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 하트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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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 갑작스러운 사건, 커다란 좌절, 새로운 시작.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 구성에 대한 패턴은 그의 책을 몇 권쯤 읽어보았다면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이어서, 언제부터인가 후반부에 있을 법한 반전에 대한 큰 기대는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매번 그의 신작 소식을 접할 때마다 이번에는 어떤 소재로 일상의 소중함을, 또는 망가져버린 삶의 소생을 그렸을지를 궁금해하며 책을 구입하고 만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일상의 권태로움을 탈출하기 위하여 호주 다윈이라는 곳으로 여행을 한 주인공 닉 호손이 척박하고 낯선 환경에서 마치 과거의 어느 시점에 뚝 떨어진 것 같은 앤지라는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이다. 2부에서는 울라누프라는 오지에 앤지의 남편감으로 납치된 닉이 그곳에서 겪는 고난이 그려지고, 3부에서는 앤지의 언니 크리스탈과 울라누프를 탈출하게 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삶의 소소함과 무료함은 예상치 못한 큰 고난을 겪어야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닐 것임에도, 일상을 탈출하기 위한 여행에서 닉에게 닥친 국면은 당황스럽기 그지 없다. 작가는 닉의 일상을 아무런 즐거움이나 희망도 없이 한정된 사람들과 제한된 영역 내에서 단조로운 작업을 하며 매일을 맥주로 버텨갈 수밖에 없는 삶으로 전락시켜 그가 그토록 따분하게 여겼던 자신의 삶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으로 재인식시킨다. 


결론이 해피앤딩인지 아닌지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곳을 탈출했기 때문에 해피앤딩일 수 있는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으니 해피앤딩으로 볼 수는 없는지. 어쨌거나 이 모든 상황과 감정들이 이리저리 뒤섞인 중에도 삶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작가는 자기의 삶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욕망의 충족만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관점임을 강조하려는 것 같다. 우리가 여행을 하는 이유도 어찌보면 여행지의 낯설고 신기한 경험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결국 일상으로 돌아와 또 다시 힘을 내어 살아가기 위함일 수도 있으니. 



작고 사소한 행복이야말로 우리의 생에서 기대할 수 있는 진정한 축복일진대 왜 우린 평생 어렵게 행복을 찾아헤맬까? - 22쪽

쿠누누라는 사실 아무런 매력도 없는 마을이었다. 텅빈 원생대의 땅으로 멋모르고 뛰어든 나에게는 사람 사는 마을이 제공하는 안전이 절실히 필요했다. 눈을 돌릴 데가 많은 마을이 필ㅇ했다. 아무것도 없는 황야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니까. 그거야말로 오지에 도사려 있는 위험이었다. 오지의 공허는 자기 자신을 더욱 의심하게 만드니까.
원시적인 대자연 속에 있다 보면 사소한 근심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은 죄다 헛소리일 뿐이었다. 내 경우에는 오히려 두려움과 자기혐오가 증폭되었다.
대자연이 내게 말했다.
‘넌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 59, 60쪽

사람들은 힘든 노동에 더욱 큰 목적이 있는 척하며 삶을 견딘다. 노동이 그저 의식주를 해결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 아니라 더욱 큰 목적이 있는 척한다. 결국 우리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일할 뿐이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초라한지 마주하지 않기 위해 일할 뿐이다. 계속 바삐 일하다 보면 우리의 삶이 절망적으로 무가치하다는 사실과 우리 스스로 빠져든 막다른 길의 깊은 수렁을 들여다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 204, 205쪽

나는 시간낭비를 즐겼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야망, 가족, 애정관계 따위를 인생의 동력으로 삼았지만 나는 달리 살고 싶었다. 내 동년배들은 인생의 안정을 가져다줄 성공의 터전을 구축하길 원했지만 나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늘 흐리컹덩하게 살며 직장에서 주어진 일을 하고, 적게 벌어 적게 쓰고, 맥주를 마시고, 오다가다 만난 여자들과 섹스를 하는 정도로 만족했다. 성공에 대한 관심이 없이 시간이 마냥 흘러가도록 방치했다. - 284, 285쪽

이제 예전생활보다 더욱 의미 없는 일상에 갇힌 나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며 헤아릴 수 없는 가치가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대디가 밴을 망가뜨렸을 때 내가 왜 무기력증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 이유도 깨달았다. 내가 마침내 소중한 시간을 들여 구축한 일이었기 때문이며, 혼신을 다해 일했던 성과가 눈앞에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 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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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미래,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오는가 - "5년 뒤 당신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선대인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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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치가 커서인지 매번 읽을 때마다 매번 실망을 함에도 불구하고, 선대인의 책은 꼭 사보게 된다. <선대인의 빅픽처>를 읽고 실망한지 몇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또 책을 사고 말았다. '일의 미래'라는 제목이 호기심을 자극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해보지만, 이번에도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꽤 크다.


이 책은 크게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일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동시에 고려해야 할 4가지 요소로 저성장 시대, 인구 마이너스, 기술 빅뱅, 로봇화와 인공지능이라는 흐름을 강조한다. 2부에서는 어떤 일이 전망이 있을지를 기업, 개인, 사회의 관점에서 각각 예측한다. 최근 화두라 할 수 있는 4차산업혁명의 유행과 맥을 같이 하며, 이 책은 경제학의 관점에서 다가올 미래, 그리고 미래의 변화에 대한 예측을 담고 있다. 


자신의 주장에 대해 충분한 근거와 통계자료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이 억지스럽거나 틀린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반대로 특별히 새로운 부분도 보이지 않는다. 한계기업의 증가라는 문제점, 한국형 패스트 팔로워 전략의 한계, 세계적인 보호무역의 강화, 인구절벽과 소비절벽의 연결, 가구형태의 변화와 그에 따른 기업의 변화, 기술발전에 따른 제조업과 같은 일자리의 수명 단축. 어찌보면 이미 추측해볼 수 있는 것에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정도라고나 할까. 


그의 분석에 따르면, 중국을 겨냥한 화장품 산업, 1인가구를 겨냥한 편의점이나 온라인 쇼핑, 고령화에 따른 바이오, 제약, 건강식품, 전기자동차와 그 인프라, 전기차 배터리, 사물인터넷과 3D프린팅, 산업용 로봇 등이 앞으로 부상할 미래형 일자리라고 한다. 그런데 이 목록들에는 일반 독자로서도 전혀 예측하지 못하거나 달리할 부분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내 입장에서는 굳이 시간을 들여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를 한다고 저자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막연한 예측에 확신을 가진 것만으로도 경우에 따라서는 큰 소득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2부에는 뭔가 내가 생각할 수 없는 전망이 담겨 있으리라는 기대를 했다. 그러나 그가 후반부에 개인에게 하는 조언들, 예를 들면 "직장이 아닌 직업을 찾아라", "창업 DNA를 가져라", "여러 번의 생애전환기에 대비하라", 창의적 작업 영역, 사회적 상호작용 영역, 신체적 능숙성 영역에서 "오로지 '나'이기에 가능한 능력을 키워라", "자산구조와 소득구조를 바꾸고, 금융지능을 키우라" 같은 조언들은 자기계발서의 내용을 각색한 느낌마저 든다. (아니,, 이러한 주장들은 누구라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진리인지도 모르겠다.)


저자에게 경제학적 분석을 할 수 있는 점쟁이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신문이나 뉴스에서 접하는 이야기들이 아닌 뭔가 색 다르고 특별한 제안을 기대한 독자의 입장에서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기술적인 문제나 자율주행차의 가격, 사용자 수용성 문제보다는 사회적, 법적, 윤리적인 문제들이 해결해야 할 더 큰 숙제다. 예를 들어 어느 쪽으로 가도 사고를 피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에서 어떤 피해를 선택하도록 설계할 것인가. 또 그에 따른 윤리적, 법적 책임을 누구에게 어떻게 물을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마련돼야 한다. 자율주행차가 원래 달리던 길로 가면 어른 네 명을 치게 되고, 이를 피하기 위해 다른 길로 가면 아이 한 명을 치게 된다고 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하게 할 것인가. 또는 좁은 길에서 갑자기 넘어진 어린 아이를 피하기 위해 가던 방향을 바꾸면 탑승자가 다치거나 죽게 될 때 자율주행차가 어떤 선택을 하게 할 것인가. 이처럼 자율주행차의 선택을 프로그래밍하는 과정은 딜레마의 연속이다. 또한 특정한 선택을 내리도록 프로그래밍한 뒤 실제로 사고가 났을 때 그 책임을 제조사에게 물을지, 탑승자에게 물을지도 고민거리다. - 104쪽

2020년까지 71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200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날 것으로 보았다. 즉, 총 51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진다고 예측한 것이다. 여기에서 얻은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관리직과 단순 화이트칼라 사무직은 사라질 위험이 큰 반면 컴퓨터나 수학 등과 관련 있는 직업은 대체되기 어려울 것이다. 둘째, 이런 일자리 변화는 심각한 노동시장의 불균형을 가져올 것인데, 새로운 일자리에 적합한 새로운 기술을 갖추도록(reskilling)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일자리는 줄어드는 반면 세계 인구는 증가해 실업률 또한 더욱 높아질 것이므로, 일자리 변화에 맞춰 적절한 기술을 갖추지 못하면 2019년에는 일할 기회를 찾지 못하는 노동자가 많아질 것이다. 또한 인구 증가 및 여성의 경제활동 등 사회적 요인에 따라서도 일자리 수요가 변화하기 때문에 이러한 흐름들도 눈여겨봐야 한다. - 138, 139쪽

미래의 파괴적인 변화는 일자리의 수(Quantities)뿐만 아니라 일자리의 질(Qualities)과 그에 따라 요구되는 기술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러한 기술의 요구는 에너지, 금융서비스, 헬스케어, ICT 등의 분야에서는 늘어날 것으로 기대되고, 사회기반시설, 소비자, 미디어 등의 분야에서는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기술이 요구되는 직업의 대부분은 컴퓨터, IT, 엔지니어링 등 수학적 지식이 필요한 분야인데 이러한 분야에 일하는 노동자 중에는 남자가 많기 때문에 여성의 고용이 상대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 139쪽

기업은 아니지만 도시 중에 샌프란시스코와 디트로이트의 대비되는 사례를 예로 들어 생각해볼 수도 있다. 디트로이트는 1950년대부터 세계 자동차 산업의 메카로 불리며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미국 자동차 메이커들의 본고장이자 미국 최고의 부자 도시 중 하나였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석유파동과 일본 자동차 업계의 거센 도전, 안이한 경영진과 과도한 요구조건을 내건 노동조합의 대립 등이 겹치며 쇠락의 길을 걸었다. 결국 2013년에 180억 달러의 부채를 안고 파산하고 말았다.
반면 샌프란시스코와 인근 지역들은 초기의 수산 및 해운물류 산업에서 벗어나 전문 서비스와 금융 산업을 키웠고, 이후에는 첨단기술 기업들의 모태가 된 실리콘밸리를 형성해 나갔다. 이런 식으로 도시의 자원과 역량이 남아 있을 때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혁신에 나서 계속 번창하는 도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 176쪽

가진 자원이 많은 강자는 기본적으로 동질화 전략과 물량전, 전면전을 펼칠 수 있다. 기업 사례로 질레트의 면도기를 들 수 있다. 면도기 시장에 일회용 제품들이 등장해 시장을 조금씩 늘려가자 질레트는 자신들도 일회용 면도기를 더 싸게 시장에 내놓았다. 같은 제품을 내놓는 동질화 전략을 써서 일회용 면도기 업체들이 성장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봉쇄할 수 있었다. 이는 기존 면도기 시장의 강자였던 질레트가 많은 자금력과 생산설비를 바탕으로 물량전을 펼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방법이다. 이는 기업의 세계뿐 아니라 정치,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도 똑같이 쓸 수 있는 방법이다.
만면 약자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틈새시장을 공략해 차별화하는 것이다. 이는 자원이 많지 않은 약자가 제한된 자원을 가장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을 선택해 화력을 집중하는 전략이다. 당연히 강자들처럼 전면전을 펼칠 수 없고, 국지전으로 갈 수밖에 없다. - 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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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한걸 2017-07-22 18: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후반부는 내공이 딸린다는 느낌입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이민경 지음 / 봄알람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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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있는 '언어'를 '소통'쯤의 추상적 개념이라고 여기고 책을 폈는데 그게 아니었다. 여기에서 말한 언어라는 것은 정말 실질적인 의미의 언어, 말투, 대화 방식 또는 스킬을 의미했다. '우리에겐 소통이 필요하다'와 같이 나이브하게 제목을 읽어내려 했던 내가 틀렸다. 어설프게도 나는 처음에 이 주제를 화합의 필요성 정도로 접근하려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무척이나 한가한 소리였다. 이 책 곳곳에는 여성혐오와 차별에 대한 매우 절박한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누군가가 ‘좋게 넘어가자’며 분노하는 이들을 온화하게 타이를 수 있는 것은 그가 분노할 필요가 없는 기득권이기 때문일 뿐"이라고 지적한 바와 같이 나역시 기득권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여실히 깨달으면서 책장을 넘겼다.


"당신에게는 대답할 의무가 없다", "마음부터 단단히 여며야 한다", "내 입장부터 정확히 해야 한다", "상대방의 입장을 명확히 알자", "단호함은 필요하다"와 같은 목차를 따라가보면, 저자가 여성들에게 어떠한 마음가짐 혹은 대화의 전략을 주문하는지를 알 수 있다. 즉 페미니즘이나 여성혐오에 관한 대화가 내키지 않을 경우 굳이 대화를 시도하거나 설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친절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페미니즘이 뭐야?"라는 준비 안된 무지한 질문 앞에서 적절한 대답을 떠먹여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이 책을 쓰게 된 큰 계기가 되었다고 밝힌 저자는 차별의 존재를 이해를 해야 하는 남성쪽에게 오히려 여성들이 공들여 설명해야 한다는 부당함을, 남성들이 그동안 자신이 부족했다는 점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으로 삼아야 하는 현 상황을 답답하게 여겼던 것 같다. 그리고 현 상황을 설명하기에 지치고 괴로운 이들에게 새로운 대화의 전략을 제공하기 위한 메뉴얼의 하나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다만, 메뉴얼치고는 그리 친절한 편이 아니다. 저자 스스로도 "독자를 확보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밝히고 있는데, 그럼에도 2016 올해의 좋은 책으로 선정이 된 것을 보면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 책에 (찬성이든 반대든) 많은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저자는 여성 혹은 페미니즘에 긍정적인 이들을 독자로 여기고, 전반부는 여성혐오에 대한 입장과 태도와 언어를 정립할 필요성에 대해, 후반부는 실질적인 대화의 스킬 또는 대응 방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성혐오와 남성혐오의 이슈에 대해 대화의 방향을 잃고 있는 이들에게는 반문하기, 인정하게 하기, 지적하기, 가로채기, 확답받기, 결정하게 하기, 선 긋기, 선공하기 등의 대응법은 우선 대화나 말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확신있는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한 괜찮은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나 스스로는 이런 대응법에 대해 별다른 감흥을 받지는 못하였다. 단순히 내가 남성이고, 여성혐오에 대해 무감각해서라기 보다는, 논리적이고 분명하며 공격적인 대화방식이 누군가를 설득시키는 것에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음을 지난 수 년간 경험했기 때문이다(물론 이런 대응법이 '설득'이 목적이 아니며, 내가 설득시킬 대상도 아니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이 책에 드러난 편향성이나 공격성 등을 지적하고 싶지는 않다. 나 역시 편향적이기에. 마찬가지로 어설픈 화합이나 평화의 추구를 주장하고 싶지도 않다. 느끼는 사람은 느끼는 대로 표현할 뿐이고, '왜 그런 느낌을 받느냐'는 무례한 질문에는 어느 누구라도 지쳐가기 마련일 것이기에. 어쩌면 내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갈급함이 이 책을 탄생시켰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에서 제안하는 대로 남성들의 고정관념, 차별성, 무지, 무관심, 팽배해 있는 관성을 하나 둘씩 깨뜨림으로써 이미 기울어져 버린 축을 조정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또 나대로의 '언어'를 찾아봐야겠다.

생각해보면 ‘이해를 시키려 노력한다’는 말, 묘하게 모순입니다. 이해란, 원래 시키는 게 아니라 하는 겁니다. 대화를 마치고 ‘이해시키느라 힘들었다’는 소리가 나온다면, 상대가 해야 할 이해를 도와주는 노력을 했는데 그게 힘에 부쳤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럼 힘을 키우면 될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계속 말하겠으나 당신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잠깐, 이해가 누구의 몫이어야 하는지 짚어둡시다. ‘이해’가 성립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누가 하고 있는지도 봅시다. - 21, 22쪽

그때 남성은 ‘내가 보기엔 아닌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동시에 가장 의미가 없습니다.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아래라 생겨나는 불평등이라는 주제에서, 남성이라는 성별을 가진 채로는 영영 당사자가 될 수 없으니까요. 본인이 직접 느낄 수 없으니, 일부러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혼자서는 볼 수 없습니다. 당신은 볼 수밖에 없는 문제를 자신은 볼 수 없다고 자기 입으로 밝혔음에도, 공신력을 얻는 쪽은 상대입니다. 내 경험의 정당성마저 남성이 결정하는 겁니다.
차별은 수치나 공신력 있는 근거로 입증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수치로도 명백히 입증되고 있으나, 당사자가 직접 느낀 고통이 먼저이며 그게 더 중요합니다. 그게 쌓여 수치가 되고 기록이 되는 거니까요. 아까 말한 직관이라는 게, 바로 이 고통이 쌓여 얻게 된 결과물입니다. - 27쪽

평등이란 하나밖에 없고, 불평등은 그 나머지를 전부 포괄합니다. 상대의 태도가 얼마나 바람직한지 아닌지는 당신이 어떻게 대응할지를 결정하게 할 뿐입니다. 태도에 따라 틀린 말이 맞는 말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의 질문만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완전히 평등한가?

아니라면 여전히 불평등한 상태고, 평등까지 더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본인이 무슨 노력을 했느냐 여부에 관계없이 말할 수 있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래도 이제 많이 평등해지지 않았냐고요? 맞습니다. 꾸준히 평등에 가까워졌습니다. 제법 평등해졌고, 많이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평등하다’는 말은 차별이 사라졌을 때에만 쓸 수 있습니다. - 38, 39쪽

많은 혼란이 여기에서 옵니다. 차별이 아직 존재하지만 점차 나아지고 있으므로 ‘차별이 이제 없다고 봐야 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차별은 있거나 없는데, 누군가가 숨 쉬듯 차별을 느낀다면 차별은 있는 겁니다. 지구 상에 성평등을 이룬 사회가 아무 데도 없는데 무슨 수로 우리 사회에 차별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차별을 없는 것으로 만들려 하는 말의 힘이 이렇게나 세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차별에 무지하며 평등에 도달하려면 한참 멀었는지 보여줍니다. - 41쪽

상대에게도 내가 겪은 차별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를 말할 자유는 있겠지만, 그 경중을 따지고 정당성을 판단하는 것은 아무리 민주주의라 한들 토론으로 결정할 게 아닙니다. 당신이 차별을 당하는 쪽으로 태어난 이상, 그게 존재하고 아니고를 말할 권리는 당신에게밖에 없으니까요. - 42, 43쪽

남성이 지금 사회에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건 의미가 좀 다릅니다. 열정페이를 받는 인턴이 이대로도 괜찮다고 말하는 건 자기위안이거나 더 불이익을 볼까 두렵거나 실제로 급여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겠지만, 고용주가 이대로 괜찮다고 말하는 건 자기 이익에 기반한 정당화니까요. 똑같이 기존의 차별적인 구조에 한 명 분의 힘을 싣고 있다고 해도, 덜 가진 상황을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이는 것과 더 가진 상황을 누리겠다는 말은 똑같을 수 없습니다. - 51쪽

누군가가 ‘좋게 넘어가자’며 분노하는 이들을 온화하게 타이를 수 있는 것은 그가 분노할 필요가 없는 기득권이기 때문일 뿐입니다. 기득권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기득권이 설파하는 아름다운 의도는 무의미하며,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분노할 수 있다는 것을 좀 깨닫고 예쁜 헛소리는 넣어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 82쪽

강남역에 모인 여성이 충분히 설득적인 어조를 취하지 않고, 남성에게 더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고, 온화하게 참고 이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전히 비난받습니다. 하지만 여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남성을 설득하고 포용해 이해로 나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견디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설득이 이루러진다면야 좋겠지만, 여성의 목소리가 기득권자인 남성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부터가 오만한 발상입니다. 여성의 목소리와 행동은 온전한 주체가 되고자 하는 몸부림이지, 다른 주체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86, 87쪽

남성혐오의 실질적인 힘은 아주 작아서 여성혐오의 뿌리에 스크래치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발휘하는 힘의 차이, 패러디와 원본의 차이가 무시된 채 ‘한남충’이라는 말이 등장하자마자 ‘남혐’이 기승을 부리는 것이 되고 곧바로 사회문제로 부각된 현 상황은, ‘김치녀’를 위시한 온갖 여성혐오 발언이 오랫동안 아무 문제없이 널리 존재해왔던 것을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노릇입니다.
남성혐오가 파장을 일으킨 건 남성이 겨우 여기에만 발끈해서가 아닙니까? 그걸 또 여자 탓으로, 심지어 여성혐오마저 ‘그렇게 남성혐오를 한’ 여성 탓으로 돌리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 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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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지음 / 동녘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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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페미니즘 관련 책을 펴볼 때마다 두렵다. 거기에 실린 글들은 이제 어느덧 게을러지고 보수적이 되어 버린 나를 사정없이 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나의 무지와 무감각을 일순간에 깨뜨려 버리기 때문이다. 남성인 내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이 원래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며, 그 이면에는 누군가에 대한 불평등이나 누군가의 불편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그만큼 나도 조심히 살피고 겸손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입장을 글과 말로라도 겪어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 서적을 읽고, 타인(비단 여성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내게는 꽤 힘들고 어려운 여정이다.


이 책은 총 4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는 '돌아보면', '무사하면', '들리면', '연결되면' 좋겠다는 제목과 함께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저자를 통해 록산 게이가 말한 '소문자 페미니즘'을 나도 경험하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뱉은 질문은 정말 ‘생각이 없어서’ 폭력이 된다.", "한 번도 타인의 삶을 상상해보지 않은 사람은 페미니즘에 가닿을 수 없다.", "나의 편리함은 누군가의 불편함을 수반한다.", "누군가의 ‘말’에 무게가 실리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무게가 실렸을 때이다." 삶이 묻어나 있는 그의 글은 하나의 아포리즘이 되어 내 머리속에 박혔다.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 나도 그들을 굳이 반대하지 않겠다.' 소수자들을 바라보았던 그간의 나의 시선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 정도쯤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나마 이 알량한 생각이 그들을 반대하고 혐오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구별지으며, 자기만족으로 버텨왔지만 이제는 자인해야 겠다. 내 생각은 '인정'이 아닌 '배제'였다는 것을. 어쩌면 나는 그 정도까지만 선을 그은 채, 내 기득권을 향유하며 애써 그들과 부딪치지 않은 채 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랬던 내게 저자는 말한다. "자신의 모르는 세계를 외면하는 게 얼마나 손쉬운 일인지..." 


계속 불편해진 끝에, 나도 언젠가는 편해지면 좋겠다. 그동안 내가 무지를 도구로 나를 지켰다면, 앞으로는 불편함을 도구로 나의 무지를 깨뜨리기를 바란다. (이미 '아재' 혹은 '꼰대'의 길어 들어섰지만) 이해하는 '척'의 수준을 넘어 이런 생각과 이런 말과 이런 행동들에 대한 불편한 반응을 줄어들기를 바란다. 타인의 삶에 대해 조금 더 마음을 열고 긍정할 수 있는 생각의 비율이라도 조금 더 늘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입으로 아는 척하지 않고, 어느 정도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로 보여질 수 있기를 바란다. 

아무 생각 없이 뱉은 질문은 정말 ‘생각이 없어서’ 폭력이 된다. 생각 없는 질문은 관심의 얼굴을 하고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 11쪽

보통의 존재라고 못 박기에 나와 너는 고유하다. "학교는? 직장은? 결혼은? 아이는?"과 같은 질문이 공허한 이유이다. 걷는 보폭, 젓가락질하는 손가락 모양, 리듬을 탈 때 끄덕이는 고개의 각도, 드러나지 못한 욕망... 재단할 수 없는 사람들 고유의 빛을 본다. - 33쪽

억압은 학교나 직장 같이 보이는 시스템에만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니라는 학교를 그만두고, 하라는 취업을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사회운동을 하고, 하라는 결혼을 거부한 것처럼 눈에 보이는 나름의 큼직한 반항들은 스스로가 관습과 통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믿음을 주었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어려웠던 해방은 가까운 관계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것은 종종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었고, 그래서 거부했을 때 죄책감을 주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통제한다는 말은 집착과 폭력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 46쪽

사랑의 다른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우리가 서로에게 친절한 타인으로 남을 수 없는 걸까. 각자의 삶을 존중하면서도 때로는 날 선 말로 서로의 굳은살을 해체하며 예민하게 성장할 수 있는 관계로. 여전히 나도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롤 통제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기 힘을 때가 많지만, 많은 부분 이 욕망이 상대를 위하는 게 아니라 내가 편해지기 위해서란 걸 떠올리며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아니라면 말을 줄이려고 노력한다. - 47쪽

누구도 한 사람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으며, 어떤 사람도 누군가의 구원이 되지는 못하니까. 상대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서 영향을 주는 것보다,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며 친절한 타인으로 남는 게 더 어렵다. 관계 맺음의 상상력 갖기. 존재 앞에서 겸손해지기. 그것이 관심이 아니라 침범이었다는 걸 인정하기. - 47쪽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수록 내 삶에 존재했던 수많은 모순이 드러났다. 일상으로 받아들이던 것들을 건드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엄마의 노동은 부엌의 고정된 풍경이었다. 아침·점심·저녁이 ‘뚝딱’ 나오는 거라 믿는 우리의 평범한 식사 시간처럼, 뼛속 깊이 새겨진 습관이기 때문에 모두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느끼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 64쪽

자신이 모르는 세계를 외면하는 게 얼마나 손쉬운 일인지, 복잡다단한 세계에서 ‘마땅한 도덕’과 ‘개인의 노력’을 들이미는 게 얼마나 폭력적인 일인지 지금쯤 그는 알게 되었을까. 사랑이 내 세계를 깨고 상대의 세계를 기꺼이 맞이하는 일이라면, 그 시절 그와 나는 사랑했다고 할 수 있을까. - 104, 105쪽

나는 내가 경험하고 겪은 부분에 한해서만 잘 느끼고 알 수 있을 뿐이고, 다른 상황은 분명 모를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내 입장에서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마땅히 그렇기 어려운 상황일 수 있다.
확신하려는 유혹 대신 불확실한 것을 받아들이기. 강단에 설 때, 마이크와 카메라 앞에서도 내가 모르는 걸 인정할 수 있는 용기 갖기. ‘알 것 같은 느낌’에 속지 않는 부지런함도 함께. - 123쪽

불법의 주체는 바로 여성의 몸이다. 함께 잠자리를 가진 남성의 몸은 불법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보호자라는 명목으로 남성의 동의가 있어야 수술을 할 수 있다. 어떤 남자들은 그런 법의 허점을 이용해서 낙태하려는 여자를 협박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를 위한다니! ‘강간을 예방하기 위해, 도덕적인 섹스를 위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생명을 위해’ 낙태는 불법이어야 한다. 나를 위해서라는 그 말들 속에 정작 나는 없다. - 156쪽

임신중절수술을 진료 목적 외의 마약을 처방하거나 환자에게 성폭력을 행한 것과 같은 의료 범죄와 등치시켜 ‘비도덕적 진료 행위’로 분류해 처벌하겠다는 정부를 보며, 누구를 위한 도덕인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자생력이 없고 아직 생명으로 볼지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존재를 고려하는 도덕은 이처럼 공공연하게 얘기되지만, 원치 않은 임신으로 신체적·사회적 단절과 위험을 끌어안아야 하는 여성을 위한 도덕은 없다. - 158쪽

한 번도 타인의 삶을 상상해보지 않은 사람은 페미니즘에 가닿을 수 없다. "페미니즘이 뭐야?"라고 손쉽게 질문하고 상대가 친절하게 대답하길 바라는 태도로는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가치에 조금도 닿을 수 없다. - 165쪽

"만약 한 여성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 미국의 시인이자 페미니스트인 뮤리엘 루카이저는 말했다. 한 여성의 시간과 몸의 서사에 세상 곳곳의 폭력과 차별이 배어 있고, 그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들을 불러낼 거라고. 아직 다 털어내지 못한 이야기를 입가에 머금고 있는 사람들의 망설임이 눈에 보인다. 나 역시 그렇다. 폴더에서 기다리는 글자 뭉치들. 언젠가 내가 이 폴더를 다 털어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 181쪽

나의 편리함은 누군가의 불편함을 수반한다. 나의 게으름은 누군가의 노동에 기대어 누리는 권력이다. 나는 오늘 얼마나 많은 노동에 기대어 편리함을 누렸을까. 얼마나 많은 차별 속에서 모른 척 편리함을 누렸을까. - 212쪽

리베카 솔닛은 우리가 명확한 언어를 구사하려는 것은 실패한 언어의 문제라고 했다. 불확실한 삶을 인정하고 견디기 어려우므로 자꾸 명료한 해답을 원하게 된다. 연인이나 결혼이라는 배타적 관계맺음, 모호한 감정에 이름붙이기, 꿈이라는 희망, 타인을 쉽게 침범하는 자세. 누군가 내 삶에 처방을 내려주길 바라는 마음, 확실한 의미를 추구하고 싶은 욕망은 여전하다. 하지만 명확한 관계맺음, 계획대로 흘러가는 인생은 없다는 것을 느끼며 나는 아주 조금 여유가 생겼다. 자주 부끄러워하며 불확실함을 받아들이는 연습 중이다. 아, 그럼에도 싫은 건 ‘정확하게’ 싫다. - 232, 233쪽

공간을 운영하며 가장 크게 배운 점은 공간이 유지되는 것은 누군가의 노동 없이는 절대 지속가능하지 못하다는 깨달음이다. 하루라도 환경미화원이 없으면 거리가 쓰레기로 덮이는 것처럼, 매우 사소해 보이는 일상적 노동은 우리의 모든 살을 지탱해주는 근본적 토대다. - 284쪽

시를 쓰고 작품을 만드는 사람에게 꼭 ‘도덕적 잣대’로 올바름을 강요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의 작품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삶의 태도는 가져야 하지 않을까. 가지려고 노력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의 ‘말’에 무게가 실리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무게가 실렸을 때이다. 어떤 ‘작품’에 무게감이 실리는 것도 만든 이의 삶의 무게가 실릴 때인 것 같다. - 289쪽

"동정과 공감은 달라요.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동정은 타인보다 내가 더 낫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내 위치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요. 공감적 상상력은 상대의 자리에 나를 세우는 일이에요. 내 세계가 깨지며 확장되는 일이죠. 모든 공부·만남·애도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는 일이어야 해요. 타인의 세계가 나를 바꿔놓고, 나를 죽이는 것. 우리는 더 불편해져야 해요." - 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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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5-19 18: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힘들어도 참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죠.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일이니까요. ^^
 
서민적 정치 - 좌·우파를 넘어 서민파를 위한 발칙한 통찰
서민 지음 / 생각정원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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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은 아니지만 저자의 경향신문 칼럼을 몇 번 읽은 적이 있다. 그때마다 그 특유의 재치있는 표현과 반어적 문장에 빠져들고는 했었다. 그렇기에 이 책을 고르는데 별 주저함이 없었다. 제목 또한 '그 답게' 서민적 정치라고 하니, 그가 말하고 싶은 서민적 정치란 어떤 것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다 읽고 보니 조금 허망한 느낌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특징 없이 서술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서민 스타일의 논조에 대한 내 기대가 너무 컸나?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래도 다음 장에는 있겠지'라며 기대했던 서민적 표현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공감능력, 민주적 리더, 관심과 감시, 색깔론, 지역감정, 선거를 통한 심판, 청년의 정치참여, 개성공단과 통일, 노조, 복지 등 책이 다루고 있는 정치적 소재들이 너무 다양하다. 정치에 관한 쉬운 글을 쓰려는 것이 목적이었는지 모르지만, 이처럼 다양한 소재들을 다루고 있는 그의 시선은 다소 평범하다. 물론 이와 같은 평범한 시각을 찾는 것에도 의미를 둘 수 있겠지만...


야구광인 그가 평균자책점, 탈삼진 등의 수치를 통하여 선동렬보다 최동원이 더 우수하다는 편향을 영남의 지역감정으로 풀어나가는 것이나, 배트맨 vs 슈퍼맨을 각각 노동자와 경영자에 비유하며 슈퍼맨에 대응하기 위한 1만 명쯤의 배트맨이 있어야 조금은 나은 노동환경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은 그나마 기억에 남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이번 선거에서도 큰 이슈가 되었던 '사표론'에 대한 주장은 크게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진보정당에 투표하면 사표가 될까봐 비판적 지지를 선택하는데, 이해는 가지만 꼭 그렇게 볼 일은 아니다. 예컨대 지지율이 20% 정도만 돼도 다른 후보들이 진보정당 후보를 무시하지 못할 테고, 진보정당 후보가 낙선하더라도 지지율이 높으면 신임 대통령이 국정을 운영할 때도 진보정당의 협조를 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진보정당의 정책이 자연스럽게 국정에 반영될 수 있지 않을까?" - 133, 134쪽

 

그는 사표에 대한 고민을 줄이고 진보정당에 투표를 해야하고, 진보정당에 대한 투표율 확보가 곧 진보정책의 수용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진보정당의 필요성에 대한 일반적 서술일 수는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무척이나 순진한 생각일 수도 있다. 


51대 48이라는 박빙의 결과를 낸 지난 대선 이후에 과연 (그가 말한 20%를 훨씬 넘는) 48%의 지지자들을 위한 정책이 반영된 건이 얼마나 될까? 승자와 패자에 대한 확실한 분별이 있는 우리의 정치현실에서 또 다시 같은 정당에서 정권을 잡는 것이 두려워 보다 당선 가능성이 있는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것이 기우(杞憂)이며, 이를 단순히 사표를 우려한 반응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는 것일까? 그가 말하듯 입체적인 세상에 대한 그의 편향에 대해 비판할 의사는 조금도 없지만, 그와 반대적 편향을 가진 내 입장에서는 보다 많은 이들을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는 진보정당의 포용성에 대한 한계도 검토해봐야 할 문제라고 본다.


그는 서민들의 가슴에 금배지를 하나씩 달자고 제안한다. 헌법적 취지에 따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대통령을, 국회의원을, 기타 공직자를 부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하고, 혐오에 빠진 정치 불신, 무소불위의 존재로서의 정치인에 대한 숭배를 그만 두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모두 맞는 말이고 틀린 말은 하나도 없지만, 이런 원론적인 주장에 더하여, 정 안되면 상징적으로라도 문방구에서 금배지를 사서 하나 달아보자고 하는 그의 제안이 평범하고 순진하게만 들리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편향성을 회피하려는 강박도 버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회적 위치와 성별, 인종 등 다양한 요소들로 인해 각자 다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직선 안에 0점을 두고 음수와 양수를 표현하는 것처럼 세상을 왼쪽과 오른쪽으로만 나눌 수는 없다. 세상은 입체다. 한쪽에서 보면 한 면만 보이지만, 사실 복잡하게 빛나는 다면체다. 편향은 우리가 보는 세상의 한 단면이다. 각자의 시선 속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어느 한 단면임을 인정한다면, 편향들이 모여야 다면체가 완성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정치에 대한 열린 토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 20쪽

어느새 우리는 스스로의 영역을 점점 더 좁게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나와 생각이 같지 않다면, 모두 적이 된다. 정보는 넘쳐 난다지만 내가 보고 싶은 것만 사실이 된다. 언론들이 프레임 장난을 하는데도, 원하는 것만 보고 있으니 거기서 벗어나질 못한다. "그 사람도 좋지만 그래도 나는 이러이러한 점에서 저 사람이 더 마음에 들어"라고 말하기보다 그 사람의 단점만 강조한다. 선명한 지지가 선명한 비난은 아닐 텐데, 우리는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상대 후보를 깎아내린다. 다들 협오는 나와 먼 이야기라 생각하지만, 바로 이런 태도가 혐오다. - 44쪽

불이 났을 때 출구가 넓어서 다 탈출할 수 있다면 "당신이 먼저 나가세요"라며 배려하는 게 가능하지만, 출구가 좁아서 일부만 탈출이 가능하다면 배려고 뭐고 서로 나가려 할 것이다. 우리 청년들은 지금 상황을 후자라고 생각하기에, 미처 나오지 못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기보단 "그러게 미리 문 옆에 대기하고 있었어야지!"라며 조롱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존 질서에 투항하다 보니 스스로에게 자존감을 갖기는 어렵다. - 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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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5-16 2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나온 서민 교수님의 책이 정치를 주제로 한 칼럼을 모은 거라서 그 글을 읽은 독자들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을 겁니다. 정치인에 대한 숭배를 경계하자는 교수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붉은눈 2017-05-19 18:41   좋아요 0 | URL
제가 배경지식이 없었군요. 제가 강렬한 칼럼만 접해서인지 칼럼을 모은 글인 줄은 몰랐습니다. 정치인에 대한 숭배를 경계하자는 생각은 시민들이 정치 혹은 정치인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명쾌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현실화하기는, 적어도 제게는 여전히 어렵기만 합니다. 최근 문빠 프레임이나 한경오 사태를 보면 지지와 숭배의 경계는 또 어디쯤일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