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천명관 지음 / 예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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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이야기꾼이라 일컬어지는 천명관의 신작을 보고 무척이나 반가웠지만 제목과 표지가 어쩐지 가벼워 보여 몇 번을 주저했다. '그렇게 따지면, <나의 삼촌 부르스 리>는 가벼워 보이지 않았었나', '그런데 그 책도 재미있게 읽었잖아' 라는 생각이 결국 이 책을 읽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작가의 말'에서 밝힌 "모두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워들은 이야기"가 어떠한 방식으로 조합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이야기들은 작가에 의해 뭉치고 쪼개지면서 흥미있는 한 편의 완결된 스토리로 재편된듯 하다. 


벤츠, 다이아몬드, 지독한 사랑, 말, 고양이, 여배우, 호랑이, 에필로그. 사물과 사람, 동물에 대한 명사로 구성된 목차는 전체적으로 보면 서로 어울리지 않을 법한 대상들을 열거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들은 일련의 사건 속에서 우연적 요소를 발생시키는 중요한 매개체의 역할을 한다. 이 중 벤츠나 다이아몬드, 말과 호랑이는 모두 재력이나 권력에 대한 상징 또는 그것들을 얻기 위해 반드시 가져야 할 대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양 사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제대로 돈이 되는 일엔 언제나 좋은 냄새가 났다. 고급 오데 코롱처럼 가볍고 상쾌한 냄새! 지금이 바로 그랬다." (68쪽)


천명관 소설의 주된 특징은 변사의 말을 듣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유려하게 쏟아져 나오는 내러티브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소설에서도 작가는 특유의 내러티브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데, 읽은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책장은 이미 절반을 훌쩍 넘어가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이 감지되었다. 그것은 코미디 조폭영화 수준의 재미만을 유지한 채 이 이야기가 덜컥 끝나버리는 것은 아닌지라는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이 불안감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졌다. 

천명관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각 인물들의 의도가 전혀 다른 사건을 일으키고 또 다른 결말을 맺는 우연적 재미에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우연은 단지 웃음만을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대한 풍자와 해학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정상적으로는 주류가 될 수 없는 이들이 냉혹하고 살벌한 이 세상을 어설프게 살아가면서 자기 안의 순진함을 간직한 채 인생의 거대한 굴곡을 넘어가는 여정 속에서 독자들은 안타까움과 다행스러움을 반복하여 느끼며 이야기 속에 몰입한다. <고래>의 금복과 춘희가, <나의 삼촌 부르스 리>의 도운이 그랬다. 그런데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의 양사장과 울트라에 대해서도 내가 이전과 같은 감정이나 연민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번 책에서는 '무엇인가'가 빠져있는 것 같았다. 


천명관 작가에 대한 기대를 가진 독자라면, 이 책에서 B급 조폭영화가 주는 (과장과 욕설로 점철된) 재미 이상의 무언가를 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남자의 세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조폭들을 둘러싼 조잡하고, 치사하고, 가식적이면서, 허세에 찌든 풍경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과거의 미숙함을 포장하여 평범한 삶에 대한 지루함을 달래는...


"그동안 참한 마누라도 얻었고 연수동에 제법 유명한 고깃집도 가지고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기분이 우울했다. 한 마디로 사는 재미가 사라진 것이다. 그즈음 그가 관심을 돌린 건 좋은 차와 멋진 슈트였다. 값비싼 이태리제 양복으로 잘 차려입고 나서면 잠시 기분이 근사해지곤 했다. 그래도 가끔은 경마장에서 마권 다발을 들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시절이 그리웠다. 남자의 인생이란 대개 그런 거였다." (126쪽)


부(富)와 권력을 추구하는 비루한 수컷들의 세력 다툼 속에서 변변찮은 직업도 없고 미래에 대한 이렇다할 비전도 없는 새내기 조폭 울트라가 작가의 기존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사회적 지위를 잇는 소외되고 비루한 부적응자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주먹, 뒷골목, 돈, 포르노라는 것들에서 아직도 '남성성'을 찾고 있는 소설 속 현실에서 그가 말을 탄 아가씨와의 숲속을 산책한다는 꿈을 이룬다는 결론이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 단순한 현실의 도피인지, 우연찮게 굴러온 행운인지, 아니면 벤츠같이 값비싼 종마(種馬)와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남자의 뻔한 판타지일 뿐인지.

양 사장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견디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그를 위협하는 건 이제 라이벌 조직이 아니었다. 검찰도 아니었고 호시탐탐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믿을 수 없는 부하들도 아니었다. 그의 가장 큰 적은 어둠 속에 널려 있는 무의미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피로처럼 쌓여가는 무기력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그 불안은 육체와 일체가 된 듯 익숙해진 외로움과 한데 뒤섞여 온몸 구석구석까지 뻗어나갔다. 손 회장도 죽고 엄 사장도 죽었다. 장다리는 실종되어 생사도 알 수 없었고 연희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양 사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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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11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거를 화려하게 지냈어도 미래가 불투명하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생기고, 현재의 상황이 지루하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