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 제155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김난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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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키상 수상작'이라고 하면 우선은 믿고 사서 읽어보는 편인데, 이 책 역시 나쁘지 않았다. 단편집인줄은 모르고 구매하였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인데, 전체적인 구성이나 내용을 보면 작가가 다양한 인간의 삶을 통해 제시하려고 했던 '관계의 치유'라는 큰 줄기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살면서 크고 작은 상처와 고통 없는 이들이 있겠느냐마는,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각자의 인생에 있어서 치명적인 트라우마(죽음, 갈등, 단절)에 갇혀 살고 있다. 그런데 이 짧은 단편들 속에서 작가는 상처입은 존재들이 스스로 그 상처를 치유하며 삶과 관계를 이어가려고 노력하는 순간을을 담아 독자에게 제공해준다. 


딸 아이 대신 성인식에 참가함으로써 그동안 결코 헤어나올 수 없었던 아이의 죽음이라는 상실로부터 스스로를 치유하려는 부부(성인식), 엄마의 참견과 부담으로부터 벗어나 연을 끊고 독립적인 삶을 살다가 비자발적으로 다시 찾아가 본 엄마의 모습에서 열등감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한 여자의 민낯을 보며 엄마를 연민하게 된 딸(언젠가 왔던 길), 이발사와 손님이라는 표면적 타인의 관계에서 대화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이해를 구하는 아버지(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소설, 게다가 단편이기 때문에 갖게 되는 한계가 없지는 않지만, 각각의 작품들을 통해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삶에 대한 관점, 관계의 회복과 치유를 위한 진정어린 노력은 의미있는 울림이 되어 다가왔다.

지금 돌아가면 또 한탄과 회한의 날들이 시작될 것이다. 오늘로 끝내고 싶었다.
스즈네를 위해서기보다 자신들을 위해서였다. 우리는 늘 같은 자리에서 맴도는 슬픔을 어느 시점에서는 과감하게 떨쳐내야 한다.
나와 미에코에게도 성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 44쪽

오늘 날씨는 퍼머넌트 옐로 - 90쪽

대부분의 손님은, 굳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을 원하십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이미 젊지 않으신데 젊은 시절 스타일을 고수하려 하시거나, 각진 얼굴형인데 마치 야쿠자 같은 스타일을 원하시거나.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뭐하지만, 이랬으면 좋겠다 하는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과 현실의 자신은 왕왕 다른 법이지 않겠어요. 거울에 고스란히 비쳐 보이는데 말입니다. - 104, 105쪽

일이란 결국 타인의 기분을 헤아리는 것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손님의 기분을 헤아리는 것. 같이 일하는 사람의 기분을 헤아리는 것. 이발소든 다른 가게든 회사든, 그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 107쪽

이상적으로 여기는 자신의 모습과 현실의 자기 모습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131쪽

아마 제가 모든 것을 거울 너머로 보지 않았나 싶습니다. 똑바로 마주하면 괴로우니까 말이죠. - 133쪽

현실의 빛이 제대로 비치기 시작하면, 모든 게 아무 쓸모없는 잡동사니 장난감으로 변한다. - 224, 225쪽

어른이 되면 자기 부모라도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법이다. 절대 특별한 존재는 아니었다. 어느 면에서나 그냥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기억 속의 아버지 나이를 넘긴 지금은. - 246쪽

"누구나 시곗바늘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겠죠." - 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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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우리 영혼은
켄트 하루프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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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애디 무어는 루이스 워터스를 만나러 갔다. 오월,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기 바로 전의 저녁이었다." 마치 단편소설의 한 대목과 같이 단도직입적인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애디 무어나 루이스 워터스가 누구인지, 이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는지에 대한 배경설명 없이 작가는 바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짧은 분량, 단순하고 명료한 서술, (어느 정도) 예상되는 전개, 평범한 대화체로 구성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읽을수록 마음이 끌렸다. 한나절의 시간을 들여 다 읽었지만, 읽는 내내 넘어가는 책장이 아쉽기만 했다. '황혼의 로맨스'라고 단순화하는 것은 오히려 이 소설을 폄하하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로 차분하고 담담한 가운데 깊이가 묻어나는 소설이다.


책을 한 장 넘기자마자 "가끔 나하고 자러 우리 집에 올 생각이 있는지 궁금해요."라는 애디의 직설적이고도 당돌한 제안이 보인다. 마치 프로포즈를 하듯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밤의 어둠을 함께 하자는 제안을 하는 여자는 삶의 마지막 자락에 커다란 용기를 낸듯 하다. 더이상 아무것도 흡수하지 못한 채 말라비틀어진 채로 죽어가던 나무가 갑자기 생기를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듯하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 갖지 않기로 결심했으니까요. 너무 오래, 평생을, 그렇게 살았어요. 이제 더는 그러지 않을 거에요."라는 말에 애디의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만만치 않다. 제3자들이야 무시한 채로 살아갈 수 있어도 가족, 특히 자식들에게는 끝내 질 수밖에 없는 것이 부모다(우리나라 드라마에서도 종종 나오는 바로 그 상황이다). 딸에게 나도 너에게 삶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으니 너도 내게 강요하지 말라, 고 말한 루이스가 오히려 꿋꿋하게 애디와의 관계를 밀고 나간다. 하지만 처음에 그를 놀라게 할 정도로 용기를 내어 다가오던 애디가 자식의 요구 앞에서 끝내 흔들리게 된다. 더 이상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으며 살고 싶다던 그녀의 변심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왜 인간은 다른 사람들이 행복을 찾은 방식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가"라는 뒷표지의 한 문장이 인상적이다. 그것이 가족이든, 제3자든 왜 우리는 자신의 이기심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저 밖으로 내몰려고 하는지. 젊은 날의 뜨겁던 욕망도, 한 없이 빛날 것만 같던 사회적 지위도, 어지러히 연결되어 있던 사람들과의 관계도 하나 둘씩 사그라들거나 끊기고 있는 인생의 마지막 여정에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반대로 그 시기가 되어서야 진짜로 원하는 삶을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을 갖는 일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래도 이대로 끝이 아닐 것 같은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한번 두 남녀를 응원하게 되는 까닭이다.

그런데 침대에 누군가가 함께 있어준다면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은 사람이, 가까이 있다는 것. 밤중에, 어둠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 그녀가 말을 멈추고 기다렸다. 어떻게 생각해요? - 10쪽

나는 그런 건 신경 안 써요. 어차피 다 알게 될 거고요. 누군가가 보겠죠. 앞쪽 보도를 걸어 앞문으로 오세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 갖지 않기로 결심했으니까요. 너무 오래, 평생을, 그렇게 살았어요. 이제 더는 그러지 않을 거에요. - 13쪽

아무런 믿음도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에 대해서는 있어요. 당신은 믿을 수가 있어요. 그건 이미 알아요. 다만 내가 당신과 똑같을 수 있는지 확신이 안서네요. - 13, 14쪽

고마워요. 하지만 그 사람들로 인해 나는 상처받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함께하는 밤들을 즐길 거에요. 그것들이 지속되는 한.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말해요? 일전에 내가 그랬듯 말하네요.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될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기를 원해요. 그녀가 말했다. 이미 말했듯, 난 더 이상 그렇게,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며, 그들이 하는 말에 신경 쓰며 살고 싶지 않아요. 그건 잘 사는 길이 아니죠. 적어도 내겐 그래요.
좋아요. 내게도 당신 같은 분별력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당신 말이 옳아요, 물론. - 33쪽

초콜릿은 안 먹는 게 좋다지만 이제 와서 뭐가 달라지겠어요? 먹고 싶은 건 다 먹고 죽을 거에요. - 40쪽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는군요.
그건 아니고, 뭐랄까요, 그녀와의 추억을 아직 사랑하고 있기는 한 것 같아요. - 45, 46쪽

그런데 말이에요, 나는 아내보다도 타마라에게 상처를 준 게 더 한이 돼요. 내 혼이랄까, 그런 걸 실망시킨, 흙바람 부는 소도시의 평범한 고등학교 영어선생이 아닌 뭔가 다른 것이 되라는 일종의 소명을 저버린, 그런 느낌이에요. - 50쪽

네 말이 맞다. 좋아하거나 잘 알지도 못했지. 그런데 바로 그게 내가 지금 좋은 시간을 보내는 요인이란다. 이 나이에 누군가를 알아가는 것, 스스로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 알고 봤더니 온통 말라죽은 것만은 아님을 발견하는 것 말이다. - 59쪽

아주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요. 좀 신기해요. 여기 깃든 우정이 좋아요. 함께하는 시간이 좋고요. 밤의 어둠속에서 이렇게 함께 있는 것.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잠이 깼을 때 당신이 내 옆에서 숨 쉬는 소리를 듣는 것. - 102쪽

나는 이 물리적 세계가 좋아요. 당신과 함께하는 이 물리적 삶이요. 대기와 전원, 뒤뜰과 뒷골목의 자갈들, 잔디, 신선한 밤, 그리고 어둠속에서 당신과 함께 누워 있는 것도요. - 141쪽

당신은 뉴스이고 싶어요?
아뇨, 절대로. 난 그냥 하루하루 일상에 주의를 기울이며 단순하게 살고 싶어요. 그리고 밤에는 당신과 함께 잠들고요.
그래요, 우리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죠. 우리 나이에 이런 게 아직 남아 있으리라는 걸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에요. 아무 변화도 흥분도 없이 모든 게 막을 내려버린 게 아니었다는, 몸도 영혼도 말라비틀어져버린 게 아니었다는 걸 말이에요. - 159쪽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당신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건 알아요. 하지만 나도 당신에게 그런 의미일 것이라는 생각이 도저히 안 들어요.
그 얘기는 됐어요. 그건 내 문제가 아니라 당신 문제니까요. - 163쪽

그는 밤에 그녀의 집에 왔지만 이제 전과 달랐다. 예전의 편안한 즐거움과 발견의 분위기가 없었다. 차음 루이스가 오지 않는 날이 생겼고 애디 또한 루이스와 함께 누워 있기보다는 혼자서 책을 보고 싶은 밤이 늘었다. 그녀는 옷을 벗고 그를 기다리기를 멈췄다. 그가 오는 날이면 아직도 손을 잡긴했지만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습관과 쓸쓸함, 그리고 예감된 외로움과 낙심 때문이었다. 마치 다가올 무엇에 대비하여 이런 순간들을 비축해두려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을 깨어 말없이 함께 누워 있을 뿐ㅇ 이젠 사랑을 나누지도 않았다. - 180쪽

진심이에요. 당신은 내게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 이상 더 뭘 원할 수 있겠어요? 당신과 함께한 후 난 이전보다 나은 사람이 되었어요. 당신 덕분이에요. - 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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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 (양장 특별판)
R. J. 팔라시오 지음, 천미나 옮김 / 책콩(책과콩나무)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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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놓쳐 대신 책을 읽기로 했다. 영화 티저만 보더라도 원작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가 보이는, 어찌보면 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설정이기는 하다. 아픈 아이, 친구나 사회로부터의 단절, 비자발적인 생각의 조숙, 관계의 어려움과 역경, 열등감으로부터의 해방... 그럼에도 이 소설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각자의 다양한 시선을 통하여 그가 처한 상황을 이해해보려는 시도에 있다고 하겠다. 각 장의 제목이 어거스트, 비아, 서머, 잭, 저스틴, 미란다... 등 등장인물들로 구성되어 있고, 해당 인물이 1인칭의 시점에서 독백을 하듯 풀어나가는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단편적으로 흘러갈 수 있는 스토리에 독특한 재미를 부여한다.


수차례의 수술로 인하여 얼굴이 일그러진 어거스트의 외모적 열등감과 유사하게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열등감이 존재한다. 작가는 인간이 이러한 문제를 결코 혼자의 힘만으로 풀어나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어거스트의 부모, 누나, 선생(현실에서는 찾기 어려울 것 같은 너무나도 이상적인 교사라는 것이 흠이다), 친구들은 그 나름의 방법으로 어거스트를 대한다. 때로는 그것이 배려나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의 부담과 상처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관계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존 던의 말을 인용한 브라운 선생의 1월 금언처럼 인간은 섬이 아니며, 혼자서 완벽하지 않으므로... 

우리의 존재!
"우리의 존재."라며 선생님이 두 낱말에 죽죽 밑줄을 그었다.
"우리의 존재! 우리! 알겠나?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사람들인가? 당신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가장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항상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할 질문이 아닐까?" - 85, 86쪽

브라운 선생님의 9월 금언 :
만약 옳음과 친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친절을 택하라. - 86쪽

브라운 선생님의 10월의 금언은 이랬다.
우리가 행한 행동이 곧 우리의 묘비이다.
수천 년 전에 죽은 어떤 이집트인의 묘비에 적힌 말이라고 했다. - 112쪽

365일이 할로윈이면 좋겠다. 그러면 누구나 항상 가면을 써도 된다. 그러면 마음껏 돌아다니면서 가면 속의 얼굴을 보기 전에 서로에 대해 알 수 있을 텐데. - 125쪽

눈이 올 때 우산을 쓰는 그런 어른은 되지 않겠다. 절대로. - 235쪽

우주는 결국 모든 것을 공평하게 만들어 준다. 우주는 자신의 모든 새를 저버리지 않는다. - 319쪽

이제는 내 얼굴에 적응한 아이들과는 달리 내 모습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그런 눈들이. 어느 방향에 놓든지 나침반의 바늘이 항상 북쪽을 가리키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모두의 눈이 나침반이라면 나는 그들에게 북극인 셈이다. - 322쪽

"하늘나라에 가면 사람들은 똑같게 보여?"
"글세. 아닐 거야."
"그럼 어떻게 서로 알아봐?"
"글쎄다, 아가."
엄마는 피곤한 목소리였다.
"그냥 느끼는 거야. 사랑하기 위해 꼭 눈이 필요한 건 아니잖아, 그렇지? 그냥 마음으로 느끼는 거야. 하늘나라에서도 그럴거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아무도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는 않아." - 351, 352쪽

인간은 섬이 아니다. 혼자서 완벽하지 않으므로. - 존 던 – 4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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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3-07 14: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록 외면의 상처가 없는 이들이라도, 내면의 상처는 누구에게나 있다는 점에서 「원더」는 참 가슴에 와닿는 영화였습니다...

붉은눈 2018-03-07 16:18   좋아요 1 | URL
말씀을 들으니 뒤늦게라도 영화를 보고 싶어집니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어거스트가 헬멧을 벗고 세상을 대면하는 모습이 상상됩니다.

cyrus 2018-03-07 2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늘 고독해서 외로이 멀리 떨어진 섬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존 던은 다르게 보는군요. ^^

붉은눈 2018-03-07 22:42   좋아요 0 | URL
저도 cyrus님과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존 던의 말을 곱씹어 보는 중입니다.
 
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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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에세이 <개인주의자 선언>을 매우 공감하며 읽었다. 그렇다고해서 그가 쓴 소설까지도 특별한 기대를 한 것은 아니다. 이적의 <지문사냥꾼>이나 이석원의 <실내인간> 같은 등단한 작가 아닌 이들이 쓴 소설을 몇 권쯤은 읽어보긴 했었는데, 편견인지는 몰라도 과도하게 독창성을 어필한다거나 불필요한 곳을 공들여 쓰는 등 소설가가 아닌 작가들의 소설은 뭔가 아쉽거나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이 소설의 단점에 대해 말하자면, 다소 산만하다는 아쉬움을 들 수 있겠다. 이는 너무 '단편스러운 단편'을 좋아하지 않는 성향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하나의 사건에 대하여 다양한 관점이나 숨겨진 이유를 밝히며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은 듯 하다. 지하철 성추행, 식당에서의 상해, 직장상사로부터의 정신적 피해, 잊혀질 권리, 이혼 후 양육권, 전관예우, 원인에 이어서 자유로운 행위, 폭행에 대한 정당방위 등  마치 TV 미니시리즈를 엮어 놓은 것 처럼 몇 편 분량의 스토리를 풀어놓고, 스토리에 캐릭터가 묻히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캐릭터(몸싸움도 서슴치 않은 행동파이자 초미니를 입고 출근하는 여성판사, 미스 함무라비)를 탄생시킨 것 같다.


어려운 분쟁과 소송을 쉽게 풀어 제시한다는 것도 특징이기는 하지만, 사건에 얽힌 이들이 아니라 그 사건을 접하고 판결을 해야 하는 판사들을 중심에 놓았다는 것은 이 소설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판사의 관점에서 실제 재판과정에서 고려하거나 고심할 것 같은 상황들이 그려져 있어, 사건을 분쟁당사자가 아닌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는 한다.

기록은 판사 소유의 물건은 아니다. 오히려 ‘판사의 삶을 소유하고 있는 물건’인지도 모른다. 전통적으로 판사의 삶이란 기록을 보는 삶이다. 판사가 보는 기록은 타인의 삶, 그중에서도 갈등, 분노, 의심의 장면들을 기록한 것이다. 그것도 객관적인 제3자가 아니라 갈등의 당사자 각자가 자기 시각에서 바라본 모습들을. - 136쪽

인간의 기억이란 참 묘해서 완결된 것은 곧 망각하고, 미완의 것은 오래오래 기억한다. 해피엔딩을 이루고는 익숙해져만 가는 사랑과 안타깝게 못이루어 평생 그리워하는 사랑 중 어느 것이 더 달콤한 것일까.
아니, 어느 것이 더 슬픈 것일까. - 170쪽

경제학가 토비 모스코비츠와 존 베르트하임은 야구, 축구 등 스포츠의 홈 어드밴티지에 대해 연구했다. 그 결과 통계적으로 어드밴티지가 존재함을 밝혀냈는데, 그 원인은 응원 때문에 선수들이 더 열심히 뛰어서가 아니었다. 선수들이 아니라 심판들이 열광적인 응원에 반응하여 자기도 모르게 홈팀에 유리한 판정을 하곤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본능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싶어한다. ‘인지상정’이란 심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판사도 인간이고 온갖 인지적 오류의 영향을 받는다. - 251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기 때문에 존엄한 것이다. 최소한 그것이 인간 사회의 약속이다. 그런데, 나약한 인간을 수렁 속에 방치하는 사회는 어떤 책임을 지는 걸까. - 3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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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끄기의 기술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만 남기는 힘
마크 맨슨 지음, 한재호 옮김 / 갤리온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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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라서 그런지 또 자기계발서에 눈이 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꽤 오랜기간 자리를 잡고 있던 이 오랜지색 표지에 적잖이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목차를 보니 여타의 자기계발서와는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애쓰지 마, 노력하지 마, 신경 쓰지마, 해피엔딩이란 동화에나 나오는 거야, 왜 너만 특별하다고 생각해?, '고통을 피해는 법'은 없어, (...) 결국 우린 다 죽어. 9장으로 구성된 목차들 중 많인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생각해보면 결국 인생에서 겪는 대다수의 문제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었다. 남들과 달리 내가 특별하다는 착각, 어떠한 목표든 나는 해낼 수 있다는 착각, 현재 머물고 있는 이런 곳에서 썩을 사람이 아니라는 착각, 가슴이 시키는대로 살아야 성공한 삶이라는 착각, 내면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착각, 나는 결코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 지금껏 이런 비현실적인 나르시즘에 빠진 채 작은 실패 하나에도 허덕이며, 실패를 죄악시하며, 자신의 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길을 흘끔거리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주워담을 만한 적절한 충고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주목한 것은 제2장 표지에 나오는 '실망 판다'가 한 말이다. "문제 없는 삶을 꿈꾸지 마. 그런 건 없어. 그 대신 좋은 문제로 가득한 삶을 꿈꾸도록 해." 저자가 만들어낸 가공의 슈퍼히어로인 실망 판다는 뚱뚱한 몸집에 두꺼운 뿔테안경 같은 눈가면을 쓰고, 배가 꽉 끼는 셔츠를 입은 채로 사람들에게 가혹한 진실을 전한다. 그가 전하고 있는 한 마디 속에는 저자가 주장하는 핵심적인 요소들이 담겨있다: 문제가 없는 삶은 없다. 부풀려진 '성공'이라는 이상에 매달려 그것을 쫓느라 좌절하지 말고, 지금 눈 앞에 닥친 문제에 집중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이것이 곧 성공으로 향하는 길이다.

모든 걸 가지려는 사람, 즉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모두 채우려는 사람은 아무것도 잃지 않는 인생을 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어떤 부족함도 용납하지 못하는 태도, 모든 걸 가져야 한다는 믿음이 인생을 ‘지옥의 무한궤도’에 빠지게 만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경 끄기의 기술’이다. 이 기술은 삶의 방향을 재조정하고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게 해주는 단순한 방법이다. 이 능력을 발달시키면, 이른바 ‘실용적 깨달음’이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 (...) 실용적 깨달음이란, 삶이 늘 어느 정도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즉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든 인생은 실패, 상실, 후회를 수반하고 마지막엔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삶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엄청난 고난들을 순탄하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천하무적이 될 수 있다. 단언컨대 고통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고통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 11, 12쪽

그가 성공한 건 ‘위너’가 되려는 열망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루저임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숨김없이 글로 풀어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코스키는 한평생 자신이 생겨 먹은 대로 살았다. 그의 천재성은 엄청난 역경을 극복했다거나 출세해서 당대의 문호가 되었다는 점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부코스키는 자신을, 특히 가장 못난 모습을 숨김없이 오롯이 드러냈으며, 결점을 태영하게 세상과 나누었다. 그의 천재성은 이런 단순한 능력 안에 있다.
부코스키가 성공한 진짜 이유는 자신의 실패에 초연했기 때문이다. - 19쪽

좋은 삶을 살려면, 더 많은 신경 쓸 게 아니라, 더 적게 신경 써야 한다. 요컨대, 오로지 코앞에 있는 진자 중요한 문제에만 신경을 쓰라는 말이다. - 22쪽

더 긍정적인 경험을 하려는 욕망 자체가 부정적인 경험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부정적인 경험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긍정적인 경험이다. - 26쪽

어떤 예술가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문제가 없으면 자동으로 문제를 만들어낼 방법을 찾는다. 내 생각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여기는 것은, 사실 그들에게는 그보다 중요한 걱정거리가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부작용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에 중요하고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는 일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가장 생산적으로 사용하는 길일 것이다.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것을 찾지 않는다면, 무의미하고 하찮은 것에 신경이 쏠릴 테니까 말이다. - 34, 35쪽

반평생 넘게 품어왔던 꿈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 몸부림친 뒤에야 마침내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나는 사실 음악가가 되길 원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난 결과를 사랑했다. 사람들이 환호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무대를 휘저으며 혼신을 다해 연주하는 내 모습을 말이다. 하지만 과정은 사랑하지 않았다. 그래서 실패했다. 그것도 여러 번. 젠장. 심지어 실패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있을 만큼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사실 안 한 거나 마찬가지다. (...) 내 꿈은 거대한 산과 같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난 그 산을 오를 마음이 별로 없다는 것을. 그저 정상을 상상하는 걸 좋아했을 뿐이었다. - 41, 42쪽

성공을 결정하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즐기고 싶은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고통을 견딜 수 있는가’다. 행복으로 가는 길에는 똥 덩어리와 치욕이 널려 있다. - 43쪽

충고하건대, 자신이 특별하다거나 남다르다는 생각을 버려라. 삶의 기준을 평범하고 일반적인 것으로 다시 정하라. 자신을 유망주나 재야의 천재로 보지 말라. 비참한 피해자나 형편없는 실패자로도 여기지 말라. 그보다 훨씬 평범한 정체성인 학생, 배우자, 친구, 창작자와 같은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라.
자기의 정체성을 좁고 희귀한 것으로 규정할수록, 더 많은 삶의 요소들이 위협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되도록 단순하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규정하라. - 82쪽

엉터리 가치를 선택하면, 다시 말해 자신과 타인에 대해 잘못된 기준을 세우면, 중요하지 않은 것과 삶을 사실상 망가뜨리는 것에 신경을 쓰게 된다. 하지만 더 나은 가치를 선택하면 더 나은 것에 신경을 쏟게 된다. 중요한 것, 즉 삶에 안정감을 주고 그 결과로 행복과 즐거움, 성공을 전해주는 것에 신경을 쏟을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자기계발’이라는 건 곧 더 나은 가치를 우선하는 것이며 더 나은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이다. 더 나은 것에 신경을 써야 더 나은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은 문제를 다뤄야 삶이 나아진다. - 109쪽

마이클 조던은 "난 살아오면서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다. 그게 내가 성공한 이유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음, 난 살아오면서 오판에 오판을 거듭했다. 그게 내 삶이 개선된 이유다.
성장은 끝없는 반복 과정이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알게 될 때 ‘틀린’ 것에서 ‘옳은’ 것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틀린 것에서 약간 덜 틀린 것으로 나아간다. 또 다른 것을 알게 되면 약간 덜 틀린 것에서 그보다 약간 덜 틀린 것으로 나아간다. 이 과정이 반복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진리와 완성을 향해 나아가지만 실제로 거기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결정적인 ‘정답’을 구할 게 아니라, 오늘 틀린 점을 조금 깎아내 내일은 조금 덜 틀리고자 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성장은 상당히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우리가 받아들이는 가치가 가설이다. 즉 이런 행동은 좋고 중요하지만 저런 행동은 그렇지 않다는 판단이 가설이다. 그리고 우리는 행동으로 그것을 실험한다. - 140, 141쪽

"너 자신을 믿어",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해". 우리는 이런 달콤한 말을 귀에 못이 박이게 듣는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려면 오히려 자신을 덜 믿어야 할 것 같다. 자신의 마음이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면, 자신의 의도와 동기를 더 많이 의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이란 항상 틀리기 마련이라면, 자신의 믿음과 가정을 꼼꼼히 따져가며 자신을 의심하는 것 외에 발전하기 위한 논리적인 방법이 달리 있겠는가? - 152쪽

그런 의미에서 ‘자아를 찾아라’와 같은 말을 따르는 건 위험하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스스로를 특정한 역할이나 쓸데없는 기대에 옮아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잠재력과 기회를 자기 발로 차버릴 수도 있다. 너 자신을 절대 알지 말라. 그래야 끊임없이 노력해 깨달음을 얻게 되며, 자신의 판단을 과신하지 않고 타인의 생각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 - 162쪽

난 되도록 적은 원칙을 따르며 살아가려 노력하는데, 그중 하나가 이거다. 맛이 간 게 나 아니면 나를 제외한 전부 둘 중 하나일 때는, 내가 맛이 갔을 가능성이 아주아주 크다. 난 경험을 통해 이걸 배웠다. 난 불안과 엉터리 확신에 휘둘려 수도 없이 헛짓거리를 벌이는 얼간이었다. 젠장.
물론 다른 사람들이 늘 옳다는 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틀리고 당신이 옳을 때도 있다. 내가 보여주려는 건 평범한 현실이다. 당신이 세상과 대결하는 느낌이 든다면, 실제로는 당신과 당신 자신이 대결하는 게 현실일 가능성이 크다. - 166, 167쪽

완전한 자유 그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다.
자유는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 기회를 주지만, 그 자체로 반드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궁극적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의미 있고 중요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은 수많은 선택지들을 거부하는 것이다. 즉 자유의 범위를 좁히는 것이다. 우리는 한가지를 선택해 몰입해야 한다. 하나의 장소, 하나의 믿음, 하나의 사람을 말이다. - 192, 193쪽

자신이 결국 소멸하리라는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해보는 게 중요한 이유는, 그 행위가 덧없고 피상적인 엉터리 가치를 삶에서 싹 없애주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돈을 더 버느라, 명성을 조금 더 얻고 주목을 조금 더 받느라, 또는 자기가 옳거나 사랑받고 있다는 걸 조금 더 확신하느라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축내는 동안, 죽음은 우리에게 훨씬 더 고통스럽고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 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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