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 관내분실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 + 마지막 로그 + 라디오 장례식 + 독립의 오단계
김초엽 외 지음 / 허블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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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라는 장르가 현재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과학기술에 관한 지식을 열거하거나 우리 밖의 외계에 관한 상상력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편견을 깨준 작품이다. SF도 결국 문학이고, 문학에는 인간의 생과 사에 대한 사유가 깃들기 마련이므로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SF란 결국 다가올 미래의 우리들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과도한 설정이나 명확하지 않은 문장들로 흡입력을 방해하는 작품들도 몇몇 있었고, 흔히 접하는 암울한 미래상이나 안드로이드, 인공지능과 관련된 소재들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6편의 작품을 읽으면서 김초엽의 <관내분실>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단연 독보적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다. 임신 후 되돌아보는 부모에 대한 이해, 불가항력적으로 저 먼 우주로 떨어진 가족에 대한 감정을 SF라는 장르를 통해 이렇게 풀어낼 수도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관내분실인 것 같습니다."

상처 입히고, 다시 사과하고, 또 상처를 주고, 다음 날에는 없었던 일처럼 행동하는 그 모든 것이 다 지긋지긋했다. 사랑한다는 말은 면죄부를 주지 않는다. - 33

"나는 내가 깨어 있는 만큼만 살아 있었다네." - 90

"동결은 대가 없는 불멸이나 영생이 아니야.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눈을 뜨는 순간이 있어야 하고, 그때마다 나는 내가 살아보지도 못한 수명을 지불하는 기분이 들지." - 94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 95, 96

기운을 내기 위한 에너지바, 미세먼지를 피하기 위한 마스크, 지각하지 않기 위한 무인자동차 카풀... 목적과 용도가 분명하다 못해 절박한 것들로만 이뤄진 이 일상에, 꾸역꾸역만큼 어울리는 부사가 또 있을까. - 147

동면에 들어간 늙은 곰처럼 사회적 활동을 최소화하면서 사이버 공간 방문도 줄여나갔다. 단조롭던 일상은 고즈넉함을 넘어 적막해졌다. 스마트 기기에 몰두한 모두가 오직 네트 안에서 ‘소통’하고 있었다. 고삐 풀린 광기에 휩싸인 세상이라지만 네트 밖에서는 그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네트 밖에는 세상이 없었다. - 148

살아야겠다는 욕구라는 게, 죽겠다는 결심보다 쉽고 당연해야 하잖아요. 노을이, 하늘이 예쁘네요, 함께 볼까요, 누군가 매일 같은 시간에 권해주기만 해도 살아지는 게 하루하루니까. - 154

숫자와 그래프들이 내 인생을 정의하고 분석하는 장관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 어떤 지옥도 매끈한 숫자와 반짝이는 그래프를 거치면 어디든 웬만해 보이겠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특별히 남루한 인생도 유난히 대단한 존재도 없었다. - 156

중학교 때였을까, 빛이 별을 떠나 우리의 눈에 도착하기까지 몇백, 몇천, 몇만 년. 어떤 별은 그사이 소멸했을지도 모르기에 모든 빛이 떠나온 곳의 현재 존재를 증명하진 않는다는 걸 배웠을 때 밤하늘은 슬픔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더 나이를 먹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지금은 같은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 별의 존재를 이렇게 멀리 있는 내가 알아볼 수 있다니, 그게 바로 기적이었다. 그리고 이젠 그 밤하늘에 무한한 가능성이 가득했다. 의식을 가진 존재를 지구 밖에서 발견한 적 없다지만, 어쩌면 저 숱한 별 중 하나는 지금쯤 새로운 의식을 탄생시키려는 여정을 시작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 164,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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