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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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출한 신인을 만났다.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두 편의 단편을 읽고서는 그녀의 다른 작품에 대해서도 호기심이 생겼다. 그녀의 세계가 궁금했다. SF라는 장르는 미래를, 다가오지 않은 현실을, 과학기술을, 인류의 진보를 그리고 있지만, 김초엽의 SF에서는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그녀가 그리는 미래에는 여전히 인간 본연의 고뇌와 삶의 문제들이 뒤섞여 있었다. 정체성을 찾기 위한 방황, 인간성과 외계성의 분리, 시간이 흘러도 결국 마음을 향하게 하는 가족애, 스스로의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외부의 물질로부터 감정을 느끼려하는 성향, 증오하던 엄마에 대한 이해, 이모의 족적을 쫓아가며 깨닫게 되는 해방과 허무함. 확장된 작가의 상상력을 이용하여 도달한 곳에서도 결국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종종 맞닥뜨리는 본질적인 의문과 고민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소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어쩌면 일상의 균열을 맞닥뜨린 사람들만이 세계의 진실을 뒤쫓게 되는 걸까? 나에게는 분명한 균열이었던 그 울고 있던 남자와의 만남 이후로, 나는 한 가지 충격적인 생각에 사로잡혔어.
우리는 행복하지만, 이 행복의 근원을 모른다는 것. - 19

릴리는 자신의 삶을 증오했지만, 자신의 존재를 증오하지는 못했다. - 47

지구로 내려간 우리는 그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거야. 그리고 우리는 곧 알게 되겠지. 바로 그 사랑하는 존재가 맞서는 세계를. 그 세계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탄으로 차 있는지를. 사랑하는 이들이 억압받는 진실을.
올리브는 사랑이 그 사람과 함께 세계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 52

인간을 비인간동물과 구분하는 명백한 특질들이 사실은 인간 밖에서 온 것들이라면.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실은 외계성이었군요." - 129

"나는 내가 깨어 있는 만큼만 살아 있었다네." - 174

"자네에게는 흘러가는 시간이 붙잡지 못해 아쉬운 기회비용이겠지만, 나 같은 늙은이에게는 아니라네." - 177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 181

의미는 맥락 속에서 부여된다. 하지만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담긴 눈물이 아니라 단지 눈물 그 자체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 215

연결을 끊어도 데이터는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삶은 단절된 이후에도 여전히 삶일까. - 257

어떤 사람의 실패는 그가 속한 집단 전부의 실패가 되는데, 어떤 사람의 실패는 그렇지 않다. -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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