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레드 에디션, 양장) -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백영옥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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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이라는 만화를 즐겨보지는 않았지만, 그런 내게도 몇몇 장면은 떠오른다. 항상 '글쎄다'라고 말하는 통통하고 등이 구부정한 매튜 아저씨의 마차를 타고 초록색 지붕 집으로 오면서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앤, 엄격한 마릴라 아주머니에게 혼줄이 나서 울먹이던 앤, 앤의 빨간 머리를 빗대어 '홍당무'라고 놀리던 길버트의 머리를 간이 칠판으로 내리치던 앤, 소매가 부푼 블라우스를 입고 싶다고 종종대던 앤, 다이애나와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던 앤... 제목만 떠올리더라도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이런 장면들에 나 스스로도 놀라며 책을 집어 들었다. 단순한 스토리를 짜집기한 책이었다면 휙 한번 훑어보고 그대로 내려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 페이지 남짓한 프롤로그를 읽은 후에는 빨강머리 앤의 장면과 작가의 삶의 관점을 한번 따라가며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목차는 크게 다섯 장으로 나누어진다. 각 장의 제목은 그 장에 속한 대표적인 에피소드의 제목이다. '우연을 기다리는 힘'은 앤이 마릴다의 집에 입양되면서 벌어지는 낯설고 어색한 몇 가지의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앤의 컴플렉스라고 할 수 있는 '빨강머리'에 대하여 컴플렉스를 없애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던 앤이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지금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라는 생각이라는 것. '고독을 좋아한다는 거짓말'에서는 앤이 유리에 비친 자신을 캐시 모리스라는 상상속의 인물로 설정하고 그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고 마릴라에게 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작가는 '고독을 좋아한다는 말은 이미 같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는 통찰을 제시한다. 이어지는 '슬픔 공부법', '더 잘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변한다' 또한 앤이 성장해가면서 익숙했던 에이본리를 떠나 퀸 학원이 있는 대도시로 가고, 그동안 경쟁관계로만 의식하고 있던 길버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고, 매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장면과 이에 대한 관조적 서술이 포함되어 있다.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실패하고 지쳐버린 자신의 인생에서 앤의 말을 되새긴 것이 끝내 좌절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앤의 말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스스로를 치유하면서, 앤의 말을 받아적던 작가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실망할 것도 없으니까."라는 린드 아주머니의 말에 반대하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한심한 일'이라고 했던 앤처럼 다시 한 번 실망하더라도 그동안 꿈꾸어 왔던 것을 다시 한번 기대해보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앤이 스스로 '고독'이라로 칭했던 자아의 내피를 비로소 벗고 자신의 삶을 직면한 것과 같은 작가 자신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기다리고 고대하는 일들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게 실제 우리의 하루다. 하지만 그럴 때 앤의 말을 꺼내보면 알게 되는 게 있다. 희망이란 말은 희망 속에 있지 않다는 걸. 희망은 절망 속에서 피는 꽃이라는 걸. 그 꽃에 이름이 있다면, 그 이름은 아마 ‘그럼에도 불구하고‘일 거라고. - 22쪽

시간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건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똑같은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게 하는 힘 아닐까. 시간은 느리지만 결국 잎을 키우고, 꽃을 피우고, 나무를 자라게 한다. 나는 그것이 시간이 하는 일이라 믿는다.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강퍅한 마음을 조금씩 너그럽고 상냥하게 키운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거울을 보며 어느 날 당신도 이렇게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아! 정말 좋다! 까지는 아니어도,

그럭저럭,
이 정도도,
나쁘지 않아... - 27, 28쪽

야망에는 결코 끝이 없는 것 같아.
바로 그게 야망의 제일 좋은 점이지.
하나의 목표를 이루자마자
또 다른 목표가 더 높은 곳에서 반짝이고 있잖아.
야망은 가질 값어치가 있지만 손에 넣는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야.
자기부정, 불안, 실망이라는
그 나름대로의 장애물을 거쳐 싸워 나가야 하는 것이니까. - 52쪽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보다 중요한 건 ‘꿈을 이루기 위해 내가 오늘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일‘이다. 세상을 천천히 응시하는 일은 나의 마음을 꼼꼼히 읽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정말로 ‘나의 야망‘인가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몰려 쫓기듯 하고 있는 일을 자기 의욕적으로 착각하고 나를 소진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는 일이다. -55,56쪽

삶을 야구에 비유하자면, 나는 이제 홈런을 치겠다는 야망보다는 출루율을 높이기 위해 연습을 거르지 않는 선수가 되고 싶다. 살면서 중요한 건 어쩌면 타율이 아니라 출루율일지도 모른다. 살다보면 좋은 볼을 보고 ‘안타‘를 욕심내기보다, 먼저 출루해 나간 사람을 위해 ‘번트‘를 쳐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안타‘ 찬스에 ‘번트‘를 칠 수 있는 선수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더 큰 세계를 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는 사람은 종종 다른 사람이 내리지 못하는 판단을 하기도 한다. 야망의 기준이 ‘나‘에게서 ‘우리‘로 확장되는 것이다. - 56쪽

이제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멸의 역작을 쓰길 바라기보다, 차라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매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매일 쓰고, 매일 읽는 사람이게 해달라고 말이다. 타르코프스키가 그의 영화 <희생>에서 말한 것도 그런 것이다. 화장실 변기 안에 물 한 컵을 붓는 사소한 행위조차 매일 하는 것에는 신성함이 깃든다. - 60쪽

삶은 내가 원하던 것과 늘 다른 식의 선택을 요구했다. - 96쪽

우리가 사랑이란 명사에 ‘빠졌다‘는 조금 특별한 동사를 쓰는 것은 사랑이 ‘젖어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나와 만나, 크나큰 낙차를 경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에 풍덩~ 빠지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쿨‘하고 ‘드라이‘한 사랑 같은 건 이제 잘 믿지 않게 됐는데, 그건 물기가 없는 곳에선 어떤 생명도 자라지 않는 이치와 같다. 생명이라곤 자라지 않을 것 같은 사막에 선인장이 존재하는 건, 어딘가에 있을 오아시스 때문이다. 진짜 사랑은 사람을 성장하게 한다. - 113쪽

무엇을 원한다는 건 그것에 따른 고통도 함께 원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 171쪽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자아 중심적인 강박이 나를 망치기도 한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현재를 망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가 ‘해야‘ 하는 일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좋아하려는 노력 그 자체가 아닐까. - 181, 184쪽

나는 직업을 꿈과 연결시켜 내가 하고 싶은 일, 가슴 뛰는 일을 하지 않으면 마치 실패자인 것처럼 좌절하게 만드는 요즘 세태를 생각했다. 그리고 직업이란 ‘내‘가 아니라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합당한 대가를 받는 일이란 생각에 이르자, 사람들이 느끼는 ‘자아실현‘과 ‘직업‘ 사이의 괴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 184쪽

누군가에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어준다는 건, 그 사람의 불안을 막아주겠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결핍을 누군가가 끝내 알아보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 결핍 안에서 공기가 되어 서로를 옥죄지 않고, 숨 쉬게 해야 한다. 그 사람이 옆에 없기 때문에 불편하고 불안해지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위성처럼 내 주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힘이 되고 따뜻해지는 사랑. 이것이야말로 떠날 필요가 없는 관계이다. - 218쪽

앞일을 생각하는 건 즐거운 일이에요.
이루어질 수 없을지는 몰라도 미리 생각해보는 건 자유거든요.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실망도 하지 않으니 다행이지.‘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 3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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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2-01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빨간머리 앤> 완역본이 제대로 나왔으면 좋겠어요. 동서문화사 번역본이 개판이라고 들었거든요.. ^^;;
 
나의 친애하는 적
허지웅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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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이 그의 두번째 책을 읽는 것이지만, TV를 보지 않는 나는 여전히 허지웅을 잘 모른다. 하지만 예전에 읽었던 그의 책에서는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나 낯설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여기고 싶은 부분들이 더러 있었다. 때문이 이 책을 선택하는 데에는 별 다른 주저함은 없었다. 제목 또한 눈길을 끌었다. '나의 친애하는 적'. 나는 유무형의 싸움에 있어서 한번도 내 상대편을 존중할만한 상대로 여겨본 적이 없었다. 그건 내가 비뚤어진 것이어서 그럴 수도 있고, 내가 그동안 상대해 왔던 이들의 수준이 다 고만고만해서 였을 수도 있다. 저자는 이 제목을 통하여 "나 자신에게 지나치게 심취하는 일"을 경계하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 어려운 신독(愼獨)의 경지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3부 '끓는점'이라는 소제목은 거기에 속한 대표적인 글의 제목을 땄다. 물론 이러한 소제목들이 각 부에 속한 글들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굳이 대강적인 분류를 하자면, 1부는 저자의 생활과 연관된 개인적인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2부는 '잊을 수 없는 얼굴이 있다'라는 제목 아래 그의 아버지, 엄마(나의 가장 친애하는 적), 데이비드 보위, 팀 커리, 도널드 서덜랜드, 신해철, 앤서니 퍼킨스 등 그에게 직간접적으로 영감을 주었던 이들에 대한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3부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슈들이 주로 묶여 있는 것으로 보아, 책의 구성을 나, 나의 주변, 사회로 확장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는 것 같다.

 

영화주간지와 월간지 기자로 일했다는 경력 때문인지, 영화에 관한 이야기가 매우 많다. 영화의 내용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글도 있고, 영화의 감독이나 배우에 대한 강한 호감을 드러내는 글도 있고, 영화의 존재가치와 사회와의 연계성에 대해 언급한 글도 있다. 저자가 언급한 영화들을 다 섭렵하여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챌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영화적 취향이 그리 강하거나 필수적인 영화들을 찾아 보는 성격이 아닌, 더군다나 가끔 서평은 읽고 참고하지만 영화평은 전혀 읽지 않는 나로서는 그것들을 다 이해할 수가 없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였다. 만약 이 책이 영화에 대한 그동안의 평론을 엮은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나는 이 책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나 고시원 이야기 같이, 매스컴을 통해 그를 잘 접하지 않는 내게 익숙한 에피소드가 있다는 점은, 적어도 이 부분에 관해서는 그의 첫 에세이인 <버티는 삶에 관하여>에서 언급했던 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느낌이다. 신해철과의 인연, 그와의 안타까운 이별에 대해서는 공감하겠으나, 그와 관련된 에세이가 2편이나 (그것도 상당히 중복적인 표현으로) 된다는 점, 후반부로 갈수록 앞 뒷글의 흐름에 맞지 않는 한 페이지정도의 글이 드문드문 보인다는 점은, 책의 처음에 비해 뒤로갈수록 안타깝게도 글의 분량이나 짜임새가 성기어진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에세이를 쓸 때 그것을 어떤 소재로 구성할지는 무척 중요한 것 같다. '악의 평범성' 같은 소재는 다른 사회적인 에세이에서도 너무 자주 접하는 소재여서 식상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아버지, 엄마, 청소, 편의점 아르바이트, 트위터 등 개인적인 배경과 일상을 소재로 한 에피소드 몇 편은 꽤 마음에 들었다(덕분에 밑줄을 많이 그었다). 처음 책을 폈을 때는 개성이 강하고 편향적인 것 같았던 그의 시선이, 책을 덮으면서는 결국 자신을 경계하며 남을 살펴보게 하고, 사회적인 약자들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게 하고, 거듭된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도록 당부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이런 시선과 더불어 한정된 분량 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간결하고 정확하게 이끌어내는 그의 재량이 부럽기도 했지만, 만약 그의 세번째 에세이가 나온다면 굳이 읽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질수록 가장 조심해야 할 건 나 자신에 지나치게 심취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에 심취하면 쉽게 뜨거워지고 자기 사정과 감정만이 특별한 것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기 사정에만 너그럽다보면 남의 사정은 나보다 덜한 별것 아닌 게 되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괴물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주변 세계를 친애하는 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확실히 도움이 되어주었습니다. - 6쪽

남의 말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남 탓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은 쉽게 불행해지지 않는다. 불행할 시간이 있으면 더 많은 걸 책임지고 노력한다. 어른스러운 길이란 건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선택과, 이후 어른스럽게 책임지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 45쪽

청소란 그 공간을 완전히 이해하게 만든다. - 50쪽

돌이켜보면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을 붙잡고 되돌려지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 늘 너무 오랫동안 분개했던 것 같다. 특히 인간관계가 그랬다. 거기에는 어떤 오해나 실수가 있더라도 어찌됐든 돌이킬 수 있어야만 진짜 우정이고 진짜 사랑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진짜 사랑과 진짜 우정이란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서로 다른 논리들 앞에서 유명무실해진다. 사실 언제든 돌이킬 수 있다는 믿음은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게 하고 결과적으로 사람을 좀 비겁하게 만든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최소한 내가 실패한 관계들은 대개 그랬던 것 같다. 결국, 우리는 모두 순순히 누군가의 과거가 될 용기가 필요하다. 돌이키고 되돌리는 것에 대한 집착은 좀 느슨하게 내버려두고 말이다. - 53쪽

아마도 사람들은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면서 구덩이 안에서 모래를 퍼내는 일을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지루하고 의미 없는 반복에 염증을 느끼던 사람조차 마침내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 자아를 성취하며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분투하는 사람보다 일상에 침몰된 사람이 더 행복해 보인다. 다시 꺼내볼 때마다 전율한다. 마침내 구덩이 밖으로 나설 기회를 가지게 되었음에도 다시 들어가 당장의 목적에 만족하고 설레어하는 풍경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어느 쪽이 더 옳은 선택일까. 더 권할 수 있는 삶일까. - 112쪽

살다보면 삼루에서 태어난 주제에 자신이 흡사 삼루타를 쳐서 거기 있는 것처럼 구는 사람들을 만나기 마련이다. 나는 평생 그런 사람들을 경멸해왔다. 그런데 이제 와 돌아보니 내가 딱히 나은 게 뭔지 모르겠다. 나는 심지어 삼루에서 태어난 것도 삼루타를 친 것도 아닌데 아무도 필요하지 않고 여태 누구 도움도 받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혼자 힘만으로 살 수 있다 자신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자신감이 건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즘에 와서야 그것이 착각이라는 걸 깨닫고 있다. - 126쪽

어떤 면에선 아버지 말이 맞았다. 그게 누구 덕이든, 나는 독립적인 어른으로 컸다. 아버지에게 거절당했듯이 다른 누군가에게 거절당하는 게 싫어서 누구의 도움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하거나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고 멀쩡한 척 살아왔다. 시간이 흘러 지금에 와선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도, 타인의 호의를 받아들일 줄 아는 능력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혼자서밖에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좋은 어른은커녕 이대로 그냥 독선적인 노인이 되어버릴까, 나는 그게 너무 두렵다. - 127쪽

결국 남은 건 뒤의 말뿐이었다. 맥락은 결코 기록되지 않는다. 과격한 말이었다. 어쩌면 과격하고 선정적인 나중의 말만 남은 게 당연한 노릇인지도 모르겠다. - 190쪽

전에는 뭔가를 내려놓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쉽게 까먹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살아보니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까먹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다보면 까먹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까지 함께 잊어버리기 마련이더라. 그리고 그렇게 까먹은 중요한 것들은 너무 중요하고 소중해서, 반드시 훗날 가슴을 치고 후회하게 된다. 어쩌면 뭔가를 내려놓기 위해 필요한 건 망각이나 체념이 아니라 이해하는 태도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그 입장이었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이해 말이다. - 191, 192쪽

좋은 다큐는 반드시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진실에 관해 스스로 한번 더 의심한다. 그리고 그런 의심의 사유를 통해 관객이 영화를 찬양하게 만드는 대신 관객이 영화에 당황하게 만든다. 그런 종류의 당황은 필연적으로 관객의 고민과 깊은 울림을 이끌어낸다. - 229쪽

무엇을 다루었느냐가 중요하지 작품의 함량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 이 엄혹한 세상에, 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나는 별로 대화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다큐 <자백>에서 과거 군부 독재 시대를 비판하는 등장인물의 대사처럼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든 상관없다‘는 태도다. 내가 편들고 싶은 것을 위해서라면 프로파간다라도 상관없다는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이들과 동업자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적 소재를 다루는 다큐들을 모두 퉁쳐서 함량 미달이라는 편견을 만들어내고 결과적으로 좋은 다큐가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세상을 망치는 건 그런 사람들이다. - 229, 230쪽

악의 평범성 개념은 아이히만의 말년 인터뷰와 새로운 연구 결과들을 통해 반박되거나 보충되고 있다. 그러나 위계와 시스템, 적극적인 동조자들이 발견되는 이와 같은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악의 평범성 논쟁, 그리고 <엑스페리먼트>가 남긴 가장 중대하고 어려운 화두가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래도 되는‘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 말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란 그렇게 힘들다. - 261, 262쪽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난다. 만날 것이다. 그러므로 당장 힘들고 어렵더라도 자폭하기보다 설득하고 싸워나가기를 포기할 수 없다. 요즘은 그렇게 원론적인 것들에 자꾸 마음이 간다. 우리 사회를 지탱해주던 가장 기본적인 믿음들이 세상을 더 많이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아직도 그런 걸 믿느냐는 사람들에 의해 수시로 훼손되어 버려지고 있다. 나는 그게 너무 슬프다. - 3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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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여행 2017-01-26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점 몇개일까 궁금했는데 3개. 만족스런 글은 아니었나봐요. 빨간 커버 느낌은 좋았는데..
자기 생각만이 특별하다고 느끼지 않도록 계속 소통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생각이 늙지 않도록 하는 가장 쉬운 길이 아닐까요?

희망여행 2017-01-26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루에 혼자 서 있는건 사실 힘든 일이예요. 상대팀 관중의 야유가 계속 들리죠. 부러워하거나 시기할 필요가 있을까요? 홈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데...
 
편의점 인간 -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석희 옮김 / 살림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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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가, 하릴 없이 서적 코너에 있는 책들을 훑어보았다. 요즘 통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가볍게 읽을 소설을 찾던 중에 마침 적당한 제목과 두께의 책이 눈에 띄었다. 잠깐동안 서서 책을 넘기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4분의 1 정도를 읽어버렸다. 이 자리에서 끝까지 읽을지를 고민하다가 돌아갈 시간이 되어 구입한 책이다.

 

다수의 일본 소설처럼 이 책도 별다른 구성이나 목차가 없다. 주인공(후루쿠라)의 회상과 시선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이야기는 평범이나 보통이라는 범주에 편입되지 못한 주인공이 그래도 자신의 본질 혹은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겪게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사건'이라고 표현했지만, 이 책의 설정들은 편의점이라는 장소에서 일어날 법한 그리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일들이다. 다만, 편의점 내의 한 부품으로서의 삶에 만족하고,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는 주인공에게 던져지는 세상의 낯선 시선과 평범함의 강요라는 것에 대해서는 현대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생각해볼 여지를 제시하는 것 같다.

 

더 이상 바라는 것 없이 서른 살이 훌쩍 넘도록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그에 대해서, 이제 제대로 된 직장도 잡고 결혼도 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그 주변인들과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다가, 그냥 그대로 사는 것은 왜 안된다는 것인지에 대한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자신이 가장 편하게 느끼는 삶을 살고 있음에도 주변의 눈치를 봐야 하는 그에게 연민을 느끼다가도, 그 불편한 시선을 떨어내고자 억지스럽게 동거를 하려는 후루쿠라의 선택에는 혀를 끌끌 차기도 한다.

 

'나는 나의 본질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 책을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이다. 나역시 그처럼 조직이나 단체의 일원으로 속해 있을 때 안정감과 행복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강하게 인지하지 못할 뿐이지, 여전히 그런 안도감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후루쿠라의 삶을 불편하게 읽었다면, 내가 이미 평범이나 정상이라는 범주를 당연스럽게 수용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그를 둘러싼 시선들에 반감을 느꼈다면, 내 마음 속 어딘가에는 지금의 평범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내가 가려는 곳이 평범의 기준에서는 한참 수준 미달의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가끔씩 느끼는 '적어도 저런 사람처럼 살지는 않는다'라는 안도감을 경계하기로 다짐한다. 이런 생각의 기저에는 '저런 사람'에 대한 배타적인 감정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내 평범함의 범주로부터 타인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나를 굳이 평범함의 범주에 밀어넣지 않으면서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어머니는 "이 새는 작고 귀엽지? 저쪽에 무덤을 만들고, 모두 함께 꽃을 바치자꾸나"하고 열심히 말했고, 결국 그 말대로 되었지만,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두 입을 모아 작은 새가 불쌍하다고 말하면서, 흐느껴 울며 그 주위에 핀 꽃줄기를 억지로 잡아 뜯어 죽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꽃이네. 분명 작은 새도 기뻐할 거야"라고 말하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다들 머리가 이상한 것 같았다. - 13쪽

그때 나는 비로소 세계의 부품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내가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정상적인 부품으로서의 내가 바로 이날 확실히 탄생한 것이다. - 27쪽

아침이 되면 또 나는 점원이 되어 세계의 톱니바퀴가 될 수 있다. 그것만이 나를 정상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 30쪽

지금의 ‘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거의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다. 3할은 이즈미 씨, 3할은 스기와라 씨, 2할은 점장, 나머지는 반년 전에 그만둔 사사키 씨와 1년 전까지 알바 팀장이었던 오카자키 군처럼 과거의 다른 사람들한테서 흡수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35쪽

같은 일로 화를 내면 모든 점원이 기쁜 표정을 짓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직후의 일이었다. 점장이 버럭 화를 내거나 야간조의 아무개가 농땡이를 부리거나 해서 분노가 치밀 대 협조하면, 불가사의한 연대감이 생기고 모두 내 분노를 기뻐해준다. - 39쪽
이즈미 씨와 스기와라 씨의 표정을 보며 아아, 나는 지금 능숙하게 ‘인간‘이 되어 있구나 하고 안도한다. 이 안도를 편의점이라는 장소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했을까. - 40쪽

빨리 편의점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편의점에서는 일하는 멤버의 일원이라는 게 무엇보다 중요시되고, 이렇게 복잡하지도 않다. 성별도 나이도 국적도 관계없이, 같은 제복을 몸에 걸치면 모두 ‘점원‘이라는 균등한 존재다. - 50쪽

아, 나는 이물질이 되었구나.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가게에서 쫓겨난 시라하 씨의 모습이 떠오른다. 다음은 내 차례일까?
정상 세계는 대단히 강제적이라서 이물질은 조용히 삭제된다. 정통을 따르지 않는 인간은 처리된다.
그런가? 그래서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치지 않으면 정상인 사람들에게 삭제된다.
가족이 왜 그렇게 나를 고쳐주려고 하는지, 겨우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98쪽

손님들만은 변함없이 가게에 오고, ‘점원‘으로서의 나를 필요로 해준다. 나와 같은 세포라고 여겼던 사람들이 모두 차츰 ‘무리의 수컷과 암컷‘이 되어가고 있는 불쾌감 속에서 손님들만은 나를 계속 점원으로 있게 해주었다. - 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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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26 15: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공동체 집단에 소속감을 느끼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혼자만 누릴 수 있는 세계를 찾습니다. 평범함을 추구하면서, 특별함을 찾으려고 살아가는 것, 고민을 동반한 삶의 방식이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설 연휴 잘 보내세요. ^^

희망여행 2017-01-26 1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편의점 인간 살까 고민했었는데... 전달 플리즈

희망여행 2017-01-26 1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품으로의 삶이 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책을 읽은 후엔 생각이 바뀔까요?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천명관 지음 / 예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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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이야기꾼이라 일컬어지는 천명관의 신작을 보고 무척이나 반가웠지만 제목과 표지가 어쩐지 가벼워 보여 몇 번을 주저했다. '그렇게 따지면, <나의 삼촌 부르스 리>는 가벼워 보이지 않았었나', '그런데 그 책도 재미있게 읽었잖아' 라는 생각이 결국 이 책을 읽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작가의 말'에서 밝힌 "모두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워들은 이야기"가 어떠한 방식으로 조합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이야기들은 작가에 의해 뭉치고 쪼개지면서 흥미있는 한 편의 완결된 스토리로 재편된듯 하다. 


벤츠, 다이아몬드, 지독한 사랑, 말, 고양이, 여배우, 호랑이, 에필로그. 사물과 사람, 동물에 대한 명사로 구성된 목차는 전체적으로 보면 서로 어울리지 않을 법한 대상들을 열거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들은 일련의 사건 속에서 우연적 요소를 발생시키는 중요한 매개체의 역할을 한다. 이 중 벤츠나 다이아몬드, 말과 호랑이는 모두 재력이나 권력에 대한 상징 또는 그것들을 얻기 위해 반드시 가져야 할 대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양 사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제대로 돈이 되는 일엔 언제나 좋은 냄새가 났다. 고급 오데 코롱처럼 가볍고 상쾌한 냄새! 지금이 바로 그랬다." (68쪽)


천명관 소설의 주된 특징은 변사의 말을 듣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유려하게 쏟아져 나오는 내러티브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소설에서도 작가는 특유의 내러티브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데, 읽은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책장은 이미 절반을 훌쩍 넘어가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이 감지되었다. 그것은 코미디 조폭영화 수준의 재미만을 유지한 채 이 이야기가 덜컥 끝나버리는 것은 아닌지라는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이 불안감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졌다. 

천명관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각 인물들의 의도가 전혀 다른 사건을 일으키고 또 다른 결말을 맺는 우연적 재미에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우연은 단지 웃음만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대한 풍자와 해학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정상적으로는 주류가 될 수 없는 이들이 냉혹하고 살벌한 이 세상을 어설프게 살아가면서 자기 안의 순진함을 간직한 채 인생의 거대한 굴곡을 넘어가는 여정 속에서 독자들은 안타까움과 다행스러움을 반복하여 느끼며 이야기 속에 몰입한다. <고래>의 금복과 춘희가, <나의 삼촌 부르스 리>의 도운이 그랬다. 그런데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의 양사장과 울트라에 대해서도 내가 이전과 같은 감정이나 연민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번 책에서는 '무엇인가'가 빠져있는 것 같았다. 


천명관 작가에 대한 기대를 가진 독자라면, 이 책에서 B급 조폭영화가 주는 (과장과 욕설로 점철된) 재미 이상의 무언가를 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남자의 세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조폭들을 둘러싼 조잡하고, 치사하고, 가식적이면서, 허세에 찌든 풍경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과거의 미숙함을 포장하여 평범한 삶에 대한 지루함을 달래는...


"그동안 참한 마누라도 얻었고 연수동에 제법 유명한 고깃집도 가지고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기분이 우울했다. 한 마디로 사는 재미가 사라진 것이다. 그즈음 그가 관심을 돌린 건 좋은 차와 멋진 슈트였다. 값비싼 이태리제 양복으로 잘 차려입고 나서면 잠시 기분이 근사해지곤 했다. 그래도 가끔은 경마장에서 마권 다발을 들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시절이 그리웠다. 남자의 인생이란 대개 그런 거였다." (126쪽)


부(富)와 권력을 추구하는 비루한 수컷들의 세력 다툼 속에서 변변찮은 직업도 없고 미래에 대한 이렇다할 비전도 없는 새내기 조폭 울트라가 작가의 기존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사회적 지위를 잇는 소외되고 비루한 부적응자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주먹, 뒷골목, 돈, 포르노라는 것들에서 아직도 '남성성'을 찾고 있는 소설 속 현실에서 그가 말을 탄 아가씨와의 숲속을 산책한다는 꿈을 이룬다는 결론이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 단순한 현실의 도피인지, 우연찮게 굴러온 행운인지, 아니면 벤츠같이 값비싼 종마(種馬)와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남자의 뻔한 판타지일 뿐인지.

양 사장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견디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그를 위협하는 건 이제 라이벌 조직이 아니었다. 검찰도 아니었고 호시탐탐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믿을 수 없는 부하들도 아니었다. 그의 가장 큰 적은 어둠 속에 널려 있는 무의미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피로처럼 쌓여가는 무기력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그 불안은 육체와 일체가 된 듯 익숙해진 외로움과 한데 뒤섞여 온몸 구석구석까지 뻗어나갔다. 손 회장도 죽고 엄 사장도 죽었다. 장다리는 실종되어 생사도 알 수 없었고 연희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양 사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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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11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거를 화려하게 지냈어도 미래가 불투명하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생기고, 현재의 상황이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우리의 소원은 전쟁
장강명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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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리 구매욕이 당기지 않는 파격적인 제목과 투박한 표지,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얼마 전에 읽은 에세이가 매우 마음에 든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강명이라는 이름 하나만 믿고 읽은 책이다. 나보다 앞서 이 책을 읽고는 '이번 책은 꽤 괜찮다'고 평했던 지인의 추천도 한 몫을 했다. 책을 집자 묵직함이 손으로 전달되었다. 그 묵직함을 이겨내며 한장 한장 넘기기 시작한 이 책을 다 읽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주 잘 짜여진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서사와 묘사가 눈 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장을 읽은 후에도 한동안 잔상이 남을 정도였다. 

 

소설의 구성은 3부로 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그의 에세이 <5년 만에 신혼여행>처럼 독특한 조합의 제목을 짓지는 않고, 1부, 2부, 3부로만 표기하고 있다. <우리의 소원은 전쟁>이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에는 남한과 북한의 정권이 지속적인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실상은 통일이 아닌 전쟁을 바라며,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통일을 내부적으로는 어떻게 방해하는지를 그리는 것이라고 추측을 했었지만, 책의 프롤로그를 읽는 중에 그 추측은 빚나가고 말았다.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남북의 통일을 가정하며 김씨 왕조가 붕괴된 이후의 북한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통일과도정부, 유엔 평화유지군, 엄청난 양의 마약을 수출하는 나라, 마약 카르텔이 부패한 정치인들과 결탁한 나라, 아귀와 수라들의 축생도 등으로 묘사한다. 북한의 이 혼란스러운 상황은 일제강점기의 종지부를 찍은 후 우리나라의 모습과도 매우 유사하게 그려진다.

 

"정말 어이가 없었던 것은, 집단농장 간부는 이름을 바꾼 국가 소유의 농장 간부가 됐고, 국가안전보위부의 지도원들 역시 이름을 바꾼 새 공안조직의 직원으로 계속 일한다는 현실이었다. '김씨 왕조에 조금이라도 충성했던 사람을 다 잘라낸다면 새 정부에서 일할 사람이 누구겠느냐, 그 포악했던 시절에 김씨 왕조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다 수용소로 끌려가 죽지 않았느냐'고 사람들은 말했다. '7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억울한 일이 한두 가지였나, 집집마다 원통한 사연 하나쯤은 있지 않은가, 그걸 다 들춰내면 새 출발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라고도 말했다. (210, 211쪽)

 

남북의 개방에 대해서는 여전히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는 남한 정부의 태도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지만, 갑작스러운 통일은 모두에게 재앙"이라는 말로 정리한다. 통일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로 통할 수 없는 상황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 사람들은 '남조선에 가는 게 김씨 왕조 시절보다 더 어려워졌다'고 푸념했다. 뗏목을 타고 넘어오거나, 제3국을 경유해 한국에 들어오는 루트 같은 것은 사라졌다. 그렇게 들어온들 곧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추방될 뿐이다. 민준은 남한의 해안 경비 예산이 김씨 왕조가 건재했던 시절보다 줄기는 커녕, 오히려 다섯 배 가까이 증가했다는 뉴스 보도를 본 적도 있었다." (98쪽)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세 명이 주연을 캐스팅하여 각자가 속한 북한의 상황을 그려나간다. 자신이 속했던 신천복수대라는 특수부대가 와해된 이유를 밝히는 것밖에는 자신의 본질을 찾을 수 없는 장리철, 절친한 지인들의 가족이 실종 사망한 이유를 밝히는데 도움을 주려는 은명화, 통일로 인해 군에 재입대한 불운을 탄식하며 군생활을 무탈하고 유연하게 넘기려는 강민준. 이들이 처한 상황과 목적은 각각 상이했지만, 인물의 관계와 사건의 흐름을 통하여 이들 목적은 모두 눈호랑이라고 명명된 대단위 마약운반계획으로 집중된다. 이 계획의 내용을 밝히고 저지하려는 각각의 노력이 이리저리 연결되기 시작하면서 소설은 그 재미를 더해가기 시작한다. 잠시 눈을 돌릴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는 전개와 개성 넘치는 인물의 등장, 상황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글을 읽는 동안 온전히 거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한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우리의 소원은 전쟁>이라는 제목과 소설의 내용 사이의 괴리감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우리'는 누구이며, 그 '소원'이 '전쟁'이라는 것의 단서를 찾기가 어려웠다. 소설의 내용에는 남한이나 북한측 어디에서도 전쟁을 원한다는 구체적인 의도나 사건이 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민준의 말을 통해 '이렇게 통일이 될 것이라면 전쟁을 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는 후회만이 드러날 뿐이다. 물론 전쟁으로 모든 것을 불살라버린 후 북한을 새롭게 재건한다는 가정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때 우리가 겪었던 시행착오 없이 통일 정부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아, 개소리하지 말라고 하십쇼. 요즘 남한 젊은이들은 '이러느니 차라리 북한과 전쟁을 벌였어야 했다'는 이야기들을 공공연히 합니다. 인터넷 게시판 같은 데서 '전쟁터에서는 앞에 있는 적만 살피면 되는데, 평화유지군에 가면 사방에 숨은 적을 신경 써야 한다'고 불평합니다. 전쟁을 했더라면 섬멸전이 벌어졌을 거 아닙니까. 그렇게 북한을 완전히 불 지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나았을 것 같지 않습니까? 무력통일을 하든, 아니면 남한 입맛에 맞는 괴뢰정부를 세우든, 지금보다 나쁘지는 않았을 거에요. 통일과도정부 같은 괴상한 정부도 없고, 부패한 관료도 없고, 마약조직도 다 소탕할 수 있었을 거에요." (332쪽)

 

멍하게 앉아서 책의 내용을 반추하다가 들었던 질문이 있다: 우리에게 통일은 반드시 해야 하지만 풀리지 않은 숙제일까, 아니면 풀고 싶지 않아 그때마다 미루어 두고 있는 어려운 문제일까. 통일에 대한 이런 강박적인 질문에 작가는 미셸 롱이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이렇게 대답한다.

 

"한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꼭 통일을 해야 한다고 강박관념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말레이시아는 화교가 많은 싱가포르를 억지로 분리시켰죠. 1965년에 싱가포르 주를 말리이시아 연방에서 쫓아냈어요. 싱가포르는 원치 않은 독립이었고, 분리 당시에도 심지어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보다 더 잘사는 나라였지만, 그렇게 갈라선 결과는 말레이시아에도 싱가포르에도 좋았어요. 한 나라로 있었다면 인구의 대부분인 말레이계가 싱가포르 화교 자본에 종속된 채 중산층이 되지 못한채 살았어야 했을 거에요. 말레이계와 화교 사이 갈등도 지금보다 훨씬 더 심했을 거거요. 두 나라로 떨어뜨려놓고 나니 싱가포르는 싱가포르대로 똘똘 뭉쳐서 선진국이 되었고, 말레이시아도 싱가포르 없이 자기 힘으로 선진국 문턱까지 왔어요." (333쪽)


개인적으로 남북한의 물리적 통일은 가능할지 몰라도 내적인 합일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계속 의문스러웠다. 그렇기에 지금까지의 제안 중 '연방제통일안'이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했었다. 서로가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남한과 북한이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그것을 인정받으면서 전쟁의 위협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도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와 같은 공존이 가능할까? 우리가 소원으로 전쟁을 바라지만 않는다면? 작가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참고한 자료의 10분의 1도 읽거나 생각해보지 않은 나로써는 답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꾸준히 생각해보아야 하겠다. 어느새 우리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강박이 되어버린 통일이라는 소원은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를.

그는 미친 나라에서 태어났다. 미친 나라에서 살아남으려면 항상 주변의 모든 사람을 의심하고, 언제라도 주변의 모든 사람을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가끔 그런 경쟁과 전투에는 아무런 한계가 없어 보였다. 극한상황에 이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옳고 그름에 대해 생각하기를 포기한다. 한번 그렇게 황폐해진 내면에 어떤 덕성이 다시 깃들기란 매우 어렵다.
어린 리철에게 가치 기준을 제공하고 그를 도덕적으로 재무장시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군대였다. 비록 그 가치와 도덕이 군대만의 질서, 군대만의 논리와 섞여 있기는 했지만. 리철은 규칙과 명령을 따랐고, 복종 속에서 편안해졌다. 그는 무리에 속해 있는 한 마리 개와 같았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 짖고, 뛰어 다녔다. - 79쪽

선을 넘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적절한 지점까지만 선을 넘는 게 어렵다. - 352쪽

민족이라든가 통일이라는 개념은 어떨까. 북한 주민을 향해 책임감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는 유용하지 않을까. 이웃 사람이 굶거나 부당한 이유로 괴롭힘을 당할 때 내야 할 용기를 발휘하는 심리적 도구로써 말이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역사를 공유하면서 훨씬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이 바로 제 옆에 있는 못 사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은 창피한 일 아닌가. - 4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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