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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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생각하는 '롤리타 컴플렉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스승(이적요)의 아우라를 절대 넘보지 못할 유약한 제자(서지우)와 그런 제자를 무시하면서도 안타깝게 여기는 스승, 이 두사람의 애증에 관한 이야기가 '본질'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은교는 이적요와 서지우를 연결해주는 매개체임과 동시에 기존의 힘의 관계(이적요>서지우)에 반전을 주는 갈등의 요소이기도 하다. 은교는, 이적요가 점점 잃어가고 있는, 그러나 서지우에게는 여전한 젊음에 대한 이적요의 욕망과 아쉬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누구도 세월을 막을 수 없는 것을...

 

 

그동안 박범신 씨의 책을 읽어보지 못했는데, 이 책을 통해 볼 수 있었던 그의 필력에 새삼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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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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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머리는 반백이 되고
나의 배는 복통처럼 불러지고
나의 기침은 그칠 새 없다
이제는 이제는 이제는
젊었을 때는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참말로
해를 쪼이고 있는 도마뱀처럼
나의 발가락이 물가에서
갈색이 되어 가는 것을 쳐다보며
나의 발이
그 머리를 갸우뚱 거리는 걸 바라보았었다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서

- J. 프레베르, '늙는다'에서-103-104쪽

너와 나 사이 그 가파른 시간의 단층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단 말인가. 별빛처럼 단번에 네 눈, 머리, 가슴에 나의 열일곱 시절을 박아넣어, 너의 온 정신을 적실 길이 있다면 좋으련만.

내가 제일 예뻤을 때
나의 머리는 텅 비고
나의 마음은 무디었고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제일 예뻤을 때
나의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그런 엉터리 같은 일이 어디 있느냐고
블라우스 팔을 걷어올리고 비굴한 거리를 쏘다녔다

-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제일 예뻤을 때'에서-109-110쪽

섹스는 자연이라고 나는 믿었다. 그것은 본래 자연이 만든 순환의 한 과정에 불과하다. 특히 남자들에게 섹스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 문제이다. 여자들이 종종 섹스를 통해 환상에 근접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남자들은 섹스를 통해 환상을 현실로 만든다.-119-120쪽

육체는 다만, 풀과 같은가.-139쪽

"죽음은 삶의 한 가지 에피소드처럼, 끝내 멈추지 않고 다가오고 있다는 인식에, 나는 하루하루 가까이 다가갔다"라고 톨스토이는 썼다. 나는 친애하는 톨스토이에게 기꺼이 동의했다. 멸망은 필연이다. 받아들여 그것을 친구로 삼는다면 최상의 죽음을 얻을 것이다.-194쪽

"연애가 주는 최대의 행복은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처음 쥐는 것이다."-200쪽

여성에게 있어 연애는 영혼으로부터 감각으로 옮겨가는지 모르지만,

남자에게 연애는 감각으로부터 영혼으로 옮겨간다,

라고 그 순간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관념적으로 연애를 상상할 때와 너무도 다른 결론이었다.-202쪽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라고 또 나는 말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라고, 소리없이 소리쳐, 나는 말했다.-250-251쪽

은교를 만나면서 나는 보다 젊어지고 싶었다. 그게 죄인가. 그 애를 통해 아직도 생피처럼 더운 나의 욕망을 확인했을 뿐, 나는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 나의 은닉된 욕망에게 형벌을 선고할 수 있는 자는 그러므로 나뿐이다. -281쪽

사랑받는 것은 타버리는 것
사랑하는 것은 어둔 밤에만 켠 램프의 아름다운 불빛
사랑받는 것은 꺼지는 것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긴 긴 지속

- R. M. 릴케, '말테의 수기'에서-348-3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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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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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한 일이야. 내가 잘나갈 때 아내와 아이들 데리고 제주에 갔다가 우도라는 섬에 간 적이 있었어. 배에서 내리는데 선착장에 아주 작은 간이 커피숍이 있었지. 들여다보니 반 평도 안 되는 가게에 커피머신 한 대 갖다 놓고 내 또래 되는 남자 둘이 커피를 팔고 있더라구. 낡은 청바지에 구겨진 티셔츠를 입고. 그 두 사람이 석양의 부둣가에 앉아 있는데 그들이 피우던 담배 연기가 아직도 기억이 나... 나는 그게 그렇게 부러웠다.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145쪽

선승이 선방을 나와 거리로 나서면 그것은 필시 난세이다. 선승은 행정을 처리하고 대중의 셈에 빠른 사판승과 달라 실은 과격하다. 그들은 진리가 하나임을 알고 그것을 향해서 온몸이 부서져라 돌진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207쪽

"이곳에 온 지 10년, 무엇이 변했는지 한번 돌아보았죠... 시간, 시간이었어요. 서울에서의 시간은 내 것이 아니었는데 이곳에서의 시간은 내 것이에요. 이게 제일 큰 변화더라고요... 조각을 하고 싶으면 하고, 팥빙수를 팔고 싶으면 팔고, 가게를 닫고 몇 개월씩 순례를 떠나고 싶으면 떠나죠. 지리산은 참 이상해요. 누가와도 어울려요. 조선백자처럼요. 조선백자는 베르사유 콘솔에 올려놓아도 시골집 뒤주에 놔둬도 어울리잖아요. 중국의 자기도 일본의 도자들도 그렇게는 못하죠. 지리산은 백자처럼 누구라도 품는 그런 산인 거 같아요."-268쪽

"바람도 아닌 것에 흔들리고 뒤척이기 싫어 나는 도시를 떠났다."-3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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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 - 나를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최인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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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지혜로워져야 한다는 이상과 그렇지 않은 현실 속에서 내가 내린 처방은, 내 자신이 이전보다 지혜로워졌다고 느끼기에 가장 유리한 방식으로 지혜를 정의하는 것이었다.
"지혜는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내린 지혜에 대한 정의다. 나는 지혜란 자신이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를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고 믿는다. 이 정의에 따르면 나는 분명 젊은 날에 비하여 훨씬 더 지혜로워졌다. 왜냐하면 현재의 나는 젊은 날의 나보다는 분명히 더 자신의 한계를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6-7쪽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사상가 중 한 사람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에서 산업화로 인한 물질적 풍요가 가져오는 폐해를 지적하고 소유의 삶에서 존재의 삶으로 옮겨갈 것을 강조하고 있다.-44쪽

현명한 소비자는 가급적 소유의 프레임을 피하고 존재의 프레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에리히 프롬의 충고처럼 소유의 프레임보다 존재의 프레임이 삶의 질에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45쪽

애매함은 삶의 법칙이지 예외가 아니다. 우리의 감각적 경험과 개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판단들도 프레임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 애매함으로 가득 찬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프레임이다. 한마디로 프레임은 우리에게 '애매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주는 것이다.-71쪽

조지 베일런트(George Vaillant)의 다음 지적은 참으로 적절해 보인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고 나면, 자신은 처음부터 작은 나비였다고 주장하게 된다. 성숙의 과정이 모두 거짓말쟁이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109쪽

선택과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 반드시 던져봐야 할 질문은 "내가 내린 선택이나 결정이 절대적으로 최선의 것인가, 아니면 프레임 때문에 나도 모르게 선택되어진 것인가?"이다. 어떤 프레임으로 제시되더라도 똑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 바로 그 능력이 경제적 지혜의 핵심이다.-182쪽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가까운 미래나 현재의 일도 늘 상위 수준으로 프레임해야 한다. 일상적인 행위 하나하나를 마치 그것을 먼 미래에 하게 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의미 중심으로 프레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187쪽

자기 방어에 집착하지 말고 자기 밖의 세상을 향해 접근하라.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새로운 일을 접했을때 늘 접근의 프레임을 견지하라. 그것이 두려울 땐 기억하라. 접근함으로 인한 후회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안주함으로 인한 후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진다는 것을!-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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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분 인생 - 진짜 나답게 살기 위한 우석훈의 액션大로망
우석훈 지음 / 상상너머 / 2012년 2월
품절


누구를 만나는가, 누구와 우정을 나누는가, 그런 게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의 생각과 삶 그리고 영혼의 무게를 결정한다. 그건 진짜 맞는 말이다. 대체적으로 마흔쯤에 사람은 누구와 생의 후반부를 같이 지낼 것인가, 한 번은 그런 것을 결정하게 된다.-26쪽

두 가지의 길이 있을 때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더 낮은 곳, 더 낯선 곳, 그걸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나이가 마흔쯤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때에도 위로 올라가려 하고, 더 신분을 높이려 하고, 더 동질적인 끼리끼리의 삶을 추구한다면, 결국에는 한나라당에 투표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다.
지금 한국의 주류 사회는 사람들에게 '더 높은 곳으로, 좁게 그리고 끼리끼리', 그렇게 지내라고 한다. 그게 명박 세대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펼쳐 보여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27쪽

프랭크 허버트의 기념비적인 SF소설 <듄Dune>에서는 악마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린다. "악마란 자신의 기억 안에 있는 어떤 특정한 존재가 자신을 완전히 지배하는 것."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무엇인가 혹은 어떤 사상이 자신을 100퍼센트 설명할 수 있게 되면, 그게 바로 악마라는 얘기다.
인간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을 시작하면서 더욱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때때로 사악하고, 때때로 고결하고, 때때로 순진하며, 대체적으로는 생각을 귀찮아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24시간 내내 악마의 속성만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24시간 내내 순수함만 가지고 있지도 못한다. 그러나 어느 한 극단에 사로잡히면 악마가 되거나 미치거나, 그러다 보면 주위 사람들이 너무너무 피곤해해서 같이 있는 걸 꺼려할 것이고, 결국 그는 외롭게 고립된다. 삶이 원래 그런 것이다.-32-33쪽

조선시대의 선비들이나 했던 생각을 내가 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난 우리 사회가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학문'처럼 학문 자체가 너무 직업이 되어버린 경향이 좀 안타깝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니까 뭔가 배웠으면 그걸로 돈을 버는 게 당연하다, 이렇게들 생각하는 것 같다. 하긴 돈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학자들만큼 다루기 편해지는 집단도 없다. 길들이기 참 편한 집단이다. -116-117쪽

어쩌면 학자에게 가난은 실체가 아니라, 가난으로부터 생겨나는 초조함이 그 실체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한다.-148쪽

지금 즐겁지 못한 삶이 언젠가 즐거울 수 있을까?
이 얘기가 내가 10대들에게 정말 해주고 싶은 얘기다. 지금 즐거운 사람이 나중에 즐겁게 공부할 수 있고, 또 즐거운 일들로 자신의 삶을 채울 수 있을 것 같다.-237쪽

앞으로 사람들과는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이런 관계로 만나지 않고 그 누구를 막론하고 파트너라는 수평적 상태로 만나려고 한다. 내가 누구에게도 머리 숙이고 싶지 않은 것처럼, 누구도 내 앞에서 머리 숙여야 하는 상황을 절대로 만들고 싶지 않다. -249-250쪽

하여간 자기계발서는 읽을 때의 심리적 안정을 위한 정신적 일탈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315쪽

이청준 선생이 말하지 않았던가. "살아서 동상을 세우지 말라." 가끔은 굶더라도 대체로 입에 세 끼 밥이 들어오고, 남들한테 갚지 못할 빚을 남기지 않고 가는 삶, 그런 거면 충분치 않을까 싶다. 때때로 작은 소망이 생기는 거야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간절히 원하는 것을 만들지 않는 삶, 그런 삶을 40대가 되면서 배운 것 같다. -318쪽

1950년대에 전쟁이 끝나고 경기고 등 좋은 엘리트 고등학교를 나온 할아버지들이 꼭 하는 말이 있다. 당시에 자신은 집이 가난해서, 고등학교 때는 이미 과외를 하면서 자수성가했다... 그런 분들에게 난 꼭 이렇게 얘기한다.
"그런데 왜 지금의 고등학생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드셨어요?"-325쪽

한국의 보수들이 정신세계 구축에 실패한 것은 그들이 북한에 대한 증오 위에 그들의 정신을 세우려 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레드콤플렉스 아닌가? 증오 위에 한국을 세우려 했지만 그건 영원히 지속될 순 없는 시스템이다. 돈과 권력, 이런 걸 보수들이 전부 쥐고 있고 지금은 대학까지 확실하게 틀어쥐고 있지만 그래도 두 번이나 정권을 빼앗겼다. 증오는 힘을 주지만, 지속성을 주지는 못한다.-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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