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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레드 에디션, 양장) -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 ㅣ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백영옥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빨강머리 앤'이라는 만화를 즐겨보지는 않았지만, 그런 내게도 몇몇 장면은 떠오른다. 항상 '글쎄다'라고 말하는 통통하고 등이 구부정한 매튜 아저씨의 마차를 타고 초록색 지붕 집으로 오면서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앤, 엄격한 마릴라 아주머니에게 혼줄이 나서 울먹이던 앤, 앤의 빨간 머리를 빗대어 '홍당무'라고 놀리던 길버트의 머리를 간이 칠판으로 내리치던 앤, 소매가 부푼 블라우스를 입고 싶다고 종종대던 앤, 다이애나와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던 앤... 제목만 떠올리더라도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이런 장면들에 나 스스로도 놀라며 책을 집어 들었다. 단순한 스토리를 짜집기한 책이었다면 휙 한번 훑어보고 그대로 내려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 페이지 남짓한 프롤로그를 읽은 후에는 빨강머리 앤의 장면과 작가의 삶의 관점을 한번 따라가며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목차는 크게 다섯 장으로 나누어진다. 각 장의 제목은 그 장에 속한 대표적인 에피소드의 제목이다. '우연을 기다리는 힘'은 앤이 마릴다의 집에 입양되면서 벌어지는 낯설고 어색한 몇 가지의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앤의 컴플렉스라고 할 수 있는 '빨강머리'에 대하여 컴플렉스를 없애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던 앤이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지금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라는 생각이라는 것. '고독을 좋아한다는 거짓말'에서는 앤이 유리에 비친 자신을 캐시 모리스라는 상상속의 인물로 설정하고 그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고 마릴라에게 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작가는 '고독을 좋아한다는 말은 이미 같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는 통찰을 제시한다. 이어지는 '슬픔 공부법', '더 잘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변한다' 또한 앤이 성장해가면서 익숙했던 에이본리를 떠나 퀸 학원이 있는 대도시로 가고, 그동안 경쟁관계로만 의식하고 있던 길버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고, 매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장면과 이에 대한 관조적 서술이 포함되어 있다.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실패하고 지쳐버린 자신의 인생에서 앤의 말을 되새긴 것이 끝내 좌절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앤의 말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스스로를 치유하면서, 앤의 말을 받아적던 작가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실망할 것도 없으니까."라는 린드 아주머니의 말에 반대하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한심한 일'이라고 했던 앤처럼 다시 한 번 실망하더라도 그동안 꿈꾸어 왔던 것을 다시 한번 기대해보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앤이 스스로 '고독'이라로 칭했던 자아의 내피를 비로소 벗고 자신의 삶을 직면한 것과 같은 작가 자신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기다리고 고대하는 일들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게 실제 우리의 하루다. 하지만 그럴 때 앤의 말을 꺼내보면 알게 되는 게 있다. 희망이란 말은 희망 속에 있지 않다는 걸. 희망은 절망 속에서 피는 꽃이라는 걸. 그 꽃에 이름이 있다면, 그 이름은 아마 ‘그럼에도 불구하고‘일 거라고. - 22쪽
시간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건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똑같은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게 하는 힘 아닐까. 시간은 느리지만 결국 잎을 키우고, 꽃을 피우고, 나무를 자라게 한다. 나는 그것이 시간이 하는 일이라 믿는다.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강퍅한 마음을 조금씩 너그럽고 상냥하게 키운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거울을 보며 어느 날 당신도 이렇게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아! 정말 좋다! 까지는 아니어도,
그럭저럭, 이 정도도, 나쁘지 않아... - 27, 28쪽
야망에는 결코 끝이 없는 것 같아. 바로 그게 야망의 제일 좋은 점이지. 하나의 목표를 이루자마자 또 다른 목표가 더 높은 곳에서 반짝이고 있잖아. 야망은 가질 값어치가 있지만 손에 넣는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야. 자기부정, 불안, 실망이라는 그 나름대로의 장애물을 거쳐 싸워 나가야 하는 것이니까. - 52쪽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보다 중요한 건 ‘꿈을 이루기 위해 내가 오늘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일‘이다. 세상을 천천히 응시하는 일은 나의 마음을 꼼꼼히 읽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정말로 ‘나의 야망‘인가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몰려 쫓기듯 하고 있는 일을 자기 의욕적으로 착각하고 나를 소진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는 일이다. -55,56쪽
삶을 야구에 비유하자면, 나는 이제 홈런을 치겠다는 야망보다는 출루율을 높이기 위해 연습을 거르지 않는 선수가 되고 싶다. 살면서 중요한 건 어쩌면 타율이 아니라 출루율일지도 모른다. 살다보면 좋은 볼을 보고 ‘안타‘를 욕심내기보다, 먼저 출루해 나간 사람을 위해 ‘번트‘를 쳐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안타‘ 찬스에 ‘번트‘를 칠 수 있는 선수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더 큰 세계를 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는 사람은 종종 다른 사람이 내리지 못하는 판단을 하기도 한다. 야망의 기준이 ‘나‘에게서 ‘우리‘로 확장되는 것이다. - 56쪽
이제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멸의 역작을 쓰길 바라기보다, 차라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매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매일 쓰고, 매일 읽는 사람이게 해달라고 말이다. 타르코프스키가 그의 영화 <희생>에서 말한 것도 그런 것이다. 화장실 변기 안에 물 한 컵을 붓는 사소한 행위조차 매일 하는 것에는 신성함이 깃든다. - 60쪽
삶은 내가 원하던 것과 늘 다른 식의 선택을 요구했다. - 96쪽
우리가 사랑이란 명사에 ‘빠졌다‘는 조금 특별한 동사를 쓰는 것은 사랑이 ‘젖어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나와 만나, 크나큰 낙차를 경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에 풍덩~ 빠지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쿨‘하고 ‘드라이‘한 사랑 같은 건 이제 잘 믿지 않게 됐는데, 그건 물기가 없는 곳에선 어떤 생명도 자라지 않는 이치와 같다. 생명이라곤 자라지 않을 것 같은 사막에 선인장이 존재하는 건, 어딘가에 있을 오아시스 때문이다. 진짜 사랑은 사람을 성장하게 한다. - 113쪽
무엇을 원한다는 건 그것에 따른 고통도 함께 원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 171쪽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자아 중심적인 강박이 나를 망치기도 한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현재를 망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가 ‘해야‘ 하는 일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좋아하려는 노력 그 자체가 아닐까. - 181, 184쪽
나는 직업을 꿈과 연결시켜 내가 하고 싶은 일, 가슴 뛰는 일을 하지 않으면 마치 실패자인 것처럼 좌절하게 만드는 요즘 세태를 생각했다. 그리고 직업이란 ‘내‘가 아니라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합당한 대가를 받는 일이란 생각에 이르자, 사람들이 느끼는 ‘자아실현‘과 ‘직업‘ 사이의 괴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 184쪽
누군가에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어준다는 건, 그 사람의 불안을 막아주겠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결핍을 누군가가 끝내 알아보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 결핍 안에서 공기가 되어 서로를 옥죄지 않고, 숨 쉬게 해야 한다. 그 사람이 옆에 없기 때문에 불편하고 불안해지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위성처럼 내 주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힘이 되고 따뜻해지는 사랑. 이것이야말로 떠날 필요가 없는 관계이다. - 218쪽
앞일을 생각하는 건 즐거운 일이에요. 이루어질 수 없을지는 몰라도 미리 생각해보는 건 자유거든요.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실망도 하지 않으니 다행이지.‘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 3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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