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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이민경 지음 / 봄알람 / 2016년 8월
평점 :
제목에 있는 '언어'를 '소통'쯤의 추상적 개념이라고 여기고 책을 폈는데 그게 아니었다. 여기에서 말한 언어라는 것은 정말 실질적인 의미의 언어, 말투, 대화 방식 또는 스킬을 의미했다. '우리에겐 소통이 필요하다'와 같이 나이브하게 제목을 읽어내려 했던 내가 틀렸다. 어설프게도 나는 처음에 이 주제를 화합의 필요성 정도로 접근하려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무척이나 한가한 소리였다. 이 책 곳곳에는 여성혐오와 차별에 대한 매우 절박한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누군가가 ‘좋게 넘어가자’며 분노하는 이들을 온화하게 타이를 수 있는 것은 그가 분노할 필요가 없는 기득권이기 때문일 뿐"이라고 지적한 바와 같이 나역시 기득권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여실히 깨달으면서 책장을 넘겼다.
"당신에게는 대답할 의무가 없다", "마음부터 단단히 여며야 한다", "내 입장부터 정확히 해야 한다", "상대방의 입장을 명확히 알자", "단호함은 필요하다"와 같은 목차를 따라가보면, 저자가 여성들에게 어떠한 마음가짐 혹은 대화의 전략을 주문하는지를 알 수 있다. 즉 페미니즘이나 여성혐오에 관한 대화가 내키지 않을 경우 굳이 대화를 시도하거나 설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친절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페미니즘이 뭐야?"라는 준비 안된 무지한 질문 앞에서 적절한 대답을 떠먹여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이 책을 쓰게 된 큰 계기가 되었다고 밝힌 저자는 차별의 존재를 이해를 해야 하는 남성쪽에게 오히려 여성들이 공들여 설명해야 한다는 부당함을, 남성들이 그동안 자신이 부족했다는 점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으로 삼아야 하는 현 상황을 답답하게 여겼던 것 같다. 그리고 현 상황을 설명하기에 지치고 괴로운 이들에게 새로운 대화의 전략을 제공하기 위한 메뉴얼의 하나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다만, 메뉴얼치고는 그리 친절한 편이 아니다. 저자 스스로도 "독자를 확보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밝히고 있는데, 그럼에도 2016 올해의 좋은 책으로 선정이 된 것을 보면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 책에 (찬성이든 반대든) 많은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저자는 여성 혹은 페미니즘에 긍정적인 이들을 독자로 여기고, 전반부는 여성혐오에 대한 입장과 태도와 언어를 정립할 필요성에 대해, 후반부는 실질적인 대화의 스킬 또는 대응 방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성혐오와 남성혐오의 이슈에 대해 대화의 방향을 잃고 있는 이들에게는 반문하기, 인정하게 하기, 지적하기, 가로채기, 확답받기, 결정하게 하기, 선 긋기, 선공하기 등의 대응법은 우선 대화나 말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확신있는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한 괜찮은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나 스스로는 이런 대응법에 대해 별다른 감흥을 받지는 못하였다. 단순히 내가 남성이고, 여성혐오에 대해 무감각해서라기 보다는, 논리적이고 분명하며 공격적인 대화방식이 누군가를 설득시키는 것에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음을 지난 수 년간 경험했기 때문이다(물론 이런 대응법이 '설득'이 목적이 아니며, 내가 설득시킬 대상도 아니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이 책에 드러난 편향성이나 공격성 등을 지적하고 싶지는 않다. 나 역시 편향적이기에. 마찬가지로 어설픈 화합이나 평화의 추구를 주장하고 싶지도 않다. 느끼는 사람은 느끼는 대로 표현할 뿐이고, '왜 그런 느낌을 받느냐'는 무례한 질문에는 어느 누구라도 지쳐가기 마련일 것이기에. 어쩌면 내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갈급함이 이 책을 탄생시켰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에서 제안하는 대로 남성들의 고정관념, 차별성, 무지, 무관심, 팽배해 있는 관성을 하나 둘씩 깨뜨림으로써 이미 기울어져 버린 축을 조정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또 나대로의 '언어'를 찾아봐야겠다.
생각해보면 ‘이해를 시키려 노력한다’는 말, 묘하게 모순입니다. 이해란, 원래 시키는 게 아니라 하는 겁니다. 대화를 마치고 ‘이해시키느라 힘들었다’는 소리가 나온다면, 상대가 해야 할 이해를 도와주는 노력을 했는데 그게 힘에 부쳤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럼 힘을 키우면 될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계속 말하겠으나 당신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잠깐, 이해가 누구의 몫이어야 하는지 짚어둡시다. ‘이해’가 성립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누가 하고 있는지도 봅시다. - 21, 22쪽
그때 남성은 ‘내가 보기엔 아닌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동시에 가장 의미가 없습니다.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아래라 생겨나는 불평등이라는 주제에서, 남성이라는 성별을 가진 채로는 영영 당사자가 될 수 없으니까요. 본인이 직접 느낄 수 없으니, 일부러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혼자서는 볼 수 없습니다. 당신은 볼 수밖에 없는 문제를 자신은 볼 수 없다고 자기 입으로 밝혔음에도, 공신력을 얻는 쪽은 상대입니다. 내 경험의 정당성마저 남성이 결정하는 겁니다. 차별은 수치나 공신력 있는 근거로 입증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수치로도 명백히 입증되고 있으나, 당사자가 직접 느낀 고통이 먼저이며 그게 더 중요합니다. 그게 쌓여 수치가 되고 기록이 되는 거니까요. 아까 말한 직관이라는 게, 바로 이 고통이 쌓여 얻게 된 결과물입니다. - 27쪽
평등이란 하나밖에 없고, 불평등은 그 나머지를 전부 포괄합니다. 상대의 태도가 얼마나 바람직한지 아닌지는 당신이 어떻게 대응할지를 결정하게 할 뿐입니다. 태도에 따라 틀린 말이 맞는 말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의 질문만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완전히 평등한가?
아니라면 여전히 불평등한 상태고, 평등까지 더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본인이 무슨 노력을 했느냐 여부에 관계없이 말할 수 있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래도 이제 많이 평등해지지 않았냐고요? 맞습니다. 꾸준히 평등에 가까워졌습니다. 제법 평등해졌고, 많이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평등하다’는 말은 차별이 사라졌을 때에만 쓸 수 있습니다. - 38, 39쪽
많은 혼란이 여기에서 옵니다. 차별이 아직 존재하지만 점차 나아지고 있으므로 ‘차별이 이제 없다고 봐야 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차별은 있거나 없는데, 누군가가 숨 쉬듯 차별을 느낀다면 차별은 있는 겁니다. 지구 상에 성평등을 이룬 사회가 아무 데도 없는데 무슨 수로 우리 사회에 차별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차별을 없는 것으로 만들려 하는 말의 힘이 이렇게나 세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차별에 무지하며 평등에 도달하려면 한참 멀었는지 보여줍니다. - 41쪽
상대에게도 내가 겪은 차별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를 말할 자유는 있겠지만, 그 경중을 따지고 정당성을 판단하는 것은 아무리 민주주의라 한들 토론으로 결정할 게 아닙니다. 당신이 차별을 당하는 쪽으로 태어난 이상, 그게 존재하고 아니고를 말할 권리는 당신에게밖에 없으니까요. - 42, 43쪽
남성이 지금 사회에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건 의미가 좀 다릅니다. 열정페이를 받는 인턴이 이대로도 괜찮다고 말하는 건 자기위안이거나 더 불이익을 볼까 두렵거나 실제로 급여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겠지만, 고용주가 이대로 괜찮다고 말하는 건 자기 이익에 기반한 정당화니까요. 똑같이 기존의 차별적인 구조에 한 명 분의 힘을 싣고 있다고 해도, 덜 가진 상황을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이는 것과 더 가진 상황을 누리겠다는 말은 똑같을 수 없습니다. - 51쪽
누군가가 ‘좋게 넘어가자’며 분노하는 이들을 온화하게 타이를 수 있는 것은 그가 분노할 필요가 없는 기득권이기 때문일 뿐입니다. 기득권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기득권이 설파하는 아름다운 의도는 무의미하며,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분노할 수 있다는 것을 좀 깨닫고 예쁜 헛소리는 넣어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 82쪽
강남역에 모인 여성이 충분히 설득적인 어조를 취하지 않고, 남성에게 더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고, 온화하게 참고 이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전히 비난받습니다. 하지만 여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남성을 설득하고 포용해 이해로 나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견디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설득이 이루러진다면야 좋겠지만, 여성의 목소리가 기득권자인 남성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부터가 오만한 발상입니다. 여성의 목소리와 행동은 온전한 주체가 되고자 하는 몸부림이지, 다른 주체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86, 87쪽
남성혐오의 실질적인 힘은 아주 작아서 여성혐오의 뿌리에 스크래치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발휘하는 힘의 차이, 패러디와 원본의 차이가 무시된 채 ‘한남충’이라는 말이 등장하자마자 ‘남혐’이 기승을 부리는 것이 되고 곧바로 사회문제로 부각된 현 상황은, ‘김치녀’를 위시한 온갖 여성혐오 발언이 오랫동안 아무 문제없이 널리 존재해왔던 것을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노릇입니다. 남성혐오가 파장을 일으킨 건 남성이 겨우 여기에만 발끈해서가 아닙니까? 그걸 또 여자 탓으로, 심지어 여성혐오마저 ‘그렇게 남성혐오를 한’ 여성 탓으로 돌리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 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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