련 단위다." - 112쪽

램 차란(Ram Charan)은 "실행력 없는 비전은 비극이다"라고 했다. 실행력이란 개인과 기업이 추구하는 목표와 열망을 가시적 성과로 이끌어내주는 연결고리이다. - 123쪽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교수는 "다른 구조의 언어로 생각하는 것도 창의성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내 친구 중에 아주 재미난 친구가 있어요. 그는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를 구사합니다. 그런데 그는 뭔가 다른 해답을 구하고 싶을 땐 다른 언어로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다른 언어의 단어로 어떤 것을 표현하는 게 창의성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 164쪽

윅스 회장의 스토리는 기업 경영에 있어 사람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어떤 기적을 낳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윅스가 입사 3년차 햇병아리 시절, 하버드경영대학원에 진학한다고 했을 때 "돌아오겠다는 약속만 하면 된다"며 흔쾌히 학비를 대줬던 사람도 전 회장이었다. 윅스 회장은 자신의 실패를 용인해준 코닝의 문화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자신이 한 결정이 정당하고 현명한 방법으로 이뤄진 것이라면 미래가 예상과 다르더라도 그 결정 때문에 비난받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사고방식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실수의 경험을 통해 교훈을 얻은 사람은 반드시 다음번엔 더 나아질 것이라는 사실이죠. 물론 우리는 완벽해야 하지만, 열심히 일하고 우리의 가치를 지켜낸다면 실패도 괜찮다는 겁니다. 내가 아마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 194쪽

호주 총리를 3번 연임한 말콤 프레이저(Malcom Fraser)는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사람을 존중하며 대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나는 교육을 받았으니까, 나는 부자니까 내가 당신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게 되면, 사람들은 십리 밖에서도 그걸 다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 소통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 203, 204쪽

위클리비즈와의 인터뷰에서 칩 히스 교수는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큰 장애요소로 `지식의 저주`를 꼽았다. 교수나 CEO처럼 지식이나 정보를 많이 아는 사람의 말일수록 알아듣기 힘든 현상을 말한다.
"전문가라면 일반 사람들보다 세 걸음쯤 앞서서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 상대방은 전혀 못 알아듣게 된다.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상태`를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 220쪽

호리바 마사오 최고고문이 2003년에 쓴 <남의 말을 듣지 마라>라는 책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 회사 사람들 중에 내가 시키는 대로 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내가 평소에 `회장님, 참으로 멋진 생각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필요 없다고 해서 그런지 사원들은 내 말을 추종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은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어야만 존재 가치가 있는 법이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차라리 그 월급을 내게 달라고 말하고 싶다. 비즈니스에서도 인생에서도 그들보다는 내가 훨씬 경험도 풍부하고 설득력도 있기 때문이다." - 239, 240쪽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는 융복합(convergence)으로 대변되는 새 시대의 법칙을 3가지로 요약했다. `1. 창조는 충돌을 필요로 한다. 2. 열림이 닫힘을 이긴다. 3. 목적이 이윤에 앞선다`가 그것. 이 중 `열림이 닫힘을 이긴다`는 우리가 왜 사일로를 부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잘 설명해준다. - 2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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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의 습격 - 먹거리에 대한 통념을 뒤엎는 놀라운 기록
유진규 지음 / 황금물고기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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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인적으로 발로 뛰며 쓴 글을 좋아하는데, 이 책이 그러하다. 이 책을 읽으며, 젊어서는 돈을 벌려고 몸을 혹사시키더니 늙어서는 망가진 몸을 치료하기 위해 돈을 다 쓴다는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지금 아프다. 그런데 아프지 않고 건강히 살기를 원한다. 이를 위해서 많은 식이요법과 운동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었던 기존의 상식들(예를 들면, 채식을 해야 건강하다, 동물성 기름은 나쁘다, 지방은 안 좋다, 우유는 불완전식품이다)이 절반의 사실이라면 어떨까. 이런 질문을 품는다면 이내 지금의 상식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라는 반대의 목소리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그 반대의 목소리들이 요구하는 반증을 비교적 쉽고 자세하게 풀어주고 있다.

 

2. 짧고 간결한 문체와 쉽게 풀어 낸 먹이사슬과 영양소들에 대한 정보는 이 책에서 제기하는 문제와 고민에 대해 독자들이 쉽게 납득할 수 있도록 한다.  

 

3. 계란에 알레르기가 있는 아이에게 토종닭이 낳은 계란을 먹이자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의문을 품은 저자의 경험으로 시작되는 이 책의 문제제기는 (나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 무엇을 먹일 것인가를 조금이라도 고민해본적이 있다면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만 본다면 이미 거대한 산업이 되어 버린 우리 먹거리의 문제점을 옥수수라는 한 종의 곡물로 치환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어찌보면 이 옥수수라는 것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커다란 문제점의 시작일 수도 있다. 옥수수, 오메가-6, 사료화, 비정상적인 가축의 사육, 동물에 대한 영향, 이것을 먹는 사람들에 대한 영향이라는 흐름을 본다면 말이다.

 

4. 그러나 우리 몸에 나쁜 영향을 주는 음식들을 피하기란 만만치가 않다. 그리고 모든 먹거리를 유기농이나 천연상태로 구매하기도 어렵다. 지금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나 한 사람만 분별있는 소비자로 살기란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 하나가 아니라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분별있는 소비자가 되어 시장을 변화시키는 수밖에 없다. 소비자의 요구와 선호는 산업의 방향과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유인인 셈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벌레 먹지 않고 매끈한 과일을 선호하였던 소비자들이 건강을 챙기게 되자, 농약과 비료를 기피하는 저농약, 무농약 상품들이 등장하더니 이제 유기농이라는 마크가 달린 상품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우리 눈 앞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러한 요구를 할 수 있는 소비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품과 제품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이 필요하다. 적어도 이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졌고, 이러한 생산방식이 자연과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에 대한. 이 책은 어느정도 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5. 산업화로 인해 다양성을 박탈당한 생태계는 이후 아무리 많은 비용을 들여도 결코 회복할 수 없을지 모른다. 이건 기회비용이 될 수 없다.

건강한 먹거리를 찾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르게 사는 것 또한 점점 더 복잡하고 어려워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두 가지가 별개의 문제여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옥수수로 인한 먹이 사슬의 문제는 많은 다른 불행과 마찬가지로 매우 복잡한 정치 경제적 문제이다. 세상의 악함 대부분은 악한 의도 때문이라기보다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한다. 옥수수의 문제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 14쪽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금지하는 것은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영양 정책이다. 근 10년간 프랑스 의사들은 성인병 환자들에게 버터를 먹지 말라고 했다. 먹는 문제에 관한 한 피에르 베일 박사의 입장은 명쾌했다. `영양 섭취에 있어서는 나쁜 것도 없고 좋은 것도 없다. 모두 균형과 품질의 문제일 뿐이다`라는 것이다. 식습관은 지역 특색과 연관하여 발전해 온 문화이다. 왜 어떤 지역에서는 생선을 많이 먹고, 어떤 지역에서는 육식만 하는지, 왜 어떤 지역에서는 채소를 많이 먹는지, 왜 여기는 쌀이고 저기는 밀인지는 지역의 자연환경과 그것을 기반으로 한 먹이사슬과 관계가 있다. 사람들은 지역 환경에 적응한 것이고 관계를 형성해 온 것이다. 여기에 나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프랑스 사람들은 버터를 많이 먹었다. 소가 풀을 많이 먹을 때였다. 이것은 전혀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소가 옥수수를 먹을 때 버터를 많이 먹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 39쪽

베르나르 슈미트 박사는 하루 종일 이어진 인터뷰 말미에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현대의 영양학은 먹이사슬을 통해 전해지는 영양 요소를 간과하여 결과적으로 커다란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었다.
"요즘 우리는 어떻게 했나요? 소에게 옥수수를 줬죠. 돼지에게 콩 깻묵을 줬어요. 모두 오메게-6 지방산만 풍부한 것들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매우 불균형한 영향 섭취를 하고 있는 겁니다. 즉 동물성 식품을 먹는 게 문제가 아니라 `부적합한 식물성 먹이를 먹은 동물성 제품`을 먹는 게 큰 문제인 겁니다. 동물들에게 올바른 먹이를 먹인다면 동물성 식품을 먹는 건 문제가 안 됩니다. 먹이사슬 안에서 우리에게 좋은 지방을 전해 주기 때문입니다. 동물에게 안 좋은 먹이를 주면 당연히 동물들도 안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게 되는 겁니다. 즉, 문제는 동물이냐 식물이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조장하는 먹이사슬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 106쪽

방목되지 않고 한 자리에 서 있는 동물은 에너지를 거의 소비하지 않는다. 사용되지 않은 에너지는 근육 사이의 지방으로 축적된다. 그것이 흔히 우리가 말하는 마블링이 되는 것이다. 마블링은 우리가 60년 전까지는 알지도 못했던 것을 만들어 낸다. A+등급, 꽃등심, 눈꽃등심이다. 풀 먹인 소로는 A+등급의 소고기를 얻을 수 없다. 소고기의 등급은 근내 지방 형성도에 따라 매겨지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소고기는 프라임, 초이스, 셀렉트 세 등급으로 나뉜다. 소는 자연적인 상태에서 적당한 양의 풀을 먹이게 되면 셀렉트 상위, 혹은 초이스 하위 등급이 나온다. 더 높은 등급의 고기를 얻으려면 옥수수가 필요하다. 소가 옥수수를 먹어서 지방으로 변화시키는 데는 풀을 먹을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대사작용이 필요하다. 반추위 미생물이 섬유질을 분해하고 이를 흡수하는 과정은 사라지고, 소화 효소로 전분을 소화하는 과정이 필요해진다. 이것은 소를 돼지로 만드는 일이다. - 119쪽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자 필립 앤더슨은 `모든 것을 간단한 기본법칙으로 환원(reduction)할 수 있는 능력이 그 법칙들로부터 시작해서 우주를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라고 꼬집으며 환원주의를 비판했다. 아무리 복잡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잘게 분해함으로써 기본적인 단순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 환원론은 근대과학을 이끌어 온 기본전략이다. 환원주의가 의학과 약학의 눈부신 발전을 이끈 원동력이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편 환원주의가 식품산업과 손잡고 음식의 질을 심하게 훼손한 것에 대해서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 151, 152쪽

환원주의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예가 비타민 이야기이다. `비타민은 영양소, 효소, 코엔자임, 항산화물과 미량 미네랄들이 함께 만들어 내는 일련의 과정이다.` 1956년, 자연 비타민 연구계의 선구자였던 로열리 박사는 저서 <비타민이란 무엇인가>에서 비타민을 이렇게 정의했다. 비타민은 하나의 독립된 분자 화합물이 아니라 생물학적 복합물이다. 비타민은 여러 가지 변수에 의존하는 다단계의 생화학적 상호작용이다. 비타민 활동은 그런 환경에서 모든 조건이 맞고 모든 요소들이 존재할 때 일어난다. - 152쪽

유제품의 경우,소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그 내용물은 확연히 달라진다. 유기농 풀을 먹고 자란 건강한 소는 건강한 젖을 만든다. 옥수수를 먹는 소는 위장에 대장균이 생기게 된다. 대장균이 우유와 고기에 들어가지 않도록 가열 살균하고 균질화 공정을 거치게 된다. 살균과 균질화 과정을 거치면 우유에 들어 있는 좋은 박테리아와 효소도 함께 파괴된다. 결과적으로 우유는 필수성분이 결핍된 상태로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이는 젖소가 의도한 내용물이 아니다. 로밀크는 이런 공정을 거치지 않아서 몸에 이로운 효소와 박테리아가 그대로 살아 있는 우유이다. 살아 있는 효소는 우유를 쉽게 소화하도록 돕고 좋은 박테리아는 위장을 튼튼하게 한다. - 167쪽

필자 역시 OP목장의 우유를 마셔본 경험을 잊을 수 없다. 프레스노의 파머스마켓에서 맛보았던 로밀크 한 잔은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음식이 주는 행복감을 진하게 느끼면서 `아, 이것이 공생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풀과 동물과 사람의 공생, 음식이란 그런 것이다. 인간은 먹이사슬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먹이사슬 속에서 함께 사는 자이다. 우리가 건강하려면 음식을 만드는 먹이사슬도 건강해야 한다. 행복한 소는 건강한 우유를 만들고 그 우유를 먹는 사람도 행복하게 만든다. 취재를 마칠 즈음 나는 `우유 속에 오메가-3가 풍부해서 두뇌의 신경전달물질이 잘 작용하므로 행복감을 느낀다`는 의학적 설명보다는 `행복한 소가 만든 우유라서 마시는 사람도 행복감을 느낀다`는 짧은 설명이 더 합당하다고 느꼈다. - 189,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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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받는 지배자 -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
김종영 지음 / 돌베개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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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학을 앞두고 미국에 대한 우리 학문의 종속성을 분석한 책을 한 권 사서 읽었다. 비록 1만 6천원의 비용을 지출했을 뿐이지만, 책 한 권을 사면서도 나름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이라는 흥미로운 부제 못지 않게, 알라딘 '편집장의 선택', '돌베개'라는 출판사에 대한 신뢰도를 따져 고른 책이었다.

 

2. 그런데 몇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이 책은 한국 지식인의 트랜스내셔널 탄생을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 트랜스내셔널 위치 경쟁, 트랜스내셔널 직업 기회들 사이의 역학 관계 속에서 이해한다."라든지 "이 책은 일종의 절충적 질적 종단 연구이며 두 단계의 질적 면접에 기반하고 있다."와 같은 문장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 이해한다"라는 주술관계의 호응을 비롯해서 '트랜스내셔널 ㅇㅇㅇ'이라는 정체불명의 조어를 남발하거나 '~적 ~적 ㅇㅇ'이라는 표현들 모두 논문이나 보고서 등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잘못된 문장들이다. (저자 자신이 교수라는 건 알겠지만)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책을 내고자 한다면 이런 문장들은 한 번쯤 충분히 다듬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편집의 문제(혹은 책임)이기도 하다.
 

3. 이렇게 말하는 나도 보고서와 논문에 잘못된 표현들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이지만, 학술논문이든 대중서적이든 글을 쓰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의 글을 퇴고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

 

4. 책을 요약하면, 미국 대학이 갖는 헤게모니에 이끌린 사람들은 국내 대학들이 갖는 불평등과 차별, 비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유학을 결행하고, 미국에서는 주변인과 비영어권자로서의 한계를 인식하다가 학위 취득 후 국내에 돌아와 미국 현지에서의 열악했던 자신의 위치를 지식의 전달자로 '전환'하게 되며, 한국 사회 내 엘리트로서의 이러한 이익을 고수하기 위하여 결국 미국에 대한 학문적 종속에 이바지한다는 것.

 

5. 무슨 보고서 같은 류의 책을... 힘들게 읽었다.

 

 

------ 추가 (위 아킬레우스님의 비평에 대해)

 

깜짝 놀랐다. 누군가가 내가 쓴 것을 읽고, 그에 대한 평을 해주다니... 처음 겪는 일이어서 다소 놀랍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하고, 부끄러우면서 왠지 모르게 즐겁기도 하다. 하지만, 굳이 제목에서부터 내 별명을 밝히면서까지 내 의견에 일일히 토를 달아 반박하면서 이 책의 가치를 설파하기 보다는 그냥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듯 내 의견도 받아들여 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이 책의 가치 여부가 독자들의 논쟁으로 드러나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각자가 읽으면서 판단하면 될 일을 (저자의 지인이나 출판사 관계자가 아닌 다음에야) 굳이 시간을 들여 내 짧은 식견을 비판하면서 이 책의 유용성을 설파할 것 까지야...

아무튼 그냥 끄적인, 어찌보면 너무 단순한 낙서 수준의 초라한 글에 이렇게 분석적인 글을 남겨주셔서 이 책에 대한 다른 관점 일부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책에 대한 독자로서의 불만은 여전하다. 책을 읽고 느낀 점들은 다 제각각이어서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고, 전공자 수준의 학식을 갖춘 분과 굳이 논쟁할 생각/능력도 없지만 애초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불편했던 점 이상을 과도하게 지적하신 것 같아 약간의 내용을 추가한다. (참고로 나는 사회학적 지식이 거의 없다.)

 

1. 나는 이 책을 단편적으로 이해해서 한국의 엘리트들이 미국에서는 열등한 위치였다는 것만을 강조하였다. 누군가가 이 책을 읽고 한 줄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난 위 4. 처럼 말할 수 밖에 없다.

반면, 아킬레우스님이 강조하듯 에필로그에서 제시한 짧지만 강력한 문장 "학문은 더럽다(Academia Immunda)"가 이 책의 '핵심'이라고는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건 이 책의 구성(지배받는 지배자, 글로벌 문화자본의 추구,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의 일상적 체화, 트랜스내셔널 위치 경쟁, 글로컬 학벌 체제,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 중 저자가 어떠한 부분을 많이 할애하였는가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에필로그에 있는 이야기를 억지스럽게 숨어 있는 결론으로 이끌어낼 것 까지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2. 이 책의 제목만으로도 그 내용이 굉장히 기대되었다. "지배받는 지배자"라는 모순적 표현이 미국 유학 후 한국의 엘리트 지식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아주 적확하게 지칭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장의 앞부분을 제외하면 이 책의 키위드, 즉 이중적 지위에 있는 한국의 엘리트를 지칭하는 용어는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이다. 정말 좋다고 생각했던 제목과 글의 내용에서 실제 활용되고 있는 용어의 불일치가 일단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위 2. 에서 지적한 것은 사회학적 용어에 대한 낯섦이 아니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트랜스내셔널 ㅇㅇㅇ'이라는 정체불명의 조어를 남발"하는 것이 읽기 불편했다는 것이다. 즉,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 트랜스내셔널 위치 경쟁, 트랜스내셔널 직업 기회와 같은 영어와 한글이 조합된 용어들을 말한다. (사회학계에서는 이 용어를 반드시 이렇게 써야 하는지 모르지만 그런 이해가 없는 나로써는) 굳이 한글로 번역하기가 곤란한 경우 학술적으로 이렇게 쓰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트랜스내셔널리즘'과 같이 하나의 단어도 아닌 형용사 'transnational'을 왜 '트랜스내셔널'로 표기해야 하는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인터내셔널과는 달리 아직 적합한 국내 용어를 못찾았기 때문인가?). 용어를 발음 그대로 한글로 치환한 것은 그 용어가 중요하기 때문이어서 일수도 있지만, 그 용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를 몰라서 일수도 있다.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이라는 용어는 내가 볼 때는 후자에 속한다.

 

3. 이건 글의 전문성이 아닌 '퇴고'에 관한 생각이었다. 최근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이나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쓰기>와 같은 책을 읽으며 우리말로 쓰는 좋은 글은 어떤 것일까에 천착하고 있었던지라, 책을 읽다가도 특히 문체에 관한 부분이 많이 거슬렸다. 그래서 특히 이 글의 문체에 대해 안 좋은 점을 비판한 것이다. 글의 용어나 내용이 전문적인 것과 글을 읽기 어렵게 쓴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아킬레우스님이 그렇게 강조하는, 내가 사회학적 기본지식이 없다는 비난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 책의 문체와 강준만, 조한혜정, 엄기호, 오찬호 등의 문체가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건 저자가 독자의 입장에 서서 얼마나 자신의 글을 다듬었는가 하는 퇴고의 문제이며, 정성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 대중서를 (읽기) 어렵게 쓰면 안되냐고 반문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것은 저자의 특성이고, 권리이자, 취향이다. 반대로 조금 더 쉽게 읽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적어도 '나'라는) 독자로서의 특성이고, 권리이자, 취향이다. 그리고 나는 적어도 저자라면 이러한 차원에서는 독자들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이 책은 논문이나 보고서 등의 다른 학술적 형태로 게재되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문이나 보고서가 아닌 다른 형식으로 글을 선보였다면, 학계 외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출판의 목적, 의도, 기대는 달랐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아킬레우스님은 이상한 비유를 들어 나를 비판하고 있는데, 나는 사회학 일반에 관한 대중서적으로 이 책을 구입한 것이 아니다. 만약 내가 수학에 관심이 있어서 책을 고른다고 하더라도 그 제목이 '대학수학'이었다면 나는 그 책을 구입하지도, 그 책이 그래도 읽기 수월할 것이라는 기대도, 그리고 책을 다 읽은 후에 책에 수식이 많다고 굳이 시간을 내어 비평을 쓰지도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의 제목이 "지배받는 지배자"가 아니라 '한국에서의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의 위치 경쟁에 대한 분석'이었다면 당연히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비용을 치루고 싶지 않다면 연구서가 아니라 대중교양서적을 읽어야 한다."라고 지적하신 부분을 100% 인정한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한 것이다. 다만, (저자와 출판사가 밝히지 않은 관계로) 이것이 그토록 전문적인 '연구서'임을 몰랐을 뿐. 그리고 전문적인 연구서라는 이유로 읽기 어려운 문체를 사용하는 것이 허용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뿐.

 

4. 1.에서 개략적으로 언급한 바 있으므로 생략한다.

 

5. 지적하신 대로 내게는 "질적 연구와 질적 연구의 글쓰기에 대한 무지"가 있다고 하자. 하지만 나는 그것이 '연구'일지라도 그 분야의 지식인뿐 아니라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구서에는 대중서와는 다른 그 나름의 체계와 글쓰기 방법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글쓰기 방법이라는 것에 가독성이 좋지 않은 허술한 문체들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쉽게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나는 신봉한다. 이 책이 쉽게 쓰여지지 않을 것이었다면, 저자가 비판적으로 연구했던 내용, 즉 "한국의 학문세계 또한 불평등하고 구조화/계층화 되어 있다는 점"을 이 책 스스로가 학계 외부로 확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국내적으로 체화하지 못한 채,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을 운운하는 저자와 아킬레우스님은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이 아닌가?

그럼에도 학술서적은 질적 연구 글쓰기 방법과 형식을 유지해야 하며, 이것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저자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비판하라, 그리고 쉽게 짜집기 한 대중서나 읽으라는 것인가? 만약 그런 의도라면 굳이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면서까지 구구절절 이런 말을 할 필요 없다. 책 표지에 작은 글씨로 '전문서적', '학술총서'라고 표기하는 것으로 족하다. 


`지배받는 지배자`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계층 이론에서 `지식인`을 일컫는 말이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지배충은 자본가 계층과 지식인 계층으로 양분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경제적 영역을 지배하는 자본가 계층이 문화적 영역을 지배하는 지식인 계층보다 우위에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지식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지식인은 지배층에 속하지만 이런 이유로 지배층이면서도 지배를 받는 모순적인 집단이다. - 20쪽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은 어떤 의미에서 지식 생산의 경제적 지위를 뜻하며, 지식인의 계급적 질서에서 중간적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미들맨 소수자가 식민지적, 전근대적 상황에서 출현하듯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은 한국 학계의 지적 식민성과 전근대성 속에서 탄생한다. - 24쪽

미국에서 교육받은 한국 지식인들은 귀국하거나 미국에 정착한다.트랜스내셔설 이동의 상황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지식인은 미국에서 생산된 지식을 한국으로 수입하는 역할을 하며, 이를 한국 실정에 맞게 변형, 적용시킨다. 이들의 한국에서의 지식 생산은 일반적으로 미국의 연구 중심 대학보다 독창성, 중요성, 파급력이 떨어지는데, 이는 연구 자원의 부족, 연구 인력의 전문성 부족, 연구 인정 체계의 파편화, 연구 집중 강도의 약화, 연구 문화의 파벌화와 정치화, 한국 학문 공동체의 천민성(pariahhood)으로부터 기인한다. 따라서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의 주요 생존 전략은 미국에서 생산된 지식을 빨리 받아들여 한국의 로컬 지식인들에게 판매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훈련받은 한국 지식인들은 영문 저널 투고, 국내외 특허 출원, 연구의 글로벌 네트워킹에 참여하여 세계적인 지식 생산에 기여함에도 불구하고 중요하고 독창적인 연구 성과를 내지 못하고 세계 지식체계의 주변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다. - 25쪽

가르침과 배움은 지배-피지배의 관계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말하듯이 모든 헤게모니적 관계는 교육적 관계다. 미국은 `가르치는 나라`이고, 한국은 `배우는 나라`다. 학문을 배운다는 것은 또한 제도적 공간인 대학 내에서의 지배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학은 위계를 가지며 고로 이 배움의 구조에서 탄생한 지식인들도 계층화되어 있다. 대학은 학문의 성지(temple)인 동시에 일종의 분류 기계(sorting machine) 또는 체(sieve)다. - 27쪽

대학은 개인에게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는 `학위`라는 특정 상품을 공급한다. 학위는 제도화된 문화자본의 형태로서 지위재(positional goods)다. 지위재의 가치는 대학의 명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명성이 높은 대학일수록 수여되는 학위의 가치가 높다. 어떤 대학이 더 높은 명성을 가지는가? 근대 대학은 `연구 중심 대학의 승리`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새롭고 중요한 지식을 생산하는 대학일수록 명성이 높다.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학자들은 연구 중심 대학에 속한 경우가 많으며, 이는 그 대학 명성의 중요한 척도가 된다. 학문과 과학은 글로벌한 활동이며 대학의 명성도 이에 따라 글로벌하게 형성된다. - 28쪽

연구는 커뮤니케이션에 기반한다. 영어는 학문과 연구 영역에서 지배적인 언어다. 한국인에게 영어는 `권력어`이며, 한국 연구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특히 이공 계열에서는 영어로 논문을 쓰는 것이 보편화되었으며, 인문사회 계열에서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무엇보다 SCI로 대표되는 `영어 논문`은 학휘 취득 후 교수직과 연구원직에게는 필요불가결한 문화자본이다. 특정 언어자본의 능숙한 구사가 학문적 실력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 31쪽

예전에는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은행에 취직할 수 있었다면 요즘은 많은 경우 대학을 졸업해야만 은행에 취직할 수 있다. 따라서 은행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학위증을 따려고 대학에 지불하는 등록금은 일종의 상징적 지대다. 이는 직업에 필요한 실질적 기술과 직업에 진입하기 위해 사회에서 요구하는 상징적 요건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한다. 한국의 학벌 체제가 큰 사회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인종주의를 만연시켜 사회적 부정의와 불평등을 낳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언론과 SNS에서 회자되었던 부산의 한 초등학생의 <여덟 살의 꿈>이란 동시는 한국 사회가 지불하는 상징적 지대가 얼마나 큰지를 잘 대변한다. "나는 사립초등학교를 나와서 / 국제중학교를 나와서 / 민사고를 나와서 / 하버드대를 갈 거다 / 그래 그래서 나는 / 내가 하고 싶은 / 정말로 하고 싶은 미용사가 될 거다." - 40, 41쪽

무엇보다 한국 대학은 학벌 차별, 성 차별로 가득하며, 유교적 질서에 복종해야 하는 비합리적인 공간으로 인식된다. 즉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국 유학 동기는 미국 대학과 한국 대학 간의 지위 간극뿐만 아니라 `윤리적 간극`(ethicdal gap) 때문에 발생하며, 유학생들에게 미국 대학은 한국 대학의 천민성과 억압에서 탈출할 수 있는 해방적 기능을 가진다. 동시에 미국 유학은 코즈모폴리턴 생활방식의 추구와 연관된다. 영어, 전문 지식, 서구적 삶은 한국의 `답답한` 삶과 대비되어 자유로움과 실력을 동시에 부여해줄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진다. 따라서 미국 유학은 글로벌 대학 체제 속에서 지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계급적 전략이기도 하지만, 특정한 삶과 도덕성을 갈구하는 문화적 욕망이자 전략이기도 하다. - 60쪽

"한계를 인정하고 핸디캡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미국 학생들과 교수들의 기준에 못 미치는 자신의 위치를 숙명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정체성의 형성은 이들의 교육적 궤적에서 아주 드라마틱한 사건이다. 초기에는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열등함을 받아들이는 것을 몹시 괴로워하지만 글로벌 교육체제에서 극복할 수 없는 자신의 위치 지어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현실과 타협한다. 여기서 타협이란 미국 원어민처럼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학점을 잘 받고 무사히 수업 과정을 마치며 수업시간에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정도로 기대 수준을 낮추는 것을 말한다. - 93쪽

한국의 엘리트 학생이라는 지위와 정체성은 미국 유학 과정에서 드라마틱하게 바뀐다. 수업 시간, 조교 생활, 연구 활동에서 자신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게 되며 자신의 장애와 능력의 한계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인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탈구화(dislocated), 방향감각 상실(disoriented), 뿌리 뽑힘(uprooted)을 경험하게 된다. 영어는 완전 정복이 불가능하며 미국 학생과 동일한 선산에서 경쟁할 수 없다는 패배의식과 자기 모멸감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유학생들은 미국인과 한국인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하게 되며, 미국 대학원 또는 미국 사회에서 완전한 사회적, 문화적 멤버십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국에서의 엘리트 학생의 위치와 미국에서의 열등한 학생의 위치 사이에서의 트랜스내셔널 긴장은 유랑(유학)과 정착이라는 대립의 공간에서 발생한다. 미국 교수들과 학생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필사의 노력은 심리적, 육체적 고난으로 이어지며, 수업과 연구에서 동등한 참여와 멤버십은 좌절된다. - 116, 117쪽

유학생들은 그들이 밟는 트랜스내셔널 궤적 때문에 `탈구 속에서의 희망과 가능성`이라는 이방인성을 지닌다. 즉 트랜스내셔널 이방인으로서 미국 유학생은 한편으로는 `똥밭`을 구르지만, 이는 자신의 미래에 `거름`이 되는 가치 있는 장소라는 이중성을 띤다. 미국 대학의 교수진이 전수하는 학문자본의 양과 질, 미국 대학 인프라의 탁월함, 대가라는 학문권력과의 만남, 우수한 연구 네트워크, 미국 학문 활동의 에토스와 규범은 한국 대학이 제공하지 못하는 귀중한 `거름`이다. 이것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미국 대학은 학문을 하는 이상적인 장소로 인식되고, 미국 대학의 학문적 규범은 누구나 따라야 할 준거가 된다. - 118쪽

학문은 감정적 작업이다. 감정적 투신 없이는 탁월한 작업이 나올 수 없다. 학문적 열정은 특정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발생한다. 랜들 콜린스는 성공적인 학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학문자본과 학문에 대한 열정(emotional energy)이다. 양질의 학문자본은 탁월한 선생으로부터 전수받아야 한다. 훌륭한 선생을 찾기 위해 한국의 인재들은 미국 유학을 간다. (...) 탁월한 선생 또는 대가와의 접촉은 학문자본의 전수뿐만 아니라 학문적 열정의 고양과 연결된다. 따라서 학문적 열정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지속성 안에서만 유지된다. 즉 짧고 단기적인 만남보다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서 계속해서 고양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집합 흥분`(collective efervescence)이 없는 `탁월한` 학문 공동체는 존재하기 어렵다. 곧 공부는 사회적인 것이다. - 195, 196쪽

"공부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교수를 한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학문의 왕, 철학의 어원에서 방점을 찍어야 할 곳은 지혜가 아니라 사랑이다. - 197쪽

학문은 더럽다(아카데미아 임문다 Academia Immunda). 정치가 그러하듯이. 학문 지배의 글로벌 구조에서 열등한 위치에 있는 한국 지식인은 이 궁극적인 리얼리티에 직면하게 된다. 피라미드 구조인 학문의 세계에서 극히 소수만이 그 정점에 오를 수 있다. 민주적 이념을 가진 학문의 세계가 결과적으로는 가장 불평등한 세계인 것이다. 제아무리 진리와 초월을 꿈꿀지라도 학문은 어디까지나 `세계-내-학문`이다. 지식인은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하고 사회적 인정을 갈구한다. 이들에게 학문적 배척은 곧 지옥이며 존재 이유의 상실이다. 그러나 이 지옥은 대다수의 한국 지식인들이 처절하게 경험하는 현실이다. 거들떠보지 않는 학벌, 인용되지 않는 논문, 인정해주지 않는 동료들, 그리고 수여되지 않는 사회적 지위.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지식인들은 경외와 숭배의 대상이지만 학문자본이 미천한 지식인은 언제나 손쉬운 먹잇감이다. 이는 곧 지식인은 지식인에 대한 신이자, 지식인에 대한 늑대이기 때문이다. - 296쪽

학문의 제도적 담지자인 대학은 진리의 전당일 뿐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의 등급을 분류하는 기계다. 학벌 인종주의로 물든 한국 사회에서 한국 엘리트들에게 최고의 지적 등급을 부여하는 곳은 미국 대학이다. 한국 대학과 비교도 되지 않을 재정, 수많은 유수의 교수진, 우수한 연구 시설, 학문에 집중할 수 있는 조직과 문화 등등 압도적인 비교 우위가 한국 지식인이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에 종속되는 이유다. 이 트랜스내셔널 간극과 대학의 글로벌 불평등이 미국 유학 션상의 원인이다. 이것이 문제시되는 것은 교육을 통한 불평등이 한 국가를 넘어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미국 유학 지식인의 사회적 특권은 학문적, 사회적 폐쇄 속에서 작동하며, 이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경쟁을 막고 특정 집단의 이익에 봉사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 296쪽

헤게모니 이론을 정치인류학적 관점에서 세련화시킨 제임스 스콧(James Scott)의 논변은 이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약자의 무기(Weapons of the Weak)라는 책에서 피지배층 농민들은 지주들에게 토지개혁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아니 그것은 그들 머릿속에서는 상상 밖의 일이다. 이들은 현재의 계급질서를 무너뜨릴 혁명보다는 일상적인 저항을 통해 자신들의 조건을 조금씩 낫게 만들려고 한다. 한국지식인들에게 한국 대학과 학계에서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를 전복시킨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the unthinkable)일 것이다. 그들은 스콧이 묘사하는 약자들처럼 대학에서 좀 더 좋은 자리를 얻고, 강의 시수를 줄이고, 연구 시간을 늘리고, 학계와 전문가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좋은 논문을 쓰고, 만약 기회가 온다면 정계와 같이 더 큰 사회에 나가 기여하고픈 욕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 297쪽

무엇보다 미국 유학파가 이 헤게모니에 도전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그들은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에 지배받는 자이지만 한국 대학과 사회에서는 지배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약자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트랜스내셔널 위치성`(transnational positionality)을 사회적 지위 향상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이들은 외국인 대학원생이라는 학문적 약자에서 출발하여 한국과 미국의 지식 엘리트로의 전환이라는 트랜스내셔널 궤적을 가진다. 국내 학위 소지자들이 이따금 담론적으로 이 헤게모니에 도전하지만, 그것이 어떤 변화를 가져온 적은 없다. 무엇보다 이들은 한국 대학의 개혁을 기획할 조직적 연대도 치밀한 전략도 없다. - 297쪽

무엇보다 한국 대학과 학계의 천민성은 미국 대학의 헤게모니에 철저하게 종속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한국 지식인 집단은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에 민주화와 근대화를 거세게 요구해왔지만 정작 본인들은 비민주적이고 전근대적인 가장 모순된 집단을 이루고 있다. 학벌 인종주의, 남성 우월주의, 폐쇄적 학벌주의, 유교적 위계질서, 검증되지 않는 전문가, 상징 폭력(symbolic violence)이 난무하는 학계... 이는 베버가 말한 비합리적 천민주의의 대학버전이다. 이 점에서 미국 대학은 한국 대학의 변혁을 이끌어내는 해방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즉 미국 대학의 근대성은 한국 대학의 전근대성을 타파하는 문화적 전범이며, 몇몇 미국 유학파들은 이를 한국 대학에 설파하는 개혁가들이 된다. -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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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의 금기를 찾아서 살림지식총서 136
강성민 지음 / 살림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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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게 말할 것 없이 무의식은 청개구리와 같은 것이다. 의식은 `노`(no)라고 하는 데 무의식은 `예스`(yes)라고 하는 경우가 학계엔 의외로 많다. 생태주의자들은 현대사회의 반생태성을 비판하지만 자신들 논리의 반생태적인 부분을 모르는 경우가 있다. 문화평론가들도 자신들의 글에 `문화`와 `비평`이 빠져 있고, 오히려 자신들의 글쓰기가 `문화비평`의 대상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 학문의 미국의존성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유럽 의존적이라는 점을, 민족 의존적이라는 점을 모르고 있다. 정말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 희극(戱劇)이 존재하는지 모른다. 진정한 공부는, 아니 진정한 `사유`는 사유하기를 통해 형성되지 않은, 즉 교육되고 주입된 자신의 무의식을 발견하고, 그것을 객관적 의식공간에 올려놓고 점검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진정한 실천은 단순하게 `언행일치`를 잘 감시한다고 해서 생겨나는 게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의 건강한 타협에서 비롯된다고 나는 믿고 있다. - 4, 5쪽

엄격한 형식주의는 학술자들의 표정을 모노톤으로 바꾸고 풍성함을 사라지게 한다. 얼마전 <모색>이라는 잡지에서 조사한 결과 최근 몇 년간 국내 학술지에서 기획 특집이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엄격한 형식을 추구하다 보니 자유로운 발상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좁아지는 것이다. - 31쪽

"혁명적 좌파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젠더와 섹슈얼리티 문제에 관해서 본의 아니게 일종의 제국주의자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진보주의자라면 사회적 소수자인 여성에 대해서 끊임없는 자기반성으로 생리적 판단을 자제하고 소수자를 위한 정치적 실천을 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나는 이런 주장이야말로 일종의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모순을 구조적인 차원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비판하는 진보주의자가, 자신의 주 고민 영역이 아닌 부분에서까지 일관되게 행동하기를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사람의 두뇌활동과 정서 구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역행하는 무리한 주장 같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페미니스트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게 해당 진보주의자더러 일상의 영역에서 뼈를 깎는 정치적 실천을 하라고 요구할 게 아니라, 우리 사회 일반의 젠더 의식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 큰 문제 될 게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모든 개체와 관계를 동등한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과 각각의 개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차이의 정치학`은 서로 다른 게 아닐까? - 50, 51쪽

나는 생태주의자들이 그들과 생각이 다른 지식인들을 설득하고 변화시킬 수 있어야 지속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다소 위험한 발언이지만 위로부터의 생태화가 아래에서의 생태화와 만날 수 없다면 결국 요즘 벌어지는 것처럼 생태주의와 상품화와 개인화, 그리고 온정주의와 결합된 기형적 생태운동 등의 반복될 것이다. - 67,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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