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의 힘 - 2012 시대정신은 '증오의 종언'이다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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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 시대를 끝장내지 않는 한 아무리 비전과 정책이 화려해도 무의미하다. 그 비전과 정책을 실현할 수 있는 국력이 증오의 싸움질에서 탕진될 것이기 때문이다. 안철수 현상이 나타난 지금이 안철수의 대통령 출마, 당선과는 무관하게 증오 시대를 끝장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는게 내 판단이다. 내가 생각하는 증오의 종언은 그 자체로서도 엄청난 개혁이지만, 더 나아가 다른 모든 개혁을 위한 인프라가 될 것이다. -8쪽

첫째, 안철수는 증오 시대를 끝낼 수 있는 적임자다. 그는 "우리 정치권은 승자 독식이 반복되기 때문에 결국 증오의 악순환에 빠진다"며 "여나 야 누가 이기든 국민의 절반이 절망한다"라고 말한다. 또 그는 "상대방을 지지하는 국민 절반을 적으로 돌리고, 국민을 반으로 갈라놓는 낡은 프레임과 낡은 체제로는 아무런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그의 정치 관련 발언은 거의 모두 이런 문제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8쪽

성한용 칼럼의 메시지를 한 단어로 압축한다면 그건 바로'경험'이다. 안철수에겐 경험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오래된 체제와 새로운 미래 가치가 충돌하는 시점"이라는 안철수의 주장이 맞다면, 오래된 체제하의 경험은 무영지물이거나 오히려 해악일 수도 있다. 새로운 사회운동을 펼칠 때 경험은 오히려 장애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48쪽

그렇다면 지금 한국엔 어떤 리더십을 갖춘 대통령이 필요한가? 나는 야권 사람들이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을 거친 뒤 한국인의 정치 혐오가 더욱 심해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게 매우, 아니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믿는다. 국민적 혐오의 대상이 된 정치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명박에 대한 분노와 박근혜에 대한 공포를 부추기는 걸로 이 질문을 피해 가려고 한다. 이게 바로 안철수가 등장하게 된 배경에 숨어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는 게 내 생각이다. 안철수의 출신 배경 성격 스타일은 모두 기존 문법에 맞지 않는다. 모두 다 그게 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건 안철수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들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당신들이 사용해온 문법은 폐기 처분되고 새로운 문법으로 대체돼야 하며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바로 당신들이다"라고 말하련다. 아니, 어쩌면 그건 그들의 잘못이 아닐지도 모른다. 디지털 시대의 속도 전쟁이라는 원리에 따라 수년 만에 달라진 시대 탓일 수도 있다. 안철수의 권력의지는 바로 그런 '전환시대의 논리'인데, 어찌 그걸 예전문법으로 평가할 수 있으랴.-60-61쪽

정치에 대한 논의를 어렵게 만드는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비평이 이상론과 현실론이 뒤섞인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에겐 현실론을 잣대로, 또 누구에겐 이상론을 잣대로 들이민다. 안철수 현상이 혼란스러운 것도 바로 그런 이중 잣대와 무관치 않다.

안철수의 집권을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 또한 그런 이중 잣대의 문제다. 좌우를 막론하고 평소 언론과 지식인은 대한민국을 '관료 집단이 장악한 나라'로 묘사해왔다. 정치 경험이 많고 정치력이 강한 대통령마저 관려 집단에 휘둘릴 정도라며 개탄해왔다. 그런데 왜 정치 경험 없고 정치력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안철수의 집권을 불안하게 생각한단 말인가?" 관료 집단이 어련히 알아서 국정 운영을 잘해나갈 텐데 말이다. 오히려 그게 더 문제라고 말하는 게 옳지 않을까?-63-64쪽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안철수식 문제의식은 진보 진영 내에서도 폭넓게 공유되고 있음에도 김보근이 잘 지적한 것처럼 "진영 논리에 빠져서 보수언론에서 선점해 다루니까 우리가 외면해버리거나 무방비로 안 다루고 놔뒀던 영역"이라고 보는 게 옳다. 안철수의 강점은 기존 진영 논리에서 자유롭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활용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90-91쪽

정의 공정 공생을 강조하고 대기업의 횡포를 비판하는 일에서 안철수는 선구자도 아니고 대표적 인물도 아니다. 그동안 진보 세력이 많은 말을 해왔다. 그렇지만 대중은 진보 세력의 사회 개혁론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들에겐 '엄친아' 성공 코드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개력론을 '약자의 원한' 비슷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반면 저의 공정 공생 코드와 더불어 '엄친아' 성공 코드를 지니고 있는 안철수의 개혁론은 그들에게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간다. 개혁을 안전하게 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라고 할까? 이걸 가리켜 "안전 개혁 코드"라고 부를 수 있겠다.

문제점이 없지 않지만, 안철수와 같은 강남 좌파의 장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똑같이 과격한 말을 해도 민생 문제에 관한 한 정통 좌파보다는 강남 좌파가 해야 더 설득력이 있다. 원한 때문이 아니라는 게 입증되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갈등과 분열로 양극화된 한국 사회의 독특한 상황을 감안컨대 이건 안철수에게 큰 정치적 자산이다.-198쪽

"20세기에는 카리스마를 갖고 외향적 성격에, 목소리 큰 사람이 특정한 위치에 올랐어요. 그 위치에는 인사권과 돈이 부여됐고 그것을 휘둘러서 리더십을 발휘했어요. 21세기는 일반 대중이 리더를 무조건 따라가지 않아요. 탈권위주의 시대가 되면서 지금은 대중이 리더에게 리더십을 부여하지요. 게다가 대중이 리더에게 원하고 갈망하는 자질이 더 중요해요. 현재 대중이 원하는 리더십은 상황에 따라 흔들이지 않는 안정성, 미래에 대한 비전과 희망 그리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에요. 이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해요."
-200-201쪽

안철수의 동지인 박경철은 "우리 사회는 선배 세대들의 헌신을 바탕으로 힘든 시기를 넘어왔고 이 시대는 대중을 이끌로 '나를 따르라 follow me'를 외치는 리더십이 가장 효율적이었지만, 이제는 그보다 '나와 함께 with me'라고 말하는 리더십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며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우리 기성세대들의 생각화 후배 세대들의 생각이 큰 괴리를 보이는 지점이고 쉽게 위로가 되지 않는 이유다. 기성세대의 리더십이 이끌고 당기는 계몽주의적 리더십이었다면 앞으로 필요한 리더십은 밀어주고 어깨를 내어주고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눈물을 닦아주는 리더십이다."-201-202쪽

"상식과 정의에 심취한 민주 자경단의 총질을 '시민의 감수성'이라며 칭송하는 김어준 같은 사람에게 노무현의 한미FTA는 착하거나 최소한 덜 나쁜 것이었고 이명박의 한미FTA는 악한 것이다. 심지어 노무현재단에서는 국민의 알 권리와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이명박 정부의 FTA 재협상과는 달리 노무현 정부의 FTA는 투명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에도 '한미FTA 졸속 협상을 중단하라'는 비판은 똑같았다. 울면서 팔아먹은 것과 웃으면서 팔아먹은 것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허지웅, 대단하다. 대부분 속으로만 혀를 끌끌 차는 사안에 대해 이렇게 정색하고 야권의 이중적인 기회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207쪽

2011년 1월에 출간된 <정치의 발견>에서 박상훈은 알린스키론에 대해 한 장을 할애한다. 가장 인상적인 한 대목을 소개한다. 박상훈은 "일부 진보파들이 보이는 가장 나쁜 습속은 '분노는 나의 힘!'을 외치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다했다는 식의 행태가 아닌가 한다. 그들은 화를 내고 세상을 탓하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대안을 만들고 꾸준히 실천하는 노력은 잘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끊임없이 화를 낼 이유를 찾는 사람들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며 그런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알린스키의 말을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한때 나는 조직가가 필요로 하는 기본적 자질은 불의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분노할 줄 아는 것이라 믿었던 적이 있다. 이제 나는 분노가 아니라 상상력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상상력은 조직가들이 계속 조직할 수 있도록 유지시켜주는 힘의 연료일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수단과 활동의 토대이기 때문이다."-214쪽

유창선은 "나꼼수는 그냥 나꼼수일 때가 가장 좋았다. 팟캐스트의 나꼼수는 정치적 치외법권 지대에 있었다. 'ㅅㅂ'를 내뱉어도, '조'를 외쳐도 누가 뭐라 하지 않았다. 팬들은 함께 '쫄지 마'를 외치며 그들의 욕설에 화답했다. B급 정서의 후련함이 공유됐기에 가능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B급 언어들을 그대로 갖고 A급 세계로 들어가겠다고 하면서 일은 어그러져버렸던 것이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220쪽

"애당초 나꼼수는 정치 지도부가 아니었다. 그들은 '가카'에 대한 분노를 안고 있던 대중들에게 B급 언어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고 다시 힘을 내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물론 그 역할은 정치 지도부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그 중요한 역할을 계속할 수 있었던 나꼼수가 어쩌다가 선거를 앞에서 이끄는 정치 지도부의 위치에 졸지에 서버리게 된 것이었을까? 나꼼수는 그냥 나꼼수였을 때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음을 4 11총선 결과는 보여줬다. (중략) 나꼼수는 언제나 '쫄지 마!'를 외쳐왔지만, 국민의 상식 앞에서만큼은 쫄 줄도 알아야 한다. 물론 나꼼수는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팬들은 다시 열광할지 모른다. 그러나 어쩐지 전처럼 속 시원하게 웃기만 하며 들을 수 없을 것 같아 안타깝다. 어쩌다 이렇게 됐나? (중략) ㅅㅂ." -220쪽

알린스키는 "타협은 허약함, 우유부단함, 고매한 목적에 대한 배신, 도덕적 원칙의 포기와 같은 어두움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지만, "조직가에게 타협은 핵심적이고 아름다운 단어"라고 주장한다. 그는 "타협은 언제나 실질적인 활동 속에 존재한다. 타협은 거래를 하는 것이다. 거래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숨 고르기, 보통 승리를 의미하며, 타협은 그것을 획득하는 것이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이 무에서 출발한다면 100퍼센트를 요구하고 그 뒤에 30퍼센트선에서 타협을 하라. 당신은 30퍼센트를 번 것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는 끊이지 않는 갈등 그 자체이며, 갈등은 간헐적으로 타협에 의해서만 멈추게 된다. 일단 타협이 이루어지면 바로 그 타협은 갈등, 타협 그리고 끝없이 계속되는 갈등과 타협의 연속을 위한 출발점이 된다. 권력의 통제는 의회에서 타협과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사이에서의 타협에 바탕을 두고 있다. 타협이 전혀 없는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를 한 단어로 정의해야 한다면 그 단어는 '타협'일 것이다." -226-227쪽

일개 지식인도 자신에 대한 언론 보도에 만족하는 법은 드물다. 기사는 학술 논문이 아니다. 자꾸 "맥락을 제거하고 특정 발언만 부각해 왜곡했다"라고 분통을 터뜨릴 게 아니라 특정 발언이 자극적이지 않게끔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노 정권은 조중동 프레임을 탓하기 전에 노 대통령이 스스로 만든 '노무현 프레임'을 깊이 성찰해야 했다. 그걸 하찮게 여겨 계속 그대로 가려면 '언론 탓'은 그만둬야 했다. 언론을 탓할 수도 없고 해선 안 될 일까지 언론 탓을 하는 건 언론 개혁 담론을 희화화해 외려 언론 개혁을 망치는 일이었고 그건 현실로 나타났다.-306쪽

전홍기혜의 표현을 원용하자면, 야권은 '보수하는 진보'인 셈이다. '진보하는 보수' 대 '보수하는 진보'의 싸움이라고나 할까? 왜 야권은 '독재자의 딸'이란 비판에만 몰두하는 걸까? 비판의 콘텐츠 부족 때문인가? 그 점도 있겠지만, 상흔 때문이다. 정치권의 세대교체가 꽤 이루어졌다. 그러나 야권의 핵심은 여전히 박정희 시대의 상흔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다.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364쪽

상흔에 갇힌 민주통합당 인사들이 박근혜 비판의 주요 메뉴를 '독재자의 딸'로 삼은 것은 박근혜에겐 행운이다. 그런 비판은 유권자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민주통합당의 콘텐츠 빈곤을 폭로해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쪽은 10년째 (박근혜를) 어떤 분의 자녀라고 공격하고, 한쪽은 지난 5-10년 내내 좌파 세력이라고 싸잡아서 공격하는 '구태'가 이어지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이런 것들이 낡은 프레임이고 낡은 체제로 아무런 사회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라고 말하는 경쟁자가 생겼다는 건 박근혜의 불운이다. 물론 그 경쟁자는 바로 안철수다. 두 사람 사이에 포지티브한 선의의 경쟁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381-382쪽

"웃음은 하느님의 적!"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Nome della Rosa>에서 호르헤 수도사는 웃음이 두려움을 없앤다는 이유 때문에 웃음을 기독교의 적으로 간주한다. 오늘날 웃음은 정치의 적이기도 하다. 두려움이 없으면 열성적인 정치 참여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웃음을 주던 나꼼수는 아름다웠지만, 그 주인곧을이 어느 순간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열성 전사들을 이끌고 그라운드에 뛰어든 순간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다른 집단에 대한 공감만 약화시킨 건 아닐까? -3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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